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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9 22:53:40 조회 : 320         
강남-누가복음 6장 5절 (안식과 안심) 210406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6장 5절 (안식과 안심) 21040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6장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그렇게 되어 있지요. 안식일이 율법 속에 들어옵니다. 창세기 2장에 안식일 나오지요. ‘안식일’.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안식일이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십계명 안에, 계명 안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이 안식일이 공격용이 돼요. 이 세상을 파헤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율법이라는 것은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율법은 더욱 더 죄를 더 증강시키죠. 증가시키고 죄 된 세상이라는 것을 실제화시키는 겁니다.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는 안식을 허락하지 않겠다. 이게 십계명 속에 들어온 안식일의 취지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안식일을 허용하지 않겠다. 안식이라는 것 다 파내겠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율법을 뭐했느냐 하면은 해석을 한 거에요. 이게 화근입니다. 율법은 해석하게 되면 안돼요. 왜냐하면 해석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지식이 되고 지식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소유용이 돼요. ‘소유용’. 이 소유는 왜 소유할려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해서 흔히 말하는 구원받고 천국가고 안식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담기게 되는 겁니다. ‘소유’.


소유해서 지식은 뭘 알겠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게 아니에요. 그 지식 내 것 만들겠다고 아는 겁니다. 내 것 만들기 위해서. 소유된다면 이 소유의 주체, 소유의 주인공이 있을 거에요. 주인공이. 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지요. 다시 볼까요?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 해석을 해서 거기서 뭐를 끄집어낸다? 지식을 끄집어내고 그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그 소유한 소유주가 누구냐 하면 ‘나’거든요. ‘나’.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누구를 위한 율법이 되어버렸어요? 나를 위한 율법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러한 세계, 안식이 없어야 될 세계인줄 모르면서 안식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세계에 주님이 투입되신 거에요. 안식이 없어야 돼요. 멸망해야 된다고요. 불 심판받아야 돼요. 안식이 없어야 마땅한데 그 마땅함을 전혀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가지고 안식을 얻고자 하는데 그 안식을 얻고자 하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은 본인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지식이 생기면 생길수록 뭐냐 하면은 누구 것 만드느냐 하면은 내 것 만들고 싶은 의욕이 넘치지요.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아깝잖아요. 그러면 그 공부한 것을 모아 모아서 그걸 누구 지식으로 전환시킵니까? 내가 생존하는데 힘이 되도록 전환시키잖아요.


지식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내 것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내 것 되기 위해서. 그 지식이 없던 것과 차이 나게 되어있어요. 지식이 없으면 인생이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하지만 지식이 많이 모아지면 모아질수록 나는 안정될 것이고 그 안정을 사람들은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그게 여유 많은 여유만만 혹은 편히 쉼, 그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식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잘못이 어디서 나왔어요? 율법을 뭐하는 거에요? 해석하는데서 나오는 겁니다. 율법은 해석용이 아니고 율법은 뭐냐 할 때 여러분 오늘 이거 하나 알아도 돼요. 율법은 해석용이 아니다. 그럼 뭐냐? 자명한 것이죠. ‘자명한 것’. 그렇게 돼야 되는 거에요. 율법은. 그렇게 돼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이 말이 자명이라는 말, 이 뉘앙스가 좀 이렇게 어려우면 제가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어렵게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쉽게 이야기할 줄 알았죠? 자명한 것 이게 어렵다면 이렇게 하면 돼요. 율법은 스스로 부푼다. ‘율법은 스스로 부푼다’ 에요.


제가 마태복음 13장 비유 가운데 하나 읽어 드릴게요. 마태복음 13장 33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과 같죠. 지금 천국을 누가 해석을 한 게 아니에요. 천국은 그냥 놔두면 안에 뭐가 있는지 뭐 이스트가 있던지 누룩이 있겠죠. 있던지 이게 저절로 부풀어지지요.


그러면 5시간 뒤에 갔다 10시간 뒤에 하루 종일 놔두고 갔다 하면 점점 더 부풀어지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자명함이에요. ‘자명함’. 율법은 살아있는 거거든요. 그러나 아이들 갖고 노는 그 바비 인형, 그거 가지고 놀 때 잠 자거라 잠 자거라 한다고 그 바비 인형이 새삼스럽게 자지는 않지 않습니까.


