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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15:08:23 조회 : 292         
강남-요한복음 20장 24절(표현)190402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75.195.96.96)
강남-요한복음 20장 24절(표현)190402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24절 봅시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 대목에 대해서 일단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도마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도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도마의 이런 행동은 내가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전형적인 사람이고 이 사람을 일컬어서 경험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도마의 주장은 오늘날 세속 학문 대표적인 과학, 과학을 좋아하는 인간들의 한계를 도마가 보여주었다.


따라서 주님께서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서 도마로 하여금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기만 하게 되면 이제는 세상의 과학만 믿던 사람이 본격적으로 주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진짜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 도마는 믿지 않는 사람의 전형적이다 보통 이렇게 하거든요. 그 반대입니다. 그거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누가 믿음이 없느냐 하면은 지금 도마 빼놓고 나머지 11제자가 믿음이 없어요. 여기는 10제자 밖에 없지만 가룟 유다는 도망쳤으니까. 10제자가 믿음이 없는 거에요. 그동안 여러분 혹시 그런 생각 들었다면 여러분들의 거꾸로 들으신거에요.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연에 대해서 제가 언급했지요. 자연의 반대말을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탈자연’이라고 했지요. 탈자연이 되면 탈자연은 구심점을 갖게 돼요. 이 구심점은 뭐냐 하면은 놀랍게도 인물이 되는 겁니다. ‘인물’.


자연은 어디에 집중하느냐 하면 이 중심 되는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연은 이 분에 의해서 통제받고 있는 겁니다. 다스림을 받고 있고 그런 관계에 있어요.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대상이 있고 그걸 내가 인정하는게 신앙이 아니고 결국 뭐냐 하면 이게 관계에요 ‘관계’. 특정 인물과의 관계.


이게 뭐냐 하면은 신앙입니다. 보이던 안보이던 진짜 그건 아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 것 이게 불신앙인거에요. 그래서 지금 도마 빼놓고 나머지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 오신걸 부활한걸 봤다는 거에요. 그거는 아무 관계를 형성해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봤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경험주의자에요. 오히려.


예수님 부활한걸 봤다. 누가 봤다? 내가 봤다. 내가 봤다 하게 되면 그것은 전혀 신앙적 관계가 아닙니다. 그거는 기존의 세상 사람과 똑같은 거에요. 본 적이 있다. 뭐 어쩌라고? 본 적이 있다. 뭐 어쩌라고? 누가 봤는데? 내가 봤다. 역시 자기의 안구, 자기의 눈 여기에 의미를 두잖아요. 그러면 계속 보여달라고 할 가능성이 많거든요.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나와요. 계속 보여달라고 하는데 40일만 계시고 떠나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전부 다 하늘 쳐다보고 있어요. 여러분 제자들을 떠난 예수님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잘못이에요? 우리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이 잘못한거에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누구하나 믿고 거기다 다 청춘을 다 바치고 젊음을 바치고 자기의 긴 3년 동안 생활을 거기다 다 바쳤잖아요.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단 말이죠.


그럼 떠나면 안되지요. 적어도 인간적으로. 적어도 인간적으로 그거는 배신행위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보면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 보면 떠나니까 제자들이 멍~해버려요 사람이. 멍~해가지고 뭘 어떻게 할까 몰라서 옛날에 했던 직업, 고기 잡는 곳으로 7제자인가? 다는 아니지만 몇몇 제자들이 같이 합류해서 고기 잡습니다. 고기 잡아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기는 주님이 자기가 주님을 떠난게 아니고 주님이 자기를 떠나버렸으니까요. 물론 제자들도 주님을 떠났지만 그거는 권력이 무서워서 비겁해서 떠났지 뭐 주님이 싫어요 그건 아니거든요. 그건 가룟 유다가 그랬지 다른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쨌든간에 주님께서 자기들이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칠 때는 은연중에 조건이 이렇습니다. 주께서 나를 지켜주겠지. 주께서 나를 지켜주겠지. 이게 불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맺음에서 그 시발점을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도달되는 결론도 내가 잘되겠지. 내가 보존되겠지 하는 식으로 하는게 이게 잘못이에요.


보통 결혼하기 전에 여자가 남자한테 기대하는게 있어요. 남자는 여자의 몸을 원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원해요. 아닌가요? 사랑을 원해요. 그래서 그 사랑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놓을테니까 제발 나를 버리지는 말아다오라는 거에요. 나를 버리지는 말아다오.


