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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5 22:50:02 조회 : 308         
강남-누가복음 6장 13절 (제자선택) 210504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6장 13절 (제자선택) 210504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선택받았다는 말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에요. 내가 여러가지를 선택하는데 고맙게도 주님께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 다른 보너스 하나를 더 주셨구나가 아니라 기존의 내가 선택한 그것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오직 우열한 하나의 우세한 하나의 선택만 주어진다면 나는 그 자체로 나 자체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무의미해지는 거에요.


그러면 제자들은 땅의 사람이잖아요. 이것은 뭐냐? 버티기에 들어가겠지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나의 의미도 따로 발생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속 주님과 함께 제자라는 이름으로 따로 붙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인간과 무관한 일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무관한 일,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을 예수님이 하고 있는데 이걸 제자들은 뭘로 해석하느냐 하면은 나도 할 수 있는 일로 해석해버리는 거에요.


그래야 나에게도 의미가 생기고 나의 나름대로의 발톱을 갈고 닦을 수가 있는 여지가 있거든요.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자기 의가 되는 거에요. ‘자기 의’. 나도 주님의 제자노릇 좀 했다는 거에요. 교만 떨지 않는 방법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여는 했다는 겁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철저하게 망해” 해버려요. 철저하게 망하게 합니다. 아무도 십자가 지는데 기여한 바가 없음을 증명하는 그러한 현장으로 계속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제자들과 주고받습니다. 그럼 제자들에게 나오는 것은 뭐냐? 계속 오해만 나오는 거에요. 오해만. 곡해만 나와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으니 죽었다 가자. 우리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 하니까 그러면 주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야된다 할 때 “우리도 죽으러 가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줄을 몰라요. 지금 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몰라요.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대표자, 12명 중에서 대표자들을 계속해서 특수한 체험을 시킵니다. 시키면 뭐합니까. 거기서 차이가 나는데요. 사단이 나는데요. 변화 산 모세와 엘리야하고 예수님하고 산에 올라가니까 베드로가 여지없이 자기 본색을 드러내지요. 여기가 좋사오니 자기가 LH인가. 뭐 땅 투기 할 일 있어요. 여기가 좋사오니 뭘 짓고? 집을 짓고.


하여튼 사고방식이 투기야. 투기. 집을 짓고. 겸손하게 우릴 위해서 필요 없고 세 분을 위해서 지어드리겠습니다. 완전 부동산 이벤트 상품 같아요. 예수님 여기 계시다고. 우리가 갖고 있는 본심을 제자들이 여지없이 다 그대로 다 보여줘요. 끊임없이 괴리가 생기는 겁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대한 세상 보기, 세상 읽기, 세상 해석하기. 하나님에 대한 인식. 모든 분야에서 여기서 일치될 수 없는 균열이 계속 일어나겠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이 돌아가신다 하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는 그런 대목들, 그런 대목들이 대표적이죠.


제자들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1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형이 모든 재산을 다 가져갔어요. 진짜 명절날 형제간에 칼부림 날 일이잖아요. 아버지 유산 남긴 것을 자기가 다 차지해가지고 동생은 한 푼도 없게 했으니까 도저히 말로 안 되니까 예수님한테 부탁한 겁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지금 형을 나무랍니까 동생, 자기한테 부탁한 그 사람을 나무랍니까? 그 사람을 나무라죠. 네가 나를 잘못 생각했다는 거에요. 인간들의 생각은 뭐냐 하면은 자신의 권익보호, 권익보호가 이게 하나님의 정의로움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 인간은 자기 권익을 보호하려고 하느냐? 여기 뭐가 가미되느냐 하면은 자기 평소에 자기 노력이 여기에 가미 되어 있어요. 권익, 자기 권리.


