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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3 21:48:05 조회 : 328         
강남-누가복음 6장 9절 (시작점) 210420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6장 9절 (시작점) 210420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첫 번째보다 약간 조금 더 난해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차이 중에 하나가 바리새인은 시작점이 ‘자기’라고 했지요. 자기라고 하는 것을 좀 이렇게 그냥 보편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이걸 유한이라고 해요 ‘유한’. 한계가 있다. 유한적이다. 유한적. 유한적으로 시작해서 무한으로 나갈려는 게 있어요 인간은.


그러면 여기서 조금 차츰차츰 계단 올라가듯이 나아지겠지요. 계단 올라가듯이. 이건 제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삶이 다 그래요. 하여튼 어떤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그 분야에서 습득이 되고 기술이 습득이 되고 더 발전했다는 느낌을 줘요. 발전을 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게 되면 보다 더 발전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어떤 무한이라는 개념을 의식하면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이걸 수학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한계서수이라고 합니다. ‘한계서수’. 한계서수라고 하는 것은 순서를 정하는 거에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순서를 정해요. 그냥 1,2,3,4는 기수라 하고 서수는 첫 번째 두 번째 이건 서수 연결시키는 겁니다. 서수. 서수 줄을 세우는 거에요. 은행에서 뽑을 때 번호표 뽑듯이 순서를 정하는 겁니다.


이것을 한계서수 순서를 가지고 알파라 하고 무한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알파는 귀속되었다. 한계서수의 그 집합을 빼서 그 알파라고 집합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말은 서수들의 집합의 나의 이 작은 이 서수는 여기 포함되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포함되었다’.


이렇게 수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이걸 가지고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은 그 뭐 그렇게 고상한 척하면서 그걸 이렇게 쉬운 말로 하지 문자로 표현하느냐라고 하는데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실제로 이런 게 있어요. 인간이 앞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 모든 경우의 수가 무한한 경우의 수를 만나요. 무한한 경우의 수를 만난다고요.


성적에서 30등하다가 29등 하다가 나중에 5등하다가 3등으로 마감될 때 이게 한계서수거든요. 공부를 아주 잘해도 1등은 못하고 되는 거에요. 그것도 촌에서 자기 반에서. 자기 반에서 3등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서울에 공부 잘하는데 가면 몇 등 하겠어요? 전국 석차는 몇 등 하겠어요. 2645등하겠지요. 그렇죠?


그러면 자기 촌에서 동네에서는 3등하다가 여기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가 더 크지요. 이 숫자가 더 크잖아요. 그게 귀속된다 이 말입니다. ‘귀속된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는 공부는 안 되겠어. 나는 그림을 그려야 되겠어. 그림 그리다 보니까 자기 읍내에서는 꽤나 그림을 잘 그려가지고 맨날 상장이 도배를 하듯 붙여놨어요. 그런데 어느 봄날에 전국 학생 실기사생대회 들어갔는데 예선탈락이다.


무한에 접근할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가 아니고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무한의 경우가 있는 거에요. 무한의 경우가 있다 이 말이죠. 자기뿐만 아니고 자기 자식이라든지 딸이나 아들이 당하는 경우도 자기가 당하는 경우고. 그래서 이걸 하나로 퉁 치자 이 말이죠.


뭐냐 하면은 어떤 자기의 그 더 나아질려는 무한으로 나아질려는 모든 서수는 전체 서수보다 항상 모자라다. 작다 이 말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앞으로 어떤 경우도. 앞으로 이 사람이 나중에 그림 안 그리고 낚시하러 가면 그 낚시 가가지고 나는 이번에 25cm잡았다 이러고 자랑질하고 있는데 서울에 이덕화는 40cm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인간은 어떤 무한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그 무한을 돌파하기 위해서 어떤 시도도 다 합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살. 이 보살이거든요. 보살. 서장훈이 여장하고 나오는 보살. 프로그램이 있어요. 무엇이든지 물어보살. 이수근하고 둘이 앉아가지고 하는 보살 흉내내면서 말 탁탁 까면서 60 밑으로는 다 말 깐다고 하면서 상담하는 거에요.


