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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7 12:37:15 조회 : 4824         
200703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라의 윤리(1) 녹취 이름 : 한윤범(IP:61.73.20.111)
 

200703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라의 윤리(1)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제 구, [하나님나라의 윤리]




이런 거 교재 가지고 공부할 때는 여기에 있는 교재 정도는 글 정도는 사전에 다 읽어보셔야 됩니다. 안 그러면 윤리에 대해서. 왜냐하면 이 귀한 시간에 이것 펴놓고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신학교처럼 설명할 수는 없거든요. 누가 누구 한 거 있었고, 도드가 어떻고, 이런 거 다 설명하려면 시간 낭비고. 이걸 일단 다 읽어보셨다고 간주하고 강의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플러스알파가 더 되니까. 시간낭비가 안 되니까. 이건 다 기본적으로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 추가적으로 돼야 되는데.




근본적으로 여러분 다 읽어 보셨으면 알겠지만 이 사람이 무슨 소리 하는지 본인이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이 글 읽어보면. 왜 그러냐 하면 윤리하고 하나님나라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관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신학적인 성경신학에 성서신학, 신약성서신학의 신학계의 분위기가 상관있어야 된다는 쪽으로 흐르면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상관있어야 되는 줄로 그렇게 알아요. 그게 이제 ‘패러다임’이라는 건데.




진리라는 것은 거기의 전문가들이 남보다 더 많이 두는 전문가들이 진리를 결정해서 새로운 진리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그 다음에 또 새로운 돌발적인 사태가 나오면 다시 우르르 몰려나오고, 그런 겁니다. 한국영화가 [괴물]해서 떴잖아요. 지금 관객 없잖아요. 뭐 뜨면 우르르 몰리듯이.




신학하는 사람들이 자기는 성경에서 바로 뽑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꼭 여호와증인하고 비슷하지요. 성경에 진리가 있으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걸 문맥상 바로 뽑으면 그게 신학으로 나온다. 뭐 딴 거 섞지 않고 바로 뽑으면 신학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뽑을 때 자기가 무슨 선입관이 있다는 것을 뽑는 사람이 몰라요. 나는 제대로 뽑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선입관을 가지고 뽑는다고. 그 선입관이 아까 이야기한 신학적인 이슈가 이미 강하게 압박을 가한 상태에서 이들과 신학계 인사들과 의사소통이 되는 요소들을 성경에서 따로 뽑는 겁니다.




한 때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이래 가지고 뽑던 반면에 이 사람 글 쓸 때는 뭐냐? 윤리. 신학이 성경이 이 현대인에게 어떤 윤리적인 지침서가 될 수 있느냐? 거기에 교회들이 요청하고, 그 요청한 것을 신학자들이 뒤받침 하기 위해서 거기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이걸 ‘게슈탈트’라고 합니다. 게슈탈트라는 것은 똑같은 환경이 오더라도 자기가 관심 두는 것은 뚜렷하게 인식하면서 나머지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여러분들이 지하철 탈 때 지하철 승강대에 있으면 저 맞은편에 다른 방향으로 반대 방향으로 사람들이 서 있지요. 어떤 분들은 또 어떤 때에는 그 사람들이 날 보는 것 같아서 어디 몸 둘 바를 몰라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상대방이 사람 있다는 게 의식 안 됩니다. 기차만 생각하고 자기 갈 방향만 생각하지, 상대방이 저쪽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앉아서 보면 바로 마주보면 이거 뭐,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어떻게 빨리 열차가 오기만 기다리죠.




이건 뭐냐? 관심 두는 것에 따라서 다른 것은 그것이 전면에 등장하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깔린다는 거예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특정부분에 관심을 두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특정부분이 양이라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음이 돼버려서 배경이 형성해 버립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똑같은 장소에 열 번을 가도 똑같은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본문을 백독을 그 부분만 해봐도 백독할 때마다 관심이 달라요. 같은 본문을 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같은 본문을 설교하면 열 가지 똑같은 설교가 나옵니다. 그러나 정말 성경 말씀이 남을 가르치는 용도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용도로 보게 되면, 자기의 처한 환경에 따라서 그 말씀이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지요. 새롭게 다가와서 그걸 증거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묵시적 우발성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지금 김용옥 씨가 문제점이 우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지 아닙니까? 성경 자체에 어떤 능력이 안 나온다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그 뭐고?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에 위배하는 거죠. 말씀 자체에서 말씀의 능력이 나온다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김용옥 씨는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하나의 교훈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썼던 거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가 이 말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참으로 옳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대로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다가 정 목사님도 대화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복음을 아는 목회자들이 제일 난처한 경우가 뭐냐 하면, 복음을 모르는 목회자하고 이야기하면 말씀이 잘 이야기했어요.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죠. 복음을 모르는 목회자는, 불신자죠. 불신자를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누가 있어요? 자기 목회자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럼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해서 전달하면 불신자가 신자가 될 수 있어요. 불신자가 신자가 돼버립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기의 목회자의 자기의 노력과 공로가 개입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뭐냐? 돈 내놓으라는 소리를 할 수 있다 말이죠. 내가 도와 줬잖아요. 라고 돈 내놔. 하고 할 수 있는 아주 떳떳한 정당성이 부여되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목회자들은 내가 말씀 전하고 싶어도 교회까지 찾아오는 것도 공로가 성령의 공로고, 그 사람이 믿는 것도 내 공로가 설교한 공로가 아니고, 성령의 공로고 그리고 신자 되어서 충성봉사해도 다음 주일날 교회 안 나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왜? 성령에 의해서 나 이제 교회 그만 다니고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따라서 당신은 나한테 복음 듣고 십 년 째 믿고 있으니까 이제는 나를 섬겨야지. 내가 목사가 어려울 때 애가 아플 때 뭔가 월급이 이것 밖에 안 돼서 애 못 키우는 걸 대충 눈치 잡아서 이제는 당신들이 도와줘야지. 라고 요구할 떳떳한 정당성을 복음을 아는 사람한테는 본인이 정당성을 가질 수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아는 목회자는 여러 가지의 복음을 안다고 치고, 여러 가지의 자기 나름대로의 목회자의 정답이 있단 말이에요. 뭐냐 하면, 당장 죽어도 한 인간이 은혜로 산다는 거, 그리고 전할 수 있도록 건강주신 것도 성령의 주님의 은혜지 어떤 내 이익 위해서 못 전한다는 거.