자기 권리가 뭐냐? 자기 노동력이 여기 다 담겨 있으니까. 그런 나를 지켜주는 것이 의로운 하나님이 하실 일에 합당하다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고 상담하러 온 거에요. 자기가 꾸지람을 들을 줄 상상도 못했지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과 무관한 일을 해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인간의 노림수와 무관한 일. 인간의 예측과 예상과 무관한 일을 하신다고요. 그러나 인간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의미 있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나의 노력과 결부될 때만 이게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나 자신에게 의미를 두고자 하는 것과 인간과 무관한 주님과 이 제자들 사이에 같이 동행을 한다 이 말이죠. 동행. 동행을 하니까 결국 이거는 분열이 일어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제자를 왜 선택했느냐. 저 생각을 갖고 있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심판을 피할 곳이 없다는 증거를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자아를 통해서 주님이 구상한 현실 세계, 실제 세계를 제자들과 마주칠 때에 그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되고 환상만 쫓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실제 체험케 하는 거에요. 어떤 체험? 선택했으니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니까. 사람의 뜻과 무관한 일을 직접 같이 체험케 하는 거에요. 여기서 제자들은 오해가 일어나는 겁니다. 오해가 일어나는 이유가 인간의 욕망은 자극받을 때 비로소 그 현존감이 드러난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평소에 자기가 욕심이 없이 살고 숭고하게 산다고 자부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과 무관한 사건 속에 집어넣으면 자기가 이런 인간인줄 몰랐던 발톱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어떤 승부욕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아나? 이런 식으로.


한 번도 평생에 욕한 적도 없는 그런 분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육두문자부터 해가지고 어디서 들었는지. 안 들었을건데 교회에서 찬송만 불렀기 때문에 욕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데 친숙한 욕들이 막 종류대로 뷔페 종류대로 막 튀어나오는 거에요. 변별력 있게. 섞이지 않고.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제자들 사랑하는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에요. 바로 그 점이.


나니까 네 본성을 알려주지 누가 알려 주겠느냐. 나니까 너희들이 아는 이 허망한 세계만 경험했던 너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낯선 사건들 속에 그들로 하여금 초청시켜가지고 이런 점에서 너 어떻게 이해해? 이건 어떻게 생각하냐? 계속 묻는 거에요. 그러면 제자들은 계속 헛짓만 나오는 거에요. 정답이 아닌 것만 내놔요. 정답이 아닌 것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지요. “누룩? 떡 먹었는데요.” “그런 누룩 아니야. 그 누룩 아니야.” 이게 여러분들이 오늘 12제자 하면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한꺼번에 확 알아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한꺼번에 말씀드릴께요. 예수님이 아는 현실을 가지고 일을 해버리면 인간 세계가 현실이라고 우겼던 그 세계가 뭐로 변한다? 전부 다 헛되고 무의미하고 환상으로 변하는 그 작업을 하신 거에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왔을 때” 이야기하면서 뒤에 뭐냐 하면은 “귀 있는 자들아 들으라 하시면서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어찌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 하시나이까” 라고 했거든요.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여기 골치 아픈 언어가 나옵니다. 비유는 두 가지거든요. 환유와 은유가 나오는데 보통 문학에서 이렇게 나눠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환유, 은유 이것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은 환각, 다른 말로 꿈에 불과하다. 꿈에 불과하다.


비유로 이야기할 때 씨 있잖아요. 씨 이야기하면 세상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환각과 꿈이 아니라면 환상이 아니라면 실제로 여기에 어떤 씨앗이 있겠지요. 씨앗. 이런 씨앗이 있겠지요. 씨앗. 이 씨앗을 예수님의 그 씨앗과 일치된다고 생각하겠지요. 일치성을 주님께서 이걸 의도적으로 끊고자 이야기한 거에요. 끊어져.


네가 아는 것은 헛된 무의미에서 나오는 의미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말한 이 세계, 인간과 무관한 이 세계,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는 이 세계에서는 이게 해석불가하고 끊어버리기 위해서 비유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비유에 대해서 해석하려고 할 때에 이거는 벌써 초장부터 비유 자체가 이미 그 자체가 해석 안에 다 담겨 있어요. 나는 꿈이구나.


꿈이라는 말이 여러분 와 닿지 않는다면 와 닿기 위해서 말씀드릴게요. 나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존재. 아까 같으면 시한폭탄이 있는 도화선에 불붙은 존재. 째깍째깍째깍째깍 하다가 나중에는 이제는 나이 한 98쯤 되면 없어지잖아요. 살기도 오래 산다. 너무 욕심냈다. 째깍째깍째깍째깍 6개월 뒤에 암으로 돌아가십니다. 그건 의사가 하는 말이고. 의사는 뭘 보느냐 하면은 세상 의사는 이 죽음이라는 비유를 몰라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다 사용하는데 그 언어 전체가 비유가 되버린 거에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누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한다. 그럼 이 세상에 아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이스라엘 백성 모르면 아무도 없는 거에요. 이 땅에 어떤 자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본인이 선택한 거에요. 본인의 선택만이 유일한 천국이에요. 그걸 12제자한테 했지요. 12제자는 나가서 네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가서 제자를 삼고 성령이 임하면 그들이 너와 똑같은 이 땅의 사람으로서 천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일관되어 있는 그 작업을 주님께서 해내시는 겁니다.


