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8-05-26 19:22:42 조회 : 877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예수님의 옆자리)180515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21.165.203.222)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예수님의 옆자리)180515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7장 2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지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입니다. 이런 기도할 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 할 때 어떻게 기도했느냐 하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그렇게 흘렀다 했지요. 그런데 막상 이 내용보면 그렇게 애 안 써도 술술 나올 내용인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못 보고 뭘 빠트리고 있어서 이 내용을 하는데 그렇게 땀방울 핏방울처럼 그렇게 애씀이 필요할까라고 생각하지요.


예수님의 그 모든 생애를 감성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입니다. 딱 한마디로 이거예요.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 자체가 고통이죠. 하늘의 영광을 포기 했거든요. 지상의 하늘의 영광을 포기한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뭐냐 하면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데 그냥 막연하게 죽을것 같으면 그냥 뭐 번개탄 피워서 자살하면 되요. 그런데 죽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생겨야 될 모든 고통을 자기 쪽으로 다 칭칭 감고 수렴한 채 돌아가셔야 되요. 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이 그냥 말이 아니라 온 육체로서 몸소 그걸 다 자기로 집중이 되어야 해요. 그야말로 지옥의 고통이죠. 그걸 이제 성경에서는 저주의 고통이라고 하는데 저주라고 하는데 그 저주의 고통을 온몸으로 다 자기를 향하여 다 끌어 오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 그 고통도 같이 동반해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올 때. 십계명 같은 율법이 올 때. 그러면 우리는 뭐 지킬만하면 지키고 바쁘면 못 지키고 뭐 편할 때 지키지 이렇게 하는데 온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게 되면 모두 위반한게 돼요. 모두 위반한게 된다면 율법이 제공하는 그 징벌, 그 징벌을 우리가 마땅히 다 받아야 돼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삼척에 가면 은총교회라고 아주 작은 교회 있는데 그 교회에서 얼마전에 가스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가스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그 지역에 와서 착한 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선한 일을. 어려운 사람 돌보고 그 교회 관계없이 방과후 공짜로 애들 가르쳐 주고 이렇게 해서 좋은 신망을 얻은게 교회인데 그 날도 사모되시는 분이 애들 주일학교 애들한테 호떡 구워준다고 가스를 틀다가 가스가 샜는지 어떻게 폭발해서 사모는 전신 3도 화상 애 하나도 전신 3도 화상 그리고 9명 아이가 2도와 1도 화상 당했고 그 중에 안 믿는 애들도 많이 있고. 교회는 교인수가 적어서 거의 자립이 안 되는 교회. 그래서 여기 성심병원인가 거기서 하는데 치료비가 3억, 들어가는 것만 3억이랍니다. 그리고 전신화상이예요. 그것도 3도.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남편은 마침 출타중이라서 남편은 뒤늦게 왔는데 그 화상 입을 때에 고통이 보통 아니거든요.


자, 우리가 그 가스 틀어서 화상 입은 사모 당사자라 생각합시다. 그럴 때 그 입장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통을 주십니까? 내가 무슨 죄 짓는게 있는가를 다 끄집어 낼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끄집어 내도 전신 3도 화상에다가 치료비 한 푼도 없는데 3억이라는 치료비를 앞으로 계속 나오고 더 곤란한 문제는 불신자 가정에서 소송이 들어오거든요. 안 믿는 가정에서 우리 애가 몇 살 때까지 살 때까지 모든 생활비까지 다 내라는 소송이 들어왔다 이 말이죠. 교회를 상대로 소송하겠지요.


