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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3 10:15:40 조회 : 127         
수련회 교재(수정판) 이름 : 서경수(IP:14.44.77.154)
[타인의 마을] 교재

- 요한복음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국가라는 공동체

1776년 7월 4일 13개 주의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공식적으로 미국 독립선언문을 발표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

이 독립선언문을 보면, 인간들의 본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상적(理想的)인 국가를 만들어 그 안에서 이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창조주를 운운하는 것은 핑계다. 본심은 ‘나를 위한 나의 국가(세계)’를 갖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정부를 만들고 국가를 조직하는 것도 그것의 출발선은 가정이다. 개인에게 있어 가족은 배타적인 개체성을 포기하고 타인과 하나가 되면서도 이를 통해 더욱 완전한 자아를 구축하는 공동체적 삶의 생생한 체험 현장이 된다.

가정에서 개인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헌신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어지고 충만해진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경험을 한다. 개인들은 가족을 통해 연대 의식과 일체감을 지니면서 공동체가 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정이라는 공동체와는 달리 ‘시민사회’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형성된 이런 자연발생적 통일성이 해체되면서 성립된 것으로서 부정성을 지니며 구성원 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개인이 가정에서 나와 그보다 상위 조직인 시민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동기가 되는 ‘내 것’을 더 많이 가져보겠다는 욕망이다. 즉 더 큰 권력, 더 큰 권위, 더 많은 재물, 더 힘 있는 발언권, 더 많은 독립성의 보장.... 곧 ‘내 것’의 확장인 것이다.

이 같은 소유권이 법적인 근거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나의 노동력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과 상호작용하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사물적 형태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상이다.

나와 타인의 의지 표상이 만나는 장(field)이 사회이며 그것의 상호작용이 사회생활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해 ‘상호주관’ 혹은 ‘상호승인’이라는 경향성을 견지하면서 공평성을 지켜내려고 한다. 자신이 존중받는 가운데 타인을 인격자로 존중하고 인정해주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인정만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는 자들이다.

자신의 절대적 자유를 사수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 공연한 허세가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침해받은 자유를 즉각 되찾고자 하는 것은 자기 확신의 회복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다. 이는 단순한 자기 보존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인정과 승인 가운데서 자기를 보존하려는 사투인 것이다. 인간의 자기 정체성은 이처럼 자신을 알아주는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통일성을 갖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자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통해 ‘나’는 개별성과 보편성까지 확보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나’가 되고 ‘나’는 우리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바탕에는 ‘소유성’이란 것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나의 소유물들을 점검하는 가운데 ‘나다운’ 존재가 되고 그 ‘존재의 맛’을 보는 것이다.

국가? 그것은 ‘나’이다. 거기에는 나의 일부가 들어 있다. 국가는 나이고 나는 국가의 부분이다. 그런데 그 ‘국가’가 국가의 이름으로 나의 소유를 침해하면 어떻게 되는가? 도대체 이상적인 국가 생활이란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여기서 국가 생활의 한계가 수면 위로 부상한다. 즉 인간의 개인적 도덕성은 국가가 지향하는 도덕성에 굴복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2.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간섭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나름의 독자적 영역을 소유하는 것을 용인하는데, 그런데 개인의 독자성과 주관적 이기심이 노동과 욕망 충족의 과정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욕구 충족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사회생활의 상호의존성 때문이다. 즉 자기를 위해 노동하고 자기를 위해 생산하고 그리하여 자기가 향유하게 되는 것들, 즉 개인의 배타적 이익 추구의 결과물이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이들의 생산과 향유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 사회생활의 이런 긍정적인 측면과는 달리, 사회는 구체적인 욕망덩어리인 개별자들이 자신의 쾌락과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면서 자기 소유를 지켜내기에 여념이 없기에 거기서 대립과 갈등과 충돌이 쉼 없이 발생한다. 온갖 탐욕과 사치와 낭비가 있고 빈곤과 퇴폐가 있으며 인간의 사물화와 노동의 소외가 있고 불평등과 차별이 있다.

