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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00:25:07 조회 : 404         
강남-누가복음 5장 8절 (아담의 뽀루지) 201222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5장 8절 (아담의 뽀루지) 201222b-이근호 목사



만약이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버리면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활동이 예수님이 활동을 해버리면 지상에 있는 우리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고 주님의 활동 시간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활동한 것은 이것은 시간에 들어가지를 않아요. 시간을 빼앗겼으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 이루어버리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심판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심판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것. 심판 속에 고정되어버렸어요. 태어날 때도 아담 속에 있었고 중간에도 20대도 마찬가지고 70되도 80되도 아담 속에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앞에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없다는 것은 베드로가 성령 받고 한 일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심판 작업에 참여하게 되죠. 심판 작업에. 언제부터? 처음부터. 베드로가 태어날 때부터. 성령 받을 때부터가 아니라 성령 받고부터면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과 후가 나뉘어져요. 베드로 시간이 되어버려요. 처음부터 모든 게 주님의 계획이었고 주님의 예정한 뜻이었습니다.


그걸 에베소서는 “창세전에 주께서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택하여서” 이렇게 나온다고요. 창세전부터 우리를 기쁘신 뜻대로. 야곱은 미워하고 아니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 들으면 섭섭하겠다. 말 잘못해가지고.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겁니다. 소급해서. 어느 한순간도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아담이라는 우리의 과거사, 그 이스라엘이라는 과거사. 거기서 우리는 한 번도 거기서 따로 떼어나간 적이 없어요. 그게. 아주 단단한 암반층처럼. 그게 박혀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우리의 과거사는 결국은 아담사가 되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면 아담을 아담으로 이야기하신 분은 누굽니까? 주님이 그렇게 붙이지요. 가인은 개인적으로 이야기했고 아벨은 개인적으로 이야기했던 간에 그걸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또는 옛날에 그 일을 상황을 만든 주님의 일 속에 집어넣어버리면 그 속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시간을 뽑아내신다. 자기 시간을 뽑아내는 거에요.


가인 속에서 아벨 속에서 뽑아내는 거에요. 그 자기 시간을 뽑아내서 다 이루었다 하게 되면 뭐냐 하면은 십자가죠. 하나는 뭐냐 하면 복, 하나는 십자가 언약이기 때문에 복과 십자가로 인하여 뭐 나옵니까? 저주가 오지요. 복 받을 사람과 저주 받을 사람을 주님께서는 성경 속에 이 세상에 쫙 깔아놓고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거기서 다 뽑아내는 거에요.


마치 지하에 지하 2km 있으면 거기에 셰일층이 있어요. 셰일층은 석유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석유회사에서 그 셰일층에서 추를 박고 뭘 뽑아냅니까? 쏙쏙 석유 다 뽑아내지요. 사슴농장에 사람들이 가가지고 사람들이 사슴 뒷목에다가 빨대 꽂아가지고 보신한다고 뽑아내고 사슴 도망가면 붙들어서 실제로 그렇게 혐오스럽게는 안하겠지만 피 빨아 먹듯이 주님이 드라큐라처럼 자신의 시간을 다 뽑아내요.


아벨에서 뽑아내고 엘리에서 뽑아내고 베드로에서 뽑아내고 사도 바울에서 뽑아내고 오늘날 우리에게 뽑아내고. 이렇게 뽑아낼 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뽑힙니까? 움직이면서 뽑힙니까? 격렬한 저항이 생기지요. 격렬한 저항. 누가복음 4장 한번 봅시다. 4장 4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주님께서 사람에게 쪽쪽 사슴 피 빨아먹듯이 뽑아서 자기 시간, 자기가 행하신 일. 시간은 주님에게만 의미가 있으니까요. 역사 속에 들어오신 주님 아닙니까. 그냥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역사 속에 이스라엘 속에 왔잖아요. 역사에 오신 분이 그 모든 역사는 누구 역사입니까? 하나님 본인의 역사에요. 시간이란 말이죠.


그걸 하는데 사람들은 곱게 뽑아가세요 뭐 이런 식으로 고개 내미는 게 아니고 누가 발악하면서 달려듭니까? 누가 뽑혀 나오지요? 예? 귀신. 귀신들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을 인간은 몰랐지요. 손흥민이 자기 속에 귀신 있는걸 압니까? 손흥민이. 70m 드리블해서 한골 넣어놓고 귀신이 했습니다. 이럽니까? 아니지요. 귀신은 인간을 앞장세워가지고 철저히 인간 편이에요. 인간의 시간을 옹호합니다. 인간의 계획을 응원합니다. 격려합니다.