그리고 실컷 교회 부흥해도 추방되거나 또는 쫓겨나거나 또 이혼 당하거나 하더라도 그걸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 스데반 집사처럼. 이것을 평소에 자신한테 세뇌를 시키고 있지요. 늘 이래야 복음을 아는 목사지, 남 전해놓고 나중에 나는 남한테 실컷 복음 전해 놓고 오히려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처럼.




이런 식을 이걸 이미 알고 잇는 상태에서 지금 말씀을 아는 상태에서 말이죠. 이건 자기 생각입니다. 그리고 현실로 딱 돌아와요. 현실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처음 복음을 들을 때 좋습니다. 하고 식사 같이 합시다. 해놓고는 어떤 사람은 일 년 가고 어떤 사람은 육 개월 가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복음 듣기 위해서 11시 예배에 10시 반에 나오던 사람이 육 개월도 한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11시 10분에 나와요. 그 다음부터 일주일 지나면 두 번 빠져 먹습니다. 일 년 지나면 교회 안 나와요. 왜 안 나오느냐 하면, 다 아는데 뭐. 이러고. 학원이야, 학원.




빵 학원 몇 개월, 육 개월 배우면  코스 끝나잖아요. 교인들이 자기가 코스를 정하는 거예요. 이 교회, 복음 아는 교회가 몇 개월만 하면 저 목사 무슨 소리 하는지 내가 빠삭하게 알아먹는가? 육 개월 잡자. 육 개월 잡고 난 뒤에 그 동안에 수강료 몇 번 좀 내고 그 다음은 수강료 냈으니까 다 알았으니까 안 나오는 거예요. 이게 현실이라니까. 이게 현실이에요.




처녀, 총각들 개척 교회할 때 재미있지요. 말합니다. 복음 때문에 재미있다 합니다. 목사도 그러리라고 생각했거든요. 복음 때문에 재미있는 게 아니고, 저희끼리 사귄다고 재미있는데 복음 때문에 재미있다고 자꾸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럼 목사는 그것도 모르고 복음을 좋아해서 이렇게 사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해보니까 복음 때문에 사귀는 게 아니고,




같은 간섭 안 하고 지 마음대로 노는데 대해서 복음으로 뒤에 다 카바를 해주니까. 그래도 용서받습니다. 다 카바 해주는 이 재미로서 저희끼리 지 마음대로 하고 노는 그 재미, 그 재미가 있어서 나중에 그 사람들이 커 가지고 한 십 년간 같이 목회하면 이제는 말씀 듣는 시간에 말씀 관심 없어요. 백 날 해봐야 다 아는 이야기인데. 백 날 해봐야 다 이야기지, 이카거든.




그리고 교회 성장 뭐하는데 하는데 교회 부흥 왜 하는데. 그리고 누구 하나 교회 들어오면 인사도 안 해요. 인사도 안 해요. 저거 보나마나 불신자인데 갈 건데 뭐 하러 인사하노. 가봐야 인사만 손해 보지. 이카고. 인사도 안 해. 그 교회 온 사람, 이 교회는 뭐, 말씀은 좋은데 인사도 안 하고 나 보고 오지 말라고 하고, 나 안 갈란다. 나가면 그쪽에서 봐, 불신자 맞잖아. 이카죠. 저희끼리 박수치고 있고.




이래 될까봐. 이런 것이 현실이기 뻔하다는 것을 복음을 들은 목회자가 알기 때문에 목회자가 복음을 포기해버렸어요. 내가 저기에 빠져들면 안 된다고. 그게 오늘 이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소속의 문제를 열매로 나타날 때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성경 말씀이 되는 건데. 이걸 어렵게 말하면 뭐냐 하면, 인간의 육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소속 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거예요. 자기의 소속에 관한 문제입니다. 소속에 관한 문제.




