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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5 11:06:16 조회 : 450         
강남-요한복음 21장 19절(해독제)190903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75.195.96.96)
강남-요한복음 21장 19절(해독제)190903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1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18절 여러분 아신다고 치고요.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이렇게 되어있지요?


영광 돌리는 방법이 베드로에게는 뭐였지요? 죽음이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이 말할 때 베드로가 상당히 끔찍하게 생각할거에요. 왜냐하면 보통 상식에서는 하나님께서 살려주고 살았다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살아있는 그 시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일반 인간들의 상식 부합됩니다. 상식에.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이유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오늘 나오는 베드로의 잘못인데요. 자기 구원욕구 중심으로써 자기 인생을 연관을 시키는게 이게 문제거든요. ‘자기 구원욕구’. ‘내가 어떤 일을 해서 결국은 천국에 골인하면 그만이 아니냐. 나 구원받으면 되지’ 라고 하는데 지금 베드로는 자기 구원론을 챙기고 좋아할 그거 생각할 입장이 안돼요.


왜냐하면 양을 쳐야 될 주님의 양을 쳐야 될 목자로 부름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베드로처럼 사도같은 경우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어야 돼요. 양의 요소도 있어야 되고 목자의 요소도 다 있어야 돼요.


그리고 양이라는 것이 목자가 있어야 양이 연결, 형성되기 때문에 이 말은 목자의 체험이 무슨 체험이 되느냐 하면은 양의 체험이 되어야 돼요. 양의 체험. 목자의 체험이 양의 체험되어야 돼요. 목자의 체험이 양의 체험되려면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이 체험이라는 말 했으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지금 양이 뭔지 목자가 뭔지 지금 그거는 몰라요.


예수님이 찾아와서 이제 실시하겠다는 거에요. 네가 띠 띄고 원치 않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베드로가 옛날부터 해왔던 겁니까? 아니면 앞으로 베드로가 해야될 일을 예수님께서 지금 예고하는 겁니다. 예언, 예언하고 있지요. 그럼 베드로에게는 목자 체험이 없지요? 자기 인생 속에. 자기 인생 속에는 자기 구원만 신경 쓰고 있지 뭐 자기 하늘나라 높은 자리에 앉을 그것만 생각만 있지 주님께서 요구하는 목자의 체험, 양의 체험 그런 것은 없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기이한 현상이 나는 거에요. 앞으로 베드로가 베드로의 체험은 자기의 과거 체험이 아니고 경험하지 않은 미래 체험을 해야 되는 거에요. 미래 체험이라는 말은 이건 성립이 안 되지요? 미래 체험이 좀 말이 좀 어려우면 좀 비슷하게 어렵지만 다른 말로 해볼게요. 미래의 기억. 더 어렵지요? 미래의 기억을 이제는 부여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럼 지금 베드로는 미래라는게 없잖아요. 지금 현재에 있으니까 미래 없지요? 그러나 미래의 기억과 미래의 체험은 누구의 체험이냐 하면 결국 예수님의 체험이 베드로에게는 미래의 체험 미래의 기억으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미래의 기억이 오게 되면 무엇과 베드로 내부의 무엇과 충돌을 일으키겠습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살아왔던 과거의 체험과 충돌을 야기하겠지요? 충돌을 야기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여기서 뭐가 생기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 어긋남. 어긋남이 발생되겠지요. 어긋남이.


필히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누가 되든 인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사람이 체험하지 않는 이야기를 이야기에 근거해서 이야기 해버리니까. 예수님 체험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예수님 체험이 일방적으로 앞으로 자기 인생 안에 미래를 장식하고 그걸 채워넣는다 이 말이죠.


여러분 고추튀김 있지요? 내가 좋아하는 고추튀김. 고추튀김 안에 고추씨를 파내고 그 안에 다른 돼지고기라든지 당면 다져넣은 것 이거 두부 다져가지고 튀기잖아요. 그러면 원래 이 내용이 고추 내용이 아니고 고추 자기 씨는 밖으로 다 튀어나가고 없어요.


그럼 외부에 있는 이 이질적인 내용이 그 형식만 고추지 안에는 다른 다진게 들어오잖아요. 속 내용이. 예수님이 베드로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목자 체험이 있어야 베드로가 지상에서 목자로 목자기능을 할 수 있어야 돼요.


그 목자기능을 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목자고 베드로는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양이 되어야 된단 말이죠. 그럼 양 체험 이꼴(=) 뭐가 돼요? 목자 체험 되는 거에요. 양 체험은 양 하겠다고 손드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목자라는 개념에 필히 맞은 편에 무슨 자리가 마련됩니까? 양이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지요.


목자라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무엇과 이렇게 연관을 지었지요? 내 양이 있다는 거에요. 그 양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베드로가 일단은 예수님의 양이 되고 양에다가 목자 심정을 집어넣으면 베드로는 양인 동시에 목자로서 살게 되는 겁니다. 안에 내용은 완전히 베드로가 체험한게 아니고 예수님 자기 체험을 쑤셔 구겨넣는 거에요.


