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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1 21:55:29 조회 : 357         
강남-누가복음 6장 27절 (말씀의 입체성) 210608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6장 27절 (말씀의 입체성) 210608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6장 27절 나온 말씀부터 하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그렇게 되어 있지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우리가 명심을 해야 됩니다. 크게 쓸게요.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돼요. 세상은 전혀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전하고 뭐 기독교가 100% 되도 해도 집단면역 안 생깁니다. 그냥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신자가 이걸 명심을 해줘야 돼요. 예수님 전해가지고 사회가 개혁되고 그런 철딱서니 없는 너무나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그런 환상을 꾸어선 안돼요.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고요하고 정돈되어 있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것은 신자들이 호들갑을 떨지 다른 세상 사람들은 옛적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해나 달이나 별이나 세상 그냥 그대로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신자보고 이야기합니다. 너도 눈이 있고 코가 있으면 한번 봐라. 종말의 낌새가 있더냐? 낌새고 뭐고 아무 낌새도 없어요.


약간의 변동이 있어도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서 극복을 해왔습니다. 인류 역사는. 순수한 종교단체가 괜히 들쑤셔가지고 자기 교단 한번 키워볼라고 교회에 사람 하나 꼬셔볼라고 그렇게 종말적 의식을 위기의식을 조장하지요.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내가 안 달라져요. 예수를 믿든 뭘 믿든 내 자체가 달라지지가 않습니다.


천지개벽나도 난 안 달라져요. 맛있는 거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이게 어디 갑니까. 그거 타고난 건데.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이게 어디 가요?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추어도 못 버리는 겁쟁이. 나는 가진 것을 결코 내놓지 않는 겁쟁이에요 우리는. 그런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선뜻 내놓고 내가 나를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안 달라집니다. 달라질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우리한테는 원수를 만들지 않습니다. 원수 만들면 우리가 스트레스 받아서 안돼요. 알아서 적당선에서 타협하고 협살하는 걸로 모든 해결을 지웁니다. 그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조율 한번 해주세요. 꼭 불러야 돼요? 조율 한번 해주세요. 한경애가 불렀던가? 신이시여 하늘이여 조율 한번 해주세요.


세상 그냥 조율하기 나름이에요. 극단적으로 자기 주장만 넣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거에요. 좋은 게 좋은 거. 나중에 둘 다 다쳐요. 소송 걸고 하지 말고. 소송은 기독교 신자가 좋아하지 세상은 소송 안 좋아합니다. 대한변호사 되가지고 알아서 중간에 갈등은 다 해소시키는 그것이 삶의 지혜로 알고 있어요.


원수의 의미는 뭐냐 하면은 원수라는 이 개념 자체가 모든 걸 극단으로 몰아가요. 극단으로 몰아가요. 적대적 대치관계. 골이 깊은 갈등구조. 이럴 때 원수. 더 심하게 말하면 왠수. 이 왠수야 하잖아요. 이 왠수. 원수는 내가 다쳐요. 나의 고유한 일상이 다친다니까요.


그 원수를 왜 우리가 그냥 우리 곁에 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좋은 게 좋지요. 원수 둬가지고 나에게 돌아올 이익이 뭔데요? 아무 이익 없잖아.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 우리는 고유하게 살고 싶고 불편하지 않게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우리한테는 원수가 없습니다. 있더라도 일시적 원수는 있어요. 일시적으로 불편한 관계있지만 우리는 빨리 평화를 원하고 그러한 갈등 구조가 해소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원수를 부각시켜 버립니다. 너희에게는 원수가 있느니라.


너희에게 원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 자주 나오느냐 하면은 중국 영화의 무림의 고수, 아버지가 도장깨기에 당해가지고 아버지 죽고 난 뒤에 구사일생 살아가지고 깊은 산속에 가서 무예를 연마하는 고수. 나중에 나이 한 20살쯤 되가지고 그때 불러서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 이 산을 떠나라. 실은 너희 아버지는 이런 원수한테 이소룡한테 당해가지고 죽었다.


그 때 원수가 나오는 거에요. 너는 운명적이야.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더라도 헤어져라. 그것보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중차대한 사명이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너희 아버지를 죽인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 난 뒤에 사랑하는 사람 만나든 뭘 하든 해라. 그래가지고 산에서 내려와가지고 만두집에 가서 만두 먹다가 한바탕 벌어지잖아요. 갈등구조가 해소되는 거죠.


