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07-04-30 15:57:11 조회 : 4418         
woorich070224b-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2)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32)
 

woorich070224b-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2)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정신적인 것이 정신을 낳지를 못합니다. 반드시 정신은 물질이 아니고 물질 외에 따로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정신을, 사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부인한다 할지라도 생각은 부인하는 나는 내가 아니야. 생각이 없어. 그 생각도 생각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원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것은 나 이전에 나를 나 되게 한 어떤 분에 의해서 생각이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그 생각에 따르다 보니까 아, 이것은 나고, 저거는 개고, 저거는 코끼리고, 구분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서 찾는가? 그것은 나도 아니고 너가 집어넣어 준 것도 아니니까. 너, 나와 물질을 그 외에 다른 또 있으면서 존재케 하는 것, 존재케 한 그 무엇, 이걸 신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은, 인간들 생각에 반드시 신은 뭐가 되느냐 하면, 존재케 한 그 무엇이 신이라면, 신은 반드시 무엇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존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신이 있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뭐가 '있다'라 할 때 어이, 있는 거, 너 누가 있게 했어? 반드시 물음이 성립되거든요.




어이, 너 있는데 니 왜 있는지 나 안 묻겠어. 이런 거 없다 말이죠. 너 출신이 어디야. 너 누가 너로 하여금 있게 만들었어. 이건 남이 안 묻더라도 본인이 묻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은 이거는 신일 수밖에 없다. 왜? 너가 아니니까. 또 나도 아니니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면 그렇게 너, 나를 따지게 했던 그 따질 수 있는 하나님이 따로 있지요.




그러면 이 신은 우리의 존재의 사유, '사유'란 생각이죠. 생각을 주니까 신이 뭐가 되냐 하면, 이게 신이 지성이 되죠. 지성을 가진 분이 되죠. 지성을 가진 분.




다시 그 논리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신이 있지만 그냥 대자연이 신이야. 신은 없어. 그냥 대자연이 서로 섞이다 보니 신이야. 라고 할 경우에 뭐가 딱 걸리고 뭐가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게 아니고, 나는 생각해야 돼. 해서 열심히 했더니만 생각할 것 같으면 나는 그렇다 할지라도 남도 나같이 그렇게 된다는 말은, 이거는 각자각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생각하시는 분이 먼저 계셔서 그 생각하시는 분이 자기의 성격 따라 그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지음 받은 피조물이 생각하는 창조자에 따라서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창조자의 지성에 따라서 같이 지성적인 인격체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지성이 있다는 말은 우리를 만드신 그분도 지성이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지성이 있다는 말은 곧 뭐와 같으냐 하면, 그분은 바로 우리들과 같이 어떤 목표를 향하여 목적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추세로 전 세계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 라는 것이 그쪽 주장이에요.




그렇게 신은 그냥 만들어놓고 아이고, 마음대로 살아라. 이런 게 아니라 애야. 예. 너도 뭐든지 니 마음대로 사나? 이렇게 하나? 아닙니다. 너는 어떻게 사는데? 저는 목표를 향하여 어떤 목적 없는 행동은 없습니다. 그렇지? 너만 그런 줄 아나? 누구도 그래요? 나, 너를 만든 신도, 나도 그렇다 말이죠. 그때부터 사람들은 뭘 생각합니까? 내 작은 사적인 목적과 거대한 신이 벌이시는 그 목적과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느냐 그걸 따져서 내가 벌 받겠는가, 축복 받겠는가 가름하겠지요. 그렇지요.




그 한 예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해보면 그 예가 뭐냐 하면, 신의 뜻을 알아야 돼요. 신의 뜻을 알아차리면, 신의 뜻을 왜 알아야 되느냐 하면, 신의 뜻을 우리가 몰라도 신의 뜻은 그대로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의 뜻을 내가 안 알아도 신의 뜻대로 가져가요. 왜 구태여 알아야 되느냐 하면, 신의 뜻을 알아야 내가 행복해. 왜? 신의 뜻을 어긋나면 나는 거대한 신의 뜻에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게 되죠.




신의 뜻이 뭐냐 하면, 신의 뜻을 어떻게 아느냐? 신의 뜻을 아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잘 들어보세요. 신의 뜻은 신의 머리를 해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신이 남긴 모든 대자연의 변화가 신의 뜻입니다. 왜냐? 자연이라 하는 것은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근데 대자연을 분석해 보면 신의 뜻이 분석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럼 대자연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음양으로 되어 있어요. 반드시 대립되는 개념으로 짝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창세기 1장. 낮이매 밤이 되니 하루가 되죠. 한 날이 돼버리죠. 낮이 오면 밤이 있고. 그리고 아픔이 있으면, 행복이 있으면 비극이 불행이 높은 곳이면 낮은 곳이 있고.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고. 모든 것이 음양의 조화로 되어 있습니다. 동양적으로 말하면 음양인데, 서양적으로 말하면 대립된 서양적으로 말하면 양을 사랑이라 하고 음을 미움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죠. 모든 게 사랑과 미움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사랑과 미움으로.




이걸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랑은 뭐로 하면 되겠습니까? 축복이고. 미움은 뭐가 되겠어요? 저주 되겠지요. 축복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뭐가 되느냐? 선이 되고, 저주는 뭐가 됩니까? 축복은 선에 대한 보상이고, 저주는 악에 대한 보상이 되죠. 처벌이죠. 신의 뜻을 안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신의 뜻에 부합하면 누가 손해 봅니까? 내가 손해 보잖아요.




