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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0 10:30:03 조회 : 4965         
20070105a 울산강의-창세기 4장(1) 녹취 이름 : 한윤범(IP:61.73.49.89)
 

20070105a 울산강의-창세기 4장(1)


(강의:이근호 목사)






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 4장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는데 아담한테는 구체적으로 말을 가지고 아담아, 어디 있느냐?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렇게 말로 이야기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말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신나겠습니까, 안 그러면 무섭겠습니까, 두렵겠습니까? 무섭고 두렵지요. 그리고 무섭고 두려운 동시에 뭘 느끼겠습니까? 제가 글로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아담아’하고 음성으로 할 때에 두렵지요. 두렵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현상이 뭐냐 하면, 뭘 어떤 걸 느끼느냐 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이 모든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다 나에게 찾아온 하나님 소관인 것이 정리되겠지요. 모든 것은 하나님 소관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아무리 뭘 해보려 해도 하나님 굴레에서 못 벗어난다. 라는 것이 이게 딱 정립이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아담을 부르실 때 아담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걸 정리될 때 만약에 모든 것이 하나님 소관을 못 느끼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이 계신 것에서 두렵지 않다는 뜻이고,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안 불러줬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렇지요? 이 논리상 되면.




하나님이 불러주시면, 아이고, 아이쿠 진짜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구나. 그냥 남 풍문으로 있을 걸, 이 정도가 아니고, 진짜 계시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셔서 날 찾아왔다면 앞으로 인생 어떻게 살 것이며, 세상이 어떻게 끝날 것도 하나님의 소관이 되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됨과 동시에 그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본인도 포함되지요. 하나님이 뜻대로 움직이는 그 세계 움직임 속에 자기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말이죠.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나라는 것은 홀로, 자존이라 할 수 있고, 독립이라. 스스로 자존하거나 독립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나는 움직거리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럼 나는 왜 사는가? 그럼 나 왜 있는가? 이걸 한번 생각 해 봐야죠.




여러분, 인생 왜 삽니까? 왜 살아요. 도대체 인간은 뭐 때문에 지금 살려고 애를 씁니까? 무슨 이유 때문에. 왜 우리는 자꾸 살려고 애 쓰지요? 사시는 어떤 목적이 있습니까?




칸트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무목적성, 합목적이라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여러분, 개구리가 물갈퀴가 있는 이유가 뭡니까? 헤엄 잘 치기 위해 있죠, 헤엄을 잘 치기 위한 합목적성,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목적이 합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개구리에 물갈퀴가 있습니다.




민들레 홀씨가 낙하산처럼 되어 있지요. 그건 왜 그럴까요? 그거는 바람에 잘 날아가기 위한 목적에 합하기 위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면서 어딜 향해 날아갑니까? 목적이 없지요. 그러니까 무목적이잖아요. 그걸 무목적 합목적성이라 해요. 어렵게 이야기해요.




사람은 순간순간에 어떤 목적이 있어요. 오늘 하루 스케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스케줄은 오늘 누구 만나고, 누구 만나고, 아침에 저녁에 와서 뭘 하고, 내일은 도배를 하고 있는데. 왜 삽니까? 라고 목적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합니까? 답변할 게 없잖아요. 아무 답변이 안 나오잖아요. 왜 삽니까?




그래서 흔히 듣던 이야기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 영광을 구체적으로 내놔라 하면 못 내놓잖아요.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산다 하는 것은 그러면 그동안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어떤 업적 같은 것을 내 놔라 하면 그런 거 없잖아요.




지난날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해 놓고 내놓은 실적은 없으면서 앞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산다 하는 것은, 그거는 못 살기 때문에 핑계 삼아 내놓는 발언이지 실제로 영광을 위하여 맞추어서 사는 게 그런 게 없다 이 말입니다.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것 해야 되고, 이거해야 되고 이런 것 있습니까? 없잖아요. 어떻게 살다보면 영광되겠지, 뭐. 이런 식으로 방치하듯이 자기를 방치하듯이 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 목적 없이 사는 겁니다. 그런데 목적 없이 사는 것이 두렵거나 미안스럽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그건 왜냐하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하나님, 제가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그 뒤에 느낀 것은 아담아, 내가 모든 것을 작정했다.




그럴 때 아담이 느끼는 것은 뭐냐? 그렇다면, 아담,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뭐로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때문에 내가 있어야 되는 쪽으로 살지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관계성이라고 합니다.




창세기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는데? 하나님 대봐라.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아담이 있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로써 아담이 있는 겁니다. 제가 방금 어려운 말을 한 건 아닙니다. 이거 어렵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이거 아주 쉬운 말 했습니다.




아담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이 자기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은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사람은 왜 사는가? 물으면 우리도 아담처럼 답변하면 되는 거죠.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나는 여기 있어야만 했기에 있다는 거예요. 울산 땅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찾아오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만약에 내가 살아간다는 사람은 평생가도 그 사람은 하나님하고 관계없는 사람이죠. 왜냐하면 이미 관계성이 아니고,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무관계성에 놓여 있어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산다든지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가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아마 자기가 지어낸 하나님이나 있을지, 그 외에는 없어요.




