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07-04-19 20:32:39 조회 : 4184         
20070406a 울산강의-창세기 12장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36)
 

20070406a 울산강의-창세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해야 될 것이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여기서 두 가지 층이 생깁니다. 저도 스모 선수처럼 앉아서 하겠습니다. 이게 앉아서 하면 버릇될까 그거 하지 싶어서. 창세기 12장에 두 개의 층이 나옵니다. 하나는 인간 아브라함의 층이 있고,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의 층이 있습니다. 층이 달라요. 하나님 층이 있고 아브라함 층이 있는데




창세기 12장부터 이야기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자기 동네에서 아는 식으로 그냥 막돼먹게 살지요. 자기 나름대로의 뭐, 포부? 또는 생존 원리? 또는 자기가 살아 버텨야겠다는 포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놀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하나님이 하나님 나름대로의 일방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하던 간에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 두 개의 층이 계속가요. 두 개의 층이 계속 가는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창세기 12장을 보면서 하나님 층과 자기 층을 이으려고 하지 마세요. 이러면 신앙생활 힘들어서 못 합니다. 힘들어서.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우리가 행동을 수정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 크게 하시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멋들어지게 멋지게 쓰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가줘야 하나님의 본색이 그대로 나타나게 돼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인간의 층은 기껏 이 정도입니다. 라는 것을 충실하게 다 보여줘야 돼요. 충실하게 드러내 보여줘야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이 우리들이 이렇게 우리 맘대로 멋대로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일에 결코 방해됨이 없었다는 것을 증거해야 됩니다. 내가 막돼먹게 살아간 이것이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거나 방해되는 적이 일체 없었다를 보여줘야 돼요. 그렇게 해야 됩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창세기 12장부터 13장 계속 그런 식으로 쭉 가요. 그런 식으로 쭉 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걸 더 간추려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의 어떤 행동에도 저지되거나 방해 받지를 않고 그대로 꾸준하게 성취되었노라. 그것을 성경은 나란히 두면서 다 증거하고 보여주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게 나의 층, 인간의 층, 아브라함의 층에 하나님을 자꾸 강제로 모셔오려고 하니까 이게 힘들은 거예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는 층에 하나님을 자꾸 개입시켜서 뭔가 우리 하는 일이 고상하고 건전하고 아주 거룩해 보이는 그걸로 이렇게 만들려고 약간 시도하는데, 그거는 자기 착각에 자기가 스스로 이거는 힘들어서 못 해요. 이거 한 일년 하다보면 지기 지 풀에 지쳐서 나도 모르겠다고 나자빠져버려요.




이거 이렇게 시도하지 마세요. 이거 소용없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가시고, 그냥 우리는 우리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가면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의 목적은 조금도 방해받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케 하시는 것이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흐름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적은 뭐였습니까? 생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적은 생존이었어요.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자기 생존 밖에 모르는 이 사람을 가지고 복의 근원으로 삼았어요. 이 세상을 복과 저주로 나누는 그런 기준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이 훌륭해서 복과 근원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자기 생존만 급급하면서 살았는데, 이 철딱서니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것을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삼습니까? 본인이 삼겠다는데.




이런 아브라함 같은 이런 돼도 않은 인간을 가지고 어떻게 훌륭한 인간, 테레사 수녀 같은 인간을 가지고 복과 저주의 근원으로 삼아야지, 이 돼도 않은 인간 가지고 자기 생존 밖에 급급한 인간을 가지고 복과 저주의 근원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러니까 하나님이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게요.




우리 상식으로 저따위 같은 인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델로 삼을 리가 없어. 라고 하는데 그 따위 인간을 삼으시니까 하나님다운 거예요. 그걸 가지고 나중에 지금은 안 나옵니다. 나중에 나오는 개념이 뭐냐? 이걸 가지고 두 자로 '거룩'이라 합니다. 이게 거룩이에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기존 상식으로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착하면 착할수록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우리의 상식은 주님께선 전혀 허용해주지 않습니다. 개떡 같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룩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자체가 거룩이에요. 이런 인간을 돼도 않은 인간을 삼았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이라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아래 층, 인간의 층은 뭐냐? 거룩해져야 거룩다워야 거룩이다. 이거는 우리 아브라함 층이에요.