전에 여러 번 광주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여기서 이야기했고, 황금돼지날에 뭐가 중요하다? 소 띠, 닭 띠, 뱀 띠가 삼재가 임하니까 절에 가서 시주하라 이 말이죠.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음양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어데 니가 사사로운 인간이 건방지게 신의 뜻을 어겨? 바쳐라.




니가 신의 뜻을 이해하면, 어느 구조로 되어 있느냐 하면, 신의 뜻은 파동으로 되어 있어요. 양자역학 또 나와야 되는데. 신의 뜻은 파동으로 되어 있어요. 모든 주위의 일이 다 파동이란 말이죠. 이 변화가. 변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닙니까. 이게 바알 종교 아니에요. 바알 종교. 죽었다가 소생하고 소생한 것도 사라지고 이것이 파동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늘 좋고 늘 슬픈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슬플 때가 있고 언젠가는 기쁠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다 이 말이죠. 지금 올라갈 타이밍이냐, 내려갈 타이밍이냐를 해야 돼요. 지금은 소 띠 하고 닭 띠하고 뱀 띠는 내려갈 타이밍이라니까. 따라서 신에게 잘 보여서 보상하면 그냥 거저먹기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결국은 신의 뜻에 부합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이거는 젊은 사람은 모르는데 나이 조금만 들어보면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남이 이 세상이 밀치는 대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걸 느껴요. 그렇다면 미는 그 타이밍, 이러한 커브를 알아서 그때 아파트 투기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선과 악이죠. 신의 뜻이 내 안에 들어올 때 뭐가 된다? 선과 악이 되죠. 여기서 뭐가 되냐? 윤리가 생겨요. 윤리와 도덕이 생겨요. 도덕은 사회적이고 윤리는 개인적으로 보면 윤리와 도덕이 발생되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신의 뜻은 음양적인 조화지만 내 안에 있는 신의 뜻은 뭡니까? 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거예요. 야, 이거 사도 바울과 똑같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우리가 구원됨은 선한 일에 힘써 행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함이라. 이거는 유다서 1장 1절입니다. 똑같네, 똑같아. 그래서 만약 안 하면 벌 받고 저주받고.




그러니까 불교 스님들은 수녀들은 이 사도 바울 성경책 이걸 달달 외워요. 외우고 공부해요. 공부하는 학자들은. 중들은 보면서 이거는 뭐, 부처님 하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예수가 온 것은 뭐냐 하면, 이 신의 뜻의 선한 쪽의 모델로 보여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선 쪽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스데반 집사처럼 순교하는 일이 있더라도 신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신의 뜻만 이루어지게 하는 신의 뜻만 드러내기 위함이라. 누가? 중들이.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중들이.




배설물을 버린다고요? 지금 뭐가 배설물인지 알고나 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알고 배설물, 버려야 될 거, 이런 거 다 버려야 돼요. 그런데 이거 버리면 한국교회 자체가 안 됩니다. 이거를 복음이라고 쥐고 있으니까. 아주 깊이 있게 은혜롭게 이런 미사여구를 쓰면서.




서양의 신학은 바로 이게, 다시 말하면 존재가 있다는 것은 신이 있고, 신은 존재를 거부하지 않고 신은 존재와 항상 결탁된 채 존재를 통해서만 신은 자기 뜻을 드러낸다. 그런데 결국 가만 보니까 뭐였더라? 개인적인 윤리였다 이 말이죠. 윤리 도덕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선한 뜻을 많이 품게 되면 그러면 이 무한과 유한 사이, 그러니까 신과 인간 사이에 딱 붙어 있겠습니까, 멀찍이 떨어져 있겠습니까? 떨어져 있겠지요. 그죠? 떨어져 있을 것 아닙니까. 여기에는 뭐가 있겠어요?




아, 첫 번째 시간 다시 합시다. 의사소통이 안 되시는데. 첫 번째 강의 중요한 대목 다시 해봅시다. 이거 중요해요. 나 원과 나 투 사이에 나 원과 나 투가 떨어져있습니까, 안 떨어져 있습니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안 떨어져있습니다. 나 투는 어디서 발생된 거예요? 나 원에서 투입된 것이 만들어져서 나 투가 되지요. 온갖 것 집어넣어서 나 투가 되잖아요.




그렇다면 이러한 왜 그러느냐 물으면, 인간은 그냥 가만있는 인간이 없고 반드시 뭐가 있다? 목표를 두고 목적 지향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목표를 목적 지향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나만 그렇습니까, 남도 그렇습니까? 남도 그렇지요. 남도 그렇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우리 인간을 인간되게 만들었던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신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신은 나 투가 필요 없으니까 신은 신밖에 없으니까 신은 투를 누구로 보느냐 하면,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은 목적과 목표가 있지요. 그것은 뭐냐? 인간을 거쳐서 신의 사람으로 다시 만드는 것, 이런 경로를 밟는다 말이죠. 이 경로를 와서 목적 주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신학이라는 것은 간단하죠. 뭐만 알면 돼요? 신의 경로만 빼내서 우리한테 이야기하면 신학은 할 일 끝나는 겁니다. 이 말입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철학자들이.




신이 어떻게 하강해서 우리 안에 있으면서 어떻게 우리 속에서 다시 우리를 가지고 같이 동반해서 상승하느냐? 이거만 하면, 이건 뭐 진짜 하나님 와도 잘했다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 받을만한 멋진 완벽한 신학이 된다 이 말이죠.