정작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아담처럼 이야기합니다. 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나를 철수하거나 철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관계라 하는 것이 내가 조종하는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만든 그 관계라면 내 쪽에서 거미줄 회수하듯이 회수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언젠가 회수할 날이 있을 겁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또는 늙어 죽은 사람, 성도들처럼.




언젠가 이제는 그만 일 했으니까 이제는 편히 쉬자, 야야. 거미줄로 밧줄로 잡아당겨서 우리를 천국에 쉬게 할 그날이 올 거예요. 회수할 그 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때문에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것이 우리 성도의 목적입니다. 그게 목적이에요. 그게 목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걸 보여주면 그걸로 되는 것이지, 내가 내 원하는 대로 잘 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욕망한 대로 잘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관계성이 아니라 내가 만든 내 목적대로 살려고 하니까 이것은 무관계성이에요. 관계가 끊어지고 단지 남은 것은 자기의 끓어오르는 욕심과 욕망 밖에 없어요.




저주라는 것은, 꼭 저주를 받아야 저주가 아니고, 저주라 하는 것은 죽고 싶어도 못 죽고 메워도 메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궁핍을 느끼는 그런 욕심이 생겨나는 자체가 저주에요. 우릴 힘들게 해요. 우릴 참,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지난, 울산도 마찬가지지만 울산도 여기 현대아파트나 여기 오다보면 아파트 새로 막 짓고 시가지 개발하고 하는데, 이 동네 지금 합기도도장 있는 이 동네 오게 되면 후지지요. 옛날 냄새가 나지요. 그 풍광이 풍경이 옛날 70년대 촬영하라면 촬영장소로 적당할 정도로 옛날 모습이지요. 울산 전체가 지금 이 동네처럼 이렇게 있다면 우리를 후지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그죠? 모든 울산 전체가.




그런데 양쪽에서 시샘하듯이 쫙쫙 빌딩 올라가고 새로운 아파트 냄새 푹푹 풍기면서 올라간다면 자동적으로 이쪽은 뭐가 되느냐 하면, 후진 데가 되고 마는 거죠. 이게 아주 덜 떨어진 낙후된 장소가 되지요. 평소에 울산에서 이런 집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을 것 아닙니까? 분명히. 세상이 이렇게 좋은 홀, 이런 예배당이 있다니 이토록 감사할 데가, 하지요.




그런데 온 교인이 큰 교회 한번 구경하고 난 뒤에는 이것도 교회가? 뭐, 이렇게 된다 말이죠. 이게 바로 저주에요. 저주를 품고 살아요. 인간은.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을 품고 산다고. 계속 욕심이 나온다는 것은 계속 저주가 나온다는 거예요.



왜? 우리로 하여금 사마리아여인처럼 마셔도, 마셔도 계속 우리 자신을 스스로 못 살게 굴기 때문에. 누가 못 살게 구는 것이 아니고 옆집 개가 짖어서 못 살게 구는 게 아니고, 내 속에서 나오는 나의 욕망과 욕심이 내 인생을 힘들게 합니다. 힘들게 하고 나로 하여금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그걸 완전히 놓치게 만들죠.




그러니까 뭐, 하나님 영광, 건성으로 영광 돌리세. 찬송 부르면서, 아이고, 참. 사는 꼬라지하고는. 하나님 영광, 영광 하면서 자기 신세타령이나 하고 말이죠. 신세타령을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천국이니, 찬송 불러 보지만, 1절도 가기 전에 힘 다 빠져서 ‘어디서나 할~렐~루~야~’ 그만 창으로 변해서 찬송도 때려치우자. 재미없다. 아이고, 내 이 꼬라지하고. 찬송도 가미되고 기도와 성경공부 가미돼도 끌어 오르는 자기의 분통,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그것 때문에 욕심과 현실의 벌어진 그 틈만큼 자기가 그렇게 괴롭지요.




그때 느껴지는 게 허무지요. 그때 뭐냐? 나는 왜 사는가? 주여, 차라리 죽여주세요. 내가 왜 삽니까? 얼굴이 밝질 못하고 침침하지요. 조명발인가? 침침한데. 얼굴이 침침하고 밝지를 못하죠. 활기가 없고. 아이고, 그만 나 좀 건드리지 마. 귀찮아 죽겠어. 너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귀찮아 죽겠어. 그만 가만 놔둬라. 만사가 귀찮아. 이것은 바로 세상만사가 하나님 손으로 돌아간다는 이 관계성을 잊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창세기를 우리가 공부하면서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하고 이렇게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이게 남의 이야기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여기 있는 피아노나 에어컨처럼 지금 우리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쭉쭉 배치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겁니다. 내 몸이 있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에요. 왜? 아담이 있었으니까.




창세기 3장을 들여다보면서 어, 아담이 여기 있네. 아담은 누구지? 나의 조상. 그럼 나는 왜 있지? 하나님 때문에 있구나. 그럼 하나님은 살아계시네. 그리고 여기 창세기 3장에 보니까 아담한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구나. 약속을 전했구나. 그렇다면 세상만사는 그 약속대로 돌아가고, 나는 그 약속 속에 있는 하나의 인간이고.