이 말이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상담가 예수님을 기대하는 거에요. 상담가. 내 인생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 부채도사. 예수를 부채도사로 보는 거에요. 잘되겠다!! 숭구리당당 숭당당 해가지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 무한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나왔다는 말이에요? 이 이야기가. 항상 유한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이 말이 어려운데요. 유한은 무한의 특수한 사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주님이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위하여 특수하게 벌어진 거에요. 이 특수한 사례다라는 이말, 이 말도 어렵지요? 더 쉽게 할려면 더 확실하게 할려면 특수한 사례 같은 말은 제한 당한 사례. 이게 더 정확합니다.


네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돼. 누군가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살도록 제한당한 거에요. 프레임이 짜여진 거에요. 너는 그렇게 살면 안돼. 사업하지 마세요. 사업하면 안돼. 물건 팔려고 하면 물건 안 팔리죠? 집사님 물건 못 팔지요? 사업하지 마세요. 이렇게 사는 것이 특수한 주님의 제한시킨 사례에요.


이게 바로 혜택입니다. 너는 그 짓하면 안돼. 그런 것은 다른 사람이 해. 너는 내가 보기에 적합한 인생 살아야 돼. 내가 보기에. 딱 적절한 인생 살아야 돼. 이렇게 되면 유한한 인간은 자기 인생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해석할 권한이 없으면 자기가 예측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벌써 그 점을 아시고 기도할 때 제대로 된 질적으로 제대로 된 기도를 하셨지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나를 제한하여 주시옵소서. 심지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잔을 이 죽음의 저주의 잔을 마시는 것조차도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최초로 성령 받은 예수님에게만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성령 안 받으면 성령 없이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아까 α=S(α) 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매일같이 만난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된 것을 이것은 원칙이다. 이게 진리다라고 본 거에요.


그런데 주님의 특수한 사례는 여기에 제한당한 사례라는 취지로 다가올 때 사람들은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이렇게 자기 뜻이 고집되어 있으니까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우연으로 보는 거에요. 우연. 우연으로 보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대말이 뭡니까? 필연이죠. ‘필연’.


그러면 오늘 본문같은 성경 해석할 때 우리는 우연으로 성경 해석해야 돼요? 필연으로 성경 해석해야 됩니까? 필연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돼요. 그 예수님께서 그 안식일에 적절하게 손 마른 사람이 그때 그 타이밍 맞춰서 거기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미리 잠자러 집에 가면 안돼요. 딱 그 타이밍에 손 마른 자가 있어야 돼요. 적절하게.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마법이 시간이 됐어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떻게 돼요? 적절한 거에요. 이것은 뭐냐? 유한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시작점을 무한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무한으로부터. 이 우연이라는 말을 우연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우연이다. 왜냐하면 자기 필연은 따로 있으니까. 내 뜻이 필연이니까. 내 예측이 있고 내 예측에 내 기대 내 희망 소망 이게 필연이에요. 인간은. 필히 그렇게 되고 싶어 해요. 인간은 쉬지 않고 유한에서 어디고 간다고 했습니까 아까? 쉬지 않고 어디로 가요? 이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늘 더 나은 나, 더 멋진 나, 지금 보다 더 내가 기대에 부응하는 만족하는 그런한 세계, 무한을 향하여 계속 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이 아까 뭡니까? 한계. 서사인데 순서인데 아까 앞에 뭐가 붙어있다? 한계가 있는 거에요. 한계가. 이게 한계가 있는 거에요. 여기에 어제 한 대구 강의는 얹는다면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이유가 이것은 뭐냐 하면은 나를 의미 있게 취급하는 거에요. 의미라는 것은 어디서 나느냐 하면은 필연적일 때 의미가 나와요. 필연적일 때. 그러나 여기서는 뭐로 봅니까? 이것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그냥 뭐로 봐요? 하나의 우연한 일로 보는 거에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렇다면 우연한 일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필연은 인간에게 무시당하게 되는 겁니다. 거부당하게 되는 거에요. 지금의 너의 형편은 내가 보기에 합력하여 합당한 네 모습이다 하면 인간은 “싫어요! 그럼 나의 가치는? 나의 의미는? 나의 포부는? 어릴 때부터 갖고 있는 나의 희망은? 어디서 찾아요?”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자, 그다음 또 진도 나가봅시다. 이러한 반발, 이걸 가지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앞뒤가 안 맞다. 흔히 쓰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한번 따져 보세요. 앞과 뒤가 안 맞으면 이것은 한 물체가 아니고 분명히 두 개의 물체가 따로 노는 거에요. 두 개의 물체가 따로 노는 거죠. 앞뒤가 안 맞으니까.