이 책을 내가 지금 세 번이나 읽었어요. 이 책의 내용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중구난방이에요. 본인도 무슨 말하는지 모르고. 여러분 아예 안 읽어봤는가. 일관성이 없어요. 이야기 스토리의 일관성이 전혀 없어요. 끝부분에 하는 이야기, 끝부분부터 먼저 봐야 돼요. 끝부분부터. 끝부분에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보상과 은총]이라는 대목 나오지요.




아까 이야기하던 것, 그 이야기 다시 해 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고, 복음적이다, 그래서 세 가지 있다. 하는 이것도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은혜로 이게 결과적으로 나와야 될 건데, 복음을 아는 지식을 소유함으로써 복음적인 목사가 되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이건 주님 앞엔 안 통합니다. 나는 이래야 되고, 이래야 되고, 이래야 되고, 이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복음적이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건 자기가 자기를 목자 세우려는 거예요. 




자기 몸을 굴려보고 어디든지 들어가야 되고 이렇게 굴리면 나한테 이런 모습이 나오다니, 하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으로 이 세 가지가 나와야 될 텐데, 이걸 미리 지식으로 완전히 자기한테 짓누르는 거예요. 너는 이렇게 돼야 돼, 너는 이렇게 돼야 돼. 그게 윤리입니다. 그게 윤리에요. 이 사람들이 하는 윤리라 하는 것은 성도다우려면 이렇게 해야 성도답다는 겁니다. 이거는 예수님 말씀과 전혀 관계없어요.




반대로 돼야 돼요. 나는 이것을 거부하고 싶은데 자꾸 이게 튀어나와야 돼요. 튀어나와야 된다고, 이런 게. 복음 안다고 해서 육 개월 만에 안 나오는 그 인간과 내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 인간과 만남으로서 잠시 육 개월 동안 만남으로서 깨달아야 되는 겁니다. 거 봐. 저 불신자잖아. 이래 되어서는 안 되고. 야, 어떻게 나하고 생각이 같으냐? 이래 돼야 돼요.




[보상과 은총]에서 이 사람이 일관성이 없다는 말은 끝에 포도원 비유로 끝나는 겁니다. 오늘 시간은 끝부터 봐야 돼요. 여기 보상과 은총, 다른 번역도 찾았습니까? 거기 보면 성경 구절 쭉 나오고, "그러나 거기에는 보상에 관하여 다른 곳에 말씀하신 전혀 다른 교훈이 있다. 예수께서 보상에 대한 응답을 하시는 가운데서 전혀 공로의 윤리에 대한 언급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목 찾았습니까? 비슷한 대목. 공로, 메리트라 하는 것. "진실로 보상은 그런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로 자체는 철저한 은혜이다." 그거 찾았습니까? "보상 자체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은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이 이 사람의 결론을 내려면 약간 복음적으로 보이지요. 사실은 복음은 아닌데. 앞에 있는 것이 이쪽을 쏠려야 됩니다. 앞에는 정리가 안 되어 있다고요. 본인이 정리가 안 되어 있어. 끝에 이렇게 된다고. 이 결론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뭐냐 하면, 보상 자체가 은혜가 아니라 일하게 하신 자체가 은혜에요. 일은 우리가 해야 되고 보상은 은혜라. 이러면 앞뒤가 안 맞습니다.




일한 것 자체부터가 은혜여야 보상도 은혜가 되는 겁니다. 아이고, 내가 어떻게 그런 교회에 일을 하다니, 내가 어떻게 그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했다니. 라는 것이 나올 때 그것이 내가 거기서 말씀을 전하게 된 자체를 하나님이 소속에 따른 내가 지금 천국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 따른 그게 상으로 주는 거예요. 해서 받는 상이 아니라 하게 하는 상, 일하게 하는 상.




빌립 집사가 에티오피아의 집사를 만나고 난 뒤에 얻은 건 무엇입니까? 없지요, 뭐.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있어서 상은 뭡니까? 그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만남으로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또다시 깊게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 본인이. 주께서 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황홀감. 누가 나를 위해서 보낼꼬? 저가 있나이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라는 것을 또다시 느끼게 하는 거예요.




사람에게는 기억이 있잖아요. 이 기억이 이건 다 엉터리입니다. 기억과 추억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느 설교에서 쓰레기통에 음식쓰레기라 했는데, 기억과 추억이라 하는 것은, 이건 버려야 될 것을 안 버리고 있는 게 기억이에요. 사실은. 그래서 우리 기억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신자다.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사실은 이것도 버려야 돼요. 내가 신자가 돼버리면,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의 기쁨이 사라져요. 신자니까 함께 있겠지. 이렇게 된다고. 내가 잘났으니까 함께 있어 줘야지.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돼요.




그래서 결론은 저는 바꿨습니다. 이 사람은 보상이 은혜로 온다고 했는데, 이렇게 보는데 보상이 은혜로 오는 건 없어요. 일하심 자체가 은혜가 될 때 그에 따른 보상마저 하나의 연결된 은혜인데, 일한 자체가 은혜라면, 그러니까 그게 보상이라면, 일하는 자체가 보상이라면, 앞에 있는 천국에서 일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를 그런 결론에 의해서 그걸 맞추는 새로운 여러 가지의 앞에 있는 절차가 있어야 돼요. 그렇게 나가야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천국이 무엇이냐가 밝혀집니다. 그때 천국이 무엇이냐가 밝혀져요.