그럼 나는 왜 있느냐? 그 약속이 있음을 하나님 계심을 알리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그러한 목적으로 나는 여기 존재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여기 있는 자체가 곧 하나님 있는 것이 돼버렸죠.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려면 도대체 나는 어디서 나왔느냐?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그걸 우리가 모를 때는 아이고, 하나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성경에 이렇게 아담과 하나님 사이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죠. 이제는 그 범주 안에 있는 겁니다.




따라서 방금 제가 강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하나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3장과 4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것은 하나의 영역으로 하나의 구역으로 하나의 영역. 하나의 영역, 필드, 장, 또는 하나의 범주로서 이렇게 우리는 거기에 이 안에 놓여 있다는 쪽으로 창세기 3장과 4장을 해석하시면 옳습니다.




내가 어떻게 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놓여있다.’ 식으로 해야 돼요. ‘나는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나는 여기에 놓여 있다, 무엇 무엇에 놓여 있다.’라는 것이 나오면 해석이 옳게 된 겁니다. ‘나는 무엇을 한다, 나는 무엇을 안 한다.’ 이러면 틀린 해석이에요.




아이, 참. 방금 중요한 것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난 어떻게 할까요? 나는 무얼 해야 됩니까, 나는 무얼 하지 말아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거는 백날 물어도 성경해석 잘못해요. 성경 천 독, 만 독해도 잘못된 겁니다.




성경은 내가 무엇을 할꼬, 안 할꼬 묻는 게 아니고, 너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어, 라고 묻는 거예요. 하나의 필드입니다. 한 식구에요. 빼도 박도 못해요. 하나님의 주어진 영역 안에서 우리는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걸 통째로 알아야 성경 아는 겁니다. 해석 되는 거예요.




흔히 교회에서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묻지요. 목사님, 집안에 우환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우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자꾸 묻는 게 내가 어떻게 하면, 또는 내가 무엇을 끊으면, 술 끊을까요, 담배 끊을까요, 어떻게 성경을 더 할까요, 헌금을 더 할까요?




내가 어떻게 안 하고, 어떻게 하고 이렇게 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에요.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느냐를 그걸 통째로 파악하게 되면 알게 되면 그게 하나님 영광이에요. 그게 하나님 영광이라고.




슬슬 더워지니까 이것도 녹음장치도 이제 바꿔야 되겠어요.




창세기 3장과 4장 이야기는 뭐냐? 우리는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는 이러한 확정된 영역 속에 놓여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3장과 4장입니다. 3장에서는 무슨 영역이냐? 3장에서는 우린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 안에 약속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 범위 안에서 우리는 못 빠져나옵니다.




4장에서는 뭐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라는 그런 하나님의 일 속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부한 사람은 거부당하고, 하나님께서 찾아온 사람, 받아들인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라는 그 원칙의 범위 안에서 우린 못 빠져나간다. 이걸 아시면 되는 거예요.




이제 그 정도, 어느 정도 정답을 아셨지요. 창세기 3장 끝부분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인데 어떠냐 하면, 우리는 왜 죽느냐? 내가 뭘 하면 안 죽을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내가 예수 믿으면 안 죽습니까? 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흙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에 있다는 걸 알면, 그게 하나님 영광이에요. 하나님 영광입니다.




사람은 왜 사는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산다면서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정해 준 자리가 내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화 되어 있다는 것을 그걸 수용하면 받아들이면 그게 하나님 영광입니다. 아, 나는 흙이네. 지금 생생하지만 죽으면 흙 되는구나. 아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해야 되겠구나. 어, 그게 우리 운명이네.




그리고 우리는 선악을 알아서 하나님께 쫓겨난 신세구나. 나 지금 선악을 알게 된 것도 이거는 내가 빼도 박도 못하게 선악을 알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그렇다면 이 선악을 알았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힘든 이 땅에서 저주받은 그런 신세로서 저주받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이것 당연한 거네. 하고 그것을 인정해야 되지요.




그리고 우리 힘으로는 생명나무 가는 곳을 기어 올라가지 못한다. 그것도 인정해야지요. 그게 영광이지, 하나님이여, 어떤 길로 가면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그걸 찾겠다는 것은, 자기 현재 주어진 것조차도 내가 거부하겠다는 것, 그건 악마적 발상에 불과한 겁니다. 악마에서 발생된 거죠.




창세기 4장에서 약간 어려운 게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그 번역이 사실은 원래 문구하고는 반대로 되어 있어요.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하와가 여자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도움으로’ 되어 있습니까, ‘말미암아’로 되어 있습니까?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인을 얻었다. 라고 하와가 이야기했다는데, 원 뜻은 그게 아니고, 주어가 바뀌어요.




하나님이 하와와 도움으로 씨, 어떤 가인, 씨를 얻었다. 어떤 남자를 얻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얻었다’가 뭐예요? 가인이에요. 하나님이 하와의 도움으로 뭔가 어떤 씨를 얻었다. 어떤 남자를 얻었다. 가인이란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얻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어렵다는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아기 이름을 딱 지을 때 그 아기 이름은, 아기 이름 속에 그 아기의 출생의 비밀까지 담겨 있는 이름이란 말이죠. 얻었다는 이름을 가져요. 얻었다는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는 우리가 애써서 건졌다는 이름이 아니에요. 그냥 주웠다 말이에요. 그냥.