인간은 율법을 바비 인형처럼 갖고 놉니다. 자기 소유용으로 해서 이걸 이렇게 주문 외워가지고 쓰담쓰담 하게 되게 되면 이 율법이 내가 원하는 천국과 구원과 안식과 하늘의 소망을 달성해주리라 생각하고 쓰담쓰담 하고자 하는 거에요. 이 율법뿐만 아니고 이 모든 신약의 성경 해석도 내가 해석해서 그 해석된 지식을 내가 소유를 하게 되면 나는 소유한 나는 천국 가는데 그만큼 안정성을 갖게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과도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일을 누가 했느냐 하면은 바로 오늘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에요. 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 일이 오늘날 우리가 되풀이하고 있다고 보시면 딱 됩니다. 어떤 인간이든 바리새인 하는 일을 못 벗어나요. 어떤 인간이든. 그래서 성경에 바리새인이 있는 겁니다. 그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한 거에요. 해석하면서 희망을 가지는 겁니다.


제대로 해석함으로 똑바로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제대로 해석했다는 그 칭찬과 더불어서 하늘나라 상급도 많이 받고 천국에 무사히 도착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바리새인의 후예가 바로 교회지요. 오늘날 교회. 오늘날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신학하는 사람들. 신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에요. 바리새인의 후예들이에요. 그들과 했던 것과 똑같이 합니다. 그들의 모토는 뭐냐? 언어로 된 것은 해석해야 내 것 된다. 언어로 된 것은 해석이 가미돼야 내 것 된다는 거에요.


언어에서 내 것 되기 위해서 뭐를 가미해야 된다? 해석을 가미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해석을 하게 되면 내 일방적인 해석일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해석의 신빙성을 추가하기 위해서 선배들, 많은 학자들, 언어를 아는 사람들, 그런 의견들을 통합해서 가장 전통적인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위험도가 적은 역사적으로 진리라고 긍정이 끝나버린 그러한 그것을 그 해석을 참조로 해서 우리가 내 것 만들어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지요.


‘하나님이여 말씀의 전통적인 진리를 우리 교회가 확보했으니 우리 교회를 하나님 부흥케 키워주세요. 또 우리 가정이 잘되게 하옵소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바 진리를 내가 소유하고 있으니까 이 소유한 나를 설마 내치지는 않겠지요.’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율법은 스스로 부풀어 올라요. 자명하게. 자명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 나타나서 하는 게 있어요. 염소새끼 키우는 것을 아느냐? 염소새끼 키우는 방법을 아느냐 하는 것은 요새는 뭐 생물학이 발달 되서 압니다 이러면 되는데 그 현장에 네가 있었어? 그 염소새끼 낳는데 네 지식이 네가 아는 지혜가 네가 아는 신앙이 염소새끼 낳는데 네가 보탬이 됐느냐? 라고 묻는 거에요.


하늘의 북두칠성 만들 때 너 거기 있었느냐 묻는 것은 북두칠성 만들 때 네가 협조한 적 있느냐? 너는 네 존재가 그냥 자명하게 없는데서 부풀어 오른다는 생각을 못해? 그걸 묻는 거에요. 욥에게. 그런데 네가 왜 고난을 언급하느냐 이 말이죠. 네가 고난을 언급한다는 고난 자체도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자명하게 고난 있구나 그럼 끝나면 될 문제를 왜 고난 받습니까? 라고 질문한 거에요.


참 우리 인간들한테는 너무 심한 하나님의 닦달이잖아요. 아픈데 왜 아픈데 말도 못합니까? 이런 식으로 반발 나오는데 그거는 근원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부터 해서 우리가 속한 세상부터 해가지고 이 세상 돌아가는 것, 이 세상 자체, 율법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마치 바리새인들이 아주 심하게 예수님한테 저주받은 것처럼. 너의 아비는 악마라고. 그 욕설을 욕설이라고 듣지 마세요. 너 아비가 악마라는 것은 자명한 거에요. 그거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한 것이지 과도하게 너 욕받아 라는 식으로 너 혼나보라는 식으로 그렇게 무리하게 덤탱이 씌우는 식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은. 누구하고 싸움질하고 시비 걸 의사는 없어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거에요. 있는 그대로 너의 아비는 악마라고.


