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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1 21:26:40 조회 : 4128         
200707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서(2)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20)
 

200707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서(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아무 상관없고 사소함을 요한복음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짓을 하고 심지어 간음한 여인도 용서받잖아요. 어떤 짓을 해도 지금 무엇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느냐? 여기에 관심을 둬야지 지금 나는 어떤 인생관을 갖고 있다. 그런 것은 먹구름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새로운 계시가 몰려오는 겁니다. 태풍, 장마 몰려오듯이 새로운 계시가 몰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계시는 철저하게 이 땅에 와서 배척받은 계시입니다.




왜 배척을 받아야 되느냐?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배척 받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나와야 돼요. 사단이 얼굴을 내밀어야 돼요. 악마가 얼굴을 내밀어야 돼요. 요한계시록에 계속해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나오잖아요. 그 차이점이 있어요.




일곱 인 할 때는 천사들만 소개해요. 일곱 인 할 때 삼분의 일, 삼분의 일 해서 제한적인 장소라 합니다. 일곱 대접을 퍼부을 때는 이건 이 세상 전부를 쳐버려요. 누구 나오라고? 사탄 나와! 빨리 나와! 하는 거예요. 숨어있지 말고 빨리 나오라는 거예요. 사탄 나와.




예수님의 계시, 이거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계시가 지금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잖아요. 하나님의 계시가 숨어있는 독생자가 등장하죠. 그러면 우리가 숨어있는 독생자를 상대하려고 할 때 너 말고 숨어있는 놈, 나와! 이래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배틀, 맞짱 까는데 하나님과 인간은 빠지고 인간 나라의 대리자 되는 사탄이 아이씨, 이젠 못 참겠네. 그래 나올게. 나오고 이쪽에 예수님이 먼저 숨어있는 대리인 그리스도 내밀어서 둘 만에 맞짱 까서 결국은 건질 자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게 그거에요.




인간의 행함이라 이런 것은 요한복음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그냥 새로운 독생자에 의해서 쓰임 받을 뿐이죠.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도 그렇고.




그래서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요한복음의 계시가 뭡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어떤, 어떤 일을 일방적으로 다 행하시고 말끔하게 다 하셨는가? 거기에 대해서 증거하는 게 요한복음입니다. 내가 뭐 한다는 게 아니라 그분이 오셔서 얼마나 두더지 때리듯이 다 때려 부숴요. 때려 부수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사탄까지. 너 숨지 말고 나오란 말이야.




근데 사탄은 진작부터 안 나오지요. 누굴 앞장세웁니까? 인간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앞장세워서 막 퍼붓지요. 결사적으로 퍼부어요. 예수 그리스도 오는 걸 퍼부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굴 보느냐 하면, 38년 된 병자, 실로암 못가에 눈뜬 청년 있지요. 이런 사람 앞장세우고. 심지어 또 누구냐 하면,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난 나사로. 나사로 욕 많이 먹었습니다. 괜히 살아나서.




이쪽에 앞장세우고. 이쪽에선 누구냐 하면, 다윗 이래되지요. 나중에 안 되니까 사탄이 어디까지 들어갑니까? 가룟 유다까지 들어가지요. 심지어 베드로도 부인하게 만들고 이러 하지요. 이 싸움이에요.




우리는 그냥 고요하게 헬라철학에서 어둠에서 바르게 살아서 빛의 나라에 들어가겠다.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대로 지키겠나이다. 그것뿐이 없는데 그것이 완전히 개판돼 버렸어요. 그런 건 다 없어지고. 이 하나님은 가짜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가짜고 쭉 오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요한복음 전체를 해석을 이번 시간에 다 하는데 할 때 주안점은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이 언약과 관련되어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과 구약의 언약과 관련되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특히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요한복음 봅시다. 1장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예, 감사합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오고, 은혜는 앞에 독생자니까 말씀되신 독생자로 왔다 이 말이에요. 말씀된 독생자로 왔다. 말씀으로 왔다. 독생자의 영광으로 왔다. 그렇다면 모세에서는 뭐가 왔습니까? 율법이 왔지요. 여기는 은혜가 왔지요.




은혜라는 말이 반드시 그 전에 무엇을 전제로 해야 합니까? 죄를 전제로 해야 은혜거든요. 그럼 죄는 누가 양산합니까? 율법이 양산하죠.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나오고, 그 죄에 대해서 용서하는 사랑하는 사함 그것이 그리스도로 온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한다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뭘 해야 돼요? 율법에서 어떻게 죄가 나오게 되었느냐 그것을 규명하면 되겠지요. 그게 요한복음 아닙니까? 어떻게 율법에서 죄가 나오느냐? 그 거룩한 율법에서 죄가 나오느냐?




성경책을 율법이라 하면, 성경책 딱 놓고, 지나가는 사람 다 만지게 하는 거예요. 만지게 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현미경 들고 들여다보고 여기에 대장균 옮긴 놈 누구야? 대장균, 박테리아 옮긴 사람 누구야 찾아내는 거예요. 모세 율법에 대해서 보면 다 드러난다 이거에요. 드러나고 다 구원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봤지요. 아들이 원하는 자만 데려가는 거예요.