그게 제가 아까 강의 처음부터 시작한 모든 세상에 모든 일어난 일은 다 누구 소관이라 했습니까? 하나님 소관이죠. 그렇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이런 아기란 어떤 남자가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그저 거기에 도구가 될 뿐이고, 결국 내 배에서 새끼도 바로 누구 새끼다? 하나님 새끼고, 하나님 새끼 이상하다. 하나님 씨고, 하나님 아들이지 우리가 애써서 만드는 건 아니올시다. 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게 바로 이런 정신이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우리는 왜 사느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러니까 제 말대로 이걸 믿게 되면, 제 말대로 믿어서는 안 되지만. 주의 뜻을 믿게 되면, 어떠냐 하면, 내가 무얼 해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승진해야 어떤 위치에 있어야 나는 비로소 사람 사는 것 답게 되느냐? 라는 그런 심적인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어느 구석에 어떻게 굴러가고 어느 나라에 가서 어느 고장에 가서 처박혀도 거기 있더라도 바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합목적성, 목적에 부합하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그걸로 되었다고요.




너무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교인들이 자기를 너무 괴롭혀. 이 바보등신아, 니가 성경을 안 보니까 이런 벌을 받았잖아요. 자꾸 만만한 게 내라. 만만한 게 내고 만만한 게 때릴 게 자기밖에 없으니까 자꾸 자길 때려요. 그때 행동, 말씨를 이렇게 했더라면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안 왔을 텐데 니가 행동 잘못해서 그렇다고, 자꾸 자기를 자학하고 자기를 핍박하고 자기를 못 살게 굴고. 만만한 게 자기라.




사실은 하나님 때리려 하니까 너무 주먹이 멀어서 못 때리니까 가까운 자기를 때리는 거예요.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때리면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사실은 부족한 게 아니고, 이 못난 놈아. 조금 잘 할 수 있었는데. 이런 뜻 아닙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의 끊어 오르는 욕망을 자기가 삭히지 못해서 아주 그런 발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욕심이 사람이 범죄한 것이 욕심 때문이라고 야고보서에 나와요.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어요. 이 욕심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된다 할 때는 그걸 욕심이라 합니다. 이게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의 특징이에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윤리적 도덕적 짐에서 벗어는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완벽하냐, 얼마나 거룩하냐? 그거 자체가 마귀의 시험에 홀딱 빠진 증거에요. 주를 위해서 살면 그만이지, 내가 왜 나를 근사한 나로 왜 자꾸 탈피하려고 근사한 나로 만들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수상하지 않습니까? 굉장히 수상해요. 내가 보니까. 왜 자기가 근사한 자기가 돼야 돼요.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야 돼요. 누굴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면 그만이지, 왜 독자적으로 따로 떼어내서 내 자체가 왜 이렇게 멋있지? 라고 왜 하느냐 말이죠.




성경을 해석할 때 하나님 뜻이 뭐냐? 이걸 알면 되는데 꼭 사람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어떻게, 꼭 남하고 비교해요. 남하고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그건 정답 자체가 진리가 안 나옵니다. 거기서는. 저 사람하고 낫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에요. 저 사람보다 못 한다고 해서 비진리가 아닙니다. 남하고 비교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남하고 비교해서 뭔가 거기서 진리와 비진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원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범죄한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준 치마를 입으면서 느꼈던 것은, 이 치마까지 자기가 만든 무화과나무 치마 획 벗겨버리고 하나님이 취해 입혀준 그 가죽옷을 입혔다는 자체가 이게 하나의 배치거든요. 온통 온 몸, 자기의 몸부터 이마에 땀 흘리는 것, 여자가 얘기 낳으면서 해산의 고통 갖는 것, 자기한테 일어나는 모든 사태, 사태, 사건 하나하나가 전부다 하나님은 여기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있다,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거는 온통 더덕더덕 갖다 붙인 게 돼요. 걸어 다니는 계시에요. 아담과 하와 자체가.




그 계시 가운데 하나 추가된 계시가 뭐냐? 하나님의 도움으로 또는 하나님이 아담의 도움으로 뭘 낳았다? 가인을 얻었다. 그것 또 새로운 계시가 거기서 자기가 솟아나는 겁니다. 하나의 화산처럼. 화산에 있는 마그마가 감춰 있다가 폭발하면 벌건, 벌건 석탄불이나 벌건 마그마가 막 튀어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속에 나도 모르는 어떤 내장된 하나님 뜻이 있다면,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걸 통해서 폭발하듯이 뭔가 퍽하고 터지면서 나도 차마 미처 몰랐던 것이 나를 통해서 폭발해서 나오죠.




그게 뭐냐? 가인을 얻은 거예요. 좋아했지요 뭐, 좋아했지요. 여자의 후손에서 씨를 낳았고 그 씨가 악마를 이긴다. 뱀의 후손을 이긴다 했으니까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것도 내 뜻이 아니고, 누구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또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번역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실제로는 하와는 그렇게 이해 안 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움으로 자기 씨를 낳았다. 이렇게 이해할 정도로 온통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그런 믿음이 있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하와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고백이에요.




그런데 그 가인이 진짜 하나님의 씨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하와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또는 하나님이 나의 도움으로 가인을, 어떤 남자를 얻었다는 고백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있지요.




