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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17:55:19 조회 : 282         
강남-요한복음 총정리(4)-요한복음 9장부터 (사이)191015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75.195.96.96)
강남-요한복음 총정리(4)-요한복음 9장부터 (사이)191015a-이근호 목사



자, 첫째 시간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부터 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는 성경 말씀에 집중하라고 제시한거죠. 성경 말씀에. 성경 말씀에 집중하고 싶어도 우리가 처해있는 이 상황을 끌고 성경 말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냥 성경 말씀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지금 내가 처한 입장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바라보게 되거든요. 그 바라보는 방법은 그 시대를 이해하자 라든지 그 때 그 당시의 마음가짐을 생각하자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성경 말씀의 해석은 어디서 나와야 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에서 나와야 되거든요. 그럼 십자가 사건에서 뭔가 십자가가 저수지라면 저수지에 댐이 좀 터졌다고 봅시다.


그러면 거기서 물이 흘러오겠지요. 시냇물이 아니고 댐에 있던 원래의 물, 물이 아래로 흐른다 말이죠. 그러면 그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죽음이 담겨있고 그 죽음이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했기 때문에 이제 이 성경 말씀은 그 십자가의 완성의 의미를 담고 도로 지상에서 흘러나오겠지요?


그러면 그 십자가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을 우리가 9장 같은 곳을 본다면 이미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것은 네가 설쳐도 별 의미 없다는 거에요. 네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아무리 설쳐봐야 거기에는 어떤 구원에 대한 특효약이 특효 효력이 거기 없어요. 약 효력이 없어요. 우리 설치는 것은 약 효력이 없다고요. 우리가 조심히 사는 것도 효력이 없어요. 죽은 자로서 편입되어야 되겠죠. 이 말씀 속에.


그러면 이 성경 말씀 자체가 우리가 말씀을 지키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하면 도로 성경 말씀이 너는 왜 죽어야 되며 왜 죽은 자며 왜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홀로 성취해야 되는가를 그 이유를 도로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출발점이 뭐냐 하면 출발점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삼고 있는 우리의 입장과 계속해서 우리 입장에 대해서 삭감하는 조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성경에 이거 해석자체가 근원적이다 또는 다른 말로 근본적이다. 또는 출발점, 뭐 다같은 뜻이라고 합시다. 근원적, 근본적, 출발점 이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집이 이명직 목사님 집이라고 칩시다. 이 집에 내가 들어오게 되면 "어! 목사님 우리 집에 들어왔네."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어딜 봐서 이 집이 목사님 집입니까?"


그 이런 질문 자체가 황당하지요? 딱 보면 모릅니까? 문패보고 딱 보면 몰라요. 요새는 문패 없지만 딱 보면 이해하겠지요. 왜 이 집이 그 다음에 들어가는 단어가 있지요. 내 집이다라고 할 수 있느냐 이거에요. '내'가 들어가요. 이게 내 집이다.


당신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할 때 이게 내 집이라는게 과연 이게 근원적인가 하는 거에요. 이게 출발점이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 내 집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내 집 없지요? 벌써 출발점이 성경적이 아니에요. 세상에 모든 것은 누구 것입니까? 주님 것이지 내 것은 없잖아요.


그러면 이미 성경 자체가 내 집이다라고 평소에 우리가 내 집이니까 당신은 손님으로 왔습니다라는 이 생활 태도 이 마음 자세부터 어떻게 하느냐? 더 근원적으로 더 원천적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말씀이 바로 성경 말씀이고 그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9장이 되는 겁니다.


뻔한 이건 누가 봐도 뻔하다고 하는데 그 뻔한 것을 더 내려가게 하는 거에요. 뻔하다고 여기는 그 출발점 자체를 문제 삼으시는 거에요. 네가 왜 건방지게 남의 집에 왔어. 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뭐냐? 이집은 내 집이고 너는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그 의식 자체가 이게 과연 옳은 것이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내 집이 아닌데 그 사람이 들어왔고 나는 내 집도 아닌 곳에 그 사람과 만났다라는 이런 생각을 왜 못하느냐 말이죠. 이런 생각을. 내 자식은 내 자식이다. 이게 우리는 흔한 이야기잖아요. 과연 이게 성경 어느 대목에서 네 자식이라는 것이 어느 대목에서 나오느냐? 성경에는 내 자식이라는게 없어요.


성경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내 자식이라는 것부터 출발합시다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라는 것도 심지어 내 자식이라고 하면 내가 있어야 되잖아요. 내가 과연 있을까를 자문해야 돼요. 내가 과연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제자들이 소경된 자를 봤을 때 소경된 자가 하나님께서 소경된 자를 제자들 앞에 이렇게 내보낼 때에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어떤 소경에 대해서 평을 하는데 그 평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평소에 제자들이 어떤 출발점을 가지고 어떤 근원점을 가지고 모든 일상을 살았는가가 다 들통나게 만드는 거에요.