아브라함 층에서 보면 지가 트릭을 씁니다. 무슨 트릭을 쓰느냐 하면, 속셈은 생존이면서 겉으로는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뜻을 재해석해서 하나님 이러니까 나는 살아남을 필요 있는 인간 아닙니까? 이런 인간이니까 내 아내 팔려도 나는 계속 버텨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날 버리면 하나님 계획이 차질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니까 하나님 내 뜻으로 해줘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위장을 위장술을 계속해 나갑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알아요. 하나님은 나하고 거래한 것이 아니고, 내 이름하고 거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 이거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하고 거래한 것이 아니고 계약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이름과 거래한 거예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란 이름 되려면 아브람이 어떻게 그걸 성취할 재주가 없어요. 아브람 아브라함 되는데 보탤 수 있는 능력은 본인한테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이걸 성경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한다. 이래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노리는 건 뭐냐?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은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되는 근원이에요. 이해하십니까? 그런데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될 수 없어요. 그것도 이해하십니까? 왜 그러냐 하면, 아브람은 내가 발음이 안 좋아서, 일번 아브람은 이번 아브라함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브람은 자기의 본색이 자기의 생존에 급급한 것 그게 전부에요. 지가 하나님 이론은 아무리 걸치고 하나님 이론을 아무리 동원해도 그거는 하나의 트릭에 불과하고 위장술에 불과하고 그거는 그냥 팔짝팔짝 깝죽대는 것뿐이에요. 별 효과도 없고 아무 효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묻기를, 하나님의 뜻도 이바지 못하는 인간을 왜 복의 근원 되게 하시느냐? 뭐, 하나님 뜻을 이룰만한 인간을 뽑아서 복의 근원되게 해야지, 일번 아브람에서 이번 아브라함으로 되지도 못한 인간을 왜 복의 근원되게 하시느냐? 정답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이다. 사람하고 얽히고설키지 않으니까 하나님답다 이 말입니다. 사람하고 얽히고설키지 않으니까 하나님다운 거예요.




제가 부탁하는데 여러분 제발 아브라함을 여러분들 아브라함 되려고 하지 마세요. 아브라함은 이것은 우리 이웃이고 남입니다. 지금 하나님 우리를 따로 다뤄요. 아브라함 같은 일이 일어날까를 은근히 기대하지 마세요. 괜히 예쁜 아내 둬서 뭐, 보내고 이러지 마세요. 그건 이미 한 때 간증으로 끝나버렸어요. 오늘날 우리 시대는 이 울산에 있는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대로 간증이 따로 있어요. 괜히 아브라함하고 비스무리하게 붙잡고 갈 필요 없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복의 근원 되게 하는 것은, 일번 아브람이 도저히 따낼 수 없는 그것과 하나님과 연결 짓지, 일번 아브람과 연결 짓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번 아브라함과 연결 지어서 복의 근원되게 하시지 일번 아브람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걸 오늘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울산에 있는 나하고 거래 안 해요. 다만 나로 하여금 신자 되게 하신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과 거래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새언약이에요.




내 살과 내 피로 하나님은 거래 안 받습니다. 내 살 내 피 안 받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의 살과 파를 받습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아브람 이름으로 시작해서 아브라함으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드러나는 것은, 아브람은 인간 층에서 한 발자국도 이탈한 적 없고 그냥 인간적인 속셈, 속내를 그대로 보여줬다는 거. 그리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가는데 또 뭐 하나 등장하느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어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해서 복의 근원되게 했다는 거.




근데 그 모든 공로는 하나님의 이름에게 그 공로를 돌려야 된다는 그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개떡 같은 아브람이란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고 등장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같은 내 생존 생계 내 생존 밖에 챙기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한테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죽을 때까지 내 자식, 내 남편, 내 새끼 밖에 모르는 내가 하나님나라에 꼭 필요한 존재에요.




그래서 안 되는 걸 되게 하잖아요. 누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그저 쓰레한 우리를 통해서 주의 이름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는 이루어냈다는 그릇으로서 달그락거리는 빈 그릇으로서 요란스러운 빈 그릇으로서 우리를 선택하신 겁니다. 주의 이름 높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




이 두 개의 층, 이거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민수기 24장 9절 한번 찾아봅시다. 제가 이렇게 강의 초반부터 제발 아브라함과 여러분을 역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제가 해드렸고, 그냥 자기 본성대로 생계 생각하면서 그냥 사시라고 그렇게 부탁을 드렸건만 또 내 이름으로 또 내가 거룩 되려고 스스로 부담주고 그런 실수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24장 9절 보면 이런 말씀 있지요. "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재탕 같은데 이게 단순한 재탕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뭐가 없냐? 적이 없어요. 그래서 축복의 의미가 뭐고 저주의 의미가 뭔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민수기는 이미 아브라함 자손이 하나의 국가 형태로 움직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축복하고 저주라 하는 것은, 전쟁 중에서 저주라 하는 것은 패배당하는 것을 말하고 축복이라 하는 것은 승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하나님의 계획은 큰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그 계획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이 하나님 층에서 갖고 있던 복안이었어요. 은밀한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저 생존입니다. 너를 가지고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은 이거는 우리를 선택한 하나님 계획이고, 우리는 괜히 전쟁에 나가고 싶은 마음 없어요. 군에 갔다 온 사람은 아직도 꿈에 군대 제대 못해서 발광치는 꿈을 군대 제대한지 25년 지났는데 아직 꾸고 있습니다. 그만큼 전쟁, 이게 지겨워요. 우리는 그저 생존뿐입니다.




