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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19:05:37 조회 : 541         
강남-요한복음 16장 32절(통합된 고백)180417b-이 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21.165.203.222)
강남-요한복음 16장 32절(통합된 고백)18041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32절에 보면 제자들은 다 떠났는데 예수님 혼자 남았다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다고 했지요?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계는 예수님만의 세계가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있는 세계죠. 그러면 그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그 자리가. 그 자리를 확장시켜 나가면 그 예수님만 아버지하고 예수님만 그 자리에 과연 인간이 끼어들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내칠 때는 언제고 다시 들어오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그 자리는 인간 몫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된다 이말이죠. 사람은 떠났다. 예수님 혼자 남은 줄 알았더니만 거기 아버지가 같이 계시다. 그러면 아버지하고 아들만 있는 세계, 그게 좋은 세계냐? 그게 하나님께서 생각했던 이상적인 세계가 달랑 아버지와 아들만 달랑 있는 세계가 전부냐? 아니면 뭔가 자기 백성들도 으쌰 으쌰 이렇게 있어야 될 세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면 예수님 있다 아버지 있다 인간들 추가해서 보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되느냐? 이렇게 할 때 그건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 했거든요. 하나님도 인간 없이 심심해서 못산다고 그렇게 이야기 한다 이 말이죠. 마치 인간이 하나님 재미있으라고 보태주는 것처럼. 아이 참 같이 놀아주자 놀아줘. 아 참 더러워서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인간이 슬쩍 끼어들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아니라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꼭 자기 백성이 집어넣어야 될 당위성. 난 너희들 없으니까 아쉬워 죽겠더라 정말 난 너희들 필요해. 꼭 그렇게 주님께서 인간 쪽을 향하여 아쉬운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만 남기려면 처음부터 보내지를 말지. 대충 알아서 잘 키워서 너희는 내 백성이야 이렇게 하면 되는데 다 내쳐놓고 두 분만 달랑 남아놓고 좋단 말이죠. 그게 뭐가 좋아요. 다시 부르러 오신다 성령을 통해서. 뭔가 빠져있다는 느낌. 주님의 일관성에서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어디서 문제인가? 그것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거기 안에 하나의 힌트가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22장은 유명한 혼인잔치입니다. 임금님께서 아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하고 소도 잡고 음식도 준비했어요. 그럴 때 거기서 개별성이 나옵니다. 나는 소를 샀기 때문에 참석 못합니다.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참석 못합니다. 나는 장사하러 가기 때문에 참석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시간에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그 시간에 나는 내가 본인 결혼식 때문에 내가 장가가기 때문에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종들을 보냈더니만 이렇게 그냥 변명만 하는게 아니고 그 종들을 때렸다고 되어 있어요. 초청하라는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하라는 그 종을 그냥 마구 때렸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화가 나서 길거리 사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 했어요. 아무나. 아무나 데리고 왔다. 그러면 이 참석한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너,나가 아니에요. 전부 다 한 바구니에 담을 수가 있습니다. 그 바구니 이름은 뭐냐 하면은 ‘아무나’에요. 아무나.


개인의 개성은 전혀 이거는 살리지 못합니다. 아무나 왔어요. 아무나 왔으니까 개인적인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나란 말은 너와 나 사이에 이렇게 본드처럼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주께서 인정하지 않았던 거예요. 에라이 아무나 걸려라 해서 아무나가 이 사람과 이 사람으로 하여금 혼인잔치에 참석케했던 거예요. 그러면 아무나는 누구의 대타입니까? 처음에 초청한 자의 대리로서 여기에 들어가지요.


그러면 초청한 이것을 아무나와 대비해서 이것도 하나로 묶어 버립니다. 묶는다. 하나로 묶어 버려요. 하나로 묶는 이것도 하나로 묶고 이것도 하나로 묶을 때 묶는 방법이 뭐냐하면 예복을 입혀 버리면 됩니다. 유니폼을 입혀 버리는 거예요. 유니폼을 입어버리면 처음에 애초부터 혼인잔치는 유니폼 입도록 되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처음에 거절한 사람들은 뭐가 없어요? 유니폼이란 것은 생각도 못하고 이 몸 그대로 참석이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겠지요. 이 몸 그대로.


그 가능하다는 생각이 어떤 사태를 낳았느냐 하면 임금님이 보낸 종들을 때려죽이는 사태를 낳게 된겁니다. 바쁜데 어디서 네가 와서 그런 남의 혼인잔치에 내가 왜 가야돼?! 그냥 감정적으로 때려버렸다 이 말이죠. 상당히 그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거죠. 임금님한테. 그래서 그 화풀이가 뭐냐 하면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 다음에 그야말로 군대가 와서 완전히 싹쓸이 한다는 그게 나와요.


아주 이상하게 이야기가 이상하게 전개되요. 아무나 왔잖아요. 그러면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면 그냥 본래 자리로 되돌아 보내면 되는데 그 예복 안 입었다고 혼을 내는 수준이 아니고 아예 그 사람이 있던 원래 자리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립니다. 누가? 임금이 군대를 보내가지고. 완전히 모든걸 파괴시켜 버리죠.