제가 언약적인 신학을 이야기 안 했더라면 여러분 지금 실망합니다. 절망합니다. 아이고, 맞는 이야기인데 목사님, 맞는 이야기를 왜 자꾸 아닌 것처럼 던집니까? 내가 보기에는 다 맞는 이야기네요. 우리는 그렇게 알았어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 상당히 절망하고 나중에 저한테 돌 던지고 할 수도.




신의 자기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친히 만든 그 존재자 속에 신의 성품을 집어넣어서 그 집어넣은 신의 성품을 요리조리 요리해서 다시 신의 성품에 합류하게 하는 이것이 인간들이 만든 인간 구원의 신학의 구조다 이 말입니다. 구조.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뭘 해야 돼요? 결국적으로 우리 속에는 우리는 가만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코스에 방해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무한적인 신의 능력이 총동원 되고 있는데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발 걸고 때리고 돌 던지고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같이 뛰어야 된다, 같이. 웃으면서 같이 뛰어야 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뭐로 반응 나타내야, 뭐로 협조해야 됩니까? 신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서 우린 뭘 해야 돼요? 악은 버리고 선은 행해야 된다. 그게 성화론 아닙니까?




그럴 때 선을 많이 행한 사람은 신에 대해서 많이 알고 천상의 요소가 많으면 천사에 가깝고, 만약에 그런 신의 뜻을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놈들은 악마 쪽에 가지요. 악마는 뭐를 입는다? 프라다를 입는다. 악마 쪽에 가깝지요. 그래서 그러면 악마는 누구한테 교육 받아야 돼요? 신의 뜻을 보다 많이 아는 천사님들한테 교육 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 천사님들의 대행자가 누구에요? 신의 사자 아닙니까. 누굽니까? 목사 아닙니까, 신부.




그러면 교회는 뭐가 있어야 돼요? 계급이 있어야 돼요. 할렐루야! 교회 계급이 있어야 돼요. 그걸 가지고 영적 권위, 또는 영적 카리스마, 영적 질서 하지요. 그래야 교회 꼴이 난다는 거예요. 교회하고 집사하고 같이 사찰하고 같이 목사하고 같이 맞먹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신의 뜻이니까.




그런데 중세에서는 교회에만 멈추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 확산시켰다? 일반적인 사회, 농노제도까지 봉건제도까지 다 확산시킨 거예요. 그걸. 이건 마치 뭐의 재현이냐 하면,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이스라엘 자체를 신앙적 공동체를 만들 때 그걸 그대로 재현하신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왔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이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이 말은 누구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바로 자기 딴엔 완벽한 신학체제를 갖고 있는 바리새인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할 때는 이건 뭐냐? 전복이에요.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린 거예요. 뒤집어엎어 버리려고 하니까 그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니나 죽어라 하고 밀쳐버렸잖아요. 그런데 이게 예정된 코스입니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인간의 이름에 의해서 주의 이름은 살해당해야 돼요. 거기서부터 새로운 자아, 새로운 신학이 전개된다 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구체적인 신학이 어떻게 신의 무한이 유한 속에 머물면서 다시 유한을 이끌고 돌아가는 그 과정에서 그걸 이끄는 그것을 신기도 아니고, 무당의 신기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이거는 인간 속에 있는 정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또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모상이다. 형상보다 모상이라는 게 왠지 더 가깝게 느껴지지요. 모상이 뭡니까? 모방이란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작은 신. 큰 신이 있으면 작은 신. 넘버 2에요. 이 세상에서. 큰 신이 있으면 그 새끼 신, 작은 신이 되는 거예요. 작은 신이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면, 어쨌든 작은 신이지만 우린 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작은 신, 큰 신이 있다면 그 다음부터 큰 신, 나이키 그런 신 말고, 큰 신 있고 작은 신이 있다면 여기서부터 신학은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뭐가 복잡해지느냐 하면, 작은 신이 할 책임량이 있고 그 몫이 있고 역할이 있고. 작은 신이 할 역할이 있잖아요.




만약에 칼빈의 예정론을 집어넣어버리면 뭐가 죽습니까? 작은 신이 할 게 없잖아요. 칼빈의 예정론을 여기다 어떻게 집어넣어야 될까 문제가 생기게 되었어요. 사실 그전부터 문제가 있었지만. 칼빈의 예정론부터 이전부터 카톨릭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극구반대하면서 예정론 주장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비주류에요. 그거는 입 다물어. 이래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큰 신과 작은 신 사이에 하는 역할이 뭐냐 이 말이죠. 여러 가지 있죠. 첫째, 큰 신은 대략적인 것만 이야기한다. 설계도만 하고 그냥 팔짱끼고, 잘해. 열심히 해야지. 그냥 코치로서 한다. 나머지 실무는 작은 신이 한다. 이런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말이죠. 이런 주장이 있게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작은 신이 잘못했을 때 그 책임을 작은 신이 지느냐, 큰 신이 지느냐 하는 이 문제가 남아요.




왜냐하면 자기한테 분명히 저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인데, 그 집사가 목사한테 대들어서 목사가 기분 나빠서 너, 성찬식 참여 하지 마. 저주받을 놈이야. 해서 그 사람을 신앙을 낙담케 했을 때에, 마치 이삭이 야곱이 복 받을 자인데 이삭은 자기가 별미를 좋아해서 억지로 큰 아들 에서한테 축복이 돌아가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잖아요. 그럴 때 그게 문제가 아니고요. 그 사람을 생명책의 리스트에 있는 사람이니까 돌아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돌아오는 능력은 누가 책임지느냐 이 말입니다.




