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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00:24:32 조회 : 362         
강남-누가복음 5장 8절 (아담의 뽀루지) 201222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5장 8절 (아담의 뽀루지) 201222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5장 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잘 하시다가 갑자기 자기 일이 아닌 시몬의 고기 잡는 일에 관여를 하셨습니다. 이 관여로 인하여 베드로의 사적인 자기 인생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엉망이라면 베드로가 강력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밀어야 되는데 여기 보게 되면 8절에 보게 되면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이렇게 갑자기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죄인이라고 이야기한 그것을 계기로 해서 10절 11절에 보면 “이제 이후로는 네가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고 이후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누가 포획된 거죠. 말씀으로 베드로하고 친구들 동무들 있단 말이죠.


그러면 고기 잡는 어부. 보통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듯이 예수님께서는 뭐를 던져서 베드로를 잡았습니까? 말씀을 던져서 베드로를 잡았지요. 그러면 여기 나오는 현상은 하나는 뭐냐 하면은 말씀에 잡혔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나는” 그 다음에 무엇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본인을 스스로 설명할 때 나는 죄인입니다 설명했습니다. 이거 자발적이죠. 본인의 자기 고백 자발적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그래 네가 죄인이야. 베드로가 자기 설명, 이걸 설명이라고 하고 서술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러합니다라고 서술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래,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너는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그 다음에 “되리라” 하고 배를 놔두고 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로 달라질 때 그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했다가 한 단계, 뭐로 변하느냐 하면은 나는 무엇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니까 주님께서는 그 죄인을 뭐라고 규명했느냐 하면은 사람 낚는 어부에 자질 또는 자격이 구비된 걸로 보는 겁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데 자질과 자격으로 보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베드로로 하여금 죄인 아닌 자를 죄인 되게 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그 끝은 그 사람 낚는 어부로 드디어 하나의 과정을 형성 만들어냈어요. 하나의 과정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첫 번째 봅시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 때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죄인을 갖고 있는 그 구성, 구성요소 그것이 나에게서 나왔습니다 또는 나의 전부입니다 라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면 이런 걸 가지고 죄인이라고 한다는 그 구성적인 모습이 그냥 나에게 다 덮친 거죠. 나에게.


나는, 나=죄인입니다. 이렇게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평소에 의인인줄 알고 죄인인줄 아는데 나는 의인보다 죄인에 속했습니다라고 이렇게 자기 의사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방향은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벌어진 상황은 죄인으로서 ‘너는 죄인이 바로 너야’ 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서 고백하도록 유도한 거에요. 말씀이.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이 죄라는 개념은 내가 평소에 분류하고 있던 아 이건 의야, 이건 죄야, 그 죄에 내가 해당됩니다. 그 점에서 나는 동의합니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이게 아니고 나는 의도 알고 선도 알고 죄도 압니다 라는 이 자체를 묵살을 해버리는 거에요. 이 자체가.


이것을 알던 말던 상관없이 무조건 적으로 나는 죄인에 해당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온 거에요. 왜? 엎드렸으니까. 내가 입이 있어도 더 이상 말 안하겠다.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나는 죄인입니다. 그 죄의 규정은 예수님의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이 아시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엎드리는 거에요. 엎드려서 무조건 주님의 안목에 의하면 저는 죄인될 걸요. 아마 죄인일걸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나는 죄인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해서 내가 아는 죄인이 아니고 주님이 설정한 그 죄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으로 포획하는 그 방식이다 이 말이죠. 이 방식을 나중에 베드로가 성령 받아서 성도들 전도할 때 그대로 이 방법에 그대로 적용되는 거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뭐다? 무조건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문제가 풀리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다니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베드로의 생애는 어떤 내용으로 꽉꽉 채워질 것이냐가 이미 밝혀졌어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느냐 하면은 내가 아는 내가 알고 있던 죄나 의의 개념은 그것은 이제 점점 날라가 버리고 주님 홀로 알고 계시는 죄가 나를 통해서 계속해서 여기서 생산되고 만들어지는 작업에 베드로가 놓이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함께 있지를 못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것은 사전에 미리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잖아요. 그게 가장 베드로다운 거에요. 가장 베드로 답다는 말은 가장 반석답다는 말이고 그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교회의 가정 전형적인 그 모습, 교회를 구성하는 그 인간의 그 모습은 베드로가 대표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주님이 알았던 그 죄를 주님의 말씀과 접촉되면서 내가 미처 몰랐던 죄가 내 안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거죠. 만들어지게 되면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베드로가 했더라도 이 고백을 이제는 내가 고백한 고백이 아니라 주께서 베드로답게 만든 그 고백으로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래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베드로가 계속 죄인이 되어가고 점점 더 죄가 많아진다는 말은 이것은 그 베드로 안에 주께서는 말씀만 했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이제는 베드로 속에 들어와서 베드로를 말씀으로 속에서 관통하고 뚫고 같이 지나가는 거에요. 뚫고 지나가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합일된다는 말은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 ‘하나’. 1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뭘로 등장합니까? 미처 몰랐던 우리가 죄인이 되는 거에요.


