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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0 23:55:15 조회 : 38         
서울의존강의20221117a 베드로후서 3장 8절(모두 멸망)-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서울의존강의20221117a 베드로후서 3장 8절(모두 멸망)-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 말씀에 대해서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 뒤에 10절에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와서 심판이 이루어지는데【심판의 근거가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다】.

심판하는 근거가, 우리 인간보고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심판하는 근거는 주님 자체의 일에 근거해서 심판해요. 심판하는 이유가 우리를 닦달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보고 따지는 게 아니고 주님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주님 자신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을 해버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그것은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없어요. 어떤 짓을 했든 간에. 불쌍한 애 안고 사진을 찍든 말든 간에,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은 심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남의 나라 쳐들어가서 전쟁을 하든 말든 핵폭탄을 만들든 말든 그것은 심판의 근거가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심판의 근거를 제출할 권한이 없다.】내가 이렇게 잘못했으니까 저를 심판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주님은 안중에도 없어요. 주님께서는 그거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된 바는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하여 그것이 심판의 근거로서 작용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걸 보고 심판을 할까 말까를 추후에 결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근거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을 마감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어떤 짓을 추가적으로 하든 말든 심판은 그대로 주어질 뿐입니다.

심판조차도 아버지와 아들과의 계약이에요. 그게 9절에 “주의 약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약속대로. 이 점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 하면, 사람들이 교회 나가면서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나중에 지옥 가는 거야.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네가 심판받고 저주받는 거야.”라고 개인을 닦달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성경에 없습니다. 네가 똑바로 하면 네가 구원받는다는 그런 구원의 근거 역시 인간에게 없습니다.

구원받는 근거도 인간에게 없고 저 인간이 지옥 가는 근거도 인간이 제시할 수가 없어요. 인간하고 상대 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주님하고만 상대해서 결정지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럼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봐가지고 잘하면 천국 보내주시고 못하면 지옥 보내주세요.’라고 계속해서 자기의 행함을 자기 구원과 구원받지 않음을 결정짓는 행위로서 자꾸 하나님 앞에 자기 걸 들이밀어요. 들이민단 말이죠.

심지어 마귀조차도 심판받는 이유를 본인이 제시할 수가 없어요. 마귀조차도. “그래, 나 나쁜 짓했다. 날 쳐라.”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권한이 악마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야, 입 다물고 있어라. 너를 심판하는 근거는 너에게 찾지 않고 내 아들 우리 주님에게서 찾아서 너를 심판하는 거예요. 악마는 자기 행위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악마가 심판받는 겁니다. 그걸 ‘주의 이름으로 심판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구원도 마찬가지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고 교회 그만큼 오래 다녔다는 말은 그동안 헛짓한 거예요. 구원과 심판과 아무 상관도 없는데 본인들이 괜히 쫄았어. 괜히 주눅 든 거예요. 누가 주눅 들게 만들었습니까? 인간들을 누가 주눅 들게 만들었어요? 예수님의 하신 일을 근거로 제시하지 않고 네가 한 일이 네가 심판받고 저주받는 근거가 된다고 외쳤던 마귀들이 교회마다 그 짓을 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먹혀들었다는 말은 이미 인간들이 마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교회에서 나를 질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본인이 본인들에게 매일같이 반성문 쓰고 질책하고 자기가 알아서 나쁜 짓 했으면 자기가 추가적으로 착한 일해가지고 자기 안에서 회계 처리하는 거예요. 장부정리 하는 거예요. 나쁜 일했으니까 내일은 좀 더 착하게 살아야지, 이런 거. 플러스 마이너스해가지고 본인이 구원받는 돈을 본인이 장만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거예요.

