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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4 17:23:42 조회 : 4172         
200700515a 부산강의-조지 래드 [신약신학]-메시아적 사명(1)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12)
 

200700515a 부산강의-조지 래드 [신약신학]-메시아적 사명(1)


(강의:이근호 목사)






십삼 메시아 문제, 역사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 요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뒤에 [메시아적 사명]하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앞에 있는 메시아 문제가, 이것은 왜 안 중요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대할 때 신적 인간으로 볼 것이냐, 인간으로 볼 것인가? 그 문제거든요.




예수님을 볼 때 신적인가, 인간인가? 신적 인간이냐, 그냥 인간이냐? 신적 인간 같으면 우리 뭐하고 공통점이 없느냐 하면, 우리하고는 공통점이 없지요. 만약에 이게 인간 같으면 우리하고 공통점이 있지요. 우리하고 공통점이 있잖아요. 우리하고 공통점이 없고, 우리하고 공통점이 있잖아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존재입니까? 역사 존재에요. 역사 존재고, 역사적 존재고 다 그렇지요. 그렇잖아요. 역사하고 역사적의 차이가 뭐냐 하면, 역사에서 의미를 끄집어내면 역사적이 돼요. 의미를 끄집어내면.




돌멩이가 있잖아요. 역사 맞잖아요. 그죠, 있죠? 동주대학있잖아요. 역사 맞잖아요. 그런데 동주대학에 대해서 우리가 연구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나한테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동주대학 총장이나 이런 사람한텐 동주대학이 무지무지하게 큰 의미가 있겠지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역사는 그냥 있는 거고, 그 다음에 역사적이라 하는 거기서 왜 있느냐 의미를 찾는 거예요. 그런데 역사에서 역사적으로 갈 때 누구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나’ 나라는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고요. 내가 빠지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빠지면 의미가 없어.




우리나라 중국에서 배 침몰되었잖아요. 그 가족들 굉장히 큰 의미가 있지요. 자기 평소의 생계가 달린 문제니까. 그런데 우리하고 별로 관계가, 우리 친척이 배 탄 사람도 없고, 관계가 없지요. 그러니까 의미가 없어요. 그 배가 침몰한 것은 역사 사실 맞는데 역사적으로 나한테 별 의미가 없다 이 말이에요.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학자들은 말하기를 뭐냐? 예수가 있다는 게 의미가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니 있고, 내 있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그래서 예수가 왜 의미가 있는 존재냐 하는 걸 이야기해서 담아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공관복음이라. 신약성경이라 말이죠. 신약성경을 해석할 때 역사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야지. 역사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역사로 해석하면 안 되고,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이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느냐 하면, 마태 족보하고 누가 족보하고 다르죠, 주기도문 다 틀려버리지요.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받을 때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근거로 해서 이런 일을 했을 때. 참, 이거 설명을 좀 해야 되는데.




예를 들어 보겠어요. 마태복음 1장 족보하고 누가복음 족보, 11장인가 나오잖아요. 족보 있잖아요. 족보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보다도 주기도문 합시다. 주기도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세 번, 네 번 했을 리는 없을 것 아닙니까? 주기도문을. 너는 이렇게 기도하라. 한 번 했을 것 아니냐 말이죠. 한 번 했다면, 그 한 번 한 것이 만약에 그걸 Q라 합시다. 한 번 한 거. 원래 한 번 한 것을 Q라 합시다.




그러면 여기에 그 Q를 보는 것이 누가 있어요? 우리 인간들이 있지요.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나, 인간이 현재 보는 나, 이근호 나. 내가 이걸 보는 것과 그 다음에 진짜 있었던 여기에 대해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보는 게 있을 게 아닙니까? 우리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의미를 따로 챙겨서, 이걸 A라 합시다. 따로 챙겨서 마태 B, 누가 C, 마가 D, 요한 E. 이 B, C, D, E와 비교를 함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내가 여기서 어떤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그렇게 배우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죠. 이게 인간이거든요.




