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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3 14:20:50 조회 : 334         
강남-요한복음 19장 3절(십자가 반복)181120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25.130.152.223)

강남-요한복음 19장 3절(십자가 반복)181120b-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성령이 오게되면 기억나게 해요 성령은. 성령은 뭘 기억나게 하느냐 하면은 시시콜콜한 뭐 유치원때 초등학교때 그걸 생각나게 하는게 아니고 그건 마법사가 아니지요. 세상에 살다가 세상에 가는거 같으면 자기 꿈속에 이야기나 그런걸 기억하죠.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십자가 사건을 기억나게 하는 그것은 성령이 와야 가능해요. 십자가 사건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냐 하면 생뚱맞게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다고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원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 같아서 현장에 아무것도 안 남아 있어요. 아무것도 안 남아 있다고.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몇 년전에 지나간 일이거든요. 지금 십자가 사건 어디있는데? 아마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대들었을 거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상해 네 눈에만 보이나? 왜 다른 사람 보편적이지 않아? 왜 너만 보고 다른 사람은 왜 못 보지?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라고 했을때는 바로 사도바울은 성령을 언급하는 겁니다.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늘 해 놓고 그 뒤에 나오는게 뭐냐 하면 네 몸 주장할래? 성령 앞세울래? 이렇게 나온다고요. 너의 행함이 네 몸 율법 지켜서 하는것이냐 아니면 성령께서 네 몸을 활용했던 결과냐고 라고 묻는 거에요. 성령은 제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모세처럼 제 3의 요소에요. 그럼 여기에서 저는 성령 안 받았는데요 하면 그건 시험칠 때 수험표 없이 온겁니다. 그럼 자격도 없지요. 말씀들을 자격도 없는 거에요.


성경은 무엇의 감동으로 되었다 했습니까? 성령의 감동이죠. 그럼 성령 받은 사람에게 준 편지가 성경이에요. 네가 뭘 한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지금 하고 계시다를 알려주는 겁니다. 주님이 하는데 일관성이 있고 거기 핵심이 있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로 하여금 꼬시더냐? 지옥가도록 꼬시더냐 하는 식으로 누가 너를 꾀더냐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 잠깐 복습하면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뭐냐? 다른 사람은 왜 그러냐?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에 보면 십자가 자체가 다 이루었다 아닙니까 다 이루었다. 성경에 앞에는 뭐라 되어 있어요? 성경에 뭐 함이라?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그러면 구약 성경의 핵심은 뭐냐 하면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거 우상이거든요. 그런데 그 신이 무슨 신이냐 하면 이사야 45장 8절인가 보게 되면은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보게 되면 아마 맞을거에요. 나는 숨어 있는 하나님이다 라고 했거든요. ‘숨어계신 하나님’. 이사야 45장 15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게 이방신하고 다른 점.


이방신은 이미 인간인 이상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신과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거에요. 이방신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숨어 계신다고 되있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먼저 존재한 신이 나중에 존재한 우리를 만들었다 그걸로서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얼추 연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이방신인 반면에 하나님은 뭐냐 하면 네가 언약을 알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너희들이 생각지도 못한 그런 일들을 계속 사건들을 만들어 나가시고 이걸 유발해 나가는 거에요. 사건들을 자꾸 일으키는 거에요. 그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친 백성되기 위함이라”. 친 백성의 조건이 뭐냐 하면 언약의 조건에 부합되야 돼요. 언약 조건에 부합될 때.


그럼 언약 조건에 부합되면 방주하나 만들고 성전 지을까요? 그건 옛날 언약이고 옛날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너는 네쪽에서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언약에 부합되지 않는다를 통보하기 위해서 옛 언약을 준겁니다. 율법이 그 기능이에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게을러서 못 지키는게 아니에요.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을 바짝 안 차려서 못 지키는게 아니고 하는 것 하는 것 족족 자신의 우상성만 드러내는 그런 것을 유발하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 이 말이죠. 하는 족족. 뭘 하든 안하든 그게 죄가 된다는.


그 노골성이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고 제자들은 떠났고 결국은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예수님 홀로 남았는데 그게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무도 다 이루심에 거들 위인은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던거에요. 아무도 없는거에요. 그래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있는 사람. 어느 정도로? 두시간 때우고 호감? 아니에요. 한 10년하고 지루하고 아니에요. 영원토록 호감을 갖고있는 사람.


주님 홀로 하셨다는데서 영원토록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만 주의 나라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런 사람 있습니까? 있으면 말을 안 해. 없어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감사해.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 본인은? 나도 아니죠. 나도 아니니까 나 말고 다른 나를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어떻게? 관계로서. 어떤 관계로서? 창세 관계로서.