지식이 큰 문제에요. 지식이. 해석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식 자체도 큰 문제라고요. 이게 왜 큰 문제냐 하면은 인간의 지식은 자기를 중심에 놓고 뭐를 구성하느냐 하면은 일관성을 구성해요 ‘일관성’. 자기를 중심에 놓고 일관성을 구성해요. 그래서 일관적이 아닌 것은 전부 다 빼버려요. 전부 다 빼버립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가 강원도 깊은 골짜기에 평생 동안 감자만 캐는 그 할머니가 1980년도 5.18 사건 광주 사태에 대해서 관심 있어요? 없어요? 관심 없지요. 그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 사건이 일어나도 나든 말든 그 할머니는 장날의 감자 값이 더 중요한 문제에요. 감자 시세가.


왜 그러느냐 하면은 자기 일관성의 논리, 연쇄고리의 사슬에 관계망에 광주 사태는 엮여지지 않기 때문에. 도외시하는 겁니다. 도외시하는 거에요.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이게. 계속해서 어려운 말 골라서 하겠습니다. 별로 안 어렵지요? 설명 들으니까 별로 어렵지 않지요? 여러분 실력 같으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설명하게 되면 이거는 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이 설명에 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둘러싸여 있느냐 하면은 내가 이해한 세상에 일관성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아무리 나를 설명해도 나를 설명할 때 투입되는 모든 자료 있잖아요. 자료. 참고.


그것은 내 일관성에서 끄집어내 온 거에요. 끄집어내서 온 거에요. 만약에 공수부대 특전단. 공수부대 특전단 숙소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와 여기 지금 학원에 다니는 꼬마아이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 방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에 강도에 대처하는 서랍에서 끄집어내는 무기가 같을까요? 강도가 들어왔다.


초등학교 2학년 본능적으로 막 대들잖아요. 그럼 연필 다 던지고 그 다음에 지우개 던지고 이러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공수부대 특전단에 강도 들어왔다. 그러면 서랍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슈류탄부터 해서 자동화기 있겠지요. 대항하는 무기가 다르지요. 그럼 그 서랍에 들어있던 그 물건들은 평소의 누구의 일관성을 증명하기 위한 물건들이였어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물건들이죠.


인간들이 세상을 대처하는 방법도 그거잖아요. 그거 대처할려고 인간들은 신학지식을 많이 확보한다고요. 이것 가지고 마귀 이기고 이것 가지고 내 인생을 차분하게 정리하게 되면 무사히 수월하게 천국에 골인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 것들만 내 서랍에 내 머리 서랍에 가득 기억의 서랍에 가득 있는 겁니다.


참 보통 문제 아니지요. 그래서 안식일 날 제자들이 뭘 했느냐 하면은 그 당시 세대의 일관성으로 통하는 안식일 날 노동해서는 안 되는 일을 여기 보면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고 먹고 갔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요. 2절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드디어 예수님 그룹이죠. 예수님 그룹에 뭐가 드디어 그 일에 그 사건 현장에 누가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참여하게 되었지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그냥 참여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참견할 때는 나름대로의 안식일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전통적인 해석, 율법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것. 사이비 말고 그들이 다 인정하는 그런 해석이 있어요. 그냥 들어온 게 아니고 그 해석 들고 들어온 거에요.


만약에 예수님과 그 무리들이 보여줬던 안식일 날 행위가 그들의 전통과 일치된다면 그들이 시비 걸러 오지를 않겠지요. 다르지요.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겁니다. 뭘 매개로? 율법해석을 매개로. 말씀해석을 매개로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본 겁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잘 이해했다면 그 다음 말도 이해됩니다. 안식일에 진행은 안식일 율법의 진행 또는 아까 부풀어 오름은 반드시 여기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은 여기 뭐가 투입되느냐 하면은 인간들의 율법해석이 여기에 같이 들어와야 된다는 것. 이것이 뭐냐? 자명한 것. 이것도 자명한 거에요. 반드시 그러해야 돼요. 그러해야 돼요.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의 율법해석 인간들의 율법해석에서 여기 누가 포함되어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포함됐겠어요? 안 포함됐겠어요? 포함되지요. 그들의 안식일을 지키는 의도가 뭐냐 하면은 자기가 구원받고 천국가기 위해서 지키겠지요. 그럼 이러한 의도에 누구를 포함시킵시다. 우리 자신을 여기 포함시킵시다.