베데스다 못가에 다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만 고침 받았지요. 그 지역에 모든 소경이 다 눈 뜬 게 아니고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간단히 하면 돼요. 예수님 오셔서 원하는 자, 독수리가 먹이 채가듯이 그냥 낚아챈다. 그러면 이 신앙이니 뭔지 모름을 복음이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그런데 여기에 강하게 반발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알아서 다가가겠습니다. 그거에요. 우리가 평소에 버릇이 그래요. 우리가 알아서 말씀 지켜서 다가가겠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낚아채는 방법이 아니고 우리가 다가가겠습니다.




사실 그런 아이디어는 그게 목회, 교회운영비 충당하기 위해서 목사들이 이런 말 할 수밖에 없어요. 교회청소는 해야 되겠지, 유치부 교사는 해야 되겠지, 성가대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교회 전기세는 누가 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내라 할 때는 뭔가 행함이 계속 이어져야 돼요. 지속적으로 행함 행함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되지 낚아채서 구원받았습니다. 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러면 이런 행함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이것도 이야기하고 행함도 나오고 어떤 두 가지 토끼를 어떻게 다 잡을 수 없는가? 그러한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러한 요한복음의 은혜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할 수밖에 없지요. 너무 은혜 일변도라고 정석훈 목사님 써 놨는데.




바로 이러한 이렇게 요한복음이 우리의 죄와 은혜와 관련되어 있다. 은혜의 일변도가 아니지요. 사실은 죄의 일변도라 할 수 있거든요. 달리 보면 죄의 일변도. 죄와 은혜가 만나야 되는데 목회자는 뭐냐 하면, 은혜와 그 다음에 행함을 연결시켜야 목회가 된다고 이렇게 자꾸 우깁니다.




사실은 행함과 관련된 은혜라면 이것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은혜에 속하는 게 아니고, 이게 어디 속하느냐 하면 죄에 속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 1장부터 나오니까 한번 봅시다.




모세율법에서 예수님의 은혜라 돼있는데, 모세율법에서 완성이 어린양입니다. 어린양 지게 되면 이게 일 단계,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령을 세례 받게 돼 있습니다. 은혜지요. 어린양 죽는 것은 뭡니까? 모세율법 때문에 죽잖아요. 그러니까 모세율법대로 죽으시고 성령의 세례로 오신다. 라는 식의 율법관이 누구 율법관입니까? 예수님 율법관인데 너희들이 이걸 했냐 말이죠. 인간들이 율법의 완성 너희들이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이 성령세례 줄 수 있습니다. 못 줘요. 도대체 성령세례도 못 주는 게 무슨 자기 교인이에요. 아니 목사가 성령세례 줄 수 있으면 내 교인되겠는데 지가 손발 뭐 스파이더맨처럼 벌려도 성령 안 나오는데 어떻게 자기 교인이 될 수 있느냐 말이죠. 누구 교인이에요? 주님의 교인이고 누구 양입니까? 주님의 양이지 내 양이 아니잖아요. 우리 자신도 양이 돼야 되고.




그래서 ‘내 양을 먹이라’ 안 합니까? 요한복음 나오지요. 내 양을 먹이라. 니 양 아니야. 내 양이야. 예수님 내 양이다 말이죠. 니가 날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말이죠.




지금 몇 개 나왔어요? 모세율법에 대해서 일번, 모세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이 잘못 해석하였다. 이거 하나 나와 있지요. 두 번째 예수님의 은혜인 것을 이야기하죠. 세 번째 뭡니까? 예수님의 은혜라 하는 건 어디서 나온다? 자신의 율법의 완성된 차원에서 은혜를 주시잖아요.




그러면 하나의 사건이라든지, 기적, 하나의 이벤트 뭐 이러면 이 요소 일번, 이번, 삼번 요소가 거기 다 들어있겠습니까, 안 들어있겠습니까? 거기 다 들어있는 게 요한복음 해석 이렇게 하시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뭐라고? 인간들의 도발. 어떻게 잘못된 왜곡해서 해석했겠는가? 여기 잘못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나오지요. 그런데 은혜로 말미암아 병고치고, 은혜로 말미암아 물이 포도주 되고, 은혜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살고, 은혜로 말미암아 병작 낫고, 은혜로 말미암아 오병이어가 떨어지고. 이거는 예수의 몫이죠.




그런데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또 누가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고 또 여기에 대해서 누구 입장에서? 자기가 모세율법대로 지킨다는 요 입장을 못 버리고 예수님을 왜곡해서 해석한 결과가 십자가 사건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믿습니다는 뭔 뜻입니까? 내가 저 십자가 해석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는 걸 인정하는 내가 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갖고 있는 틀 가지고 십자가를 백날 해석해도 이건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를 자인하는 겁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할 때는 그게 뭐예요?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하는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헬라철학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헬라철학의 계시는 뭐라 했습니까? 또 다 잊어버렸죠. 자연세계 속에 있는 조화, 사랑과 미움의 질서, 그걸로 통해서 내가 확인하는 신의 형상, 내가 확인하는 신의 로고스를 형성하잖아요. 그러니까 도마가 내가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했잖아요. 예수님께 봐라, 자 봐. 보여주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주여,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모세율법이 있더라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우리가 욕하지 맙시다. 우리는 만약에 지방대학교 나왔다면 그 사람은 서울대학 나온 사람들이에요. 우리 수능 400점 만점에 150할 때 그 사람 400점 만점 맞은 사람들입니다. 우린 그걸 따라 붙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에요. 신학을 통해서. 이런 두꺼운 책 신학을 통해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따라 붙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 래드한텐 미안하지만.