하나님의 복안은 뭐냐? 생존 밖에 모르는 이런 아주 털팔이 같은 인간을 가지고 승리와 패배, 이 세상의 저주받고 복을 받는 이걸 가지고 우리를 전쟁의 도구로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무기도 무기다워야지, 기도를 좀 두 시간씩 한다든지 뭐 이래야 돼요. 전쟁을 무기가 무기답지도 않은 인간을 데려다가 승리와 전쟁, 전쟁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 층에서 이뤄지는 복안입니다. 계획입니다. 아직도 아브라함 때에는 이게 안 나타나요. 아직까지.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거룩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지금 창세기 12장에 보면 거룩의 개념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개념을 율법과 연관시켜요. 그런데 아브라함에는 율법이라는 게 없어요, 지금. 아브라함 때 율법이라는 없습니다. 율법은 430년 후에 나와요.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에서는 희미하나마 자기 생존 밖에 챙길 줄 모르는 진짜 우리하고 똑 닮은 그런 털팔이 같은 인간 데리고 저런 인간도 복 되더라 하는 점만 부각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구나.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 이야기는 이사야 가서 하란 말이죠. 나중에 하나님은 우릴 위해서 대속해 주시고. 그런 것은 신약에 가서 이야기하란 말이죠. 지금 우리가 아브라함을 이야기할 때는 털팔이 같은 인간을 무슨 하나님의 이름이 어떤 재주가 있는지 아직까지 모르겠지만 어떤 거룩이 있는지 무슨 전쟁의 복안이 있는지 그건 나중의 이야기지만. 이런 털팔이도 되더란 말이죠.




되는데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거는 하나님의 이름에 아브라함이 감동 받아 불렀던 그 하나님의 이름에 뭔가 엄청난 것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게 털팔이 같은 아브람도 아브라함이 되더란 말이죠. 하나님의 축복의 백성에 편입되고 가입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 오래 다닌 사람도 있고 초자도 있을 것인데 사람이 한꺼번에 하나님의 거룩이 어떻고 나는 죄인입니다. 이거 다 알 수는 없어요. 알 수는 없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압니다. 나는 눈만 뜨면 밥 먹고 사는 거, 이거는 내가 숨길 수 없다. 이게 초자가 되던 모자가 되던 뭐가 되던 교회를 오래 다녔든 절대로 우리 몸에서 안 빠져나가는 게 뭐냐 하면, 나는 밥 먹고 살아야 된다. 돈 벌고 살아야 되겠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이 아브라함이 필요하죠. 아브라함 이야기가 정말 필요한 겁니다. 나는 뭐, 신앙생활 한 30년 하고 목사 쯤 됐으니까 이제는 아브라함 정도는 수준은 넘어섰고, 이런 거 없어요. 그거는 말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한 치도 아브라함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안 벗어나면 날수록 하나님의 층에서 이루어지는 복의 근원은 우리 말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 되거든요. 우리가 한 치도 우리 생존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의 구원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털팔이 같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주의 이름이 더욱더 빛이 나는 겁니다. 우리한테 거룩이 있는 게 아니고 그분의 거룩이고,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게 아니고 그분이 율법을 다 지키고,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왔을 때 자, 이 털팔이 아브라함 또 왔다 생각하고, 도대체 이 성경 나중에 나보다 더 털팔이가 있을까? 나보다 하나님 잘 섬김 없이 내 생존만 열중하는 인간이 있을까? 그걸 이렇게 찾아보시는 그 재미도 솔솔 합니다. 그런 재미가 있어야 돼요. 자기 본색을 그 재미. 솔직하게 다 드러낼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이게 대리해주잖아요. 성경을 통해서 아하,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 또 있네. 라고 그걸 발견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자꾸 하나님을 개입시켜서 내가 하나님 가까이 가고, 이러면 부담돼서 두 달 되면 교회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좀 높아지지만 나중에 직장 가서 바쁘면 교회 못 나오잖아요. 못 나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씹을 거 아니냐 말이죠. 기도할 때 유창할 줄 알고 오래 다닐 줄 알았는데 일주일만 다니고 끝나네. 기도가 가증한 기도다. 그러면서 앞에서 씹고 뒤에서 씹어서 씹는 소리가 들려서 그 다음부터 교회 못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본인 자세가 자기 층에 그냥 자기 층으로 가라 이 말이죠. 자꾸 자기 층에다 하나님을 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일을 따로 해요. 하나님은 일을 따로 하고 나는 내 일 따로 하는 거예요.