그래놓고 다른 사람한테 또는 목사한테 묻는 거예요. “목사님, 저 어때요? 김 집사, 나 지금 살아가는 게 좀 어때? 천국 갈만해?” 이것은 본인이 본인 얼굴에 메이크업해놓고 나 오늘 화장발 잘됐어, 못됐어? 하는 것처럼 자꾸 타인에게 자기의 형편을 묻고 또 물어가지고 그것으로 자기를 규정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주변사람이 필요하고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들을 사랑해서 주변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긍정을 위하여 그걸 호응해줄 다른 사람들을 찾는 거예요. 다른 사람 찾다가 정 없으면 개나 키우면서 개한테 묻는 거예요. “뽀삐야, 나 어때? 나 괜찮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뻐? 하는 것처럼.

주변에 나를 확인하기 위한 여러 가지, 내 업적을 괜찮게 포장해주고 증명해줄 것들을 찾는 겁니다. 시집갔으면 친정 어머니를 가끔 찾아간다든지 시가집에 좀 잘해준다든지. 남편 같으면 자기 남동생 어떻게 사나 선물 들고 귤 한 박스 들고 찾아가는 식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진정으로 동생들을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걱정돼서 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정을 안주고 그러면 다 지켜보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나중에 책임 추궁하겠는가. 살아있을 때 착한 일 많~이 해가지고 주께서 너 왜 그렇게 살았냐고 하면 ‘이것도 했습니다. 저것도 했습니다.’ 하고 변명할 수 있는 거리를 많이 장만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오늘도 착하게 살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 보는 거예요. 성경 보는 이유가 오늘도 차카게 살자. 조폭 구호죠. 차카게 살자. 오늘도 될 수 있는 한 여건, 형편이 되는 한 바르게 살자.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여 최선의 삶을 살자.

방금 이야기한 것을 붉은 걸로 쓰면 이렇습니다.【구원은 나의 삶과 관련이 있다.】라는 종교를 인간들이 따로 자기가 만든 겁니다. 내 구원은 내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성경은 이게 구원의 또는 지옥 가는 근거가 안 되기 때문에 이걸 버리라 하겠죠. 나의 삶이 나를 살린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버리라 하겠죠.

그러나 이걸 버릴 수가 없어요. 왜 버릴 수가 없느냐 하면 아침부터 생각하는 전체가 only 오로지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자신의 질적인 가치 향상에만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빠져버린 나는 진정 내가 아니무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진정 내가 아닌 거예요. 내 생각이 빠져버린 나는 내가 아닌 거예요.

정말 나라면 내 안에 가장 중심부에 나만 들어있어야 그게 나다운 거예요. 왜 그러냐? 인간들이 예수님을 인간세계에서 추방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하고 안 놉니다, 하고 추방시켜버렸어요. 예수님을 추방하고 밀치는 것이 특정 악한 자만의 소행이 아니고 기존 교회 장로가 주일 낮 대표기도 하듯이 어린아이부터 당회까지 모조리 다 예수님을 추방해요. 예수님을 추방하는 거예요. 어린아이도 어른들도, 인생을 짧게 살았든 길게 살았든 인간 속에는 최종 자기만 남기고 다른 것은 일체 다 들어내는 겁니다.

어떤 사람 보면요. 김치찌개를 시켜놓으면 김치찌개에서 돼지고기를 다 들어내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하나. 나중에 밥 먹고 나면 옆에 돼지고기가 이만큼 쌓여있어요. 어떤 사람은 잡채주면 돼지고기를 다 들어내서 돼지고기 없는 잡채만 먹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들의 하루 일과가 바로 그겁니다. 나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젓가락가지고 다 들어내요. 아침식사에만 점심식사에만 젓가락 쓰는 게 아니고 하루 종일 마음속의 젓가락이 나한테 이익 없는 것은 다 들어내요. 나한테 이익 있는 것만 거기에 남겨두는 겁니다. 철저하죠. 철저해요. 시키지도 않았어요. 누가 이거 학교에서 배워주지도 않았어요.