‘창조’란 뭐냐 하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에요. 이걸 주일 낮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창세전과 창세후가 싸운다고 했지요. 왜 싸웁니까? 한쪽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한쪽을 부정하기 위해서 싸우는 거에요. 전쟁이란 이런거에요.. 창세전에는 그때는 야곱이 실체에 있는 몸에 있는 야곱도 없었고 뭐도 없었습니까? 예수도 없었어요. 야곱 없고 예수도 없고 뭐만 있었냐? 창세전엔 말씀만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말씀이 그렇게 결정했다는 겁니다. 결정된 말씀만 있으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있으매” 모든 생명이 말씀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가 없었으니. 생명은 생명 고유의 생명은 안나옵니다. 말씀이 말씀을 기인으로 하여 말씀을 바탕으로 설계도로 해서 도면으로 해서 그래서 그 말씀에 입각해서 생명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말씀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위하라고 새롭게 재편하는 겁니다 재편. 모든게 재편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바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냐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주님과 인간 앞에서는 자기 백성 앞에서는 어떤 힘이 주어지는가? 이 둘 다를 다 알아야 되겠지요. 인간대 인간에 있어서는 인간에 있어서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냐 하면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아요. 인간은 전부 다 개별자이기 때문에. 부부는 남이라고 했지요.


부부가 잠을 자되 같은 꿈이 나올수 가 있을까요? 확률상 굉장히 힘들어요. 확률상. 가능하기는 해요. 둘 다 오줌 눌 때. 둘 다 오줌 눌 때 꿈에 둘 다 홍수나요. 둘이 한 침대에 자는데 전기장판을 깔아가지고 온도를 너무 높였어. 둘 다 뜨거울 때 둘 다 꿈속에 불났어. 이럴 경우 말고는 같은 꿈을 꿀수가 없어요. 이게 뭐냐 각자 ‘개별자’라는 뜻입니다.


서로가 다 연결되어 있어요. 심지어 내 몸에서 나온 자식도 이미 떨어져 있습니다. 결혼할때는 성경에 보면 뭡니까? 뭘 떠나라고 했어요? 부모를 떠나죠. 부모를 떠나야 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누굴 잡느냐 하면 이삭을 잡아 버리죠. 이삭을 잡습니다. 옆에 있는 숲속에 숫양이 없다고 한다면 이건 아버지가 누가 봐도 아버지가 자식을 죽인거에요.


그러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유일하게 연결되는 것은 인정 혈육 그딴거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요. 안됩니다. 여기속에서는 뭘 집어 넣느냐?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언약. 이게 무슨 언약이냐.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하는 거에요. 아버지가 자식을 죽일 때 이미 그 자식은 죽은 자식이에요. 이미 죽었어요. 이미 아버지 손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수풀에 있는 양이 왔다는 말은 양이 있다는 말은 이 자식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식으로서 자식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그 살아난 자식으로 인하여 혈육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 자식으로 인하여 영적인 언약성이 있는 연결성이 있는 새로운 아버지로 거듭나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가지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이삭의 자리에 로마서 4장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이 들어가지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관계의 매치에 들어가는 겁니다 새로운 관계에. 모든 인간은 혈육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단독자로 태어났거든요. 왜냐하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스스로 신처럼 되었기 때문에 신은 둘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둘 같으면 신이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대 인간에서는 어떤 연결 고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가 죽잖아요. 창세기 5장입니다. 죽으리라 죽으리라 죽으리라... 아들도 죽으리라 죽으리라...


그렇다면 사실은 인간과 인간사이라고 하지만 이걸 하나로 묶어 버리면 이거는 오직 한 몸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연결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건 바로 무슨 힘이냐 하면 죽음의 힘. 죽어야 될 힘 또는 죄의 힘 저주의 힘 심판의 힘 율법의 힘 이런것들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입니다.


사람의 죄라는 것이 어디서 등장하느냐 하면 혼자 있을때도 물론 죄가 등장하겠지만 그걸 구체화할 때 남하고 대인관계에서 죄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지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거 성립안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게 되면 그걸로 종결되요. 마감이 된다고요.


왜냐하면 내 사랑은 나로 귀환하게 되어 있거든요. 남에게 줄 내 사랑은 없어요. 내가 누굴 사랑하잖아요. 누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고무줄처럼 나에게 나온 사랑은 반드시 나의 어떤 업적으로 내가 사랑했다는 그 상태를 증거용으로 다시 회수하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자식 사랑도 마찬가지 잖아요. 사랑해놓고 댓가를 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희생한다 말이죠.


댓가가 없는 행동이 어디 있어요 인간에게는. 병신입니까 자기 손해보게. 인간은 그렇게 만만치 않단 말이죠. 손해보는 장사는 안할려고 하지요. 그러다가 손해보지만. 손해 안 볼려고 모인 시장이 무슨 시장? 주식시장이고 하는거에요. 손해만 봐요. 인공지능 동원해서 해도 손해만 봐요.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너무 냉혹합니다.