그러면 이것은 감당이 됩니까 감당이 안 됩니까? 감당되지 않지요. 이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가 보통 아프다 고통하면 제일 먼저 뭐냐 하면 이 고통이 왔지만 내가 보다 더 착한 일하고 하나님 섬겨서 고통이 없는 식으로 이걸 극복하거나 좀 줄이는 방향으로 좀 면제되는 방향으로 내가 한번 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져요. 고통은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는게 아니고 고통이 오게 된 것은 여기 반드시 고통의 원인이 있는데 나쁜 일을 했을 때 나쁜 짓을 했을 때 거기에 합당한, 걸맞는 그러니까 이게 용량이 얼추 비슷한 나쁜 짓의 비슷한 고통이 주어지게 된다 그러니 고통이 왔을 때는 뭔가 신호가 되고 이거는 징벌이 되고 징계가 되고 정신 차리라는 어떤 싸인일 수도 있고 그래서 이걸 계기로 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보다 그 보다 잘 살았지만 바르게 살았지만 보다 잘 살도록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들을 고통 중에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욥기에 보면 고통은 이게 뭐냐 하면 감당이 안 됩니다. 감당 될 수가 없어요. 우리 이 점을 사람들이 몰라요. 예수님에게서의 영생은 고통이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보는 영생은 신나는 겁니다. 와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 영생 기분 좋다. 우리는 기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요. 영생의 내용이 뭐냐를 이렇게 풀어볼 생각을 안 해요. 영생이라는 그 결과물만 홀딱 내가 이렇게 마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 수박이 너무 맛있다. 아 진짜 맛있거든요. 수박이 찢어지는 아픔은 몰라요. 그 당분을 내가 마시면 난 기분 좋은 거예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공짜로 영생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다가 뭘 붙이냐 하면 그걸 가지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야~ 진짜 사랑의 하나님 진짜 멋있다. 공짜로 막 주고 우리를 거의 아는 구절 있죠.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그 구절 있잖아요. 상투적인 구절 성경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 구절을 도입해가지고 영생을 구매하는데 있어서 장애되지 않도록 방해되지 않도록 순수하게 하도록 여러 가지 성경적 단어를 갖다가 여기다가 앞뒤에다가 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영생은 바로 고통이었습니다. 그럼 이 고통은 예수님이 거부할 수 있느냐. 거부하면 영생이 없어요. 그래서 고통이에요. 고통이 율법의 징벌이 저주가 너무 아프잖아요. 그런데 아프다는 이유 때문에 그걸 피해버리면 영생이 날아가 버린다니까. 영생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영생을 얻겠다고 이 저주를 받아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기 감당이 안 되지요. 감당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도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이죠. 아버지 뜻으로 이 잔을 마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어요. 왜 아버지가 없느냐 하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자리에 아버지가 나와요. 아들이 아닌 사람은 아버지가 없다 이 말이죠. 인간들이 믿는 신들은 다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건 전부다 우상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앞에 어떤 형상을 붙여도 전부 다 우상이에요. 성령께서 오셔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할 때 예수님에게만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외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유대 사회에서 봤던 그 여호와는 뭐냐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냥 상상의 관념적인 철학적인 신들이죠.


예수님만이 아버지가 알고 다른 사람은 아버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을 부여하니까 비로소 성령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때에 그 전에 내가 알던 하나님은 이거는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받아들이게 돼요. 망상이었다. 그 이러한 끊어진 것을 이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감당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것은 감당되지 않는다면 이 고통을 면제해 보려고 좀 줄여보려고 모든 한 모든 시도는 다 헛된 시도가 되는 겁니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고통이 왔을 때 이 고통이 너무 참기 힘들어서 아까 제가 이야기 하다가 말았습니다만 욥같은 경우에 욥이 고통이 오니까 욥은 가만있었어요? 감사했습니까 ? 아니면 하나님께 분풀이 했어요? 화를 냈습니까? 욥이 그만큼 두꺼운 이유가 뭐냐? 그 두꺼운 내용 하나하나 전부다 차츰차츰 하나님께 대드는 그 고통의 신음소리가 그렇게 욥기의 내용을 차곡차곡 채웠잖아요. 그 욥이 내뱉는 고통 속에 모든걸 내뱉을 때 이것은 일종의 인간을 하나의 그릇으로 보면 그 안에 내용을 다 긁어내는 거예요. 다 쏟아내는 그릇에서 쏟듯이 다 긁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욥이 그 당시 인간의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대표자가 되어서 내가 미처 모르는 내 안의 어떤 것들이 어떤 성격들이 들어있는지를 욥이 대신해서 그걸 전부다 다 드러내 보여주는 겁니다. 쭈욱 이렇게 나열하는거예요. 이런 저런 것 쭉 나열했지요. 자, 그렇게 나열했을 때 나열하니까 어떻게 욥이 좀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고통이 좀 수그러졌습니까? 어떻습니까? 전혀 차도가 없지요? 전혀 차도가 없어요. 이게 바로 중요한 겁니다.


고통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차도없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차도가 없는 또는 달라지지 않는 속성이 곧 누구다? 자아다. 나다. 나다 이 말이죠.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 다니고 아무리 해도 인간은 어떤 짓을 해도 그 짓이 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욥이 대신 다 보여주는 겁니다. 욥이. 그런데 이 욥은 그 당시 무엇과 대조되느냐 하면은 욥의 친구와 대조가 되요. 욥의 친구한테는 고난이 안 왔잖아요. 그 고난이 안 오니까 요즘말로 하면은 그들은 배부른 소리하고 있습니다. 이 배부른 소리를 분석해보는 거예요. 욥 하나에 친구가 네 명 달라붙지요? 그러면 마지막 엘리후 빼놓고 욥 하나에 앞에 있는 친구 세 명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들이 내뱉는 신학이 어떤 신학이냐를 분석해 봐야되요. 욥의 친구들이 내뱉는 신학이.