악마의 본성입니다. 그게 마귀의 본성이에요. 마귀의 본성으로 나한테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들어내기 때문에 교회 와서 만약에 예수를 믿는다면 그 예수도 내가 원하는 예수만 남기고 원하지 않는 예수는 벌써 다 내 나와바리, 내 영역에서 그런 예수는 내가 안 사귄다 하고 다 내보냈죠. 그래서 사람마다 예수님이 다 달라요. 사람 지문이 다르듯이 사람 DNA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예수님이 다 달라요.

똑같은 예수님은 한 분밖에 없는데 어떤 점에서 똑같으냐 하면 모든 인간으로부터 모두에게 배척받은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에요.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척받은 예수님. 다시 그분의 영이 오지 아니하면 인간에게 진짜 예수를 받아들일 기회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과 구원의 근거를 인간이 자진해서 소환한다든지 요청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하고만 의논해서 모든 지구의 운명을 결정해버렸는데 인간은 마치 자기 삶의 주인이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삶의 주인이.

초등학교 4학년이 일기를 쓴다면 ‘오늘도 우크라이나 걱정이 된다. 젤렌스키는 어떻게 잘 대처할까?’ 이런 얘기 안 나와요. ‘오늘도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줬다.’ 전부다 자기 이야기죠. 우크라이나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죠. 자기가 종군기자도 아니고 그걸 왜 씁니까. 이제 어른 되면 일기를 안 써도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매일같이 자기 일기를 일지를 쓰고 있어요, 매일같이.

일지 같은 거 이렇게 앉아서 꼼꼼하게 쓰진 않지만 하루 종일 왔던 문자 메시지 후루룩 훑어보면 그게 다 일지 아닙니까? 문자 메시지 답장 보낸 게 오늘 하루의 일과였잖아요. 일지이고 일과였단 말이죠. 김 집사님, 오늘 옷 2개 가져갔다. 그것도 외상이다. 그게 나의 하루 일지 아닙니까? 김 집사하고 우크라이나하고 무슨 관계있어요? 북한의 핵개발하고 관계없잖아요.

인간은 세상 전부를 아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내 삶에 유리한 것만 알면 그걸로 끝이에요. 내 삶에 유리한 것, 내 이익이 되는 그것만 알면 끝이라고요. 그러니까 인간은 본인의 신자에요. 누굴 믿는가? 본인을 믿어요. 본인의 삶을 믿는다고요. 믿씁니다. 누구? 내 이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인생 챙기는데 거들고 후원해주면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결국 그런 인간, 자기 삶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나오는 인간의 시간관은 뭐냐? 하루는 하루고 이틀이면 이틀이고 천년이면 천년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장 8절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주께서는 천년이 뭐 같고? 하루 같고. 하루가 뭐 같고? 천년 같고. 그것에 근거해서 주께서는 이 지구를 불바다 만드는 거예요.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문제는 뭡니까? 하루는 하루고 이틀은 이틀이고 일년은 일년이고 이러한 시간개념을 낳게 만드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탈출할 필요가 있죠. 출애굽할 필요가 있다고요. 탈출할 필요가 있어요. 내 삶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아야 돼요. 내 삶을 위하여.

이 말은 우리의 시간이라 하는 하루면 하루, 이틀이면 이틀, 일주일이면 일주일, 이것은 나를 위한 시간개념이라는 그 자체에서 우리는 탈출을 해야만 합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그것으로 탈출해야 돼요. 하루가 하루 같은 데서 벗어나서 일년이 일년 같은 데서 벗어나서.

그러면 다음 문제는 뭐겠어요? 어떻게 벗어나나, 그게 문제가 되겠죠. 무슨 수로 벗어나느냐? 분명히 심판은 천년이 하루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께 근거를 두고 심판하는데 우리의 하루하루 소박한 우리 일상은 내 삶에 근거해서 내가 최선을 다해보면 되겠지. 열심히 착하게 살면 되겠지, 라는 아직도 거기에서 헤매고 있고 못 벗어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이 심판의 근거, 구원의 근거도 아닌 걸 그 헛짓을 아직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방어시스템으로 여기고 그걸 쥐고 있으니까 평생을 살아도 부질없는, 아무 소용없는 인생을 시간만 낭비한 거예요. 그래놓고 “나는 50년간 주님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주님한테 자기 잘났다고 이야기를 하면 “50초?” “아니, 50년.” “내가 보기에는 50초도 안되는데.” 천년이 하루 같으면요. 90년 계산해봐야 몇 초되지도 않아요.