목사가 가서 아이고, 집사님. 잘못됐습니다. 내가 사적인 감정 때문에 저주했는데 그거 취소, 취소, 취소. 내 교회 앞에 공포할게요. 아무개 집사는 내가 저주했지만 성품상 정말 훌륭한 집사고. 이렇게 반성해서 내가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것이냐? 아니면 그 사람을 타락시키는 힘은 목사한테 있더라도 타락된 자를 돌아오게 하는 큰 신, 우리 하나님이 나설 거냐? 그 문제 모호해요. 그 경계선이 모호해요. 어느 쪽 하느냐 가부 물을까요? 여러분 어느 쪽이 적당할 것 같습니까?




문제가 생겨요. 만약에 인간은 형제를 타락케 할 수는 있어도 타락된 형제를 돌아오게 할 능력이 없다고 돼 있다면 아주 기분 좋지요. 마음껏 성질대로 해도 삐지고 돌아가도 책임은 누가진다? 큰 보험회사에서 책임보험 되어서 다 해주니까 마이카가 다 알아서 해 주니까 지는 사고만 저지르면 돼요, 우리는. 그래 되는 거예요.




그래 되면 마지막 심판 받을 때 문제가 생겨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타락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회복되었다면 그 사람을 타락시킨 목사는 어떤 공로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크심을 더욱더 나타내게 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로자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최 집사님께서 목사한테 상처 받았는데 하나님 은혜를 주셔서 회복되었다면, 그 최 집사님은 하나님, 저 목사 아니었으면 주의 은혜를 모를 뻔 했습니다. 저 목사가 아니었으면 저는 목사만 믿고 구원받는 줄 착각했습니다. 라고 깨닫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럼 깨닫는데 공로자가 누구에요? 자기를 타락케 한 목사가 공로자가 되는 겁니다. 전적으로. 그럼 가룟 유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표창장을 받아요. 이름 가룟 유다. 귀하는 주의 일에 지대한 공로를 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케 했기 때문에 상장 받는 수가 생긴다 말이죠.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만약에 책임을 이쪽에서 진다면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람이라도 중간에 사람이 저질러 버리면 두 번 다시 회복될 길이 없어요. 왜냐? 최 집사님. 제가 잘못됐습니다. 내가 말을 주둥이가 내가 말을 왜 그렇게 했을까. 아무리 반성해도, 그 최 집사는 저 목사가 지금 이게 하는 게 버릇이야. 이런 한번 큰 소리 쳤다가 또 회개하고,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원래 술 먹고 마누라 패는 인간들이 그게 버릇입니다. 잘못됐다 빌어도 소용없어요. 또 술 먹고 팹니다. 그러니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자기가 타락한 것을 자기가 책임지고 돌이킬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럼 결국 무슨 문제입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너, 너, 너 구원받는다고 하더라도 마귀가 나선다든지 중간에 인간이 나서버리면 그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도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의 작당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는 본인이 하나님께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본인이 잘 견디다가 마지막 칠십 다섯 살 때 그때 한번 타락해서 지옥 갈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본인이 여력이 안 되서 지옥 간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지요. 니 잘못인데 어쩌겠냐.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문제 때문에 중세에서 고민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문제냐 하면, 단순이 어떤 사람이 구원받고 구원 안 받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린 능력이 인간에 의해서 그게 취소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가 인간의 범죄적인 성향에 의해서 그 은혜가 막힌다든지 안 그러면 비껴간다든지 은혜 줘도 나 안 믿어. 라고 버틴다면 과연 은혜가 너는 아무리 은혜 줘도 안 되겠구나. 할 수 없지, 뭐. 철수해 가는 그런 경우가 생기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해결하는가 보세요. 참 이런 고민거리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그걸 풀어헤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특징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게 자력적이에요. 하나님 형상은 자립적이다. 독자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은 독자적이다.




이거는 왜 이런 소리하느냐 하면, 인간은 무엇과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그냥 형상이라 합시다. 형상과 또 뭐로 되어 있어요? 육체로 되어 있지요. 육체는 어떻게 돼요? 늙어 죽으면 없어지지요. 흙으로 돌아가지요. 결국 뭐는 남아야 돼요? 형상은 남아야 되죠. 이것까지 없어진다는 것이 여호와증인이고. 오늘 아침에 찾아왔어요. 문 콱 닫아버리고. 요새 날 따뜻하다고 미리 4월 달에 오는데 2월 달부터 왔어요. 날 따뜻해 노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자, 죽어서도 형상은 있을 것 아닙니까. 육체는 죽었으니까. 만약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주님의 형상이 있겠지만 어쨌든 간에 죽은 사람은 영혼만 남아있을 것 아니겠어요. 만약에 형상이 자력적이 아니고 비자력적이라면 독자적이 아니라면 형상은 반신불구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샴쌍둥이가 하나 죽더라도 나와서 한 쪽을 찾는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비자력적이라면. 그러니까 육체로 있을 때는 말도 곧잘 하고 생각도 곧잘 하던 사람이 죽어서는 말도 못하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어디 갔습니까? 아브라함 품에 안겼잖아요. 살아 있어서 거지 때는 거지라도 말은 잘 했었는데 육체를 잃고 난 뒤에 전부다 말을 못하는 거예요. 다다다다. 왜? 반신불구가 되어서. 이럴 수는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육체로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형상이 주도권을 쥐어야 되는 거예요. 이걸 하나님의 영혼의 자립성, 형상의 자립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연구 많이 해요. 그 사람들 연구 되게 많이 해요.