소경 보고 하는 말이 저 소경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자기 조상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제자들 자체에서 질문을 할 자격이 권한이 본인한테 정당하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정당하게.


그러면 주님께서 여기서 답변을 할 때 그들의 답변을 할 때 그들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질문의 출발점 자체를 엘리베이터 태워가지고 지하 5층으로 더 꼴아박게 만들어요. 지하 5층으로. 너는 본래 네 자리가 아닌 곳에서부터 붕 떠서 지금 일방적으로 네가 설정한 그러한 위치에서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는 더 내려갈 필요가 있어.


그 질문 자체가 그 질문 자체에서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해도 너희들이 얻고자 하는 해답으로 너희의 질문한 그 자리로 되돌아올 수 없어. 내가 하는 그 답변은 네가 질문한 자리마저 무너지게 만드는 거에요. 그게 원래 네 자리가 아니야. 왜 그래. 네 자리 아닌 거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질문의 오류에요. 질문의 오류는 이게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반성의 오류와 서로 통합니다. 사람이 반성을 한다는 것은 반성하기 전의 모습이 맘에 안 들어서 꼭 반성을 하고 싶은 거에요. 회개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싶어요.


그러면 반성하고 반성했다는 그 의식, 그 의식은 그 의식이 달라붙어야 될 그걸 이제 임신했을 때에 수정란이 착상이라는 말을 하죠. 그걸 착상할 수 있는 새로운 몸이 필요한 거에요. 새로운 몸이. 그 몸은 누구의 상상력에서 나왔어요?


기존의 내 몸의 반성하기 이전의 몸에서 상상해서 그런 인간을 상정하지요. 반성이 착상이 되지 않는 '나'가 이제는 반성하고 난 뒤에 반성이라는 장점이 달라붙어있는 새로운 자아를 염두해두면서 “나 회개합니다. 나 반성합니다.” 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출발점은 그거는 자기가 조종한 거죠. 그래가지고 신앙생활 10년 20년 해도 무슨 소용있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거에요. 뻔한 이거는 옳다고 여기는 뻔한 이야기 그 뻔한 게 누가 일방적으로 뻔하다고 이야기했는가.


나는 내 집이 있다. 내 집이 있으니까 이 집은 나의 것이다 하면 나는 집이 있고 집이 있음은 이게 곧 너의 집이 아니고 나의 집이다 함으로써 ‘나’라는 이것을 할 때 집과 ‘나’라는 것이 먼저 근원이 되고 집은 부수적으로 나한테 속하여있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나를 상정하는게 문제가 있다면 이 집은 내 집이 될 수가 없는 거에요. 내 집은 영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본 적 있어요? 없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 9장에서 아주 난해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는 겁니다.


여기에 소경된 자 있지요. 소경된 자. 여기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죠. 제자를 보고 저 사람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할 때는 이 소경된 자 이쪽에 하나의 물체라고 봅시다. 물체. 또는 사물 어려운 말로 하면 객체이지만 이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냥 사물, 대상. 대상이 있고. 여기 소경이 볼 때는 이 제자들도 하나의 뭡니까? 대상이 되지요.


질문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제자들이 소경을 보고 일방적으로 평을 하면서 저 사람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어딜 주목하느냐 하면 의도적으로 소경된 자를 제자들 앞에 지나가게 함으로써 이러한 대상과 대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없는게 새롭게 발생되는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사이에요. 간격입니다. 간격. 사이. 만남으로써 새로운 ‘사이’라는게 돼요. 사이 그 노래 강남스타일 싸이 말고. 둘 사이의 빈 공백에서 관계성이 등장하는거에요. 주님께서는 뭘 주목하느냐 하면 네가 오느냐 네가 오느냐가 아니라 둘 만남으로 없었던 새로은 사이, 새로운 관계를 주께서는 주목을 하는 겁니다. 새로운 사이에.


이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제가 어렵다고 미리 당부했습니다. 어렵게 갑니다. 이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의미가 나와요 의미가. 사람은 만나지 않으면 의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누굴 만나야 의미가 생겨요.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의미가 누구하고 만나는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면서 여기서 뭐냐 하면 이 둘 사이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두 가지 종류밖에 없어요. 저 사람과 내가 연결되어 있는가? 연속성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둘 밖에 없으니까 하나는 뭐냐? 대립 또는 대치입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있는가? 연속성이겠죠.