그래야 귀신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을 인간이 몰라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도 쉿! 입 다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대표자, 너와 나와의 관계지 인간은 관계없다. 인간은 악마한테도 당하고 주님한테도 당하고. 주님에게 당한 사람은 구원받고 귀신에게 계속 당하고 있는 인간은 계속 그대로 지옥 가는 거고요.


주님에게 온전히 다 이루었던 십자가의 주님의 시간의 완성의 그 당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심판 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아는 자유를 누리고. 그런 반면에 귀신이 있는 인간은 자기 스케줄에 빠져가지고 어떻게든 간에 내가 성스러운 성결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어가지고 죽어서 좋은 나라 천국 가겠다고 아득바득 애를 쓰지요.


천국 가는 것은 누구 하기 나름이다? 나 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누가 그렇게 사주했습니까? 귀신이. 광야에서 귀신은 말씀을 거론하지요. 귀신이. 악마가.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 가는 사람들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 구원받겠다고 열심히 성경 들추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안경쓰고 이렇게 앉아가지고. 뭐 하나 지킬려고.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내 시간이 뽑혀야 되는데. 아니야 조금 있으면 오실거야 주께서. 주님 오시는 걸 대비해야 돼. 기름 준비해야 돼. 주유소 옆에 살면 되지 뭐. 주유소를 하든지. 자기 집이 주유소인데 기름 준비할게 뭐 있어요. 수시로 예수님께서 주의 일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이 하는 일의 의미를 감을 못 잡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은 첫 번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 왔을 때 그 당황스러움. 베드로의 당황스러움이 베드로 일생 끝날 때까지 계속 됩니다. 당황스러움이. 너는 너의 원대로 가지 않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당황스러움이 계속 간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베드로의 생애는 방황하고 방랑자 신세, 다시 말해서 종잡을 수 없게 만들어요. 모든 성도의 인생이 이렇습니다. 자기 스케줄이 먹히지를 않아요. 자기 스케줄이.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 또는 택한 백성에게 주는 하나님의 혜택이에요. 내 스케줄 뜻대로 되지 않아요.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또 계획을 또 세워요.


그 때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아직도 네가 네 조상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네가 심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몰라? 넌 너를 왜 그리 몰라? 너는 뭘 해도 심판이야. 알아? 그걸 계속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네가 그 말을 어떤 식으로 했던 간에 그 너 말한 대로 그 죄를 너에게 덮어씌울 거야.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가 아니라 주여 나와 함께 계셨기에 주께서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기에 제대로 나는 죄인 맞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그래서 베드로 입장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은 비현실적입니다. 자기의 생애가 비현실적 같애. 뭔가 열심히 아득바득 살려고 살려고 발악을 하는데 내 뜻대로 되지를 않는 거에요. 발악을 하는데 내 뜻대로 되지를 않아요. 내 계획대로 되지를 않아요.


그러면 아예 계획을 세우지 말게 하시던지. 아니에요. 계속해서 주께서 계획을 세우게 만들어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아담의 주특기가 그거거든요. 자기 시간을 자기가 계획해서 미래를 단선적 인과관계, 내 계획한데로 결과가 도출되기를 단선, 선이 하나밖에 없는 이 시간위에 존재하는 것. 그것에 계속 매이게 하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The time is out of joint”. 시간은 경첩에서 떨어져 나갔다. joint에서 떨어져 나갔다.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에요. 시간은 경첩이 되가지고 부채살처럼 한곳에 매여서 오늘 지나면 내일, 내일 지나면 이렇게 되야 하는데 어떤 사태가 벌어져 버리면 어떤 사건이 벌어져버리면 이 시간이 뽑혀가지고 혼자서 날라다녀. 혼자서 날라다녀요.


정처 없어요. 뿌리도 없어요. 내가 앞으로 뭐가 될지 어디로 갈지도 몰라요. 거기에다가 주님은 그런 거 생각 하지 마 너는 이미 어디서 무얼 하든지 어떻게 살든 심판 안에 있잖아. 그걸로 됐잖아.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지. 네가 선교사가 되든 뭘 해도 그게 심판이고 그게 죄가 되는 거에요. 선교지에 가서 죄 짓고 코로나 걸려가지고 선교지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와도 죄 짓고.


선교사들 코로나 때문에 잠시 한국에 온 사람들 돌봐주는 그런 단체가 있어요. 웨슬리하우스라는 게 있어요. 우리나라 선교사가 2만 8천명인데요. 많지요. 그중에서 6천명 들어왔답니다. 6천명이 갈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24지점 거기에 웨슬리하우스라고 해가지고 선교사들 보호해 주는 겁니다. 선교사들 나가서 죄 짓고 들어와서 죄 짓는 거에요. 뭘 해도.