자기의 삶을 계속해서 긍정하고 그걸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시간계산에 몰두한 거예요. 열중한 겁니다. 잘못된 시간 계산속에서 자기 인생의 모든 걸 거기다 걸었던 겁니다. 저쪽에서 화투치고 있는데 이쪽 방에다가 돈을 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한 거예요. 결정은 저쪽 화투판에서 결정 나는데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엉뚱한 데다가 자기 인생의 자존감과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그 모든 것을 왜 엉뚱한 데, 헛짓에 다 투자했냔 말이죠.

그럼 우리는 어디다가 투자했습니까? 이게 이제 오늘 두 번째 중요한 거예요.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뭡니까?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어디 있다? 주님에게 있지, 우리한테 없다. 그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게 있어요. 심판과 구원의 근거가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우리는 이미 종말 처리된 존재 또는 대상이다】이게 두 번째 중요한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회사에서 다툼이 있어가지고 너무 흥분해서 욱하는 성질 때문에 한번 쳤더니만 그 사람이 한 대 떡 맞고 자기 딴에 자세취한다고 하다가 책상 모서리 날카로운 데에 받쳐서 죽어버렸다. 그럼 나는 과실치사에 의한 폭행죄로 살인을 저지른 게 되죠.

그럼 세상에서 형벌을 어떻게 합니까? “너는 왜 예수를 믿었어? 사형!” 이럽니까? “너는 성경 말씀, 주의 약속을 왜 믿었어? 사형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뭐라고 이야기해요? “너는 왜 그 사람을 쳐가지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실치사 했는가? 네가 거기에 대해 고의성이 없는 걸 봐서 한 10년간 살다 나와라.” 직장이고 뭐고 10년이면 가정도 이혼하고 파탄 나고 뭐 다 깨지겠죠.

자, 이러한 판결은 근거가 어디에요? 내가 그 사람을 때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 사람이 멀쩡하게 그 다음날 헤헤 웃고 나타났으면 내가 10년간 살 필요 있어요, 없어요? 살 필요 없죠. 그럼 내 인생이 10년간 감옥생활 한다는 것은 내가 행위한 게 근거가 되어서 교도소생활 하잖아요. 그때 우리는 내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베드로후서 3장 초반에 보면 이미 만물은 뭐로 심판받습니까? 처음에는 뭐로 심판받아요? 물로 심판받죠, 물로. 마지막에는 뭐로 심판받습니까? 불로 심판받죠. 물로 심판할 때, 자기가 고의로 사람을 때려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한 사람은 전부다 나와. 내가 물로 심판하리라. 이게 노아홍수입니까? 여기서 성질부려가지고 사람 때려죽인 사람 다 나와. 내가 물에 빠뜨려서 죽이리라. 이게 노아심판의 근거에요? 여러분 성경 그 정도는 알게 아니겠습니까? 노아심판 받을 때 천하의 죄수들, 교도소만 찾아가서 전부다 바다에 들어가. 물에 빠져죽이리라. 이렇게 했습니까?

비가 왔는데, 여기는 그냥 천사같이 사는 거예요. 그냥 힘들게 신곡시장 여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 하나 애 둘 키운다고 내놓고 하는 할머니 그런 사람하고, 나이트클럽에 껄렁거리면서 깐족거리면서 마약이나 하고 담배나 피우면서 까불고 있는 그런 사람 있을 때 노아 때 하늘에서 비가 막 오는데 비가 막 오다가 신곡시장에 있는 그 아주머니는 피하고 저 깡패한테 쏟아져가지고 깡패가 멀쩡한데 익사해서 죽었습니까? 그런 거예요? 답변해보세요. 그런 겁니까? 아니죠.