지금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 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 네가 원치 않는 네가 원치 않는 마지막에 네가 늙어서는 원치 않는 죽음을 볼 것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베드로가 원하는 죽음이 있을거에요. 원하는 죽음. 원하는 죽음이 있을거 아니겠습니다. 이거는 베드로가 원하는 죽음은 지금까지 자기 인생을 살면서 나는 이렇게 죽고싶어 라는 것이 이게 살아가면서 누적되어 있을거란 말이죠. 죽음은 삶의 끝이니까.


그 중간에 있던 살다가 살다가 그래 죽을 때는 이렇게 죽어야지 이런게 있다 이 말이죠. 95세까지 남한테 전국 노래자랑 해가지고 95세까지도 계속 일하면서 남한테 인기 얻고 송해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는 그냥 자는 잠에 돌아가셨나? 안 가셨나? 모르게 자다가 얼마나 좋겠어요?! 그건 우리가 원하는 죽음이다 이 말이죠. 이게 자기구원론이죠.


이런 것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은 이미 죽은 인간이에요. 베드로는 뭐냐? 원치 않는 죽음이다 이 말이죠. 원치 않는 죽음. 원치 않는 죽음이니까 베드로 속에 누구 요소가 들어간다? 예수님 요소가 그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가 여기서 반박 아닌 반박이나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어! 이건 내가 대비하거나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어떤 재료 같은 것은 내 쪽에서 준비할 수가 없지요. 재료를 왜 준비해요. 말씀 준비하는데 왜 준비운동을 왜 하는 겁니까? 지금 주님은 우리하고 흥정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할 수 있는걸 지금 말씀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너는 네가 할 수 있고 없고 차원을 떠나서 일방적으로 밀어넣으면 이거는 그대로 가야되는 거에요. 가면서 뭘 알아야 돼요? 이것이 내 뜻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구겨 쑤셔넣은 주님의 뜻이라는 것. 내 뜻이 아니라는 것. 항상 삑사리 난다고 하지요. 어긋남이에요 어긋남. 비틀어짐 어긋남이 항상 성도 인생은 그게 있어요.


그 어긋남에 대해서 베드로가 그 평소에 생각했던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에 20절, 21절에 보면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이니까 묻던 자니라.” 사도 요한이죠.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바로 이렇게 다른 제자들에게 관심을 둔다는 자체가 이게 삑사리에요. 이게 잘못된거에요. 몸이라 하는 것은 아까 강의 전에 질문 나왔어요. 몸이라 하는 것은 그냥 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시간 + 공간. 이게 플러스 알파인데 시간과 공간이 이렇게 발산 돼요. 시간과 공간이.


옛날 노래 들으면 옛날 노래를 듣거나 옛날 영화를 보게 되게 되면 그때 그 모습이 그리운게 아니고 그때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그리운거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니까. 그때만 주인공이겠습니까? 매일매일 내가 주인공이죠. 우리는 한번도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대해서 이 현실에 대해서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주인공 되는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 기억과 그러한 장소만 생각을 하고 그걸 과거의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꼬깃꼬깃 내 깊숙한 이 해마 기억장치에다가 다 담는거에요. 다 담는거에요.


그 캄보디아에 크메르 루즈에 의해서 캄보디아 인민들이 얼마나 죽었습니까? 기억도 안나요. 자료보면 40만 죽었다고 되어있지요. 그거 왜 기억해요? 기억 안 나지요. 국민학교 5학때 담임선생님 이름 기억합니까? 기억 안 나지요. 그런데 “너 그 선생님한테 맞아가지고 너 이빨 나갔는데.” “아!!! 그 선생님!!” 이렇게 하지요. 평소에는 자기 몸과 무관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뭔가 나와 관련성을 하게 되면 “아~기억나.”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구원론이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서 오직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거든.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에요. 나만 행복하고 나만 주인공 되면 그만인거에요. 이러니까 주님이 목자, 주님의 양됨이 전혀 무관한 존재로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만 챙기는데 그게 무슨 목자고 자기만 챙기는게 무슨 양입니까.


내가 개척교회는 100군데를 하고 10군데를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한국교회 다 하지. 왜 100군데 밖에 못했어. 인간이 말하는 그 태도와 말은 항상 그냥 내가 이렇다가 아니라 그 앞에 생략된게 있어요. 내가 주인공인데 나는 내 행복이 제일 중요한데 그래서 이 말을 던진다 라고 하는 것이 중간에 생략되어 있어요.


그걸 왜 생략하느냐 하면 상대방이 너무 힘들어 상대방이 듣는데 너무 힘들어 할까 싶어서 자기만 챙긴다고 욕할까 싶어서 그건 빼고 이야기하지요. 인간의 몸과 시간과 공간 이거는 자기중심 입니다. 자기중심. 자기중심은 항상 자기 구원만 챙기게 되어 있어요. 자기 구원.