어떤 죄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 예수님만이 십자가 져야 될 이유가 다른 사람은 거들 필요 없이 예수님 홀로 죄를 대속하실 분이 예수님뿐인 것을 더욱 더 드러내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이 자기 구원에 죄인이 협조할게 아무것도 진짜 아무것도 없어야 가장 찐찐찐! 진짜 죄인이 되는 거죠.


회개를 했다든지 이런 거 전혀 보탬이 안돼요. 배신할 때 확실하게 배신해야 돼요. 확실하게. 배신의 끝장을 보여줘야 돼요. 강도가 배신하는 것은 그건 이해되죠. 왜? 예수님께 별로 혜택을 안 입었으니까. 그러나 가장 누구보다 가까이 혜택을 입은 자가 배신을 해줘야 배신의 진수를 보여주는 겁니다. 배신의 진수를.


예수님과 합의를 했다. 신비로운 합의다. 신비로운 합의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는 말이에요. 나에게서는 어떤 거룩이나 어떤 성결이나 괜찮은 것은 일체 애초부터 우리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왜 내 바닥을 몰랐는가. 왜 나는 바닥을 몰랐는가. 제가 주일날부터 노래했지요. 한번 적어볼까요.


‘저 바닥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어디서 많이 들었던 노래죠? 저 바닥에 누워. 가장 바닥에 누웠을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는 자의 전형적인 찐찐 성도의 모습이에요. 성도는 십자가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제대로 죄인의 코스 괴수의 면모를 다 보여준다면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 자신 베드로를 통해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심판의 부합되는 인물, 심판에 부합되는 인물을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심판에 부합되는 것.


심판에 부합된다는 말은 내가 있을 자리가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가 내가 거기에 있을 자리다라고 인정하는 것.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 심판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는 거에요. 심판 속에서. 왜냐하면 나에 대한 어떤 기대가 전혀 이것은 애초부터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심판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걸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부자유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은 부자유란 비교와 그리고 경쟁. 비교와 경쟁의 여지가 있는 곳에 부자유가 있거든요. ‘비교와 경쟁’. 비교와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누구와 비교한다? 나와 남들, 타인. 하나님 저 보기에 어때요? 저 괜찮아요? 지금 신앙이 맞아요? 불신앙이에요? 라고 할 때 이게 전부 다 뭐냐? 부자유를 의미하는 거에요. 자유가 없는 거에요. 아예 심판 속에 있으면 비교할 건덕지가 없잖아요 비교할 건덕지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있던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 그걸 알게 된 거에요. 자기가 강도 세리나 창기. 내 쪽에서 근사한 것, 내 쪽에서 괜찮은 것을 끄집어낼 것이 전혀 없었다는 거에요. 내가 살아가면서 알았던 선악체계에서 알았던 그 죄 말고 예수님이 말씀을 가지고 주실 때 비로소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그 죄의 깊이. 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선악체계에서 알고 있는 그 죄 말고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서 아는 그 죄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을 던지면서 어느 쪽으로 갑니까? 살려고 갑니까? 죽으러 가십니까? 죽으러 가시죠. 그래서 예수님이 죽을만해서 죽게 되는 그 예수님의 죽음에 순간에 비로소 드러나는 그 죄를 베드로는 이제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거에요.