왜 성도한테는 성도가 요구하지도 않은 원수가 왜 있어야 됩니까? 이것 성경에 원칙 중에 하나인데 깊은 성경 전체의 맥을 뚫는 원칙인데 미리 한번 적어보겠어요. 천사하고 성도하고 둘 다 일방적인 주님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천사하고 성도하고.


물론 좋은 천사 나쁜 천사 따로 있는데. 악마 말고 천사 따로 있는데 천사는 고난이 없고 성도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게 차이점이에요. ‘고난’, 이게 있기 때문에 천사가 오히려 성도에게 절을 해야 돼요.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이죠.


성경을 보실 때에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살 생각하지 마세요. 없던 고난이 내가 요구하지 않은 고난이 우리에게 난데없이 쑥 들어오는 거에요. 욥기처럼. 욥처럼. 쑥 들어오는 겁니다. 뺄래야 뺄 수가 없어요. 세상 같으면요. 심청전처럼 고난이 오게 되면 그들의 고난은 나중에 장래에 성공하기 위한 절차로 들어가는 거에요.


고난 자체가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 잠시 힘들게 사는 그 기간이 고난이에요. 그러나 성도는 그게 아니고 고난의 후손입니다. 고난밖에 나가면 안돼요. 고난이 해소되면 안돼요. 고난이 주가 되고 나는 고난의 하나의 객체가 되는 겁니다. 주도권은 고난이 쥐고 있고 나는 객체가 되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팔자와 운명을 답습하는 겁니다. 성도는.


따라서 우리가 원하지 않은 원수가 왠수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원수를 원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원수라고 들이댔을 때에 우리가 궁금한 게 뭐냐? 주님이여 원수가 뭡니까? 원수가 누구입니까? 뭐가 우리의 원수에요? 이렇게 궁금하겠지요. 이게 성경에서는 이걸 누가 원수라고 하지 않고 상당히 난해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도 15장에 보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요. 우리 같으면 악마? 뭐 그런 쪽으로 뿔 달린 귀신? 얼굴을 녹색이고 복장하는 꼬라지는 아무거나 걸치고 주로 습기찬 데 이렇게 해가지고 습기찬 데 기어나오는 것들. 공동묘지 근처에 있으면서 그런 것들 원수라고 하잖아요.


귀신아 물러가라 하면서 마늘 막 던지고 팥 던지고 하는 거 있잖아요. 오멘이라는 그 영화에 보면. 물길 잡는 거 해가지고 이렇게 돌아가면 이상하니 축축하니 습기 차가지고 귀신 나오고. 성경에선 그렇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원수를 명확하게 되어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 보게 되면 15장 26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볼까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여기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망이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수 그 사망의 아가리에 네가 내 택한 백성이 물려있다는 겁니다. 물어도 꽉 물었어요. 빼지를 못해요.


사망이 원수가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오시는 이유가 그 원수의 아가리에서, 아가리가 욕 아닙니다. 아가리라는 큰 고기를 말해요. 아가리에서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우리를 쏙 빼게 하시는 거에요. 더 쉽게 말해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왜냐? 악마는 보이지 않으니까. 악마가 키가 몇센치에요? 혈액형이 뭐에요?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물이기 때문에 악마의 세상의 세력을 잡은 자에서 우리가 빠질 수가 없어요. 우리를 꽉 물었던 그게 우리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운명, 팔자가 결국 죽음이라는 그 강력한 힘, 에너지에서 갇혀있습니다. 못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어떤 행동, 어디를 가서 어디 이민을 가서 어떤 행동을 하든간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그 공포심에서 면제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하나가 손끝이 떨립니다. 굳이 치매 안 걸려도 벌벌 떨어요. 내가 이 일을 결정을 하게 될 때 나한테 이익이 올까? 손해가 올까?


자, 이익은 뭐냐? 사망의 공포로부터 좀 느슨해질까? 그럼 손해가 뭐냐? 사망이 가까이 접근했네. 안 그래도 곧 죽겠다 하는 이걸 손해라고 하는 거에요. 그게 손해라고 하는 거에요. 전세금 뛰면 손해 뭐 해주잖아요. 성경에서는 이 사망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은 바로 죄에서 오게 되면 사망이 죄에서 오거든요. 사망이 죄에서 온단 말이죠.