욥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욥보고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친구가 잘못되었으니까 그 친구의 죄를 위해서 욥이 네가 대신 재물을 드려서 욥의 친구들의 죄를 용서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결론을 미리 알았으니까 그걸 가지고 욥의 중간 지점에 친구 나오는 지점부터 하나하나 거기에다가 대비를 해보는 거예요. 대비를 해보면 소위 욥의 친구들이 내뱉는 그 신학이 뭐를 모른다? 하나님도 모르고 배부른 자의 소리, 망상이죠 망상.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자기 자신도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내뱉는 그런 신학들이 나옵니다. 그 신학이 무슨 신학이냐 하면은 바로 악마의 신학이죠.


자, 악마의 신학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첫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한다예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요. 악마가 하나님을 하나님인줄 알지요? 야고보서 2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한 분인줄 아느냐? 마귀도 그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두 번째 신학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런 나부터 출발해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나는 하자가 있다 없다? 나는 잘못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잘못이 없다가 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잘못이 없다. 잘못이 없다 부터 나오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선과 악이 나옵니다. 선의 리스트가 쫙 나와요. 이렇게 이런 이런 것이 선이다. 그중에 하나가 악마의 신학 중에 하나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게 빌닷의 이야기에 나오지요. 그 다음에 선은 이렇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악은 이렇다고 쫙 나열해요. 이걸 오늘 식으로 하면 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이 나와요. 어디서? 배부른 자의 소리에서. 욥의 친구에서. 이게 쭈욱 나와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세 번째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선을 했으면 뭘 받느냐 하면은 보상을 받고요 악을 했으면 뭐냐 하면은 징벌을 받아요. 이게 악마의 신학입니다. 이게 배부른 자의 욥의 친구의 신학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정리된 본인의 신학을 가지고 누구한테 적용시키느냐 하면은 바로 욥에게 욥을 질타하고 욥을 공격하는데 이 신학을 그대로 동원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욥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전체 주제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뭘 안다? 인간들은 누굴 안다? 네모를 안다. 뭘 안다? 인간들은 신을 알고 있다고 내부적으로 자기 내부로 그렇게 주장한다죠. 신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이 신으로부터 나온게 뭐냐하면 아까 세 번째에도 나오죠.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윤리와 도덕이에요. 그리고 이 신과 윤리 도덕을 이어주는 중심에 누가 있다? 본인들이 있는 거예요 본인들이. 이 본인들이 완벽하다고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나는 행동이 완벽한게 아니고 뭐는 완벽하느냐 하면은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악이라고 구분할 줄 아는데 완벽하고, 그 다음에 선을 행했으면 보상이 되고 악을 행했으면 징벌받는다가 그걸 아는거예요. 그럼 이걸 하나의 뭐로 보느냐 이걸 하나의 체계, 프레임이라고 하는데 또는 구조. 구조라고 봅시다.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봅시다. 이 구조를 이렇게 했지요.


그러면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면 되겠지요? 그렇죠?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면 누구한테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게 사람들은 선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윤리 도덕을 기본적으로 집어넣고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예수 믿기를 집어넣어요. 예수믿기. 나는 예수를 믿는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보상으로 어디 간다? 천국 간다가 됩니다. 길에서 만난 구원파들이 뭐라고 합니까? 구원받았습니까? 묻지요? 구원받았느냐 묻는 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기는 있는데 우리가 전하는 정보가 부족해서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욥기에 있어서 욥기에서 이 구원 문제가 욥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은 이런게 참 제가 설명하면서도 어려운데 욥이 아까 누굴 위해서 제사드린다고 했습니까? 욥이 욥의 친구를 위해서 그게 아니야 그건 엉터리야라는 행위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져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정보를 내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는데 성경을 누가 알려주는 그 정보를 내가 습득하고 확보해서 구원 얻는게 아니고, 누군가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등장해야되요. 내 앞에. 나 말고 내 앞에. 누군가 억울한 사람 등장했고 그 억울한 분의 고통과 고난 받은 그분이 그 다음에 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서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죄사함의 제사를 드려줘야되요. 아 복잡해요.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입니까? 나빼고 얻어진거예요. 나빼고 얻어진거예요. 따라서 이 말은 뭐냐? 나는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는 권리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그런 권리가 없어요.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지 아들도 아닌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나설 문제가 아니에요.


자,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이제는 실습에 들어가보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욥의 친구들한테 이야기 해본다 칩시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는 구원될 자격도 없었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위해서 이미 씻어줬습니다 라는 이 이야기를 욥의 이야기를 가지고 욥의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해보자 이 말이죠. 욥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이게 무관한 이야기라고 훼방을 놔요. 하나님의 존재하심.


왜냐하면 방금 내가 어떤 누구하고 욥이 고난받고 죄씻는다는 것은 이게 기능의 속한 문제지 존재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계시다 이게 문제가 아니고 계신 분이 이 땅에서 뭔가 뭘 했던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존재함 자체는 전혀 이거는 구원하고 상관이 없는거예요. 욥의 친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어쨌든 저쨌든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맞잖아. 그건 내가 인정하잖아. 이렇게 되요.