시작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그 뒤에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베드로하고 예수님하고 그래 너 사람 낚는 어부해라 하고 헤어지거나 졸졸 따라오는 정도를 허락한 게 아니고 이제는 베드로에게 뭐가 채워지느냐 하면은 왜 예수님이 너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되느냐 그 이유를 베드로 안에서 점점 더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변 상황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거에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만들어냈을 때 성령을 받게 되고 그걸 내가 심판에 합당하다는 것을 내가 알 때 그게 뭡니까? 자유라고 했지요. 자유라는 것은 우리에게 뭘 주느냐? 평안함을 줍니다. 영원한 안식을 주지요. 비교하거나 경쟁하거나 어떤 것도 비교 경쟁 대상이 없어졌다는 사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 이걸 아셔야 돼요. 신비하고 영 또는 성령 이걸 좀 구분해야 돼요. 신비라고 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신비입니다. 언어를 통해서. 영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 못하는 거에요. 이해 못하는 세계에요. 세상이 이해 못하는 것. 신비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라면 유한의 세계는 신비가 아니잖아요. 유한 너머의 무한의 세계가 신비입니다. 언어로 묘사될 수 없는 무한의 세계. 궁극적인 세계.


이것이 신비라면 영의 세계는 뭐냐 하면은 유한과 무한이니까 따라붙을려고 노력하겠지요. 이건 양적이에요. 계속 양이 얼마나 악을 줄이고 선을 늘리고 양적으로 이렇게 지향되게 된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양적이 아니고 질적이에요. 그냥 죄와 의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이해 못해요. 그래서 신비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이것은 너무 보여요.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 보고 있었어요. 보고 있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왜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은 자기가 그 정도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기가 그 정도로. 영적이라고 하는 것인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걸 가지고 어린애가 눈에 보입니다.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왜 같은 인간인데 자기는 의가 없다고 주장하느냐 이 말이죠. 왜 인간인데 남하고 비교할 생각을 아예 안하느냐 이 말입니다. 경쟁 할 생각을 왜 안하고 비교할 생각을 왜 안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해를 못하는 거에요. 그런데 신비는 지금 비록 인간은 후패하지만 저기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 있어서 우리는 더 그것을 지향해야 되고 그것을 추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더 순수하게 더 순결하게. 이것은 신비입니다.


신비 이것은 천주교에서는 작은 형제들, 이름도 보세요. 얼마나 경건합니까. 큰 형제들이라고 안하고 작은 형제들. 수도원이죠. 불교, 티벳 불교. 보통 불교. 전부 다 이게 뭘 추구하는 겁니까?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신적인 것을 뽑아낼 수 있는가. 유한한 인간이 무한의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무한의 기적을 뽑아낼 수 있는가 에요.


그래서 이 신비로움을 체계한 공식이 옛날 철학부터 옛날 헬라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육과 그리고 혼과 영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육과 혼과 영. 그래서 이것을 잘못됐다는 것을 설명한 대구 강의에서 지구의 구조를 설명한 거에요. 지각이 있고 눈에 보이니까 그리고 멘탈, 마그마 보이니까 외핵 S파 P파 로 외핵의 존재를 아니까. 그리고 내핵 있고 여기 중심에 핵이 있고.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인간이 아무리 볼 때 지구 자체가 핵이 있지요. 핵은 제일 무거운 물질. 철과 니켈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것을 뭐로 본다? 입자로 보는 거에요. 입자로 봅니다. 이게 몇 kg이냐 몇 kg이냐 이건 전부 다 뭡니까? 양적으로 본다. 양. 양으로 비교가 돼요. 너 성적 몇 점 나왔어? 한 달 수입이 얼마야? 전부 양적이죠.