오늘 베드로후서 3장에서 물로 심판받을 때 도대체 그 인간은 무슨 죄로 심판받는 겁니까? 지금 제가 말하는 게 성경에 없는 이야기 아니죠. 노아홍수 심판받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미 언급을 했어요. 그들은 뭘 했느냐 하면 먹었대요. 마셨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장사하며 애 키우고 그렇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판의 물이 떨어져서 다 죽었대요.

인간들이 자기 삶을 근거로 해서, 나 착하게 살았으니까 구원받을 거야. 나 너무 나쁜 짓해서 나 지금 지옥 갈 거야. 그렇게 인간들을 교도소 집어넣는 의식을 가지고 그걸 확장시켜서 하나님도 우리를 이렇게 다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모른다는 죄목으로서 물 심판받고 불 심판받는 거예요.

왜 심판받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심판의 근거를 몰라서 그래요. 심판의 근거를 몰라서 심판받는 거예요. 막 하나님이 때리는데 “왜 때립니까? 때리지 말고 먼저 나보고 ‘이걸 해라’ 했는데 말 안들을 때 때려주세요.” 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때리는 것부터 먼저 해요. 때리는 것부터 먼저 하고 “자, 때릴만하지?”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일괄 심판. 일괄 멸망. 멸망시켜놓고 “자, 이래도 멸망 받을만하지?” “왜요? 멸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알려주면 되지 않습니까?” 알려주기 전에 네가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겁니다. 인간은 없는 것을 찾아야 될 존재입니다. 인간은 없는 것을 찾아야 될 존재에요.

그런데 없는데 무슨 수로 찾습니까? 그러니까 맞아야 되죠. 주께서 문제를 내는데 없는 것을 찾으라는 거예요. 그럼 있는 건 뭡니까? 있는 건 교회에 있죠. 신학책 있죠. 성경 있잖아요. 자꾸 성경보고 교회 다니고 신학공부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그건 있는 거예요. 있는 건 백날 해봐야 그건 안 됩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없는 것을 네가 찾아낼 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어느 인간이 없는 걸 찾아낼 수 있습니까? 없는 걸 찾아낼 수 있는 위인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너무 조용하다. 답변 좀 해보세요. 없는 걸 찾아낼 수 있는 위인들이 인간 중에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래서 없는 걸 찾아내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저주받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 예수님의 행하심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행하심과 내 삶 또는 나의 행함과 경쟁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경쟁관계. 어느 것을 신봉할 것인가, 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그들은 어디에 마음 두었느냐 하면 본인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여기에 온 혼신의 마음을 다 둔 거예요.

그런데 노아는 어디에 근거를 두었습니까?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거든요. 은혜 입고난 뒤에 어디에 근거를 두었습니까? 바로 방주. 방주가 어느 시장에 팔아요? 방주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 당시에 방주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방주가 전기차입니까? 테슬라처럼 팔게. 없죠. 없는데 없는 것이 노아를 통해서 있게 하는 것.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들이 죽어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 여러분 안에 새록새록 새롭게 발생되고 생산되는 게 있어야 돼요. 그것이 여러분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갑자기 구원받기 힘들어졌죠.

아니,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문제는 예수가 벌써 많이 배포가 되어있고 사람들이 이미 익히 안다는 거예요. 예수가 식상해. 식상해졌고 너무 흔해 빠졌어요, 예수가. 물론 예수가 교회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주님을 어디서 구입합니까?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구입합니까? 주님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주님은 항상 자신이 없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노아는 왜 구원받았습니까? 노아는 왜 구원받았는가? 제가 아까 후딱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을 했어요. 노아는 왜 구원받았습니까? 누구 답변해보세요. 제가 하기 전에.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은혜를” 그다음에 뭡니까? “입었더라” 되어있죠. 옷 한번 벗어볼까요? 이 짓까지 해야 됩니까. 노아에게 낯선 언약이 입혀진 거예요. 언약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선물이에요. 없는데 없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없는 것을 하나님이 제공한 거예요. 우리가 해낼 수 있고 우리가 아는 것은 주께서 선물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생각도 못한 걸 준 거예요.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 믿는다.’ 예수님 믿는다, 이것을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다닌 사람은 수십만 번 이상 들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예수를 믿으면 이것은 그 수십만 번 들었던 예수 믿는 것과 같이 어울리지 않고 없는 거예요.