하루 밥 먹고 살거든 그걸로 남는 장사로 여겨라. 더는 이윤 바라지 말아라. 그저 잠 자고 먹고 마신걸로 족한줄로 여겨라 이러거든요. 그것에 더하는 것은 죄가 되리라. 아니 주님이 우리를 아주 거지로 떼거지로 만들어요. 거지로 간주해요. 지금 우리가 관심두는 것은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빨간걸로 할께요. 이 문제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육신이 되느냐 그 문제거든요. 주님 말씀이 육신이 된다 한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15장 16장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아 됐겠지. 지금 이걸로 끝나잖아요. 지금 이것이 예수님에 국한된 이야기가 되면 안되요. 이게 누구한테 되야 돼요?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야 돼요.


우리가 내가 여기 있는데 새로운 내가 있는데 새로운 나는 말씀에 의해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연결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봐야 그거는요 자기 육신을 자기가 훼손하기 위한 노력이고 몸부림에 지나지않아요. 그런 믿음은 지옥가지요. 나와 이 말씀 사이에 연결고리가 성립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연결고리가. 왜냐하면 그 원형을 누가 했습니까? 그 원형을? 예수님이 그 원형을 이야기했거든요.


신기한 동물 사전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지요 지금 2편까지 나왔지요. 신기한 동물사전에 보게되면 그 도망친 동물들 모으는데 그 주인공이 뭘 사용하냐 하면 옛날 1920년대 트렁크 있잖아요. 트렁크를 열어요. 트렁크를 딱 열게되면 아무리 큰 등치도 이 안에 다 들어갈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말씀을 예수님이라는 트렁크에 만들어 놓고 전부다 거기에다가 다 집어 넣는거에요. 집어넣으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역주행, 역주행이 일어나야 됩니다 역주행. 술먹는거 아닙니다. 술먹고 고속도로 달리는건 아닌데. 역주행이 일어나야 돼요.


자, 역주행이란 뭐냐 정상적인 주행은 우리가 있음 있음 있음 계속 있음이 주행이라고 했잖아요. 계속 앞으로 가는 주행이죠. 내가 있다는 말은 곧 내가 움직인다 살아있다는 말이고 살아있으면 뭐가 나온다? 행함이 나오지요. 살아있는 내가 내 행함으로서 살아있는 나를 앞으로 더 내일까지 사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노력하고 있다. 힘들지만 애쓰고 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주행이잖아요. 40이다. 41살 내다보고 41살이다. 42살 내다보고 계속 그런 식으로 가는 거에요. 계속 가는겁니다. 어디까지? 우리가 목숨 다 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영천에서 근육관리, 이것하다가 사흘만에 죽은 신성일 가는 그 길 따라서 우리도 계속 가는겁니다. 효심 때문에 죽었다고요. 향 많이 피워가지고.


전에 내가 이야기했는데. 신성일 죽은 이유. 술담배는 안하는데 향을 많이 피워 죽었다고 했잖아요. 어디서 했는데. 효심이 죽였다니까요 효심이. 왜 효심이야기 합니까? 왜 효심 부립니까? 왜냐하면 우리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이미 살았다는 것은 있음 아닙니까 있음. 이건 앞으로 주행하는거죠. 역주행은 뭡니까?


죽음을 앞에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은 어디에 있다? 뒤에 있는거에요. 어디 뒤에? 나의 태어날 아니에요. 더더 뒤에 어디에?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바로 거기가 바로 트렁크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어요. 십자가 사건에서 튀어 나온거에요. 십자가 사건으로 이걸 다시 가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이야기 한거에요.


그리고 그거 하기 전에 바로 그 전에 구절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죠. 여러분 다 아시죠? 그 십자가의 현재의 기능이 뭐라고 했던가요? 나를 뭐하는 기능이다? 나를 날마다 죽이는 기능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 했잖아요. 예수님 살아있고 나는 죽고 내가 살아 있으면 뭐가 된다?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지요. 내가 살아있으면 예수님 존재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있는 한 기도를 하든 주여 믿습니다 주님 저기 살아계십니다 백날 해봐야 그렇게 외치는 누가 살아 있어요? 그렇게 외치는 내가 살아있잖아요. 내가.


내가 안 살아있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것이 살아계신 주님의 활동에 결과물로서 지금 내가 지금 물 마셔야지. 주님의 주신 은혜로서. 그래야 주님의 증인 되잖아요. 나의 증인이 아니고 주님의 증인된다고요. 주님의 증인은 나도 살고 주님도 살고 주님의 증인 되는 법은 그런 법은 없어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죽어버려요. 그건 하나의 우상이 된다고요.


주님 이렇게 주님 증거합니다. 아프가니스탄 가가지고 이슬람한테 몸값 뺏겨가면서도 나는 그 불쌍한 이슬람의 영혼들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찬양했습니다 그렇게 의료선교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죽어도 좋으니까 주님의 사랑이니까 십자가만 알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누가 기억해요? 누가? 누가? 살아있는 본인이 기억하는 거에요.