이론상으로는 국민을 존중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사회생활의 이런 부정성에 대해 절대 방치하지 않는다. 가차 없는 법적 강제 조치가 시행되는 것이다. 사회를 통제하는 강력한 실체로서의 국가의 개입 앞에 개인의 사적인 도덕은 침해당한다. 국가의 도덕적 이념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3. 도덕의 한계

도덕성은 의지의 내면에 머물기에 현실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존재와 대립하는 한낱 당위성에 그치고 만다. 도덕은 실현되어야 하지만 실현될 수 없고, 실현되어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실현되는 순간 그것은 의지의 내면에 순수하게 존립하는 도덕성 본래의 색깔을 잃게 되고 마땅해야 한다는 자기 모순적 요청에 영구적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성은 의지의 순수한 자기규정이라는 형식을 그 원리로 삼는다. 바로 그런 공허한 형식주의적 특성 때문에 도덕성은 그 내용 측면에서 오히려 주체의 자의적 결단과 내면의 동요, 그리고 외부로부터 주어진 경험을 구성하는 소재의 특수성과 그것의 우연성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도덕적 양심은 선만이 아니라 악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는 악 역시 선 못지않게 주체적 자유와 자기 확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나름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과 인종 학살에까지 이르는 만행을 인류는 역사를 통해 충분히 경험했고 현재도 그것은 진행 중이다. 이 같은 주관적인 도덕성은 여전히 ‘객관적인 권리’와 대립 상태에 있다.

도덕성이 주관의 특수성을 지양하면서 내용 측면에서도 보편성을 획득하고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구현될 때 그것은 인류적 가치가 이행된 것이다. 개인의 도덕적 양심은 사회 공동체의 바른 기풍을 전제로 할 때만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실 있고 확고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고 더불어 왜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를 해야 하느냐는 동기에 대한 정서적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따른 판단과 결정만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려는 개인의 주관적 자유는 ‘근대적 의미의 도덕성’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개인의 주관적 자유는 관습적인 덕과 개인의 권리에 선행하는 사회적 역할과 책무를 근간으로 삼았던 전통적 인류성을 역행하는 파괴와 분열의 계기로 작용한다.

시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다는 것은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이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또 결정될 수밖에 없다. 세상사의 번잡함 속에서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을 관통하는 어떤 일반적인 원칙을 적용하겠다거나 과거에 있었던 어떤 유사한 사건과의 관계를 따져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퇴색해버린 추억’ 같은 것이기에 현재의 거센 풍파를 이겨내는 데는 아무 힘이 되지 못하며, 게다가 현재가 지니는 ‘시대의 활력과 자유’에 대해서는 일체 무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실용적 역사관’을 붙든다. 이것이 대세다. 자연은 ‘반복’되면서 진행되는 반면 역사는 ‘발전’하면서 진행된다고 믿는다. 인간은 단지 고통 그 자체를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 때문에 괴로워한다. 의미는 열정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역사는 그 역사 속에 살아가는 개개인의 의지와 욕망, 그리고 이해와 관심이 만들어낸 사건들로 구성된다. 개인의 열정은 보편적 행위를 유발하는 촉매이자 작용 요인이기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일도 열정 없이는 달성된 적이 없다.

민족정신이란 문화적· 법률적·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를 형성하는 구성원들이 품고 있는 그들의 자의식이다. 이 정신은 세계화를 꿈꾸며 스스로 형태화한다. 그 구현체가 국가이다. 이것은 세계를 의미 있게 여기고 최상의 형식을 추구한다. 민족정신 혹은 국가 정신은 주변 모든 것을 흡수하여 통합하고 그것이 보편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전진해 나간다. 자신이 포함된 총체이자 자신을 파악하기 위한 총체성으로서의 국가가 구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국가 안에서 개인은 비로소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은 자아의 절대성을 갖추려는 시도이다. 타인은 자기의 절대성 구축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과연 이런 자기중심의 세계,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인간은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가?