목사님, 그래 가르치면 안 되지요. 따로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하나님을 모셔야 될 것 아닙니까? 라는 그런 소리해도 그것도 따로 에요. 하나님 그 소리에 뻥 넘어가서 감격하고 이런 하나님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겐 아예 기대하지 않고 시작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를 안 하는데 인간이 왜 하나님에게 지가 은근히 기대를 품습니까? 아주 수상합니다. 아주 수상해요. 그러지 마세요. 괜히 지 위대해지려고 하지마세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이 층을 구분하는 쪽으로 일을 합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한다? 인간 층과 아래층, 하나님 층을 뚜렷하게 이게 딱 드러나는 식으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성령이 충만함을 입게 되면, 내 층과 나의 층, 인간 층과 하나님 층이 딱 갈라지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눈에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주여, 은혜로 구원받았지 내 잘나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이게 고백이 탁 돼버려요. 그 몇 초 가지도 않습니다만 그게 드러나요.




평소에는 이게 막 혼재해서 섞여서 주여, 열심히 했는데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이렇게 하다가 한번 당하고 난 뒤에는 층이 딱 갈라져요. 이 층이 갈라지게 하는데 하나님이 쓰는 방법은 뭐냐? 적어놓으세요. 손 운동을 좀 해야 되니까 적어놓으세요. 두 자입니다. '굴욕'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굴욕’ 아아, 사람 참 더럽게 만들어요. 사람 위신 참 더럽게 만들어요. 굴욕이죠. 사람이 굴욕이 안 되면 인간이 안 됩니다. 굴욕이 없으면 인간이 인간 되질 않아요. 건방 떨어서 못 씁니다. 굴욕 당할 때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투자한 것이 아무 짝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죠. 투자한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굴욕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애야, 근호야, 니는 니 층으로 좀 가 둬. 괜히 여기서 하늘나라 얼쩡거리지 말고. 니는 그냥 니 할 일 해. 왜 하늘나라 근처 있다고 니가 성화되고 거룩하다고 뽐내고 그래. 니는 니 할 일 가. 괜히 여기 우리 하나님 알아서 할 테니까 니는 가 있어. 괜히 얼쩡거리지 말고. 개뿔도 모르는 게 왜 자꾸. 이렇게 층을 분리하죠.




사람이 굴욕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이거는 위대해지는 위대함. 갑자기 주위 칭찬하고 잘한다고 그래요. 사람이 위대해지면 지금 하나님이 신이 나하고 역사한 줄 알고 착각을 해요. 층이 안 갈라집니다. 스데반 집사는 얼마나 성령 받고 난 뒤에 층이 갈라졌던지, 돌이 막 날아와요. 날아와도 그냥 맞고 있습니다. 한두 번 겪는 굴욕이 아니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침 뱉음을 당했어요. 예수님은 한두 번 당한 굴욕입니까? 그냥 침 뱉음을 당하고 귀싸대기 얻어맞습니다.




이게 층이 안 갈라지면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놓는 게 아니고, 상대방을 왼 뺨을 박살내놓습니다. 층이 안 갈라지만. 어데 주의 종을 니 한번 맞아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층이 쫙 갈라지면, 때리면 때리는 대로 왼 뺨 내놓고. 물론 개기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그러다 더 맞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릴 인도하는데 굴욕을 연속 달성시키면서 인도하십니다. 그게 아브라함 이야기에요. 아브라함 이야기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아브라함 완전히 쪽 났다. 그겁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히 쪽 났어요. 철저히 낮아질 대로 낮아지는 거예요. 자기 인간 본색 다 드러납니다. 그 코스가 경로가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 통로 말고 아브람이 아브라함 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천국 가는 아브라함의 백성들이여, 그 아브라함 방정식 안에 그대로 들어 있어야 돼요. 그 아브라함 방정식에서 벗어나서 천당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브라함 방정식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장담합니까? 히브리서 11장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보면, 꼭 남이 하지 않는 독특한 행동을 해서 갈수록 세상과 격리됩니다. 갈수록 격리돼요. 믿음의 장 전부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지요, 노아는 주문 들어오지 않았는데 배를 만들지요.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고 그거 보화 다 버리지요. 심지어 톱으로 켜이는 것과 광야에 유리하는 것과. 세상에 그런 굴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저거들보다 뭐가 못났는데 아이큐가 못 났나, 뭐 아는 친척이 없어? 뭐 때문에 이런 굴욕을 당하는 겁니까?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주님의 오늘날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변은, 주님이 가신 코스를 성령이 와서 데려갑니다. 데려가면서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거죠. 성지 순례하는 거죠. 어이, 근호야. 저게 바로 베드로가 내가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물었던 장소야. 내가 일곱 번씩 일곱 용서하라고 한 장소야. 그 대목을 지나칠 때 그걸 딱 듣는 순간, 아하 내가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주제 넘는 말도 안 되는 내 생존만 챙기는 놈한테 뭐도 가당치 않은 용서란 말인가 깨닫는 거지요.