만약에 기억하는 그 본인을 누가 옆에 서서 에라 죽어라 이렇게 하면 대번 격분합니다. 내가 아프가니스탄 가서 괜찮은 일을 했는데 나보고 쓸모 없다고 죽으라고 하면 화는 누가 내야 됩니까? 누구 몫이 됩니까? 내가 화를 내가 내는 거에요. 남수단에 가가지고 울지마 톤즈, 울지마~~~해가지고 울지마 톤즈 해가지고 거기에 뭐 소아과 의사 입니까? 있지요. 이태석 신부. 이태석 신부가 가서 했다. 그거 죄입니다.


그 사람도 죄고 그걸 떠벌리는 사람도 죄고 그걸 교과서에 실었던 남수단 당국자도 죄고. 무슨 사건이 빠졌어요? 없음에서 나왔다는 그 사실이 빠졌고요 이미 사람손에 죽었던 분이 살아계시다는 사건이 빠져있는거에요 그게. 봉사해서 구원받을거 같으면 저도 봉사합니다. 한 봉사 합니다. 봉사는 마약같은 거에요. 여러분 봉사 안 해봐서 그런데 봉사해보세요. 봉사보다 더 쾌감을 주는 취미가 없어요. 봉사는 그냥 취미같은 거다 취미같은거.


양자 들여서 서명하는 것, 이거 무한한 이거는 엔돌핀을 제공해 줍니다. 엔돌핀을. 지금 형편이 안되서 못하지. 마약 이상의 즐거움을 줘요. 정기적으로 고아원 방문하고 정기적으로 소리없이 쌀가마를 동사무소에 갔다놓고 이런거 내는거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안해서 그런데 해보세요. 10년 20년 그냥 그 즐거움이 그냥 갑니다. 돈주고 못 바꿀 즐거움과 행복감을 줍니다. 100% 마귀가 한 짓이에요. 100%. 100% 마귀가 한 짓이에요.


주의 증인은 뭐냐 하면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하는거에요. 통촉하옵소서. 죽여주옵소서. 주님을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왕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사극에 보시면 왕의 위세가 앞에서 신하 앞에서 얼마나 존재감이 미흡하다는걸 아시죠. 죽여주옵소서 죽이면 그만이에요. 네로 황제는 신하의 아내같은건 그냥 뺏어버리고 많은 돈 많은 부자도 그냥 죽여버리고 돈 뺏어버려요.


아합이라는 북이스라엘 왕은 여기에 요새 포도농사 얼마 받습니까? 그 포도원 탐을 내서 죽여버려요. 왕이란건 그런 위세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자기가 왕이에요. 왕인데 성경에 보면 주 예수를 믿게 되면 주님이 누가 돼요? 왕이 돼죠. 우리는 뭐가 되냐 하면은 왕이 되면 왕의 왕국이 있습니다. 왕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우리가 결국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백성들 중에 하나가 돼요.


그것도 독자적 백성이 아니고 백성들 중에 하나가 되어버리면 이 백성은 맨날 뭐만 쳐다보느냐 하면은 왕국을 왕국답게 하게되는 그 모든 책임과 지시와 명령 지시사항이 전부다 예수님에 의해서 이게 하루하루 하루치가 제공이 돼요. 철저하게 예속되고 철저하게 종속되는 존재라니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삶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나와야 돼요. 이 차이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나온다면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오지요. 십자가 사건이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오늘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다른말로 ‘나 못박혔다는 사실을 주께서 알리는 조로 이 세상을 운영해 나가나니’ 이런 뜻이에요. 내가 여기서 살아 있는게 아니고 죽었다는 사실을 살아계신 주님이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나를 지금도 활용하는 차원에서 나를 살리고 있다 이 말이에요.


갈라디아서 20절 보다 더 길다. 해석이 더 긴데 할 수 없어요. 그 말씀 자체가 어려워가지고. 불평, 원망, 자기 인생에 대한 후회 그리고 이거는 내가 바르게 했다 내가 나쁜짓 했다 그렇게 언지를 할 언급할 그런 하등의 권리도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자랑질하는 것은 겸손하면 그만이지만 생각해보세요. 자랑질하는 것 겸손하면 그만이죠. “아이고 이거 큰일했는데.” “아~~이거 제가 한게 아니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거는 누구나 쉽게 조금만 연습하면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잘못했을 때 후회가 안된다는게 이게 가능할까요? 후회가 안된다는게. 아~~무릎을 치면서 내가 선택을 잘못했다. 이렇게 후회 안된다는 그런 뻔뻔스러움이 과연 성사 될까요? 후회 안되는 사람 있으면 자랑도 본심으로 인정해줄께요. 자랑이 정말 자랑이 아니라면 뭐도 안해야 되냐 하면 후회도 안해야 돼요. 후회도 안해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와야 되지요. 좀 뻔뻔스럽지만. 그리고 그때는 그때고 앞으로 또 내일 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내가 예측할 필요도 없고 할 그런 이유도 없어요. 왜? 역주행이니까. 역주행이란 말은 가방을 예를 들었는데 봅시다. 가방이 포장이에요. 우리가 없었던 창세후에서 어디로 역주행한다? 창세전으로 역주행 하는거에요.