이거 참 중요하네. 분명히 그 가인은 구원받은 가인이 아니지요. 그러면 틀린 거지요. 그렇다면 틀렸다고 해서 하와가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통해서 틀린 말만 해요. 우린 틀릴 수밖에 없는 행동과 말 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런 고백조차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아, 이게 어려워서. 정리가 돼야 될 건데. 이게 지금 그냥 맹물이죠. 아따, 참. 이거 생강차 맛있다. 이렇게 했다 말이죠. 목사님, 그거 생강차 아니고 맹물인데요. 아이고, 이제 보니까 맹물이구나. 이렇게 했다 해서 맛있다가 틀린 거예요?




지금 하와는 감동해서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그러한 솔직한 고백을 드러내는데 그게 불신앙입니까? 진짜배기 신앙이죠. 진짜배기 신앙이라는 것은 진짜 진리가 나온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그러한 인간적인 그런 불성실하고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걸 믿는 믿음으로 간주해 주신다는데 그게 축복이 있어요.




또 하나 예를 들게요. 창세기 37장 20절에 보면,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심심한데. 읽어보세요.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아멘.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아멘 하면 곤란하지만. 요셉이 형들에게 오니까 형들이 평소에 요셉이 꿈꾸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물론 요셉의 형들이 보면 그 꿈은 개꿈이에요. 혼자 착각한 거라. 뭐, 짚단이 자기에게 절하고 별이 자기에게 절하고. 에라이, 개꿈 꾼 놈아!




그래서 뭐냐 하면, 요셉이 꿈을 꾸었으니까 요셉 주장대로 하면 요셉이 있는 한 그 꿈은 계속 이루어질 것 아닙니까? 그러면 반대로 요셉을 죽여 버리자 말이죠. 그 꿈은 어떻게 됩니까? 날아가 버리죠. 그죠? 날아가 버린다고. 실제로 그렇습니까? 요셉을 죽으면 요셉 꿈이 날아가 버립니까?




누가 뭐래도 요셉이 죽은 사람이라고 간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냐?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이미 형들이 짐승의 피를 바른 요셉 옷을 보고, 채색 옷을 입고, 이미 요셉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 사랑했던 아들, 요셉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얘들이 열한 명이 아니고, 열 명 밖에 없어요. 왜냐? 분명히 죽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요셉이 안 죽고 살아있다 하는 것을 나중에 알잖아요. 그렇지요? 그때 요셉은 뭘 느낍니까? 하나님께서 사람과 협조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생각을 뒤엎는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야곱은 어긋맞게 하죠. 자리 바꿔서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일부러 자리 안 바꾸고 이렇게 어긋맞게 하는데, 어긋 맞는데 여기에 의미가 있어요. 나는 이런, 이런 하나님 정식으로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의 뜻을 거꾸로 돌리시는 하나님인줄 이제 알았다. 하나의 배치들이었어요. 배치.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의 계시를 둘로 갈랐어요. 평생 동안 형을 속이고 또 속이고 형한테 팥죽 팔아서 장자 빼내고, 아버지 속여서 형에게 돌아갈 축복 자기가 빼내는 모든 인간적인 것, 그 모든 것이 자기는 하늘의 축복받은 비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그런 인간적인 오류와 얍삽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걸 하나의 배치로 사용하시되 그걸 거꾸로 사용하시더란 말이죠. 그게 십자가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이렇게 해서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되는데,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그 다음에 자기를 뭐 나옵니까? 비워내지요. 이 세상에 자기를 비어낼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를 비어내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성공한 예를 없어요.




자기를 들어낼 수 있습니까? 들어낸다는 말은 노출한다는 말이 아니고, 덜어낸다. 비빔밥 이렇게 같이 해놓고 덜어주잖아요. 더 먹을래, 더 먹을래. 더 먹어라, 야. 자기 밥그릇의 비빔밥을 비빈 것 덜어주듯이 자기 속에 자기를 덜어낼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그거 불가능하지요.                 




예수님도 자기 힘으로 불가능해요. 예수님은 누구의 힘으로 그렇게 덜어낼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에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난 뒤에 자기를 덜어내는 일에 나섰습니다. 어디까지?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것도 그냥 화려하게? 아니. 처참하게, 처참한 몰골로. 모든 인간들의 비웃음과 뺨까지 얻어맞으면서. 뭐 하기 위해서? 자기를 덜어내기 위해서. 자기 알맹이를 다 끄집어내기 위해서.




자기 끄집어낸 거기다 종의 형체, 그것도 그냥 종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죄 짓지도 않은 본인에게 죄가 들어와요. 그 장소에. 죄가 들어오면 뭐가 따라 들어옵니까? 저주가 들어오죠. 그 저주가 무슨 죽음이었습니까?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이게 신약성경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창세기 3장, 4장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 안에 들어있어요. 이걸 끄집어내야 돼요. 끄집어내려면 우리가 무엇을 할꼬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작업을 벌이는 영역 속에 놓여 있는가? 그 범주 속에 놓여 있는가?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돼요.




큰 대야에 그걸 경상도 말로 ‘대집이’라고 하지요. 큰 대야에 물이 있는데 그 물에 이런 먼지가 떠있고 뭐가 떠 있더라도 그대로 마셔야 버려야 돼요. 뭐, 골라내고 골라내서 이건 내 안 하고, 이건하고 그래서 나는 정답이고, 정답은 먹고. 이게 안 돼. 정답이고 뭐고 그대로 마셔야 돼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그냥 다 마신 거예요.