이걸 양적으로 선악체계를 하게 되면 오늘 착한 일을 몇 번했어? 나쁜 일을 몇 번했어? 전부 다 측량이 가능하지요. 측량이. 그러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했으면 나쁜 짓 좀 해도 괜찮지요. 군에서 고생 많이 했으면 휴가 조금 보내줘도 괜찮다. 휴가 가서 좀 일탈해도 너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의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경찰서에서도 봐주고 이런 거 있잖아요. 양적으로 조정하는 거에요. 인간의 마음을. 왜? ‘나’라는 입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라는 입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갈수록 예수님 배신할 때까지 계속 안에서 죄가 말씀에 입각해서 증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말씀에 입각한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과 기적을 할 때 그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있었지요. 베드로하고 이 사람들 있었지요.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된 사태지요. 사태. 사건, 상황이 주어졌지요.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왔을 때 병 고쳐줬습니까? 죄사함 했습니까? 중풍병자 본인은 중풍병 걸린 거에요. 중풍병 낫게 해달라고 지붕 뚫고 온 거에요. 자, 여기 중풍병자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전과 후를 생각하는 거에요. 자기가 처음에는 중풍병에 안 걸렸어요. 안 걸렸는데 얼마 전부터 몇 년 전부터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중풍병에.


그래서 이 사람은 지붕 뚫고 예수님한테 와가지고 뭘 기대합니까? 중풍병을 낫게 한 중풍병이 없는 자기를 기대하겠지요. 그러면 이건 뭘 의미합니까? 입자에서부터 시작해서 입자로 와서 끝까지 뭘 고수한다? ‘나’라는 자는 입자로 계산하는 거에요. 입자로 구축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 주님께서 여기서 만나서 중풍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뭘 이야기합니까? 죄 사함을 이야기한다고요. 죄 사함을. 죄 사함을 이야기한다고요.


이제 두 번째 어려운 거 나와요. 두 번째 어려운 게 진짜 어려운 거에요. 뭐냐 하면은 지금 중풍병자가 병 고치러 나왔을 때 중풍병자가 뭘 갖고 있느냐 하면은 시간을 자신이 갖고 있어요. 시간을 갖고 있다. 시간은 가는데 시간은 흐름을 내가 안다. 시간을 갖고 있고 인간은 시간의 속에 있다. 시간의 흐름이 뭐냐 하면은 과거 있고 현재 있고 미래 있다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 중풍병자가.


그러니까 전후를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해버린단 말이죠. 죄 사함을 해버리면 이건 어디서 나오느냐. 말씀의 위력 아닙니까. 말씀의 위력이거든요. 말씀의 위력에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인간이 시간인데 여기서 주님의 시간과 만나버리면 이 시간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시간의 상대성이 나와요. 시간이 상대성이 나옵니다. 어렵지요?


상대성이 나와버리면 주님이 활동해버리면 인간은 시간이 흐르는게 아니고 인간은 고정되어 버립니다. 인간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인간은 시간이 없어요. 흐른다는 이 자체는 이건 자기 혼자 생각이에요. 인간들 세계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본인이 시간이 있다고 주장하니까 누가 시간이 없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고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고정된 하나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누굴 보냈습니까? 예수님을 보내가지고 예수님이 활동해 버리니까 그 활동에 의해서 예수님이 활동해버리는 순간 인간은 인간의 모든 시간은 다 없어지는 거에요. 인간에게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인간에게 자아란 없다는 뜻이에요. 이게 세 번째 어려운 겁니다.


자, 인간은 자아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아까 인간 입자로 생각해서 지각 뚫었다고 했지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뚫어버리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 제일 밑바닥에 아담의 층이 나와요. 아담의 층. 자꾸 어렵다 하지 말고 쉽게 해야겠지요. 그게 저의 임무지요.


여러분들이 집에서 샤워할 때 오른쪽으로 틀면 물 나오지요. 왼쪽으로 틀면 물이 잠기지요. 그런데 치매 환자가 그걸 잊어버렸다고 칩시다. 그런데 자기가 샤워할려고 갈 때 이걸 오른쪽으로 틀지 왼쪽으로 틀지 모르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과거가 날라가 버렸으니까. 과거가 날라가 버렸으니까 다시 둘 중에 하나니까 둘 다 해보는거죠. 치매까지 안와도 요즘 나도 그래요.