이 래드가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조지 앨든 래드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봤다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 소리 나와야 돼요. 주여, 저는 소경입니다. 이 소리 나와야 돼요. 이거는 인간이 해석했다고 될 문제가 아니군요. 이건 덮쳐야 될 문제, 십자가가 덮쳐야 될 문제지요.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모세언약에 모세율법이죠. 모세율법에 의해서 되어진 나름대로의 구원관 그리고 율법관 모든 사단의 개념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잖아요. 니가 귀신들렸다 하잖아요. 귀신관 모든 그런 것과 그걸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시죠. 찾아오시는데 이게 어린양과 성령세례라는 이 사명을 띠고 율법의 완전성을 띠고 이렇게 치게 됩니다.




치니까 결국 성령세례가 왔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앞에 뭘 이루었다? 어린양이 온전히 다 이룰 경우에만 뭐가 옵니까? 성령세례가 오죠. 성령이 왔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뜻이거든요. 요한복음에 다 이루었다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 왔잖아요.




그렇다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은 “신랑과 영과 진리로 오나니” 하는 말은 그 말을 하니까 물동이 인 여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난 성령 받았다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난 메시아를 만났다 하지요. 그러니까 메시아가 와서 성령세례, 율법을 다 이뤘다는 그 증거가 뭐가 돼요? 성령이 왔다 이 말이죠.




성령이 왔다는 말은 모든 율법을 이뤘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성령세례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어린양의 희생이었다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뭐가 돼야 돼요? 죄가 돼야 될 거 아닙니까? 어린양의 희생이 누굴 위한 겁니까? 죄인 된 자기 백성 위함이죠.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너는 죄인인데 널 위해서 값을 치렀다는 뜻에서 성령 받아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소리를 바르게 알아들으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됩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린 죄인 맞는군요. 라는 고백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고백을 결국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고백하는데 아직 예수님께서 활동하는 시간에까지는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없으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자기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그러한 사례들을 가는 곳마다 일으키잖아요.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 아닙니까? 남자 다섯 해서 여섯 번째 사귀는 여자. 물동이 버려두고. 물동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마지막에 결국은 특히 11장에 보면 결국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할 때 우리 입장을 하소연 앞두고 우리를 편하게 해주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위로를 들어주려 하는 것도 아니에요. 결국 일방적으로 예수님은 자기 일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얻으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가만있어라. 내꺼 너한테 덮어주겠다. 그러면 우리는 왜 내가 가만있습니까? 나는 모세율법 해석 못하는 줄 압니까? 모세율법 지킵니다. 예수님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 말씀 지킬 테니까. 대표적인 예가 엄마 마리아가 예수야. 예. 포도주 떨어졌다.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나하고 포도주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마리아는 자기 아들을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 기적을 많이 하니까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 마태, 마가 다 알거든요. 그 당시에는 다 이용하려 하니까. 여자여, 나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말이야. 나하고.




요한복음 성전에 가서 하니까 역시 또 율법완성이죠. 성전 위에 성전이 아니야. 내가 성전이야. 그런데 제자들은 그걸 보라 할 때까지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다는 거예요. 언제 알아들었습니까?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할 때 아아, 부활하고 난 뒤에 그 뒤에 성령을 받아보니까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게 전문가가 따로 계시는데 그분이 누구다? 바로 예수님이 율법 다 지켰구나. 우린 그냥 가만있다가 그 사랑을 열매를 얻어먹기만 했구나.




그게 뭐냐?  포도나무는 따로 있고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가 쭉쭉 뻗어서 우리는 하나의 붙어있는 가지로써 존재하는구나. 가시가 포도나무가 원가지에 떨어지면 죽지요. 붙어있단 말이죠. 붙어있다는 소속되어 있다 이 말이죠. 원가지가 대단한 분이에요. 예수님이 대단한 분이니까. 원가지가 작은 가기를 목욕해주니까 작은 가지 베드로가 오해하기를 그러면 딴 데도 씻겨 주이소. 이것만 씻어도 이미 너는 나한테 붙어있다는 뜻이야 하는 겁니다.




선택이란 말은 일반적인 선택은 니를 찍었다 이래되지만 성경에 선택은 뭐냐? 니는 빼도 박도 못한다는 뜻이지요. 한번 선택한 놈은 이젠 한 소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해요.




제가 주일날 문방구 이야기한 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우리교회 문방구하는 사람 있거든요. 지 동생한테 맡겼다고. 문방구 직원이 열심히 일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는 건 좋은데 결국은 남 아닙니까? 문방구 누나가 지 동생한테 문방구를 맡길 때는 이윤 남기라는 뜻도 있지만 니가 만약에 여기 하다가 사고치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가족과 남의 차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남으로 보지 않고 가족으로 봤어요. 그게 선택이라는 개념이에요. 가족이 돼버리면 우리가 잘한 것을 칭찬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책임은 우리 주님이 다 지게 돼있어요.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니까. 한번 적어봅시다. 너무 좋은 말이에요.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킨다.] 이거 복음입니다, 복음.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켜요. 예수님 떼놓고 보면 지키는 것처럼 보이죠. 예수님 중간에 삽입해버리면 우리는 못 지킨다가 돼버려요. 안 오실 때는 지키겠다. 오면 못 지키는구나. 빠지면 지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걸 믿으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 생각 안 나면 저 지키겠습니다. 복 주세요. 이게 하루 23시간, 24시간 왔다갔다, 왔다갔다. 변덕이 이래 심해요. 심하다고. 이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다. 누가 와서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요.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켜요.