4. 타인이란

타인과 맺는 관계의 배후에는 ‘상실된 전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상실된 전체성으로 말미암아 대인관계가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 있다. 인간관계는 그 관계가 지향하는 바를 관계의 출발선에서 상실해버린다. 나에게 있어 타인은 나와 전체 사이의 매개자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타인에 대한 평가는 전체성에의 부합 여부가 된다. 예를 들면 그 타인이 여성보다는 남성일 때, 혹은 흑인보다는 백인일 때, 즉 힘이 있을 때 그는 전체성에 더 부합하는 것이다.

세계는 이와 같은 ‘타인 이론’으로 구성된다. 이 세계는 ‘공통성’을 기반으로 조성된 공동체다. 타인과 나의 만남은 동일 조건 속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동일 조건이란 ‘서로가 인정하는 진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동일 조건’하에서 인간은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의 개입으로 인해 ‘사로잡힘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의식은 자의식으로 회귀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사로잡히고 그 관계에 지배받는다. 타인과 마주침에 의해 주체는 자신의 의향과 상관없이 자아성을 잃고 수동적이 되며 비난받을 수 있는(기소당하는) 자리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사로잡힘’은 자기의식을 통한 제어가 힘든 상태에서 자아가 타자와의 관계로 이끌려 들어가는 정황에 대한 표현이다. 곧 자기의식의 종말이다. 자아는 타자라는 ‘귀신’이 개입된 사건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늘 세상에 의해 조롱받는 처지에 노출되어 있다.

자아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말은 자기에게로 회귀해 자기성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타자와의 관계가 ‘비대칭적’이며 역전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대한 자아 나름의 자구책은 자신과 말이 통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이 통하지 않고 이성, 감정, 감성적으로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과도 과연 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인정하고 수용한 공통의 ‘진리’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공통성이 개입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초월하는 묵시적 동일 가치성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통성은 해당 시대의 ‘시간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 공동체를 성경은 ‘이 세대’로 언급한다. 모든 인간은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지금’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하는 ‘오는 세대’는 시간 밖에서 들어온다. 이것은 두 세대가 속한 시간 층이 다르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세대’의 시간 층에 속해 있는 ‘나’와 ‘오는 세대’의 시간 층에 속한 ‘나’가 다른 것이다. ‘나’가 사라지면 ‘타인’도 사라지고 ‘나’가 두 종류면 타인도 두 종류다.

5. 신체

타인과 나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불가능한 이유는 각각의 신체 때문이다. 신체가 타인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신체는 항상 변화하고 있는데도 자아는 그것을 동일한(정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신체를 볼 때, 일단 타인의 신체를 ‘죽여놓고’ 보기 때문이다. 마치 횟집 요리사가 도마 위에 놓인 횟감을 주목하듯 그렇게 타인의 신체를 정지시켜놓고 살펴본다는 것이다. 인간은 과학의 칼, 종교의 칼, 철학의 칼, 정치(권력)의 칼 따위를 손에 쥔 채로 타인에게 시선을 던진다.