인간이 어떤 운전을 한다든지 뭘 할 때는 이미 과거에 했던 그 기억이 우리 속에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이 ‘나’라는 신체를 움직이는 자아가 되는 겁니다. 나는 어느 동네에 순대국집을 안다. 과거잖아요. 나는 지금 순대국집에서 순대국을 먹는다. 현재지요. 먹고 나는 한숨 자야지. 미래지요. 그렇잖아요. 그렇게 계획을 잡을 때 그 계획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주인공이 ‘나’가 되는 거에요. 신체가 주인공이 아니고 자아가 주인공이라니까.


나는 저걸 알고 나는 지금 하고 있고 나는 앞으로 잠을 잘 거야. 신체가 주인공이 아니고 자아가 주인공이 되는 거에요. 자아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뭐가 있다? 시간 개념이 흐르고 있어요. 시간 개념이. 계획이 있다고요.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을 지금 실행에 옮기고 그 다음에 미래에는 계획을 하고 이게 인간의 자아란 말이죠. 이게 바로 베드로에요 이게. 이게 베드로라고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엎드렸던 베드로가 그냥 베드로가 아니고 그냥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다 자기 고집, 자기 시간, 자기 계획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옆에 붙어서 지금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그걸 지금 듣고 있는 거에요. 그게 죄인 줄 몰랐지요. 그게 죄인 줄 몰랐던 거에요. 예수님한테 가서 예수님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은 자리 앉습니까? 이미 자기의 스케줄 자기의 계획이 있지요.


베드로의 신체가 이야기했습니까? 자아가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의 ‘나’라고 한 게 그런 거에요.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 베드로의 혓바닥이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 본인이 이야기했습니까? 본인이 이야기한 거에요. 본인이. 자, 신체, 자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신체가 있어요. 키, 몸무게, 머리, 눈 다 있는데 이 베드로가 신체를 가지고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여기서 자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무슨 요소를 가지고? 시간 요소.


시간 요소라는 것은 기억 더하기 기대. 기억+기대 아닙니까? 기대거든요. 아침에 눈 뜨면 여러분 그냥 눈 뜹니까? 나는 지금 눈 감고 눈을 떴다 이겁니까? 안 그렇잖아요. 눈뜨면 뭐부터 합니까? 오늘 뭐하지? 가정주부 같으면 아침에 눈뜨면 아침에 뭘 또 해 먹이지? 뭘 해 먹일지 뭘 걱정해요. 홈쇼핑에 볶음밥같은 거 한 40개 사가지고 하면 깨끗이 해결될 걸요. 국 없으면 육개장 시키면 되고.


기억과 기대가 있는 그게 자아가 되는 겁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나’라는 거에요. ‘나’. 내가 기억과 기대할 때에 이 ‘나’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 말씀을 만나기 전에 뭐하고 있었어요? 고기 잡고 있었어요. 고기 잡고 있었는데 신체가 고기 잡은 게 아니고 베드로라고 ‘나’라고 하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잖아요. 신체가 그냥 고기 잡으면 그냥 으쌰 잡아당기면 그만이에요. 오른쪽으로 넣어라 하면 오른쪽 던졌다. 아무 접촉점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해요? 내가 열심히 잡았지만 말씀에 의지한다 하지요. 그 객소리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객소리가. 그 자아는 뭐에 걸쳐있다? 자기 시간관에 걸쳐있는 거에요. 시간관에. 그 자기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자기가 쫙 엎드려있는 거에요. 그냥 엎어져있는 거에요. 엎어져서. 쫙 엎어져있는 거에요.


운전할 때 내 신체가 운전하는 게 아니고 내 자아가 운전해요. 자아가. 그래서 어떤 때는 자아가 운전하다 보면 차가 나와 동일시 되가지고 딴 생각하다보면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왜? 그냥 하도 습관화 되가지고. 습관화 되가지고 마치 내가 인공지능 같애. 심지어 운전대 잡은 감각도 없다니까요. 내가 지금 운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운전대 붙들고 구경하고 있는지 이상하게 차가 잘 가네. 잘 가는 이유도 몰라. 딴 생각한다고요. 80넘으면 운전하지 말아야 돼요. 정신 없어요. 술 먹으면 더 심하게 되고.