그러면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르지 이거는 반복성 또는 대립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이 신체, 신체를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걸 매질, 어떤 것을 흐르게 하는 매질 있지요. 소리가 흐르려고 하면 파동이 있어야 되고 공기가 매질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나의 그 중간 통과하게 하는 매질같은 것으로 신체가 있는 겁니다.


주님의 주목은 여기에 그들 사이에 있다고 보는 거에요. 인간의 주목은 뭐냐 하면 사이에 있지 않고 본인에게 있어요. 본인에게. 본인에게 있기 때문에 나는 저 사람과 사귈 것이냐? 연속성. 이제는 관계를 끊을 것인가? 대립성. 그렇게 되지요.


그렇다면 내가 저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의미가 각자 갖고 갈 거죠. 지금 여러번 이야기 합니다만은 주님께서는 각자 저 사람 만나고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보는게 아니고 진짜 의미는 뭐냐 하면 너희 둘을 마주치게 해서 너희들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이, 새로운 의미를 따로 뽑아내시려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신 거에요. 두 사람을.


사람들은 사이에 주님께서 여기서 강조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뭐냐 하면 사이에 강조점이 있는게 아니고 나는 저 사람보고 내가 더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소경이 아니니까 나는 저 사람보다 의롭다는 것을 알았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의미의 보유, 갖고 가는 거에요. ‘의미의 보유’. "야 나 저 사람 만나니까 나 신자 맞아. 나 저 사람 만나니까 나는 잘났어. 역시 나는 지금 천국가고 있는게 맞아." 다시 사물인 신체에 오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신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사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간격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매질인데 인간은 매질으로 보지 않고 중간, 매질, 중간으로 보는게 아니고 오히려 내가 챙길 거 챙겼다고 우기는 거에요.


이게 인간이 악마의 앞잡이 되어가지고 선악과 챙기는 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선악지식을 나는 챙겼다고 보는 겁니다. 보유했다고 보는 겁니다. 나는 소유했다고 보는 거에요. 제자들은 지금 자부합니다. 주님과 우리가 한패라고 여기는 거에요.


한패라고 여기는데 주님께서 소경된 자를 지나가게 하니까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의 의견이 아마 주님 보시기에도 옳은 출발선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매질이 되어야 돼요. 중간 매질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야 될 우리가 하나의 대상처럼 최종 목적이 되고 마는 거에요.


인간이 어떤 목적이 있어버리면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기의 자기 자신이 목적으로 되는 그러한 줄을 세워요. 정렬을 해요. 배열을 한다니까요. 내가 이렇게 나답게 되기 위해서 일어난 일들 다들 모여라가 돼요. 다들 모여라.


동창회 할 때 고등학교 졸업하고 10년 뒤 어디서 만나자 해서 나무 밑에다가 캡슐집어넣고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만나냐 해가지고 엽기적 그녀하고 비슷한 거 해가지고 상수리 나무 밑에다 이렇게 캡슐 해가지고 10년 뒤에 어디서 만나자 해봐야 동창들 다 안 만납니다.


꼭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자들만 오던지 아니면 정수기 파는 보험 하는 애들만 와요. 다른 사람은 오지도 않아요. 온다고요. 그러면 60명중에서 모인사람이 10명이라면 연락해서 10년 뒤에 만나자하는 약속대로 왔다고 한다면 그 10명 중에 꼭 대장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일 잘 된 사람. 제일 잘 된 사람. 치과의사라든지 이런 거. 변호사 됐다든지 이런 사람. 특히 여자 같으면 좋은 집에 시집갔다든지. 그런 것. 꼭 잘 된 사람들만 이렇게 오면 이게 정렬이 돼요. 정렬이 된다고요. 왜? 빨대 꽂고 얻을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주 뭐 붕붕 띄워주지요. 한잔 받아라 하면서 하지요. 나 보험 하는데 하나 넣어줘 이런 식으로 하고 하겠지요. 인간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그 앞에 열중쉬어 차렷 줄을 세워버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패라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 소경된 자가 우리 선배에 합류할거냐 말거냐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본부니까 아지트니까. 자기가 중심이니까.


그러나 주님은 어디를 주목한다고요? 제자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과 소경이 만남으로써 제자들이 갖고 있는 이 출발선을 더 바닥을 치게 만들어요. 더 내려가게 만들어요. 쉽게 말해서 어딜 봐서 너가 너냐 이 말입니다. 어딜 봐서.


네가 너라고 보고 인식하고 규정하고 있는 그 규정 그거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를 매질로 보지 않고 어떤 실체로 보기 때문에 실체는 뭘 갖는다? 목적을 가져요. 인간은 목적을 갖는 순간 모든 일어난 일을 내 중심의 목적에 부합되려고 적재적소에 전부 다 정렬을 해버린다고요.