그 사실을 만약에 선교사 가운데서 내가 보기에 거의 모르지 싶은데 이건 내 교만이고. 혹시라도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성도입니다. 진짜 성도에요. 바깥에서 죄 지었고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안에 와서 죄 짓는다. 이제는 웨슬리하우스에서 신세지면서 죄 짓는다. 인간아 왜 사냐? 뭐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 있다면 그건 정말 성도에요.


왜? 그 사람에게서 나올 것은 뭐냐 하면은 고정된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앞으로 잘 할게. 앞으로 선교사 잘 할게 이게 아니고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고정된 십자가만 증거하는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제대로 주님과 통하는 시간을 제대로 발견한 거에요 그 사람은. 제대로 발견.


내 시간이 아니고 나에게서 뽑혀나와서 죄 지은 시간을 의로 바꾸신 주님의 자기 의로 바꾸시고 자기 의로 완성으로 바꾸신 그 고정된 시간. 어떤 죄도 죄 사함이 되게 하는 그 시간 있잖아요. 하나님과 주님과 함께 있기에 어떤 심판도 뭐로 바뀐다? 복으로 바뀌는 심판. 그 안에 놓여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태 누가 요한 다 볼 거 없지만 여러분 다 아는 상식 내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자기의 과거사. 자, 여러분 다 아시니까 베드로의 과거사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의 과거사 뭐라고요? 아담. 아담이 긴 치마, 원피스 치마처럼 퍼져 나가면 이게 뭡니까? 인류사죠. 인류사. 그러니까 이 전체 인류사가 우리 개인에게 다 집약 다 들어있는 거에요.


그래서 아담의 성질, 타락한 아담의 성질, 성깔 그게 우리 안에 그대로 다 나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운동하는 거에요. 움직이는 것. 그리고 감각하는 것. 뭘 느끼는 것. 냄새라든지 귀로 듣는다든지. 감각하고 운동하는 것. 이걸 계속해서 우리가 활용해서 내 계획대로 실시를 합니다. 오늘 아침은 뭘 먹을지 점심은 뭘 먹을지. 늘 계획하지요. 애는 어떻게 교육시킬지. 애 교육을 6살인데 학교 가기 전에 어떤 걸 배워놓고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계획하고. 전부 다 움직이는 거에요. 움직이고 감각하는 거죠.


그런데 언제 우리가 주님의 완성에 접촉이 되고 내가 심판에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면은 이 모든 감각의 행동이 이게 고장날 때.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안될 때. 내 뜻대로 안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초조하지요. 그렇죠? 초조하다는 말은 곧 내가 뜻대로 되게 되면 시간가는 줄을 몰랐었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내 시간을 느낄 때가 언제냐면 내 뜻대로 안될 때 어깃장 났을 때 어! 내 계획대로 안됐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육신을 장악하고 있는 이 아담의 요소가 늘 이렇게 그냥 가만 자동적으로 놔둬도 아담의 위세, 죄의 위세, 위력이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어요. 계속 계획하고 움직이고 펀드는 어느 쪽에 넣으면 되고 주식은 언제 빼고 무슨 주식 사면 되고 항상 쉬지 않고 살아있는 티를 내요. 뭐든지 살아있는 티를 내요.


그런데 성령이 또는 주님이 와서 이걸 어떻게 합니까? 밤새도록 고기 잡고 고기 안 잡히면 다음날 또 고기 잡고 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개입했지요. 오른편에 던져라. 주님의 개입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움직임에 잠시 STOP하는 겁니다. ‘STOP’. 주님의 모든 지시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STOP! 아 제가 아주 절실하게 그 단어를 느꼈어요. 개한테 STOP하는 걸 배웠거든요. 이게 개한테 할 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한테 하는 거구나. STOP!


이 말은 일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 일은 너의 계획이 아니고 나 주님의 계획이었어. 네 생각을 STOP하라. 어떻게 STOP하느냐. 너는 지금 심판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이게 STOP이에요. 심판에. 단선적 인과관계, 이걸 해서 이걸 얻겠다는 그 생각을 STOP해라. 멈춰라 이 말이죠. 너는 나한테 충실한 개니까. 네가 열심히 해서 인간 되는 게 아니니까. 충실한 개니까.


소위 교회에서 선교사나 교인이나 이걸 사람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잡는 어부에요. 그 사람을 격려 못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우리 교회 오면 3년 안에 사업 잘 됩니다. 복 받습니다. 가정이 화목합니다. 귀신이 시킨 전도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귀신이 시킨 전도를. 귀신이 떠나간 전도가 아니고 계속 인간이 계획하고 있는 시간은 격려하고 후원해 주는 전도.