그러면 스스로 부풀어 오르는 안식일 율법이 여기 바리새인 인간들 여기 이 자리에다가 나를 집어넣는 거에요. 나를 집어넣으면 이 안식일 율법이 나한테 부풀어 올라서 집어넣는다는 말은 안식일에 스스로 부풀어 오르는데 있어서의 나의 엉터리 같은 이 신앙이 필요 있다는 말입니까?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필요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죠? 필요 있지요. 필요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통제당한다. 이걸 통제당하는 거에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성도는 한평생을 주님 앞에 감시당하는 겁니다. 감시. 여러분들이 CCTV 에서 감시당할 때 만약 여기 작대기 가지고 성질나면 CCTV 깨겠지요. CCTV가 여기서 765m 위에 있어요. 짝대기로 CCTV가 안 깨져요. 그 CCTV로 감찰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짝대기로 치지 말고 짝대기를 놔버리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포기해야 되겠지요. 그 포기가 그게 신앙이라니까요 그게. 그게 신앙이에요. 주께서 우리 안에서 스스로 부풀어 오르는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바리새인처럼 혹시 살지 않았습니까? 들통 다 나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들은요 한결 같이 이야기하기를 성진우 가수가 이야기한 것과 똑같이 이야기해요. 다 포기하지 마. 다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말래요 우리보고. 믿씁니다 쌍시옷 써가면서 주여 믿씁니다. 도와줄 줄 믿씁니다! 간절히 빕니다. 맨날 악을 써가지고 자꾸 악바리처럼 우리가 포기 안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은 스스로 부푸는 거에요.


목사님 몸 왜 그리 좋아요? 근육에다가. 운동 좀 했어요? 그럼 목사님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부풀어 오른 거에요. 운동해서 된 게 아니고 부풀어 오른 거에요. 우리 몸도 모든 몸이 부풀어 오른 거에요. 고무풍선에다가 주께서 바람 넣어 주신 거에요. 성령께서. 이 간단한 걸. 너무나 간단하잖아요. 아파트 경비원이 와가지고 차 왜 거기다 세워놨어요? 주께서 부풀게 해서 그렇게 놓은 거에요.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고 감시받고 있는 그 자체에 대해서 안심을 하는 날이에요. 안식이 아니고 안심을 하는 날이에요. 이게 말장난 같지만. 대구시내 그 근처 가면 ‘안심’이라는 곳이 있어요. 왕건이 견훤한테 쫓겨가지고 이쯤 오면 안심 놓는다 해서 이름이 안심됐는데 하루 종일 쫓겨다녔다 해서 반야월이고 그 지명 이름이 다 그래요. ‘안심’이라고 있어요.


안식일은 안심하는 날이에요. ‘안심하는 날’. 그 무엇과 대비하느냐 하면은 6일 동안의 노동과 대비해가지고. 노동할 때 건성건성 노동하지 않습니다. 이거 안하면 나 굶어죽는다고 얼마나 걱정이 늘어져 있습니까. 6일 동안 우리 평생을 다 압축한 거라면 안식일은 바로 “그렇게 노력했냐?”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죽어. 죽어도 괜찮아. 네가 손 놔도 괜찮아. 줄곧 나는 너를 감시하고 있었어.” 관찰하고 있었단 말이죠. 네가 왜 건방 떨어. 네가 왜 해석을 해.