이게 남자들은 도저히 여자들이 그런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해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서 그런가요?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거에요. 모든걸 바치라고 남자가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바쳐놓고 네가 나를 배신했다고 또 잔소리하니까 니가 먼저 좋다고 와놓고 그 평가를 일방적 너의 기준에서 남자는 이래야 한다고 평가해 버리면 나는 원래가 그런 뜻으로 결혼 안 했는데 네가 암묵적으로 나한테 지금 부담을 주고 있다라는 생각이 남자의 생각이에요.


이럴거 같으면 결혼 안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이런 식이에요 남자들은. 남자들은 결혼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일부인데. 여자는 결혼이 전부에요. 모든걸 결혼을 전부로 여기는 여자와 결혼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도 있다는 것과 달라요. 언약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과 언약이 주제의 일부라고 여기는 사람과 이야기가 통할 리가 없지요. 쫓겨났겠지만 교회에서.


그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여자를 여자는 여자 단독으로 여자가 누구냐는 확인이 안돼요. 반드시 여자를 보호해주고 사랑해주고 책임져줄 수 있는 남자가 있을 때 비로소 여자로서는 여자로서의 존재의 의미가 남자가 있기에 배필자로 말미암아 경유해서 ‘아 나는 여자 맞구나’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단독으로 남자이지만 여자는 남자가 있음으로써 여자가 되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는 그런 사랑이 있느냐?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 전부가 되지를 않아요. 사랑이 전부가 되지를 않습니다. 사랑이 전부가 되는 세계는 뭐냐 하면 바로 천국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이 전부냐 하면 일체 내 행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을 정도로 사랑으로 모든 것이 용납이 되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정말 천국 생활을 벌써 성령을 통해서 시작했다면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내가 나한테 물으면 안돼요. 그거는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남편이 있는데 아내가 혼자, 혼자 사는 것처럼 질질 울고 있으면 남자가 머쓱해져요. 서양 사람들 잘 하는 몸짓 있잖아요. “으응?!!” 카메라가 어떻게 비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으응?!!”


너 내 아내 아니야? 왜 너는 처녀라고 너 혼자 산다고 생각해? 남편이 뭐야? 네가 그렇게 좌절하고 낙담하면 남편은 뭐냐? 아무것도 아니잖아. 남편의 존재 의미를 위해서라도 남편으로부터 뭔가 받은게 있는데 그게 뭐냐 사랑인데 여자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고 다 받아주는 거에요. 천국은 이순재 천국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다 다 용납해주는 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세리와 창기도 용납한다는 이 말이 세상에서는 그게 그것이 문제가 되지만 천국에서는 세상에서 문제되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세상에서는 이 관계라는 것이 내가 얼마나 건사되는가? 이 건사라는 말 아시겠죠? 건사되는 것. 유지되는 것. 아주 건전하게 보전되는 것.


이 세상에서는 내가 어떻게 나답게 건사되는게 이게 목표지만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 예수 부르짖고 삼위일체 찾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나답게 건사하게 유지되는 것, 보존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천국에서는 이런 ‘나’라는 관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가치를 챙기고자 하는 이것은 천국에서는 그건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로 보지를 않아요.


그럼 뭐가 와야 돼요? 뭐가 무너져야 돼요? 나는 내 가치를 내가 유지해야겠다는 것이 새로운 관계에 돌입되면서 이게 내 생각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태에 돌입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거든요. 그런데 그 믿음은 제자들에겐 믿음이 없어요.


그 믿음을 어떻게 주느냐 하면은 22절 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라고 되어 있지요.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물론 창세기 2장도 그런 이야기 나옵니다만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입김을 불으시니까 사람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거는 육체가 계속 살게 하는 그 생명력을 이야기하고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그것도 어떻게 하십니까? 받으라 하시고 어떻게 하십니까?


숨을 내쉬는데 이 숨 쉬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숨을 내쉬어서 성령을 받으라 하잖아요. 그럼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편하고 좋습니다. 뭐냐 하면 부활이 되었기에 본격적으로 죽음을 찾는다. 부활이 되었기에 죽음이 무효가 되는게 아니고 반대로 본격적으로 부활되신 분이 자기가 거쳐온 죽음을 재대로 거기에다가 자기 백성들에게 전환시켜야 되는 이유가 관계가 그래서 맺어지거든요 관계가.