요한복음 다 해봅시다. 요한복음 1장에 30절에 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했지요. 어린양이라 했는데 33절에 보면, 성령이 온다는 것은 어린양이 올 때 성령이 왔죠. 성령이 오게 되면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누가 혜택을 입는가? 요한복음 2장 끝에 보면, 바로 언약백성.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따라서 나다나엘 같은 참 이스라엘만 구원받습니다. 나다나엘이 기도하는데 간사한 것이 없다. 이 말은 해석을 나다나엘이 기도할 때 뭐가 없다 했습니까?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할 때에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요. 나다나엘처럼 우리가 그렇게 순진하게 깨끗하게 기도하자. 이런 해석 나올 수 있겠지요.




두 번째 해석이 어려워요. 왜 나다나엘이 예수님한테 주목받는가? 그거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간사함이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에게 간사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래 볼 수 있지요.




간사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많은데 그중에서 나다나엘을 뽑은 것은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을 드러내가 위해서 유사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을 지목함으로써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다나엘에게 간사함이 없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전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합니다. 구약도 마찬가지. 다 마찬가지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만약에 일번 해석 같으면 나다나엘이 미안해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는 분명히 간사 안 했는데 기도하는데 고구마 삶아 먹을 때 간사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다나엘이 간사함이 없다 하는 것은 자기의 성품과 품위가 24시간 지속된다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나다나엘이, 너는 24시간 늘 간사 한 게 아니고 그때만 간사 안 했습니다. 하면 그러면 그 덕은 누구 덕입니까? 주님 덕이죠. 그러면 제 말이 맞잖아요.




결국 간사하지 않은 주님의 품성이 순간적으로 우발적으로 간사함이 없게 했다. 이래 해석해야 그리스도가 나온다 이 말이에요. 간사하지 맙시다가 돼버리면 몇 분 동안 할까요? 이래 된다 말이죠. 그 다음에. 목사님, 몇 분 동안 간사하지 말까요? 이래 된다 말이죠. 한 두 시간만 하면 하나님 인정 안 받겠습니까? 이러면 곤란하다 말이죠. 목사님은 두 시간 합니까? 난 2시간 안 된다. 목사님도 못하는데.




간사하지 않는 분을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결론으로 설교가 끝나야 된단 말이죠. 간사하지 않는 주님. 왜? 우리는 너무 간사하니까. 우리가 얼마나 간사한지 간사했다, 안 했다 맨 날 번복하니까. 간사하지 않는 주님을 우린 사랑하고 사모합시다. 관심을 둡시다. 생각을 거기다 둡시다.




요한복음에서의 또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만 해서 지시를 따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지시 따르기 전에 먼저 자기 한 말씀대로 거기서 성취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황사 오는데 조심해라. 이게 아니고 황사데이. 벌써 임한 사실을 예수님 식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니가 간음 안 하면 내가 용서해 줄 게. 봐라. 니는 이미 용서받았다.




시간적인 여유를 안 줘요. 그 왜 그러냐 하면, 시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영역으로 니는 이미 내 사람이라는 뜻을 그런 식으로 내 사람이다. 마리아가 예수님 보고 포도주 떨어졌다 할 적에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나 삐졌습니다. 잘됐다. 완전히 혼인잔치 개판났구나.




이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마리아는 내 영역 속에 속하고 마리아가 포도주를 원한다는 그걸 통해서 예수님도 이런 포도주는 아니지만 영생을 하늘나라의 먹는 포도주를 이를 위하여 내가 왔습니다를 그 말 통해서 비춰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표적이라 하지요.




2장 끝나버렸지요. 3장. 여기 2장 18절 한번 봅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그 다음에 뭐로 돼있죠?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2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처음” 그 다음에 뭐로 돼있죠? 이 표적을 갈릴리에서 행하죠. 표적이죠. 두 번째도 표적이죠.




표적이란 말은 뭡니까? 기적의 의미가 뭡니까? 초자연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표적이고 그리스도 안 드러내면 표적 아니에요. 방언이 뭔 줄 알아요? 말더듬이가 방언이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하면 방언이고, 예수님 안 나타나면 방언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홀로 하셨다는 걸 나타내지 않으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전부다 걷는 것도 표적이고 똥 누는 것도 표적이죠. 그리스도만 생각한다면




요한복음에서 방금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해놓고 우리보고 지시를 기다리는 게 아니고 말씀하는 그 즉시로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4장 48절.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53절요.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래 돼있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이건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하십니다를 믿습니다. 이래 돼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다 될 줄로 인정합니다. 받아들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자기 말씀으로 완전히 뭉개버리죠. 이 어두운 세상을 완전히 뭉개고 들어갑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서경수 목사님 거기 앉아 있잖아요. 서경수 목사님, 내가 있잖아요. 의심됩니까? 분명히 현존하잖아요. 현존, 있지요. 그 이상으로 그만큼 지금 주님이 현존한다면 우리가 남의 이야기 하듯이 주님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거 예수님 있잖아. 거 그 사람 말이야. 이렇게 마치 안 계신 것처럼 이야기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럼 이야기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예수님 있잖아요. 당신은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데? 계시잖아. 뭐가 보이는데? 니는 안 보이지만 난 계신다. 예수님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다 이뤄지는 줄 제가 믿습니다. 비록 안 보이지만 없는 건 아니잖아요. 계시단 말이죠. 마치 우리가 세상에 있듯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요한복음이 해석이 돼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만.