인간은 사망 아구에서 못 빠져나오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은 죄에서 못 빠져나오고. 죄라는 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몸부림치는 거죠. 죽는 공포 속에서 될 수 있으면 죽는 쪽에서 사는 쪽으로 빠져나올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이야기하면 원수는 우리의 삶의 처지 또는 환경 그 자체에요. 그 자체. 그래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은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 때는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이미 원수로 그 원수라는 환경 속에 일원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까발리시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네 원수가 네가 네 원수다. 네가 네 원수야. 그러니까 원수에서 빠져나올려면 네가 너하고 결별을 해야 돼. 빠이빠이 잘 있어 안녕. 나야 안녕. 자기하고 헤어져야 돼요. 자기하고 헤어진다는 말은 꼬리 떼고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나를 떼고 나 아닌 나, 나 아닌 나 가 구원을 받는 거에요.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아예 구원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그게 원수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원수에게서 나온 희망사항이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겠다는 내 구원 자체로부터 내가 탈출을 해야 돼요. 세상에서 탈출이 아니고 내가 세상에서 탈출 받겠다는 그 생각 자체로부터 우리가 탈출이 돼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인간이 구원에 성사가 될 수 있겠어요.


성경에 그런 예가 많은데요.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했지요.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잉태할 때 예수님은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게 아니고 어디서 태어났느냐 하면은 마리아에서 성령으로 와가지고 예수님이 태어날 때 예수님은 마리아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마리아의 세계에서 태어난 거에요. 마리아의 세계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실 때 예수님이 마리아에서 태어나고 예수님이 하늘나라 가셨습니까? 아니지요. 본격적으로 일을 할 때 마리아에게만 찾아갔습니까? 아니지요. 마리아가 포함된 마리아를 살게 만든 마리아가 존재하게 만든 이 세계 전체에 대해서 예수님은 찾아가시는 거에요. 따라서 마리아 아니더라도 구원이 돼요. 마리아 아니더라도.


이것은 마리아에게 성령 와서 예수님을 구원했기 때문에 구원은 어디까지나 마리아와 예수님의 둘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그 해석이 잘못된 해석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도 찾아가지만 베드로에게도 찾아가고 12제자에게도 찾아가고 오늘날 성도에게도 찾아오지요. 그러면 이 마리아의 세계는 뭘로 확장되느냐?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로 이미 확장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누구든지 그 안에서 누가 나오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나오실 때에 이 예수님의 이름이 바로 새로운 자아가 되는 거에요. 꼬리 떼고 구원되는 자아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 구원이 아니고 누구 구원이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이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그게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이름이 죄 속에 들어왔다가 아무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예수님이 홀로 빠져나올 때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주의 이름의 구원이에요. 주의 이름의 구원이에요. 주의 이름의 구원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바뀌느냐? 주님의 고난에 같이 동참되고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이름의 확장. 그 확장은 새로운 세계, 영토에요.


그 영토가 죽음의 영토에서 죽음의 아가리에 먹힌 그 영토에서 예수님의 영토로 바뀌는 겁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아이디어냐 하면은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나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그러한 구원론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들이 지어낸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은 구원받는다에요. ‘구원받는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치고 죽어서 천당 안 가고 지옥 갈 사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자기가 하는 행세는 다 뒷전이고 그래서 죽어서는 좋은데 가야하지 않습니까. 보험 들어놨어요? 삼성보험입니까? 왜 좋은데 가야 됩니까? 그냥 가고 싶네요. 왜 가야 돼요? 그냥 가고 싶데요. 왜 가고 싶습니까? 물으면 이 세상에 죽음의 저주가 너무 강렬해요. 그건 네 소원이고. 그거는 어디까지나 죽음의 세계에서 길들여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된 인간 존재에서 기껏 품을 수 있는 나중의 희망사항, 기대고 희망사항이에요. 종교적 희망이죠. 소원입니다. 우리의 소원.