창세후에서 창세전으로 왜냐하면 예수님과 야곱은 그 사람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이미 창세전에 이미 결정났기 때문에. 창세전에 결정나거든요. 그렇게 역주행을 한단 말이죠. 역주행을 하면서 무엇과 무엇을 교체를 해야돼요. 뭐냐 하면 주님이 창세전에 예비한 자아와 그리고 지금 내가 창세후에 내가 세상에 물들었던 세상에 의해서 구성된 내 자아와 이게 계속 바꿔치기를 해나가야 됩니다.


이게 구약의 광야 40년이 이걸 아주 잘 묘사해서 제대로 바꿔치기 했지요. 홍해를 건너온 사람은 두 사람 빼놓고 다 바꿔치기 했으니까 사실은 두 사람 지워버려도 거의 100% 바꿔치기 한거죠. 40만에서 2두명이면 퍼센트가 얼마 안되잖아요. 99.9%는 다 바꿔치기 했지요. 홍해의 기적을 알고 있는 사람을 다 바꿔치기 한거에요. 다 죽여버린거에요.


그래서 시간은 다 죽을 때까지 계속 지연되는겁니다. 40년간. 안 죽냐? 안 죽냐? 결국은 누가 죽었느냐? 모세까지 약속의 땅을 못 보고 보긴 보고 거기 무슨 느보산인가 그래요. 올라가서 보고서는 자기는 못 가고 거기서 죽어 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나의 천국의 자아는 살아있는 내가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나하고 연결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감수하는거에요 감수. 그걸 인정하는 겁니다. 끊어진거에요.


여기 있는 ‘흙에서 난 나’하고 ‘천국가는 나’는 끊어진 상태가 되는 거에요. 끊어진 상태가 뭐냐 하면은 여기서 내가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찬양한 것도 무용지물로 끊어져 버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의 의미로서 못 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보통 도사를 교회가면 도사들 많으니까 현인, 현자들 앞 자리 쭉 앉아있거든요. 오래다닌 이무기들 있잖아요. ‘교회 이무기’들. 오래 다닌 사람들.


주님 욕하면 가만있고 교회 욕하면 화딱지내는 사람들 있잖아요. 내가 여기 몫돈 낸게 얼만데 하면서 앉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왜 도를 닦느냐 하면 이 몸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거에요. 그 사람들 특징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조심스럽게 살기. 조심스럽게 살기. 행동하더라도 한번 생각해보고 행동하는거. 발을 딛더라고 이게 내가 가야할 길인지 발을 빼야될 길인지 생각해보고 가는거에요.


그런 사람에게 묻습니다. 한번 하지 말고 일곱 번씩 생각해보지. 일곱 번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일곱 번했다 하면 일흔번의 일곱을 생각해보지. 490번 생각해봐. 원래 살던곳은 예수님께서 부활되면 그때는 시집도 아니가고 천사도 그러니까 이땅에 살면서 부인에게 남편에게 이를 갈갈 갈았던 것, 나중에 천당가서 한번 보자 멱살 잡는다. 천당가서 멱살 쥘 일이 없어요. 천국가서 멱살 쥘 일은 없습니다. 분하면 지상에서 복수하든지 알아서 하세요.


둘 다 지금 역주행하는 상황같으면 고소하지 말고 비난하지 마세요. 둘 다 수렴되잖아요 ‘수렴’. 수렴이란게 뭐냐 하면 이렇게 크다 여겼던 그것도 점점 작아지면 하나의 질적으로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대단한 남편이고 대단한 아내로 보이지만 둘 다 성령께서 그런 가정 거의 없습니다만의 예를 들면 둘 다 성령 받았다칩시다. 그런 가정 거의 없는데 받았다고 치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들이 보잘 것 없고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사실로 뒤에 만나게 되겠지요.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면 갈수록 뭐만 남아요? 당신 나하고 살아줘서 고마우이. 당신 나하고 살아줘서 고마우이. 처음에 결혼해서 부부싸움할 때는 나니까 너하고 같이 살아주지 나 아니면 너 같은거 없다. 엄마 쇼파 버릴까요? 쇼파 버리지 말고 네 엄마나 갔다 버려라. 나니까 살아 줬지. 속으로 빠빠이다 인간아. 인간은 부부라도 개인이에요.