자립성이라는 말은 여기서 중요한 거 끄집어냅니다. 자립성이 잇다는 말은 독자적인 어떤 자유가 허용돼야 돼요. 자유가 허용되지 아니하면 심판이란 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집을 짓는데 집이 잘못됐다. 그러면 채찍 때리고 벽돌 때립니까? 벽돌이 뭐 했다고. 벽돌은 그냥 시키는 대로 옮겼을 뿐인데. 잘못은 누가 했어? 설계도, 형상, 생각하는 사유를 갖고 있는 설계자한테 잘못을 물어야지, 벽돌이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시멘트가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시멘트, 이리 와. 죽었어. 여기에 들어갔어? 그 시멘트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철저하게 하나의 인격자가 되려면 하나의 독자적이 되려면 하나님 형상 나름대로의 자유성이 보장돼야 되는데 이 자유성이 절대적 자유성으로 보장돼야 돼요. 그래야 마지막 심판 받을 때 재가 잘못해서 내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남 탓을 안 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이거는 제가 잘못한 겁니다. 라고 수긍이 되려면 절대적 자유성 가지고 해야 돼요.




그런데 자, 여기 큰 신, 작은 신 봅시다. 절대적 자유성을 갖게 되면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자기 절대적 자유성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온갖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온갖 짓을 늘어놓을 텐데 그러면 거기에 대한 뒤처리는 하나님이 따라다니면서 다 처리해야 되는가? 그건 어떻게 되는가?




이게 방금 영혼 문제가, 무한이 유한에 머무는 양상, 이 대목에서 이거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죽음에서 살아남은 영혼은 하나의 실체이자 온전한 실체여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쭉 했고. 여기 보면 자립적 형상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유한자에서 방출된 무한에 보면 영혼의 활동성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 대목은 난 더워서, 안 벗습니다. 전국적으로 방송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보면,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만은 신의 섭리적 직접적 적용이 배제된다.] 그런 말이 있어요. 인간의 선택할 때는 하나님의 신의 섭리 적용이 배제돼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기계, 로보트가 되니까. 기계가 되니까.




그렇다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이걸 제가 큰 신이라 했잖아요. 큰 신을 제일 원인자라 하고, 작은 신 인간을 가지고 제이 원인자라 이렇게 지금 교재에서 하고 있지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제일 원인자, 제이 원인자라 했는데. 만약에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택적 행위를 해야 되느냐 하면, 그것은 정답은 뭐냐? 다양성 때문에 그래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각은 이런 겁니다. 얼마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 중심적인가 한번 보세요. 내 개인적으로 구원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게 되면 하나님의 자유와 마찰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일도 내가 방해할 수가 생긴다. 그래서 이거는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라고 되겠는데,




하나님께 전체를 운영하는 하나님의 넓은 관점에서 안목에서 보게 되면, 인간에게 어떤 선택성을 주고 자유를 주는 것은, 니가 멋대로 한번 살아봐라. 멋대로 살면 콩닥콩닥 멋대로 살 게 아닙니까? 그러면 인간이 멋대로 살고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멋대로 살다보면 여기서 다양성이 나오겠죠.




다양성이 나오게 되면 어떤 오류를 피할 수 있느냐 하면, 내가 개인적인 사업을 하면서 신의 뜻은 이것이고 신의 뜻은 저것이고 이렇게 내 사적인 욕망과 욕구에 의해서 결정되던 신의 뜻이 아니, 다른 사람들 사는 걸 보니까 야, 신의 뜻이 내 개인적인 욕심과 달리 더 넓은 범위가 있구나. 하고 깨닫게 하는 그러한 환경을 조성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는 마누라 죽고 사업 망했어. 난 자살해도 마땅해. 하나님이여, 자살하는 자유를 나는 선택해서 자살하겠습니다. 이거는 하나님도 할 말 없지요? 라고 있는데 세상에 자살하는 사람, 나한테 와서 한 푼 줍소. 하고 오더란 말이죠. 나는 그래도 아무리 지금 내가 뭐, 마누라 죽고 뭐, 사업 망해도 저 사람보다 낫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왜 삽니까, 나는 신이여, 왜 있게 하십니까? 내가 신의 뜻을 너무 좁게 생각했구나. 신의 은혜를 너무 작게 생각했구나. 이렇게 자살할 수 있는 약을 먹을 수 있는 약값도 주의 은혜인데 나는 이것도 모르고 내 개인적인 열망과 욕심에만 매여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건 눈에 안 들어오고, 내 열망이 뜻대로 안 해 준다고 함부로 내 자유를 내 처분하는데 내 죽는데다 행사했구나. 주여, 내 신의 뜻을 너무 좁게 생각했습니다. 라고 다양성에 눈 돌리게 한 그 자체가 넓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겁니다.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감동의 물결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다양성이라는 것은 이 말은 뭐냐? 결국 이것은 뭘 하느냐 하면, 집에 가서 혼자 인터넷 보고 신앙생활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지순 씨. 집에 가서 혼자서 신앙생활하지 말고 모여야, 모여야. 아참 지금 모이잖아. 모이죠? 내 공개적으로 말해서 미안합니다. 지금 전도사님 맞지요? 미안합니다. 옛날 생각나서. 옛날에, 옛날에. 지금 아니고 옛날에.