당신이 하시는 일은 믿음대로 하시면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귀신이 나가야 되는데 귀신이 나갈 턱이 있어요? 안 나갑니다. 귀신이 나갈려면 우리가 심판에 놓여있다는 소식을 전해야 귀신이 나가지요. 아이씨 더는 못 속이겠네 이러면서 나간다고요. 아이 참 속일려고 했는데 안 속네. 이래서 나가야 되는데, 네가 뭘 해도 심판 안에 있어. 이 소리를 해야 귀신이 나가는데 그 소리를 안 하니까 계속 희망을 갖는 거에요. 희망을. 계획을 잡고 희망을 갖는 거에요.


그 희망은 움직임의 자기 시간이 더해 버리면 이건 뭐냐? 나만의 지평선. 나만의 지평선. 나만이 공간이 형성됩니다. 요양병원에 가면 이런 사람들 많이 누워 있어요. 내가 자식 어떻게 키웠는데 이러면서. 평생에 자기의 과거사, 자기만의 지평선이에요. 거기에 대고 어머님, 어머님은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면 야야 나의 지평선 바깥의 이야기는 이야기하지 말아라. 너는 나를 떠나라.


내가 아는 이 지평선은 뭐냐 하면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기억의 반지름들이에요. 내 지평선들이에요. 내가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훌륭한지. 단선적 인과관계 속에 다 형성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이것 말고 어머님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죽는데 죽는 이유가 죄 지어서 죽습니다. 그러면 야야 내가 무슨 죄를 내가 평생 파출소도 간 적 없는데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죄인이냐 이렇게 나올 때는 이 지평선 밖에서 나오는 거에요. 이 지평선 밖에는 못 넘어가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직접 폭격을 해야지요. 성령께서. 뭐로 폭격합니까? 고정성으로. 우리 보기에는 십자가가 고정되어 있지요. 반대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 어디서 무얼 하든지 어떻게 살든 이건 고정되어 있고 심판 안에 고정되어 있고 아담의 암반층에서 빠져 나온 적 없었고 움직이는 건 누가 움직였다? 주님이 움직이죠. 움직여야 여기 시간이 나오니까. 주님의 시간이, 스케줄이 나오니까.


나는 성령으로 태어나서 이런 말씀 전하다가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이건 누구 스케줄이죠? 주님의 스케줄, 그 스케줄 너 나아가면 나는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고 선악과 심었고 따먹게 했고 전부 다 모든 스케줄이 누가 다 걷어가요? 주님 자기 걸로 다 걷어가는 거에요. 주님 자기 것으로. 이 사무실에 냉장고 있는데요 우리가 와가지고 배고프다 해가지고 어?! 여기 피자있네 해가지고 이거 끝나고 우리 피자 먹읍시다 하는데 여기에 사무실 주인이 와가지고 내 피자 가지러왔다 하고 가져가 버리면 우리 피자 먹을려고 하는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가져가 버리죠.


우리의 바닥부터 우리의 신체까지 전부 다 우리 것이 아니고 다 주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인데 이게 누가 와서 주인도 아닌 게 중간에 선악과 따먹으라고 누가 부추겼어요? 독립하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독립하라고. 시작을 하나님부터 시작하지 말고 너로부터 예수님부터 시작하지 말고 너로부터 시작하라고 누가 그렇게 격려했던가요? 이게 악마잖아요. 악마부터, 따먹을 때부터 내 시간이 시작되는 거에요. 내 시간이 시작된 거에요.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무슨 벌을 줬습니까? 네가 만난 사람마다 널 해치려 한다니까 시간을 알고 있는 가인이 너무나 놀래하면서 자기 장면을 생각해볼 때 아득하거든요. 제발 타인이 나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그건 좀 너무 심한 벌입니다 이렇게 한 거에요. 그러나 아벨 죽일 때는 순간에 죽었지만 가인은 순간에 죽지 않고 사형 당하지 않고 오래 살다가 죽었잖아요. 그 오래 산다는 게 뭐냐? 시간을 그만큼 경유한 거에요. 벌 받을 시간을 늘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죽었어요 이제. 벌 받을 시간을 늘인 거에요.


아슬아슬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늘인 겁니다. 시간이 주는 폭격을 한번 맞아봐라. 시간이 얼마나 우리한테 무서운 징벌인지를. 시간이. 시간은 주님이 받을 징벌이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데 주께서는 주님의 그 시간 징벌을 주께서 다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 없는 언제 어디서 무얼 하든지 고정적인 시간이 없이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너는 그 자리에 제자리 뛰기 했었다는 그러한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심판의 요소로서 우리에게 육신을 준 겁니다.