자, 부부 관계를 하게되면 한몸이 되지요. 하나님이 짝지운걸 나누지 못한다. 하나지요. 그 말씀이 있잖아요. 오늘 배운걸 여기 실습해 봅시다. 부부가 두 몸이 하나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가 된걸 육으로 실험을 해보겠죠. 하나 될려고 애를 써보겠죠. 놀러갈 때 싸우더라도 같이 놀러가고 물론 놀러가다가 운전할 때 조수석 앉아 가지고 가면서 싸우고 올 때까지 싸우고 하지만 어쨌든간에 하나 될려고 애를 써본다 이 말이죠.


야 다 풀고 풀고 우리 풀고 일본 온천 여행 갈까? 그래서 하나 되가지고 이렇게 해볼까 노력은 하는데 결국은 이게 실패로 끝나요. 왜? 말씀은 내 육 가지고 성취가 안되기 때문에. 그거 실습하라고 결혼하신거에요. 여기 앞에 둘. 그거 하라고 부부된거에요. 혹시 이중에 결혼 안 하신분 있습니까? 하세요. 내가 얼마나 내 단독자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해봐야 돼요.


그래 애 없으니까 쓸쓸해서 안되겠다. 애 나오면 정 들겠지. 애 하나 낳아요. 애 하나 가지고 안된다. 적어도 둘 낳아야지 둘 낳으면 정이 오겠지. 둘 낳았다. 세 명 낳아야 된다. 아들 낳아야지. 세명. 안된다. 네명 되면 완전한 사랑되겠지. 퍼펙트 러브 되겠지 네명 낳았다. 완전합니까? 왜 5명 시도 안 하시고? 한 12명 낳으면 완전한 부부 되겠네요. 한 몸 되겠네요.


인간의 모든 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실패하라고 인간의 몸을 주신거에요. 교체하라고. 네 몸과 말씀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네 몸은 이미 조져놔버린 악마로 인하여 수상한 혐의가 있는 몸이에요 혐의가. 천국에 올수 없는 몸이에요. 인간의 우리의 몸은 이렇게 살아봐서 아는 것도 있지만 정확히 아는 것은 아무리 살아도 다 몰라요. 확실히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가지고 말씀과 결합이 될 때 그 끝은 뭐냐? 아버지한테 저주 받았다는 사실.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여기 오늘 본문에서 요한복음 19장에서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핍박받는 이야이가 19장 끝까지 가요. 읽어보시면 더 이야기할거 없어요. 쭉 그런 이야기에요.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뭐냐 하면 여기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는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하시는데 마태복음에서는 26장에서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이야기해요.


마치 예상 못한 불평을 하는 예상못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해놓고 다 이루었다고 했거든요. 이거는 시편 22편에 그 다윗이 하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그게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이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제는 반복이 되고 영원히 하나로 고정화 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이 ‘고정화’ 돼요.


고정화 된다는 말은 우리하고 무관한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고정된 그 모든 말씀에 고정화 완성이 우리 현재의 자아, 육으로 실패로 끝난 자아하고 여기서 나온 이 자아 예수님에게 나온 자아와 바꿔치기하는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열심히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열심히 하고 계신거에요.


그래서 열심히 하기 때문에 제가 낮에 주일낮에 이야기 한것처럼 여기 덤벨이라고 하면 여기 추를 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역기 봉이 중요하거든요. 관계가 중요하다고요. 관계가 중요하기 위해서는 여기는 누가 달리고? 예수님이 달리고 이쪽은 누가 달리고? 이쪽은 육적인 너무나 육적인 나밖에 모르는 나의 정의감으로 살아가는 내 잘남을 남한테 과시하는 그걸 보라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여기에 매다세요. 이걸 버리면 안 된다고요. 막 살아야돼요. 막 살고 주님 막 살고 두 개의 막 살면서 누가 이기나 보자 이 말이죠.


이렇게 만약에 우리가 주님한테 갔다고 한다면 지금 약간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성령께서 지금 제대로 교체가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가 나오느냐 하면은 인간에게 매달리지 않아요. 인간에게 매달리지를 않습니다. “아...목사가 되가지고 교인이 또 빠졌다. 벌써 올해만 벌써 12명이 빠졌다. 이래가지고 나는 이러면 헌금 안 나오면 나는 못 산다.” 목사 머리에는 맨날 그것 밖에 없어요. 교인수와 헌금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자기 가게가 우상이니까요. ‘골목교회’에요. ‘골목식당’이 아니고. 백종원이. 골목교회거든요 교회들이. 그것만 따진다고요 그것만. ‘공리주의’에요. 어떤 힘이 될수 있는 그것만 따지지 뭐 어떻게 진실 그런건 생각도 안돼요. 말만 진실하지 말고 돈이라도 내면 인정해줄게 이런 식이라니까. 돈도 안내고 무슨 진실이에요. 목사님 복음 사랑합니다. 돈으로 이야기 해 돈으로 증명해 돈으로 증명해!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갑자기 표정들이 왜 그래요?