지금 하루 하루 살았던 이 시간들이 모여서 천국에 그대로 입성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이런 천국도 없고. 따라서 주님께서는 양이 양답고 구원받은 양이 구원받을 양답고 목자가 목자다우려면 수정이 필요하겠지요. 어떤 수정이 필요하냐 하면은 상관없다 다른 말로 하면 관계없다가 돼요. 관계없다. 이걸 쉽게 말하면 조건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께서 대답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했지요? 올 때까지니까 이건 무슨 개념이냐 하면 이건 시간개념이에요. 시간개념이란 말이죠. 베드로야 네가 네 중심의 시간은 버려라 이 말입니다. 그건 네 나름대로의 과거 기억이지 그것은 내 중심의 시간계산이 아니다 이 말이죠. 계산법이 아니다 이 말이죠.


관계가 상관이 없다는 말은 무슨 상관있느냐 사도 요한이 어떻게 되든 너는 너 할 일만 하면 되지 거기에 신경 쓰냐 이 말이죠. 그러면서 베드로가 평소에 그 인간 됨됨이에 있어서 그 인간 나는 이렇다 할 때 뭐를 참조를 해서 나는 이렇다고 자아정체성을 구성했겠어요? 라이벌이 되는 사람이 있겠지요. 사도 요한이죠.


누가 누가 더 사도답나. 누가 누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나? 그런 질투도 있을 것이고 시기도 있을 것이고 있을거란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되버리면 베드로는 뭐냐 하면 베드로는 아직도 자기가 산 자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합니까? 네가 마지막에 뭐 된다? 네가 원치 않는 그 다음에 뭐죠? 원치 않는 죽음이죠. 원치 않는 죽음.


사명을 감당하려면 양과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의해서 일단은 네가 죽자 이겁니다. 일단 죽자. 죽은 자에게는 뭐가 필요치 않습니까? 어떤 조건도 개입될 이유가 없지요. 죽은 자인데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아이고 멀쩡한 사람 왜 죽입니까? 하는데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님의 체험이 미래의 기억으로 들어온다고요. 그럼 베드로의 미래는 뭐냐? 이미 기어이 원치 않는 죽음으로 확정됐지요. 확정됐다는 그 상태에서 원치 않는 죽음에 확정된 베드로를 그 원치 않는 죽음의 그 시점에서 거꾸로 시간을 한번 되돌려보잔 말이죠.


그럼 죽을 때만 죽었습니까? 그 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간 거에요? 원치 않는 죽음으로 계속 수렴되지요. 수렴. 모아지지요. 그러면 그 수렴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목자가 목자답게 양이 양 다우려면 그 기준은 어디로 수렴되어야 됩니까? 원치 않는 죽음에 수렴과 관련이 있을 때만 목자답고 양 다운 거에요.


최후의 죽음이 원치 않는 죽음을 향하여 질주한다면 질주하는 과정도 뭐가 돼요? 목자가 되고 양이 되는 거에요. 그렇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려고 하면 죽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베드로가 하는 모든 일이 목자답지 않고 양 답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니까요 이게.


아까 다시 합시다. 예수님의 추억과 체험이 베드로 속에 고추튀김 들어오듯이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껍데기만 베드로지 속에는 뭐가 됩니까? 예수님 인생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 부러워가지고 야 너 좋겠다. 이랬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지요.


사도 요한이 오래 사는 거하고 예수님 자신이 죽는 거하고 그게 시기를 할 일입니까? 질투를 할 일이에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목자 양이라는 그 개념을 자기의 과거에 근거해서 해석하다 보니까 누가 시기되는 거에요? 평소에 하는 행세가 그대로 본성이 툭 튀어나오는 거에요.


나는 원치 않는 죽음 주고 아이고 요한 저거는 좋겠다 나처럼 빨리 나중에 더러운 팔자 안돼요. 이런 식으로 시기한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딱 잘라 이야기한거에요. 지금 네가 받은 사명은 사명이 얼마나 그게 중요한건지 그 사도 요한이 어떻게 되는건 그 조건이 너에게 붙을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죽은 자가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죽는데.


아니 그 저 1km 앞에 폐차장이 있어가지고 폐차하러 가는데 화물차 오래 되서 노후되서 폐차하러 가는데 어떤 가게에서 “어이 화물차 아저씨.” “예.” “수박 좀 배달해 주실랍니까? 배달비 5만원 줄께요.” “예, 실으세요.” 실으면 뭐합니까 1km 가다가 폐차하는데 실으면 수박까지 다 폐차하는데.