제가 이렇게 심판 안에 들어오게 되면 모든 것이 자유라고 분명히 격려 차원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실컷 이야기했건만 여전히 우리에게 찝찝하게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은 축복 안에 고정되어있다고 하면 듣는 오빠 기분 좋을텐데 심판 안에 있다 하는 게 왜 그렇게 찝찝합니까 생각하실 거에요. 그건 간단해요.


축복 안에 내가 있어버리면 나는 나를 포기를 못해요. 나는 나를 포기를 못한다고요. 축복 안에 있어버리면. 축복 안에 있는 것은 바로 나를 포기 못했다.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이게 언제부터 생긴 거냐 하면은 바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긴 귀신의 사주를 받는 아담의 모습이 이거에요.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와 같은 말이 뭐냐? 내가 최종적 의미다. 내가 최종적 의미다. 하나님이 오시든 가든 간에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이게 내가 최종적 의미에요. 이것이 그대로 살아서 복을 받겠다고 기대한다면 이거야말로 악마의 ‘나’가 그대로 지금 탱탱히 살아있는 셈이 되잖아요 이게. 그렇잖아요? 이걸 도중에 이걸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걸 없애버려야죠 이걸. 이걸 없애버려야죠.


심판의 일부로써 내가 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는 나한테 최종적 의미다? 아니다? 최종적 의미가 아니죠. 나는 나한테 기대를 한다? 안한다? 기대할게 없지요. 나한테 기대할게 없으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최고의 복이거든요. 그걸 제가 엥~하고 모기가 십자가 속으로 돌진하는 겁니다. 사실은 모기가 십자가에 돌진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모기에게 돌진해가지고 모기를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생명은 날마다 갖고 있지 말고 나한테 넘겨라.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에 넘기움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살아있는 방법은 우리의 것을 주님 앞에 넘기는 겁니다. 넘기울 때 그냥 넘기지 말고 주님 앞에 뽑혀서 넘겨야지요. 주님 앞에 내 놓을 가치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그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인간은 심판 안에 있다. 심판 안에서 빠져나온 적이 없는 그러한 존재로서 그런 자아로서 기꺼이 심판 안에 있으니까 기대할게 뭐 있어. 기꺼이 그까짓 것 나 같은 것 기꺼이 주님 앞에 드리지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키우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비록 내가 그리스도와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한 바로다. 얼마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보세요. 자신 있게 이야기하잖아요.


자, 그 다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심판 안에 있다. 또는 심판받을 자로써 주님 앞에 넘겨서 주님의 활동, 주님의 작업의 요소가 되게 했다 했습니다. 그럼 이번부터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은 아담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에요. 아담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자, 우리 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아담 있다고 했지요. 우리 안에 이스라엘 있지요.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멸망당했습니다. 그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죠.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날마다 매일의 삶을 통해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성깔과 성질을 계속 우리를 통해서 뿜어져 나온다는 뜻이에요.


아담의 자기 잘난 체하는 그걸 복음 이기주의라고 하는데 복음 가지고 또 이기주의 활용해 먹는 자기 잘난 체하는 하나님께 귀한 것 받았다 하면서 자기 자랑하는. 이게 선악과야. 얼마나 맛있는지 이러면서 자랑하는 이 자기 위주, 자기의 최종 의미를 계속 뿜어내죠. 이스라엘이 망했던 것을 계속 끄집어내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 인간의 육신은 뭐가 나온다? 아담의 죄가 나오고 이스라엘의 죄가 나오지요. 여기에 주님이 마중을 나갑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중을 나가지요.


마중을 나가서 이것을 이것은 이미 심판 안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안 받는다라고 쳐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성령은 십자가의 사건에서 옵니다. 주일날 설교하면서 너무 압축적인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 구석이 있는데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사건이다. 이게 형상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사건이에요.


형상은 어떤 모양을 말하는 게 아니고 뭐를 어떤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거에요. 어떤 의지가. 어떤 성질이 나오는 거에요. 성질이. 우리의 신체를 통해서 무엇이 나온다? 복이 나오는 게 아니고요 저주가 나오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나옵니다. 십자가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희생가치가 완료되었다. 완료된 희생이 나오는 거에요. 완료된 희생.


그러면 희생이 희생될려면 우리는 뭐가 되어야 돼요? 우리는 여기서 뭐가 나와야 됩니까? 죄가 나와야 되지요. 죄가 나오게끔 주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세상 환경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덮치게 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코로나19. 요새는 코로나19가 아니고 완전히 코로나 식구됐어요. 개그입니다. 아재개그. 무슨 말이냐 하면은 코로나 걸렸으니까 교회 그만 나와라. 교회 문 닫습니다. 제목이 코로나 식구에요.