그럼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일관성은 없다마는 중간 중간에 엉터리 같은 소리했느냐? 아니에요. 하여튼 좋은 소리는 다 뽑아놨는데 일관성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책을 보면서 이 사람 한 가운데서 바른 소리, 옳은 소리 한 게 뭐냐? 그걸 새삼스럽게 찾아내야 될 그런 수고를 또 해야 됩니다.




이 사람 한 이야기 중에서 많은 이야기가, 본인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 줄 모르면서 다른 신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이거 뭐, 옳지 싶어서 대충 넣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넣은 게 많아요. 그 많은 것 중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율법과 관련해서 나오는데, [예수와 율법] 번역 새로 한 사람 찾아보세요. 찾았습니까? 그 예수와 율법과 관련해서 이분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래드 이 사람이 뭐라 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셨다는 뜻은 하나님의 의는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고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되어 이제 자신의 선교사건으로 실현되어 나가는 과정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행위에 의한 매개되어진다.”라는 말을 했어요. 뭐는 아니고 했어요? 율법에 대해서는 아니고, 자신의 선교사건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이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거 어려워서 적어봅시다. 지금 이 사람 말을 보통 사람이 들으면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율법을 이룬다 했잖아요. 이 사람 말 그대로 해봅시다. 율법을 이룬다 할 때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뭐가 전제되어 있어야 돼요? 뭘 이룬다 할 때는 앞에 뭔가 이룰 목적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죠? 애야, 장난감 가지고 놀아라. 하면 장난감 있어야  갖고 놀 게 아닙니까. 그게 말이 되잖아요. 너는 화초에 물을 줘야 돼. 하면 물들고 줄 화초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화초가 없는데 물주라 하면, 엄마, 물 어디다 뿌려야 하는데.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율법을 이룬다는 말에 뭐가 필요합니까? 율법을 이룬다는 말을 하려면 반드시 뭐가  필요해요? 아니, 율법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율법이. 지금 기존의 성화론자, 칼빈주의자들이 뭐가 문제에요? 율법을 이루러 왔다 할 때에 반드시 어떤 경우에도 율법을 빼놓고 율법을 이뤘다는 앞뒤가 말이 안 된다  말입니다.  화초에 물주라 해놓고 화초 없애버리면 물, 마루에다 뿌립니까, 어디다 뿌리라는 겁니까?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래드는 감히 이런 말을 해요. 율법을 이룬다 해놓고 율법이 매개되지 않는다 한다 말이죠. 율법 빼버리란 말이죠. 그러면 칼빈주의나 저런 쪽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래 이야기하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율법을 빼는 게 아니고, 율법을 염두에 두고 방법은 자신의 십자가나 자신의 행함으로 하되 결국은 그건 뭐로 돌아간다? 율법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을 해야  옳다는 것이 칼빈주의자,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래드는 본인이 이해하든 이해 못하든 상관없이 지금 뭔 뜻으로 하느냐 하면, 율법은 매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걸 잊으라는 겁니다. 율법 자체를 잊으라는 겁니다. 칼빈주의는 뭡니까? 율법을 이어야지 왜 잊어버리느냐 이 말입니다. 그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차이점을 잘 알아야 되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공부해야 될 것은 두 개의 차이점은 그 논리가 어디서부터 다른 논리에서 나왔는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일한 자체, 보상 자체가 은혜라는 것이 나중에 결론적으로 나옵니다. 그런 것을 철저하게 분석하는데 이게 약간 굉장히 어렵고 난해해요. 논리적으로 어렵고 난해한데 우선 천천히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율법을 이룬다 할 적에 율법을 뺄 때 율법을 뺀다는 것은 뭘 빼느냐 하면, 율법은 대표적이 십계명이 아닙니까? 십계명은 누구한테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거잖아요. 율법을 뺀다는 것은 뭘 빼느냐 하면, 인간 자체를 빼는 걸 말합니다. 율법의 매개 없이 예수님이 자기 선교적 사건으로, 여기 나오는데 거기 그 대목 한번 볼까요? 해석이 그렇게 되어 있는데, 여긴 171페이지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의는 더 이상 율법으로 매개되지 않고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되어서 이제 자신의 선교사건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행위로 매개되어 있다." 그 대목이 그렇게 번역되어 있어요. 찾았습니까?




그렇다면 이 대목을 그림으로 해보겠습니다. 그림으로 보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율법, 율법하면 어려우니까, ‘십계명’합시다. 십계명을 통해서 그걸 누구한테 전달했다. 사람에게 전달했죠. 거기서 나온 결과가 뭐다?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 라는 그것이 율법을 주신을 하나의 의미라면, 율법을 매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고리 전체, 연결된 사슬 전체를 철거한단 말 아닙니까? 그럼 뭐도 철거당해요? 이 뒤에 인간도 같이 철거당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없이도 의가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지금 래드가 하는 이야기가 그겁니다. 인간이 없이도 의가 나온다, 안 나온다? 천국의 의는 충분히 나온다 이 말입니다. 로마서 3절 21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율법 외에 한 의 아닙니까? 인간 없이도 의가 나온다 이 말이에요. 지금 래드가 이 이야기할 자기가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인지 본인은 잘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이걸 진짜 믿는다면 제목에 윤리라는 게 없어져야 돼요. 하나님나라에 윤리가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윤리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윤리를 집어넣으면 율법 자리에 천국을 집어넣고 사람 자리에 윤리를 집어넣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의를 요구한다. 그래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국 사람에게 니가 시민이냐, 천국백성이냐? 백성입니다. 그럼 이런 의를 행해. 라고 요구하는 게 돼요. 요구하게 된다면, 반드시 따라오는 게 뭡니까? 여기에 순종해야 되지요.