최초의 인간은 깨진 달걀에서 흘러나온 액체의 흐름처럼 매임이 없었다. 소위 ‘액체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 액체 인간이 피부 표면의 구멍들, 즉 눈, 코, 입, 귀 등에 얽매인 인간으로 변한다. 이 구멍들은 신체의 감각 기관들이다. 이런 감각 기관들의 ‘충동’이 인간 내부에서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네 개의 구멍을 매개로 하는 충동, 즉 시각 충동, 후각 충동, 구강 충동, 청각 충동들은 그 충동이 지향하는 대상을 갖는다. 시각은 시선, 후각은 배설물, 구강은 유두, 청각은 목소리를 그 대상으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충동들은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의 것이므로 충동의 대상들 역시 주체에서 독립해 있다. 즉 이 충동들은 주체의 대응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객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충동의 대상은 일상적인 주객 관계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충동 자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이와 같은 충동들에 지배받으면서 자기 신체에 거주한다. ‘거주한다.’라는 것은 기하학적인 공간 안에 도형이 들어있는 것 같은 정지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 안에서 활동하며 무엇인가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가령 ‘아늑한 기분이 들 정도로 방이 크다’라는 말을 들을 때 가늠되는 공간의 크기는 그 공간과 얽혀 그 방을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잣대로 말미암은 크기이지 객관적이고 기하학적으로 측정된 공간의 크기는 아니다. 또한 ‘너무 즐겁게 놀다 보니 해가 지는 줄 몰랐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시간 인식은 그 시간과 얽힌 경험 속에서 인식되는 주관적 시간이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은 아니다.

이처럼 자기 신체에 거주하는 자의 인식에 따른 시간과 공간 인식에 비하면 기하학적 공간과 물리적인 시간은 2차적인 것이며 반성적인 차원에 속한다.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이 주관적인 시간과 공간 인식에 밀려나는 이유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세계 안에서 거주한다고 하는 의식 역시 ‘뭔가를 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판단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뭔가를 계속해서 쉼 없이 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계는 나의 행함과 타인의 행함이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세계가 된다.

생각의 결과로 차후에 행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거나 캄캄하게 어두운 데서 성냥으로 불을 밝히는 일들은 ‘이 시점에서 손수건을 꺼내야겠다거나 어두우니 불을 밝혀야겠다.’는 판단으로 말미암은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환경에 대한 자연적인 신체의 반응들이다. 행위는 추상적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라는 자기 환경에서 비롯된다.

마찬가지로 모기에 물린 사람은 물린 지점을 애써 찾아낼 필요가 없다. 단번에 안다. 긁는 능력으로서의 손과 그 손에 의해 긁히는 물린 지점 사이의 관계는 신체의 자연적인 반응 체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상호 양립할 수 없는 행위들이 공통의 세계 안에서 표현되고 내놓아진다. 나를 위하여 상대가 자신이 하던 행위를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가 양립하는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초원의 그 초록을 나와 타인이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은 나와 타인 둘 다가 ‘신체’에 귀속되어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루어지는 ‘본다’라는 양자의 경험은 그 경험 배후에 있는 하나의 동일한 신체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나’와 ‘타인’이라는 각각의 자아가 본 것이 어떻게 서로 일치할 수 있는가를 조율해야 하는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다. 보는 일은 자아의 개별성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 둘 다의 공통적인 신체의 감각, 즉 ‘시각’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공통의 신체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세계 역시 나와 타인에게 공통된 것이다.

타인은 나를 세계와 연결하는 회로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하는 점은 나도 그 타인을 세계로 연결하는 회로 가운데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상호 공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기원인으로서의 개별적 의식은 그 고립성으로 인해 초월을 통해 타자의 의식 세계로 가서 공동체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 들지만 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 모든 이의 의식 배후에 이미 공통의 익명 존재, 즉 신체가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사고를 따라 내가 사고한다는 것은 나의 사고가 나의 내면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사고가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체’라는 세계와 ‘국가’라는 세계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신체가 나 자신만의 고유 본질을 따로 갖지 않는다는 것은 그 신체를 구원해야 할 목적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즉 굳이 사회적 귀속의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는 신체이기에 내 신체만을 위한 개별적 목적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임의적 연대는 자기의식과 타인 의식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주의에는 위협이 된다.

국가는 통치를 위해서 존재하기에, 국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타자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강력한 귀속 조치를 시행한다. 국가의 통제 밖에 있는 집단의 연대에 대해서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국가의 주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임의적 연대는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따로 갖지 않는다. 정치적 목적 같은 것도 없다. 국가 입장에서는 이런 연대가 가장 위험하다.