그게 무슨 잔이라고 합니까? 쓴 잔을 마신 거예요. 그냥. 내가 골라서 뭐, 이거 어떻게 피하는 방법 있습니까? 아이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내가 종이니 그냥 마시겠습니다. 그 쓴잔을 그냥 마셔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이 이거는 나만 마시는 것이 아니고, 장차 너희, 제자들도 너희들도 나의 쓴 잔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너희도 마실 것이다.




그리고 빌립보서에 너희는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자기를 비워내는 끄집어내는 그 마음을 우리가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도 동일하게 해야 돼요. 뭐냐? 자기를 낮춘다? 아니에요. 자기를 뭐, 훌륭하게 (      ) 아니고, 내가 하는 짓거리는 말도 안 되는 오류와 그런 욕심밖에 없습니다. 불구하고 주께서 그대로 용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것보다 더 큰 예수의 마음이 없습니다.




뭐, 고아원 방문해서 연말연시 갖다 주고 이게 예수의 마음이 아니고, 나는 정말 나 밖에 모르는 말도 안 되는 인간인데, 그런 인간 속에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이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배치며, 우리가 속해진 영역이며 내가 빼도 박도 못하는 내가 정초해 있는 내가 딱 여기에 존재해 있는 그러한 하나의 활성화된 예수 안의 영역이라는 것을 그대로 마시는 거예요.




마시게 되면 그 사람은 어디 안에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 안에 있지요.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고, 바깥의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 바깥에 있겠지요.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바깥을 보면 바깥의 사람은 죽은 놈이죠. 십자가 바깥에 있는 인간들의 십자가 안의 사람들 바라보면 맨 날 죽었다 하니까 죽은 놈이고. 양쪽 다 서로 죽은 놈이래.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날마다 죽는다고 이야기하고, 주께서 날마다 죽인다고 이야기하고. 왜? 그게 자기를 비우는 모습이니까. 십자가 안에서 바깥을 보니까 저건 백날 살아도 그건 왜 사는지, 뭐 때문에 사는지, 하나님이 계신지,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어디로 때려죽이는지도 모르고 넓은 길로 쫓아가는 이미 죽은 놈들이고.




그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죽고, 나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고. 서로 죽은 자에요.




안 죽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죠. 예수님이 죽이겠다는데 안 죽겠다고 버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역 자체가 그걸 용납 안하는 영역이라서 그래요. 우리는 지금 맨 날 오류하고 아까처럼 하와처럼 말이죠. 야, 얻었다. 여자의 후손을 씨를 얻었구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었구나. 라고 했지만 나중에 어린애 하나 더 얻어버렸어요. 얻었으니까 하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그래서 두 번째 아이 이름이 뭡니까? 허무하잖아요. 아벨 아닙니까. 허무하잖아요.




이것은 출생의 비밀이 담겨 있는 거예요. 그 이름에는. 자식 하나만 있으면 그 여자의 그 뱀을 이길 힘인 줄 알았지요. 하나만 더 태어나 버렸으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허탈한 거죠. 처음에 얻었다고 좋았다고. 그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얻었다고 좋다했던 것이 자기를 허탈하게 허무하게 만든 거예요.




이렇게 자기가 허무하게 되면 결국은 일은 누가, 약속은 누가 이루어야 됩니까? 뭔가 하와가 도움 줘서 아담이 협조해서? 아니에요. 하나님이 홀로 이뤄나가시는 일로써 우리는 그냥 혜택만 입을 뿐이죠. 우리는 그냥 허탈과 허무를 느낄 뿐이고. 아, 내가 개뿔도 한 것도 없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는 가운데서 나는 죄 진 것밖에 없는데 주께서 내 죄를 대신 짐으로 말미암아 그 효과로 주께서 홀로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가 영생 얻었구나. 하는 것을 신약  뿐만 아니고, 구약에서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창세기 4장 초반부터 그게 쫙 깔고 나가죠.




3장, 4장 전체를 합해보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합해보면 요지가 뭐냐? 어쩔 수 없는 이미 영역 속에 하나님 주신 배치 속에 인간은 빼도 박도 못하고 거기 놓여 있다는 그 현실.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딴 게 믿음이 아니에요. 내가 뭘 한다가 믿음이 아니라 주어진 대로 주어진 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나, 그렇다면 내가 사는 목적이 뭡니까? 주어진 대로 살아가야 된다가 아닙니다. 갈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이 졸지에 한 40억 유산 받는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끼죠. 주여, 내가 40억 달라고 요청한 적 없는데 주셨군요. 돈이 40억 생긴 게 문제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다시 새삼 실감나게 하죠.