사람이 안 죽으면요 자꾸 자기 몸을 챙기는데 급급해요. 자기 몸을 챙기는데. 자기 몸 건사하는데에다가 거기에다가 모든걸 다 걸어버립니다. 그걸 세상에서 가볍게 이야기하는데 그걸 행복이라고 하는 거에요. 말은 행복인데 그 행복 거기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바로 나가 바로 핵심 대상으로 들어있어요. 나의 행복이지 너의 행복이 아니에요.


사람이 불행한 이유가 뭐냐? 너의 행복 때문에 내가 행복해도 저쪽이 행복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우리는 불행을 느끼는 그 정도로 우리는 자기중심입니다. 우리는 나의 행복 또는 우리 가족의 행복 우리 교회 행복 하여튼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은 나의 행복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그래가지고는 예수의 부활의 세계에 참여를 못해요. 부활의 세계 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되는데 성령의 역할이 뭐냐 하면 그 나의 행복 나만의 행복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죽여버려야돼요 그걸. 없애버려야 된다고요. 행복할 건덕지가 되는 대상을 없애버리는 일을 해야됩니다. 성령의 일이.


이미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무슨 경험을 했느냐 하면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잖아요. 그런데 부활의 능력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죽이는 것과 죽이는 것도 있지만 그 다음에 죽이는 분에 의한 세계를 죽이는 분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그 부활의 능력을 죽이는 동시에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주님 중심을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내용도 성령 안에 함께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


그냥 죽이고 끝! 이게 아니고. 죽여놓고 이제는 살리는게 이거는 너 행복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복을 받는 그러한 능력까지 부활의 능력 안에 들어 있어요. 부활의 능력. 왜?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래서 부활의 능력에서는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죽을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너 그러면 죽는대. 너 그러면 지옥간다” 라는 말은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되는 이유가 이미 그것을 충분히 지옥 갔고 충분히 벌 받았고 충분히 죄에 대해서 지적을 당했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한번 처벌한 것은 두 번 처벌이 없게 돼요. 오랜만에 고급스러운 단어를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한번 처리한 재판은 두번 다시 거기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이미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잘못해서 처벌받는게 아니고 내가 수립한 관계가 하늘나라에 쓸데없는 관계였다는 그 점을 밝히면서 처벌하는 거에요. 그래서 처벌이 내가 생각하기에 잘못된 것을 처벌해주세요 하면 그건 아직도 어디 있느냐 하면은 선악과 관계를 맺고 있을 경우에는 착한 것은 나무라지 마시고요 나쁜 짓만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여전히 자기 행복을 계속 유지하는게 되요. 자기 가치를 건사하는 태도가 되는 겁니다.


그냥 아예 근원적으로 이게 아예 나에게는 조금이라도 의로움이 없음. 나에 대한 희망을 걸어서는 안됨. 이걸 아예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것은 뭐냐? 우리의 지식, 선악의 지식에다가 맡길게 아니고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그 사람 속에다가 집어넣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땅에서 존재하고 서울 땅에서 사는 이것도 나를 위해서 사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내 인생이 아니고 누구의 인생? 주님의 연속된 주님의 인생 부활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살았지만 사실은 죽은 자고 죽었지만 사실은 영원히 살아있는 모습’.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해놓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은 대표적인 모델로서 관계 설정에 나서는 대표 인물이 바로 도마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도마가 전형적인 영어로 ‘prototype’ 이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것. 모델적이다 모델. 전범적인 것, 메뉴얼적인 것. 가장 전형적인 신앙인은 바로 도마입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관계를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그 관계를 유지해주기 때문에. 내가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해서 솔직하게 자기는 어떤 관계망 속에 나는 놓여 있음을 도마가 노골적으로 다 보여줍니다. 있는 그대로. 이 말은 내가 스스로 치료 기회를 내가 갖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얼마나 그점이 참 주님 보시기에 훌륭한 점인지. 내 인생을 내가 손대가지고 내가 고치겠다는 생각 일체 없어요. “나 이것밖에 안돼” 라는 것을 아주 자신만만하게 노출시킵니다.


마치 엑스레이 앞에서 가슴 두 팔 벌리고 사진기 앞에 그냥 자기 가슴을 들이대는 것처럼. 주님 자체가 카메라라면 주님 카메라 앞에 자기 온몸을 그냥 던지는 거에요. “주님 보시기에 저 어때요?” 이런 식이에요. 주님 보시기에 저 어때요?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되는데 믿음이라는게 굉장히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여러분들이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 갈릴리 바다 위를 걸은 것을 아시지요? 제가 이스라엘 갔는데 차마 물 위를 못 걷겠어요. 풍랑이 너무 세. 빠지면 내 옷만 젖어요. 베드로는 그 본문에 의하면 이래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이유는 주님만 쳐다봤기 때문이에요 주님만. 자기 자신의 어떤 인물이고 자기 자신의 한계가 뭐냐를 전혀 생각 안했기 때문에 건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물위를 걸었지요?