자, 어떻게 안 맞는지를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앞뒤가 안 맞을 때. 그럼 앞은 뭐고 뒤는 뭐냐. 앞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안 그러면 인간을 생각해도 뭘 해도 앞뒤가 안 맞으니까 관계없습니다. 앞을 인간으로 봅시다. 인간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하고 이게 안 맞아요. 왜 안 맞느냐 하면은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몸이냐 영혼이냐를 생각합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은 신학이 나왔어요. 신학 중에 특히 구원론이 나와요. 몸과 영혼.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항상 몸과 영혼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뒤가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이 되시겠지요.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역사와 묵시로 봐요. 역사와 묵시. 역사, 시간을 초월한 것. 주님의 관점은 이걸 봅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나만의 스토리, 나만의 소설. 인간들의 생각은 몸과 영혼을 생각해요. 내 몸은 어떻게 되는가?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몸과 영혼. 여기 오늘 본문에 손 마른 자 있지요. 손 마른 자가 있을 때 환자 본인도 그렇고 바리새인도 그렇고 전부 다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병자가 과연 이 몸이 낫겠느냐 안 낫겠느냐 이렇게 보지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환자가 병이 낫겠느냐 안 낫겠느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환자가 병 나았다 안 나았다 하는 이것이 전부 다 역사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마다 쫓아다니면서 아픈 사람 고쳐주는 것 그거 할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지요. 네 몸이나 건강해라. 예수님께서 뭐 의사면허증도 없으면서 의사할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은 죽을려고 오셨어요. 이 몸과 영혼이라는 이 관심사 자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인간이 앞뒤가 안 맞는 이유는 자기 몸과 영혼, 영혼이란 마음을 이야기한단 말이죠. ‘마음’. 인간은 그 정도는 알거든요. 죽고 나면 이 몸은 꼼짝도 못하고 영혼만은 건져야지. 몸은 이미 포기했지만 몸은 늙어서 포기했지만 죽어서는 영혼이 빠져나오면 영혼이라도 천국 가야지라는 인간들이 간절한 노림수 있잖아요. 기어이 자기 자신을 못 버린다고요.


결국은 몸의 역사, 그 다음은 뭐의 역사? 자기 영혼의 역사가 있는 거에요. 아까 기도한 어린아이가 나중에 할머니 되겠지요. 그러면서도 그 어린애가 자기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은 몸은 비록 늙어 죽더라도 무엇은 남아있다고 보는 겁니까? 내가 어릴 때 기도했던 기도의 기도빨은 남아있다는 영혼은 남아있다는 거죠. 영혼은 오래 가거든요. 백반한번 백반두번 백반세번 영혼은 오래가요. 밧데리 오래 가잖아요. 에너지가. 몸은 이렇게 몇십년하면 없어지고.


그러니까 인간은 기어이 자기 속에서 불멸적인 요소를 포기를 못하고 있는 거에요. 불멸적인 요소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전체 아까 말한 전체 모든 α=S(α) 안에 이 전체 모든 무한을 뭘로 보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인류가 관심 가지고 있는 역사로 보는 겁니다. 역사. ‘역사’.


몸과 영혼에는 무슨 요소가 없습니까? 여기는 자기가 동영상 유투브할 때 했지만 인간은 자기를 뭐로 본다고 했지요? 자기를 이 세상의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중심으로 본다고 했지요.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보지요. 인간에게 뭐가 없다고 했어요? 자기가 중심에 있기 때문에 따로 방향이 없는 거에요. 내가 이미 ‘나’이기 때문에 굳이 시간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 모든 걸 역설을 할 때에 이 모든 역사 안에다가 뭐를 집어넣느냐. 모든 인간들의 분투, 노력을 다 집어넣는 거에요. 모든 인간의 역사. 나 역사, 너 역사, 국가 역사, 교회 역사, 모든 역사, 이스라엘 역사, 유대 역사를 다 집어넣는 거에요.