자, 비유 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자, 비유라 하는 것은 1대 1 대응이 없다. 이 땅에서는 이게 이 땅은 무의미해요. 의미가 없습니다. 무의미라고 할 때 이걸 자꾸 힘들게만 보지 말고 이걸 무의미할 때는 뭘로 봅니까? 가볍다. 아직까지 안 가벼운 거 같애. 내 인생이 의미 없다는 말은 가벼운 거에요. 뭐 내용이 없어. 내용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볍지요.


오늘도 비가 왔다. 그래서? 할 말 없지요. 아침에 빵을 구워 먹었다. 그래서? 그럼 내일 바꿔볼까? 죽 먹었다. 그래서? 도대체 아침 먹은 게 무슨 의미 있어? 뭘 먹어도 의미 없어요. 뭘 먹어도 의미 없어요. 마치 빨간 우산 쓸까? 파란 우산 쓸까? 노란 우산 쓸까? 비 오는데 아무 지장 없어요. 아무 우산 써도 비만 안 맞으면 되거든요. 식별이라는 것이 내 중심으로 나오는 식별은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환상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는데 주께서 비유로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이 비유로 했을 때 씨를 뿌릴 때 이 씨가 의미가 없는 이곳에 새롭게 의미를 창조하는 거에요. 그 대상이 누구다? 너희에게는 제자들에게는 내가 너희들에게는 비유로 이야기한다. 비유가 어떤 목적이 있다는 거에요. 너희에게는.


나의 선택을 받은 너희에게는 비로소 너희는 무의미한 게 아니고 예수님 입장에서 의미가 있어야 되지요. 예수님 입장에서 의미가 있으니까 제자들은 우리도 의미 있잖아 하면 안돼. 뭘 경유해야 돼요? 주님께서 의미가 있다 할 때는 제자들은 반드시 뭘 경유해야 됩니까? 기존에 있던 나는 반드시 무의미로서 의미를 거쳐서 나와야 돼요. 의미를 거쳐서.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13장 12절 이거는 누가 한번 읽어봐야 돼요. 이거는 정말 어려워서 읽어 봐야 돼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제가 한번 읽어 볼게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무슨 뜻입니까? 뒤에서부터 하게 되면 해답이 풀립니다.


없는 자는 누구냐? 이 세상이죠. 모든 인간이죠. 없는 자는 빼앗겨 봐야 아! 있는 자가 누굽니까? 주님이죠. 주님한테 얻어먹어야 비로소 있음이란 말이 성립된다는 거에요. 비로소. 이 의미가, 의미 있는 비유가 현실화되려면 반드시 뭐를 어떤 과정이 필요하다? ‘나’라는 그 자체가 허망해야 되고 모조리 다 빼앗겨야 되는 거에요.


그 빼앗기는 작업을 선행해서 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입니다. 아들이지만 십자가에서 다 버렸잖아요. 버리시고 주께서 그를 사흘 만에 부활시켜가지고 그 주님의 했던 그 체험이 주님의 일치된 기억이잖아요. 주님의 기억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게 되게 되면 이게 뭐 3천명이든 5천명이든 12명이든 몇 명이 되든 우리 입에서 근원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다는 것. 값으로 샀다는 것. 죄 용서받았다는 것. 전부 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우리 속에서 나오는데 이게 얼마나 신기한지요. 그런데 내 것이 있어버리면 이게 막혀요. 몇 명을 전도 했니, 헌금을 했니 이게 있어버리면 주님의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주님만 할 수 있는 것이 막혀버린다고요.


계속 12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할 때 보세요. 없는 자가 누굽니까? 있는 자가 누굽니까? 빼앗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넉넉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 자체가 예수님 비유거든요. 이 비유는 어디서 이게 이루어지느냐?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자기의 행적 속에서 이 비유에 일치되는 경로가 나오는 거에요.