그러나 도마는 지금 어느 정도냐 하면 물도 없는데 지금 건너고 있어요. 그게 도마가 더 쎄요. 물도 없는데 건너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구약에 믿음에 대한 상황을 수시로 계속 집어넣는데 그중에 여러 가지 많아요. 거의 대부분 믿음이니까. 대표적인 것이 이제 가나안땅 12정탐꾼. 갈렙과 여호수아 그것도 믿음이지만.


유다같은 경우보세요. 유다의 보통 유다의 아내가 베레스를 낳았는가?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잖아요. 보통 성경 보면 유다의 아내가 다말로 되어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뭐냐 하면 다말의 남편이 유다에요.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을 좇는 계보를 보게 되면 누가 보조냐 하면 남자가 여자의 보조가 되야 됩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그냥 남자는 그냥 여자 하나 얻어서 자식 놓으면 그만이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아무 남자나 만나서 그 종족의 자식을 낳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다말은 이 언약적인 자식은 하나님의 언약의 예정된 언약된 사람이 아니면 그 자식이 태어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 이삭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이삭은 꿈도 못꾸는 거에요. 그저 이스마엘로 족합니다 하고 끝내버려요.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삭이라는 자식을 놓게 된 것은 전혀 아브라함 생각이 아니고 찾아온 천사의 생각이에요. 그 천사의 기능을 그 다음에 누가 하느냐 하면은 바로 이방 여인 다말이 해주는 거에요 다말이. 그 천사 역할 다말이 한 거에요. 다말이 낳은 자식은 그냥 자식이 아니고 약속의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포함된 자식을 낳은겁니다.


여자의 후손이에요. 남자 빼놓고 남자는 시다바리고 남자 빼놓고 남자 없이 여자 혼자서 자식을 낳는다. 야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이게.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정말 말이 안되는 것만 골라서 믿는 사람 같아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간이 아니라고 여겨요. 나는 외계인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그냥 말이 될 거 같으면요 얼마든지 믿지요. 하지만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을 다 끌어 모으면 그것은 오히려 믿음을 방해하는 거에요. 약속을 가리는 짓이 되는 겁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다 발라내세요. 믿을 가능성이 있는거 다 끄집어내세요. ‘야 이건 믿을만 하네’ 그걸 다 제껴버리란 말이죠. 다 버리면 뭐 남는게 있을거에요. 그건 ‘나의 무능성’이죠. 그게 바로 믿음 아닙니까. 그게 바로 오늘 도마가 보여주는 거에요. 좋다는 것을 다 끌어 모으지마세요. 좋다는 것을 다 끌어 모아봤자 그거는 오히려 진짜 좋은 것을 못 믿게 만들어 버리는 하나의 미세먼지 같은거에요. 미세먼지 정도가 아니라 깜깜한 답답한 먼지 같은 겁니다. 그런데 현혹되어 버리면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자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이천년 교회 역사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믿을만한 것을 다 집어넣어 놨어요. 마귀가 못 믿게 만들기 위해서. 믿을 수 있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가능성 있는걸 전부다 집어넣은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뭐냐 삼위일체 외우기. 교리 외우기. 기도해서 응답받기. 정성들인 헌금은 하나님께서 30배 60배 100배 채워준다 이런거.


내가 원인이 되어서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주어진다 그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것에 믿음도 아닌 것을 얼마나 많이 동원시킨지 몰라요. 그거 동원시킨다고 성경말씀 전부 다 곡해하고 오해하게 한거에요. 과부의 기도를 본받아라.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열심히 했더니 귀찮아서도 응답해줬다 이런거 있잖아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게 없다 해가지고 나무 뽑고 소나무 뽑고 산에 심고 주로 그런 내용들요.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있다 해갖고 자기 기도는 안되고 특별히 기도하는 은사받은 권사나 부채도사 목사님의 기도에 기도빨 받으려고 하는거. 그 모든 것이 개인의 행복이에요. 개인의 행복. 자신의 현재 포함되어 있는 그 관계를 관계망을 더 강화시키는 수작이 지나지 않습니다. 내 행복을 못 놓겠다는 거에요. 내 행복을 못 놓겠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했어요. 자기 집안 가운데 누가 무당이 있었는데 그 무당이 귀신 불렀는데 자기는 이제 복음을 알았는데 자기 자식은 아직 교회를 안 나가고 있고 그런데 어떤 설이 있는데 어떤 설이냐 하면 무당이 무당짓을 제대로 안하게 되면 귀신이 대대로 그 자식한테 내려간다는 그 설이 있답니다. 그게 걱정되서 저한테 물었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 자식한테 귀신 들어가가지고 무당된다하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한테 물어서 제가 답변을 삼빡하게 해드렸죠. 천벌 받으세요. 천벌 받으면 있는 마귀 다 떠나갑니다. 저주를 안 받을려고 하니까 오는 마귀 일곱귀신 다 들어오는 거에요. 보자 어떤게 귀신 들렸는지 한번 보자. 기다리세요.