이런 일은 나를 위해서, 저런 일도 나를 위해서, 이런 일도 나를 위해서, 나 천당가기, 나 구원받기 위해서 다 일어난 일로 간주해 버린다고요. 주님은 그 사이를 본다고요. 두 사람 만남 가운데서.


연속성을 갖는다든지 대립을 갖는다는 것은 두 물체가 두 인간이 만났을 때 둘 중에 하나 밖에 없어요. 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내 적으로 여길 것인가? 이 두개 밖에 없지요. 둘 다 엉터리에요. 둘 다. 둘 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내가 필요한 사람, 저 사람은 나의 원수, 두 번 다시 만날 필요도 없는 사람, 이것밖에 안된다고.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이거는 뭐냐? 엉터리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지만 모든 말씀은 저수지죠. 완성되어 있지요. 십자가지요.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물이 흐른다 했지요? 댐이 터지듯이.


물이 흘러버리면 요한복음 9장이고 모든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인간은 이미 뭐가 된다? 인간은 죄인이 되는게 돼요. 그러나 지금 십자가 하기 전에 제자들의 모습은 자기가 "아이고 주님이여 제가 소경 되야 돼요." 라고 손들고 나서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쯧쯧쯧.


저 사람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조상 죄 때문입니까? 쯧쯧쯧. 우리는 건전한데. 우리는 괜찮지요?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이들의 그렇게 생각하는 출발점을 낮추어서 어디에 합류시키냐 하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로 합류시킵니다. 합류시키는 그 전에 어디 나오느냐?


그들이 기피했던 소경의 출발점에 집어넣습니다. 소경 출발점에다가. 제자들아 너희들이 한번 소경 한번 되어 볼래? 바로 이 소경은 제자들 앞에 서기 전에 이 소경은 누구하고 섰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하고 서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소경을 붙들어서 제자들 앞에 보임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보이기 이전에 예수님 앞에 소경, 여기서 예수님과 소경 사이에 무엇이 등장하겠습니까? 사이가 등장하지요 사이. 오늘 제목은 '사이'로 하면 간단한데.


왜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이렇게 거론시키느냐? 왜 소경을? 소경 자체가 아무 볼 품 없어요. 소경이 이런 소리 합니까? "예수님 감사해요. 이 소경된 이 몸은 내 몸이에요." 이렇게 합니까? 아니죠. "주님 좀 바꿔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눈을 뜬 제자들은 눈 뜨고 있는 제자들은 이 제자인 자기의 몸을 대단히 자기한테 중요하게 여기는 겁니다. 어느 쪽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줍니까? 어느 쪽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보여줍니까?


예수님 오신 이유는 제자들과의 만남이 아니라 소경과의 만남에서 이 사이에서 모든 말씀이 완성이 되는 거에요. 예수님도 이 말씀이 희생되야 되고 소경도 희생되야 되고 그렇게 해서 여기서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등장하는 겁니다. 새로운 의미.


그 의미는 매질이 따로 보유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표현한다고 되어있어요. 표현한다. 오늘 제목 바꾸자. ‘표현’으로. 몇 번 바꾸는지 모릅니다만은. 둘이 대화하면서 만약에 이게 보유가 되어버리면 어떤 의미를 어떤 복음적 의미를 내가 갖게 되면 그게 뭐가 되느냐?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이렇게 돼요.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아니야.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표현이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당신은 누가 당신을 그런 고백을 하게 했습니까? 라고 둘을 서로 연속이나 대립이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세우신 분을 새삼 찾게 돼요. 그 없는 관계를 만들어준 그 분을 쳐다보게 된다고요.


그러면 누가 잘났다. 누가 못났다가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성립이 안되지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러한 취지는 그 당시에 요한복음 9장 마지막에 나오지만 바리새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바리새인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왜 구원 되야 되느냐?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다는 그런 조건들을 자기 앞에 정렬을 시킨 거에요. 나는 저 사람보다 낫고 저 사람 보다 낫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다. 이게 얼마나 지옥 가는 면면이에요.


우리가 요한복음 그냥 이렇게 보게 되면 또 나 구원받은거 확인해보자 하는 식으로 하게 되지요. 무심코 그런 식으로 나를 위해서 성경 보는 그런 태도가 그게 지옥 갈 태도인 것을 상상도 못하지요. 마치 이 집은 내 집입니다 하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고 너무나 지당하고 누가 봐도 내 주장 옳은 것을 증명하는 그 이 집은 내 집이라는 거에요. 과연 내 집인가를 스스로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주께서 집을 허락할 때 나 보유하라고 준 게 아니고 집이라는 사물체와 나라는 사물체 사이에 이게 내 집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에요. 내 집에서 나가세요. 그 말이 맞아요?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오게 되면 아 여기 사세요. 저는 이런 사람 아닙니다. 대번에 나가세요 말이 나가세요지 저리 꺼져라. 쉴려고 하는데 어딜 들어와. 꺼져라 이렇게 할거에요. 그렇게 할거에요. 그러나 돌아서서 과연 내 집일까? 과연 이 집이 내 집일까? 그 사람을 왜 내보냈을까?