여기 오늘 본문에 6장 5절에 보세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의 주인’. 해석을 해도 내가 해석해 내가. 예수 내가 해석한다고. 네가 안식을 알아? 네가 안식을 만들었어? 네가? 만들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네가 해석을 하느냐 말이죠. 출제의원 따로 있는데. 출제의원 따로 있는데 자기가 문제를 출제 안했잖아요. 그럼 왜 자기가 자기를 왜 채점해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채점을 누가 해야 됩니까? 출제의원이 채점을 해야 될 게 아닙니까.


안식일 주인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켰고 안식일을 어떻게 완성시키느냐를 좀 보란 말이죠. 안식일을 해석할 생각하지 말고. 안식일 주인이 어떻게 안식일을 스스로 자기 해석을 했는가를 좀 보란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끼어든 것은 제자들은 양쪽 다를 경험해야 돼요.


왜냐하면 어차피 예수님 부활하고 떠나고 난 뒤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그런 날이 오게 되면 제자들이 인간 해석 틀렸고 주님 해석 맞다고 이야기해야 될 그 역할을 그들의 역할은 지식이 아니고 틀린 답변의 안식을 몸소 체험해야 돼요.


내과 의사가 내시경한다고 할 때 의과대학에서는 직접 의사 될 사람한테 직접 내시경을 당해보게 해요. 수면내시경도 당해보게 하고 그 마취 없이 하는 내시경도 하고 얼마나 아프다고요. 저도 마취 없이 하는 거 당해봤거든요. 정말 너무 아파요. 죽는 줄 알았어요 아파서.


제자들이 그걸 경험해야 되는 거에요. 제자들이. 왜? 제자들 무리는 이 바리새인 무리나 그 동네에서 배웠던 지식 아닙니까. 안식일 해석 뭐 안하고 뭐하고 뭐하고 이렇게 지킨다. 그 해석에 전부 다 같이 휩쓸린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이라고 뭐 그들보다 뛰어난 지식 있는 거 아니고 같이 놀아나는 겁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야기할 것은 이 안식일이 율법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율법 따로 있고 다른 율법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떡이 한 덩어리 된 이상은 하나의 떡 일부를 뗀다고 해서 다른 떡하고 다른 맛이 나는 게 아니에요. 어떤 떡의 어떤 그 모서리를 떼고 다른 부분을 떼더라도 동일한 맛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진짜 오늘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다수’. 순 우리말로 하면 ‘여럿’. 그런데 이 여럿은 어디에 포함이 안 되는 여럿이냐 하면은 인간들의 일관성에 없는 여럿이에요. 일관성이 없는 여럿.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비일관적 다수라고 이야기 합니다. ‘비일관적 다수’.


지금 왜 비일관적 다수 어려운 말 쓰느냐 하면은 일관성에서 필히 반드시 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신입니다. 하나님이 나와요. 인간들은 모든 일관성에서는 일관성을 위에서 총괄하고 통제하고 의미를 제공하는 최고의 정점에 어떤 존재자를 인간들은 상정하게 되어있어요. 그건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절대자와 연계 맺고 있는 자기 자신을 안정망 속에 자기를 넣어두기 위한 논리적인 필연적인 조치에요. 필연적인 조치.


그래서 신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부처가 됐든 대자연이 됐든 과학 같으면 대자연이 되겠지요. 세상은 저절로 된다. 이게 다윈의 변화설이잖아요. 어떤 사람은 진화론이라고 하는데 저는 진화론이라는 말은 다윈이 했다는 거 안 믿어요. 변화를 이야기했지 진화를 이야기한 적은 없어요. 진화론은 다른 사람들이 다 이야기한 것 같애. 이 세상은 변화한다.


철학의 두 계열이 있어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 멈추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변화와 변화의 연속이다. 이런 주장이 있는 반면에 또 하나의 철학은 변화해봤자 결국 하나로 모인다는 거에요. 철학의 큰 두 개의 줄기가 있어요. 두 개의 줄기. 철학이 그렇다는 말은 인간의 논리의 극한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의 논리가 끝에 어디 갔느냐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두 가지 논리 가운데서 논쟁을 해보면 누가 이기겠어요? 최후의 누군가 있다가 이기게 되어있어요. 왜? 로마서 1장에 보면 모든 인간은 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럼 왜 자꾸 변화를 주장하느냐? 그 최후의 그분을 눈으로 본적도 없고 사다리가 거기가지 갈려고 하면 너무 짧아. 인간의 논리의 사다리가. 그런데 끝에 가면 점, 점, 점으로 되거든요. 실선으로 이어지는게 아니고.