나는, 빼앗긴 자는 빼앗기리라. 그리고 인자가 얻으리라. 그 경로를 그대로 제자들 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되풀이해버리면 제자들은 빼앗기면서 얻게 되지요. 뭐를 빼앗기느냐? 자기 의를 빼앗기죠. 자기 발톱을 빼앗기고 살쾡이 그거 빼앗기고 빼앗긴 그 자리에서만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있음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잘나버리면 주님의 잘남이 이게 가리워져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악마가 떨어져 나간 체험은 어떤 체험이냐? 제가 물어놓고 제가 답변했지요. 악마가 떨어져나간 그 체험은 자기 의가 떨어져나가는 체험이에요. 인간이 자기 의가 떨어져나가면 가벼워지고 떨어져나갈 때는 나의 의가 떨어져나갈 때는 나의 전부가 다 떨어져나간 거에요. 나의 전부가. 일찍부터 악마가 네 잘난 맛에 살아가라고 했기 때문에 그게 떨어져 나갔다는 말은 다 떨어져나간 거에요.


그런데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주님께서 자기를 가루를 만들어도 떨어진 가루 중에서 몇 개 주워서 그것 가지고 버틴다고요. 박살낸 그거 주워서 자기가 조립해가지고 그것 가지고 주님한테 “이만큼 했지 않았습니까.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너 누군데? 도무지 너를 모른다.” 그 한마디에 끝났어요. 그 한마디에.


인간은 자기 역사를 허망하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은 마작처럼 숫자 맞춰서 줄 맞춰주는 거거든요. 중국 영화 보면 나오거든요. 우리는 매일같이 하는 게 어제의 지속과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을 끼워 맞추는 이 일만 해요. 이 일만. 이거. 그걸 딱 해놓고 밤에 잠을 잡니다. 오늘 하루도 참 보람 있게 옥색 드레스 입고 손 모으고 기도하는 소녀의 기도. 그런 액자 보셨지요?


딱 이렇게 맞춰가지고. 누가 여기에다가 건드리면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게 바로 자기 의의 구체화죠. 자기 의의 구체화. 그 마태복음 13장 15절에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자, 왜 자기 백성이 구원받기를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느냐 하면은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의 선택의 의미가 빠져버리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택의 의미. 주님 쪽의 선택의 의미. 주님의 선택이 되려면 인간의 자기 선택은 모두 무효가 되어버려요. 인간의 자기 선택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잠시 마태복음 잠시 보겠습니다. 오늘 제자들의 활동의 특징이 뭐냐를 그걸 전문적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오늘 누가복음 6장처럼 제자들 뽑았지요. 뽑아가지고 가서 5절부터 쭉 보면 시간관계상 다 설명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만 말씀드리면 9절에 보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거지되는 거잖아요. ‘거지 되는 것’.


이 말은 전부 다 부정적이에요.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라” “말하지 말라” 부정적이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뭘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건 뭐냐 하면은 지금 전도를 하면서 누가 방해물이고 누가 훼방질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개코도 하나님 나라를 모르면서 하나님을 전파하고 있는 자가 누굽니까? 제자들이죠.


제자들이 어떠할 가능성이 많습니까? 하늘나라를 전파하는데 이 정도는 되야 보다 효과 있을게 아니냐고 인간적인 노력이 가미 될 가능성이 많아요. 하늘나라에. 그거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오해도 보통, 몰라도 보통 모르는 게 아니거든요.


로버트 라이언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19세기 중반 현대사회 들어갈 한 몇십년 전 사람인데 이 사람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제가 한번 그려볼게요. 이 사람과 똑같이 그림 그리겠습니다. 제가 화가도 아니지만 이 사람과 똑같이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이걸 캔버스라고 하고 캔버스에 제가 이 사람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실제로 이 그림을 전시했습니다. 상당히 비싼 미국의 비평사 상 받은 작품이기 때문에 감히 제가 어떻게 그리겠습니다만 하여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이게 그림이에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림이었습니다. 잘 그렸지요? 완전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 같지요? 잘 그렸잖아요. 이걸 전시장에 딱 해놨어요. 아무것도 안 그렸어요. 벽면인지 캔버스인지 구분 안돼요.