아이고 미안합니다. 내가 호수를 잘못했네요. 왜 호수를 잘못 읽은 분이 왜 갑자기 초인종 누르고 왜 잠시라도 2초라도 왜 들어왔을까? 그걸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그걸 생각해봐야 됩니다. 도대체 나의 자리라는 것이 나한테 과연 합당하냐 이 말입니다. 내 자리라는게.


이거는 내 집은 내 보유거든. 내 소유 아닙니까. 내 소유라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요? 합당치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내 소유라는 것도 없고 나는 그냥 표현할 이미지이지 ‘나’ 라는 존재는 없어요. 그냥 주님을 보여주는 매질에 불과해요. 중간 매질에 불과합니다.


‘나’ 란게 없어요. 그걸 언제 아느냐. 죽을 때 알지요. 우리 외숙모가 100세 때 돌아가셨는데 만으로 99고 100세 때 돌아가셨는데 지금 돌아가셨어요. 화장해가지고 재 됐습니다. 없습니다. 백년 살았는데 없어요. 백년 살았는데.


그런데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더라 이 말이죠. 사람이 내일이 없다면 목적은 목적도 같이 날라가버립니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아둥바둥 살려고 하는 이유는 내일이 있다는 조건 하에 이러고 있는 거에요.


이 순간이 나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나의 목적같은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제발 의미 없게 살아라. 의미는 내가 채워줄게 내가. 내가 그때 그때 채워줄게. 어떤 의미로? 네가 너라는 것을 계속 바닥을 낮추어서 낮추어서 십자가 앞에 세울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나를 위한 나는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거에요. 마귀가 그렇게 우리를 속여 온 겁니다. 사기친거에요. 지난 시간부터 사기라는 말이 많은데. 자꾸 등장하는데 나보고 사기친겁니다. 남들 다 그러니까 그런줄 아는 거에요.


성경가지고 십자가를 증거하지요. 십자가를 증거하니까 십자가는 좋은데 실례지만 십자가 질 때 그 날 예수님의 손발 씻었습니까? 이게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는 좋은데 예수님 손발은 씻으셨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그런 질문한다면.


이건 뭐냐 하면 이왕에 피도 손발 씻어야 깨끗한 피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럼 관심사가 뭐에요? 깨끗한 피는 손발 안 씻은 피보다 더 깨끗하다는 의식이 뭘까요? 그런 생각이. 그것은 무슨 생각이 가미된 겁니까? 깨끗한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가미되지요.


그러면 그것이 가미됐다는 말은 본인의 의도는 뭡니까? 뭐하게 살자? 깨끗하게 살자죠. 앞에 뭐가 붙습니까? 누가? 내가. 내가 깨끗하게 살자. 내가 깨끗하게 살게 되면 결국은 나보다 못한 사람은 내 깨끗함을 증명해줄 확인해줄 나보다 못한 사람들의 정렬이죠.


그럼 나는 그런 사람들만 수집하는 거에요. 나보다 못한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그걸 수집하는 거에요. 내가 있음이 우리에게는 영원한 계륵이에요. 계륵. 계륵이라는 뜻 알지요? 닭뼈를 먹었는데 이게 내려가지도 않고 올라가지고 않고 목에 걸린거에요. 계륵이에요 계륵. 나라는 의식이.


아무리 은혜 받고 은혜 받아도 시간 10초도 안 지나서 앞에 '나'가 붙어요. 나는 은혜 받았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갑자기 매질에서 하나의 내가 새로운 반성이 장착된 상상되는 새로운 '나'가 되어버려요. 그 나를 아까워서 못 버립니다. 그 '나'가 살면 그 집이 누구 집 돼요?


그 집이 내 집 되어버려요. 내 집 챙기는거에요. 계속 나 챙기기. 육신의 본성은 정말 이거는 어떻게 이 고질병을 고칠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5장 34절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자, 왜 주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왜 주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를 사람 취급을 안 하거든요.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하던지 맹세를 할 때는 출발점을 견지하면서 하거든요.