만약에 예수님이 빠지면 내가 해야 돼 내가. 안 계시니까 내가 해야 된다고 이걸. 그런데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 계신데 주님한테 맡겨야지 왜 내가 해. 주님 솜씨가 나보다 더 나은데. 난 성령을 뿜어낼 수 없는데.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강대상 혼자 홀로가면 안 되지. 홀로 올라가면 지 쇼가 되지요. 쇼를 하라! 띡띡띡. 쇼를 하라. 영화 관람권 하나 줄 테니까. 이 쇼가 아닌가? 그 쇼가 아니죠.




예수님 어때요? 이 말 어떻습니까? 교인들은 모르지만 목사, 본인은 아는 거예요.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을 해야 그래야 주의 말씀이 되니까. 듣든지 안 듣든지 지 마음대로지만 택한 백성만 믿게 되지만. 그러면 목사가 교인들 눈치 볼 이유가 없지요. 이유가 없잖아요. 왜 눈치 봐요. 지금 이 눈치 보기도 바쁜데 어데 저 눈치까지 신경 써서 합니까? 교인 몇 명 나오는가 그거 신경 쓸 수가 없지요. 헌금 얼마 나오는가 신경 쓸 필요 없지요. 그 문제는 주님 문제지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잖아요.




요한복음은 바로 주님의 현존입니다. 독생자가 현존인데 사람들이 너무 시시하기 때문에 너무 비참한 모습이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파격적으로 다 깨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기피하고 멀리하고 싶지요. 저리가, 저리가. 어이, 저리가. 이러지요. 그게 내 속에 있는 사탄의 영이 사탄의 마음 자꾸 예수님 밀어서 문제지. 그러면 그것조차 주께서 다 아시고 다가옵니다.




요한복음 3장 해봅시다. 2장 끝에 제 말 방금 한 말 나오지요. “친히 사람의 속에는 아시므로” 그러니까 누가 뭔지 뭐 다 알지요. “아시므로 사람에 대해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 뭔 뜻입니까? 하여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예수님의 답답하심이죠. 내가 살아 있잖아. 니 보고 부탁한 거 아니야. 내가 살아있어. 내가 내 일 해. 내가 받은 것도 내가 준 거야. 지금. 니에서 나온 건 죄밖에 없어. 라는 식으로 다가서는 겁니다.




자, 그 연이어져 3장에 보면 나오는데. 바람나오지요. 아까 이야기했죠. 바람인데 여기서 한 가지 3장 12절 봅시다. “내가 땅에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야, 이 말은 땅에 이미 내가 있잖아. 내가 땅에 와 있잖아, 지금. 저희들은 멍청하게 하늘 보고 있는 거예요. 어이, 형씨 하늘 보고 있습니다. 내가 왔잖아. 내가 당신 옆에 있잖아. 옆에. 하늘같지만 내가 지금 하늘이야기하고 있잖아. 땅에서 하는 이 하늘이야기도 못 믿으면서 무슨 니가 하늘 쳐다봐.




이 말은 주님께서 전에부터 땅에 무슨 일을 발생시켰어요. 근데 그것이 율법이 아니고 전부다 뭐로 왔습니까? 은혜로 왔기 때문에 은혜를 이해하려면 자기가 먼저 율법에 의해서 자기가 뭘 인정해야 돼요? 죄인인 것을 인정한 사람만이 은혜가 필요한 거예요. 난 용서받지 않으면 희망 없어. 라는 자에게 용서가 의미가 있지, 용서 안 해도 됩니다. 이런 사람 무슨 용서가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놋뱀 이야기하는 겁니다. 놋뱀은 특징이 뭐예요? 왜 뭐 잘못 됐는데 왜 이렇게 물려야 합니까? 놋뱀 의미 없어요. 잘못 됐었기에 물렸습니다. 마땅합니다. 물어도 마땅합니다. 라는 사람에게 놋뱀을 쳐다보게 됩니다. 그 작대기 형상이 뭐예요? 뱀 아니에요. 뱀. 내가 사탄인데 내가 뱀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물려도 쌉니다. 벌 받아도 마땅하지, 뭐. 나는 뱀 같은 인간입니다. 뱀, 저게 내 속에 있는 내 모습입니다. 하고 쳐다볼 때 그때 용서받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그 모습이 죄인의 모습 있잖아요. 저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고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십자가 바라볼 때 그런 심정이 될 때 그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빛 된 독생자가 갖고 온 의미를 아는 겁니다. 그런 자만이 믿는 자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거예요. 영생이라 하는 것은 영생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우리를 극히 죄인 되게 만드는 방식,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영생이 오는 겁니다.