주님께서는 이게 베드로가 과거를 알고 있고 현재 고기 잡고 있고 현재 미래 기대가 있다 이 말이죠. 여기는 고기 안 잡혀. 밤새도록 해도 안 잡혔어 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 현재에 주님께서 수직으로 말씀을 결합시켜요. 말씀을 결합시켜보면 자신의 전체에 있는 시간 자체가 말씀에 강탈당합니다. 빼앗겨버립니다. 빼앗겨버리면서 빼앗길 만하니까 빼앗겠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나는 뭐다? 나는 죄인입니다. 갑자기 과거 현재 미래 나오다가 다시 말해서 자아가 알고 있는 바가 나오다가 이 자아가 뭐로 돌변했습니까? 죄인으로 돌변했어요. 죄인으로 돌변했다고요. 이 말은 내가 어제만 죄인이었습니다. 이게 됩니까? 인간은 어제만 죄인이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어제 기억을 갖고 있는 게 ‘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는 것이 앞으로 잘하겠다는 것이 앞으로 잘 할 거라고 생각하는 현재가 그런 소리를 현재의 내가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 시간 자체를 주께서 뽑아내버려요. 이제 어렵다는 말도 안 할란다. 아예 기대를 안 할 테니까. 아까 수도꼭지 왼쪽 오른쪽 하듯이 인간에는 모든 인간에는 과거사가 있습니다. 과거사. 그 과거사가 전에는 수도꼭지 오른쪽 왼쪽 했잖아요.


성경에 보면 우리가 아담의 아담층하고 연결되어있어요. 아담의 선악과 따먹은 것이 아담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과거사에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것이. 그리고 아담 다음에 누가 나옵니까? 이스라엘 나오고 이스라엘 멸망 나오지요. 이스라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이 우리 이야기라고요.


이게 신체가 개체가 되니까 입자가 되니까 아담 따로 나 따로잖아요. 주님께서는 아담의 시간 따로 있고 내 시간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앞에 지각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있고 일본 있고 미국 있을 때 미국 따로 우리 따로지만 밑에 들어가보면 전부 다 이 밑에 흐르고 있는 맨틀이 365일 동안 맨틀이 20cm 25cm 움직인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밑에 더 깊이 들어가 버리면 주께서 말씀 더 깊이 들어가 버리면 지각에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전부 다 한통속이에요. 모든 인간은 아담의 뿌리를 받고 있고 오늘 제목이 아담의 뽀루지. 아담의 뽀루지에요. 아담의 뽀루지인데 이걸 누가 억누르고 있느냐 하면은 나의 좁은 나의 기억 속에 태어나서 살았던 나의 좁은 시간이 이걸 감추고 억누르고 덮고 있는 겁니다. 이걸 캐내는 것은 누가 캐내고? 주님의 말씀이 캐내는 거에요.


우리는 뭐라고 변명하느냐 하면은 저는 선악과 구경도 못 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네 밑에 누워 있는데. 아담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어요. 왜? 아담의 신체니까. 아담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고요. 아담의 암반층과 우리가 같이 결합되어 있다 이 말이죠.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죄인 같으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마땅히 죄에서 나온 뽀루지죠. 죄인이죠. 죄인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에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육신의 모습으로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친히 어디까지 친히 방문하셨다? 아담층까지 방문하신 거에요. 아담층. 아담층에 방문하시니까 어느 인간도 아담에서 벗어난 인간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뭐 이스라엘 욕한다고? 이스라엘 우리 과거사인데요. 왼쪽으로 돌리면 물 나올까? 이것만 우리 과거사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전부가 우리 과거사라고요. 과거사 없는 게 아닙니다.