그런데 밑에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매개하지 않으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요구하는 게 없고, 요구하는 게 없으면 뭐가 없습니까? 순종이 없잖아요. 그런데 래드의 앞의 글을 보세요. 덤벅이 덤벅이 계속 나오는 게 뭡니까? '순종하라' 이 말 아닙니까? 내가 보기엔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래드가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거예요. 본인이 좋은 말 골라놨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거예요. 우선 본인이 안 믿는 거예요. 뒤에 나오는 게 순종, 순종하라. 그러면 래드처럼 순종해야 하나님나라를 이룬다면 순종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라는 말이 나온다고.




결국 래드는 뭘 모르느냐? 칸트의 인간의 윤리적인 속성을 몰라요. 뭐든지 순종이란 걸 할 때는 반드시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율법적 앞에 빼고 법적 기능.




신학교 때 신학교 2학년 때 이 책을 쭉 보면서 이 내용을 보면서 중간에 있는 이 대목에 줄이 안 쳐져 있어요. 나도 이 책을 보면서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지금 봐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에 보면 내적 삶의 윤리, 이런 말이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시간이 가지만 인간 내부에 법적인 요소가 어떻게 되는가? 그 설명을 먼저 드리고 난 뒤에 합시다. 여러분들이 오늘 머리가 약간 복잡하더라도 녹음할 테니, 녹음 되나 모르겠다. 다시 듣든지 하세요.




인간 내부에 이거는 철학이 아니고,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인간 내부에는 이미 윤리적인 요서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게 선은 무엇이며, 악이 무엇이며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겨요. 문제가 분별하는 기준을 누가 내세웁니까? 분별하는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 자신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악마가 들어있어요.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을 분별할 때 분별의 기준을 뭐로 잡느냐 하면, 생존의 문제와 관련시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공부하는 시간 말고, 평소에 낮잠 자거나 꿈을 꾸거나 화장실가거나 밥을 먹거나 그 모든 일상적인 생활을 딱 한번 압축시켜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아프고 배고프면 세상 모든 게 다 없어요. 아무것도 의미 없어요. 아프고 배고프면. 그러니까 몸 아프고 돈 없으면 예수고 하나님이고 여호와, 삼위일체고 복음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배고프면, 한 푼 줍쇼. 하게 되어 있고, 목사출신이 신학교 나와도 길거리 나 앉아 한 푼 줍쇼. 되어 있고. 몸 아프면 이노무 마누라 뭐하노? 내 몸만 아픈데 돌보지 않고. 이노무 성도, 집사, 목사가 몸 아픈데 나, 찾아보지도 않고. 내 몸 아픈데 왜 시끄러워. 조용히 다녀. 내 몸 아파. 내 몸 아픈데 바깥에 크락숀 소리는 왜 찍찍 울고. 내 몸 아픈데 노무현이는 쌀 퍼주고 난리야, 북한에. 내 몸 아픈데 왜 증권 투자하는데 중국 증시는 폭락해서 내 몸 아픈데 만들어.




자기 몸이 아프면 모든 집중을 이래가지고 죽겠다는 거. 내가 이래가지고 죽지. 자기 죽음에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죽는다는 거. 이것은 사람이 죽음을 관리한다는 게 아니고, 인간의 신체는 죽음이 우리 몸을 관리해요. 죽음, 죽음아, 좀 가 줘. 라고 할 쨉이 못 돼요. 우리가. 아무리 기분 좋아도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간 내놓고 쓸개 내놓고 다 내놔요. 몸 아프고 배고프면 모든 것은 환상으로 다 날아가 버리고, 실제 남는 것은 자기 신체만 남아요.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종노릇한다. 이 말씀이 장난이 아닙니다. 장난이 아니에요. 아직 여유 있을 때는 집에 돈 없을 때 마누라 먼저, 당신 먼저 죽 먹고 나는 굶을 게 하지만 그것마저 없을 때는 에이, 니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결국은 뭔가 약간의 유익이라는 것, 선이고 악이고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여유 있다는 거예요. 아직도 여유 있는 자의 양심이에요. 그게 여유 있는 자의 양심이라고. 그런데 진짜 몸 아프고 배고프면 선악의 마지막, 선악이 어디서 없어지느냐? 결국은 배고프고 몸 아픈데서 선악 자체도 날아가 버려요.