타인의 부재는 사물을 인식하는 나의 지각 체계의 배경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부재로 인해 나의 지각은 사물에 대한 인식에 가 닿질 못하고 나의 지성은 암흑으로 덮이게 된다. 타인은 나 자신으로는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세계의 변두리, 혹은 잠재 영역의 존재를 보증한다. 내게는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 영역도 타인에게는 보이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겁에 질린 얼굴은 그 무서움을 우리가 직접 지각하지 못하는 어떤 공간에 대해 알려준다. 타인을 통해 공간은 우리의 직접적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공간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결국 ‘내 신체’란 없는 것이다. 그냥 ‘신체’가 있을 뿐이다. 어느 것 하나 ‘내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죽음으로 접수한 예수님의 것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Ⅱ. 본론

요한복음은 인간의 실체와 그것의 현주소를 ‘육’으로 표현한다. 인간의 본 모습은 인간 세상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파악될 수 없고 오직 인간 세상에 오신 ‘영’ 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그 실체가 알려진다.

인간이 육(3:5-6)이라는 말은 단순히 인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육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 또한 영 되시는 분이 오심으로써 파악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으로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고유영역이 있다. 그 영역은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며 그 영역에서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을 인지할 수도 없다. 이 영역은 곧 죽음의 영역이다. 이와 같은 ‘죽음’의 세상에도 그 나름의 법과 규범이 있지만(5:16),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그 규범을 통제는커녕 오히려 규범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요1:4에서 말씀하는 ‘생명’은 인간이 부지하고 있는 목숨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런 목숨은 이미 언급했듯이 ‘육’이다. 소실되는 것이고 허약하며 후패하는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다. 이것은 곧 죽음이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1장 초반부에 ‘생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영생하시는(부활하신)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 인간이 그분을 어떻게 대했냐를 알리기 위함이다. 인간은 부활(영생)에 대해 곡해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배척으로 일관했다. 이 사실은 인간이 영생하시는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끊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 요한은 육의 세계와 정반대 편에 있는 세계를 ‘영’으로 소개한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는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부활로 그분이 진실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분위기가 교회 내에 형성되었던 시기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에게 발생한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성도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즉 과거에 발생한 사건이 현재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며 그것이 지금에 와서 어떻게 영생이 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만 상대하여 그들만 정죄하시고 그들 가운데 특정 유대인들만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란 사실이 분명하다면(17:18) 어떻게 유대인들만 상대하여 행하신 일이 전 인류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1:3절에 “만물”이 언급된다. 예수님은 만물, 즉 우주를 지으셨다(1:1-3). 그러나 유대인들은 창조를 순전히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만물’을 언급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왜 그처럼 예수님을 싫어하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한다. 결국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이란 창조 사역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말씀(율법)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다(1:4).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 율법을 주었다(1:11). 그 율법들은 진정한 생명을 내다보고 주어진 것으로 생명이신 분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영접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14). “아, 저분이야말로 율법이 인격이 되어 나타나신 분이구나!”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기 백성은 그분을 영접지 아니하였고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원래부터 말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데, 이것을 사도는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으로 단정 짓는다(1:5).

그런데 이 ‘어두움’의 상태는 유대인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보편화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에 유대인들만 개입된 게 아니라 이방인 총독도 관여되었기 때문이다(18:35-36/ 19:10-11/ 17:14).

여기에 첨부되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세례 요한 역시 영이 아니라 육이라는 점이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지만 믿게 할 수 없었고 그의 물세례 또한 효과가 없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비교한다(1:33). 세례 요한은 중도 하차했지만 (3:30/1:8) 성령은 영원하다(16:7/ 14:23/26/ 20:22).

이제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유대인의 ‘육 됨’이 실제로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역사에 남겼는지, 그리고 이런 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음으로까지 끌고 갔는지를 보여주면서 더불어 이 유대인의 육의 요소가 세상 사람 모두에게 보편화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그들에게 심판 아니면 구원의 근거가 된 것 같이 사도가 쓴 복음서 자체가 예수님의 생애 이후 사람들에게 심판 아니면 영생이 주어지는 방편이 된다.