두 번째 보게되면 신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기에 나는 반드시 구원 받을 그런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한데서 보상 받아 버리면 이게 윤리적으로 모순이 되어 버려요. 뭔가 한게 있어야 보상이라는게 의미가 있지. 한 것도 없는데 보상 주어진다 하면 이거는 좀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는 오류에 빠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뭔가 해야 되는 거예요. 뭔가 하는데 예수 믿어주기라는 착함을 누가 한다? 내가 그걸 믿는다는 행함을 행할 때 비로소 보상차원에서 주어진다 이게 그들에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왜? 나는 나의 행함에 대해서 나한테 문제 있다는 생각을 이 사람들은 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못 해봐요 근원적으로. 좋으나 싫으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 인생 살지 못나도 내가 내 인생 알아서 잘나도 내가 알아서 한다이지 못나고 잘나고 내가 나한테 손 댈 권한 없다는 말을 도저히 우리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럼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지옥가면 어떠냐 하잖아요. 성경자체가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지옥만 가야돼요. 이게 내 뜻이 아니고 아담의 뜻이거든요. 아담이 범죄할 때 이미 모든 인간은 죽었잖아요. 죄로 인해 죽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지옥만 가야돼요. 그리고 더 이상을 욕심내면 안 돼요.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거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갈라디아서 3장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저주 받아야 되죠. 저주 받아야 되면 저주 받을 값을 해야지 왜 딴 소리 나오느냐 이 말이죠. 못 지키면 지옥가는게 당연한데 왜 좋은데 보내주세요 라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신이 달라서 그래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나 잘났다에서 파생된 하나님이에요. 나 훌륭하다에서 파생된 하나님, 나는 완벽하다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훌륭하다에서 파생된 하나님이에요. 무슨 수로 이걸 바꿀 수 있습니까? 잘났다는데. 나한테 하자가 없다는데 이걸 무슨 수로 바꿀 수 있습니까? 못 바꾸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사람들은 악마가 시키는대로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둘둘 감습니다. 교회와서 윤리 도덕 이야기만 뽑아서 들어요. 이 말은 뭐냐 결국은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홀로 있다. 이게 문제입니다. 사람은 홀로 있어요. 혼자서 구원 방법을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어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인간은 혼자 있어요. 혼자 있으니까 필요한 것들을 갖추기 위해서 뭐로 감느냐 하면은 율법으로 감아요.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혼자 있는 여기를 이게 만약에 구리라면 자석이라면 구리로 감는 거예요. 전기 생산 되겠다. 자석에다 구리를 징징 감는거예요. 전자석이죠.


사람은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자기 잘난 맛이 둘둘 감아져 있어요.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잘난 맛이. 만약에 두 사람이 이렇게 카페에 모였다. 그냥 모인걸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둘 감았어요. 여기서 자기 첫째딸 이야기 나오면 첫째 아들 나오죠. 우리 딸내미 유학 갔다하면 나는 우리 아들 셋 다 의대 다닌다. 우리 남편 한달 얼마다 나는 얼마다. 전부 이렇게. 몇 평 산다 몇 평 산다. 이게 나와요. 둘둘 감았다니까. 그런 이야기 왜 하느냐. 이게 다 착함의 보상으로 주어진거예요.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신께서 이런 보상을 줬으니까 너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느냐? 서로 대조하고 대결하고 비교하는거예요. 자기 의가 많은 사람한테는 그만큼 보상이 많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자기가 한 짓이 더러우면 주께서 전능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전부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욥의 친구에서 나온 이야기예요. 욥의 친구가 하는 이야기예요 욥의 친구가. 우리 친구가 아이가 이 친구. 욥의 친구가 하는 말이 욥아 네가 그렇게 아픈 것은 네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 이건 욥을 위로하는게 아니예요. 자기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는 그만한 고난을 안 받았으니까 나는 너보다 항상 정당하게 살았다는 것을 이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티를 내는구나. 지금 자기 자랑하고 있는거예요.


처음에 다시 돌아가서 처음에 예수님의 영생은 뭐라고요? 고통이에요. 이 땅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심지어 예수님도 감당 못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넘어가게 하옵소서. 그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율법 100개중에 99개 지켜도 소용없습니다. 하나 어기면 지옥가요. 우리가 지금 사태 파악을 해야됩니다. 지금 천당 가는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역사라는게 있어 가지고 역사책에 기록됐지만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세상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져야돼요. 예수님의 고통을 가지고 세상을 다시 봐야 됩니다. 십자가를 다시 봐야돼요.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다시 봐야돼요. 나 살아있다 예수님 살아있다 같이 맞먹을 생각하지 마시고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음으로. 예수님이 저주 받음으로 모든 인간은 다 지금 다 사는게 저주예요.