무한=묵시입니다. 시간을 초월합니다. 유한은 시간 안에 있다고 보는 거에요. 유한은 시간 안에. 시간 안에 있으니까 이거는 뭐냐? 미완료되고 미완성이 되는 거에요. still-one-more. 아무리 자기가 노력해도 아직도 하나는 더. 아직도 하나는 더. 거기에 대해서 묵시는 뭐냐? already ‘이미’. 이거는 뭡니까? still ‘아직’.


‘이미’가 ‘아직’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의미를 삭제시켜버리는 거에요. 백날 까불어도 너는 역사 안에 있잖아. 나는 무한이야 ‘무한’. 역사를 끝냈어. 너는 의미가 없다고 이런 뜻이에요. 너는 의미가 없는 거에요.


자, 누가 민수기 16장 한번 찾아봅시다. 16장 30절에서 31절.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지금 이 이야기가 고라 이야기거든요. 고라. 고라 자손이 반란을 일으켰지요. 모세 왜 너 집만 대장질하고 왜 우리를 이렇게 우리는 대장 못하게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누가 나섰느냐 하면은 묵시적인 존재, 이런 유한들의 이야기 속에 누가 개입하느냐? 무한이 개입해버려요. 무한이 개입할 때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뭐가 갈라졌다? 뭐가 갈라졌습니까?


31절에 땅이 갈라졌지요. 35절에 보세요. 여호와께로부터 뭐가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소멸했습니까? 불이 나왔지요. 땅이 갈라져서 음부의 완전히 조폭이다. 완전히 묻어버려요. 그 인간들을 묻어 버리고 또 불이 나와서 250명이 죽었어요.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도대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에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이에요. 자기 자신이 어떠한 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하는 분이지 어떤 일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무관한 일은 일으켜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괜히 본인 인생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본인 인생 걱정할 권한도 자격도 그런 의미도 없어요 우리는. 까라면 까야지 말이 많아요. 왜 쓸데없이 우리가 우리 자신 단도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지킬려고 합니까. 그럴 자격도 안 되는데. 누가 함부로 그런 자격 있으라 했어요. 없는데.


다시 누가복음 6장 돌아가 봅시다. 누가복음 6장.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죠. 아까 강의한걸 다시 되새겨보겠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죠. 그렇죠? 그러면 이미 율법은 인격화되었죠. 말씀이 육신이 된 거에요. 그러면 이제 남아있는 율법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모든 율법이 예수님으로 응축이 되어버렸는데 무슨 율법이 있습니까? 율법이 없죠. 이미 예수님이 독점을 했잖아요.


그 다음에 율법의 완성에 의해서 살게 할 자는 살게 하고 멸한다 했으니까. 아까 무참한, 비참한 것 봤지요? 비참하게 죽이는 그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율법의 완성자에게 있어요. 율법의 인격화된 그 분에게 있다고요. 그 분이 자기 결정에 의해서 했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주님 보시기에 그게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건 필연적인 거에요. ‘필연적인 것’.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야 될 필연을 보거든요. 주시옵소서!!! 아까 했잖아요. 주시옵소서!!!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진짜 그 일 안 이뤄주면 하나님께서 트럼프 대통령 안 돌봐주면 나 예수 안 믿을 참이야. 아까 그런 기세를 보게 되면. 공산화되는 거 빨리 없애고 유투브 예배 참석 안 해도 안 보면 그 아이 말에 의하면 유투브 예배 안 본 사람은 전부 다 벼락맞을 거 같은 그런 간절함이 있단 말이죠. 그런 간절함.


문제는 그런 권한을 누가 줬어요? 준 적 있어요? 없어요? 준 적이 없다고요. 모든 율법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만 모이도록 했지, 예수님 빼놓고 그 누구에게 준 적이 없어요. 너희들은 율법에 관심 가져라. 율법에 신경써라라고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이 말입니다. 어제 대구강의에서 핵심적인 성경말씀이 뭐냐 하면은 이거였잖아요. 이거.


율법 외의 한 의. ‘율법 외’. 율법 말고 율법 외. 율법은 화목제물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고 율법 외의 한 의. 혜택. 아까 말했지만 혜택. 자, 유한이라고 했지요. 성도는 여기에 대입시키면 성도는 유한, 무한에 예수님 대입시키면 성도는 예수님의 특수한 뭐가 된다? 특수한 사례가 되는 거에요. 특수한 사례. 예수님으로부터 혜택을 입은 사례가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성도가 주의할 것은 자기 설득에 대해서 자기가 뿅 하고 가고 이러면 안돼요. 자기 설득에 대해서 반대를 해야 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도대체 내가 나 잘났다를 증명해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그게.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잖아요.