이번엔 제가 작곡을 해보겠습니다. 작곡을 좀 해봤거든요. 작곡을 하는데 존 케이지가 백남준 친구 존 케이지가 했던 작곡해보겠습니다. 작곡 작품에 연주에 길이는 4분 33초. 그 교향악단 모아놓고 드디어 지휘를 했습니다. 했는데 연주자들이 가만 있는 거에요. 가만 있으면 소리가 그들이 연주를 하지 않으면 소리가 어디서 들리겠습니까?


미리 예상 안했으니까 어디서 들리겠습니까? 관객석에서 들리겠지요. 뭐야? 오늘 취소됐어? 저 뭐하는 거야? 나 화장실 갔다 올까? 아직 연주를 안 해. 튜닝이 안됐어? 왜 가만 있지? 하는 그 시간이 4분 33초. 그 노이즈. 그 소음이 바로 연주였던 거에요.


왜 이런 미친 짓들을 하느냐? 이쪽은 뭐냐 하면은 공백이거든요. 공백. 0으로 만드는 거에요. 0으로. 내가 하는 그림 솜씨가 내가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겁니다. 진리 그 자체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화가의 솜씨는 진리를 훼방하고 방해한다는 거에요. 상당히 종교적이죠. 왜냐하면 진리자가 있다면 그건 인간의 노력과 무관한 현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의 노력과 무관한 현상.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뭐 이렇게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고 뭘 해도 이건 다 누가 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라면 이게 바로 여백 아닙니까. 여백이고 이쪽의 음악 같은 경우에는 이거는 여백이 아니라 뭘 추구하느냐 하면은 예상 밖. 예측 안됐던 뭐가 모아진다? 노이즈. 인간의 잡음. 잡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거에요.


이 말은 잡음을 잡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작곡가는 연주자는 뭘 멈추어야 된다? 자기의 연주 아주 우수한 대학을 나오고 독일의 연주자 코스 나오고 돈 몇 억 들어서 했던 그 모든 것을 중지를 시켜버리고 그 때 등장했던 그 잡음, 이 잡음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저 연주자들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연주가들이 얼마나 좋은 솜씨를 가지고 아름다운 조화로운 음악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할까라는 그런 기대와 예측을 무산시킬 때 나오는 그 소리.


그거는 우리의 선입관에 감추었던 짓밟혔던 우리가 놓쳤던 자연의 소리. 충청도 서산에 있던 전설의 고향인가. 자연의 소리. 너무나 한국적인 소리. 너무나 인간적인 소리. 그 소리를 듣는 현대 예술가들이 이런 장난질을 치는 거에요. 그렇다고 뭐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신선해야 이게 또 값이 올라가요. 값이 올라간다고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갖지 말아라. 그냥 부정적이에요. 아무것도 갖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네게 능력 주신 그것만 해라. 그게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나오지요.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이죠.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지만 너무 핑계 삼아 대지 말고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이야기입니다. 이것뿐만 아니고 모든 게 그래요. 21절에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태복음 10장 36절에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 이야기를 옆에 있는 누구한테 듣겠습니까? 제자들이 다 듣지요.


제자들이 들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하겠습니까? 제자들은 자기 사적인 과거 기억들을 다 갖고 있어요. 인간의 자아는 기억에 다발이니까. 그동안 쭉 마작하듯이 이어져오는 기억들이 기억의 제일 마지막 모습이 단면이 자아의 모습이에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기억들의 최종 정점이 지금까지 기억의 결론이 자아에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 기억이 그래. 내 기억이 그래.” 기억이 기관차 부분이에요. 공기를 뚫고 지나가는 제일 앞 선두주자가 기억이에요 ‘기억’. 최신기억이에요. ‘최신기억’. 인간은 매일 자기 기억을 조작하고 편집해야 그게 살쾡이의 단단한 발톱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손 내봐라. 발톱 빼자. 이걸 빼겠다는 겁니다.


은이나 금이나 이런 것 갖지 말고 심지어 너의 아비나 어미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거는 뺄 때 한두개 빼면 되는데 아예 아작을 내는 거에요. 뭘 아작내느냐? 제자들의 개인적인 사적인 기억을 통째로 뽑아내면서 뭐냐. 이래야 내 제자답다는 거에요.