그 소원이 소원되게 나타날 수 있도록 에너지로 밀어붙이는 자는 누굽니까? 악마지요. 왜? 쓸데없는 희망은 악마가 맘껏 허용을 하니까. 빌어라.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악마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 이야기해요. 예수 이름으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구원받고 뭐 받고 어떻고 어떻고 온갖 다양한 교리와 체험들을 내세워가지고 교단들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되는 거에요. 레시피를 다해. 레시피를 다 한다고요. 만두 삶을 때는 몇도에 삶고 마지막에는 꼭 잊지 말고 조미료 확 쳐라. 맛이 없을 리가 없지요. 레시피 다 나와 있으니까 레시피대로 하면 되니까. 그 레시피 주인공은 뭡니까? 나야 나. 자기 자신이죠. 자기 자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의 세계, 마리아의 세계죠. 마리아의 놀던 그 세계죠. 그 세계에서 기대하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마리아가 임신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미리 예측 못한 거에요. 그 마리아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은 말씀을 지키고 말씀대로 어릴 때부터 다 교육 받아서 말씀을 지켰던 그 유대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 말씀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그 말씀과 함께 장차 인격화되신 분의 그 분 위주로 말씀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그 유대사회는 주님이 오기 전이니까 전혀 거기서 아는 바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원수라는 이 개념, 이 모든 개념을 알기 위해서 뭘 하나 공작시간 뭘 하나 만들어 봤어요. 12cm, 높이 7cm짜리 투명 판 가지고 스카치테이프하고 칼하고 가위 가지고 오려 가지고 면이 사면체인데 딱 세워놓는 이것 한번 만들어봤습니다. 이게 어디에 필요 하느냐 하면은 이걸 설명해드릴게요.


사면체 있어요. 이것은 홀로그램을 이것 가지고 비치면 홀로그램이 여기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휴대폰 위에다가 이걸 딱 놓게 되면 휴대폰에 나오는 그 영상이 홀로그램 입체 영상으로 공중에 허공에 뜨게 되어 있어요. 물론 모든 게 되는 건 아니고 그 유튜브에 홀로그램 현상 영상 치면 네 가지의 그림이 움직이는 게 나올 거에요.


그 네 가지의 그림이 여기에 투명판에 반사가 되면서 입체로 등장하는 거에요. 홀로그램 현상이라고 쳐보시면 나옵니다. 그림이 나와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지표면, 인간 세계 자체가 표면적이거든요. 표면적. 땅에 속한. 지표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그 말씀이 어디 떨어지느냐 하면은 지표면에 전부 다 여기에 달라붙어있어요. 인간들의 죽음의 세계, 원수의 세계에 말씀들이 다 달라붙어있어요.


달라붙어있으니까 여기서 인간들은 선악체계를 갖춘 여기에다가 말씀을 선악체계 자체가 이미 죄인데 죄의 구조인데요. 죄의 구조에 성경말씀 오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원수 된 표상들이 나오는 거에요. 선악 해석하는 그 잣대, 해석하는 그 기준 자체가 죄가 된단 말이죠. 나를 선한 인간으로 어떻게 하면 전환될까를 의도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보기 때문에 시작부터가 나는 선악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성경말씀해도 결국 자기에 대한 변명과 구실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 있죠. “누구든지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최고 레벨에 도달한 바리새인도 땡 탈락이다 이 말입니다. 바리새인 탈락하고 사두개인 탈락하고 서기관 탈락하면 어떤 인간도 다 탈락이라는 뜻이에요. 전부 다 표면적 존재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표면적 존재에 있지 않고 말씀 자체가 인격이 되게 되면 여기에 성경 말씀이 예수님 인격이 되어서 여기 공중에 붕 떠 있는 거에요. 붕 떠 있으니까 그들이 평소에 그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모든 그들이 이해한 것과 선악체제, 선악시스템 그 구조에 달라붙은 그 해석과 말씀, 율법 출제자.


여러분 시험 출제자가 알겠어요? 시험 치는 사람이 알겠어요? 정답을. 본인 문제 출제자가 알게 아니겠습니까. 출제자 자신이 완성이 되어서 온 그 사이에는 여기서 뭐냐 하면은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이 정답이. 붕 떠서. 잡히지를 않아요. 이것을 이미 성경에서는 이미 이것을 구약 성경에 이러한 그 홀로그램이 나와요.