주님이 무서운 게 아니고 뭐가 무서워요? 코로나가 무서워요. 이거는 뭐가 무섭다? 주님보다도 누가 무섭다? 저승사자가 귀신이 더 무서운 거에요. 귀신이여 부탁하오니 제발 나를 지켜주옵소서. 이 식구, 이 패밀리.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한다고 했지요. 그럼 종이 하는 이야기가 뭐겠어요? 모든 행동과 모든 내용 속에서 바닥에 뭐가 있습니까? 나는 당신의 딸랑딸랑 종 입니다가 거기에 의미가 담겨서 행동하고 나오겠지요.


코로나19가 찾아오면 자진해서 코로나 식구 되는 거에요 이제. 알아서 기겠습니다. 안 모이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기적은 그럼 모이는 게 기적이냐? 모이는 게 기적이 아니고 말씀이 십자가가 덮치는 게 기적이에요. 십자가가 덮치는 게 기적. 그래서 코로나 오더라도 모이라는 뜻이 아니고 모이든 안 모이든 감사가 나와야 돼요. 나로 하여금 죽음에 벌벌 떠는 적나라한 심판받아 합당한 것을 뽑아내주시는 그 주님의 성령의 작업에 우리는 참여합니다. 감사하고 우리는 즐겨야 돼요.


그래서 어떤 분이 코로나19 때문에 참석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길래 제가 집구석에 있더라도 감사하시면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내 뜻으로 교회온 것이 아니고 코로나 없어서 온 게 아니고 주의 뜻으로 오고 가게 했다면 주께서 있게 한 것도 주의 뜻입니다라고 코로나라는 환경을 돌파해서 직접 주님의 은혜와 접합하는 게 이게 기적이란 말입니다. 이게 기적. 코로나 네가 겁나는 게 아니고 겁나서 안 모이는 게 아니고 오늘은 주님이 모이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하네. 이상한 핑계를 대나. 오늘 가지 말고 오늘 잠시 교회 쉬고 이게 주의 뜻 같애.


더욱 더 우리를 죄인 되게 해서 변명이 되겠느냐만은 결과적으로 어떻게 보면 그 자체를 다시 한번 내가 얼마나 심판에 있을 만큼 믿음이라는 것은 개뿔도 하나도 없다는 완전히 뒤로 뒤집어서 털털 털게 하시는 그 기적, 그 기적이 성도이기에 받는 기적입니다. 그거 받아서 성도 되는게 아니고 성도이기 때문에 그것이 확인되고 발견되는 거에요. 주님의 일하심이 발견하는 거에요. 이게 기적입니다.


교회 모이면 코로나 있더라도 교회 모이면 성도고 안 모이면 성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거는 누구한테 계속 기대를 갖고 있습니까? 나의 결심을 내가 믿어야 돼요. 내 각오에 대해서 내가 헌신해야 됩니다. 이것은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가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을 가능성을 내가 스스로 또 만들어내는 거에요. 그것은 배후에 누가 격려하겠어요?


귀신이 그렇게 격려하지요. 너 할 수 있어. 너의 신앙을 보일 수 있다고. 보여 봐 보여 봐. 이 창궐하는 전쟁통 속에서도 네가 신앙이 있음을 장렬하게 순교하는 것을 보여 봐. 누가 이 소리를 하겠어요? 악마는 누구한테 기대를 겁니까? 내 속에 아담이 있지요. 악마가 아담을 노려서 성공적으로 아담을 종으로 삼았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을 뭐라고 합니까? 죄의 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6장에서도 나오고. 죄의 종인 거에요.


죄가 왕노릇하고 왕노릇하면 아담은 그 종이 되는 거고. 그리고 로마서 6장에 보면 죄가 왕노릇하고 있는 거에요. 죄가 왕노릇할 때 우리는 악마를 의식합니까? 안합니까? 악마를 의식하지 않는 식으로 우리는 악마의 종이된 거에요. 모든 결정은 내가 알아서 내가 선택해서 한다 그게 바로 악마의 종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 4장 42절 오니까 분명 그 사람 멀쩡해요. 멀쩡한데 주님 와서 오니까 주님의 의가 오니까 죄의 아담과 악마가 결탁했던 죄가 근원적인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그게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에이씨 하면서 비타민씨를 이야기하면서 에이씨 하면서 악마가 나온 거에요. 악마가 나오고 귀신 나오고 난 뒤에 귀신들린 본인이 놀래버려요. 나한테 귀신이 있었어? 내게 괴물이 있었어?