왜냐하면 새로운 관계망은 그전에 우리가 어느 관계망에 주눅들었는가를 깔끔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도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붙드는 것들이 어떤 것들을 붙들고 있었는가를 성령이 오게 되면 그걸 다 까발려주세요. 얼마나 감사한지. 믿을만해서 믿은 것은 전부다 내 행복을 위해서 믿은거에요. 주님의 의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아니고 내 뜻이었어요. 내 뜻이 가미된 나라는 천국이 아니고 그게 지옥입니다. 왜? 내 나라이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실 때에는 부활이 되고 난 뒤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뒤에 찾아오시는거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이 가시는 그 코스를 우리에게 답습하라고 오시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가신 코스, 십자가 죽으시고 그 다음에 부활의 능력이 임하는거 있잖아요.


신랑이 먼저 그런 경험을 했으면 신부는 어디서 뽑겠습니까? 바로 신부도 신랑 따라가는거에요. 신부도 신랑이 하는 그 코스대로 그대로 따라와줘야 죽이 맞아요. 그 신랑에 그 신부에요. 따라서 그 신랑되시는 주님께서는 자기 신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천벌받게 하시는 거에요. 베드로에게 물위를 걷는 것은 천벌입니다. 그거는 빠져 죽는거에요. 보세요. 물위를 걸었잖아요. 빠져 죽는줄 알았지만 물 위를 걸었잖아요.


지금 가룟 유다 빼놓고 11제자는 지금 인간으로 차마 건널 수 없는 길이 없는 곳에 지금 건너고 있습니다. 길이 없어요. 아니 길이 없어야 돼요. 우리가 길이 있으면 그 길을 사람이 찾아갈거에요. 만약에 좁은 길이 영생가는 길이라면 좁은 길, 넓은길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아마 돈 주고 막 넓은 길 할거에요.


SK그룹이나 남양그룹이나 현대그룹의 제벌 3세들이 아마 돈 들고 그 좁은길 앞에 서 있을거죠. 마약이나 피우면서 할걸요. 마약을 하는데 그걸 마약도 좋은데 그 영생길을 포기하겠어요? 돈 있는데.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어떤 교회 목사가 청년이 취직해가지고 몽땅 월급을 다 바치면서 내가 월급 다 바칠테니까 하나님 내 인생 책임져달라고 헌금하니까 담임목사가 그걸 아주 대칭찬해가지고 여러분도 이 믿음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바로 인간이 자기 몸 건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도리를 성의를 다 표한거에요. 이거 완전히 돈 놓고 돈 먹기라니까요. 이 말은 서영춘이 말하고 똑같은거에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가 있어야 마시죠. 컵도 아니에요 고뿌라고 했어요 서영춘이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애들은 가 이런거 있잖아요. 뱀이 왔어요 이런거.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가 없으면 컵 없으면 못 마시듯이 아무리 주께서 사랑을 줘도 우리가 믿음으로 매달려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갑자기 왜 이 점을 왜 강조하느냐. 믿음 달라고 또는 성령의 충만함 달라고 부탁하고 매달리는 거에요. 그 매달리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본인이잖아요.


제자들은 지금 은근히 예수님을 기다린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었지만 예수님의 그 다음 조치를 기다린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그 다음 조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보여줄 때만 그러느냐 하면 제자들의 낭패. 상실감. 이런 것을 바닥까지 다 까발리는거에요. 예수님을 믿을 건덕지를 하나도 없게 만들게 까발리는 그것이 성령이 와서 알려주는 십자가의 의미에요.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고 통과했다고 우기지 마세요. 십자가의 의미는 낭패고 상실감이에요. 일곱 번 넘어졌잖아요. 여덟 번 일으키면 여덟 번째 또 밟아버려요. 아예 밟아버려요. 더 근원적으로 말해서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냐면 내가 현재 숨 쉬고 사는 것도 그걸 기적으로 느껴져야 돼요. 숨 쉬고 사는 것. 욥이 그랬거든요 욥이. 아프지만 숨은 쉬잖아요. 이게 마지막 남은 이것인데 마지막 남은 숨까지 내가 숨 쉰다 하면 안돼요.