다시 그 삼척 은총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제가 만약에 그 사모한테 찾아간다. 찾아갈 때 빈손으로 찾아가면 욕 되게 얻어먹겠죠. 3억 나왔다는거 뻔히 알면서도 위로금 봉투에 조금 넣어가지 그냥 빈 손갔다. 그러면 그 사모나 목사한테 우리가 해줄 말이 뭐가 있습니까? 손 만지는척 하면서 해야죠. 참 훌륭하십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내가 화상 당해도 마땅함을 당신이 대표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어디 나오냐 하면은 바로 누가복음에 나와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지요. 그거 왜 죽었게요? 왜 죽었습니까? 뒤에 주님의 해설 붙지요. 망대 넘어져 죽은 사람, 요새 말로 하면 세월호 빠져 죽은 애들 그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네가 저 사람보다 죄가 없는 줄 아느냐?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세상을 똑바로 보지 아니하면 너도 이 꼴 된다는 거예요. 너도 똑같은 저 꼴 이 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18명 왜 죽었습니까?


정답은 그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앞당겨 보여주는 거예요.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축하드릴 일입니다. 축하드릴 일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고통의 세계거든요. 저주의 세계이기 때문에 주의 뜻에 의해서 저주에서 빨리 빼내줬으니까 축하할 일이죠. 제대 빨리 했으니까. 마르다 마리아 오빠 이름이 뭐지요? 나사로.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누가 화내느냐 하면은 마르다 마리아가 화를 내지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 울었습니다. 왜 화를 냅니까? 그들은 살아있어야 이게 자기의 가치에 부합된다고 보는 거예요. 지금 우리를 죽이는 것은 두 번 죽이는 것이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를 죽이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섬겼던 거기에 합당한 대우가 아닙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지금 마르다 마리아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래오래 사시는 분이십니까? 지금 이 땅에서 저주 받고 죽으시는 분이예요? 예수님 자신이 저주 받고 죽으신 분이예요. 그러면 영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가신 길에 있지요. 노선이 달라요 노선이 달라요. 오늘 동대구역에서 수서까지 오는데요 아 오늘 가슴아픈 일이 있었어요. 이때를 위함인지 모르겠습니다만 70 한 80가까이 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있어요. 몸이 굉장히 불편해요. 그래서 참 기차 여행이 힘들거든요. 계단 올라갔다 내려갔다 힘들다 이렇게 했는데, 그냥 내가 기다리면서 책보고 있었는데 언뜻 듣기에는 안내양하고 이야기 하면서 안내양이 당부를 해요. 13번 거기에 가서 타세요 라고 했어요. 내가 13번으로 들었어요. 있는데 보니까 12번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13번은 새마을이고 12번은 SRT인데 거기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뭣도 모르고 가는데 오지랖이 있어가지고 남의 일에 간섭한다 해가지고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 가지고 물었어요. 저 할아버지 새마을 탑니까? KTX탑니까? 자기는 새마을탄대요 그러면 이쪽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하는데 벌써 기차가 왔어.


제가 그걸 뭘 느꼈느냐 하면은 갈 길이 달랐다. 내가 세상 사람을 볼 때 이 세상사람보고 외치고 싶은 것이 그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착해서 보상받아서 가는 그 길은 지옥가는 것이지 천국가는 길이 아니예요. 천국 가는 길은 주님 가신길이 천국가는 길이예요. 주님은 이 땅에 어떻게 통과했느냐 하면은 이거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계속 기어들어 갔어요. 그러면 목사님 저보고 고통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까? 어느 누구도 못해요. 감당해봤자 못해요. 감당이 안돼요. 그래서 즐거운 겁니다. 복음이 가벼운거예요.


만약에 이 율법으로 칭칭 감아 버리면 율법 칭칭 감으면 조금만 집안 일 잘못되고 안되면 이거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 해가지고 더 선한일 자기가 생각하는 욥의 친구들 선한 일을 총동원 시켜서 빨리 옛날에 그 손해를 만회해가지고 부도난거 만회해가지고 다시 나봐라 나 착하니까 이렇게 복 받았잖아 그것 자랑하기 위해서 하다 보니까 이게 뭐냐하면 스스로 악마에게 약점을 노출해버리는 거예요. 혼자 사니까. 율법으로 하니까. 악마가 주는 저주를 주는 그 율법을 자진해서 자기가 요청을 해버려요. 그래 가지고 교회가 뭐하냐 하면은 목사 설교 들으면서 목사 설교에서 뭘 뽑느냐 하면은 내가 선할 수 있는 요소를 다 뽑아요. 다 뽑고 이거 이번 주 내에 이거 다해가지고 다음 주 올 때는 지금보다 더 괜찮은 인간으로 자랑거리를 내세울만한 그런 보상받은 티를 내면서 교회오고 다음 주일날 하고 싶은거예요. 가는 길이 뭡니까? 가는 길이 새마을호. 그거는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지옥으로 가고 있는거예요. 그런데 배운 가락이 이것밖에 안 배웠어요. 배운 가락이.