백날 가르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백날 가르쳐야.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저 바다에 누워”. 이런 본성 밖에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 예수를 믿으면 호기심에서 예수 한번 믿어 볼까? 그것도 내 기억속의 일부로 가져오고 저것도 일부로 가져오고. ‘나’라는 것은 이쪽 기억. 저쪽 기억. 이쪽에서 뻐꾹 저쪽에서 뻐꾹 온 뻐꾸기 소리 다 끌어 모아가지고 이만하면 넉넉하지 않겠느냐. 그게 우리 소유 아닙니까. 생명은 어디에 있지 않다? 내 소유에 넉넉하게 있지 않지요. 내 기억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제자의 특혜가 있다면 주님 앞에서 실컷 헛된 짓거리를 다 하게 만들어요. 헛된 짓거리를. 다 하게 만들어요. 그럼에도 고상하게 거룩한 말씀과 사업에는 같이 참여시키고.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제자들 자기들 보고 이야기한 줄 모르고 자기들 적들 보고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꿇어!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인 줄 알아?! 이러고 있단 말이죠.


예수님이 제자들 뒤통수보고 너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 보고. 너 보고 이야기했어 너. 이게 어디서 손가락질하고 있어. 나중에 목자를 치면 양이 어떻게 돼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지요. 치기 전부터 이미 흩어진 상태에요. 치기 전부터.


쳤다는 것은 그 본색이 드러난 순간이고 처음부터 이게 잘 안 뭉치는 흙덩이처럼 손대면 다 부스럭거리는 따로 노는 따로국밥 같애. 전부 다 따로 놀아 따로 놀아. 소용없어요. 그러니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이 제자들이 갔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왔던 그 제자의 모습들이 얼마나 우리 성도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잖아요.


다시 한번 정리하고 들어갑시다. 주님의 일은 실제이기 때문에 대칭적으로 이게 뭐가 됩니까? 실제의 반대말은 뭐가 되지요? 허상. 환상. 뒤에 촛불처럼. 계속 타들어가는 거에요. 계속.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70살까지 산 것은 70살까지 경험해보라고 산 거에요. 70살 때는 또 얼마나 망가지는지를 경험해봐야 돼요.


80세까지 사신 것은 운이 좋아서 산 게 아니고 80세에 어떤 험한 꼴 나는지를 직접 체험해 보라는 겁니다. 어떤 아이는 2살 살다가 죽은 것은 너는 2살 살면 됐어 그만. 더 살 필요 없어. 이래서 2살까지 살다가 양부모한테 맞아서 욕조에서 맞아 죽은 아이도 있고.


70을 사나 80을 사나 2살을 사나 전부 다 이거는 하나의 허망한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 거에요. 팍 터질 때는 화려해보이지요. 벌써 내려오는 순간 시커먼 숯덩이 되어서 두두두 떨어져. 없어. 빈자리 보면 없어요. 이게 인간이 살아있으면서도 그걸 우리는 이미 느껴야 돼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서울 갔다가 촌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 같으면 명절날 기회를 통해서 촌에 한번 가보잖아요. 초등학교에 소나무에 가볼 때에 외나무다리에서 까불고 장난치고 다슬기 줍고 했던 그렇게 친구와 놀고 했던 그 시절에 그 다리를 한번 가보라고요. 그 다리는 그대로 있어도 그때 기분이 안나요. 어릴 때 기분이 안 나는 이유가 그 친구들이 없어요. 그 친구들이 함께 있어 줘야 돼요.


그게 뭐냐? 내 기억에는 있어요. 자기 기억 팔아먹고 사는 거에요. 지금도 어떤 현장을 볼 때에 지금 아름다운 세계적인 한국의 한지공예를 보고 있잖아요. 보고 있으면 어느 인간도 이걸 그냥 보는 인간은 없어요. 그때 불현듯 촌에 있을 때 그때 외갓집 있을 때 생각나는 거에요. 인간은 볼 때에 그냥 보는 게 아니고 자기 기억을 총동원해서 본다고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든지 이 풍경이 아늑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이런 무늬가 있던 내가 어릴 때 살던 그 초가집에 이런 방에서 살았어 라는 정감을 주는 거에요. 예술가도 그걸 의도하고 노리고 하고요. 그걸 가지고 그 기억이 살아나는 것을 가지고 의미라고 해요. mean. 의미라고 해요. 내 기억을 살려줄 때 그것은 나한테는 의미가 되고 내 기억과 안 맞을 때는 무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무의미한 존재고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친근한 얼굴에 수염 난 잘 생긴 서양 인물.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 호감을 줬던 미남상을 모델로 해서 중세 때 그림을 그렇게 그렸기 때문에 그 기억들이 와가지고 그게 마치 예수님 상 진짜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각인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이렇게 하지요.