내가 예수를 지식으로 믿었던, ‘예수 믿으면 나한테 유리할 거야. 예수 믿으면 날 천당 보내줄 거야. 그렇다면 내가 꼭 믿어야지. 이건 내게 필요한 거야.’ 왜? 인간의 삶은 자기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만 챙기기 때문에. 내게 유리하기 때문에 챙기는 거예요. 예수보다 내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예수는 경상도 말로 단디 챙기죠.

하지만 성령이 왔을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를 지적하는가? 너는 지금껏 예수 믿는 너를 믿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식으로 성령이 선물로 와버리죠. 그러면 준 선물과 챙기려는 나를 완전히 바꿔야죠. 완전히 바꿔야 됩니다.

내가 있던 자리는 주님이 차지하고 나는 내가 추방했던 예수님처럼 내가 나를 추방시켜버려야죠. 나의 경험, 나의 선행, 나의 악행, 나의 잘못 다 추방해버려야 돼요. 나의 실수, 나의 오류, 나의 장점, 나의 주특기 다 추방해야 돼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시험입니까? 얼마나 큰 유혹인지 몰라요. 물론 저나 여러분 중에 해당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뭐 성공한 적이 있어야죠.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 남들 보기에 부러울 만한 일이 됐다는 것은 그때부터는 그것이 나의 삶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럼 내가 성공한 것이 우리 집에 들어온 귀신이 돼버려요. 귀신이 된다고요. 신봉하게 돼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중학생인데 이상하게 천성적으로 팔 힘이 좋아가지고 전국 중학교 팔씨름대회에 우승했다면 그놈의 상장은 제일 잘 보이는 데다가 둬요. 차라리 그때 우승하지 않고 예선 탈락했으면 되는데 그때부터는 야, 내가 큰일 내겠네. 해가지고 딴 짓 안하고 팔씨름만 해서 1억 따려고 어디 시합 나가고... 이것만 한다면 내 삶은 나한테 훅 들어온 귀신이 정해준 거예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나를 높여줬던 귀신이 갖고 온 그 선물에 내가 완전히 올무처럼 그 종이 돼버린 겁니다.

그냥 학교 다니지, 랩 한다고 해가지고 쇼 미 더 머니, 뭐 나에게 돈을 보여줘, 하는 프로그램에 가서 자기가 뭐하나 써가지고 리듬 맞춰가지고 뭐 노랜지 아닌지...... 나도 그럼 해볼까, 랩 해볼까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을 너희에게 바라나니.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거 좀 되고 나면 공부 이제 때려치우고 야, 이게 나의 삶에 쾌락을 준다, 하고 거기에 빠져버리죠. 그걸 향유(享有)라 하는데 예상 못한 즐거움이 와버리면 거기에 인간이 매료돼요. 인생을 버려버립니다.

아버지가 바둑 학원을 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바둑 학원을 해가지고 애한테 바둑을 가르쳐줬더니만 애가 6개월 만에 자기 아버지를 이겨버리네요. 그렇게 해서 사법고시보다 더 치열한 프로기사가 되고 난 뒤에 학교 공부고 뭐고 다 치우고 이제 바둑만 공부하는 거예요. 하루에 어떤 때는 18시간, 20시간까지 하루 종일 청소년들이. 프로기사가 됐다 칩시다. 반짝하겠죠.