사람이 같이 모여야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나만의 신의 뜻이 얼마나 그게 철없는 생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다양하게 일하는데 우리는 좁게 나 구원만 챙기고 내 복만 챙기는 개인적인 것이다 말이죠.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는 뭐냐? 결국 개인적인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것은 선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선이 아니고, 그럼 뭐가 선이야? 전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때 그게 선인데, 그 선을 인간이 평생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계속해서 정진, 정진, 거룩 또 거룩을 계속 해나가자 이 말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뭘 가지고? 주신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속이지 말고, 뭘 하고? 마음대로 선택을 발휘해서 이걸 통해서 하나님의 그 넓은 섭리를 점차점차 그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는 그것에 매진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 뜻에 합당한 성도의 생활이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빈틈이 없어요, 빈틈이. 완벽하지 않습니까? 내가 왜 갑자기 신나노.




이것은 어렵게 이야기해서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더니만 나중에 더 넓은 것을 알고 보니까 그게 내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고 내 행동 자체가 우연적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거는 내가 선택했다고 우겼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으신 하나님의 더 깊은 하나님의 필연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내가 이거 할까요, 말까요? 라고 자기 행동을 필연으로 삼을 때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다양성을 모르는 오류에 빠지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일 안 해도 하나님이 일 다 하시는데 내가 뭐 하려고 일하노? 이거 있잖아요. 내가 일 안 해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는데 내가 왜 일을 해? 내가 복음 안 전해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할 건데, 내가 기도 안 해도 주의 기도대로 다 해줄 건데, 내가 뭐 한다고 해?




이것이 바로 자기 나름대로의 필연적인 것, 이것이 바로 필연이라고 여기는 그 필연은 사실은 필연이 자기 혼자 착각한 필연이다. 그것마저 깨어지기 위해서 다양성. 예를 들어서 갑자기 무슨 액운이 덮친다든지,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든지 해서 기도 안 하고는 못 배기도록. 하나의 예를 들면,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돼지 새끼 낳는데 기도 못 한다. 박사교회 있을 때 어떤 집사님이 차 위에 올라가서 기도해달라고 할 때 저는 차에 올라가진 않았지만 그냥 기도는 해줬어요. 집에서 기도해줬는데.




복음을 아는 목사가 차 샀다고 기도하면 되느냐? 당신의 그 복음을 확신하고 필연적인 건 뭐냐? 절대로 그런 것은 기복신앙은 기도해선 안 된다는 게 필연이잖아. 라고 여길 때 그 필연은 나 혼자 필연이죠.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준 것은 필연이란 조건을 파악해서 그것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게 아니고, 내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은 늘 깨어지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서 늘 깨어지는 용도로서 주신 겁니다. 그것마저 깨어져야 되고 또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거죠.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미 철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철학적으로.




그래서 이렇게 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면, 이 부분이 상당히 은혜롭고 참, 목사님, 천주교가 복음적이네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이렇게 될 경우에 제일 원인, 큰 신이 결국은 뭘 앞장 세워서? 중개자, 작은 신을 앞장 세워서 자기 뜻을 펼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작은 큰 신에게는 필수불가라는 거죠. 없으면 안 되는 거죠. 이걸 작은 신이 뭐냐? 이걸 매개한다 해요. 매개체로 사용하는 거예요.




천주교가 왜 마리아를 포기 못 까? 마리아는 무슨 역할 하는 겁니까? 큰 신이 작은 신을 하나의 매개로서 훌륭한 매개자로서 모델이 되기 때문에 마리아를 포기 못해요. 이미 쉰 새벽에 가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매개체로 삼아서 마리아는 모든 성도의 모델이니까 삼을 만 한 거예요. 매개체로서 필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이와 유사한 신학이 있어요. 그게 중보기도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묻고 싶어요. 저, 기도하고 중보기도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답변 못 합니다. 답변할 수가 없어요. 기도는 뭐고, 중보기도는 뭐냐 말이죠. 왜 중보기도 하느냐?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왜 중보기도하고, 기도하고 차이점이 뭐냐? 물으면 이렇게 답변할 겁니다. 기도는 안 돼도 하는 게 그냥 기도고, 중보기도는 하면 백발백중 되는 게 중보기도고. 아마 이렇게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 차이점 밖에 없을 거다 말이죠.




그러니까 병원에 특진 받는 거. 그냥 하는 건 일상적인 기도고, 특진, 반드시 책임지고 당신 낫게 하겠습니다. 하고 집중 기도하는 걸 특진 받듯이, 중보기도라 하는 것은 한 사람 조지기. 한 사람만 아예 집중적으로 기도해서 그 기도의 효과를 반드시 끄집어내는 것. 그거 아니면 그냥 기도하지, 뭐 때문에 중보기도 하겠습니까?                


                


이런 중보기도라는 것은 결국은 뭐하느냐 중보기도 하는 당사자를 천주교의 마리아처럼 하나의 가치를 인정하는 셈이 되겠지요. 그죠? 인정하는 셈이 되면, 그러면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대한 바와 달리 중보, 매개체 되는 중보자, 이걸 성도라 하죠.




성도가 개인적으로 나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매개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 매개체끼리 뭐가 일어나겠어요? 여기서 경쟁이 생기고 뭐가 생기겠습니까? 비교가 생기는 거예요.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받겠다는 뜻에서.