‘육’의 대표격으로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율법에다 자신의 더러운 종교성을 가미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보려 했다. 소위 ‘종교의 바벨탑 쌓기’이다. 그들의 관심은 ‘율법의 인격성’이 아니라 율법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믿음이 혈통으로나 육정에 의해 나오는 것으로 여겼고, 자신들의 지혜와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종교적 수고(열심)를 무시하는 예수님에 대해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의 공동체 질서와 안녕을 위한다는 핑계로 예수님을 제거해버렸다(11:50).

그들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다(21:15-16).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이 세운 법 체제와 조직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것이고 자신들의 영광을 가득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5:44). 결국 예수님을 죽인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자신들의 종교였다.

예수님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나님이었다. 이 차이가 영생과 사망을 가른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이 ‘육’임을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 고집스럽게 자신들과 자신들의 성전 예배를 ‘영’으로 여기게 만든 것이다(4:23-24). 그러니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시는가에 대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는가?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하신 일, 즉 장사치들의 상을 엎고 채찍으로 소와 양을 내쫓은 일을 단순한 성전 청결 행위로만 여긴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의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야 제자들에게 알려졌다. 그것은 곧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성전은 필요치 않다는 뜻이었다(2:13-22).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을 의도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의 ‘열심’이 아버지의 집을(나를) 엄습했던 것이었다(2:17). 이것은 새 언약의 태동이자 옛 언약인 모세 언약의 허물어짐이다. 옛 언약의 ‘허물어짐’ 그 자체가 언약을 다 이루심이 된다(19:30). 새 언약이 ‘옛 언약의 완성’으로 주어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처럼 육의 허물어짐 그 자체를 ‘영’으로 천명한다(3:3/ 1:13/ 6:63).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독생자의 영광과 어떤 관련성을 띠는 것인가? 말씀은 이미 그 자체로서 인격적이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 독생자가 나타낼 영광과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이 없으면 독생자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생자의 영광은 아들만이 가지는 유일한 영광이다. 이것은 모세가 율법을 건네받을 때 나타났던 그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사도 요한은 소개한다. 모세에게 나타났던 영광은 그것의 절정의 때가 따로 있음을 암시하는데 그 절정의 때가 곧 아들의 육신 되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한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드러낸다. 은혜와 진리가 아들의 육신 되심으로 충만해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아들로서의 영광에 대한 포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광의 절정이었다.

사도 요한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이 인간세계에 계실 때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부정한 육(인간)에 불과한 제자들이 하나님(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견딜만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영광을 지니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은혜와 진리로 나타내는 영광이었다.

이로써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게는 하나님다운 영광이 없었다는 주장을 충분히 반박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낸 은혜의 영광이 ‘비천함(낮아지심)’으로 밖에는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은 왜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단순히 인간만을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제공하는 일과 더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1:16).

인간들의 경건한 종교적 열심과 선에 대한 추구,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들이 내미는 선한 양심의 결실에 대해 왜 하나님은 고개를 돌리시는가? 그것은 말씀이 요구하는 수준의 ‘낮아짐(비천에 처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생양’ 수준의 자리다.

세례 요한은 말씀의 은혜 됨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표현한다(1:29). 세례 요한은 자신의 세례가 어떻게 하면 그분의 사역을 부각할 수 있을까에 온 관심을 쏟았다(1:20-27). 이것 때문에 그의 세례 행위는 죄를 씻어내는 데 초점이 있었던 게 아니라 죄가 죄 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래야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분의 가치와 고귀성에 결합하는 세례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 되심은 또한 성령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요한복음에 있어 성령의 역할은 세례 요한의 세례와는 달리 세상 죄에서 분리하는 작용을 한다(1:33/ 20:22-2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은 세례 요한의 세례에서 탈피하여 율법의 전달자가 아닌 성령의 전달 통로로서 이들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법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기초를 이룬다(21:15-16).