사명이 나 사는 것보다 우세해요. 우월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 저를 이렇게 살려주셨사오니 더 이상 내 인생이 어떻다 왈가 할 필요 없게 해주시고 더 안 줘도 상관없어요. 그게 상관없는게 이 상관없는거에요. 내가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 세상에 추가적인 어떤 조건을 내가 굳이 달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 주께서 다루시기 때문에. 죽은 자가 뭘 더 필요합니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지요.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저 상관없어요. 왜? 살려주셨으니까. 영생을 주셨으니까. 그동안 우리가 인생 걱정, 근심하는거 다 어디서 나옵니까? 새로운 조건을 자꾸 달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여기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그거는 사명이 없어서 그래요. 목숨보다 더 귀한게 뭐라고 했어요 방금? 사명이죠. 사명이 목숨보다 귀하기 때문에 사명 앞에서 내 목숨도 귀하지 않아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요. 내 목숨이라는게. 내 목숨조차도 나의 그 신발 안에 모래처럼 짜증스러운거에요. 이 산다는게. 사명이 살아있어야지 내가 살아 있으면 안되잖아요.


자,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왜 일체 베드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야박하게 야박한건 아닌데 야박하게 하는지 왜 이렇게 상관없다고 일언지하에 너는 너 할 일해라. 무슨 상관이냐 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다시 베드로는 몸이 있지요. 베드로 몸이 있으면 베드로 몸은 사실 모든 인간의 대표라 할 수 있는데 몸이 있으면 자기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고요 남하고 시기질투하고 이 모든 것이 뭐냐? 누가 주인공이라고 했습니까? 누가 주인공이죠? 베드로에 대해서 누가 주인공입니까? 자기가 주인공이죠.


왜냐하면 살아온 모든 과거가 체험이 내가 주인공이다 내가 주인이야 내가 행복해야 돼 중심으로 다 살아온거에요. 그러니까 상당히 이건 개인적이죠.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개인적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악마를 염두해두고 악마가 이 모든 세계에다가 치명적인 바이러스, 저주의 바이러스를 악마가 심어놨어요. 저주를. 심어놔가지고 이게 그 증상이 모든 인류에게 확 퍼진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보는거에요. 주님께서. 그럼 악마의 바이러스에 대한 악마가 집어넣고 그 바이러스 집어넣은 정서가 뭐냐 하면 오직 악마 말에 충성하게 되어 있어요. 악마의 말에. 죽기를 무서워서 그러니까 헤매는 것처럼. 그렇게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모든 인간을 죽음 안에 전부다 두려워하도록 악마가 이미 바이러스를 다 집어넣은거에요. 다.


물론 잠시 안 무서울때가 있어요. 잠잘 때. 졸음할 때. 어쨌든간에 이게 죽음이라는 바이러스를 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해독제가 필요한거에요. 해독제가. 해독제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이거 외에는 해독제가 없어요.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내 살과 내 피가 없으면 해독제가 없으면 너희들은 이미 죽어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본인이 죽어있다는걸 몰라요. 죽어있다는걸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살려고 하는거에요. 죽음은 기피하고. 그래서 너에게 원치 않는 죽음을 준다 할 때에 이걸 해독제를 갖고 오신 주님의 해독제가 왔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베드로는 뭘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 사도 요한보다 일찍 죽는게 이게 상당히 분하고 상당히 애통하고 절통하고 좀 졌다는 느낌. 재수 없다 이런 생각 드는거에요 이런 생각을.


그걸 누가 간파하고? 예수님이 간파하고 베드로야 사도 요한이 나 재림할 때까지 살아있다 할지라도 너하고 무슨 상관 있느냐 이 말이죠. 개인적인 것을 생각하느냐 이 말이죠. 사실 개인적인 것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악마가 집어넣은 병의 증상입니다.



첫 번째 증상 나만 생각한다. 두 번째 증상 그래서 지옥간다. 두 번째 증상이 죽는게 무섭다. 세 번째 증상이 결국 무서워하면서 다 지옥간다. 그게 세 번째 증상 아닙니까. 자, 여기 제가 이런 말했지요? 그러면 이런 말 듣고 여러분 사명이 뭡니까? 갑자기 내 구원은 이거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고 내 사명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내 오른손에 뭘 쥐면 된다? 해독제를 갖고 있으면 될 거 아닙니까 해독제.



내가 어느 대학 나왔냐? 내가 집안 잘 사냐? 이건 문제거리 되지 않아요. 집안 잘 살면 뭐합니까? 자기 딸내미 의대 가면 뭐합니까? 해독제가 없는데. 주님보시기에 해독제가 없는건 인간도 아니에요. 그거는. 저주받을 인간이지. 아까 했잖아요. 사명이 뭐보다 더 우세하다? 내 목숨보다 더 우세한 거에요 사명이.



성경 그렇게 보니까 되게 간단하죠? 성경해석. 그동안 성경해석 왜 헛갈렸습니까?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주인공 삼아서 자기의 과거체험. 윤리적 도덕적 체험 그것 가지고 더 착하게 살아서 천당가려고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고 또 그런 식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해독제도 없는 교회에서 노골적이다.