그러면 남는 것은 파괴되지 않은 장소는 딱 한 장소밖에 안 나와요. 그거는 뭐냐 하면은 혼인잔치 벌리는 그 잔치집 외에는 전부다가 거기만 소복하게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가 생산되었다 하느냐 하면은 이것이 바로 평안의 생산입니다. 평안의 생산. 큰 난리가 없으면 평안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 말은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평안이 있다 없다? 처음부터 인간은 평안이 없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평안은 평안이 아니고 큰 난리를 저주를 받을 대기상태죠.


아직까지 누가 자기를 친다는 것을 전혀 생각 못한 상태에서 잠시 고요한 찻잔속에 고요. 순간적 고요 이 세상 지금 잘 돌아가고 우리나라 잘 돌아가고 있잖아요. 한순간의 고요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모든 정치적인 행위가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잖아요. 김정은과 트럼프하고 회담한다고 하니까 사람들 좋아합니다. 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그런데 시리아는 난리,난리에요. 미국 치고 오늘은 또 이스라엘 치고 영국치고 프랑스치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의 기준에 있는 평화는 뭐냐 하면은 본인의 가치를 계속 살려주는 조건하에 평안, 그 평안 속에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가 꾸준히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누리는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는 아니고 지옥이죠. 이거는 지옥이라고 할 수 있어요. 33절에 봅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내 안에서.


그러면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인간들이 진짜 예수님 말씀 평화, 평안 다 같은 말이에요. 안식 다 같은 말이에요. 이걸 몰랐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고 아들만 있으면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더할나위없는 평안이 되요. 천국이 되요. 그래서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를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초청받은 거예요. 참여하게 된겁니다.


그러면 참여하면서 뭐를 버려야되요? 내가 원했던 나 위주의 평안과 화목과 화해와 안식은 이것은 여지없이 밟혀야 되고 포기해야되죠. 그러면 여기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의 공식을 제시하겠습니다. 평안이란 평안을 방해하는 것은 평안이죠. 내가 평안을 방해하는 것은 평안이죠.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은 평안 또는 평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게 생각하는 평화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환란 속에 환란을 우리는 평화라고 잘못 오해하고 있는겁니다. 이 환란을.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가 뭘 당하나? 환란을 당하죠.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이렇게 되어있단 말이죠. 이 공식을 집어넣으면 우리가 지금 바나나 먹고 평안하잖아요. 이게 환란이에요. 우리는 이것을 먹고 마심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앞으로 더 살아야지 바나나 먹고 피부 좋아져야지. 내가 나 위주의 평안을 계속 고집해나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뭘 원합니까? 환란을 원해요? 평안을 원하죠.


집안의 우환, 또는 내 인생의 암담한 인생, 그것을 교회와서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서 이 세상에 받는 환란이 심리적으로 평안하기를 바리지요. 그러면 그것은 이거는 환란을 더 키웁니다. 점점 더 그 떼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바닥에서 그대로 환란을 더 키우는 셈이 됩니다. 마귀의 시험 들어서. 더 키우는 셈이 되지요.


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환란 가운데 있으란 말이죠. 환란 가운데 있으면 그럼 내가 누리는 환란은 뭡니까? 너가 살아질 때 니가 사라지고 내 눈앞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나타날 때. 지금 내가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합니까? 내가 제일 중요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나’라는 것이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제가 말로 이렇게 해가지고 뭐 그런 사람 있겠나 하지만 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그랬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잖아요. 돌에 맞으면서 뭐가 확인됐느냐 하면 지금 내가 설교 뽑아내고 한게 이게 내 뜻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께서 그들 앞에서 짱돌 들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해댄거에요. 누가 했다고요?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누가 했다? 성령 충만 받아 성령이 그렇게 하신거에요. 성령이 그렇게 했으니까 내 생각해도 돼요? 안 해도 돼요? 내 생각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내 생각을 안 하니까 내 환란을 구태여 따로 뽑아낼 이유가 없어요.


수면내시경. 수면내시경입니다. 내가 프로포폴 맞고 내가 이 침대 저 침대 옮겨야지 라고 이렇게 계산하지 마세요. 마취만 딱 받으면 눈 깨보면 벌써 침대가 이쪽으로 옮겨져 있어요. 평안입니다. 그런데 침대에서 깨어나가지 아이고 이래가지고 운전하겠나? 벌써 환란이 시작됐어요. 왜냐하면 내가 또 뭐 해야되니까. 주께서는 원천적으로 우리 태어날 때부터 네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태어나게 했다 계속 주인공을 원천적으로 성령받고 난 뒤에서 처음부터 소급해서 주인공이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태어난 것도 네 뜻도 아니고 네 부모도 네가 골라잡아서 부모가 아니고 쌍꺼풀 없는 엄마에다가 쌍꺼풀 없는 아빠, 그러면 내가 쌍꺼풀 없지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쌍꺼풀 생겼다? 두 가지에요. 수술했거나 안 그러면 유전자 조사를 해봐야되겠죠. 주어진 이 모든 것이 목사님 주어진 모든 것이 본인이 기여한게 뭐가 있어요? 본인의 의가 가미되어서 어떤 요소가 있습니까? 의가 가미되어서 원했던 어떤 요소가 있습니까? 없지요? 머리 아픈건 좀 나았어요?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팠습니까?