그 다음에 와서 어이, 저거 봐. 저 광야가 무슨 광야지? 이 장소가 좀 넓지? 저기 오병이어 했는데 사람들이 떡 좀 주니까 나를 왕으로 삼으려고 달려든 곳이잖아. 가들 도망 다 가버렸어. 그 코스를 하는 거예요.  




그걸 조직신학적으로 말해서 성령께서 뭣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누구한테 적용시킨다? 우리한테 적용시킨다. 이렇게 조직신학적으로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현실화시키면 우리를 손목 잡고 데려가면서 주님이 이 땅을 거쳤던 코스대로 구비구비 가면서 거기서 제자들이 얼마나 곡해했으며 얼마나 오해했던가를 하나하나 짚어서 이야기해줌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 소리를 듣는 우리가 뜨끔뜨끔 하게 만드는 거예요. 참, 나보고 하는 소리구나.




어이, 근호 저 봐라. 이 장소가 뭐냐 하면, 베드로가 지가 목숨 순교해서 나와 함께 천국 가겠다고 깝죽댄다고 했는데 내가 거부했잖아. 니는 목숨 바쳐도 천당 못 가. 왜? 내가 만든 처소 아니면 니가 만든 처소는 애초부터 천국이 없는 거예요. 이근호 이름으로 만드는 처소는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만들어야 그게 처소지. 내 이름으로 만든 처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상급론 없습니다. 상은 주님이 만들어서 일률적으로 주는 상이지, 내 이름으로 만들어서 상의 자리, 내 자리는 천국에 없습니다. 그건 베드로가 이미 실패한 거예요.




그거는 이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제발 여러분, 자기 층에 그냥 남아 계셔요. 자꾸 이 층에 올라가지 말고, 사다리해서 위로 올라타고 가지 말고. 그냥 아래층에서 노세요. 아래층에서 노시기 바랍니다. 아래층에서 쥐새끼처럼 찍찍거리면서 지하실에서 그냥 노세요. 그냥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놀았는데 이게 되더란 말이죠. 구원이 돼요. 누구 때문에? 위에서 부지런 떨어서 다 되게 되어 있어요. 이 관계를 가지고 이걸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내 일에 시끄럽고 고개 들어보니까 저 위에서 되게 시끄럽고. 저 위에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다. 이걸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뭐가 믿음이 아니냐? 사다리를 타고 이 세상을 떠나서 거룩한 나라에 가겠다고 들어가지도 못한 게 하늘나라에 가서 주의 일에 콩 내라, 팥 내라 간섭하는 거, 주제넘은 짓입니다, 그거. 대번에 밥그릇 차 버립니다. 내려 가! 이게 올 데가 아니야. 차 버립니다.




주의 이름으로 처소를 만들고 주의 능력으로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십자가 능력에 내 능력 보태서 구원 되는 건 아니거든요.




이걸 제가 신학적으로 신약 펴 놓고 이야기해서 너무 어려운 이야기 됐는데 감사하게도 우리가 구약을 보고 있으니까 이게 실감이 나는 거예요. 아하, 그야말로 구약은 신약의 함축된 이야기의 모형이구나. 모형은 좀 보기 쉽잖아요. 실체는 너무 어려우니까. 창세기 이야기는 그냥 모형이에요. 아브라함을 들여다보면서 아아, 주의 이름하고 아브라함 이름하고 아브라함과 아브람이 이런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똑똑히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봅시다. 지난 시간에 한 것이 뭐냐? 12장 8절에 했어요.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이래 되어 있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지는 지금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 일에 뭔가 내가 보탬이 되고 협조가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여호와가 간여하고 있다는 그 정도는 알아요.




그런데 아직까지 여호와가 어떤 일을 모색하고 어떤 복안이 있는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계획이 있는지 이거는 전혀 몰라요. 다만 당신과 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거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쨌든 여러분, 참 이게 중요한데 어쨌든 안 떨어지고 여호와를 부른다는 건 믿음인데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브라함도 몰라요. 자꾸 계속 곡해할 뿐이죠. 다만 이상스럽게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참 재미있는 세상 아닙니까? 여호와 이름은 부르고 하는 짓거리는 여호와 뜻하고 전혀 상관없고. 이게 평생 간다? 평생 가는 거예요. 평생 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식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덤으로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뿐이에요. 내가 이만큼 훌륭하다는 게 아니라 내 몸의 새끼가 나에게 복을 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정하는 걸 말하는 거예요. 어쨌든 그건 나중에 나오니까. 아브라함이 이제 부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갑니다.