집사님은 기도 몇 시간합니까? 중보기도. 나는 두 시간합니다. 내가 한 시간 밖에 안했더니만 기도 응답이 늦다. 앞으론 한 시간 더 끌어올려야겠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개인이 하나님의 자유를 줌으로서 그 자유를 가지고 내가 전체적인 다양성을 모른데서 오는 어떤 부족함을 깨닫는 그쪽이라면 그것은 교회는 그렇게 써먹지 않아요.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매개체의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 더 가치가 우월 하느냐, 안 우월 하느냐를 모든 것이 나의 가치로 되돌아오는 방향으로 쓸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더 근본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계신데 왜 지가 중보자로 나서야 됩니까? 도대체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계신데 지가 왜 중보자로 나서야 됩니까? 이 매개체, 중보자 같은 말이에요. 중보자가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 중보자의 가치에 따라서 다른 사람이 타락하고 구원받는 그런 결과가 이게 연결고리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참 저 사람, 말을 잘못해서 타락했구나. 저건 내가 설교 잘해서 구원받았구나.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님이 할 그게.




그러면 아마 사도 바울이 그랬더라면 사도 바울은 자기 손수건을 공장에 맡겨서 한 천 장 찍어냈을 겁니다. 손수건 가지고 죽은 사람 살려내니 자기 손수건이잖아요. 노란 손수건이 아니고 자기 손수건 아닙니까. 자기 손수건 가지고 그냥 찍어내면 되잖아요. 이러한 심보가 지금 다 깔려 있습니다. 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마르크스가 뭐라고요? 자기의 유용가치를 뭐로 환산한다? 돈으로 환산해서 경쟁하는 것이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자, 오늘 잠깐 정리하도록 하죠. 너무 많은 걸 해서 여러분 헷갈리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성도 속에 함께 있는 게 인간의 신체 말고 뭐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근데 하나님의 형상은 뭐다?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코스를 밟는다. 그럼 독자적인 코스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확립시키고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자, 그러면 심판을 하려면 인간의 행동 따라서 잘했다, 못했다 판정이 되려면 그러면 개인적인 양심이라는 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느냐, 않느냐  판단할 수 있느냐 할 때 천주교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노'합니다. 놀랍게도.




양심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자기 변명조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법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양심의 부족한 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나님의 법이 된다는 겁니다.




이 교재에 나옵니다. 인간을 위한 신학 그 전에 보면, 이 법이 나오는데 영원법이 있어요. 영원법을 인간이 몰라요. 영원법이 있는데 이 영원법은 하나님만 알아요. 사람은 몰라요. 하나님만이 아는 영원법이 있어요. 그런데 뒤에 뭐가 있어요, '영원' 다음에 뭡니까? 법이죠. 법이니까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세상의 어느 구석도 이 영원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안 벗어납니까? 답변 하세요. 강의가 너무 축 처지기 때문에 답변해야




법이 있다는 말은 어떤 인간이 마귀가 설치고 천사가 어떻게 반란해도 법에서 영원법대로 됩니까, 안 됩니까? 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예요. 인간은 몰라요. 영원법. 그건 영원법이고.




도덕법은 이 영원법을 기초로 해서 도덕법이 생겼어요. 이 도덕법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자연법이라고 합니다. 이게 자연법이에요. 인간은 영원법은 몰라도 뭔 알아야 됩니까? 도덕법, 자연법은 알아야 돼요. 아는데 그 자연법이 인간의 양심에 의해서?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변명, 맨 날 행동해 놓고 양심대로 했다. 이래 되니까 그건 안 되고.




여기 뭐냐? 자연법을 아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이 법을 아는데 인간에게는 뭐가 있느냐? 이성이 있는데 이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형식 이성과 실천 이성이 있어요. 실천 이성을 가지고 이걸 윤리라고 합니다.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옳다, 그르다 이것만 아는 거예요. 아, 저건 옳은 것, 저건 그른 것. 하지만 실천으로 안 옮기면 그만 이에요.




그러니까 실천하기 전에 뭐부터 알아야 돼요?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가 돼야 그 다음에 실천에 나서든지 안 하든지 하지, 옳은지 않은지 그것도 모르고 실천에 나서지는 않으니까. 하나님의 나쁜 것은 안 할 테니까 뭐가 나쁜지는 알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할 때 이것이 나쁜 것이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형식적으로 되고, 그 형식이론에 맞추어서 아, 그른 것은 거부하고 옳은 것은 해야 되겠다. 실천 이성이 동원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이론에 의하면? 있지요. 이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에겐 뭐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 형상 안에 뭐가 있다? 자유.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은 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법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우리가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형식 이성과 실천 이성을 줘서 형식적으로는 옳다, 그르다만 판정하고, 그 판정대로 옮길 수 있도록 실천 이성하도록 어떻게 힘을 더하는 실천하는 윤리를 행하도록 하는 방법을 따라서 우리 모든 피조물들이 영원법에 또는 그 밑에 있는 자연법에 순종하도록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자, 그러면 이 윤리 도덕법, 자연법 안에 이것 하고 성경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자연법 안에 뭐가 있느냐? 영원법 말고 무슨 법이냐 하면, 구체적인 법이 있어요. 그게 교회법과 모세법. 모세법과 그리고 교회법이 있습니다. 그 밑에 있는 게 뭐냐? 사회법이에요. 자꾸 밑에, 밑에 하는 이유가 요 까지는 밑에, 밑에 하는 요것은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서 수정 가능해요. 교회법도 역사에 따라서 천주교에서 모여서 회의하면 달리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런 것은 자연법은 (      )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세상 법정에서는 뭐까지 다룬다? 사회법으로 다루더라도 교회에서 당신은 성만찬, 성례식 참석하지 마. 하면 지옥 가야 되는 거예요. 사회법적으로 원고 승소해도 사회법보다 뭐가 더 위입니까? 자연법이 더 위죠. 자연법은 어디서 보여줍니까? 성경 모세법과 교회법.