신명기 11장 29절, 신명기 27장 12절, 여호수아 8장33절인데. 아무거나 봐도 되는데 그중에서 신명기 27장 12절에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지표면에 서는 거에요. 그리심 산에 서고. 그 다음에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에발 산 쪽은 어떤 쪽이냐 하면은 본처가 아닌 그러니까 라헬이 아닌 레아 쪽이나 종의 지파와 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은 그래요. 저쪽 축복 산에는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레아도 포함되어 있고 6:6으로 분리한다는데 딱 해놓고 뭘 하느냐 하면은 그 다음부터 지표면이 아니고 공중을 향하여 말씀을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아멘은 어디서 모이느냐? 공중에서 모이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역할은 뭐냐 하면은 이런 자에게는 축복을 받습니다라고 그리심 산에 있는 그 지파가 상대방 저쪽 산에 날려버려요. 저쪽 산 공중을 향해 날려버린다고. 산이 두 개 나란히 이렇게 계곡이 되어있거든요. 이 지점을 향하여 축복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 쪽에서는 뭐냐 하면은 저주를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축복받아야 돼. 이 백성들은 저주받아야 해 하는 이것은 모든 것은 뭐냐 하면은 본인의 소관이 아니고 이쪽 소관이에요. 축복과 저주는 여기에 한 데 아멘으로 모이는 아멘으로 형성되어 있는 제3의 영역에서 축복과 저주를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은 말씀 출제자가 말씀을 결정할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축복과 저주를 결정할 권한이 없어요. 왜냐 하면은 모순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의 인간이 축복과 저주를 같은 인간 안에 같이 형성이 되는 것은요 축복과 저주가 너무나 이질적으로 대조가 되는 거에요. 너는 축복도 받고 저주도 받아라 이런 건 인간한테는 안 된다는 거에요.


너는 축복이면 축복 쪽이고 지옥 갈라면 지옥 가고 너는 천당 가면 천국 가는 거에요. 둘 다 양다리 걸쳐서 다리 찢어지겠다 이런 거 없어요. 확실하게 한쪽에 속하는데 그쪽은 인간이 자기가 요청하거나 본인이 고대하거나 희망하거나 기대하거나 전혀 상관없어요. 어느 인간이 지옥을 기대하겠어요. 어느 인간이. 좋은 건 다 할려고 하겠지요.


왜? 인간은 자기를 좋게 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좋게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은 저주받을 짓입니다. 왜냐 하면은 자기의 원천을 말씀의 완성되신 예수님부터 만나가지고 새로 결정해야지 왜 본인이 결정합니까? 내 운명을 왜 내가 결정해요? 성경에 나온 개념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주님이 결정해서 우리에게 그냥 제공하는 거에요. 이게 원수야. 이게 복이야. 이게 저주라고 하는 거야. 너는 입 다물어 가만히 주는 대로 받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성경은.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경 해석하실 때 요한복음 5장 38절에 보면 이건 다 같이 한번 찾아봐야 돼요. 37절부터 38절까지. 요한복음 5장 37절 38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그 말씀이 그들의 자기 지표면에 자기 몸에 딱 붙어있는 거에요. 자기 몸에다가.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 위주에요. 잘 될 거야. 맨날 자기 희망과 말씀이 같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천사는 뭐가 없고? 고난이 없고 택한 백성은 고난이 있지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고난을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요청하더라도 빨리 해소되고 영광이 이르기를 원하겠지요. 고생 뒤에 낙이 온다고. 주여, 고생을 주시옵소서 이러고 있다고요. 그거는 꼼수에요. 왜냐 하면은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주님의 영광이 들어와버리면 뭐를 잊어야 되느냐 하면은 지표면에 서있는 이 계곡에 서있는 나는 이제는 잊어야 돼. 이걸.


그런데 구원론은 인간을 못 잊게 만들어요. 소위 기독교의 교리라는 구원론이. 구원받고 난 뒤에 자기 잊었습니까? 아니죠. 더 집착이죠. 아주 야무져요 그때부터는. 집착하면서도 은근히 화가 나요. 뭐라고 화가 나느냐 하면은 주님 죄 사함 해주는 건 고마운데요. 그걸 빌미로 자꾸 나를 찾아오면 내가 스토커가 찾아오면 괴롭지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못하잖아요.