해독제도 갖춰지지 않은 유사 해독제. 없어 해독제도 없는데 착하면 천당 갑니다. 그거 하나 가지고 착하면 복 받습니다 그거 하나 가지고 악마가 집어넣은 유사품 그거 가지고 교회 부흥됐느니 뭐 이러고 있단 말이죠. 거기에 단디 속았던 이유가 있지요. 단디. 경상도 말로 단디. 대구은행 신용카드 이름이 단디에요.


왜 단디 속았겠습니까? 마귀가 바보입니까? 지혜로운데. 너 뭘 원해서 교회 나오는지 뻔히 다 알거든요. 천당 가려고 교회 나왔지요. 천당 보내줄게. 예수 믿어라 이거잖아요. 그게 해독제입니까? 그거 믿으면 누가 좋은데? 그거 믿으면 내가 주인공된게 사라집니까?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 말씀이거든요.


예수님 오게 되면 너는 너 죽음도 네 마음대로 못해. 내가 이렇게 죽겠다. 이렇게 살겠다. 하는 것도 네가 주인공되기 위해서 네가 억지로 조건들을 내가 주인공에 필요한 조건들을 네가 이 세상 돌아가는데 골라잡은 거에요. 그게 나의 시간이고 나의 공간이에요.


교회 집사가 되어가지고 국회의원 세 번이나 해먹는 사람. 예능프로 국회의원이 나와가지고 마이 웨이 부르면서 인간성 좋다고 서울 송파구인가? 강남에 국회의원 세 번이나 해먹은 사람. 그 사람 몇 달 전에 자살했잖아요. 이름 모르겠다만. 있지요? 교회 집사고.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이 서울대학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동안 나의 나 다움의 조건을 자기 체험 속에서 계속 끌어모으는데 급급했어요. 결국은 내가 보기에는 한마디로 뭐가 없어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날 사명이 없어요. 사명감이 없어요.


이거 감당하면 구원받는다 이런 사명 말고 구원과 상관없는 사명 있잖아요. 내가 주인공인 것과 상관없는 사명. 주님이 주인공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일방적으로 나를 사용하시는 그 사명. 그 사명이 없으니까 너무 괴로우니까 다른 도피처가 뭐냐 하면은 지가 죽는 수 밖에 없어요. 아내야 미안하다 하면서 죽었어요.


베드로는 자살할 수도 없어요. 자살. 사명이 베드로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예수님께서 못 죽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살하는 것도 자기가 원하는 죽음이잖아요. 베드로는 자살 다 했어요. 자살 할 때 나 안하는데 이런거 없잖아요. 베드로에게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을 준다 이 말은 이미 베드로는 누가 손아귀에 있다? 주님이 죽는 것도 지 마음대로 못한다 이 말이죠.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은 그 죽음을 향한 모든 일어나는 인생사는 모든 일어나는 일도 내 마음대로 아니지요? 내 마음대로라면 사는 쪽으로 자꾸 옮길거 아닙니까. 원치 않는 죽음으로 이미 방향이 정해진 것이 주님의 일방적인 정함이라면 그 정한대로 가야될 모든 그 사건들도 내 소원이 아니고 베드로 소원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이다 이 말이죠.


베드로는 이런 횡재를 한거에요. 횡재를.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내가 원치 않는 일이니까. 어떤 짓거리를 해도. 주님의 말씀은 맨날 이래요. 상관하지 마라. 상관하지 마라. 상관하지 마라. 조건 달지마. 조건 달지마. 너는 조건 달지마. 조건이 필요치 않아.


그것은 베드로가 해독제를 쥐고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베드로 자체가 해독제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20장 22절. 21절 보게 되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 다음에 보세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라고 되어 있지요? 베드로가 훌륭하다는 말이에요? 훌륭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베드로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 일조차도 누구를 사해주면 사해주고 이 일조차도 베드로 본인의 결정입니까? 아니지요.


튀긴 고추 안에 이미 거기 다른게 들어 있으니까 주님이 베드로를 가지고 하는 거에요. 껍데기만 베드로지 속에는 주님이 일하시는 거에요. 그게 뭐냐? “성령을 받으라” 에요 성령을 받으라. 그럼 성령은 어디서 나오는가? 20절에 봅시다.


요한복음 20장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지요? 손과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어요? 손과 옆구리에서 쏟아진게 뭡니까? 해독제 아닙니까 해독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오지요. 해독제라는 이런 생각 그 자체가 세상은 온통 악마가 뿌려놓은 그 질병에 오염되어 있는 완전히 세상 전체가 정신병동 세상 전체가 병동이에요 병동. 전부다 미친 인간들이에요 미친 인간들. 사람도 아니지요. 좀비들이죠.