유한이 마치 무엇을 흉내 내느냐 하면은 아주 무한에 도달되지도 않고 미흡함에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벌써 성급하게 무한의 행세를 해요. 흉내를 낸다고요. 무한은 따로 있는데. 주님은 따로 있는데. 오늘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전부 다 이게 뭐냐? 누구 권한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예수님의 자기 표현입니다. 자기 권한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 권한 할 때에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을 주니까 사람들이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인간들이 율법을 미끼를 물은 거에요. 바보같이. 저 율법이 나의 잘남을 증명해 줄 것이다. 꽉 물은 거에요.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헌금하라면 헌금하고 예배 참석하라면 예배 참석하고 시키는대로 다 하는 거에요. 그것이 뭐로 이어집니까? 나는 역시 구원돼야 될 필연적 존재야 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설득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 앞뒤가 이게 안 맞는 겁니다. 그 앞뒤가 안 맞다는 증거가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믿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들이대는 이유가 너희는 백날해도 주님의 뜻과 네 뜻이 앞뒤가 안 맞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근거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죽였잖아. 너희가 죽였잖아. 혜택주신 분 죽였잖아.


요한이 한계서수를 통해서 계속 무한으로 나아갈 때 여기 무수한 무한들이 있지요. 어떤 의미에서? 내 쪽에서 유한이지만 나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신을 향하겠다고 의지를 갖고 있는 이상은 해야 될 숙제가 너무 많은 거에요. 모든 일의 완벽과 모든 일의 철저, 모든 일에 실수가 없어야 돼요. 모든 일에.


나는 오늘 여기 와서 복음 잘 들었다 하고 얼마나 뿌듯하겠어요. 하다가 차 빼다가 옆에 차 그랜저 긁었다. 이게 뭐에요? 나 왜 이리 어설퍼. 갑자기 완벽하다가 어설퍼 되지요. 다음에 어떻게 하겠어요? 성경 말씀도 참석하고 차도 제대로 뺄 수 있는 보다 완벽한 인간을 추구하겠지요. 이 얼마나 많은 무한을 만나겠습니까? 만날 때마다 인간은 동원하는 게 뭐냐?


나의 행함의 철저함,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오늘날 교인들이에요. 나의 행함, 나의 철저함. 나의 믿습니다. 뭘? 나의 행함의 철저함을. 그래서 로마서에서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이해해요?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 오류가 없고 철저한 믿음. 치매가 걸려도 믿는 것만 남아 있는 그러할 정도로 철저한. 세상이 네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철저하게.


지금 아까 기도 영재 봤지요. 2분 46초 동안 하면서 믿습니다 주시옵소서 했지요. 만약에 그걸 이 동영상을 보고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애가 그걸 보고 너도 행할 거 같으면 나도 행할 수 있다 해가지고 더 쌍시옷이 많이 들어가고 이거는 2분 45초가 아니라 7분 60초 한다면 누가 무한의 승자가 됩니까? 얘가 더 무한적이죠. 더 철저하죠. 용어 자체도 더 목사님 같고.


기도의 영재 또는 바이올린 영재라 하면 그 영재의 세계는 전부 다 무한을 추구하는 올챙이들의 우글거림이에요. 전부 다. 올챙이들의 우글거림이에요. 거기에 대한 주제 영화가 소울이라는 만화 영화. 픽사 영화. ‘소울’ 영화 봤습니까? 그 영화. 재즈를 즐기고 싶다가 하수구에 빠져가지고 유령들 세계 죽음의 세계에 빠진 사람 이야기, 그 이야기에요. 인간들은 희망을 가져야 된다 뭐 이런 이야기.


이 세상은 전부 다 어느 방면이든 간에 거기 도사들 있고요 있어요. 있으면 그 사이를 포기하겠습니까? 따라붙을려고 자기 행함을 내놓겠습니까? 자기 행함을 내놓잖아요. 어떤 권투장에 누가 권투 너무 잘해. 나이는 같은데 취취~~ 권투하는데 너무 잘해. 그러면 목사님은 나 포기할래 합니까? 네가 잘하는지 한번 붙어볼까? 올라와라 한번 붙어보자.