왜냐하면 세상에 살다보면 세상에 신이 있지요. 세상 신이 뭐예요? 고린도후서 4장에 이 세상 신을 뭐라고 합니까? 악마 아닙니까. 악마가 세상 신이예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누구한테 일임했어요? 악마한테 일임했기 때문에 악마이름이 세상 신이예요. 그럼 세상 신이기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누구한테 양육받았습니까? 세상의 같이 살기 위해서는 누구의 방식을 내 방식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어요? 마귀가 시켜주는대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둘둘 감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런 원칙과 이런 자세로서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간다는 거예요. 지금 지옥 갈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럼 천국 간 사람은 있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간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그 다음에 뭡니까? 만민을 다스리는 그 다음에 뭐죠? 권세죠. 이 권세는 우리의 권세가 아니고 외부에서 주어진 권세지요. 권세가 동원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우리가 개과천선을 할 수 있다 없다? 안되죠. 배운 가락이 그것밖에 없어요. 배운 가락이 마귀가 가르쳐준대로 이 땅에 사는데 적합한 방법만 우리가 알고 있어요. 이 땅에서 오래살기 남기위한 필요했던 모든 요령과 재주는 다 갖고있어요 우리가.


어려울 때는 기도하면 되고 뭔가 돈에 욕심내지만 헌금을 하게 되면 자식대대 복을 받고 모든 것이 잘되는 거예요. 그 잘된다는 것이 잘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이에요. 잘된다하고 같은 말이 뭐냐? 안정적이다. 안정성이 있다. 그러면 가장 안전적인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게 뭐겠습니까? 한자로. 돈이잖아요. 돈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로또됐는데 울고불고 난리난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돈 되기 위해서 애들 교육시키고 유학 보내고 가정교육시키고 다 하잖아요. 행동 똑똑히 해라. 똑똑히 하면 대기업 간다 이런 것.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어 돈이 안정감을 줘요. 이 방식이 누구한테 배운겁니까? 바로 이 세상 신 악마한테 이걸 배운거예요. 악마한테 배운 심성을 가지고 어디 갑니까? 교회가요. 교회가서 기도내용부터 해가지고 모든 헌금부터 모든 봉사에 결국 우리가 은근히 뭘 노리느냐 하면은 이렇게 할테니까 우리로 하여금 안전빵으로 이 세상 안전하게 사는데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돈 좀 아슬아슬하게 주지 마시고 좀 이렇게 편안하게 여생을 여유롭게 연금도 좀 많이 이렇게 되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하고 할 뿐이예요. 그리고 교회가서 봉사했다하면 그 보상은 돈으로 환원되어서 오기를 바라지요.


그러면 교회에서는 목사는 이야기 합니다. 마음을 낮춰야한다고 그러면 교인들은 마음 낮추면 돈주십니까? 마음 낮추면 돈 주십니까?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돼. 그럼 주를 위해서 고난 받으면 돈 주시겠습니까? 인간이 달라질 수가 있겠어요? 없어요? 안 달라집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바로 혼자 살지 말고 같이 사는 거예요. 같이 사는 것. 우리를 뭐라고 하느냐 성도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지요. 여자의 위치는요 그냥 여자 혼자 여자 위치를 챙기지 않아요. 누구의 옆자리가 여자 자리예요. 누구의 옆자리 맞지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나오니까 누구의 옆자리가 여자예요. 우리는 신부잖아요. 우리가 신부가 되려면 우리의 옆자리가 권세자가 우리의 옆자리가 되어 있어야 되요. 그분이 갑이 되고 우리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안 되느냐. 모든 권세를 우리한테 준게 아니고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께 다 줘버렸잖아요. 줘버렸으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악마의 속성 자체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법 지켜서 착해서 착함에 대한 보상으로 잘되고 만약에 조금이라도 우리가 자세가 흐트러져가지고 실수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징벌 때문에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느니라 해가지고 징계받아갖고 뭐 그런 식으로 산다. 전부 논리가 선악 논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못 고칩니다. 죽을 때까지 못 고쳐요. 그러면 우리의 자리는 혼자 있는게 아니니까 신랑되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바꿉니다. 바꾸는데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은 그 바꾸는 방법은 우리가 그릇이라면 그릇에서 우리의 속성을 끄집어내요. 주께서 권세니까 모든 사태죠. 모든 사태를 주셔가지고 다 끄집어내요. 아까 제가 고통이라고 했는데 여러분한테 문제를 한번 내볼께요.