이제 10절에 보면 그 땅에 기근이 있지요.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지요. 내려가니까 거기에 뭐냐? 아브라함을 굴욕적으로 만드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름을 부를 때는 혼재되어 있어요. 위층과 아래층, 하나님 층과 아래층이 지금 분리되지 않고, 자기는 지금 보람찬, 하면서 지금 하나님 함께 섞여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굴욕적인 일을 당하게 되면, 굴욕적인 일이 이게 하나의 쐐기처럼 하나의 칼처럼 파고 들어와서 하나님 층과 자기 층이 쫙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내가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대종상시상식을 하는데 내가 장동건을 안다. 장동건을 알아서 초청장이 장동건 이름으로 왔는데 나는 장동건을 안다 하고 같이 시상식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거기서 관리하는 사람이 초청장 봅시다. 저, 장동건하고 일행인데요. 어딜. 딱 끊어버려요. 장동건은 장동건이고, 니는 니야. 안 보내주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 보람찬~ 주여 믿습니다. 하는 것을 딱 끊어버려요. 딱 끊어서 하나님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놀라운 작전입니다. 이거 멋진 겁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야 돼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실컷 불러도 그건 아무짝도 소용없고 내 힘이 안 되고 보탬이 안 되고, 하나님을 실컷 부른 나나 하나님을 안 부른 인간이나 똑같이 돼버리는 굴욕적인 삶.




그 굴욕적인 예를 하나 들게요. 이거는 실제 있는 일이 아니고 가상적인 예인데. 제가 우리 집에 오다가 언덕을 오다가 강도를 만나서 엎어졌어요. 엎어져서 그만 죽게 되었는데 합동 측 교인이 다가가서 어, 강도 만났네. 하고 가버립니다. 이번엔 통합 측 교인이 와서 가버립니다. 침례교 교인이 왔다가 그냥 가버립니다. 그런데 누가 오느냐 하면, 여호와 증인이 와서 아이고, 강도 만났구나. 내가 병원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혹시 치료비 모자라면 내가 다시 와서 치료비 보태겠습니다. 그저 형제여, 편히 쉬소서. 이 네 사람 중에 누가 우리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여호와 증인이에요.




이건 실제 있었던 사건인데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세상에 차가 끊겨 버렸어요. 집은 가야 되는데. 마침 자가용 택시가 와서 서는 거예요. 나중에 이야기 쭉 해보니까 여호와증인이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굴욕적입니까? 감히 이단한테 도움 받다니. 여러분, 그런 경험 없어요. 여러분 경험조차 없구나. 하나님이 날 아브라함처럼 사랑하시는 모양이에요. 굴욕주시니. 그렇게 여호와증인, 이단 고함쳐놓고 강의하고 돌아서서 여호와증인 도움 받는 거. 누가 니 이웃이 되겠느냐?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세상. 세상 희한한 세상 아닙니까?  




몸이 아팠을 때 옆에 있는 절에 다니는 이웃집 사람이 나를 먼저 병원에 모시지, 멀리 있는 새순교회 교인이 목사가 먼저 모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바로 이웃 없이는 못 사는 거예요. 신앙, 종교, 그건 다 헛방이에요. 이웃이란 인간이란 이 굴레는 이웃,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부르짖는다고 하나님 날 도와주는 게 아니고, 옆 사람이 도와준다는 것을 창세기 12장 바로 왕의 만남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깨닫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 이 바로 왕이 이게 하나님 없는 바로 왕이 니가 왜 그런 나쁜 짓 했노?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니 때문에 화를 냈구나. 내가 꿈자리 사납더라. 미안합니다. 사람, 참 실없는 사람이네. 자기 누이를 누이라고 하지 누가 뭐라고 하는가. 아내를 아내라 하지, 왜 거짓말해서 나를 당황케 하느냐? 아이고 실없는 사람,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답게 해야지. 아이고, 미안합니다. 갈랍니다. 그냥 가지 말고 여기 돈이나 쓰고 갈 때에 기근 때문에 우리 동네에 왔으니까 이것 가지고 양식 사 먹으라고 이렇게 여호와증인한테 도움을 받는 거예요. 이게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십니까 해도 뭐, 아는가 모르겠어.




옛날에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두세요. 옛날 중세 때 하고 근대 때하고 사람이 사는 게 달라요. 근대에서는 주체의식이 등장했어요. 중세 때는 그게 없어요. 근세 때는 나한테 무슨 의미냐, 나한테 뭐가 이익이냐? 이게 데카르트 이후에 근세 주체사상이 등장할 때입니다. 그러나 중세 때는 뭐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중세 때는 신과 인간만 있어요. 하나님 형상을 띤 인간만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속에서 따로 튀면서 나가 필요치 않아요. 나가 누구냐를 묻지를 않았습니다. 신부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인간이란 두루 뭉실 하나의 종, 무리, 전체를 신 앞에서 대비해서 신이시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렇게 묻던 시절이에요. 중세 때는. 내가 어떻게 한다는 게 없어요.