이거는 정말 우리가 똑똑한지 바보인지를 봐야 되요. 우리는 똑똑한 줄 알지만 등신도 그런 등신이 없습니다. 이중에 내 것이 하나도 없는데 또 마귀가 그래 마귀가 자꾸 네 거니까 네가 알아서 잘 챙겨야 된다고 교회가도 그런 소리 하고 집에 가도 그런 소리 하고 어린애들도 부모들이 그런 식으로 양육했고 우리는 또 우리 자녀한테 그런 거짓말 또 자식들에게 강요합니다. 네가 지금 공부하는 것에 따라서 네가 앞으로 얼마나 예쁜 아내를 만나느냐가 지금 결정된다고 계속 또 아들보고 하지요. 딸한테는 네가 지금 하면 괜찮은 남자 만나고 아니면 결혼도 못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가 본인이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우리는 또 뭐예요? 나의 정체가 뭡니까? 수상해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식이 바뀌는 그런 지점을 할당을 한겁니다. 배당을 해줘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가위표치는 그런 자리를 우리에게 배분해주지요. 배분이 뭡니까? 양식없으면 나눠주는게 배급이예요 배급. 배급해주는 거예요 배급. 영화 볼 때 배급사 나오지요 배급. 영화 네가 안 만들었다는 거예요. 딴데서 만들어 놓고 영화관마다 전부 다 집어넣어 줬다는 말입니다. 배급하잖아요.


뭐를 배급하느냐 하면은 아버지와 아들만 있어도 저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라는 평안을 우리에게 공급해주는겁니다. 공급이 좋으네. 공급. 공급해주면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자리. 인식의 전환이. 공급이 되어 버리면 육을 갖고 있는 우리는 계속해서 옛날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자, 하나 예를 들게요. 롯데호텔 있잖아요. 앞에 호수가 있어요. 무슨 호수겠어요? 석촌호수지요. 석촌호수에 벤치에 앉아서 바로 볼 때 이 세상은요 어느 장면을 봐도 보는 순가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은 추억이 생각나요. 추억은 기억에 다발입니다. 자, 앞에 바라보니까 개나리가 피었어요. 개나리. 개나리 처음 보지는 않았을거 아닙니까? 나이 60이 되어서 석촌호수에 앉아서 개나리를 보았다. 그러면 내가 개나리를 본 게 언제였더라? 내가 개나리를 본 게 기억나는 것이 그때는 초등학교 없었어요. 국민 학교. 국민 학교 5학년 학교 학교는 담벼락이 없었어요. 그냥 개나리 그게 담벼락이 담이었어요. 개나리 본 것이 떠오르겠죠.


떠오르면서 그 때 불렀던 동요가 떠오르면서 동요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얼굴이 같이 떠오르면서 같이 노래하지도 못하면서 했던 갑자기 그 옆에 있던 순이가 생각나고 순이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며 누구하고 옥경이처럼 희미한 등불 밑에 어떻게 그게 또 생각나면서 이 전체가 뭐냐 하면은 개나리 보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로이트처럼 개나리를 보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이 그 짧은 순간 튀어나오는데 그게 어디서 튀어나오느냐 하면은 나, 자아가 그 순간에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짧은 순간. 10초 내지 15초 그때 그 자아는 괜찮은 지금의 육신의 자아가 아니라 열두살 먹었던 그때 자아로 잠시 변신되는 겁니다. 이게 ‘자아의 생산’이라는 거예요. 봤던 기억이 나에게 기억이 내 두뇌에 공명현상을 일으켜서 잠시 동안 옛날의 기억의 창고에 잠자고 있던 그 때 그 자아가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5초 내지 10초 밖에 안되는 이유가 눈은 지금 그 시대가 아니고 다른 시대이니까 빨리 그것이 오버랩 되어 버려요. 아쉬워요. 오버랩 되는 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때 그 동료도 같이 나와야 되고 그 때 먹은 빵 맛이 혀를 자극해야 되고 그때 있었던 그 냄새라든지 그런 풍경도 같이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좋은게 아닙니다 미친거다 이게. 좋은게 아닌데 정신차려야돼요. 좋은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때 그 모습이 잠시 생각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한 것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무의식속에서. 원래 짜증나는 것은 ‘플래쉬’라고 해가지고 억압이 되요. 정신분석학에서. 꽉 눌려있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되거든요. ‘나오지마’ 꽉 눌려있고 괜찮은 것만 편집되어서 나타납니다.