그러면 지금 뭐가 없습니까? 이게 없지요. 이게 없으니까 우리는 마치 탐정이 범인 남긴 그 흔적을 가지고 실제로 그 사건의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새로 파악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범인 흔적이 뭡니까? B, C, D, E아닙니까? 이걸 통해서 B를 순종하거나 C에 순종하지 않아요. B, C, D, E를 점검해서 그때 무슨 일이 있는가를 나름대로의 실제 Q를 나름대로 찾아내요. 우리가.




찾아내서 이 Q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 이렇게 받는 겁니다. B, C, D, E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고, 이걸 이용해서 진짜 뭐가 있었던가를 발견해서 그것과 현재 나, 나라는 인간과 여기서 은혜 받으면 받고, 감동 받을 땐 받고, 도움 받으면 받고, 구원받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수단들을 따로 챙기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B, C, D, E에 우리가 순종하는 겁니까, 이용하는 겁니까? 이용하는 거죠. 이용하는 거란 말이죠. 그럼 이용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용하는 주체는? 내가 이용하죠. 객체는 누굽니까? 성경이죠. 이용한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주체가 스스로 내가 부정돼야 될 필요가 없잖아요. 부정될 필요가 없다고.




앞에 예를 들면 이게 마이크라 하면, 나는 마이크를 본다. 그런데 내 보는 게 틀리거든. 이러면 그런 소리 할 필요 없잖아요. 나는 똑똑한데 아, 이거 마이크네. 내 말 믿어라. 이래 되는 거 아닙니까. 성경을 볼 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보는 거예요. 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 주시려고 귀한 성경 주셨구나. 고맙게 받겠습니다. 자, 어디 슬슬 해석해 볼까.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내가 무슨 해석을 해도 죄고, 부족합니다. 이런 식으로 안 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신학 학자들이 문제가 그 점이에요. 신학학자들이 자기의 학문적 성과를 부정할 수 있는 어떤 특정 요건을 본인의 논문 속에는 없어요. 빠져 있다 말이죠.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내 설교가 틀릴 수 있습니다 하는 요소가 설교 내에 항상 빠지게 되어 있어요. 남의 설교 다 틀려도 내 설교는 맞습니다. 이래 나오지, 자기 긍정이 돼있지, 자기 부정이 내포된 설교를 그 설교 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의 설교든 모든 언어에 있어서 이게 한계에요.




그래서 해석학이란 게 등장한 겁니다. 이것도 해석학의 일종으로서 등장하는데. 역사를 볼 때 앞에 우리가 주체가 돼요. 역사를 보는 주체. 내가 어떻게 보느냐 할 때 여기 문제 삼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 또한 뭐의 산물입니까? 역사적 산물 아닙니까? 역사적 산물이 역사를 본다? 이거는 상대적이죠.




내가 시속 150으로 가고 있는데 저쪽의 차가 시속 150으로 간다면 둘이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 같이 정지되어 있으니까? 내가 역사적 속에 실려 달려가고 있고, 역사적 산물을 보면 내 역사를 스스로 부정 못 하잖아요. 그러면 현재 내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내가 현재 의미 있는 것만 챙기는 거예요.




아, 이거 좀 더 설명을 좀더 해야 되는데 알기 쉽게 해야 돼요. 오늘 몇 명 안 모였지만 듣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여러분, 동네 수퍼에서 하이마트에서 사면 바나나우유 600원 주면 삽니다. 요새는 600, 700원 이면 사거든요. 그런데 기차간에서 사면 이게 얼마냐면 900원이라고. 900원이죠. 그럼 나는 바나나우유하면 항상 무엇이 각인되어 있습니까? 600원 짜리 바나나. 바나나우유는 600원. 이것이 각인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900원 내라 하는 거예요. 900원 내놨어요. 그러면 우리는 내막을 모르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이래 하지요. 예를 들어서 당신이 바나나우유 900원 달라하지만 나는 당신의 그 의견을 거부하고 내가 알기론 600원 하니까 600원 받아서 챙기세요. 이렇게 하고 싶지요. 그런데 그게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잖아요.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300원의 차이를 느끼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건 600원인데 왜 그 사람은 900원이냐? 그 사람 세계를 모르잖아요. 그 사람 세계를 모른다고.