또 모세법에는 뭐가 포함되겠어요?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법도 포함되겠지요. 이 법이 뭘 위다? 사회보다 위이기 때문에 결국 교회는 뭐보다 위입니까? 교회는 국가보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위에 있는 거예요. 교회가. 그래서 옛날에 제국들이 왕들이 잘난 척 하고 칼 있다고 까불다가도 교회에서 파문시켜버리면 잘못됐습니다. 하고 빌고 들어오잖아요. 빌고 들어오죠.




자, 그런데 여러분 이게 여기 교재대로 해 봅시다. [법은 영원법과 비영원법으로 구분된다. 영원법은 세계를 통치하는 신성한 기획이다. 이 신성한 기획은 이성 안에 있다. 비영원법은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구분된다. 실정법은 인간의 실정법과 신성한 실정법이 있다. 인간의 실정법은 국제법과 사회법] 다시 합시다. 이거 쉽게 한다고 했는데. 교재 그대로 해봅시다. 교재가 없으니, 내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영원법이 있고 최고고, 그 다음에 비영원법이 있다. 비영원법에 뭐가 있느냐 하면, 자연법과 실정법. 자연법이 비영원법에 속하는 이유는 자연이 없어지면 자연세계가 없어지면 이 세상이 없어지면 없어지니까. 실정법. 이 세상이 없어지면 같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비영원법이죠.




인간의 실정법은 국제법과 그 다음에 시민법. 신성한 실정법 이게 실정법인데 실정법에 보면, 신성한 실정법이 있고 인간적인 실정법이 있는데, 인간적 실정법은 국제법과 시민법. 신성한 실정법은 뭐냐 하면, 모세 율법과 모세 율법에는 사도 바울도 포함됩니다. 그 다음에 교회법. 교회법이 뭐보다 더 위 입니까? 시민법보다 더 위죠. 그래서 신부들이 비록 세상법에서는 교도소 가도 성당에서는 성자가 되죠.




다시 모세법은 뭐로 되어 있느냐? 도덕법과 십계명이죠. 예절법과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재판법. 이거는 모세 제사법, 이런 걸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래서 도덕법에 참여하는 것은 이쪽 계통에 해서 영원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래 이야기한다 말이죠.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자, 이제 둘째 시간 정리하겠는데 여기서 문제점이 뭐예요? 이렇게 법을 정해 놨는데 문제점이 뭡니까? 자, 지금 논리 고리 이야기할 때 문제점 이야기하고 쉽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상을 줬다. 형상이라 하는 것은 독자적인 판단력을 줬다. 왜? 그건 자유이니까. 그럼 그만큼 이성이 있는 거 아닙니까? 신이 주신 이성. 그 이성이 있다는 말은 이성에 의해서 따질 수 있는 법을 하나님께선 맞은편에 법을 이렇게 배치한 거예요. 아, 저건 잘못이네. 아, 저건 옳은 것이네.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주고, 저쪽에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보여줄 수 있는 법을 주고.




이성이 있다는 말은 판단력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법이 있어야 짝이 맞으니까 했다. 그래서 그 법대로 할 때 하나님 뜻이다. 이것 뭐가 문젠데? 뭔가 문제점을 발견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느낌이 안 좋지요. 뭔가 율법 냄새가 안 납니까? 굉장히 많이 나지요. 굉장히 수상하지요. 뭔가. 상당히 조직적이고 조직을 긍정하는 조직의 체계를 더욱더 권력화, 정치적인 법, 법, 법. 법이 몇 개에요? 법이 왜 이리 많아요.




법이 많다는 말은 이 안에서 사랑이 통용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법체제가 권위를 점하고 우위를 점하는 그런 권력체제가 된다는 걸 알겠지요. 이게 과연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일까요? 성도의 사는 모습이 이럴까요? 뭔가 많이 지금까지 이야기 쭉 대보면 존재부터 다 맞는데 따라와 보니까 이상하다 이 말이죠. 과연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그거는 다음 시간에 10분 쉬고 합시다.   


게시물8,503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65   겨울수련회 강의 녹취 4번 한윤범 07-01-15 5496
172   겨울수련회 강의 녹취 5번 한윤범 07-01-17 5393
195   20061103a 울산강의-창세기 1장 녹취 한윤범 07-01-29 5364
196   20061103b 울산강의-창세기 1,2장 녹취 한윤범 07-01-29 5725
200   20061201a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 한윤범 07-02-06 4913
201   20061201b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 한윤범 07-02-06 5123
205   200702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2-13 5467
206   20070206b 부산강의-질의응답 녹취 한윤범 07-02-13 4559
207   20070206c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2-13 5197
213   20070105a 울산강의-창세기 4장(1) 녹취 한윤범 07-02-20 4968
214   20070105b 울산강의-창세기 4장(2) 녹취 한윤범 07-02-20 4914
224   20070202a 울산강의-창세기 5장 녹취 한윤범 07-02-27 5380
225   20070202b 울산강의-창세기 6~9장 녹취 한윤범 07-02-27 4972
239   20070302a 울산강의-창세기 9장 녹취 한윤범 07-03-10 5054
240   20070302b 울산강의-창세기 9~12장 녹취 한윤범 07-03-10 4915
434   200707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 한윤범 07-07-11 4129
245   200703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3-17 4827
246   20070306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 한윤범 07-03-17 4971
296   200700403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메시야 … (1) 한윤범 07-04-11 4353
297   2007004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인자, … 한윤범 07-04-11 5588
맨처음 이전 [1] [2] [3] [4] [5] [6] [7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