그런데 그 날, 몇 년 뒤에 40억 몽땅 가져갔을 때 다시 한번 돈 날아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것을 또 느끼게 하고. 그 다음 다시 자기 존재의 목적, 내 사는 목적을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를 비우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나는 이 모습, 이 꼴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왜 키가 작나, 어떤 사람은 왜 키가 크나, 쌍꺼풀이 왜 있느냐, 없느냐? 쌍꺼풀이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살아야 되고,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집안 대대로 DNA 그래서 젊을 때부터 간이 안 좋아. 할 수 없잖아요. 할 수 없어요. 어떤 당뇨 걸리고 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거 걸렸다고 뭐, 하나님 저주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지옥 갈 저주 받은 건 딴 게 아니고, 내 힘으로 그걸 극복하려고 애쓰는 종교적인 노력, 그게 바로 지옥 갈 사람의 모습이고 특징입니다.




왜 범사에 감사하지 못 합니까? 왜 그걸 감사 안 할 걸로 치부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감사하라고 줬는데 지가 뭔데 이건 감사하면 안 되고, 지가 왜 치웁니까? 물론 사람인 이상은 즉각적으로 감사는 안 나옵니다만.




잠언서에 이런 말 있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요. 그럼 문제 나갑니다. 아홉 번 넘어지면 열 번째 일어날까요, 안 할까요? 영역 자체가 주님이 있는 영역이라면, 이거는 아홉 번이 아니고 칠백칠십 일곱 번 넘어져도 칠백칠십 여덟 번 태어나야 돼요. 왜냐하면 영역 자체가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해요. 우리가 어떻게 다룰 수 없는 영역이에요. 우리 손에서 이미 벗어난 주께서 지배하는 통치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자, 이제 4장에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자, 이제 두 아이의 운명은 이제 부모 손에서 떠났습니다. 왜? 허무하다 했으니까. 아벨은 허무하니까 아벨에 대해서 부모가 새삼스럽게 개입할 거는 없습니다. 그냥 손을 떼는 게 좋지요. 그렇다면 아벨과 가인의 그 운명이라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미처 몰랐던 자기의 잠복되어 있던 본성이 독사의 갈라진 혀처럼 둘로 갈라져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 속에 뭐가 있느냐? 아담과 하와 속에 이미 서로 협조될 수 없는 화합될 수 없는 결합될 수 없는 갈라진 두 개의 노선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또 하나는 뱀의 후손. 이것이 잠복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요청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저로 하여금 약속의 자손이 되게, 이래 요청한 게 아닙니다. 아담이 있다는 자체가 이미 그거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그 안에 컴퓨터 칩처럼 그냥 심어 놓은 거예요. 자기가 빼질 못합니다.




이것은 아담이 스스로 그 운명을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심어져 있는 하나님 약속의 정보와 아담과 하와의 운명과 그 후손의 운명을 결정짓고 마는 겁니다. 자기는 다만 거기에 하나의 매개체에요. 매개체라는 의미를 아시겠지요?




여기 보일러 같으면 파이프가 있잖아요. 물이 찬 물이 흐른다. 뜨거운 물이 흐른다. 파이프로서는 어쩔 수 없지요. 흘러 가는대로 흐를 수밖에 없지요. 물론 파이프 없으면 물은 안 흐릅니다. 하지만 파이프가 있는 것 때문에 뜨거운 물이 찬 물로 변하는 건 아니고, 그냥 파이프로써 존재할 뿐이지요.




이걸 간단히 말하면, 제발 당신의 증인이 되지 말고 주의 증인되도록 하세요. 그 말이에요. 당신의 증인. 목사가 설교할 때 그 설교가 본문해석이 어떻고, 문법이 어떻고, 문학적 해석 아무리 해도, 뭐 복잡하게 해서 유식한 척 해도 뭘 증언하고 싶은 거야? 라고 딱 물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이런 걸 증언하면 바리새인처럼 되잖아요.




어떤 본문을 설교해도 뭐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은 복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그 복음이라는 게 뭐예요? 십자가 복음 아닙니까? 어떤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가 나오지 않다면 그동안 지금 실컷 3,40분 설교해놓고 도대체 당신이 파이프로써 뭘 지금 어떤 장난을 쳤느냐 말이죠.




진짜 복음의 파이프라면 십자가 복음이 흘러들어가서 흘러 통과해서 복음만 튀어나오면 되는데 무슨 파이프가 장난을 쳐서 십자가 복음으로 안 되고 행함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래 방종했습니다. 이래 나온다는 것은 뭔가 보통 수정한 게 아니잖아요.




요란스럽게 신학적인 모든 걸 투자한다 할지라도 결국 뭘 증거 하고자 하느냐? 자, 여러분 이거 전했습니다. 오늘밤에 돌아가셔도 여러분 낙원에 가 있습니다. 할만한 게 십자가 복음 밖에 더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 했으니까 저주냐, 축복이냐? 하는 것은 복음으로 십자가 복음으로 규정될 문제지, 다른 건 문제 거리가 안 된다 이 말이죠. 설교자가 말을 더듬는다든지 분명치 안다든지 그런 건 문제 안 돼요.