특히 그 때 있던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음악이 점점 더 나로 하여금 생각나겠죠. 밥 딜런 불렀던 천국에 노크하라고 하면 갑자기 밥 딜런 활동하던 시대에 기타 쳤던 그 내 모습과 사람들 같이 놀러가서 엠티 갔던 그때는 엠티가 없었어요. 그냥 친구들 같이 그 당시 김민기 노래부터 해가지고 이런게 한꺼번에 확 밀려오지요. 그때 그 자아가 등장한다면 지금 옛날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한다면 지금의 내가 자아라고 할 때 이걸 믿을 수 있습니까? 내일 되면 지금의 내가 또 변신하는데. 왜? 내일 몫의 체험이 또 주어져요.


그러면 12살 때 잠시 행복했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평안’이라고 해요. 평안.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아이가 차가운 물에 빠져 죽고난 뒤에 잠수함이 지나갔던 간에 박근혜가 미용을 했던 간에 빠져 죽고 난 뒤에 그 아이가 마치 옆 방에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느껴질 때 나는 누구예요? 애가 없는 내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잠시나마 있는 나잖아요. 그런데 문 열어 보니까 그 아이는 죽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왔을 때에 그 때 아이가 있어서 행복했던 나를 내가 붙잡을 수 없다는 나의 자괴감. 누가 보상해줍니까? 4억? 청와대에서 보상해주면 그 때 다시 나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 때 그 애만 있는게 아니예요.


이런게 참 어려운데 내 방엔 내가 있고 애는 공부하고 있잖아요. 지금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가기 전에 공부하고 있다고요. 내가 그 애를 생각하면 그 아이만 생각하는게 아닙니다. 그 아이가 서울대학 들어가고 공부도 잘하니까 안산에서 제일 공부잘하니까 서울대 법대 나와서 사법고시 합격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이 침대 있는 방에 있으면서 상상을 했거든요. 그럼 내가 죽었다는 말은 뭐냐? 그 아이가 죽음으로서 생길 상상마저 그 아이가 죽음으로서 이것이 한꺼번에 날라갔다는 그 절망감. 그거 누가 보상해 줄거에요? 4억? 4억오천? 이게 보상됩니까? 술로 달래야지요. 술로 달래요.


여자 애인 헤어지고 절대로 맨 정신으로 안 옵니다 남자들은. 꼭 한 잔 걸쳤을 때에 그 자기 옆자리가 허전해질 때에 정문으로 안 들어오고 창문으로 와가지고 술 한잔 먹고 와가지고 너 누구하고 사귀니? 다시 시작하자 이러면서 또 와요. 그것도 술 먹고 와요. 이게 내가 체험한건 아니지만, 있어요. 너 나하고 그렇게 헤이지면 되나?! 데이트 폭력까지는 안 나가지만 그거 왜 그래요? 그 여자가 있던 내가 지금은 없으니까 미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인간이 지금 술 먹고 그런 옛날 여자친구가 안 찾아 올 때가 언제입니까? 새로운 자아가 생산될 때죠. 그 때가 누구냐 하면 새로운 여자를 새로 사귈 때. 안 찾아옵니다. 그때 여자 쪽에서 또 헤어졌네. 저 쪽도 뭐 카톡카톡 해가지고 만날까? 이렇게 나와요. 미쳤나 너랑 만나게?! 그러니까 이게 결국은 본인이 있어요? 없어요? 본인이 없어요. 본인은 어디서 만들었느냐? 지금까지 수집된 모든 기억들이 그때 그 순간마다 자아를 새롭게 생산해냅니다.


자, 그러면 다음 주일날 교회갈 때 앉아있는 자아는 누가 만든거죠? 지금까지 내가 만든 허구죠. 허구적 자아가 몸은 몸이지만 허구적 자아가 앉아 있겠죠. 앉아 있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금껏 내가 주를 위해서 많이 했기 때문에 주님 저 인생 천국 가는거 보장하겠지요? 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이죠. 지금 엉터리 자아를 두고 내가 이 자아 가지고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봉사했기 때문에 그것을 봐서라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피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해달라고 내밀겠지요? 주께서 그 인간 구원합니까? 구원 안하지요. 있어야 구원하지요 있어야. 뭐 자아가 있어야 구원하지요. 자아가 있다고 지금 우기고 있으니까. 내일이면 또 변할 자아인데. 없는 자아거든요.


그럼 주님은 자아를 구원하는게 아니죠. 뭘 구원합니까? 몸을 구원하는 거에요. 몸을 구원합니다. 몸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늙어 죽게 만들어서 구원하는 거에요. 주님의 구원은 지금 벌써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해달라고 안 해도 점점 늙어요. 여기 70대도 계시지만 늙은것을 아쉬워한다는 말은 뭐냐? 아직도 우리는 옛날 자아상에 기초하게 되면 늙는게 아쉬워요. 20대때 이뻤는데 뭐 40대때 잘났는데 뭐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내가 늙어가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내 자아의 일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 나를 손대고 있는 일이거든요. 그렇다면 연세가 많을수록 주님과 가깝겠어요? 멀어지겠어요? 점점 더 가깝지요? 그러면 자랑해야돼요. 아이고 이 젊은것들아 고생 좀 해라.