시신인데 세상 모든 인간들이 시신인데 눈뜬 시신. 눈뜬 시신. 눈은 떴는데 시체에요. 왜? 이미 병원 환자니까요. 왜 환자냐? 해독제가 없으니까. 그 해독제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서 나오지요. 그럼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서 나오려면 무슨 사건이 나와야 되요? 십자가 사건이 나와야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보인다 하니까 해독제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그걸 가리겠어요. 오염시킨 그 당사자가 누굽니까? 주동자가 누굽니까? 악마 마귀지요. 악마는 모든 것을 용납하되 일체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로 마귀는 용서가 안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마귀가 한 짓거리 지 짓거리를 아니까.


그래서 이 땅에는 목자도 없고 양도 없어요. 왜? 전부다 악마 손에 있으니까. 정신병자가 목자, 양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악마가 어떻게 합니까? 목자 만들고 양 만드는 거에요. 진짜 목자 양 생각하지 말고 돌아보지 말라고 얼마든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목자 양 만들 수 있는데요. 삼위일체 만들어 냈지요. 마귀가. 다 만들어내잖아요.


해독제가 있어줘야 뭐가 보이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 내부를 알아요. 모든 인간 내부에 악마의 흔적을 갖고 있는데 그게 뭐냐? 요한계시록 13장 17절,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대구 강의 때 했는데요.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라.” 짐승의 이름이 있지요. 짐승의 이름이 인간내부에 있지요?


그런데 숫자 이름이 뭡니까? 666이죠. 모든 인간이 666이 다 들어 있는거에요. 태어나면서부터. 뭘 새삼스럽게 뭘 받아요. 다 태어날 때부터 다 갖고있는데. 모든 인간 666있는데 그 666이라고 알 수 있는 사람 누구 밖에 없어요? 사명을 받은 자 외에는 다 몰라요. 그 사명을 받은 자가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감람나무 아닙니까. 엘리야와 모세. 두 증인.


뭘 새삼스럽게 바코드 안 받는다고. 그거 안 받아도 다 있어요. 안 받아도 666 다 있다고요. 그거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알기는 돈 못 벌고 매매 못하면 벌벌벌 떨고. 왜 떱니까?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죽기를 무서워 한다는 말은 이미 악마에 짐승에 힘이 이미 다 거기에 오염되어서 바이러스가 다 퍼져있고 퍼져있는 그 숫자가 666이에요.


안에 666 요소가 다 들어있고 그 666끼리 서로 매매를 하니까 소통이 되지요. 그놈의 소통, 소통 인문학 강좌 맨날 소통이 되니까 이야기가 된다고요. 이야기가. 돈 이야기. 돈 이야기하면 다 잠 깬다. 돈 이야기하면. 아무리 졸아도 돈 이야기하면 다 와요. 돈 번다는 이야기하든지 하면 깰 수도 있고 당신 돈 날라간다 돈 내야한다 하면 또 다 깨고.


설교시간에 우리교회는 예외입니다만은 설교시간에 설교 안 들어요. 사람들. 해가지고 설교 중간중간에 그래서 한 구좌씩 200만원 내야된다고 하면 잠 다 깨어있어요 벌써. 잠 다 깨어있다고요. 얼마나 돈 문제가 민감한데요. 소통이 된다니까요. 말이 돼요. 말이 되니까 모든 인간이 75억이라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17장에는 뭐로 봅니까? 75라는 숫자가 의미가 없지요? 1, 한, 큰 성. 바벨론. 딱 하나의 성.


하나를 하나의 성을 3분의 1로 작살을 내는 이만만이고 3분의 1이 다 죽어요. 마병대 숫자가 2만. 그게 딱 하나에요 전부다. 같은 성질의 것이 그러니까 악마가 누굴 공격한다? 악마가 악마를 공격하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조정하신 거에요. 왜냐하면 서로 물고 뜯으면 망할 때는 그렇게 망해야 돼요.


집안이 서로 물고 뜯어야 망한다고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지요. 악마가 악마끼리 서로 싸우고 아마겟돈 전쟁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서 다같이 무너지는 거에요 다같이. 이스라엘이고 뭐고 다같이 무너지는 거에요. 진짜 이스라엘은 하늘에 가 있는데 뭐 하늘에 앉혔는데 뭐.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요한계시록 겁내지 말라고. 골로새서 3장 4절에 이미 이 땅에서 우리는 뭐에요? 이미 죽었잖아요. 죽은 자가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주여 더 이상 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에게 어떤 수모와 고생을 한다 하더라도 저를 살려 줬으면 그걸로 저는 됐어요. 상관없습니다. 돈 없어도 관계없어요. 혼자 살아도 관계없어요. 상관없어요 주여.