목사는 우상이 그런겁니다. 교회는 자기 집이 또 우상이니까. 이렇게 할 때 결국은 매달리는 것이 사람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철없는 신학교 처음 나왔잖아요. 그럼 주의 뜻인줄 알고 복음 전한다고 처음에는. 주여 복음이 뭡니까? 내일 죽어도 좋으니까 아골 골짜기에도 복음 들고 가겠습니다. 진리만 전하다가 장렬하게 죽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이렇게 장렬하게 주의 뜻대로 했으니까 한 세명은 더 보태 주겠지. 오게 하겠지.


네명 나갔는데? 그중에 네명 나가 버렸는데. 그것도 헌금 많이 하는 쪽이 나가 버렸는데. 큰일났는데. 결국 느끼는 것은 인간은 사람 없이 못 산다는 겁니다. 사람 없이는 못 산다. 이 복음도 모르는 마누라 나가!! 나는 주님 뜻에서 나는 혼자 살래. 이혼했다 합시다. 외로운데? 이제 슬슬 종로3가에 공원 있잖아요. 무슨 공원이에요? 탑골 공원에 나가는데. 거기서 장기 두는데. 박카스 아줌마 만났는데. 약 먹고 꽃뱀한테 걸렸는데. 몸이 말 안 듣는데 몸이.


여러분들은 제 말이 어려운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성경을 다 외웠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복음을 다 안다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진솔하고 진실한 것은 내 몸이 감당이 안돼요. 사람이 그리운걸. 사람이 그립다 보고싶다 아니야 이러면 안돼 백날해도 이 몸이 너무하다 싶을정도로 이 몸이 가만두지 않을 때 어떡합니까? 너무 과하다 할 정도로. 안돼 나 사람을 의지하면 안돼 주님을 의지해야 돼. 주님만 생각해야 되고 주님만 사랑해야돼. 몸이 있다가 놀고 있네. 누굴 귀신을 속여라.


인간은 자기 몸을 못 속여요. 자기 몸을 못 속여요. 자식보고 나는 네가 공부 1등하는 것도 싫고 수능만점 받는것도 싫고 오직 잠언서 1장에 있는 말씀처럼 청년들아 오직 누구만?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게 사람된 본분이다 뭐 이런거 있잖아요.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고 여호와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나 아무것도 너 공부 잘하는 것 원하지 않아. 그랬는데 엄마 또 100점 받았어 할 때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내가 아는 것도 이 몸이 말하는 것과 달라요.


아무리 끊고자 끊고자 하고 성경말씀을 아는 입장에서는 그래서는 아니된다 아니된다 백날 해도 몸은 누구 몸입니까? 우리 겁니까? 주님 것이죠. 이게 왜 이런 현상이 일어졌느냐 하면은요 주님이 직접 내 몸을 바꿔치기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어줍잖게 거드는 거에요. 뭐냐 하면 이왕 바꿀거 주님께서 좀 수고 덜 하라고 이왕 할거 착한 내가 되어 가지고 주께서 원하는 천사와 같은 몸을 바꿔주는데 일조하려고 애를 쓰는거에요.


그렇게 되면 관심사가 누가 돼요?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같으니까 구원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겠지요. 나같으니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교회 앞에 어떻게 산다? 함부로 살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 조심스럽게 한번 더 생각하고. 내가 이래야 되겠느냐를. 과연 내가 이런 선택이 옳은 선택이였는가를 염두해두면서 해보는 거에요. 왜? 그렇게 하면 좀 위로가 돼요? 그렇게 하면 주께서 추가적인 보너스 복을 더 받을거 같아요? 백배는 아니지만 삼십배 정도는 기본으로 받을거 같습니까?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끝까지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겠다는 악마적 심성을 본인의 몸에다가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극에 나오잖아요. 과부가 은장도 하나 해가지고 저 바깥에 허연 보름달 떴는데 저 바깥에 오랜만에 175일만에 오랜만에 남정네 소리 난다. 이 집에서 한번 묵고 지나갈 수 있습니까? 한번 물어보러 왔을 때 은장도를 해가지고 이러면 안돼 이러면 안돼. 찌르는것처럼 찔러놓고 문은 열어준다. 몸 따로 마음 따로에요. 따로 국밥 따로 없어요. 몸 따로 마음 따로라니까요.


자,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성경이 네가 생각하는 몸, 몸에서 나온 그 자아가 그대로 우리에게 노출시키는 용도로 성경을 준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서 7장이 뭡니까? 선을 행하라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걸 어기는 욕망이 나오는데 그냥 그런 욕망이 있다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경쟁을 붙여요. 누가 이깁니까? 악이 이깁니까? 악이 이기는 거에요. 그런 사도 바울을 누가 구원했어요? 주님이 구원했어요.


그 사도 바울의 그 고백이 모든 성도의 기본 모델이 되는 겁니다, 샘플이 되는 거에요 샘플. 꼭 이런식으로 구원하겠다는 거에요. 신년 됐으니까 죄 지을거 없다고요? 아니요.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more and more, everyday.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에베소서 3장에 있는 사도 바울의 기도처럼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사랑의 깊이와 사랑이 높이와 사랑의 넓이와 사랑의 그 폭이 점점 더 커지기를 원하노라. 오직 사랑밖에 없어요.