그런데 이 사람은 900원을 받아야 돼.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기차간에서 바나나우유 900원 해요. 깜짝 놀랐어요. 천원 주면 백 원밖에 안 내준다고. 900원 한다고. 그 내막을 모르잖아요. 그런데 900원 하는 내막을 알 필요가 있습니까? 비싸면 안 사면 되지, 내가 알 필요가 뭐가 있어요. 이게 중요해요. 내가 안 사면 그만이지요. 그죠?




성경의 마태가 이래 주장했더라도 우리는 마태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현재 내가 아는 마태는 이거야. 이 정도 밖에 안 돼요. 그럼 내가 이만큼 이게 잘라내고 이건 남겨주면 그만이다 그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나는 마태가 나한테 무슨 소리했던 간에 내가 성경을 이렇게 보고 하나님을 이렇게 보고, 이건 내가 포기 못한다 이거거든요.




이게 교인 백 명 같으면 백 명 다 성경을 봐도 전부다 자기한테 의미가 있는 그런 쪽으로 보고, 자기한테 의미가 있다는 말은, 현재 자기가 역사적 존재로서 자기가 역사를 살면서 뭔가 아쉽고 욕망이 달성하고 인생의 행복을 느끼고 싶은 그런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걸 뭔가 도움 얻고 싶어서 교회 나와서 성경말씀 듣는 거예요. 그럼 자기 편리한대로 해석해서 집에 가져가면 끝난다 말이죠.




이장우 목사님이 지난주 설교한 게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지금 교인들은 그 소리 듣기 싫어요. 예수님은 나의 이용물이지, 내가 필요해서 내가 찾아온 거지, 교회 와서 지금 주님 날 알아달라고 왔는데, 예수님 뭐라 합니까? 나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내가 당신을 왜 알아야 돼요.




나는 600원짜리 바나나우유 사려고 하는데, 이는 900원 하느니라. 내가 900원 하는 거 안 사면 그만이지, 어떤 의미에서 900원 하는지 왜 따지고 하느냐 이 말이죠. 나는 난데. 나를 위해서 교회 왔지 주님 위해서 교회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걸 누가 알아요? 예수님 벌써 알거거든요. 알기 때문에 뭐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는 겁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마태, 누가 다르고, 주기도문 다 다른 것은 뭐냐 하면, 우리들의 평소 관심사가 예수님이 보는 세상과 전혀 상관없이 내 위주로 내 좋으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하는 걸 아시기 때문에 성경으로 하여금 내 위주로 따로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여지를 완전히 삭제시켜 놔버렸어요. 그런데 신학자들의 고집은 삭제했다고 연구 안 합니까? 그놈들이.




가위하고 풀하고 가져와서 성경책을 전부다 오려서 이거는 여기 붙여야 맞고, 이건 마태가 착각했구나. 누가가 무식하기는 와 여기 와 버렸노? 이 말은 이리 댕겨야지. 요한복음은,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복음은 3년 내지 4년이에요. 마태, 마가복음은 1년 내지 2년입니다. 요한복음은 유월절 세 번 내지 네 번이에요. 앞에 성전청결은 요한복음 몇 장에 나옵니까? 2장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은 어디서 나옵니까? 저 뒤에서 나오지요. 이거 요한이 잘못 잘랐네. 내가 잘라야 되겠다. 지가 가위 갖고 다 잘라버려요. 이거 잘못 되었다고.