이걸 주께서 원하십니다. 요 점이 중요해요. 지금 마귀를 통해서 우리를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나오는 윤리, 하나님의 그 의가 결코 우리가 순종할 수 없는데서 순종이 되고, 은혜 받을 수 없는데서 의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계속 그것을 치고 들어요. 주의 이름으로 우리 이름을 작살내는 겁니다. 계속 박살 내버립니다. 이런 이야기, 전혀 여기 안 들어있다고. 엉뚱한 수박 껍데기 핥다가 먼지만 핥고. 




선과 악은 결국은 우리가  있다는 말은 선을 선택하고 악을 선택하고 분별하더라도 결국 우리 속에 분별하는 우리 자아가 분별하는데 그 분별 속에 악마가 들어 있잖아요. 죄가 들어있어요. 죄는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게 만듭니까? 악을 선택하게 만들어요.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선은 뭡니까? 악을 선택한 거기에 대한 위장술이 선입니다. 악의 다른 모습이죠. 악이 진짜 악을 선택해놓고 이걸 포장지를 선으로 포장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강도질 왜 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기도했어?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죽는 것이 나의 명예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면 어디까지 깊이 들어가야 하느냐 하면, 매주 여기까지 깊이 들어가야 돼요. 목사님, 어떻게 각 사람의 심령을 매주 깊이 들어갑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목사 본인이 매주 들어가면 돼요. 목사 본인이 그 말씀 가지고  매주 이 바닥에 가면, 자기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라니까. 인생 가는 게 똑같은 거예요. 인생사는 거 뭐 있어? 다 똑같지, 뭐. 이런 거예요. 다 똑같아요. 인생사는 거.




지난 주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온다는 것은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X-ray, 흑백사진 찍는 거예요. 그냥 흑백사진, 해골 몇 개 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은 그걸 몰라요. 죽음을 모르는데, 이제 나이 팔십, 구십 세 되면 실감난다니까. 죽는 게 실감나요. 이 세상에 죽는다는 것보다 생생한 현실은 없습니다. 가장 아무리 부인하고 부인해도 가장 확실한 사실은 죽는다는 거예요.




데카르트의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봤는데, 현대 실존주의 철학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샤르트르나 하이데거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백날 옳은 소리하고 철학을 해도 그게 다 무용지물이고 결국 사람은 내가 죽는다는 거예요. 없어져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곧장 없어질 인간이 마치 안 없어질 것처럼 큰 소리하고 외치는 것이 지금 길에 다니는 것이 우리들이에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하는 거기에 보면 웃음소리만 남기고 없어지는 고양이가 나와요. 아주 희한한 고양이에요. 꼬리부터 없어지는데 점점 없어지는데 웃음소리는 계속 약간의 여운을 남기면서 메아리처럼 헤헤헤 하고 남기는 기라. 나중에 보면 웃음소리도 날아가 버리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사람이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그건 그 사람 기억이고, 그 사람 기억을 끄집어낸다고 내가 또 살아나는 게 아니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없앤다는 사실을 우리가 왜 자꾸 잊어버리느냐 말이죠. 




하나님이 지금 내가 이렇게 누워 있다면 간질간질 하게 지금 하나님께서 여기서부터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 거예요. 말은 잘 해. 아직까지 안 지워져 있으니까. 그런데 발목부터 해서 지워져 있는 거예요. 우리는. 마지막에 한 구십 넘어 죽어버리면 다 없어지잖아요. 누가 지웁니까? 천국이 지워요, 천국이. 하나님이 지우고 예수님이 지우신다고. 왜?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아까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 율법을 매개로 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로 매개하지 않고 따로 자신의 선교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의는 불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불필요한 것은 지워야 되는 겁니다. 우리의 겉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날로 새롭다 하는 것이 성장한다는 말이 아니고, 번듯번듯 놀라운 사실들이 계속 화산처럼 쏟아 오르는 겁니다.




우리가 큰 교회 목회자 부러워하고, 어떤 사람은 월급 많이 받는 목사 부러워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우리가 만든 과거의 추억이 만든 환상이죠. 그게 왜 환상입니까? 월급 80만원 받는다. 이래서 같은 목사로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 자살할까 하는데 아프리카 가니까 20만원 받고 하더라. 거기 가니까 80만원이 많더라. 이러는 거예요. 교인 50명이 죽을까 50명이 뭐냐? 하는데 딴 데 가니까 댓명 이것보다 많더라. 다른 곳에 대한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 비교의식에서 내 나름대로의 욕망이 환상을 만들어낸 거예요.




나는 목사데 논다. 그런데 병원에 가보니까 다 아픈 사람이더라. 나는 건강하잖아. 이게 아픈 사람들 속에서 건강하다는 것이 복인 줄 아는 사람은 또 새로운 축복이다 말이죠. 그 작업을 인간적으로 해버리면 그런 지식을 안다는 것이 또 나의 또 하나의 환상이 돼버려요. 그런 지식 안다는 게.




그럼 그건 다시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나의 하나의 선이 되고, 이 선은 아까 뭐라고 했어요? 무슨 술? 위장술이죠. 나의 위장술. 나는 복음 안다는 위장술이 되죠. 사실은 주님께서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데. 아직도 여전히 밑바닥인데, 우리는 이런 것을 안다는 것이 나의 선인 것처럼 이걸 통해서 구원받는 것처럼 여긴다 말이죠.