자, 아까 은총교회 사모 3도 화상 전신화상 입원비 3억 지금 당한거에 플러스 알파, 이게 고통스럽니까? 아니면 내가 물어볼테니까 그때 답변하세요. 제가 옛날 영주 동부 교회 전도사로 있었는데 거기에 과장이 과장이 일이 뭐냐 코카콜라 영주 영업소 과장이었습니다. 그 사람 항상 교회 올 때 항상 얼굴이 시커매요. 왜 시커멓냐 하면은 밀어내기 하기 때문에. 밀어내기가 뭐냐 하면은 공장에서 코카콜라 만들잖아요. 그러면 영업소에다가 강제로 떠맡겨 버립니다. 팔리든 안 팔리든. 우리가 아는 상식은 뭐냐? 영업소가 코카콜라를 팔고 오! 몇 병 안 남았네? 전화해가지고 몇 병 보내주세요. 이렇게 해가지고 이거 팔고 수수료 얼마 먹고 이게 우리의 상식인데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계속 줘가지고 이거는 코카콜라도 마찬가지고 몇 년전에 있었던 요플레 그것도 마찬가지고 몇 일전에 뉴스에서는 된장, 된장도 마찬가지예요. 영업소는 팔리든 안 팔리든 네가 알아서 그걸 네 돈으로 사든지 모르겠고 무조건 밀어내게 해요. 그러면 이거는 어쩔 수 없이 안 팔리면 자기가 그 돈 주고 사야돼요. 마찬가지예요. 다단계가 아닌 것처럼 다단계같은. 정수기.


자, 제가 묻는 질문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고통스러울까요? 같지요. 정답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제일 고통스러워요. 내가 하는 일이 제일 고통스러워요. 어떤 노동자들 데모하더라구요? 데모한다고 임금체재 임금도 안주고 이렇게 잔업시키고 데모하는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렇게 힘들면 네가 부장해봐라. 자기가 한번 부장해보지요? 더 힘들어요. 사람은 얼마나 모든 일이 힘들면 10년 20년 해보지 아니하면 손에 이렇게 숙달되지 않으면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힘듭니다. 모든 인간은 다 힘들어요. 심지어 가정주부도 놀러다니는 가정주부도 골프치러 다니는 가정주부도 힘들어요. 홀인원 안 될까바 다 힘들어요.


왜냐? 이 세상 자체가 힘들라고 만든 세상에 살기 때문에. 다 같이 힘듭니다. 힘든데 중요한 것은 힘든 것을 벗어나는 그 방식이 주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바로 마귀적인 방식들이 이 땅에 회자되고 있고 서로 유통되고 있고 통과되고 있습니다. 네가 당한 이 저주를 벗어나려면 우리에게 오너라. 우리에게 와서 기도 좀 하고 하게 되면 헌금 좀 하고 하게 되면 너는 앞으로 전에 잃었던 것 다 보상 30배 60배 다 보상해주고 다 해준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그거 보이스피싱입니다. 그거 완전 사기꾼들이예요. 이 땅에서는 우리 어떤 경우라도 고통은 우리에게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길을 가게 만들어요. 뭐냐 하면은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졌던 십자가가 죄는 죄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하면서 십자가가 이게 가슴 쓸어내면서 아이구 다행이다. 이 다행이라는 이 기쁨을 성령을 통해서 점점 더 주시는 겁니다. 그거뿐이에요. 이런다고 살림살이 더 나아지는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살림살이 나아지는게 아니예요. 지금 바꾼다고 더 편해지는 것도 아니예요. 아무리 재미난 일도 몇 개월 하게되면 전부 다 식상해요. 시들해지고요 해봤다가 꽂꽂이 해봤다가 난 쳐봤다가 뭐 그 뭡니까? 다도? 그거 해봤다가 시간 때우고 싶어가지고 때울거 없나 싶어서 웅변도 해봤다가 검도 해봤다가 태권도 해봤다가 백날 해봐도 결국 인간은 시들해지고 식상해집니다. 은퇴하고 난 뒤에 백날 등산가도 몇 개월 안 되서 재미없고요 그냥 등산복만 버리고 해외여행 가봤자 피곤만 하고요. 어디에도 고통 없는 곳은 없어요.


고통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당연한거예요. 고통이 면제되다니요? 없어요.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성령의 기쁨. 혼자 살지 않는다는 기쁨, 그 기쁨밖에 없습니다. 아이고 다행이다. 그 다행이다가 언제 크게 등장하고 기쁨이 언제 등장 하느냐 하면은 자신이 정말 구원받을 가능성이 제로였다는 것을 알 때 바로 내 자리에 쳐들어오신 주님의 권세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주께서 세리와 창기가 율법 징징 감은 소위 도 닦은 사람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고 이야기 한겁니다. 그들은 자기가 한 것을 자기가 잊지를 못해요. 이거 내가 했다. 이거 내가 해서 복 받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대해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마귀가 가진게 뭐냐? 자기 연민이었어요. 위로해도 내가 위로해요. 지옥가도 용기를 주실 분은 마귀밖에 없어요. 지옥가도. 어떤 경우에도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나를 격려합니다. 우리가 배운게 평생 몸으로 익힌 것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익힌게 없어요. 내가 안 믿으면 구원 못 받고 내가 뭘 하지 않으면 어떤 효과 없다는 그 철칙, 그 철칙으로 평생을 버텨온거예요.