정작 옆에 예수님과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거리감을 두고 있었던 거에요. 현장에서 있었던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데 뭔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요. 그러니까 성령의 조건은 뭐냐 하면은 성령의 조건은 이겁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이 오시면 십자가 영이 오시면 우리 속에서 자기 의를 자극시켜서 끄집어내요.


자기 의를 끄집어내서 이 자기 의와 십자가의 그 복음을 완전히 정면으로 이걸 박치기해버리죠. 충돌시킨다고요. 이래야 구원이 돼요. 그러면 자기 의는 우리의 기억이 있는 한 버립니까? 못 버립니까? 버릴 수가 없어요. 우리의 발톱은 못 버립니다. 이게 뭐가 되냐 하면은 죄가 되는 죄인이 되는 근거를 우리 안에 품어서 우리를 더 넓은 프레임으로 외각으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의 기억과 죄가 의미 있음을 계속 키우면서 그걸 주님께서는 용서해주지요. 그러니까 성도한테는 고귀한 게 있어요. 성깔부리고 성질부릴 필요 없어요. 우리는 포근하게 암탉이 새끼를 품은 것처럼 주의 용서가,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겁니다. 시한폭탄이 됐든 뭘 해도 우리는 어떻게 대우해도 우리는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자, 그렇게 하고 다시 6장 돌아가 봅시다. 6장에 보면 이제 이만큼 했으니까 18절 보겠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 나오지요. 성경에서 많이 나오니까 우리는 귀신을 간질병 환자로 보지만 이 귀신은 딴 귀신이 아니고 바로 환상적 존재에요. 환상적 존재. 이 허망하고 환상적 존재가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환상을 감추고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귀신이라는 거에요.


왜 환상적 존재라고 하느냐. 인간에게는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귀신을 뭐로 봅니까? 귀신은 없고 있더라도 죽을 때 귀신이고 있다가도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를 끄집어냅니까? 이 세상에서? 순간순간 인간들이 환상으로 여기는 이것을 귀신을 끄집어내잖아요. 봐라 봤잖아. 나가는 거 봤지?! 네가 실제야? 귀신이 실제야? 분명히 해. 이거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신 거에요. 귀신 쫓아낸 거에요.


귀신이라고 하니까 귀신이 나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거기서 뭐가 나간다? 악마의 힘이 인간의 발톱으로 자리 잡고 있거든요. 악마의 힘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뭐가 나갑니까? 자기 의가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에요. 빠져나가면 나는 아무것도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였구나 라는 그 존재의 가벼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병이 낫는 거에요. 근원적으로 병이 낫는 거에요. 근원적으로.


그걸 19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자, 예수님의 능력은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귀신을 내쫓으러 왔잖아요. 그러면 인간에게서 귀신이라는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은 부수적 요소지요. 실제로 인간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귀신이 주인공이 아니고 인간 자기들의 노력과 헌신과 희생과 그들의 지혜가 이 세상의 문명을 이룬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들어가! 과학이 발달됐는데 무슨 귀신이 있어. 그거는 옛날 과학이 발달되기 전 미신들이야 라고 추방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하면서도 귀신이 심어준 그 승부욕, 지지 않을려는 것. 나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 나는 의미 있고 가치 있기 때문에 나 좀 건드리지 말라는 그 자체가 바로 귀신이 들린 상태로 보는 거에요. 왜? 주님을 대적하는 힘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주님을 대적하는 힘이 있고 주님은 그 힘보다 귀신보다 더 쎈 힘이 있고. 그러니까 그 쎈 힘이 귀신을 쫓아내게 되면 그 인간은 바람 빠지 풍선처럼 퓌쉬쉬식 하고 내려가지요. 가게 앞에서 춤을 추다가 퓌쉬쉬식 죽어가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오직 그리스도만 고귀하지 나의 의, 나의 가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가자. 일하자. 그리고 망하자. 왔노라 보았노라 망했노라. 로마군대의 교훈이 시저가 이야기 한 겁니까. 왔노라 보았노라 나는 망했노라. 남자들 여자 보고 가졌노라. 여자들아 나는 망했노라. 우리 남자들은 결혼하면 망했다 해요. 빼도 박도 못하고 무를 수도 없고 망했노라. 세상은 결혼뿐만 아니고 모든 게 다 그래요. 신났을 때 있었지요. 그러나 그 신남은 반짝이고 결국은 다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구나” 이건 귀신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활동을 이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20절 봅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서 누가복음식 팔복이 쭉 나옵니다. 팔복이 나오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게 된 자가 천국의 백성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게 된 자. 내가 노력해서 천국 가는 게 천국이 아니고 내가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게 된 사람. 그럼 이 사람 속에 뭐가 담기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담기게 되겠지요. 이게 바로 제자들이죠. 제자들.