바로 그러한 데서 벌어지는 그 모든 논쟁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를 누구로 치냐 하는 그 말씀 입장에 서서 다시 내가 성경을 보기 위해서 접근하는 나 자신 속에 하나님의 개념, 메시아개념, 구원개념, 신앙개념, 율법개념, 천국개념, 여기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게한나, 지옥개념, 소울개념, 이 모든 지옥, 천국 이 모든 개념이 얼마나 이게 나 위주인가를 주님 입장에서 다시 볼 수 있어야 돼요. 주님 입장에서. 그렇게 돼 미쳐 보지 아니하면 이 역사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가 풀리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걸 다시 한번 정리해 볼게요. 다시 해 볼게요. 자, 예수님이란 걸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지요. 하나는 신적 인간이냐, 인간이냐? 둘이 있다 했어요. 신적 인간은 우리하고 공통점이 없어서 믿기만 하면 돼요. 믿는 대상이다.




그런데 인간이 되면 우리하고 뭐가 되느냐? 우리하고 공통점이 성립됩니다. 공통점이 성립된다는 말은 뭐냐? 우리 쪽에서 인간 예수를 해석할 자격이 우리한테 있다. 왜? 이웃집이니까. 이웃집 아저씨 아닙니까. 거기서 나온 게 김용옥이고 이문열 아닙니까. 김동리고. 이웃집 아저씨인데 뭐. 고난 받는 메시아, 예수님의 시험 이런 게 아닙니까. 이웃집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이라면 인간에서 공통성을 한다는 말은, 나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통성을 우리끼리 공통성을 그대로 어디 안에 집어넣으면 된다? 예수에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이런 경향이 지금 13과 말고 14과 보면 굉장히 많다 말이에요. 이 래드도. 조지 엘든 래드도.




이런 문제를 생각 안 하고 여러분들이 쭉 읽어보시면, 그냥 맞네. 기분 좀 더럽다만 맞네. 맞는 이야기네. 반박의 여지가 없구먼. 맞는데 기분이 이상하게 느낌은 안 좋은데 딱 집어서 이거 틀렸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그리고 나중에 다 보고 난 뒤에 목회 도움도 안 되고, 신학자들 장난이다 하고 덮어버리고. 두꺼운 책 읽고 덮어버리잖아요. 그래도 총신대 이거 다 읽어도 이거 활용하는 사람 없잖아요. 설교할 때 활용 안하죠. 신학자들 저희끼리 논쟁 벌이는데 내 대충 은혜만 받으면 끝난다. 이래 된다 말이죠.




이런 책이 나오게 된 그 인간의 발상이 이미 내 속에도 잠재 돼있고 교인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걸 위해서 이걸 공부해 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여기서 뭐냐 하면, 역사와 역사적이 있다 말이에요. '역사'라 하는 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 하지만 그게 '역사적'이 되려면 여기서 뭐가 가미되어야 된다? 의미가 가미돼요. 의미가 가미되려면 뭐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와 관련이 있어야 의미가 돼요. 나와 관련 없는 것은 의미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 여기에 추가적으로 투입될 필요가 있죠. [역사+나]가 역사적이 된다 이 말이죠. 역사와 나의 만남.




그런데 이 역사라 하는 것은 내가 고르는 역사가 아니고, 내 욕망이 불러내는 역사죠.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라고요. 아니,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다 호기심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심지어 산부인과 의사가 바둑 좋아해서 애 낳아도 애도 안 보고 지금 바둑 두고 있다가 귀때기 맞았다는 이야기,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 있는 모양이라. 바둑 안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게 미친놈 짓인데.




자기 골프 치는 욕망을 가진 사람한테는 골프 이야기가 귀에 솔깃하단 말이에요. 골프 모르는 사람한테는 아무리 골프 쳐도 이게 김지영이가 60센티 남겨 놓고 우승 못한 거, 몇 천만 원 못 탄 거 의미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한테 역사적이 아니다 이 말이죠.




따라서 교회 올 때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그들의 공통성을 찾아낼 것이다 하면, 이래 나와야 되죠. 그들이 갖고 있는 신적 인간이든 간에 그들이 갖고 있는 신성,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나님이 접근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여기에 중점을 두고 설교하면 될 거예요.