3장에서 21절 봅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이 본문 하나만 댕겨버려도 사도 바울의 모든 명령법 해석 다 끝났습니다. 이 본문 하나만 해도. 행함이냐 믿음이냐 모든 문제해결은 이 본문 하나로 끝나버려요. 그 사람의 어떤 행함이 하나님께 나온 행함으로 논해야지, 행했다 가지고 논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다시 봅시다.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다.” 이게 사도 바울 같으면 주 안에서 행한 것이다. 그 주 안에서 행하면 어떤 행함이 나오겠습니까? 나는 죄인이며 은혜 줄 자는 주님밖에 없습니다가 나오겠지요. 그걸 합쳐서 행함이죠. 그런 행함 이야기했다고 행함 없다고 욕 얻어먹었으니 참, 기가 찰 행함이죠. 예수님이 구주십니다. 라고 그런 이야기했다고 해서 행함 없다고 욕 얻어먹었어요. 욕하는 거예요. 이단들은. 행함은 또 따로 있어야 된다고. 이 행함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서 행함은 어떻게 돼요? 박살나야 되겠지요.




[정죄함이 없나니] 책 읽어보셨습니까? 거기에 보면 내 강의한 것보다 많이 더 첨가되었지요. 거기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이게 우리한테 해당 안 되지요.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가 못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이 말씀 주셨고 그리고 이 말씀을 성취한 것은 우리 안에 주께서만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됩니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 말이죠. 우리를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모습을 통해서 원수 사랑이 바깥으로 나오게 한다.




나도 같이 용서받은 주제에 왜 당신을 용서 못해. 이게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내가 용서함 같이” 이게 뭐냐 하면, 나도 용서받아야 사는 인간인데 왜 내가 당신을 용서 못하겠습니까? 아이고, 당신은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기는 내가 죄인인데 뭐. 내가 합니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다 하시는 것이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래 됐다 이 말입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용서하자. 이런 건 아니다 이 말이죠. 내 힘으로 건전한 나로 하자. 이건 아니다.   




요한복음 3장 21절 잊지 마세요. 누가 뭐라 하거든 이거 한번만 대면 끝나버립니다. 행위는 맞는데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만이 주께 행위다 이 말이죠. 그게 어떤 행위든 간에.




그 다음에 3장 36절 봅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했을 때 이 말만 하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뒷말을 듣기 싫어해요. 뒷말부터 먼저 해봅시다.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라는 것을 재판장이 재판관한테 이야기할 수 있고 병원의 의사한테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뭐 경대 어디 나와서 간판, 전문의 땄는데, 당신 진노야.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병원이야. 왜? 당신 예수 안 믿잖아.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게 전도 아닙니까? 그런데 앞에 것만 이야기하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래하는데 뒤엣것도 이야기해 줘야지. 




앞에 것만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이래 돼버리면 믿는 것도 하나의 인간의 개인적인 자질에 속하는 이야기가 돼버려요. 그러면 그건 마귀 전도지 주님의 전도가 될 수 없지요. 인간의 자질을 더 긍정해주니까. 전도하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못 느끼게 만들어요. 만약에 진짜 구원될 사람 같으면 예수 믿지 않으면 저주가 임합니다. 할 때 내가 왜 저주 받아야 됩니까? 당신 죄인이거든요. 할 때 비로소 죄인의 입장에서 놋뱀을 쳐다보게 된다. 십자가 쳐다보게 된다 이 말이죠. 




결국 이런 일은 우리보고 뭐냐? 전도해도 니가 어떤 실적을 기대하지 마라. 이런 말을 하는데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전도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전도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 42절이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니라” 41절.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서” 이것은 제자들이 능력 있게 한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능력 있게 임한 겁니다.




저는 요한복음 4장을 바라볼 때마다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간단 간단한 거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서 전도하더라. 할 때 전도를 어떻게 했는데 상당히 궁금했었단 말이죠. 했는데 요한복음에서 이걸 넓혀주잖아요. 4장에서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 전도 중에 하나에 이거 아닙니까? 아, 전도는 제자들은 거저줍기 했구나. 추수 이삭을 다 해놓으면 거저줍는 것만 했구나 하는 것을 요한복음 4장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5장에 보면, 5장 아까 했지요.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만 살리신다. 5장 37절 봅시다.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이게 말이 앞뒤가 안 맞지요. 예수를 왜 안 믿느냐 이유가 뭐라 돼있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책임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없으니까 안 믿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제 곁에 계신 분이 말씀하는 거예요. 예수님, 저 심방 열두 번 갔는데 안 나옵니다. 글쎄, 내가 그러니까 성령 안 주니까 아나 나오는 거지. 니가 왜 답답해하느냐 말이죠. 그런 믿음 니한테 없잖아. 없으니까 걱정 니가 혼자 싸잡아서 걱정하고 있다.




하여튼 제가 했잖아요. 요한복음은 예수님 자기 노는 장이에요. 우리 보고 뭐하라 하는 게 아니고 혼자 다 해요. 혼자 다 해요. 북 치고 장구 치구 차 띠고 포 띠고 혼자 다 해버려요. 장기 두고 바둑 두고 화투치고 혼자 다 해요. 사실은 마태, 마가, 누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요한복음에서 윤곽이 더 드러나죠.