바둑도 마찬가지에요. 낚시도 마찬가지고 골프도 마찬가지고 어느 분야에서 심지어 백신세계까지. 어느 나라는 백신 다 맞았다는데 우리 나라는. 모든 나라는 뭡니까? 무한경쟁. 악마의 지옥의 모습. 그 자체 무한경쟁. 무한경쟁. 오직 그것뿐이잖아요. 오직 그것 뿐. 무한경쟁.


회사 그냥 일한다고 월급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회사 적합한 사람 뽑았잖아요. 어디로 내보냅니까? 무한경쟁. 무한경쟁. 그래서 사원 입장에서 제일 소망하는 것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은 제발 우리 회사 근처에 동업하는 회사 안 오기를. 경쟁업체가 우리 회사 근처에 안 오기를 간절히 믿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거에요. 경쟁 없으면 회사 거저먹기입니다. 거저먹기에요.


모든 교회가 교인수가 3명. 이건 목회 하는 게 신나. 나라에서 모든 목사에게 월급 골고루 250만원 다 주고 교인수는 신경 쓰지 않고 3명만 되면 된다고 한다면 목사님은 어떻게 합니까? 만세를 부르지요. 만세 부르지요. 왜? 경쟁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바리새인은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합니까? 손잡고 우리 경쟁 마당에 나서자고 잡아 당기는 거에요. 어차피 시작은 유한으로부터 시작해서 무한으로 나가니까 당신은 잡아당기는 거에요. 주님께서 “손 안 놓냐? 이 손 안 놔? 이거 죽여버릴까? 불에 태워 죽일까? 땅에 파 묻어버릴까? 어떻게 해볼까.”


바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처참한 참혹한 지경에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합니다. 이제 아까 묵시의 만남이라고 했지요. 이걸 말을 좀 바꾸겠습니다. 역사와 묵시의 만남 해도 맞고요.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맞아요. 그 다음에 역사와 무엇의 만남이냐 하면은 언약의 만남이에요.


그러면 언약은 아까 손 마른 사람을 낫게 했지요. 창조입니다. ‘창조’. 병을 낫게 하신 게 아니고 창조한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 사람 입장에서는 병이 나은 거지만 병을 고쳐준 주님은 창조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창조주에요. 이런 게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보통 창조라 하는 것은 없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와야 창조잖아요.


그러나 성령을 줘가지고 육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예수 믿는 영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을 영의 세계에는 없는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게 창조에 해당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해당돼요. 성도는 피조물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지 개과천선한 사람 아닙니다. 단절되어 있어요.


그러면 창조가 언제부터 시작됐냐는 말은 그럼 역사는 뭡니까? 이건 이렇게 되지요. 파괴죠. 이거는 파괴되죠. 파괴되는 겁니다. 역사가 계속해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면서 이게 무한의 세계죠. 무한의 세계인데 이 유한에서 무한으로 갈 때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 이 사람들이 인간들이 놓친 게 있어요. 뭘 놓쳤느냐 하면은 공백, 빈자리 이걸 놓쳐버린 거에요.


너무 많이 갖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아예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요. 경쟁이 너무 심하다 보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공백은 감산. 감산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마이너스에요 마이너스. 이 언약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플러스를 주는 게 아니에요. 플러스는 어디서 줍니까? 역사에서 플러스를 하지요. 역사에서 플러스를 하는데 보다 더 낫게, 보다 더 많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기도할 때 양의 기도는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양은 바깥에 나오지요. 바깥에 내 행함이 행함에 대한 거기에 대한 성과를 살피는 것이 양적이에요. 그러나 언약은 창조이기 때문에 빼기를 해요. 그런데 빼면 뺄수록 뭐가 드러나느냐 하면은 혜택이, 나에 대한 혜택이 점점 더 늘어나요.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시력이 0.7이다. 그런데 옆에 장님이 지나가요. 장님이 지나가도록 주께서 조치해버리면 장님의 시력이 뭡니까? 제로지요. 그럼 나는 0.7이잖아요. 주님이 장님이 지나가게 해서 그 주님의 뜻을 알게 되면 나는 0.7에서 어디로 마이너스가 됩니까? 시력이 제로가 되는 거에요. 제로가.