그런데 중세 때에 예를 들어서 지구 돕니까, 태양이 돕니까? 태양이 가만있고 지구가 돌잖아요. 근데 중세 때는 지구가 가만있고 태양이 돈다했잖아요. 그만큼 중세 때는 뭐냐 하면, 신의 계시, 성경의 계시가 권위를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근세 때는 과학이 발달하잖아요. 과학이 발달하다보니까 태양이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돈다고 했잖아요. 그런 걸 여러 가지 과학을 통해서 신의 권위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신의 권위가 없으니까 신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는 가치, 신의 권위가 없어졌으니까 신 자리에 누가 들어갑니까? 과학이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어떻게 하려하느냐는 필요 없지요. 이제 과학이 발달하고부터 뭐가 필요합니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나, 나. 너 말고 나. 너 말고 나. 너를 죽이고 나를 살리던 하여튼 너 말고 나. 나의 주체사상이 강렬해지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자본주의를 이 과학이 자본주의를 만들고 지금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런 거 안 묻습니다. 목사님, 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김 집사가 아니고 박 집사가 아니고 납니다, 나.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옛날에는 중세 때나 아리스토텔레스 그 전까지 뭐냐? 인간을 한 덩어리로 봐서 신 앞에서 옛날에 플라톤 같은 경우에는, 신은 진리고, 인간은 진리에 대한 모형이거든요. 모형이란 말은 허무하다, 허잡스레하다, 뭐 이렇게 부족하다, 온전치 않다, 완벽치 않다, 허무하게 소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영혼은 남아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간다. 이게 플라톤 사상입니다. 이게 헬라사상, 기독교에 도입된 헬라사상이에요.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부족하고 인간은 허무하고. 그러니까 허무한 인간이 허무를 통해서 완전을 끄집어낼 때 이걸 하나님 형상으로 보고, 그 형상 따라서 점점 계급이 있어서 착하면 신의 형상 많이 닮고 백정이나 창녀는 적게 해서 지배받아 마땅하고. 오늘날 같은 그 시절입니다. 그런 시절 때는 인간은 혼자서 나 하면 안 돼요. 나란 허용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더불어 사는 거예요.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냐? 인간은 무슨 동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동물이다. 이래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게 현재 근세 철학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랬던 우리가 근대 자본주의에 들어와서는 뭐냐 하면, 이웃과 경쟁관계에 들어가요.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고 이용가치죠. 그러니까 주체에 있어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나만 잘해주는 하나님만 오케이에요. 최고에요. 더불어 산다는 건 싫어. 나만 잘되면 좋은 하나님이고, 남 잘되고 난 못 되면 그건 나쁜 하나님이라. 교회도 꼭 자본주의 모습을 닮은 교회가 그렇게 대우 받았어요. 전 사회가 다 교회니까. 사회 자체가 그러니까 그 사회가 교회.




제가 이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우리란 인간의 사고방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유구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제가 알려드리는 거예요. 아까 목사님하고 식사하면서 이야기하다보니까 한국의 지금 대학교육이 문제라 난리를 쳐요. 굉장히 복잡해지고 하는데.




그거 한 마디로 뭐냐 하면, 각자각자 나나 위주로 살다보니까 그걸 대충 꿰어 맞추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다보니까 그런 희한한 입시제도가 생긴 거예요. 우리는 한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안녕을 위해서 이런 게 없고, 나나, 너너, 하나씩 잘 되려 하다보니까 이 사람 입맛 맞추고 저 사람 맞추다보니까 그렇게 이상한 입시제도가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름을 불렀던 말든 자기가 불렀던 아브라함을 그야말로 발가벗겨지게 만들어요. 하나님이 없는 구석에서 너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한번 두고 볼 거야 하는 식으로 굴욕 속으로 집어넣어버리는 그게 하나님의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해라. 나 혼자 한다, 나 혼자. 그게 하나님이에요.




아침저녁으로 부르는 하나님이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고 그런 것을 찾지 않을 수밖에 없는 나의 본색으로 되돌아가게 하시는 일,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왜? 그때 우리는 아브라함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우리가 아브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신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 층이 갈라지는 것을 통해서 다시 한번 알게 됩니다.




그 층이 갈라지는 것을 두 자로 뭐라 했습니까? 그걸 두 자로 뭐라 했어요? 말해보세요. 그게 뭐라고요? 거룩이에요, 거룩. 이제 거룩 개념을 아시겠습니까? 성화개념이 아니지요. 거룩개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확실히 하나님. 김영삼이 말대로. 하나님은 확실히 하나님이고 나는 확실히 죄인이고. 그 층이 분명히 나눠지는 그 관계를 가지고 거룩이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이게 온유, 화평, 자비, 양선, 형제우애가 그때만 나와요. 다른 때는 절대로 안 나옵니다.