그러니까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다 치고 아는 것을 하자 해서 세상은 그냥 변한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동양철학같은 건 팔계가 변한다. 팔계가. 음양으로 다 변한다는 거에요. 멈추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라고 하는 것은 늘 ‘도’에서 ‘도’로 변할 뿐이지, ‘도’ 스스로 하나의 과정을 보일 뿐이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말 자체가 신을 의식해서 하는 이야기에요.


신은 죽었다는 말이 신을 부정 못하겠다는 소리를 그렇게 우회해서 간접적으로 한 거에요. 만약에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엄마 나는 귀신을 안 믿어! 귀신을 안 믿는단 말이야! 아이고 무서워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귀신 무섭다는 뜻이에요. 괜히 허세를 부리는 거에요. 허세를.


인간은 통제받고 감시받는 것이 악마와 한통속이 되고 난 뒤에는 되게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해석할려고 하는 거에요. 자기 실력을 보여줄려고 하는 겁니다. 주님 보시지요. 이정도 실력 됩니다. 하자 없지요? 해석에 하자 없지요? 그냥 밀어 붙입니다 이제. 밀어붙입니다. 밀어붙이다가 어디에 걸리느냐 걸림돌에 걸립니다. 걸림돌에.


어떤 분의 제자들이 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에 가면 비벼 먹는 그 사태와 부딪힌 거에요. 그러면 인간의 일관성이 그걸 보고 격분하지요. 밀 하나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구축해놓은 그 완벽하고 완전한 진리라는 일관성, 그 일관성에 도전받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자, 여기서 그러면 예수님은 안식일 율법을 어떻게 지키느냐 라는 것이 상당히 궁금하겠지요.


다시 봅시다. 인간은 여러 가지 변화를 뭘로 봅니까? 다수로 봐가지고 이 인간의 다수가 해석을 될려면 최종해석이 돼야 되거든요. 논리적 위기의 레벨을 자꾸 높여가는 거에요. 높여가게 되면 최후에 누가 있습니까? 신이 있어요. 신의 이름을 절대자 뭐 어떤 이름을 붙여도 그게 신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신을 일부러 피할려고 뭐 대자연 이렇게 빅뱅 뭐 어떻게 해도 그냥 신이에요. 신. 다수에서 뭐한다? 신으로 가겠지요. 다수에서 신으로.


그런데 이 다수에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뭐가 다 떨어져 나갑니까? 일관성의 끼어들 수 없는 일관성의 오류를 유발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알아서 삭제해버렸겠지요.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하지 않는 날이지요. 그러면 노동하자라는 것은 용서치 아니하고 전부 다 이것은 율법을 위배하는 자로 벌써 제껴놨지요. 그 제껴놓은 그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일관성에 있는 다수라면 여기에 이 세상의 일관성에 끼어들지 못하는 비일관성의 뭐가 되겠어요? 다수가 있겠지요. 주님은 바로 해석을 할 때 이것을 앞장세워서 해석을 해버립니다. 제자들 봐라. 밀밭길에 안식일에 노동했잖아. 봐봐 보라고. 보란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이 훌륭하다는 뜻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제자들은 그냥 배고파서 한 거에요. 배고파서.


그렇다면 이 일관성을 다시 봅시다. 일관성에서 의도적으로 일관성에서 이탈할려고 하고 싶은 사람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없어요. 왜? 일관성에서는 일탈할 수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비일관성을 충분하게 고려해서 빼내기 때문이에요. 고려해서. 네가 인간이냐? 인간이라면 일관성에 동의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일관성으로 구축한 거에요.