손 마른 사람, 손 마른 사람이 주님에 의해서 안식일에 낫게 했다면 멀쩡한 사람은 안식일에 그럼 뭘 보여줬어요? 아무 것도 못 보여준 게 되잖아요. 그렇지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못 보여줬잖아요. 그래서 안식일은 나를 파괴하는 날이에요 그래서. 나는 파괴당하는 그 혜택을 입는 날이에요. 감사하죠.


나는 역사에 속해서 까불락거렸던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옥갈 수밖에 없었습니다를 안식일을 통해서 알라고 주께서 안식일을 주신 거거든요. 지금은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안식일이 인격화됐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안식일이 찾아온 거에요. 안식일이 찾아왔다는 것은 네가 손 마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네가. 네가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러한 구조, 역사냐 언약이냐, 언약이냐 역사냐 구조에서 너는 호박 안에 들었던 사람이에요. 호박. 율법의 저주 안에 들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고 그걸 우리에게 증거하는 영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 되지요. 예수님의 영이 누구지요? 이거 쉽다. 예수님의 영이 누구지요? 성령.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영원토록 죄 사함이 없다. 성령의 죄 사함이 없으면 영원히 죄 사함이 없다. 오는 세대에 네가 처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기본적인 이 뜻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세요. 자기 자신을 동정한다는 것은 어디서 동정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이렇게 한계서수에서 이렇게 힘들게 자기 인생을 올라왔잖아요. 20대 30대 40대. 어디서 동정을 하느냐 하면은 과거로 가요.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면 과거 내가 20대에 내가 기대했던 만약 지금 여러분이 50대라면 20대에 50대를 그리워했던 그 그리움을 잠시 회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옛날 가요나 옛날 팝송이나 옛날 외국노래나 듣게 되게 되면 그 노래만 기억되는 게 아니에요. 노래가 들려졌던 그 언덕길 밑부터 해가지고 음악감상실부터 해가지고 옛날 좀 놀았던 그 때 명동, 대구에서는 동성로 이렇게 뭣도 모르게 괜히 깃 세우고 눈 왔다하면 다 기어나올 때. 눈 왔다 하면 다 기어나와가지고 쇼윈도 보고 저 모습이 괴물이야 명동콜링에 나온 가사처럼 말이죠.


그렇게 눈발 내릴 때는 왠지 휙휙 우리 한번 놀아볼까 헛짓하고 그때 그 시절에 취직만 해도 감사했던 사람이에요. 그때 시절로 돌아가면. 결혼은 그것은 너무 과분한 혜택이고. 취직만 해도 사람 구실했다고 자랑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게 서수가 아니고 그게 한계서수에요. 20대에 갖고 있는 콤파스로 그렸던 자기 중심이니까 20에 그렸던 자기 인생의 원이에요 원. 원.


물론 여러분같이 어린 아이같이 아직도 순수한 사람에게는 20대보다 더 낮은 인생의 목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괜히 빈 말입니다. 그럴 순 없어요. 주님께서 요구 하는 것은 먹을 것 입을 걸로 족한 줄 알라. 아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돼요. 도대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안다면 교통사고 나서 깁스하고 병원에 입원해도 괜찮잖아요. 왜? 병원에서 의료보험 되가지고 먹을 거 입을 거 나오잖아요. 환자복 나오잖아요. 어느 정도 낮아져야 돼요. 도대체가.


그러니까 계산을 카운트를 나의 유한으로부터 해가지고 한계서수를 1,2,3,4, 나부터 출발점해가지고 starting point 잡지 마라 이 말이죠. 위에서 내려오는 거에요. 위에서. 혜택을 주신 거에요. 혜택을. 그런 하나님의 같은 분이지만 그 영광을 버리고 이 천한 나까지 찾아온 거에요. 뭐할라고? 우리 구원할라고?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베데스다 못이라는 것. 내가 자비의 연못이라는 사실을.


그 앞에서 “누가 나를 데려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방식 아니야. 이제는 연못 풍덩 들어 가는 방식이 아니야.” “예?” “너한테 방식을 준 적이 없어.” 예수 믿는 것도 법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성령이 왜 있습니까? 성령에 속한 사람은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법에 속하지 않는다 이 말 아닙니까. 로마서 8장에서. 아 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데.