나만 잘하지. 나만 신과 결합해가지고 어떻게 신비로운. 참나. 그래놓고 주님의 신비로움에 신비로운 연합했다고. 주여 제대로 하겠습니다. 네가 아는 너는 그건 껍질, 껍데기. 돼지 껍데기 알지요? 그냥 껍데기 부분. 기껏 내가 기억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과 어떻게 잘 해볼라고 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뽀루지, 종기라고 합시다. 피부가 이렇게 있는데 종기가 났습니다. 여기 고름이 있고 좀 더럽지만요.


이걸 가지고 수술할 때 뽑아내게 되면 여기는 옴폭 뭐가 나옵니까? 이렇게 파이지요. 갑자기 시간이 과거 미래 단절되었어요. 현재성이 완전히 박살난다고요. 말씀이 와서 이걸 잡아당겨 버립니다. 이걸. 이걸 잡아당겨버리면 우리는 아담으로 태어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벌 받고 있어요. 이건 대구강의에서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태어난 것부터 자체가 벌이에요. 태어난 자체가. 태어난 자체가 벌이에요.


전에 죽었던 담배 많이 피워서 죽었던 이주일이 맨날 무대에서 폼 잡고 나와서 하는 말이 뭔가 보여드릴까요? 였는데 우리도 뭔가를 보여줘요. 뭘 보여줍니까? 죄를 보여주는 거에요. 죄를. 아담과 나는 상관없다. 이스라엘과 내가 무슨 상관있냐? 저 사람 잘못한 거 나와 상관없다. 전부 다 자기가 조작된 자기의 짧은 시간 안에서 조작된 그것만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부인 베드로의 과거사에서 밤새도록 고기 잡았는데 지금 예수님이 지적한다고 해서 오른편에 고기가 많이 잡힐 수 있다는 그것은 베드로의 기억에는 없어요. 그리고 베드로의 친구에게도 없어요. “혹시 그런 일 있었나? 밤새 안 잡혔는데 오른편이 이상하게 보물단지가 되가지고 고기 많이 잡혀서 배가 침몰할 정도로 많이 잡힌 거 봤나? 없지?” “없지.” “없지?” 없는 거에요. 자기 자아의 기억에서는. 자아의 기억에서는.


그런데 말씀에 의지하여 던지니까 자아의 세계의 자기의 기억의 세계, 시간의 세계에 없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 격차. 그 차이. 베드로는 그걸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나의 지평선보다 더 넓은 이여 나를 떠나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지평선이라는 말은 지평선의 특징은 그 지평선을 아무리 가도 지평선은 내가 움직인 만큼 지평선이 넓어지는 거에요. 더 멀어져요. 지평선 다 따라잡았다 해도 가보면 내가 처음 지평선과 동일한 거리의 지평선이 있는 거에요. 그게 우리의 지평이에요. 우리의 한계, 삶의 한계가 그렇다 이 말입니다. 삶의 한계가.


이게 바로 자아의 한계죠. 자아의 한계. 그런데 주님은 우리 쪽에서는 그 지평선을 넘어 설수가 없어요. 우리의 공간이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의 공간에 말씀, 예수님이 여기서 침입을 했어요. 여기서 침입하니까 지금껏 자기의 지평선이 감당이 안 되는 거에요.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안 될 때 베드로의 본능적으로 누굴 지킵니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나를 떠나소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자아에 머물겠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아주 겸손한 태도의 주님을 밀치는 거에요. 밀치는 겁니다. 그렇게 밀칠 거 같으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네가 한 그 고백의 의미를 이제는 내가 채워줄게. 내가 채워줄게. 네가 생각한 네 시간을 쏙 다 빼놔줄게. 네가 생각하는 시간, 네가 나한테 배신하고 앞으로 어떻게 했더라도 그것은 네 시간이 아니고 그게 바로 주님의 활동시간이었습니다. 아예 내 시간 자체가 없어졌어요.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이렇게 저렇게 했습니다 자체가 날라가버려요. 왜? 뭘 해도 심판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뭐 더 이쁜 죄 덜 이쁜 죄 그런거 없어요. 그냥 죄에요. 그냥 죄.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 되고 난 뒤에는 원 없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왜? 더 이상 자기한테 자기가 내세울 과거도 없어 자기가 기대할 미래도 없고 그냥 주님의 성령에 붙잡힌 바 되었기 때문에.