그러면 각자 전부다 하나님이 있으니까 이제 나머지 문제는 뭡니까? 자기가 어떻게 행하냐에 따라서 복을 받느냐 구원 되느냐는 자기한테 달린 문제니까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생각했던 구원관이고 하나님 관이기 때문에 인정하고 그 목사의 설교에 동조를 하고 폭 빠질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에서 나오는 것은 어떻게 해도 의미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개입을 해야 된다 이렇게 하게 되면, 어떤 사람에게만 이 말이 이해되느냐 하면, 평소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평소에 범사에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의미 있고, 하나님을 하늘에 뚝 떨어져 놓고 여기서 어떻게 해 드릴까요? 하는 사람한테는 그게 하나도 재미없는 거예요. 설교가. 재미가 없을 뿐더러 재미없을 정도는 괜찮죠. 이게 화가 난다니까. 뿔따구 나요. 인간을 무시한다고.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증거한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내가 다른 하나님을 전하면 저주받는다. 이래 한 게 아니고, 내가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 했거든요. 사도 바울이. 그럼 복음이라 하는 것은 누가 한 사건이냐 하면, 하나님 만난 사건이 아니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심지어 하나님마저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고.




그러면 구약이나 신약이든 어떤 본문을 가지고 뭐가 나와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야 된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약에 거쳐서 하나님께 나가버리면 그건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쳤기 때문에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거는 하나님에다 흡수 통합시키고 이건 지워버려도 그만이 되는 거예요. 마지막 설교 다 듣고 아, 그러니까 평소에 하나님 잘 섬기라 이 말이구나. 그런데 이거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있구나. 그럼 예수님 지워도 없어도 괜찮은 거예요. 마지막 최종적으로 하나님만 남으니까.




성경에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떤 본문이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로 나오려면, 왜 하나님 믿는 나와 예수님 사이에 이걸 비교해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 평소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비교를 해 줘서 내가 행함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써 하나님께 작용되고, 그 하나님이 나에게 그리스도를 앞장세워서 복을 주는가, 구원의 능력 주는가? 이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작업이 아주 복잡해요. 간단한 작업이 아니고 굉장히 복잡한 작업이라고.  




그렇게 위해서 그러면 예수님과 나하고 경쟁관계에 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얻어터져야 되죠. 예수님이 아이고 잘한다, 아이고 내 새끼. 이런 식으로 하지 않거든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이야기할 때는 이러니까 너 대신 내가 죽어야 돼. 그게 바로 내가 보기엔 '죄'라. 이래 되는 겁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도 예수 그리스도가 보는 관점과 내 관점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다르기 때문에 나는 주님한테 성령을 통해서 지적받아야 될 그 문제입니다.




그래서 13장은 이걸 그냥 넘어갑시다. 왜냐하면 13장의 비평문제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그들이 신학자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논쟁을 벌이는 거예요. 역사의 예수냐, 역사적 예수냐? 그래서 그들은 결론은 뭐냐? 결국 역사적 예수이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찾지 말자. 은혜만 그냥 감동 받고 도움 받고 은혜 받으면 그만이지, 뭐 때문에 진짜 역사 찾아내봤자 안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래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지도 않았는데 십자가가 졌다는 이야기만 믿어야 되는가? 그렇다. 왜? 그거는 모르잖아. 우리가 모르잖아. 다만 남의 이야기만 듣고 믿는 것뿐이지. 사도 바울이 그걸 증명하려고 하진 않잖아. 라고 역사적 예수로서 돼버렸다.




그러면 그거는 결국 뭐냐 하면, 신학자들이 기존에 있는 지금 교회를 떠나고, 그 당시 교회를 떠나고 있거든요. 산업사회시기에. 교회를 떠난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이 역사의 예수를 몰라도 의미만 있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다시 교회로 끌어당기기 위한 교회에 도움 되기 위한 신학을 하기 위해서 이런 논쟁들이 있었고, 목사들은 그 신학자의 말 순종해서 도움 받아서 설교를 그런 식으로 했던 겁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슈바이처 많이 있어요.