아까 성령께서 주님께서 숨 쉬잖아요. 그러면 성령이라 하는 것은 내가 숨 쉬는 것입니까? 내 안에서 누가 숨 쉬는거에요? 주님이 숨을 쉬는 거에요.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는 거처가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를 해버리는 겁니다. 원래 주인 내쫓고 주님이 그 주인이 노릇 해버리는겁니다. 숨 쉬는 것도 내 숨이 아니고 주님 숨이에요. 휴우휴우~.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모든 사건과 일어난 모든 변화 모든 자연은 탈자연화되지요. 모든 자연은 누구 말 듣는다고요? 그리스도의 말을 듣도록 되어 있어요. 바다야 바람과 바다한테 나무라니까 갑자기 순종했지요.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골로새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위해서 만들어지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는 그것이 실감나게 적용을 시키는 그 관계를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이제 관계 알지요? 관계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 그 관계가 바로 주님과 자기 신랑과 신부를 맺은 믿음의 관계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 믿음의 관계라고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간 쪽에서 주님을 붙들려고 하는 모든 관계는 뭐로 되느냐 하면 결국은 내가 믿는 만큼 실망으로 이어져야 되겠지요.


내가 이만큼 기도했으면 뭔가 예상된다는 그 예상이 좌절되어야 돼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저는 기도하면 응답되던데요. 아직까지 기도의 응답을 못 받아서 그래요. “아 이 기도자체가 죄구나” 라는 응답까지 내려가야 돼요. 헌금했는데 복 받았다. 헌금했는데 아무 소식도 없더라 이렇게 되어야 헌금하는 것조차 내 욕심이 담겨서 하는 헌금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른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아까 다말 이야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다말에 있어서 자기가 다말이 모압 여자인가요? 가나안 여자지요. 다말 자신이 분명히 출신이 있고 본적이 있고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말은 뭘 봤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을 본거에요. 그리고 내가 이 집에 시집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언약적인 언약의 일관성 있는 작전 가운데 자기가 휘말려들어간걸로 본겁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언약을 아는데 자기 시아버지는 유다가 언약을 모르는거에요. 자기 집안 중심으로 내 가족 중심으로 다독거리고 있는거에요. 그러니까 다말이 언약적으로 과감하게 시아버지한테 자식놓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유다가 다말에게 한 고백이 있어요. 너는 나보다 더 의롭다 하는 그것. 주도권이 이미 바뀐거에요.


남자의 자손이 아니고 너의 자손이여야 된다라는 것. 우리 둘의 관계에서 세운 자식은 내가 아버지라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 없이 네 언약이 너를 낳았다라는 쪽으로 나가야 돼요. 그야말로 언약의 자식이 되야 돼요. 그 관계를 거꾸로 한번 봅시다. 우리가 자식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엄마 다말이 낳았다고 하면 안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낳았다고 해줘야돼요.


왜냐하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시간은 미래에서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주께서 주를 위하여 다말이라는 저 우리 어머니를 이용해서 주께서 주의 자식을 낳았다 이렇게 봐야 되는 겁니다. 복잡해요 믿음이라는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믿습니다가 아니라 관계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는게 믿음입니다. 제가 자주자주 이야기할게요. 이런 이야기는 늘 봐도 자꾸 잊어버려요.


관계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헤어져있습니다. 부활되고 난 뒤에 자주 찾아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멍하니 떴습니다. ‘Cast Away’ 라는 옛날 영화가 있어요. 톰행크스가 주연인데 Cast Away 라는 영화인데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쫓겨났다에요. 쫓겨났다. 그 내용은 문명사회에서 쫓겨난 주인공이 4년 동안이나 무인도에서 혼자 겪다가 다시 기적적으로 거기서 배를 만들어가지고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온다 뭐 그런 내용인데,


이 내용이 아주 수작이 되고 좋은 영화된 이유는 자기 문명세계에 있을 때는 아내하고 혼자 남은 아내하고 약속했어요. 내가 살아서 돌아가겠다. 택배회사 직원인데 비행기 수송 택배기사 유명한 택배회사 있잖아요. 하여튼 그 택배회사 수송기 타고가다 수송기 고장나서 외딴섬에 혼자 살았는데 그때 뭐냐 하면 살아있는 아내가 있으니까 나는 다시 아내를 만나러 가겠다라는 일념으로 그는 다시 애를 써서 용을 써가지고 문명세계에 다시 돌아왔어요. 4년 후에. 우여곡절을 다 겪으면서.