집사님, 나는 개코로 죄인입니다. 이게 그 집사 들을 때는 화평, 그야말로 양선, 자비에요. 오뎅국 끊였는데 내 국을 안 먹어? 이러면 안 돼요. 양선 아닙니다. 니 먹어줬는데 내 점심했다고 안 먹어. 그냥 반찬 들여가지도 않고 말이야. 사랑이 있어야지. 그거는 횡포지요. 주께선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굴욕케 하는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어서 정말 나 같은 인간을 건진다는 것이 주님의 큰 배려였음을 정말 주님의 큰 배려이고 일방적인 긍휼과 불쌍히 여김이야말로 나의 구원의 근거입니다. 그걸 깨닫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살려고 미인계를 아마 사용했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자기 아내가 예쁘다는 것은 자기 혼자의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 뒤에 또 아비멜렉이 나오니까 자기 눈에만 예쁜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예뻤던 모양이죠. 그래서 여러분도 새순교회 교인들도 고민거리가 뭐냐 하면, 전부다 아내, 남편이 미남, 미녀라는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 새순교회는. 이거 참, 관리를 잘해야 돼. 누가 채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 관리한답시고 여호와 이름을 불러대지만 가는 곳마다 죄만 질질 싸고 있고 고민이라.




아브라함이 큰 대국에 그러니까 죽이고 살리고 하는 권력을 가진 바로 왕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은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나약하며 자기 믿던 신앙이 전혀 힘이 되지 못하는 것을 처절하게 절감하는 그러한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안 믿는 바로 왕이 나를 도와줄까 저 안 믿는 여호와증인이 나를 도울까 저 안식교인이 뭘 날 도와줘. 저 불교신자가 보살이 뭘 날 도와주겠어. 라고 그렇게 선입관을 갖고 있었는데 주께서는 놀랍게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을 통해서 나에게 흠뻑 자비를 베푸시니 정말 주님은 살아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그런 걸 느낀다 말이죠.




만약에 내 인간 층과 하나님 층이 혼재되어 있고 섞였다고 생각하면, 나의 적이 곧 하나님 적이고 하나님 적이 내 적이라고 착각을 벌일 건데 딱 분리된 상태에서 보니까 내가 도리어 하나님의 원수로서 나를 도와주러 온 사람을 내가 원수로 취급했던 그러한 오판과 오산이 자꾸 드러나게 만드는 또다시 나로 하여금 굴욕케 하는 그런 경험을 겪게 하시지요. 그게 주께서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신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아이고, 인간아 지옥이나 가거라. 라고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예상치도 못한 도움을 받았던가를 손꼽아 생각해보세요. 많을 거예요.




옆집에 온 불교신자가 맛있는 떡 해서 돌리고, 등산가서 절에서 비빔밥 맛있게 먹었을 것이고. 많은 도움을 기대했던 사람한테는 도움이 안 오고, 기대 하지도 않은 예상치도 않은 도움들을 주께서는 옆구리를 통해서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층과 나의 층이 이렇게 뚜렷하게 만드는 그것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저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겁니다.






10분간 쉽시다.   


게시물8,486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95   20061103a 울산강의-창세기 1장 녹취 한윤범 07-01-29 5364
196   20061103b 울산강의-창세기 1,2장 녹취 한윤범 07-01-29 5723
200   20061201a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 한윤범 07-02-06 4911
201   20061201b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 한윤범 07-02-06 5122
205   200702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2-13 5464
206   20070206b 부산강의-질의응답 녹취 한윤범 07-02-13 4559
207   20070206c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2-13 5193
213   20070105a 울산강의-창세기 4장(1) 녹취 한윤범 07-02-20 4965
214   20070105b 울산강의-창세기 4장(2) 녹취 한윤범 07-02-20 4911
224   20070202a 울산강의-창세기 5장 녹취 한윤범 07-02-27 5380
225   20070202b 울산강의-창세기 6~9장 녹취 한윤범 07-02-27 4972
239   20070302a 울산강의-창세기 9장 녹취 한윤범 07-03-10 5054
240   20070302b 울산강의-창세기 9~12장 녹취 한윤범 07-03-10 4914
434   200707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 한윤범 07-07-11 4127
245   200703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3-17 4824
246   20070306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3-17 4967
296   200700403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메시야 … (1) 한윤범 07-04-11 4352
297   2007004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인자, … 한윤범 07-04-11 5586
433   20070703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 한윤범 07-07-11 4290
326   woorich070224a-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1) 녹취 한윤범 07-04-30 4904
맨처음 이전 [1] [2] [3] [4] [5] [6] [7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