고맙다 해 드릴께요. 십일조 가져가세요. 가져가는데 나머지 돈에는 손대지 마세요. 이건 스토커도 아니고 뭐 쪼금 고맙게 해줬다고 그 다음부터는 살림 다 들고 갈 참인가 이건. 은근히 부화가 나는 거에요. 부화가. 주님한테 고맙다 해줬잖아요. 찬양 해줬잖아요. 찬송가 한번 불러 볼까요? 잘 불러요. 찾아오지 마세요 이제는. 지겹다, 이제는. 주님도.


그게 원수야. 그게 네 자아상이야. 그게 원수에요 그게. 여러분 일가친척 가운데 친구 가운데 여러분한테 잘해주는 사람 고맙지요? 고맙지만 계속 들이대게 되면 나중에는 죽여버리고 싶어요. 이건 뭐 한번 혜택 입었다고 말이야 언제까지 울궈 먹을라고. 다 빼가라. 간, 쓸개 다 빼가라.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 안 바뀐다고 했지요. 세상 안 바뀌는 이유가 내가 안 바뀌어요. 인간은 자기가 결정한 것, 내가 결정한 것이 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결정하냐? 나의 본성은 뭐냐? 그것이 알고 싶다. 그걸 알려주마. 나는 내가 다치기 싫어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영원한. 나는 내가 다치기 싫어요. 다치기 싫다. 싫어요. 내가 다치기 싫어요.


애가 되든 40이 되든 50이 되든 70이 되든 한결같아요. 한결같애. 내가 이렇게 안변하는데 세상이 변할 리가 있습니까? 다만 이런 걸 꼬깃꼬깃 감췄지요. 인간 내부에. 감춘 거에요. 기도 별로 하지도 않다가 갑자기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다칠까봐 겁나서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지옥가고 천국가는 것을 하나님이여 아이디어만 주시고 결정은 제가 하겠습니다. 왜? 평소에 내가 안 다치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나는 선택해 왔고 결정해 온 그 행세를 나는 때려죽어도 못 버리겠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럼 주님께서 버리지 마. 네가 지금 개과천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버리지 말아야 된단 말이죠.


왜? 버리지 않아야 주께서 원수라는 것이 계속 그 개념 속에 우리가 놓여 있어야 돼요. 원수이기 때문에 주께서 가위 가지고 떼어내는 거에요. 고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문경 말대로 정지칼. 부엌칼, 잘 드는 독일칼 있잖아요. 정지칼. 슥슥 갈아서. 고치지마 내가 잘라줄게. 네가 사망인데 너한테 암세포처럼 달라붙었어. 내가 떼 낼게. 내가 떼 내는 거에요.


왜? 사망을 이기신 분은 주님의 성령밖에 없어요. 주님밖에 없는데 자기가 떼어낼려고 하니 떼어집니까. 착각만하지. 스스로 아주 연출을 해. 연출을.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 연기만 늘었어 연기만. 성도는요 내가 신자 아닌 것을 알아가면서 신자가 되어 가는 거에요. 갈수록 나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덜렁거리는, 주여 빨리 잘라주세요.


불신앙을 잘라달라고 누구한테 요청합니까?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덜렁거리는 나의 일을 떼 내고자 하는 거에요. 이걸 잘라내는 거에요. 속이 시원하게. 덜렁덜렁 무겁지도 않아요? 무겁잖아요. 떼 내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망한 거에요. 이스라엘 망해주는 게 이스라엘 복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계시 받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망해야 비로소 계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직도 자기한테 희망이 있으면요 이 성경 말씀이 안 들어와요. 네가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이 말은 우리 보고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경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원수 같은 너에게, 주님이 원수라고 규정하고 일단은 규정하고 원수에게 두 번째 주님이 다가가서 세 번째 원수를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 원수로부터 이별하게 만드는 거에요. 잘라내버리는 거에요. 내가 나를 원수로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원수를 보는 그 본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거에요 그거는.


주님이 나를 원수로 본다는 것은 슥삭슥삭 정지칼, 부엌칼 가는 게 귀에 들리는 거에요. 슥삭슥삭. 네 입으로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좀 나대지 말고 가만 있어. 내가 잘라줄 테니까. 잘라줄 때 암세포 떨어져나갈 때 이미 암에서 나온 사람은 자기 몸에서 나온 암세포 보고 반갑다 친구야. 이게 암이구나. 자기 자신을 이미 과거 존재로 볼 수 있는 여유. 그게 자유 아닙니까?! 자기 자신을 과거로 보는 거에요.