중요한 것은 거기에 십자가 복음만이 깔끔하게 나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십자가 복음만 나오려면 설교자가 자기 임의로 자기가 들어가면 안 돼요. 거기에. 역시 파이프가 좋으니까 역시 복음이 괜찮게 나오는군. 이러면 안 된다 말이죠. 파이프가 좋은 게 어디 있어요? 파이프는 안 새면 천만다행이지. 물이 좋아서 좋은 거지, 파이프가 좋은 게 아니잖아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베드로가 한 말이에요.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얼마나 싹 들어갑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지 파이프 벗어나서 어떤 가로막는 짓을 했지요?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나는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 하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나를 짐 지고 따라오려면 뭘 해라? 너처럼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그 따위 사고방식이 있는 걸 부인해야 돼요. 부인한다는 말은 다른 구절에 보면 자기가 절 죽이라 이 말이죠.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따라오면 그것이 충실하게 주님의 파이프 역할에 충분하다. 그렇게 됩니다. 그게 하와와 아담이 처한 실존하고 동일한 실존입니다.




그렇다면 하와와 가인의 문제는 누구 손에 넘어갔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가르칠 문제가 아니지요. 가인아, 이리 오너라. 아벨아, 이리 오너라. 제사 드릴 때 양 잡아라. 이렇게 가르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과를 미리 안다면 커닝을 해 주겠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을 어떻게 다룰지, 어떻게 다루어야 될 그 문제는 하나님만 알고 계시고, 심지어 친아버지인 아담과 하와도 도통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사전에 정보를 빼낸 적이 없어요. 정보를 파악한 적이 없습니다.




이거 조금만 더하고 쉽시다.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을 대라면 간단해요. 가인은 제사 자체를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제사, 그것을 포기를 못했습니다, 가인은. 내가 드린 예배, 내가 드린 제사, 내가 드린 헌금, 내가 드린 전도, 내가 드린 헌신, 봉사, 내가 바친 어떤 예물. 나라는 것을 빼질 못했어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자기를 비워서 종의, 자기를 비우질 못했어요.




그런데 아벨 같은 경우에는 그 예물하는 그 예물이 아벨은 자기가 결정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대로 예물을 드렸어요. 그게 창세기 4장에는 안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가르친 대로 드렸다는 말은 안 나오고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4절에 나옵니다.




11장 4절에서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예물의 차이점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물의 차이점인데 아벨은 예물을 어떻게 드렸느냐 하는 그건 안 나오지만 아벨은 예물을 드릴 때 뭐로 드리느냐 하면, 믿음으로 드렸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드렸다고 돼있어요. 돼있지요?




여기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라는 게 행함에 포함된 믿음이 아니에요. 행함의 일종으로서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뭔가 있는데 뭔가 원주체자는 계시고 원주체자가 보이지 않는 형태로 계시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뭔가 벌어진 일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말해요.




믿는 내가 주체가 아니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보지 못한 거니까 같은 말로 안 보이는 것. 내 말 틀린 것 아니지요. 보지 못하는 것은 안 보이는 거니까. 안 보이는 것의 증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고, 뭐가 더 중요하다? 안 보인다는 게 더 중요하다. 뭔가 이끌리고 있고, 뭔가 머리 위에서 지시 받고 어디서부터 명령 받고 있고.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벨이 누구로부터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다는 증거는 뭐냐? 딴 게 없단 말이죠. 아벨이 드린 예물이 이거는 인간의 손에서는 나올 수는 없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손에서 나올 수 없는 걸 뭐라고 하느냐? 믿음으로 드렸다 이렇게 돼요. 믿음이 아니면 그런 예물이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한 가지 예로 노아가 방주 만드는 거, 자기 집안끼리 의논해서 만들었습니까? 노아가 설계도 어디서 얻었습니까? 그 당시 다른 민족에서 그런 배 만드는 게 유행돼서 그래요? 아니에요. 그러면 세상에 아브라함이 독생자 바치는 게 자기 아이디어 입니까? 야곱이 침상에서 손을 어긋맞게 축복하는 게 자기 아이디어에요? 모세가 애굽의 바로의 공주의 모든 보물을 거부하고 자기 백성과 고난 받기를 원했던 것이 자기 아이디어입니까? 사사기에 있는 모든 입다라든지 이 사람들이 승리할 때 자기 아이디어로 했습니까?




이 모든 것에 공통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은 뭐냐? 누구로부터 지시받았다. 그 믿음의 실체가 뭐냐? 히브리서 11장에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지시의 당사자였다. 명령했던 당사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한 걸음 더 나가서 단순히 명령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예물이 장차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모자이크의 한 조각을 구성한다는 거예요. 예물이 조각을 구성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물이고, 예수님은 방주고, 예수님은 죽어야 될 독생자고, 예수님은 애굽의 보화를 거부해야 될 사람이고, 예수님은 톱에 켜 죽어야 될 분이고, 그거 히브리서 11장에 다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유리하고 방황하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요.




다만 앞에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은 그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여러 가지 속성 중에서 일부를 자기 인생에 담은 겁니다. 왜? 하나의 그 사람들이 사는 이유기 때문에 존재하는 이유기 때문에. 아담처럼 배치, 배치된 믿음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벨은 믿음이라는 환경이 지배하는 배치 속에 있었기에 아벨의 예배는 가인의 예배와 달라야만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그 이유로. 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여줘서 문제였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고 예수님 아닌 것은 안 받습니다.






5분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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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200703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3-17 4824
246   20070306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3-17 4968
296   200700403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메시야 … (1) 한윤범 07-04-11 4352
297   2007004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인자, … 한윤범 07-04-11 5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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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woorich070224a-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1) 녹취 한윤범 07-04-30 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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