말씀 안 줬어. 안 믿었다고 죄라 하고. 뭐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했잖아요. 이 세상은 처음부터 뭐다? 어둠이다. 어두움아, 어두운 띠 내라. 결국 어두움 띠 냈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뭡니까? 내 나라는 이쪽 나라가 아니다. 따로 있다. 난 딴 데 간다 하니까 지가 어디로 갈라고? 이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이 예수님이 내가 딴 데 간다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지가 어디로 갈라고? 이카는기라. 지가 갈 데 없는데. 그때 뭐라 합니까? 니가 보긴 보아도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 그 말씀을 또 예수님이 이루어야 돼요. 그래서 안 믿는 자는 안 믿어져야 돼요.




6장 봅시다. 5장 끝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독생자 영광이 나오죠. “니가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한다.” 바리새인들은 뭐하고, 뭐하고 연결이 안 됩니까? 율법 잘 지키기하고 그리고 독생자 영광이 연결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율법은 누가 지키는데? 본인이 지키기 때문에 독생자 영광이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본인이 죄인인 것을 알아야 독생자 영광을 증거할 텐데 본인이 율법을 너무 잘 지켜. 너무 잘 지키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자 영광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요한복음 6장 봅시다. 6장은 아까 참 했잖아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아니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7장 봅시다. 7장에 보면, 7장 7절에 세상이 너희를 뭐 합니까? “세상에 너희를 미워하되”라는 말은 제자들이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안 믿었습니다. 왜냐? 지금 미움 안 받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제자들이 미움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미움 받아요. 미움 받는 것이 말씀대로 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미움 받으면 뭐 됩니까? 내가 뭐 행동을 잘못해서 미움 받는 걸로 오해하고 있다니까. 아이고, 내 설교를 잘못해서 미움 받는구나. 자꾸 오해하시는데 그렇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움 받는 게 정상이고 안 받는 게 이상해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스트레스, 광주강의 그런 이야기했는데, 스트레스 받고 뭐 근심, 걱정하는 거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망해야 돼, 나는 망해야 돼.’ 열 번만 외우면 스트레스 다 날아간다고 했어요. 오늘도 망해야 돼. 오늘도 내 뜻대로 안 돼야 돼. 열 번만 이야기하면 스트레스 다 없어져요.




반대로 생각해서 ‘나는 돼야 돼. 계획대로 다 잘돼야 돼.’ 하니까 정신병 걸리고 우울증 걸리고. 제가 아까 했잖아요. 오래 사는 게 문제라고. 한번 생각 보세요. 여러분들이 오래 사는 게 문제입니다. 진작 안 죽은 게 문제에요. 진작 안 죽은 게 문제라니까.




7장에 미움 받도록 돼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미움 받아야 되고. 그래서 이걸 신학적으로 봐서 뭐냐 하면, 성도의 등장은 종말의 증거라 했어요. 신학에 나와요. 제가 지금 교재에 안 하는 것은 교재를 다 읽어봤고, 읽어보니까 아까 이야기 것처럼 자꾸 기존의 틀에다가 사발에다가 자꾸 담으려 하니까 이게 해석이 전부다 엉터리 해석이 돼요. 배척이 없어요. 거부가 없고 우야면 잘 꼬셔서 이해되도록 해서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      ) 맞습니다. 자꾸 납득을 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잘못됐다 이 말이죠. 해석 자체가.




요한복음 6장에 아까 지나갔습니다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절) 했잖아요. 이것도 보세요. 우리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마지막 날에 잃어버린 자를 다 살린다 하면 좀 믿어주세요. 제발. 믿어주세요. 제발 거, 우리 목회 못해도 다 살려냅니다. 우리 목회 못해서 아이고, 때를 놓쳤다. 이런 예수님 아닙니다. 살려내십니다. 하여튼 목회자가 주님의 목회를 방해해요. 걱정 안 해도 될 일을 걱정하고 있어요. 참, 우리가 걸림돌이에요.   




7장 넘어갑시다. 8장. 8장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자유함이라 하는 것은 아까 했죠. 소속이 다른 소속으로 바뀌었다. 독립된 자유는 없습니다. 전에는 사탄에 소속되었다가 지금은 예수님의 식구가 됐어요.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질 건 하나도 없어요. 아직 저들은 마귀에서 남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다.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9장에 보면 유명한 게 있지요. 소경이 소경이라면 소경이 아니지만 소경이라 하면 소경이다. 말 우에 해야 됩니까? 이건 니가 무슨 말해도 소경이다 이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소경 눈 뜨게 하지 않으면 너는 계속 소경이 될 것이다. 이것도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하실 일이에요.




10장에 보면 이 말씀이 나옵니다. 10장 3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리라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 안 따른다? 봐라. 따르게 돼 있어요. 목회자는 걱정할 게 없다니까. 따르게 돼 있어요. 엉뚱한 말 하면 안 따르지요. 그러나 복음 전하면 구원받은 자는 따르게 돼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하, 이게 감사한 거예요. 영생을 우리보고 처리하라는 말이 아니고 준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받을까요, 말까요? 할 수도 없이 그냥 들어와 버리면 일단 그렇게 들어온 영생은 두 번 다시 우리에게서 빠져나간 법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영생을 쫓아내도 안 쫓겨나고 내 옆에 어떤 다른 마귀가 와서 빼내도 안 빼진다는 거예요. 아무도 내 영생을 뺏을 자가 없느니라. 내 손에서.