와보니까 자기 아내가 이미 자기 장례식을 다 치루고 관도 있고 자기 유품들 거기에 다 집어넣었어요. 이쪽세계에서는 주인공이 ‘척’인데 그 이름이 척인데 이 척이라는 이 사람은 이미 죽은 자에요.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려고 주인공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거에요. 이쪽에서는 죽은 자인데 죽은 자가 살아오니까 친구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부활하는데 왜 그렇게 서류가 많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하거든요.


사람이 하나 죽어도 서류가 많이 필요한데 죽었다가 살아나면 서류 다 바꿔야 되거든요. 이미 사망신고가 되었기 때문에. 특히 아내가 자기를 치료하던 치과의사하고 결혼을 해버렸어요. 그런데 자기가 혼자 있을 때는 아내가 그리웠는데 아내가 그립다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는 아내가 보이지 않지만 아내 곁에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아내가 없어졌어요 갑자기. 아내는 살아있는데 없어졌어요.


그 이유는 뭐냐? 내가 죽었을 때는 아내가 살아있었는데 내가 다시 산 사람에 섞이니까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거에요. 자기 아내가 없어진거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천국가는 관계가 믿음이 안되는 것은 내게 문제있어요 내가. 내가 자꾸 살았다고 여기니까 내가 살아있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믿음에 포함이 되지 않는거에요.


왜냐하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믿고 기도를 하든간에 결국은 누구 좋아라고 하는거에요? 믿는 당사자 내가 좋아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도마가 나머지 10제자를 대표해서 도마가 믿음, 자기가 현재 기존의 관계망, 기존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오해하고 이걸 믿음이라고 여겼습니다라고 하는 그 모든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로 해요 표현.


바로 도마가 주님 앞에 제시한 것은 이겁니다. 내가 표현한 방식에 주님이 걸려들지 아니하면 나는 믿지 않겠다. ‘표현’. 오늘 제목은 표현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제목이에요. 표현한다는 것은 표현할 수 있는 당사자가 전제되어 있지요. 믿습니다 하는 것도 표현이지만 그런거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 그냥 무심코 뭐 이렇게 설거지 한다든지 축구 공 차는거 야구 구경가는거 전부다 뭐냐 하면 표현이에요.


인간은 살아있는 한 표현이 중지되지 않습니다. 뭐 꼼지락 꼼지락 뭔가를 표현해요. 그 표현이 그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얽혀 있는 관계망을 전부다 대신 다 발산하고 있는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반대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꼼지락 꼼지락 뭘 해도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전부다 주님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게 신앙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도마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도마는 자기 평소의 표현들을 평소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다 몰빵, 다 주님 앞에 보여주고 그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따로 믿습니다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살아가는 자체가 전부다 믿음이 되게 하는 거에요. 이걸 가지고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도마가 믿음을 자기 표현을 통해서 나 다움, 자기 자신다움 내 관계를 표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나타냈다면 예수님은 도마의 새로운 표현을 통해서 주님께서 도마를 통해서 튀어나온거에요.


성령받은 12제자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지금 계속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제가 튀어나온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이게 얼마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논리를 도약하는 뛰어넘는 이야기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러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 그림이나 화투같은 것 저는 화투를 잘 못칩니다만은 11월달에 보면 어릴 때는 많이 쳤어요. 11월달에 보면 일본 노인이 삿갓 쓰고 나온거 있지요? 비. 삿갓쓰고 있는 동양인 있잖아요.


그 삿갓 쓴 그림 있잖아요. 그 그림이 화투치다보니까 그게 그림이 아니고 실제로 살아서 조그만 꼬마 노인네가 삿갓 쓰고 우비입고 나온다면 기절초풍하겠지요? 우리는 그것을 허구라고 생각하고 에이 그럴리 없다 하겠지요. 이게 믿음 없는거에요. 나를 통해서 주님이 주님의 손이 뻗어나오고 발이 뻗어나오고 주님의 생각과 마음과 모든걸 뻗어나오도록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내안에 누가 사느냐 하면 내안에 사시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번에 주일날 설교에 그런 예 들었지요. 내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그 다음에 뭐도 유익하다 했습니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제가 거기서 표현할 때 우리 자신이 주님의 숙주고 운반체라고 했지요. 그 뒤의 대목을 하게 되면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그 앞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함이라. 살든지 죽든지. 다시 말해서 내가 포장지가 찢어지든지 포장지가 멀쩡하든지 포장지가 포장지 걱정을 해서는 안된다 이야기에요.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표현하는거에요. 내 안에 귀신이 있다. 이거거든요. 완전히 신들린거 아닙니까. 물론 고상하게 하면 성령들렸지만.