지독하게 내가 구원받을려고 애썼던 모든 짓거리를 보는 겁니다. 말씀을 지표면에서. 나 구원 용도로써 해석해왔던 모든 신학과 신학체제, 성경 말씀, 세미나 쫓아다니는 것, 그 모든 그 들으면서도 자기 마음가짐이 오늘 이거 듣고 천당 가야지 하는 자기에 대한 집착과 집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이렇게 붕 뜰 줄 몰랐지요.


계곡에 사면의 공중에 아멘으로 화답할 줄 몰랐습니다. 이쪽 계곡에서는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이 미사일처럼 나와요. 축복이 튕겨 나오고 이쪽 에발 산에서는 저주가 팍 튕겨 나와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디 있느냐? 두 개가 아니거든요. 하나밖에 없거든요. 축복 산에 있겠습니까? 저주 산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는?


질문하는 실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빨리 답하겠습니다. 저주 산에 이 에발 산에 법궤가 있어요. 에발 산에. 다시 말해서 여기서 올라오는 이 저주가 여기서 어디서 만나느냐? 아멘으로 합이 되어버리면 축복 기능 다시 말해서 축복 절차와 저주 절차가 오로지 주님, 예수님에게만 이게 일치된다는 것. 그분이 축복할 권한도 있고 그 분이 저주할 권한은 오직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와요.


요한복음 5장 한번 봅시다. 5장 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요. 원수에 대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안하고는 누구의 소관입니까? 말씀출제자 예수님 자기 소관이에요. 말씀이 축복과 저주를 누구를 축복주고 누구를 저주 주는 권한은 유일하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말씀으로 다가가서 그 인간 개개인에게 감정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 속해 있는 그 세계 자체, 인간 세계 자체가 뭐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것도 없어요. 뭐 자체가 사망의 세계에요. 그 차제가. 악마가 지배한 세계고 죄의 세계, 유령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요. 우리보고 빠져나오라고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빠져나와서 빠져나왔다는 통보를 해야 그 다음부터 우리가 빠져나온 걸 알 수밖에 없어요. 이 세계에 주님께서는 들어오신 거에요. 절차가 뭐냐? 저주받는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받았어요. 갈라디아서 3장에 십자가 나오지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저주받은 거에요.


예수님께서 저주받았다 하지마세요. 예수님이 속했던 예수님이 일시적으로나마 왔던 이 세계 자체가 전부가 예수님 저주로 말미암아 저주받았음이 확정된 거에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한사람이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산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가 사신 분을 위해서 살았다”


그래서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당신은 누구 밑에서 일하는가? 당신은 누굴 위해서 삽니까? 라는 질문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한테는 정확하게 그런 사례가 나오지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은요 대장 밑에서 사는 거 아닙니다. 주님 밑에서 살아요. 그 대대장 중대장 취직한 것도 주님께서 취직하게 하신 거고.


오늘 저녁에 냉면 먹은 것도 주께서 하게 하신 거고. 사리 하나 더 시켰잖아요. 주께서 시켜주신 거에요 그게. 죽고 싶은데 못 죽게, 사리 하나 더 시켜주신 거에요. 네 맘대로 죽나? 내 마음이다. 너는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요. 할 수 없어 이거는. 왜? 나는 주님 밑에서 살기 때문에 살라면 더 살아야 돼.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위해서. 주님이 어떤 경로로 왔고 어떤 경로로 탈출했고 어떤 경로로 또 찾아왔는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걸 그림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나’가 아닙니다. ‘나’가 아니고 ‘나의 세계’입니다. 나와 남은 둘 다 똑같아요. 뭐 더 뛰어난 거 없어요. 우리는 거기서 배웠고 그들의 시선과 눈치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게 자아상이 되는 겁니다. identity, 우리 정체성이 된 거에요. 남들 눈치 보고 살아가는 거에요. 남들 기대에 부응 못하면 자살할 정도로 그 정도로 우리는 남의 눈치 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의식하면서.


나의 세계가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말씀의 세계로 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지표면에서 놀던 인간이 주님 계시는 공중으로 홀로그램처럼 3차원 영상처럼 붕 떴어요. 우리는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있다 이 말이거든요.