코로나19 터졌다. 나라에서 뭐 쓰라고 합니까? 마스크 쓰라고 하지요. 턱에다 걸치지 말고 코까지 올려서 꼭 눌러라 하지요. 자, 나라가 코로나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마스크 쓰면 예방이 됩니다라는 이 일관성. 이 일관성에 대해서 이의 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이의 걸 사람 나옵니까? 나와요? 안 나와요? 이 말은 인간들이 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너도 동의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나도 동의 안 할래야 안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모아서 일관성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 일관성 속에 탈출 성공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있을 수가 없어요. 일관성에서 탈출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 말은 바리새인 말을 백성들이 듣는다는 말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일관성이 있고 합리적이고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이거는 반대할 여지가 없는 거에요. 확실한 것들이에요. 요즘에 말하는 과학처럼. 확실한 거에요. 그 당시에도 나름대로의 과학이었어요. 나름대로의 과학이라고요.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에 대해서 이의를 거는 사람은 목사의 사생활 돈 밝히고 여자 밝히고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 가지고 우리 목사는 돈을 너무 월급을 달라고 하더라 이런 거 이야기하는데 그거 왜 우리 목사는 교회 사정도 어려운데 돈을 왜 많이 가져가느냐 하는 그러한 반박을 할 때는 그 반박은 뭐냐 하면은 목사님도 동조할만한 이 반박에 이의를 걸 수 없지 그런 내용만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들의 전체는 일관성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지요. 벗어나는 사람 있다면 이 세상 사람 아니에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하는 행위가 이게 해석이 안돼요.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자명한 걸로 보는 거에요. 자명한 걸로. 율법은 내 식대로. 끝. 그러니 성경말씀 해석해서 구원받겠다는 이 시도 이 자체가 교만입니다 이거.


다른 교만은 자기가 아는 교만이지만 자기 일관성에서 아는 교만이지만 이건 자기 일관성에 들어 있지도 않은 교만이에요. 교만이에요. 그냥 키워준대로 곱게 하고 감시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면 되는데 이러고 싶지 않은 거에요. 나는 그러면 나는 쪼다야? 나는 마네킹이야? 뭔가 내가 하늘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된다든지 존재감이 있어야 될 게 아니에요. 내가 주님의 일에 어느 정도 얼추 쓸모 있는 어떤 한 모퉁이의 일, 역할 관여했다는 어떤 자부심 같은 것도 있어줘야 성도로서 살맛이 나지 않습니까?


아까 동영상 두 번째 시간에 제목을 쓰레기로 바꿨잖아요. 그런데 내용은 뭡니까? 쓰레기 내용이 아니고 개 이야기죠. 믿음이라고 칭찬받은 그 여인은요 뭘 인정했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나를 도외시한 것이 너무나 합당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배제한 것이 너무나 주님답다는 거에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여자 안에 주님의 생각이 확장된 거에요 그거는. 주님의 생각이 확장된 거에요.


여인의 딸이 귀신들렸단 말이죠. 귀신. 처음에는 여인이 자기 딸에 귀신 나가도록 해달라고 한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귀신하고 같이 살아야 돼요. 나가달라고 하는 것은 귀신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 거에요. 귀신에 대해서 해결할 분은 누구밖에 없냐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죠. 그 상식에 의해서 그 여자가 주님보고 자기 딸의 귀신 나가라고 부탁하러 온 거에요.


그런데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개 같은 사람한테는 나 안 돌아본다 하거든요. 그런데 개 같은 사람이다 할 때에 옳소이다 한 거에요. 지당하다고 한 거에요. 지당합니다. 이게 지당하니까 뭐가 떠나가버리느냐 하면은 귀신이 떠나버렸어요.


그러면 귀신은 뭐냐? 구색맞춘 거에요. 귀신은 내가 쫓아낼 대상이 아니에요. 지금 귀신 나간 내 딸의 모습을 지금 목표로 삼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귀신들렸다는 이 자체, 이 자체가 주님의 일의 목표인 것을 알아야 돼요. 내가 귀신들린 자 맞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까 성진우 하고 반대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해버리는 것. 나는 개에게 오지 않았다에 대해서 여자가 하는 말이 참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지금 그 이야기나 인간들이 일관성 속에 갇힌 이야기나 동일한 이야기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어떻게 한다고요? 부풀어 오르는 거에요. 천국은 부풀어 오르는 거에요. 그걸 조사한다고 부풀어 오르는 걸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부풀어 올라요. 자체적인 힘이 있어서. 율법 자체적인 힘이 스스로 부풀어 오르는 겁니다. 우리 보고 해석한 자만 부풀어 오르는 게 아니에요. 그게. 그거는 인간들의 일관성 속에 인간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주님은 율법을 어떻게 지키는가? 주님이 홀딱 벗고 들어가는 거에요. 율법 속에. 홀딱 벗고 들어가는 거에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은 좋은 옷을 입었다 하지만 사실은 벌거벗은 겁니다. 신하가 차마 이야기 못해서 대나무 숲에 가가지고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이렇게 하니까 또 한쪽에서 나도 봤다 이렇게 되거든요.