이 출발점은 양보 못합니다라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해서 나에게 내가 원하는 목적에 부합되는 의미로써 줄 세우기 위해서 주님 앞에 어떤 흥정에 나선다 이 말이죠. "주여 이렇게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주님께서 우리를 누구하고 만나게 하는 것은요 우리를 망하게 하는 거에요. 제가 지난 낮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들은 메시야 찾고 예수님 찾지만 예수님은 바짝 마른 건어물과 같아서 빨대 꽂아봐야 뭐라고 그랬어요? 같이 죽자 외에는 다른 말이 안 나옵니다.


예수님이 통통해야 빨대 꽂을게 있는데 예수님이 바짝 말랐어. 거기서 주의 뜻이 뭡니까? 그러면 같이 죽자에요. 같이 죽자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같이 죽자는 말은 같이 망하자는 겁니다. 같이 망하자. 같이 바닥을 치자.


이거 외에 다른 주의 뜻은 없습니다. 딱 이거 하나 뿐이에요. 주의 뜻은 이거 하나 뿐이에요. 이것과 연관해서 천하 자식도 내게 합당치 않다. 이것과 연관시켜서 이게 다 맞아들어갑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미워하라. 다 맞아들어가요.


요한복음 9장 보세요. 10장 11장 나사로의 부활, 그리고 10장에 나오는 그 양과 목자. 나는 죽었기에 목자 된다는 그 이야기. 요한복음 9장에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내가 소경이라고 하니까 본다. 즉 모든 이야기는 뭐냐 하면은요. 너는 네 자리 모른다에요. 같이 망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같이 망신당하자. 망신당하자. 같은 뜻이에요. 십자가를 보유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매질이지 십자가가 나의 인생의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되면 안돼요. 십자가도 알지만 깨끗하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그건 무슨 의미죠? 그게 연결되는 의미입니까? 그게 만날 수 있는 의미에요?


결국 그렇게 해야 될 이유를 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변나오겠어요? 필히 뭐가 나오겠어요? '나'가 나오겠지요. 나는 그걸 원합니다라고 '나'가 나오겠지요. 네가 원하는 것이 왜 성경에 왜 주님이 들어줘야 되는 이유가 뭐냐? 그걸 네가 근거를 한번 제시해봐라.


근거가 어디 있어요? 근거 없어요. 왜? 우리는 표현하는 거니까. 내가 보유하고 있는게 아니고 표현하고 있거든. 표현.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한다. 두 사람이 결혼같은 것을 보유한 거에요? 성경대로 하면 표현한 겁니까? 표현한 거에요.


시집가는게 팔자 고치는게 아니에요. 혼자 망하다가 물귀신, 같이 망하는 거에요. 같이 주께서 지정한 자기의 본자리 찾아가는 거에요. 갑자기 오늘 제목을 이렇게 바꾸고싶어요. 연못 속에 꼬르륵. 물방울만 탁탁 남고 꼬르륵.


확정된 자아를 우기게 되면 그 타인과의 사이, 간격이라는 중요성이 날라가버려요. 소멸되고 어디로 되느냐? 다시 서둘러서 내가 잘났다로 서둘러서 그 필요한 정보를 다 끌어모아서 그걸로 자기를 재정립해요. 인간은.


나 은혜받았다. 은혜 또 소유합니다. 나 기적받았다. 또 소유합니다. 나는 복음이라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그것도 소유합니다. 하나의 관통하는 관이 되어야 될텐데 하나의 통이 되고 마는 거에요. 제가 오후 설교때 이야기한 것처럼.


맹세하지 말라는 그 이유 아시겠지요?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맹세하는 그 자세 자체가 그게 주께서는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낮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너는 빠져라. 매질로. 중간 매질로 빠지는 거에요. 매질로.


소리가 전파할 때는 공기가 있어야 되듯이 또 물이 있어야 되듯이 하나의 우리는 공기 같은 주님이 주신 환경에 속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한다고 치고 그러면 이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주님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솟구쳐 올라오는 거에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있지요. 제자들이 있지요. 여기 소경 있지요. 예수님 있지요.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고 소경 보기에 예수님도 똑같은 인간으로 봤는데 이 예수님과 이 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전에 알던 다른 예수님으로 올라가면서 이 소경과 제자들은 상대적으로 현재 내가 유지했던 내 자리라는 것이 이게 허락될 수 없는 자리인 것을 반대방향으로 내려가겠지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졸지에 소경 아니라고 우겼는데 졸지에 뭐가 됐습니까? 소경이 된 거에요. 예수님이 말씀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소경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못했지요. 기본적으로 나는 눈 떴다는게 나는 눈 떠 있다. 소경이 아니다가 기본인데 뭐로 바뀝니까? 나는 소경이다라고 바뀌겠지요?