재림의 뜻이 뭐냐 하면은 재림은 만난다는 뜻이예요. 헬라어 원문에 보면 뜻이 그래요 만난다는 거예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재림. 그래서 이 재림은 어떨 때 용어가 중요하냐 하면은 이 땅에서 환란 중에 있을 때에 세상이 지긋지긋할 때에 나 자아를 만나는게 아닙니다. 이 몸을 변화된 주의 변화된 몸으로 바꾸어주기 위해서 작업 들어오시는 작업하시는 그 보이지 않는 손길 그 손길 위해서 옛 사람은 후패하고 새 사람은 만들어 내는 작업 중에 있어요 우리가. 이 고물 몸을 새 몸으로 교체한다고 지금 주님은 되게 바빠요. 되게 바빠요.


그래가지고 뭐 신장 고장나고 일찍 돌아가시면 그거는 땡 잡은거고. 병원비 안 나가서 좋지요. 가족들 신경 안써서 좋지요. 나는 일찍 죽어서 좋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성경해석은 어떻게 한다? 살려고 하지말고 죽으려고 해석하면 해석 안 되는게 없습니다. 죽으려고 해석하면. 주여 우리 교회 다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될 해석이 없어요.


어쨌든간에 이 교회 살려주옵시고 부흥시켜 주옵소서 이러면 성경해석이 개판이 됩니다. 주여 내가 이 교회 당회장인데 일찍 죽게 하옵소서. 교회고 뭐고 나는 내 평안함, 이 교회 붙드는게 내 평안이 아니고 교회 부흥되는게 내 평안이 아니고 나라는 이 지긋지긋한 허상이 계속 생산되는 것 이 지독한 이 귀신 있잖아요. 내가 나를 만들어 낸다는 것. 곤지암인가? 공포영화도 이런 공포영화 없잖아요. 자고 나면 또 내가 기억가지고 기억의 뭉치가 그것도 수상한 엉터리 기억, 괜찮은 기억만 뭉쳐가지고 또 나라고 우겨야 될 이런 고집스럽게 근사한척 괜찮은척 위선 떨어야 될 이 부담감, 이 위선적인 연기를 언제까지 해야됩니까?


기도를 해도 주여 주여 시계를 보면서 오늘 5분만 더하자. 이게 무슨 기도예요. 참 마지막 잊어 버렸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거 빠질 뻔했다 이래가지고 이게 엉터리지 이게 무슨 기도입니까. 기도를 해도 어설프고 헌금을 해도 가만있어보자 내가 만원짜리를 낸다는게 오만원짜리 잘못 넣은거 아냐? 확인해보고 이게 무슨 헌금이에요? 전도해도 꼭 자기가 좋아하는 이쁜 것 전도하고 못생긴 것은 저리가 지옥가라. 이쁜 것만 전도 ‘혹시 사영리 아십니까?’ 이게 무슨 전도예요? 자기 마음에 드는 것.


모든게 나 괜찮지요? 저 이러니까 더 살아야 될 가치있지요? 이걸 전제로 해서 설교하고 복음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우리 가정 손대지마세요. 남의 가정은 어떻게 되든 우리 가정은 우리 아이는 공부 잘해야되고 이런걸 가지고 그것도 기도랍시고 헌금이랍시고 전도랍시고 하니 이 엉터리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 위주의 평안을 내가 포기를 못해서 그런거에요. 포기를 못해서.


여기 오늘 본문을 보면 환란을 당하나 이렇게 하니까 뭐를 이렇게 또 연출을 하느냐 하면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인위적 환란을 조작해 냅니다. 나 공산당이 싫어요 똑같은 거하고 아이가 철이 없으니까 그런 소리 하는거에요. 공산당이 왔는데 자기가 공산당이 싫다는 것을 그렇게 나댈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이 뭐더라? 이승복 어린이. 아마 동상 있을걸요. 공산당이 싫다 해가지고 순교당한 아이잖아요.


순교는 다른게 아니에요. 내가 봐도 나는 오늘치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는게 그게 순교입니다. 왜? 그게 죽음이잖아요. 순교에 성경의 뜻이 뭐냐 하면은 잠 잔다예요. 잠 잔다. 잠 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잠 잔다 하는거냐면 일을 많이 했을 때 주께서 일을 많이 했을 때 주께서 시킨 일이 있을 때 주께서 안식케하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일하는 것은 이것은 안식에 참여 못합니다. 지옥갑니다. 내가 알아서 하는게 아니고 선교하든 전도하든 내가 알아서 하면 안돼요.