세상에 복음을 아는 지식으로 구원 받진 않습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지, 복음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된 어떤 것도 날아가 버려요. 마치 악성 바이러스에 파일 날아가듯이 날아가 버리고, 구원은 십자가에서 외부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구원받지, 내가 그 능력을 갖고 있다는 그 의식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윤리라는 게 성립되고, 윤리의식이 되고 신학이 되려면, 외부에서 날아온 능력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말고, 당신은 현재 이런 것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신을 살립니다. 라는 쪽으로 이렇게 체계가 정립돼줘야 그걸 교인들에게 가르쳐서 이거 가르쳤으니까 돈 내라가 성립되는 게 그게 목회가 되는 거예요, 결국은.




다같이 손가락으로 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저분의 능력을 이렇게 하지 않고, 그렇게 손가락을 바라봐요. 달을 보는 게 아니고,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을 가지고 이걸 붕대 감아서 귀하게 보존해서 당신처럼 나처럼 이거 보존하세요. 해놓고 교인들에게 당신 신학했으니까 돈 내라고 할 수 있단 말이죠. 당당하지요. 정당하게.




주님의 목회를 가장 큰 방해하는 사람이 목사들인데 왜 그러냐 하면, 목회는 주님이 하시는데 목회자가 자기가 목회한다고 매일같이 그렇게 생각해요. 매일같이 눈만 뜨면 생각해요. 어제 대구공부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항상 사람은 눈만 뜨면 오늘 할 스케줄을 자기가 짜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 일이라고 여기는데,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걸 부수는 그것이 하나님 일이에요. 사람은 못해요. 사람은 자기 생각을 자기가 부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게 부셔지게 하시는 다른 분이 부셔지게 할 때 아이고, 주께서 부셔지는구나. 그걸 믿는 것이 하나님 일이에요. 자기 일이 아니고.




그러니까 늘 이렇게 뭔가 집어줘야 되고 부셔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윤리라는 것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선과 악이 있을 때 선과 악은 누구나 있으니까, 이 선이 하나의 포장에 불과하고 이것이 깨지면 내 속에 있는 악이 포장지를 뚫고 위선과 가면을 뚫고 튀어나온다. 라는 것을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 성도는 살아가야 돼요. 여기서 윤리가 있을 수 없지요. 소속이 어디냐? 내 소속이 어디냐?




이제 MBC에서 주몽이 다 끝났는데, 오늘밤 되면 끝나는데, 국가라는 것이 없는 거예요, 원래. 국가라는 게 없습니다. 국가라는 게 실제 한다면, 실제 한다고 여기면서 국가를 중심으로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고 전쟁에 승리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국가라는 허상만 있고 국가란 없는데 허상들이 다같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으니까 마치 국가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여겨지는 겁니다. 그 허상의 정체는 요한계시록에 바다에서 오는 짐승이 그 허상을 유발했죠.




그래서 로마서 13장에 공연히 칼을 준 게 아니란 사실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허상을 실상처럼 여겨서 그걸 위장하는 사람에 대한 천사에 하는 징벌을 인간이 천사가 넘겨주게 되어 있어요. 사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거 누가 하게 되어 있어요? 천사가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로마서 13장에 보면,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라 하지요. 하나님의 사자가 뭡니까? 천사들이란 말이죠.




그런데 권세자들이 자기가 천사인 줄 압니까? 천사인 줄 몰라요. 고레스 왕이 자기가 메시아인줄 압니까? 몰라요. 다만 성경에서 고레스 왕이라 할 뿐이에요. 역할이 그럴 뿐이라고. 이걸 통해서 국가가 정당함이 없어요. 그거는 선교단체나 칼빈주의에서 전혀 이거는 이런 생각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국가가 신화에 불과하고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허구를 갖고 노는 거예요. 허구를 갖고 논다니까.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코미디할 때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코미디프로에서 여보, 당신 돈 달라 하니까 돈 없다 하니까, 당신 삼천 만원 갖고 있는 거 무슨 돈이야? 하니까 게임머니라 안 캅니까? 게임머니라는 게 사이버 세계에서 통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허구 아닙니까?




사람은 허구만을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라캉에 나오는데.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전부다 허구만을 욕망하게 되어 있어요. 욕망 자체가 그래요. 왜냐하면 욕망하는 내가 허구기 때문에. 지금 지우개로 지워져 나가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 얼마나 쓸데없으면 지우겠습니까? 쓸데없는 걸 지우는데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표를 내는 것이 국가에 대한 욕망들이에요.




내 생존에 대한 욕망. 이미 살려 줬는데 소속이 천국 안에서 이미 살았는데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했는데 우리는 이미 살았는데 우리 기분은, 아까 뭡니까? 배고프고 몸 아프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무슨 짓이든 다 하잖아요. 내 몸이 없어질 하나의 허구인데 유일한 실상으로 본다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르죠. 왜 유일한 실상이 이 땅에서 없어져야 되는가? 그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성경은 간단하죠. 죄 값은 사망이라. 그 죄라 하는 것은 우리 근본을 노리는데 이 사람들 속에는 선과 악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나를 죽이게 하는 것은 악이고, 나를 살리면 선이라는 그런 잘못된 허구적인 선악체계 하에서 죄라 하니까 그러면 죄 안 질게요. 앞으로 잘 할 게요. 살려주세요. 앞으로 내가 교회 잘 섬길 테니까 복 주세요.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 아닙니까? 이게 너도나도 다 허구적인 선악체계에서 나온 허구적인 죄관이고 의관이란 말이죠.