나의 고유의 나의 세계, 나의 공간, 나의 영역은 주님한테 쏙 빼앗겼습니다. 전부 다 강탈당했습니다. 주께서 그거 가져가서 어디에 써먹을려고 합니까? 그걸 가져가야 그 죄를 가져가야 그게 바로 베드로가 했던 죄의 생산, 죄를 드러낸 그 작업이 베드로의 본인의 작업이 아니고 누구 작업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신의 작업이 됩니다.


죄인인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에서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는 본인의 작업에 베드로의 일대기는 아주 유용하죠.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심판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은 거에요. 심판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고 기쁨과 감사가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자유, 심판 속에서. 그래서 주님께서 늘 성령받은 성도한테 묻는 것은 이거에요. ‘네가 아직도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라고 추궁하죠.


뭐 주님이여 헌금 얼마를 해드릴까요. 주님 저에게 사명을 주옵소서. 너는 네가 아직도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심판 속에 있는 자가 긍정적인 어떤 행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심판 속에 있기 때문에. 따라서 어떤 심판 속에 있는 성도가 어떤 복음을 전파해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면 이것은 누구 작업입니까? 예수님의 작품이죠. 예수님이 하신 일이죠. 자기는 심판 속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인간이 내 공로다. 내가 고생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 네가 제공해야 돼.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거 어떻게 돼요? 그때 주님이 네가 아직도 네가 죽은걸 모르느냐? 하고 박살냅니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저 사람에게 복음 전하면 저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건 아직도 뭐가 살아있는 거에요? 내 시간이 살아있는 거에요. 내 시간이.


그걸 단선적 인과관계라고 합니다. 참 오늘 또 고상한 거 하나 합니다. 단선적 인과관계. 선이 하나. 선이 하나고 지금 내가 원인 있으면 어떤 결과 나온다. 단선적 인과관계. 이것은 바로 이 시간은 주님 앞에 허용될 수가 없어요. 그럼 단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면 중첩이 될 수 있는데 단선적 인과관계에서 중첩관계. 원인은 주님이 주시는 거거든요.


여기에 과정 속에서 베드로 같으면 순서를 쉽게 하겠습니다. 과정을. 단선적 인과관계에서 중첩하는 여러 가지니까. 복선이라고 할 수 없어요. 복선보다 더 많은 여러 가지 관계있을 수 있으니까. 중첩했다고 봅시다. 중첩 관계가 이렇게 있다 할 때 첫 번째는 베드로는 타인을 상대합니다. 이거 다 우리한테 해당돼요. 우리는 남을 상대하지 않아요. 뭐가 있을 때는? 자아는 나 말고 타인이다. 나 말고. 주께서는 이게 뭐냐? 베드로는 아담을 상대합니다. 내 속에 있는 아담이 타인 속에 있는 아담을 상대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꼬라지하고는. 네 꼬라지나 내 꼬라지나 둘 다 똑같다. 세 번째는 베드로는 나를 상대한다. 증진한 타인은 내 안에 있어요. 증진한 타인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나를 상대한다. 나보고 격려하는 거에요. 똑바로 해. 언제까지 이 꼴로 살래? 앞으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내가 나한테 격려하고 질책하고 꾸중하고 그리고 칭찬하고 응원하고.


한번 적어볼게요. 나는 나를 원한다. 내 시간을 갖고 있다. 만약에 안 되면 자살. 안되면 자살하는 거에요. 왜 인간이 자살합니까? 자기가 내가 나에게 타인이기 때문에. 내가 처분이 가능해요. 내가 정한 타인이기 때문에 내가 처분 가능한 거에요. 그래서 자살한 사람이 누굽니까? 가룟 유다 아닙니까. 가룟 유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뭐라고 하느냐? 사탄이 들어갔다 하지요. 결국은 사탄은 단선적 인과관계를 계속해서 인간에게 심어놓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5장 8절 (아담의 뽀루지) 201222a-이근호 목사.hwp (168.5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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