주께서 일을 맡길 때 비로소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죄인이예요. 죄인의 자아가 되요. 죄인의 자아가. 죄인의 자아가 되고 주께서는 이 죄인의 자아를 주님의 임의대로 구원받는 몸이 되도록 그 작업이 나타날 때 그때 우리는 주의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진행 중이요. be동사 +ing예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죄인 것을 알 때 그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이 어떤 뜻이냐하면 내 나름대로의 평안과 몸이 아니고 이 자아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심에 대해서 나는 양보없다가 강렬하게 일어날 때 그게 바로 성도한테는 주의 일을 시작한거예요. 짝대기 가지고 눈밭을 지금 쑤시고 있는 중입니다. 너는 이런 인간이였어. 너는 백날 하나님해도 너는 너 자존심 외에는 아무것도 안 챙기잖아. 그렇잖아. 그게 너의 본래 모습이야.


그러면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무엇을 부르러 왔어요?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럼 죄인 여기 있습니다라고 주께서 쑤셔주면 그냥 죄인 아니고 방긋 웃는 죄인. 들켰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주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분이니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있네요. 죄인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처녀가 동전하나 잃어버렸잖아요. 온 집안 다 뒤집어서 동전 얼마 한다고 그걸 찾고 난 뒤에 얼마나 좋은지 친구 불러서 파티 열었습니다. 비용이 더 나왔을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큰 아들 있었잖아요. 미리 돈 챙겨 가지고 다 떨어 먹은 아들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 탕자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에요. 이 말은 뭐냐 기존적으로 성도라 하는 것은 기존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헛깨비 같은 자아만 붙들고 그것 가지고 그걸 집어넣겠다고 시도하는데 그로 인하여 잘못된 개념 잘못된 용어들을 쓰기 시작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환란을 당하나 내가 이겼다 하니까 의도적으로 환란 받을 짓거리를 하는거에요. 기도할 때 꿇어 앉아서하면 더 환란되고 몸이 아픈데도 일부러 감사헌금하는 겁니다. 일부러. 그런 사람들 참 많아요. 몸이 아픈데 봉투에 제가 체험했다니까요. 일부러 몸이 아프지만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 올라와있어요. 이게 위선 아니고 뭡니까? 몸이 아프면 집에 가서 약 먹어야지 감사가 왜? ‘이거 받아먹고 빨리 낫게 하라’ 무언의 압력을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것인지. 왜 그런 위선적인 누가 봐도 위선적인 그런 행동을 왜 합니까?


그리고 감사헌금할 때 그 감사를 꼭 돈으로 해야 됩니까? 그 마음으로 하면 감사 아닌가요? 감사를 돈으로 낸다는 말은 이미 돈 안내면 감사가 아닌 엉터리 감사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너무 따진다 정말. 그냥 눈감고 지나갈건데. 저는 눈감고 못 지나가겠어요. 진짜 돈 안내면 감사를 못 견딜 때 감사헌금하란 말이죠. 돈 안내고도 감사하려고 하니까 감사가 들쑥들쑥하니 막 가만있질 않고 자꾸 들썩여요.


그렇게해서 돈 조차도 내 돈이 아니고 감사케하신 주님의 돈입니다라는 것을 표시하는 거에요. 나는 감사도 안했는데 주께서 이렇게 감사케 하셨습니다. 나는 시키는대로 할 뿐입니다. 저게 뭐 제 돈입니까 주님 돈이지. 이런 식으로 하라 이 말이죠. 뭐든지 하든지간에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를 위해 하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이죠. 그것은 누가 하게 하십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대목은 이렇게 넘어가겠는데요


결론은 뭐냐 하면은 환란을 임의로 조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자체가 환란이예요. 환란 가운데서 어떤 경우에도 평안하느냐 하면 그 환란 가운데서도 환란인 이유가 바로 내가 있음에 기쁘거든 그게 환란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스데반 집사처럼 내가 어떤 때는 내가 생각이 안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 자체가 평안이에요.


그럼 평소에 성도는 평안 가운데 살아있어요. 그런데 누가 와서 건드리게 되면 갑자기 나가 성립되면서 온갖 또 상상 다하고 이만큼 하니까 어떤 결과가 오겠지라고 할 때 골치 아픈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했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들을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하면 빠질 것이라’ 했지요.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계속 인간의 자아를 자극해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려면 그 믿음을 가진 소유자가 등장해야 되겠죠. 그 소지자가 누구여야 됩니까? 바로 나지요? 그게 너라면 진짜 그게 너라면 네가 그게 믿음의 주인공이 나라면 그래 좋다 그 믿음 가지고 내가 기준을 제시할게. 적정 기준을 제시할게. 이 산을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 하는 것을 내 앞에서 보여봐라는 겁니다.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거기다 뭐를 또 추가하느냐 하면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갈 자가 없다고 하니까 나는 그대로 두고 내가 기도와 금식을 막 추가시키는 거예요. 추가시키면 그 추가시킨 기도와 금식을 어느 정도 얼추 많이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를 그걸 누가 측정해야 됩니까? 내가 측정해야 한다고요. 이만하면 겨자씨만큼 조금 커졌겠지. 그 겨자씨가 이제는 강냉이 씨만큼 커졌겠지. 그만할까 이제? 금식을. 이걸 누가 스탑 걸어요? 누가 판정 걸어요? 내가 판정하니까 그 판정한 입장에서 기도와 금식은 이거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금식과 똑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모든 말씀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의 기도와 본인의 금식 없이는 절대로 산이 뽑혀서 바다에 안 빠집니다. 그러면 내 기도를 어떻게 해요? 내 기도를 가져야돼요? 포기해야돼요? 나 자아에서 헛깨비 같은 자아의 믿음과 소망과 믿음을 포기하면 됩니다. 포기하라고 주님께서 죽여버리죠.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 살게 되면 그건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뭔가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그게 요한복음 16장에 쭉 나옵니다.