그러면 그 뒤에 나는 뭐냐 하면 이건 어디서 온 '나'냐 하면은 이 사이에서 온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나'가 되어버려요. 부여받은 나인데 나 뒤에 붙는 이것이 나는 건전하다가 아니라 나는 뭐가 된다? 소경이다 이 말이죠. 이 소경이라는 것은 내가 기피하고싶은 거에요. 내가 원치 않는 바닥이에요. 나는 그렇게 되고싶지 않는 요소에요 이게.


그러니까 인간은 평소에 뭐냐? 자기가 되고 싶은걸 한 거에요. 멋있어 보이는 것, 잘나 보이는 것, 남 앞에 내세울게 있는 나. 이 집은 내 집이다 그런 거. 이러한 논리는요 한번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더 깊은 십자가 자리까지 가는 거에요.


다 왔다 싶으면 지하 6층인데 지하7층 있는지를 몰랐어요. 7층이 끝인줄 알았는데 지하 12층 있는지 몰랐지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내려가는 거에요. 끊임없이. 계속해서 내려가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그림으로 그리게 되면 알기 쉽지요.


나는 내가 여기 있다. 그런데 어떠한 주님의 개입, 사건으로 인하여 나는 끊어지고 새로운 내가 되었다. 보통 이렇게 설명을 많이 하거든요. 사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게 아니고 나는 그대로 나로 가요. 나로 가는데 방향이 나로 가는데 나를 여기서 어떤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가는 나를 점선으로 표시합니다.


내가 계속 가는데 결국 나는 없어진다 또는 없다가 돼요. 없다가 되면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과 공포와 남들이 나를 이렇게 나를 조져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 두려움이 없어지는 순간 동반해서 같이 없어지겠지요. 없어지겠지요.


그 박스에다가 옛날 7살 때 9살 때 일기장부터 쭉 있는데 그게 일본 태풍에 다 날라가버리면 다 없어지는 거지요. 주께서는 우리를 죽임으로써 우리 안에 들어있던 근심 걱정 두려움 공포도 같이 날라가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뭐다? 방향이 이쪽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주 오는 방향에 있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심에서 마중 나오는 '나'가 있어요. 이거는 주님의 있음이라는 조건하에 표현으로써의 '나'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표현이 아니고 내가 개체가 돼요. 개체 또는 개인이 되는 겁니다.


죽어라고 쥐고있는 양보 못하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나. 당구공같은 나죠. 이 '나'가 있으면 뭐가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하는 대립이나 우리는 생각이 같아요 라는 연속성과 대립이 두가지 생긴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이거는 나를 내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런데 이 소유함으로써 소유하게 되니까 이걸 지키려고 하겠지요? 나 소경 아니야 왜 자꾸 나 소경되지 싫어. 나 소경 아니고 싶은데 주님은 왜 소경이라고 해. 원망스럽다. 뭐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요. 계속해서 이건 내 집이야 내 교회야 우기고 싶지요? 이게 없어진다고요.


이게 없어지니까 더 초조해서 뭘 하느냐 하면 반복적으로 자기 정립이 되는 겁니다. 자기 정립. 반복적으로. 자기 정립이 되는데 여기서 오는 여기서 예수님으로부터 우리한테 제공하는 예수님의 있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있는 표현.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면 생겨날 수 없는 그 무엇. 주께서 십자가 지신 그 능력과 부활하신 그 능력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는 그 무엇. 이럴 때는 이거는 내 정립이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요한복음 9장에서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믿음. ‘믿음’.


믿음의 근거는 사라져가는 내가 아니지요. 이거는 믿음이 아니고 자기정립이라니까요. 자기정립. 나 이렇게 또 정리했다. 나 역시 믿는 자 맞아." 또 정립하고 정립하는데 여기서 뭐냐 하면 근거가 내가 따로 개체라고 할 것 없이 표현이에요 표현. 주께서 살게 하기 때문에 살아온 거에요.


살게 해서 살기 때문에 잘못이라는게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그렇게 살게 했는데 왜 잘못이 되죠? 제가 누누히 이야기합니다만은 우리의 잘못은 없고 아담의 잘못이라니까요. 아담의 잘못이고 내 잘못 아니에요. 좀 많이 뻔뻔스럽지요. 많이. 심히 뻔뻔스러워요.


DNA가 아담 DNA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환경이 그렇게 나를 몰아넣는데. 잘못한걸 모아놓아서 죄인이 되는게 아니고 그걸 적체라고 했지요 적체. 안양강의에서 아니 서울강의에서. 적체가 아니고 다윗처럼 간음하고 살인해서 죄가 아니고 모아둔 죄가 아니고 이미 날 때부터 총체적으로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모든 것도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알 때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죄를 보여주기 위한 매질이 되는 거에요.