이걸 완전히 한꺼번에 다 작살내는 게 뭐냐 하면, 율법을 통하지 않고 예수님의 선교적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천국의 의가 이루어진다. 그 대목입니다. 이런 중요한 대목을 참, 중요한 대목을 이 저자가 쓰면서도 무슨 의민지도 모르는 거예요. 지금. 그럼 좀 더 해봅시다.




선교적 사건이라 했는데 선교적 사건이 뭐냐? 사실 이게 더 어려워요. 선교적 사건에서 뭐가 나온다? 뭐가 뿜어져 나온다고요? 뭐가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나오죠. 예수님이 병 고치면 세상 사람들은 뭘 보느냐 하면, 병 고쳤다로 보지요. 그런데 신앙인은 뭐로 봅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왔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차이인 줄 몰라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떡 주니가 떡 먹은 사람은 뭐가 나온다? 떡이 나온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진짜 나중에 제자들이 요한이 쓸 때는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떡도 먹고 의를 챙기면 안 되느냐? 천만의 말씀. 떡을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무엇의 대적자요 무엇의 반대자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반대하는 죄악된 무리죠. 악마에 속한 무리죠. 그래서 예수님을 두 번 다시 따라다니지 않고 떨어져 나가잖아요.




단순히 그들이 떡을 배고프고 몸 아파서 떡을 달라는데 그것이 단순히 자기는 자기만 생각한다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원수적인 작태에요. 원수적인 행동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원수들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의가 나와요. 놀라운 사실은. 왜냐하면 예수님을 찔러 죽여야 찔러 죽인 거기에서 의가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인간의 역할을 뭐예요?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기 위해서 가룟 유다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꼭 필요한 존재지요. 이 말 또 오해하면 꼭 필요한 존재라고해서 아, 난 필요하고 가치 있구나. 가치 있어서 필요한 게 아니고, 악한 역할로써 해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옵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추려서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을 거저 등장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이름이 누굴 공격해야 돼요? 주의 이름을 공격할 때 그 주의 이름이 죽음에 이를 때 그 죽음이 역사현장에 나타날 때,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의 이름이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름이 있어야 되고, 인간의 이름이 거기서 주의 이름을 공격해야 되고, 주의 이름이 공격 받을 때 죽음이 나타나야 되고, 그 죽음이 다시 역사현장에 일어날 때 그 역사 전체가 죽음의 역사였다는 것이  판정될 때 그때 율법으로만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신 의가 이 세상에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는 이것이 주의 이름만 높이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계획의 목적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선교적 사건은 뭐냐? 선교적 사건이라 할 때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거는 성경적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소물통, 풍선, 풍선은 탱탱하니까 이건 좀 적당하지 않고. 소물통, 소 위통하면 약간 물렁물렁하면서 탱탱하잖아요. 거기에다가 물을 가득 담아놓고 옆에서 창으로 찔러버려요. 찌르면 구멍나죠. 구멍 난 그곳에서 뭐가 쏟아집니까? 물이 쏟아지겠지요. 이게 선교적 사건으로 보면 되죠. 인간의 죄로 주님을 찔러대면 주님을 찌른 데서 의가 나오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안식일 날 제자들이 밀밭 사이에 가서 밀을 비벼서 먹으니까 그때 노렸던 것이 악이 공격하지요.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뭘 범했다? 안식일을 범했다. 찌르니까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자기 의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그럴 때 순종이라든지 지킴이라는 게 이게 제자들에게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안식일을 어떻게 지킵니까? 지키는 게 성립이 안 된다니까. 지키는 게. 안식일 지킴이 성립이 안 되잖아요. 악이 와서 창으로 찔러야 나오는 그 율법의 완성을 뭘 지킨다는 게 율법을 지킨다는 게 성립이 안 된다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찌르지요. 구멍을 내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요. 이 소 위에. 구멍을 찔렀는데 우리는 몰랐는데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가 찔러서 나온 거지요.




선교적 사건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선교적 사건을 해석할 때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모든 어떤 이적들을 해석할 때 우리는 뭐냐? 두 가지 점을 찾아내야 돼요. 하나는 내가 찔렀다는 거, 그리고 그 찌른 그 구멍을 통해서 주님의 의가 거저 주시는 용서와 자비가 튀어 나온다 말이죠.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 당시에 사도 바울을 보필하는 사람이 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를 맛보기 위해서 구멍 더 찔러야 되겠네. 이렇게 하지요. 그런 게 로마서에 나오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가 돼요? 그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순종과 지킴이 성립되잖아요. 더 죄를 지키는 그 착한 짓을 하면 의가 더 나오니까 이것도 또 하나의 인간에서의 행위가 나오지요. 행위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이 선교적 사건에 담긴 의미와 이제는 다음 시간에는 천국의 본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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