그러기에 그들에게만 인자의 영광이 보인다(1:51). 예수님의 인자로서의 영광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으로 나타났는데 사실 그 표적들은 인간들의 오해와 무지로 인해 촉발된 것으로서 예수님의 반대자들에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갈 구실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표적이 그들의 오해를 해소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무지를 더욱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예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고 소와 양을 채찍으로 쫓아낸 사건에서 보여졌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당시의 성전 건물을 성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 사건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의 집’이란 곧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사도는 증거한다(2:22).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전 청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시편 69:9(“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에 비추어 해석하면, 새로운 성전을 사모하는 예수님의 열성으로 인해 예수님이 대적들에게 훼방을 받았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님의 그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내모는 시발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치들의 상을 엎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내쫓으신 일은 단순히 분노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행하냐고 따지고 들며 그 같은 권한을 뒷받침할만한 표적을 보이라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던진 말씀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기존의 성전과는 다른 성전을 제시하신 것이었다. 이 성전(예수님의 몸)을 헐었는데 사흘 만에 다시 세워졌다면 과연 너희가 자랑하는 성전이 참 성전이겠냐는 것이다. 결국 46년에 걸쳐 지어진 인간이 자랑하던 그 성전은 애초에 성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다. 결국 인간은 ‘육’이었다(3:6).

이 일 이후에 전개되는 일들, 곧 예수님과 접촉한 인간이 보여주는 모든 부정적인 반응과 태도, 오해와 요구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로 밀어낸 육의 소산물들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의 의미도 모르면서 예수님께 생수를 요구한 것(4:15),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예배처로 아는 것(4:20), 예수님의 양식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4:33),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살려달라는 왕의 신하의 간청(4:47),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낫게 했다고 예수님께 시비 건 일(5:10), 예수님을 떡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여 왕 삼으려 한 일(6:15),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부추겨 세상에 드러내시기를 요청한 일(7:4),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고 예수님을 책잡은 일(9:16), 나사로의 여동생들이 오빠의 죽음에 예수님을 탓한 일(11:32), 제자들이 죄인인 여자가 비싼 향유를 허비했다고 비난한 일(12:5),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라도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다짐한 일(13:37),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 자신의 권세를 주장한 일(19:10), 도마가 예수님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한 일(20:25).

이상의 모든 기록은 인간의 육의 요소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영생에는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 어떤 인간의 그 어떤 도움도 개입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영은 순전히 예수님의 인자(人子) 되심과(3:13)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15:26). 영은 인간을 철저히 육으로 고발하는 그 현장에 비로소 출몰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영생의 열매를 심고 또 거두시기 위함이다(4:36). 또한 자기가 원하는 자를(5:21)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5:24),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의 양식을 주시기 위함이며(6:27), 믿는 자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기 위함이다(7:38-39). 또한 믿는 자들을 율법의 노예 생활에서 빼내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이며(8:32),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기 위함이다(9:5/39). 또한 자기 양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며(10:10), 자기가 선택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여(13:1) 그들을 하나님의 처소로 삼아 영원히 그들과 함께하시기 위함이고(14:2/23), 아버지가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드리기 위함이다(15:5).

이 모두를 한마디로 말하면 영생이다(17:3/20:31). 이 영생이야말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아들도 이로 인해 영광을 받으신다(17:5).

이상의 여러 목적에 부응하여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초반부를 아들의 영광됨에 대한 진술과 인간 육의 절정이요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의 바벨탑인 헤롯 성전 청결 사건으로 열어간 것이다.

Ⅲ 결론

“저의 최종 선택은 저 자신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시는 고백이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신다. “너는 거기 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제자들을 비롯해 모든 인간은 자신이 출생한 이 세상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

세상은 모두가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 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산 자로 여기는 세상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이다(요 21:24).

(함숙경 집사님이 교정하는데 수고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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