예수님의 계획은 이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가 봤지만 성령으로 세례받은 그분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 백성에게도 성령의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했다고요. 성령의 세례 예수님 본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은 그 모양새 그 형식을 자기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자기의 복사판들이 계속 나오도록 주께서 하나님 자리에 앉으면 성령의 세례를 주는 그 오른편에 앉으면 그 오른편이 그냥 구경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일하시는 자리거든요.


그걸 기능적 자리라고 하는데 주의 오른편은 기능적 자리에요. 원수를 쳐부수는 자리에요. 시편 110편 1절에도 나와요. 오른편의 자리에서만 원수가 원수로 보이고 원수는 그 발 앞에 묻히게 되어 있어요. 시편 110편 1절에. 언젠가 목사님 우리교회와서 그 대목으로 설교한적 있는데. 없어요? 내가 다른 사람하고 오해하는가? 시편 2편 가지고 설교하신 분 계신데. 주의 오른편에 앉아야 주가 되거든요.


주님이 그냥 노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가 경험했던 그 자기 복사판을 계속 뽑아내는 겁니다. 마치 원숭이가 머리털 뽑아가지고 원숭이가 아니고 손오공이 제2 제3의 손오공을 남발하듯이. 그것 때문에 그렇게 미세먼지가 많은지 모르겠는데. 주께서는 택한 백성을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것을 창세기 2장에서 숨을 후우~ 내쉬면서 성령받으라 한거에요.


흙에서 시작한게 아니에요. 주일날 설교한것처럼 흙에서 시작한게 아니고 십자가 피에서. 피에서 시작했다는 말은 피의 의미를 시간이 가도록 놓치지 않는다는 것. 반드시 네가 성도라면 그 안에 피만 바라볼 수 있는 피 외에는 어떤 다른 의미라든지 피 외에는 어떤 가치를 성령이 알아서 다 제거해주시는 기능이 발휘해주시는 존재. 그게 성도입니다. 그 피가 용서하는 피거든요.


그러면 결국 우리는 뭐냐? 우리는 계속해서 용서가 용서하는 피로 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뭐 해야되느냐 하면 없는 죄를 계속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계속 죄를 지어야하는거에요. 아 급진적인 발언이죠? 지금 급진적인 것. 도발적이죠. 죄를 알고 죄를 안 짓는게 아니고 없는 죄도 평생 계속 지어줘야 되는 거에요. 그 역할도 우리가 맡은 겁니다. 그럼 그 죄가 어떤 죄입니까? 살인죄입니까? 간음죄입니까?


그게 아니고 기존의 관계망, 믿음도 아니면서도 그걸 내 중심으로 믿어왔던 그 죄. 그 죄가 계속 발각되야 되는 거에요. 그 죄를. 제가 발각이라는 말을 했어요. 제목을 표현 발각이라고 바꿀 용의가 있는데. 발각이라는 말은요 우리 몸의 본성상 몸의 중심성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육의 본능이 그거니까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튀어나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존재다 튀어나온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기능이 튀어나와야 되거든요. 이게 언약의 완성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의 역할은 십자가 피의 나오게 하는 보조적 역할로서 충실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러한 육의 본성 때문에 주님께서는 억울하게 인간에게 밉상받아서 당했다는거에요. 그것을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게 뭐냐 사적 구원, 개인적 구원되기 때문에 말하기가 좀 조심스러운데요.


사적 구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뭐냐? 우리는 어떤 우리가 원치 않는 관계망 속에 있어서 관계망에서 기존의 세속적인 관계망에서 요구하는 우리는 자아성을 위하여 자기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꾸준히 살아오고 있고 또 살아가고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몰랐던 죄에요. 하나님을 위한다는, 찬양한다는 그 모든 발언과 행동 속에서 어제까지 몰랐던 죄가 새롭게 그 안에 담겨있음을 오늘로 발각당할 때 우리는 그걸 은혜받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20장 24절(표현)190402a-이근호 목사.hwp (188.0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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