그게 믿음이라는 거에요 믿음. 그게 표현이에요. 죄를 보여주기 위한 표현. 이거는 주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표현. 둘 다 합해서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 이게 요한복음 9장, 10장, 11장입니다.


예수님을 잘 대접했던 그 가정에 갑자기 오빠가 죽었어요. 그냥 세월호에 갔다 빠져 죽었다고 보면 돼요. 세월호에 죽었다. 그 여동생 둘은 난리가 났어요. 난리가 났어요. 엉엉 울었지요. 왜 웁니까? 왜 울어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사이가 없어요. 오빠는 누굴 위한 오빠다?


오빠는 내가 아니고 누굴 위한 오빠다? 오빠가 있어줘야 나라는 확장된 내가 내 가정이니까 내 집이니까 나라는 가정에 확장된 오빠가 누락이 되면 내가 정립한 나의 가치 나의 의미가 누락이 되니까 못 견디고 살 수가 없는 거에요. 오빠가 세월호에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일부러 죽게 했어요. 일부러. 일부러 죽게 했다고요. 뭐가 없냐 하면 믿음이 없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믿음 대신에 마리아 마르다는 뭐했느냐. 자기정립 했어요. 믿음 대신에. 믿음은 하나도 없고 이게 믿음일거야 라고 자기정립에 나선 거에요.


그 자기정립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잘 섬겼으니까 예수님하고 나는 한편 먹었고 따라서 예수님께 잘했으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나라에 살 것이라고 예수님을 포함해서 괜찮은 자기정립에 상당히 기뻐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께서 상실감을 줘버린거에요. 기존의 육신으로 된 정립된 '나'가 이게 상실감이 있다는 말은 아까 이게 깨지는거죠. 이게 없어지는거죠. 없어지니까 난리난거에요. 뭐 울고 불고 난리났어요. 울고 불고.


어떤 분은 조국 사태 나고 난 뒤에 그렇게 많이 울었답니다. 우시고 난 뒤에 뭐 깨끗하게 정리가 됐다고. 왜냐하면 그게 과거의 횡포다. 과거의 횡포. '나'가 가만 있고 싶어도 내게 누적된 기억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누적된 기억이.


당신 나한테 이렇게 했잖아. 내가 얼마나 아팠는 줄 알아?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안하겠어. 이렇게 되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주를 믿는다고 하지만 막상 이렇게 건드리면 다시 어느새 벌써 내가 건드리기 전부터 자아가 새롭게 정립된다는 것이 건드려 줄때 새삼 발견합니다.


야 지독하네. 나는 나만 모셨구나. 이 집은 내 집이고 이 교회는 내 교회고. 들어오기만 해봐라 죽여버린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죽여버립니다. 당신은 나한테 왔다면 나한테 무슨 이익을 줄 것이냐. 내 편이야? 오라. 적이야? 가라. 그걸 자기정립이죠.


그러면 자기정립을 누가 부숩니까? 주님이 부셔놔요. 그게 뭐냐? 요한복음 10장이에요. 예수님께서 뭐냐 하면 없어진 것부터 한번 출발해 보자는 거에요. 요한복음 10장 보겠어요. 10장 15절요. “나는 선한 목자라”.


자, 출발 어디서부터 합니까? 양부터 출발하는게 아니지요. 어디부터 한다? 목자부터 하지요. 그럼 목자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지요. 그럼 양을 위해서 목자가 어떻게 사라져버렸지요?


양들은 닭 쫓던 개 신세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없는 거에요. 없는 분이 살리고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내가 정립한 나를 살리는게 아니고 주님께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 합니까? 같이 망하자. 같이 죽자죠. 너 나하고 같이 안 죽으면 같이 사는 거 없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을 때 같이 살게 되려면 같이 죽는 사람에 한해서만 같이 살아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게 아니에요. 이 소식. 애들은 가라 정말.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아주 개망신 당해야 돼요. 사람이 망신당하지 않으면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유가 안 나와요.


나는 옳고 당신도 옳다 하던지 내가 더 옳다던지 달랑 그것만 남아요. 주께서는 군화발로 깡통을 무너트립니다. 우지직. 찌그러지지요. 주께서 우리를 아주 밟아줘야 돼요. 밟아줘야 찌그러질 때 고상한 나의 정립이 찌그러지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에게는 뭐가 없느냐? 내일이라는게 없어요. 내일이라는게 보장될 수가 없어요. 내일이 없으면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이 죽는 날이에요. 죽는 사람한테는 목적이라는 것은 사치입니다. 목적이라는 것을 만들 필요도 없고 기대라는 것도 할 필요도 없고 오늘은 오늘치의 표현만 하면 되시고 우리는 10분 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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