성령에 속하지 않고 법에 속한 사람 같으면요 그 종인데 승진해서 회사 이사 될려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거기에 대리든 신입사원이든 인턴이든 아들이에요. 그거는. 같은 패밀리라고. 누구 패밀리? 주님의 패밀리인 것을 소급해서 확인시켜 주는 게 성령입니다. 너는 처음부터 내 아들이었어. 하늘나라 내 거야.


아들이라면 이제 율법의 종이 된다? 안 된다? 이제는 율법의 종이 아니야. 아들이야. 이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어. 아버지라고 불러봐 불러봐 불러봐. 아버지 그렇게 기도하는 것처럼 부르지 말고. 아버지라고 부르면 반드시 아들의 영을 받아야 되거든요. 그러면 아버지라고 부르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불렀던 그 시선과 안목과 부르짖음이 있게 돼요.


예수님의 자리는 아버지를 부를 때 어디서 불렀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역사의 한복판에서 불렀지요. ‘역사의 한복판’. 이 무한 경쟁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불렀다고. 지리산에 기도원에 들어가서 부른 게 아니고. 삶의 한복판. 무려 일을 4가지 하는 거 있잖아요. 아침 6시에 출근해가지고 밤 10시에 들어오는 그 삶의 한복판에서 아버지를 불렀단 말이죠.


물론 괴로워서 불렀겠지만. 일을 4가지나 하는데 안 괴로울 수 있겠어요. “쫌 살려주이소.” 정말 하소연하겠지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딱 맞다. 너에게. 네 처지에 딱 맞다. 네 처지에 딱 맞는 거야. 내가 할당한 자리야. 배석이 바로 그 자리야. 예수님은 너보다 고생 더 했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식일에 안식일 지키라고 한 게 아니고 거기에 누굴 배치했느냐 하면은 손 마른 자를 배치한 거에요. 손 마른 자를. 그리고 여기 지금 누가복음 보고 있지만 마태복음 12장 잠시 한번 볼까요? 거기 보고 마치겠습니다. 12장에 보면 안식일 나오지요. 거기에 손 마른 사람 고치지요.


12장 11절 보세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라고 했지요. 바리새인들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안식일 날 양을 구할 일이 없도록 아예 안식일 날 양이 안 빠지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게 바리새인이에요. 그러나 양이 안 빠져버리면 안식일의 의미가 날라가요.


안식일은 인간이 손 댈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 지켜서 자기를 유한에서 무한으로 빠져나오는 자기 행함으로 빠져나오는 날이 안식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빠져있음을 처참한 지경에 빠져있음을 또 다시 확인하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호박 속에 갇혀있음을. 그래서 양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손 마른 사람 이야기한 거에요. 혜택을 입었다. 감사한다. 예 알고 있는 말이죠.


그러나 혜택을 어느 정도 혜택은 내가 이 무한경쟁 속에 주께서 적절하게 나를 집어넣을 때 야 남한테 안 질려고 역사고 묵시고 그건 다 무시하고 내 몸 하나나 추스르고 내 몸 하나 밥이나 먹고 살고 내 자신이나 잘 먹고 잘 살란다 그렇게 몸부림 칠 때 역사 묵시라는 그 위에서 내려오는 그 취지는 날라가버리고 나만 살면 되지 뭐. 나만 행복하면 되지.


우리 아프지 말고 행복합시다. 아버지는 비록 택시 드라이버라도. 마포대교 건너가는 아버지한테 한 것처럼.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게 얼마나 단촐하게 우리 인생 이렇게 살아요를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합니까. 행복하자 그 다음에 아프지 말고. 돈 많아도 아프면 소용없잖아요.


자기 몸과 영혼, 종교, 신학, 구원론 이거 다 처참한 지경에서 몸부림쳐서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지옥의 잘라낸 지옥을 두 쪽으로 잘라낸 드러난 뭡니까? 감춰진 지옥을 두 쪽으로 잘라내면 단면 나오지요. 지옥의 단면입니다. 주님은 그 지옥 속에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 속에 두게 하심을 도리어 감사합니다. 마치 잘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주님의 거저 주신 혜택이 없었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날마다 더 깊이 깊이 자각하는 가운데서 그저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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