주님의 비일관적으로 보이는 이 행위는 모든 인간들의 추구하는 그 방향으로서는 절대로 흉내도 내지 못하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인간은 돈이 얼마냐 재산이 얼마냐가 아니라 추구하는 것, 돈이 있던 없던 추구하는 방향. 그것은 바로 율법을 해석해서 나로 하여금 어디로 도달한다? 율법에 안식일 있으니까 나도 안식의 나라에 참여하겠다는 그 의도 있잖아요. 그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임금님이 벗었다는 말은 주님께서 스스로 다 벗고 십자가에 스스로 안식과는 정반대되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는 거에요. 율법은 이 땅을 저주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을 예수님은 온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게 해석이에요. 이게 주님의 율법 해석입니다. 이게 안식일의 주인이 하시는 모습이에요. 이게 안식에 이르는 방법이에요.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철저하게 율법을 통제해야 되지요. 행여나 율법이 인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잘못된 해석을 할까봐 행여나 주의 말씀이 인간의 희망적인 요소로서 잘못 이해될까봐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제하는 겁니다. 그러한 작업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 내내 해왔던 거에요. 이게 신약에만 일어난 게 아니고 계속 해왔던 거에요.


하나님께서 찔끔찔끔 율법을 주고 율법을 준 이유가 기존의 율법 가지고는 사람들이 숙제 끝났다 이러거든요. 빨래거리 있잖아요. 빨래 끝났는데 양말 뒤늦게 주잖아요. 그럼 양말 빨래하고 빨래 끝 하는데 이번에는 이것도 해야지 자꾸 내 놓듯이 율법이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추가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미완성에서 오는 자기의 일관성의 미완성에서 오는 분노를 누구를 향하여 공격하게 만드느냐 하면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공격하도록 유도하신 그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 공격을 누가 받느냐 하면은 선지자가 받아요. 선지자. ‘선지자’. 욥은 누구한테 받습니까? 욥의 친구들한테 당하지요. 친구들이에요 친구. 프렌드라고 의견 통합해서 좋게 지내던 사이였어요. 그 친구 관계가 뭘로 다 깨지고 원수 관계 되었습니까? 난입했지요. 주님께서 고난으로 해석이 안 되는 난입이에요. 해석이 안 된다니까요. 해석이 안 되는 난입이고 욥은 해석 못하겠다 하고 친구는 해석해줄게 이렇게 나온 거에요.


욥이 화가 났지요. 해석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욥이 친구는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벌 받는다. 우리가 아는 정의로운 하나님 공정한 하나님은 너도 나도 알잖아. 그런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의라는 것은 악을 벌주고 선을 상주는 그게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 하나님을 너나 나나 다 정당하다고 동의했잖아.


욥은 글쎄 그거 나도 동의했는데, 이것은 이해가 안 되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친구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해서 그렇다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한 비난이 그대로 욥이 선지자니까요.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거든요. 선지자니까. 그러한 상황이 그대로 역사 끝날 때까지 이 시대에도 지금 이 교회도 이 시대도 되풀이되는 겁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제자들을 통해서. 그래서 제자들은 이 세상에 전에도 설교했듯이 경계선이 있어야 돼요. 경계선에 있으면서 양쪽 다를 친히 체험을 하게 해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옛사람은 잘나고 싶고 우리의 새사람은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고 매일 삶이 그 두 사람의 갈등과 투쟁의 연속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6장 5절 (안식과 안심) 210406a-이근호 목사.hwp (163.5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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