권세라는 것은요 적절함 또는 합당함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이야기하고 쉽시다. 먼저 물어볼께요. 권세가 가시적 결과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눈이 보이는 결과가 있어요? 없어요? 권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이 세상이거든요. 이 세상의 권세를 인간은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아까 제가 이 세상 신이라고 했지요. 권세라는 눈이 있어요.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눈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현실. 현실 또는 사실 또는 다른 말로 있는 그대로. 이게 전부다 권세입니다. 그런데 그 17장 2절에 이 모든 권세를 누가 줬다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일임했지요? 예수님한테 일임한거예요. 예수님한테. 예수님한테 일임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권세아래 있는 사람가운에서 영생 받기로 작정된 사람에게 이 세상 권세로부터 벗어내기 위해서 예수님한테 이 권세를 일임한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내가 망가져도 상관없고 내가 망해도 상관없고 내가 죄지어도 상관없고 그렇게 사태에 상황에 몰아붙인 것은 누구의 권세란 말입니까? 바로 나 말고 내 옆에 계신 분, 나는 그분의 여자 신부거든요. 그 분의 여자이기 때문에. 나를 여자로 칭하시는 그분이 하시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무대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얼마나 이거는 엄청난 긍정적이에요. 굉장히 긍정적이죠.


만약에 우리가 혼자 산다고 한다면 우리가 기대하는바 때문에 죄가 진다는 것 때문에 깜짝 깜짝 놀랍니다. 이걸 비롯해서 내가 집안이 망하는게 아닌가? 내가 이런 실수를 통해서 앞일이 어떻게 꼬이는게 아닌가? 지례짐작 겁을 먹고 있잖아요. 이거는 혼자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추스르고 단도리 해주면 누구도 내 인생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까 나라도 열심히 성경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 지키고 교회 나와서 이만큼 착했습니다 티를 내줘야 그 다음에 약간은 안심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욥의 친구의 악마의 신학에 속아넘어가신거예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예수님의 옆자리)180515a-이 근호 목사.hwp (67.5K), Down:16
게시물9,304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7514   가락-요한복음 16장 1절(공백)180102a-이 근호 목사 홍민희 18-01-05 1485
7515   가락-요한복음 16장 1절(공백)180102b-이 근호 목사 홍민희 18-01-05 1521
7551   가락-요한복음 16장 9절(부재)180116a-이 근호 목사 홍민희 18-01-20 1114
7552   가락-요한복음 16장 9절(부재)180116b-이 근호 목사 홍민희 18-01-20 1518
7579   강남-요한복음 16장 12절(지적질)180206a-이 근호 목… 홍민희 18-02-10 899
7580   강남-요한복음 16장 12절(지적질)180206b-이 근호 목… 홍민희 18-02-10 904
7610   강남-요한복음 16장 13절(죄 꽃다발)180220a-이 근호 … 홍민희 18-02-27 1289
7611   강남-요한복음 16장 13절(죄의 꽃다발)180220b-이 근… 홍민희 18-02-27 1051
7628   강남-요한복음 16장 16절(기시감)180313a-이 근호 목… 홍민희 18-03-17 787
7629   강남-요한복음 16장 16절(기시감)180313b-이 근호 목… 홍민희 18-03-17 866
7652   강남-요한복음 16장 21절(환원적 해석)180320a-이 근… 홍민희 18-03-27 1050
7653   강남-요한복음 16장 21절(환원적 해석)180320b-이 근… 홍민희 18-03-27 1088
7664   강남-요한복음 16장 25절(이면지)180403a-이 근호 목… 홍민희 18-04-08 887
7665   강남-요한복음 16장 25절(이면지)180403b-이 근호 목… 홍민희 18-04-08 784
7692   강남-요한복음 16장 32절(통합된 고백)180417a-이 근… 홍민희 18-04-23 1041
7693   강남-요한복음 16장 32절(통합된 고백)180417b-이 근… 홍민희 18-04-23 885
7714   강남-요한복음 17장 2절(제3의 조건)180501a-이 근호 … 홍민희 18-05-10 851
7715   강남-요한복음 17장 2절(제3의 조건)180501b-이 근호 … 홍민희 18-05-10 907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예수님의 옆자리)180515a-이… 홍민희 18-05-26 878
7744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예수님의 옆자리)180515b-이 … 홍민희 18-05-26 963
맨처음 이전 [1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