20대 돼서 자진해서 프로기사를 그만둬버려요. 남자 이 동훈 9단, 여자 박 지연 4단, 이 세돌 9단 전부다 자진해서 스스로 자기 팔목을 자르는 것처럼 바둑을 잘라버려요. 이제는 젊은 후배들한테 실력으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젊은 청춘을 바쳤는데 그 바친 청춘이 나를 평생 보장해줄 수 있는 밥벌이가 되지를 못한 거예요. 미혹된 거죠, 결국은. 관심사가 내가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본인이 즐거운 것이......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요? 즐겨보세요. 거지꼴을 못 면하리, 뭐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인생은 즐기기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게 아니에요. 뭔가 성공하려고 했는데 어릴 때부터 공룡 이름 달달 외워서 공룡박사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 해. 전혀 이건 특징이라 할 수가 없어요. 나를 위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가치나 의미를 발견 못했다는 거예요.

그럼 왜 나를 위해서 사느냐? 거울 보면 내가 보이잖아요. 보이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난데 저 친구가 더 마음에 든다면 나는 언젠가 10년 뒤에 저 친구를 따라잡겠다. 보이는 데에서 보이는 것만 자꾸 찾아다니는 거예요, 보이는 것만. 아줌마들 취미생활 하듯이. 꽃꽂이하다가 때려치우고 돈 더 들여가지고 홈쇼핑에서 뭐 하나 구입해서 리본 아트해볼까 하다가 그것도 또 재미없고. 이거 하다가 저거 하다가, 전부다 보이는 거예요.

뭐 남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치과의사하다 때려치우고 김밥하다가 김밥하다 때려치워버리고 딴 거, 뭐 랩하고 하여튼 집구석 돈 있으니까 굳이 내가 고생할 필요 없다 해가지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뭐 누구는 둘 되는 인생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원 없이 살겠다고. 원 없이 살다가 전부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떠돌이처럼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럼 살면서 그동안 뭐했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건가. 오로지 생각한다는 것이 자기 종교 만들어가지고 자기를 신으로 만들어놓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 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대체하면서 자기 욕망에 미진한 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그렇게 세월을 보낸 거예요.

주님에게는 이미 구원과 멸망은 다 게임 오버, 결정됐어요. 결정됐습니다. 뭐 빽 써봐도 소용없어요. 결정나버린 겁니다. 그 결정난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이라 하고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는 ‘주의 약속’이라고 해요. 주의 약속. 언약, 주의 약속은 우리 인간세계에서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좋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인간세계를 완전히 섬멸해버렸다. 다 완전히 불바다 만들었다.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 인간세계에 들이닥쳐 와서 다 섬멸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인간세계에 눈에 보이는 것만 구입하고 그것만 탐을 내면서 계속 더 좋은 것, 좋은 것 찾아다니는 인간은 이미 불바다 속을 여행하는 것밖에 안돼요. 거기서 빠져나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베드로후서 1장 17절, 지난 시간에 했지만 다시 한번 봅시다. 1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가 알게 한 것이” 그다음 말씀이 중요해요.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했죠.

보통 이 세상의 이야기, 담화라 하는데, 이야기를 만들려면 만든 사람이 있겠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면 이 세상 이야기는 다 저자가 있고 만든 사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화가 되든 뭐가 되든 다 인간세계에 있는 것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거예요. 백설공주도 마찬가지고 심청전도 마찬가지고 춘향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들뿐이에요, 이 세상에. 그 이야기 내용이 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누구는 잘됐다 그 이야기, 누구는 못됐다 하는 그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만났던 이야기는 인간이 만든 공교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17절에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다음에 뭡니까?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께서 누구 하나를 딱 지목한 거예요. 내 사랑하는 자, 내 기뻐하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간과 차별화시킨 거예요. 그 차별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예수님과 그 외, 그 외를 대조시키는 겁니다. ‘그 외’ 속에 누구도 포함시키겠어요? 본인이 포함되겠죠, 본인이. 본인도 포함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특화시키면 나머지는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들의 집합이 되죠. 아닌 자들의 집합.