왜냐하면 영생은 주고 그만 손 터는 게 아니고 준 영생 속에 주님 손이 계속 있기 때문에. 어느 인간이 예수님을 마귀가 예수님 손 털고 빼낸다? 그런 예수님 같으면 실패한 예수님이죠. 우리는 성공한 예수님을 믿습니다.




29절 보세요.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주님이 주신 그것은, 그거는 바로 그렇게 된 것이 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할 때 이런 사람에 해당되겠지요. 다른 사람에 해당되지 않고.




11장 봅시다. 11장에 50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움 받았어요. 그리고 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한 걸 ‘저놈 나빴어, 저놈 나빴어.’가 아니라 니도 뜻대로 안 되지, 그자? 아버지께서 아버지 뜻대로 하기 위해서 누굴 이용한 거예요? 나를 죽이는 그런 바리새인, 사두개인을 아버지께서 작용해서 나를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니가 내 앞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참, 그런 믿음을 우리가 있어야 돼요.




저 사람이 저 사기꾼이 왜 왔는가? 이래 생각해야지 주님께서 이렇게 해야지. 내가 저 사람한테 지다니. 사람은 지는 걸 못 참거든요. 진다, 이긴다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 왜 나를 저 사람한테 지도록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을까? 하고 자꾸 하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주례할 때 제가 그런 이야기하죠. 왜 아내를 왜 저런 아내를 보내줬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되지. 처음 할 때는 그런 생각 안 나죠. 고맙습니다. 하다가 나중에 2년만 지나면 저 아내를 왜 나한테 붙여줬는가? 이래 생각하죠. 그러면 니 주제에 다른 여자가 오겠나? 그러면 우린 하죠. 혼자 살지, 뭐. 일단 살아봤으니까 혼자 산다는 말이 나오지, 혼자 살면 아이고,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항상 우리는 우리 위주입니다.




12장 아까 12장 39절했습니다. 40절에 보면,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걸 누가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했죠.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죠. 딴 말씀은 잘 순종하면서 이 말씀은 왜 순종 안 하는지 몰라. 목사가 이 말씀 순종해야지요.




저희 눈을 멀게 하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말씀을 해야지요. 해야지요, 그걸. 단 조건이 뭡니까? 그리스도만 전한다는 조건하에. 내 말 안 들으면 완고한다. 이러면 안돼. 그러면 큰일 나는 거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누구의 눈치 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13장 봅시다. 13장 발 씻는 이야기했습니다. 이 13장 27절에 보면, 사탄이 떡 조각 먹을 때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조각을 찍어다 주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사탄마저도 누구 손아귀에 있다? 예수님 손아귀에 있습니다.




14장은 14장에 보면 14장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이것은 빈 말이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이거는 우리가 그렇게 계명 지켜서 될 문제가 아니고, 우리 관계없이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우리가 이걸 기쁨으로 못 받아서 문제지, 우리가 기쁘다, 안 기쁘다 간에 주께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어이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제자들에게 다 맡기고 맙니다.




15장 26절요. “내가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가 오리니” 오셨지요. 그들은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그러면 그들이 안 기다리면 성령이 안 옵니까? 이거는 뭐 말도 아니지요. 오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오라고 기도 안 했기 때문에 성령이 안 온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또 자기 위주라. 자기중심이라. 아, 그럴 때는 힘들어요. 사는 게 힘들어요. 왜? 자기 측정을 계속해야 되니까.




그러다 오시게 되면 성령 왔다. 증거가 뭡니까? 세상에 성령을 것이 아니고, 성령 오면 누굴 증거한다? 예수님을 증거한다. 그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17장 봅시다. 17장 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내 안에 있죠. 우리 안에 있죠. 그러니까 이걸 반드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야 우리가 이 죄를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캡슐, 방어벽을 치는 겁니다.




19장 넘어가고요. 20장 봅시다.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그 다음에 뭐죠? 내 아버지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 아버지” 이거는 우리 힘으로 쟁취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젠 내 아버지만 아니라 너희 아버지, 내게 속한 예수님께 속한 아버지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런 숙제는 우리가 할 숙제가 아니고 푸는 숙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미 그걸 숙제, 황사처럼 다가와라 이렇게 해버립니다.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고 벗어나질 못해요.  




마지막 21장 24절에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이 일의 증거함을 참인 줄 아노라” 그리고 요한일서에 보면, “내 증거를 받지 않은 자는 적그리스도다” 하, 참 그 자신감, 그 배짱 대단합니다. 내 증거를 받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도 요한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안에 속해서 예수님이 모든 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의 변변치 못한 행동과 근심걱정 속에서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훼방되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다 드러나는 그런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한 시간 만에 다 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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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20061103b 울산강의-창세기 1,2장 녹취 한윤범 07-01-29 5725
200   20061201a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 한윤범 07-02-06 4913
201   20061201b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 한윤범 07-02-06 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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