그때는 네가 이야기할 거 없이 쉽게 말해서 딱 보면 네가 알겠다. 만약에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궁시렁 궁시렁 이야기 할 필요 없이 그때는 밝히 알리라. 그때는 네가 밝히 알리라. 뒤에 보면 나와요. 25절에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성령을 통해서 딱 보면 아는거죠. 남들에게 설명은 안 되요. 설명은 안 되는데 본인은 알아요.


주께서 일 저질렀지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기도하도록 하셨잖아요. 유도했잖아요. 금식하도록 하셨지요. 이렇게 모든 것을 주의 일에 합류되도록 이렇게 하는겁니다. 그것을 뭐냐 하면 26절에 ‘그날에 너희가 누구 이름으로 구하겠느냐.’ 내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혀를 놀려서 이름을 부르는게 아니고 진짜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나 아니에요 하면서 나오는게 뭐냐 함께 계신 주께서 나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는겁니다.


어쨌든 이 몸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께서 이미 자기의 자신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빌려가신 몸이거든요. 이걸 차압해가신 몸이기 때문에 어쨌든 우리 몸은 우리 몸이 아닙니다. 아니고 하루 잠자고 일어난 것도 주의 몸이니까 알아서 살아있어야 될 때까지 계속 살려주십니다. 취직을 시켜주시던지 누가 일을 하던지 월급 받게 하든지 하여튼 어떤 경로로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살게 하신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은 늘 자아를 죽게 하시는 방식으로 우리 몸을 주님이 다루십니다라는 말입니다. 늘 자아를 죽게 하시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시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걸 몇 시간 동안 알아야 합니까? 하는데 이거는 몇 시간동안 아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소급해서 몇 달이 지나든 몇 년이 지나든 그때는 기억나지 않더라도 어느 한순간에 깨닫게 되면 어느 한순간에 소급해서 다 알게 되는겁니다. 소급해서.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꾸준히 해왔거든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한 집안에 있는 부모나 아버지를 만날 때, 만날 때마다 아버지 이거 해주세요 아버지.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귀찮아해요. 그냥 무심코 하게되면 아버지가 다 받아 넘기고, 뭐 나 누구지? 아버지입니다. 그때만 아버지하지 보통 아버지 아버지 이야기 안하지요. 그냥 이거 이거 하지 주어 호칭을 별로 안하잖아요.


그처럼 함께 살고 있어도 주님을 의식할 때가 따로 있어요. 평소에는 뭐냐하면 아버지 주신 은혜 가지고 평소에 자기 일 하는거에요. 자기 일 하다가 야 여기 너희 집 아파트 넓은데 이거 누가한거야? 아니 아버지가 한거야 라고 아버지라는 이름이 나올 그 타이밍을 아버지 쪽에서 조성해 주십니다. 그 타이밍을. 그러니까 사도들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것을 관계적 뭐라고 했습니까? 수동성. 관계적 수동성. 그리고 우리가 받은 자리는 우리가 마련한 자리가 아니고 주님께서 할당해준 자리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모든걸 하신 그 자리에 우리는 그냥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몸에 지체가 되는거죠.


그 다음에 진도 나가 봅시다. 17장 조금만하고 마칠게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의 이 겟세마네에 계실 때에 기도 주제가 뭐냐 하면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 영화롭게 한다면 제자들의 구원에 대한 내용은 여기에 없습니까? 조건부로 있어요 조건부로. 뭐냐 하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조건에 파생되어서 아들을 영화롭게하는 자로서 구원되죠.


그러면 누구 구원이 빠집니까? 자아의 구원은 여기서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으면 누가 영화롭게 되요? 현재 내 자아가 나 구원받았다 하고 까불까불 대면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지요. 그런 구원은 주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뭐냐? 예수님을 모든 것을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습니다. 심지어 나의 구원도 나의 몫이 아니고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라고 사후에 고백하는 형식으로 우리가 같이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의 우리가 구원해야 될 몫은 그럼 없습니까? 없어요. 그럼 우리는 기도 안해도 됩니까? 그런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걸 자꾸 생각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없는거에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구원받아요? 이게 그 발상이 뭐냐 하면은 평소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추억 속에 꾸준히 내가 나를 이만큼 지켜왔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었다는 기존의 내 추억의 다발들이 지금의 자아를 성질을 그렇게 드럽게 만들어 놓은겁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하게 되면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그러면 이목사님 말대로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요 이러거든요. 여러분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요 지금.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안한다는 것이 아무것도 정말 믿음 좋으면 뭘 해도 아무것도 안한게 해당되거든요. 왜냐면 주께서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게 혼자 있으면 주님이 없고 혼자 있으면 바로 그런 질문이 나오는거예요.