이럴 경우에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대일 대응이 안 된다’고 합니다. 대응이 안 되면 동치(同値,equivalance), 동일하게 일치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이걸 수학에서는 ‘무한의 크기가 다르다’고 합니다. 인간세계의 무한은 유한을 크게 키우면 이게 무한 돼요. 766 끝, 하면 유한이잖아요. 그런데 766,…하면 무한 되거든요. 끝없이 가면. 인간은 766 다음에 767나올 거고 계속 나올 거잖아요. 무한과 유한 사이는 연속체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무한, 이 무한 속에 인간의 종교가 들어있어요, 종교가. 인간들은 자기를 유한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무한은 신의 영역으로 돌리는 거예요. 이 이야기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건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인간이 만들었어요? 인간이 공교하게 만든 거예요, 인간들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십계명 받은 것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십계명 받았다는 이야기하고 같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일과 예수님이 십자가 진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하고 같은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의 말만 믿어요. 성령이 없을 경우에는. 그런데 반대로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의 말은 무조건 안 믿어요, 인간의 말은. 알거 다 알아버렸는데 그거 믿어서 뭐합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나 예수 믿는다.”하면 안 믿어요. “아니 진짜로 내가 너처럼 예수 믿는다니까.” “안 믿어.” 왜? 그 이야기는 내가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니까. 자기는 주님만 바라보지, 나는 너처럼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내가 들을 이유가 없죠.

그것은 사람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일 수밖에 없거든요. 너는 주 예수 믿으면 예수님하고 의논해. 나한테 그거 자랑질 하지 마. 딱 듣기 싫어. 왜 예수 믿는다는 것을 저렇게 광고합니까? 그것은 나의 삶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데서 자기의 주체성을 형성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흔히 인간들은 개 키우면서 이런 이야기하죠. 개도 주인이 예뻐하면 개들도 주인이 자기 예뻐하는 걸 안다는 거예요. 그 개한테 속아 넘어가신 겁니다. 개는 자기밖에 몰라요. ‘이렇게 내가 재롱부리면 나를 예뻐해주겠지.’ 라고 개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개보다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자기 말고 다른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주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개는 본성상 자기밖에 몰라요. 인간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방법 중 하나에요. 좋은 관계 맺어서 나한테 손해될 것 없으면 그렇게 해요. “아이고 손님, 옷 잘 어울립니다.” 어울릴 리가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은혜라 하는 것은 모든 걸쳐진 인간관계를 쳐내는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쳐내는 것. 내 안에 주님의 심판과 구원, 주의 약속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가시덤불이 가리면 안되죠. 안되잖아요. 그게 또렷하게 드러나야 되죠.

그래서 주님 약속 외에는 일체 누구의 말도 믿지 않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그 누구 앞에서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비난할까봐, 그래서 그들 세계에 나를 안 넣어주고 나하고 안 놀아줄까봐, 왕따 당할까봐 완전히 그 사람들에게 내가 밉상 받으면 나는 못 산다, 라는 본인 생각에 본인 걱정이 되어서 아부하듯이 그 사람에게 빌빌 기는 거거든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공교하게 만든 것만 줘요.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줄 재주나 능력이 그들에게 없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는 누구밖에 없어요?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그때 이야기에요. 베드로가 좋다고 야, 이런 세계가 다 있었네. 이 눈부신 세계. 이거 뭐 놀이동산도 아니고 이런 황홀한 세계도 다 있나, 하고 거기에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 정신 차려라! 하고 훅 날라가버려요. 모세고 엘리야고 다 날라가버리고 남는 것은 역시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런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 뒤에서 하나님의 어떤 음성이 겹쳐지죠.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분의 말만 들어라. 근거가 베드로 너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근거는 너에게 없고 모든 근거는 아버지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 예수님의 언약 완성 그것만이 유일한 근거인 것을 네가 앞으로 알게 될 것이다. 끝.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21117a 베드로후서3장 8절(모두 멸망)-이 근호 목사.hwp (99.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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