제자를 삼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아요. 내 존재 이유를 안다고요. 그렇다면 세상은 딱 두 종류입니다. 뭡니까?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과 이쪽에 있는 사람은 나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 나의 이야기는 나의 기억이겠죠.


자아, 나의 기억이고 예수님의 이야기는 누구 기억입니까? 이 땅을 예수님이 다녀갔던 그 기억. 십자가 고난 받았던 그 이유. 그 기억이 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 성령이 임한 사람이죠. 성령이 임하지 않는 사람. 이걸로 주님께서는 이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자, 이제 정리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제일 먼저 제가 강의한 것은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아 이 이야기를 안했구나. 아까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12제자의 취지는 뭐냐 하면은 별도의 사람, 이걸 아까 탈선이라고 했잖아요. 별도의 사람들이에요. 영광스러운 사람들이에요. 선택받은 사람들이니까. 별도의 사람. 특별한 사람이에요. 선택받았으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 처음에 자부심이 있었지요. 망하라고 선택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요. 하지만 이 특별한 선택은 결국 성령이 옴으로써 완성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12제자의 취지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없었던 분이 오셨다가 12을 선택을 했단 말이죠. 선택한 이유가 이스라엘이 12지파이기 때문에 선택한 거에요.


구약적으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언약의 하나님의 축복을 해서 12을 낳은 거에요. 그러면 이 12은 전혀 이 세상에 있는 제자들과 상관없는 일방적인 예수님의 12이 되는 겁니다. 이 지위와 신분으로서 선택을 했거든요. 선택은 포기를 하지 않으니까 선택받은 이 사람들은 어디를 가느냐. 12로 만족한다는 것 이걸 어디로 가느냐? 허무하게 이걸 0으로 가요. 0으로 가서 다시 1로 가서 12이 되는 겁니다. 12를 채워야 성령이 오기 때문에.


이 코스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 땅에 있던 우리를 주께서 성령을 주셔가지고 이 코스대로 제자들 갔던 코스대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다뤘던 그 코스대로 우리를 그대로 이끌어내시는 겁니다. 대단하고 잘났고 남한테 지기는 싫어하고 또 지지 않을만한 그런 위세와 지위와 그러한 노력과 희생이 있다고 자부했던 나를 주께서는 망하게 해버려요. 허망하게 한다고요. 허망하게 하고 무의미하게 만들어요.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는 성도라는 지위를 얻게 되면서 비로소 우리 안에 예수님의 기억이 들어오면서 12이라는 다시 말해서 교회가 생겨버리면 이거는 하나가 아니고 12니까 같은 성도들끼리 같은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이야기. 자신은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고 구애받지 않고 내가 이거 이야기해도 쪼다되지 않느냐는 이런 계산 같은 것 없이 그냥 편하게 나 원래 아무것도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바로 천국의 백성이에요. 그냥 주께서 불러줘서 아침 10시에 왔을 뿐이고 너는 2시에 왔을 뿐이고 그러나 하나님의 천국의 복은 노동과 관계없이 그냥 죄 사함을 해주시는 것.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러분 편하게 한번 살아가 봅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태어났던 사람들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이제 우리 차례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톱을 세워서 내가 뭔가 대단한 존재인 냥 자체적으로 내세울게 있는 냥 오해했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하시는 일만 드러내는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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