이렇게 세상에 해독제를 줬는데 뭐 줄 거 다 받았는데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받는 순간 우리가 주인공이 아닌 것을.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님이 주인공 됨을 드러내는 양이요 목자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진도 나가 봅시다. 제가 아침에 오늘 아침에 이렇게 운동을 하는데 운동이 아니고 빨리 걷기를 하는데 새벽 6시쯤 되기 전에 하는데 뭔가 차가 트럭이 하나 지나가는데 뭐라고 써있느냐 하면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어두운데도 잘 봤어요. 잘 보이던데. 초심불망. 초심만 가지면 망하지 않는다. ‘초심불망’.


자, 여기서 이걸 보고 생각하기를 문제는 이겁니다. 무엇이 초심이냐 하는거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준게 뭐냐 하면 원치 않는 죽음이 초심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한테 어떤 지시를 받은 현재 이 수준의 내 마음이 초심인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베드로의 초심은 필요치 않습니다. 왜? 베드로는 해독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해독제거든요. 베드로는 어떤 죽음을 죽더라고 베드로의 그 죽음은 절대로 해독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제목을 해독제로 할까. 베드로는 절대로 해독제가 될 수 없어요.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죽어도 그거는 남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초심은 바로 예수님이 지정한 원치 않는 죽음 그 지점이 초심이에요. 그러면 그 죽음이 되면 베드로가 죽잖아요. 베드로가 죽어버리면 베드로가 없어지잖아요. 죽으면 베드로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초심이라는 것이 뭡니까? 결국 나는 있어도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떤 없으니까 어떤 조건도 붙일 수 있는 주께 붙일 수 있는 본 종이가 없는 어디가 갖다 붙여요? 없는데.


뭐 밥 주세요. 강도의 도적을 피하게 하시고 바다의 위협도 없게 하시고 사도 바울이 하지 않는 이유가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굶기도 하고 그게 왜 사도 바울에게 그게 별 신경 안 쓰는 이유가 원래 자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기피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날마다 나는 예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나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나는 괄호( )다 나는 네모다.


나는 뭐라고?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짐을 예수님의 미래의 체험이 나에게 주어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됐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함이라. 진짜 튀긴 고추 한번 보여주면 좋겠네. 튀긴 고추 없나. 겉으로는 고추인데 안으로는 고추가 아니에요. 예수님이에요. 사명이 내 삶보다 더 우세합니다. 사명이. 내 사명이.


자, 그렇다면 베드로가 왜 베드로의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가야합니까? 베드로도 몸을 가졌잖아요. 한 고집하거든요. 옛날 자기 이 몸으로 겪었던 그 기억이 한순간에 다 날라가지 않습니다. 베드로 알아들었냐? 옛썰! 알아들었으니까 제가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하도록 놔두지를 않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베드로가 모르는 초심으로 데려갑니다. 베드로가 알지 못하는 초심.


자, 초심이 들어간다면 뭐가 필요없느냐 하면 이게 필요없어요. 마지노선이 필요없어요. 2차대전때 독일이 왔을 때 프랑스가 왔을 때 네덜란드 근방에다가 이거 철통같은 방어선을 할 때 마지노선이에요. 설마 이건 넘어오겠는가 했는데 넘어왔다고요. 우리가 예수님 말씀 듣고 내가 주의 목자로 양으로 산다고 하면서 주여 초심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는데 그 초심이 주께서 점차 데려가는 초심이 아니고 내가 결정하는 초심같은거 있잖아요.


그 초심을 뭐로 무장되어 있느냐 하면 이게 마지노선 이게 윤리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어요. 어떤 선을 넘지 않겠습니다. 이게 뭐에요 이거. 이게 마지노선이라는 말은 주여 이것마저 넘으면 주여 나는 못할 이거잖아요. 그럼 주님이 놀고 있네. 기껏 이게 마지노선이야? 네가? 기껏 이게 도덕으로 무장 이게 마지노선이래. 자기가.


이정도로 착하니까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거는 어떤 목사가 잘못 가르친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태생이 그래요 태생이. 아 이것만큼은 허락 하소서. 이것만큼은. 임재범이가 제가 이거 몇 번 이야기했는데 이제 식상하다 임재범 예도 이제 식상하다. ‘고해’라는 노래. 이제 미안해서 이야기 못하겠다.


다만 임재범이 예수 잘 믿는다는 예수 잘 믿는지 교회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예수 믿고 여자 때문에 예수 믿고 우울증에서 벗어나가지고 했는데 그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가도 제발 이 여자만큼은 허락하소서. 허락하소서. 그게 초심이에요? 그게? 허락하소서가? 예? 남자들 그 노래 임재범 노래 부르지도 못하면서 불러가지고 초반에 잘 보이려다가 목청 다 나가고 올라가지도 않는데 왜 그 노래 불러가지고.


여기에 이 초심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걸 잠시 설명하고 쉽시다. 우리가 찾지 못하는 초심. 그럼 주님이 찾아가시겠지요. 찾아내시잖아요. 이미 주님이 초심을 줬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는거에요. 성령께서 알게 하시는데. 그 초심 찾기 과정 속에서 선지자의 도리 또는 선지자의 자세에 대해서 구약부터 계속 이어져왔어요. 구약부터.