누가복음 17장 20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지표면적으로 이야기해요. 질문을 해요. 예수님 하늘나라 어디에 있습니까? 네비 찍으면 어디 나옵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네비 찍으면 어디 나옵니까? 양재 7번 출구에서 어디 있습니까 물으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늘나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제시해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among 너희 안에 있는 거에요.


아까 계곡 있죠. 지표면 안에 있는 거에요. 성령받기 전에 아무도 못 알아 듣습니다. 너희 안에 있는 겁니다. 너희 안에 있어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주지요. 나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 말씀의 세계에서 그 다음에 원수 사랑을 하면서 나의 세계에다가 우리를 파견하는 형식을 줍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세계에서 올라올 때 이미 우리는 죽었지만 우리의 껍데기는 남아있어요. 우리의 육신은 남아있잖아요.


이 육신에다가 주님의 성령이 육신에다가 자기 자리라고 사용해버려요. 나의 세계일 때는 허둥대면서 개코도 모르면서 말씀지켰다 하다가 이미 주님의 말씀의 세계에 와버리면 이거는 ‘다 이루었다’가 되어버려요. 다 이룬 상태에서 육신을 가지고 이제는 예수님의 이런 절차를 밟았다. 저주받고 다시 갔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원수는 사망과 죄, 마귀 그게 원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로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 작업 때문에 우리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냐 하면은 소유가 소유권이 이미 넘어갔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지요. “이미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네 몸은 너의 것이 아니니라” 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도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날마다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겁니다. 이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주님의 지시가 어떻게 옵니까 라고 하는데 주님의 지시는 회고적으로 알게 되어있어요. 회고적으로. 그때는 모르는데 나중에 뒤돌아서서 보게 되게 되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새로움이 나와요. 감사가 나온다고요.


우리의 지표면의 인생은요 쉬운 예로 내가 먹었던 짜장면은 그 맛이 그 맛이라 생각하는데 주님의 거듭난 사람의 그 맛이 그 맛이라는 우리의 옛 사람 속에 주님의 성령이 와버리면 이 짜장면이 이런 맛이었었어?! 이렇게 새로움이 오게 되면 그것은 뭐냐? 감사로 이어지게 되어있어요. 모든 일에 감사로. 냉면이 이 맛이었어? 이런 맛이었어?


그러니까 이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뭐를 끊어버리느냐 하면은 나의 예상과 기대를 끊어버리도록 하는 겁니다. 어떻게? 점심을 안 먹는다든지. 점심 때 튀김 맛없는 것을 먹었을 때. 배부를 때는 전혀 맛있지도 않은 냉면이 오늘따라 배고플 때는 사리 하나 추가요. 날마다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주사 맞을 때 따끔하고 아프지요. 그래서 미리 예상을 해요. 주사 아픈 거는 그거 다 아플 거야. 주사 놓는 순간에 마치 누가 전화로 소식을 전해가지고 아들이 이번에 과학고 합격했습니다. 그래?! 하는 순간 이게 없어져버렸어. 안 아파. 이게 안 아파버려요. 아플 거야. 많이 아플 거야. 참아야 돼. 이건 과거에 내가 아는 기억 속에 있는 내가 예상하는 거에요.


대비해야 돼. 대비해야 되는데 아프더라도 나는 목사한테 들었어. 어떤 경우에서라도 감사하라고 했으니까 주사 맞더라도 감사해야 돼. 엉터리 감사에요. 자기가 조작한 감사에요. 그런데 난데없이 전혀 별개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뒤돌아보니까 방금 뭐 찔렀어요? 오늘따라 왜 이리 안 아프지?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감사가 나오는 거에요.


부부싸움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화장실에서 앉아서 안하고 서서 싸느냐 이런 걸로 싸우다가 따르릉 전화와가지고 장인어른 돌아가셨답니다. 장인어른 돌아가지고 난 뒤에 변기 그거는 별 큰 문제가 안 되어버렸어요. 시시한 문제가 된 거죠. 주님께서는 바로 십자가와 연관시켜서 우리의 일상을 다 시시하게 만드는 그러한 일들을 줘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케 하는 그런 쪽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6장 27절 (말씀의 입체성) 210608a-이근호 목사.hwp (165.5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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