그 사랑이 사랑답게 될려면 이 몸이 죽을 때까지 이 몸이 누구를 괴롭혀야 됩니까? 나 자아를 괴롭혀야되죠. 그럼 누가 누구를 괴롭힌게 되죠? 내가 나를 괴롭히고 내가 성도를 괴롭히는 것은 누구를 괴롭히는 겁니까? 바로 주님을 괴롭히는 것이 되니까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 ‘십자가의 되풀이’. 오늘 제목입니다. 십자가가 되풀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주님을 괴롭히는 거에요. 나는 성도이기 때문에 안 괴롭힌다? 자기 정말 주제파악 못해요.


우리에게는 오늘 강의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상이 있습니다. 그 우상은 십자가 사건이 빠진 우상이에요. 좀 약간 학문적으로 말해서 새 언약에 결과가 아닌 십자가에요. ‘새 언약’. 새 언약 좀 더 깊이 이야기 하면 내가 관여할 수 없었는데 주님 혼자 관여해서 일으킨데서 나온 그 사건. 거기서는 누가 빠집니까? 내가 빠져있는 사건이 나를 건드린다는 그 내용이 빠져버리면 그건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저를 왜 뺍니까? 하고 반드시 나와야 돼요. 저를 왜 뺍니까?


내 구원에 아무 기여가 안되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빼는거에요. 내 뜻대로 마음껏하게 만들고 약올리게 만들고 나 설치게 만들고 가입해 놓는 거에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성도는 뭡니까? 그걸 감사한다는 거에요.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오히려 유일한 자기가 평생 살아온 유일한 자랑이 뭐냐 하면은 내가 안 된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에요. 내가 안 된다는. 왜 안 되냐면 이미 죽은 몸과 다를바 없어서 죽은 몸이 이미 숨 죽어 죽었는데 무슨 살아있느냐. 내가 안 된다는 것을 자랑하는거에요.


그러면 복음 모르는 친구들은 뭐라고 합니까? 너 마법사야?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갑자기 제목이 바뀔려고 한다. 네가 마법사야? 제목을 아까 뭐라고 정했습니까? 잊어버렸다. ‘십자가 반복’이죠. 사람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리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해도 정신 똑바로 차리면 안될 일이 없다 하지만 되는 일이 없어요. 정신 차렸다고 내 몸이 내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충동과 욕망은 나의 이성보다 더 힘이 세요.


엄마 이번 모의고사 수능 못 쳤어. 괜찮아 괜찮아. 아프니까 청춘이야. 무슨 아프니까 청춘입니까? 아프니까 청춘이야. 성공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실패를 하는거야. 말은 그렇게 해요. 엄마는 그 날 저녁에 수저를 놓습니다. 아이고 주여 그리고 교회 갑니다. 나훈아처럼 땅을 칩니다. 청춘을 돌려다요. 주여 사십일 했습니다. 개근했어요. 개근해서 사십일 했고 또 성경 쓰라고 해서 성경까지 베껴 썻습니다. 결과가 이렇게 되면 앞으로 내가 무슨 의욕으로 주님을 더 충성하고 찬양하겠습니까? 앞으로 내 신앙 좀 놀더라도 책임은 당신이 지세요.


그게 바로 빌라도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인간은 다 나름대로의 몸이 진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몸이 누구나 다 그리워하는게 있습니다. 그리워하는데 그 그리워하는 참고는 세상에서 가져온거에요. 하지만 막상 본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이 세상에 현실에 없습니다.


왜 없게 하느냐 하면 그래야 악마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감사 대신에 고마움 대신에 계속해서 결핍과 불만족에 시달리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독려해왔습니다. 계속해서 지금도 마귀가 그렇게 하고있어요. 그러나 마귀보다 누가 더 쎕니까? 주님이 더 쎄지요. 결핍되고 불만족 스럽고 짜증나는 것을 반드시 우리는 겪어요. 거칩시다. 역기 봉에다 이걸 걸쳐요. 걸치고 이것만 걸치면 안돼죠. 그럼 중복 인생이 안되잖아요.


이걸 의도적으로 이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여기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걸쳐놓게 되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를 위한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신의 십자가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너같은 탕자도 구원했다는 그런 찬양을 온 우주에 자랑질하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데리고 이끄시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에서 이렇게 가담된 사람 많은 것은 지금도 이 십자가 사건 속에서 우리는 늘 놓여져 있으면서 이미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 십자가 사건을 늘 현실화로 지금 현실로 기억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인생인줄 알았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주님을 위한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백성으로서 왕의 백성으로서 편입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날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들추어주시고 교체하는 그 감사와 그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19장 3절(십자가 반복)181120b-이근호 목사.hwp (80.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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