비로소 우리는 귀신들린 자라는 것을 성령 받고 난 뒤에 아는 겁니다. 앉은뱅이가 낫고 난 뒤에 앉은뱅이 아는 게 아니고 앉은뱅이가 낫고 난 뒤에 비로소 내가 바로 앉은뱅이인 것이 합당한 것을 낫고 난 뒤에 아는 거에요. 소경도 마찬가지고. 내가 바로 소경입니다. 이제는 느긋하게 자신만만하게 제가 바로 소경이고 제가 바로 불신자고 제가 바로 지옥 갈 사람이고 제가 바로 심판 속에 있습니다를 왜 말을 못해. 왜. 이제는 다 주님의 과거사 아닙니까. 다 과거지사입니다. 이제는 법명으로 불러주세요.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다 과거.


우리의 과거사가 육신이 있는 한 아직 계속 뿜어져 나오는데요? 계속. 어제 구원받았는데 하면 안돼요. 어제란 시간은 우리의 단선적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어제 구원받았다는 것이 이게 의미 있으면 안돼요. 어제 주께서 일하셨겠죠. 그러면 오늘은? 오늘 주께서 일하시겠지요. 왜? 나는 매일 고정되어 있고 시간 속에 움직이는 것은 주님의 시간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4장에서 귀신 쫓아내고 5장에서는 그 쫓아내는 그 주님께서 그 주님이 바로 베드로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귀신이 그대로 있는 자, 정말 자기가 어떻게 뭔가 시도해서 뭘 해보겠다는 사람.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공부 얼마나 했는지 봅시다. 성경 개념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고정되어있습니까? 활동되어있습니까? 인간들 입장에서는. 범죄한 인간들 입장에서는 고정되어있습니까? 활동하고 있습니까? 문자니까 고정되어있지요.


그러면 인간은 고정되어있으니까 본인은 고정합니까? 활동합니까? 활동하지요. 활동하는 내가 고정된 성경 말씀을 지켜서 뭐 하겠다? 구원받겠다 시도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이죠. 그런데 누가복음 5장에서 누가 활동합니까? 말씀의 개념이 누가 움직여요? 주님 스스로 움직이죠. 말씀이 주님 스스로 움직여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아담이 있다면 아담의 책임자는 누구냐 하면은 아담이 아니에요. 아담의 책임자가 아담이라고 여기는 것은 누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뱀이 한소리고 아담의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담 속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움직이는 거에요. 뭘 움직이는가? 말씀으로 언약으로 율법의 완성으로 움직여서 찾아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은 나도 움직인다 그 다음에 누구도 움직인다? 주님도 움직인다. 내가 움직이게 되는 것은 어떤 기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단선적 인과관계에서 기대하고 있지요. 주님은 뭡니까? 다 이루었지요. 다 이루심이 뭐를 보게 합니까? 내 기대하는 것을 작살내니까 우리의 인생은 뭐다? 방랑자. 도대체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내가 어디로 갈지를 모르겠어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에요.


주일날도 설교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나를 매직 삼아서 주님의 자기 일기장을 하루하루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하루하루에요. 주님은 깻잎을 두 장 쥐지 않습니다. 깻잎 짱아찌를 한 장만 딱 쥐지요. 우리는 성질 급해서 미리 서너장 내년 5월달까지 계획 다 잡아놨어요. 아이고 그때 비가 안와야 될 텐데. 그때 코로나 잠잠해야 될 텐데.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관여하실 때 관여하면서 다가오면서 뭐가 이루어지는가? 바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다 이루심의 입장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발견케 하는 겁니다. 확인하고 발견케 하는 거에요.


충실한 개가 아 나한테 주인이 있었지. 그걸 매일같이 발견하는 거에요. 보다 더 충실해야지 이게 아니고 보다 더 충실한 게 아니고 일은 누가 하느냐? 우리 주님께서 다 하시고 나는 그 주님이 다루는 대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하는 것을 그것을 아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내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계획이 있더라도 순간적으로 성령이 와버리면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했던 간에 주께서는 그것을 다 이루었다가 되게 하시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가 되게 하시는 거에요.


왜 내손에 맡기지 않는가? 나는 심판 속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이 있는 한 우리의 기능은 역할은 뭐냐? 우리는 뭘 해도 죄고 저주고 심판이라는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 역할. 그 역할 하면 돼요. 그런데 만약에 이 역할 하는 우리가 만약에 하나의 개체라면, 입자라는 말이 어려우면 개체. 개체라면 그다음부터는 개체라고 생각한다면 걱정이 되는 거에요. 아까 여러분 걱정을 제가 대신한다고 했잖아요.