왜 혼자 있느냐? 평소에 혼자서 살았기 때문에. 참 혼자 사는 사람들 보게 되면 누구를 소개 해줘도 결혼 못해요. 버릇이 혼자 사는 버릇이 되가지고. 자기밖에 몰라. 당신 나한테 해줄게 뭐있는데 이렇게 나와요. 혼자서 했기 때문에 나는 거뜬히 나 혼자 살아왔는데 구태여 네가 끼어들 이유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네가 나하고 결혼하려면 현재 내가 꾸준하게 내 방식 있잖아요. my way. 내 방식대로 사는데 거기에 기여한다는 조건하 같으면 내가 봐줄게. 내 머슴으로 취직시켜줄게 이런 경우에만 혼인이 성사됩니다. 하되, 혼인신고는 안 된다. 안 되고 그냥 동거는 될게. 이런 식으로 또 찢어져야 되니까. 요새 얼마나 약았는지 미쳤다고 혼인신고 해요? 법적으로 골치 아프니까. 통장도 따로 쓰는 마당에 뭐 때문에 결혼을 합니까? 그렇게 딱 한단 말이죠.


그런 버릇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를 구원한다 하면 제가 뭐한게 있습니까? 혼자 사는 버릇이 있어가지고. 예수의 피를 믿습니다 아! 저 손들고 믿겠습니다. 이런다고요. 그런 행세 혼자 사는 행세가 예수 믿어도 그 행세가 달라지지 않아요. 누구 자리입니까? 꾸준히 자기 추억의 다발이에요. 자아를 굳히기, 자아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100% 가짜입니다.


죽기 싫어요. 지금껏 나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해 왔는데 죽기 싫어요. 뭘 포기 못해? 내 영광을 포기 못해요. 내 위신과 내 체면과 내 자존심을 포기 못합니다. 내 자존심 안에 뭐가 포함됩니까? 내 새끼 내 남편 내 아내 다 들어 있어요. 이거 내 바운더리예요. 이거 건드리면 하나님이라도 용서가 안돼요. 남의 이야기하는거 아니죠 지금? 지금 우리 이야기 하는거죠?


주께서 말씀을 볼 때 바로 주께서 모를 때는 우리는 주의 은혜라고 하지만 주께서 막상 짝대기 가지고 눈밭을 헤치게 되면 내가 몰랐던 이러한 나 위주의 근성이 꾸준히 죽을 때 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주께서 죽이시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 주께서 어떻게 죽입니까? 몸을 늙게 하면서 서서히 죽음으로 서서히 죽게 하시는데 몸만 늙으면 뭐도 같이 변화될까요?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뭡니까? 자아도 같이 거기에 자기 늙는데 정당하다는 식으로 자아의 변신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내가 70이 돼서 아무것도 안하지만 옛날에 참 주의 일 봉사 많이 했다 해가지고 하여튼 노년에 가면 주로 하는 이야기가 과거 이야기해요. 내가 자식 둘 있는데 하나 의사 만들고 또 하나 의사 만들고 쌍의사 만들었다. 둘이 의사되니까 며느리도 의사 우리 집에 의사가 4명이다. 이게 자아가 구성하는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돌팔이라고 하면 화내지요.


왜냐하면 이 자아를 자아가 성립되게 되면 여기에 내가 우리가 죄인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옵니다. 죄인은 뭐냐?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거예요. 나의 자존심과 나의 명예와 위신과 체면과 의미와 내 모든걸로 살지요. 이걸 우리가 싫어하지 마세요. 주께서 지금 짝대기로 눈밭을 쑤시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는 이걸 거쳐야 비로소 우리는 그 때 떠났고 주께서 찾아오심이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니 이런 더러운 육이 얼마나 감사한지 마지막에 기쁜 소식 나오는데 성질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고치지 마세요. 고치면 마귀에 시험들어요.


이게 우리가 손도 못 댈 우리의 본성이니까 본성 그냥 가고 손을 대도 누가 대야 되요? 성령님이 손대는 대로 하세요. 그럼 성령 안 받았다고요? 안 받으면 할수 없지. 안 받은 그거는 나한테 묻지 말고. 성령께서 여러분 성깔대로 막 산다는 복음이 또 나오는데 그냐 막 사세요. 주께서 성령받은 사람 이 모든 구조가 구성을 이 구성이 나올겁니다. 구성하니까 홈쇼핑같은데 이 구성 날마다 오는 구성아니에요. 이 완판됬어요 이 구성. 이 구성 그대로 유지하셔서 죽을 때도 나 죽고 난 뒤 자식들 해라! 이러한 치매현상 맘껏 보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책임질 필요도 없고 책임지지도 않는 날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천하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를 십자가 피 아니면 왜 구원될 수 없는가를 오늘도 앞으로도 확인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16장 32절(통합된 고백)180417b-이 근호 목사.hwp (71.5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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