에스겔에 보면 선지자를 뭐라고 하느냐하면 목자라고 해요. 그러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목자라면 다른 선지자는 뭐가 되느냐하면 가짜가 되겠지요? 그걸 삯꾼 목자라고 합니다. 가짜. 엘리야 엘리사가 선지자라면 그 당시에 바알 아세라는 가짜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유명한 엘리야도 초심을 어디까지 받습니까? 초심을 잘못 측정했지요. 그 850:1로 이겼잖아요.


그런데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참하다만은 이세벨이 와가지고 현상수배 때려가지고 엘리야 보거든 죽여버려라 이랬단 말이죠. 그러면 나 살려라 도망갑니다. 도망간 사람 말이 뭐냐 하면은 나만 남았다는 거에요. 엘리야가. 이 세상에서 기독교 신자 나 밖에 없다 이 말이랑 똑같애. 성도 나 밖에 없다고 한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자기의 과거의 추억을 추억이라는 백과사전을 뒤집어 보니까 제대로 믿는 사람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은 자기 체험에 준해서는 맞는 이야기에요. 주님께서는 모르는 이야기를 던져 버립니다. 남은 7000명. 그러니까 엘리야조차도 나만 남았다가 굉장히 순수해 보이고 이건 자기의 마지노선이라고 봤는데 뭐가 됐어요? 그 마지노선이 허물어져버린 거에요.


너는 아직도 메시아다? 아니다? 너는 메시아가 아니에요. 그래서 엘리아가 지옥 갔습니까? 잘못 측정해가지고? 어디 엘리아 지옥 갔어요? 마태복음 17장에서 모세하고 누가 나타납니까? 엘리야 등장하잖아요. 구원 받았잖아요. 엘리야가 허튼 소리했는데 천국가지요?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왜 천국 가 있지요?


바로 그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바꿔주기 작업을 계속 해왔던 거에요 계속 선지자에게. 바꿔주기 작업. 너가 아는 그게 바이러스 악마의 병균체를 갖고 있는 너를 주님께서 그때 시대에 필요한 해독제를 조금씩 주면서 그 해독제의 본질과 본 모습을 선지자의 계획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진짜 초심에게로 접근시키는 겁니다. 그게 구약의 계열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초심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거죠. 그러고 뭐합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이죠.


오늘 아까 요한복음 21장에 뭡니까? 네가 원치 않는 죽음. 그래 그 죽음이 사실은 초심이 뭡니까? 베드로가 경험했거나 예상한게 아니고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체험한 그 체험을 베드로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집어넣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도를 건드리면 저주받는다고 했지요? 성도 건드리면 저주받는 이야기나 아까 요한복음 20장에 네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네가 그냥 두면 사함이 없을 것이란 그 이야기가 똑같은 차원이거든요.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뭐겠어요?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삼촌이 필요합니까? 죽은 대통령이 필요해요? 죽은 자에게 필요한게 뭡니까? 나를 눈뜨게 해서 깨워주신 분만 있으면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살면서 주님이 깨워준다면 주님 외에 주님의 살과 피 그 해독제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우리에게 필요한게 없습니다. 아무것도. 정부미도 필요없고. 정부미 알아요? 정부미도 필요없고 배급제도 필요없고 아무도 필요없어요.


아니 죽은 자를 깨워줬으면 그걸로 됐지 뭘 더 원해요?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놀립니다. 기독교를 막 욕해놓고 화내니까 “어! 기독교에 보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네가 화를 내네? 왜 너 사랑 안해? 너는 왜 원수를 사랑 안해?” 이런 식으로 이제 골려먹을라고 그런 소리 하는데 원수 사랑이 뭐냐 하면 “너 지금 병들었어.” 그게 사랑이에요.


“아버님 병들었어요.” 이게. 시어머니 시아버지에 대한 최고의 사랑은 추석이라고 봉투에 돈 넣어주는게 아니고 “예 갔습니다. 예 벌써 물이 빠졌네요. 끝났습니다. 지옥갑니다. 아버님. 아버님 지옥가시고 어머님 지옥가시고. 두 분 아니면 지옥가는걸 어디서 발견할까.” 뭐 이런 식으로. 그게 최고의 사랑이에요.


죽을 때 되어가지고 자식들 다 불러놓고 자식들은 좋아가지고 아버지 힘내세요. 이제는 집은 누구 주겠나? 땅은 누구 주겠나? 평소에 오지도 않는 지 마누라까지 데려와가지고 꿇어앉으라 해가지고. 자 한번 들어보자 야야 목사님 같으면 그럴 거에요. “너는 죽었다. 병들어 마귀의 병들어 죽었어.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다. 간다 나. 자러 간다.” 꼴까닥.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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