만약에 진짜 심판 속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만 지옥 가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이것은 뭐냐 하면은 개체가 아직 살아있는 거에요. 개체가 깨어져버리면 입자가 깨지면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파동이 있다고 했지요. 파동은 스스로 에너지가 없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에너지가 없어요. 돌은 연못에 돌 던지면 연못가에 있는 파동은 어디서 나오는 에너지입니까? 돌과 연못에 물과 부딪힌 그 에너지가 퍼지잖아요.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사건, 그 돌멩이가 파고를 이루면 우리는 다 이루었다는 파동에 여기에 포획되는 겁니다. 어려워요? 주님이 개입하지 않는 나의 일은 없어요. 모든 일에 주님이 개입했습니다. 모든 일에. 마태복음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6장 30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 이 들풀은 내일까지 살 수 있습니까? 못 삽니까? 못 살지요.


그러면 이 들풀이 만약에 입자라면 개별체라면 인간이라면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되면 나 이제 지옥 가는구나 하고 들풀은 고민에 빠집니까? 고민에 빠진 들풀 뭐 이런 거에요? 들풀 고민합니까? 고민 안 합니까? 들풀이 고민할 리가 있어요? 주께서 쓰시옵소서 이렇게 되잖아요. 그 들풀을 우리로 바꿔치기 해봅시다. 심판에 있다고? 그럼 지옥 가는데 그럼 나만 손해인걸.


지옥이란 지옥의 모습은 관계성이 끊어진 게 지옥이에요. 주님이 존재고 나는 그 존재에서 나오는 하나의 팔이고 다리고 하나의 연관된 관련성이 있는 같은 지체라는 것을 모르면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 안 가도 이미 지옥 온 거에요 그 사람은. 단독적으로 개체, 끊어진 관계. 관계가 이어진 게 아니고 관계가 끊어졌으면 그 자체가 지옥이다 이 말이죠.


자기 걱정하는 자체가 지옥 같은 걱정이죠 근심이죠. 내 믿음이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불신자 되는 거에요. 왜? 내가 불신자 되도록 주께서 하셨다는 그 관계가 살아있다면 그 관계가 신자가 되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는 마음껏 나는 불신자야. 나 믿음 없어. 나는 행한 것 없어. 나는 헌금한 적 없어. 나는 기도한 적 없어.


주님의 기도의 여파가 계속 나로 하여금 주께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들풀도 먹여 살리잖아요. 우리가 내일 아궁이에 안 던져질 보장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이중에서. 내일 살 수 있는 사람? 보장 있는 사람 없어요. 들풀 신세와 우리 신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죠 관계. 관계가 그 나라와 의에요.


그 나라 의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성된 것이 예수님이 이 지상을 다녀갔기 때문에 그 완성의 자락이 그 완성의 여파가 이미 지상에 있습니다. 어디 있어요? 아담의 세계에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담에서 주님이 구원하는 방법이라고 했잖아요. 아담에 있는데 어떻게 구원하느냐? 어떻게 찾아온다? 주께서 움직이는 말씀이 찾아오는데 말씀이 찾아올 때 이미 완성된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아담에 속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새 아담, 새로운 피조물로 생산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 솜씨에요? 주님의 솜씨죠.


그래서 그 작업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육신 자체를 뭐했다? 죄 아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오늘 줄곧 이야기한 심판 아래 있는 것. 아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심판 아래 있다. 이게 뭐가 그렇게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고 고민거리고 골칫거리 이야기입니까. 안 그러면 이게 자유의 이야기고 승리의 이야기잖아요 이게. 난 뭘 해도 심판 속에 있다 이게 얼마나 큰 승리입니까? 외쳐야 되지요. 나 임금님 벌거벗은 거 봤다고 산 위에서 외치는 소년의 그 기쁨, 기쁨이잖아요. 나는 봤다! 나는 보았다! 내가 벌거벗은 것을.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됐잖아요. 누가? 강도가. 어디서? 십자가에서. 유한이 무한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자기 지평선 때문에 못 따라가요. 아무리 해도 그 지평선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이 유한이 아니고 양적인 문제가 아니고 질적으로 죄 속에 죄라는 질속에 주님의 의가 고정된 의가 들어와서 죄를 모르는 우리가 뭐가 되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알게 된 거에요. 그렇게 해서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을 우리를 통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시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 다 이루었다는 그 사건.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을 남은 여생을 죄를 드러내는데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죄는 주께서 성령이 옴으로써 코로나19보다 더 쎈 변종이 나와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마귀적으로 나 자신을 지킬려고 했는지 옛날의 아담의 과거사가 나의 과거사인 것을 처절하게 체험하면서 역시 혹시 했는데 역시 우리는 내 힘으로 구원 안 되는구나 그걸 확인하는 즐거움과 승리의 기쁨이 있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할 일 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죄 짓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이 얼마나 즐겁고 기쁨인지요. 일체 나에게 기대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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