오늘 중요한 것은 [메시아적 사명]입니다. 메시아적 사명은 바로 십자가에 관한, 이 제목이 사실은 메시아적 사명도 되지만 '십자가란 무엇이냐?' 그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이야기.




이 14과를 다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가 아까 반박이 안 된다 했지요. 왜냐하면 중간 중간에 중요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특히 래드의 14과에서 제일 아주 뿅 갈 정도로 중요하게 한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십자가에 모인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래드가. 예수님 모든 사역은 십자가에만 집결된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방향성이 있다는 거예요, 방향성.




여러분들 뷔페에 보면, 김밥 있죠. 김밥이 있고 잡채 있잖아요. 김밥, 잡채, 여기는 그냥 뭐 곡식밥. 곡식밥 있고 여기는 스파게티 있다면 이 놓여진 음식들이 서로서로 당깁니까? 김밥하고 스파게티하고 붙이고 이럽니까? 방향성이 없지요. 있는 그대로 있으면 내가 골라서 먹잖아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이 뷔페가 아니에요. 1장 잡채, 2장 김밥, 이런 식이 아니에요. 그거는 전부다 뭔가 의미상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그게 어디로 모입니까? 십자가로 모인다.




그래서 젓가락 들고 야, 이거 마태복음 3장 은혜 된다. 싶어서 이걸 집어서 지금 내 입에 넣으려고 마태복음 3장 그걸 집으려고 하는데 어, 움직이는 기라. 어디로 가? 3장에 보니까 어디서 집어야 돼요? 십자가 집으면 3장 다 집히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6장 그 산상설교를 야, 이건 세상의 빛이라. 야, 이거 멋진 경험이다. 이걸 집으려 하니까 빛이 가만있는 게 아니고 움직여. 이게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가 보니까 십자가까지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집는다는 것은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마태복음 5장, 6장의 모든 산상설교가 다 같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설교자는 뭘 이야기해야 됩니까? 그렇게 집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뭘 풀어내야 하느냐 하면, 그걸 탁 깨버리면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5장, 6장, 3장 다 이렇게 들어있다는 것을 다 이야기해야겠죠. 방향성을 이야기해야 된다 말이죠.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5장을 한다면, 마태복음 5장이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향하여 가잖아요.




지금 래드가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사명은 십자가로 모인다는 말, 그건 했는데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로 모인다는 말은 못하는 거예요. 왜? 아까 뭡니까? 아까 메시아 문제에 있어서 성경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마태, 마가, 누가의 의미죠. 의미에 불과하기 때문에 말씀 자체가 살아있다는 건 인정 안 해요.




다만 거기서 따로 말씀은 따로 그 다음에 뭘 따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음을 따로 분리를 시켜서 진짜 십자가로 모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이는 것이지, 성경 말씀이 모일리가 있겠나? 이래 생각해서 그걸 지금 따로 분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게 다 교회 또 나중에 보면 교회성장과 관련이 있어요.




마태복음 5장에서 십자가로 모인다면 그러면 십자가에 안에 5장이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설교자는 십자가를 탁 깨서 현재 우리가 오늘 본문 5장을 설교한다면, 십자가 안에 5장이 어떻게 담겨 있는가를 5장을 통해서 같이 방향성을 따라서 십자가를 소개해줘야 되죠. 그럼 이래되면 뭐가 빠져버립니까?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이 깨져버리죠.




왜 깨지느냐 하면, 이 5장을 설명할 때 5장을 십자가 안목에서 보는 것도 있지만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죠. 우리는 사회 생활하다가 나라는 역사적 존재가 교회 와서 예수라는 역사적 존재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5장을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했잖아요.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 경쟁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경쟁관계에 있는데 내가 보는 5장은 메시아를 중간과정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메시아의 하는 일을 중간으로 보고, 하나님과 나, 이런 틀로써 보기 때문에 이런 틀 안에서 5장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이 포함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이 십자가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기를 뒤로 감춰버리고 누구를 세웁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은 신을 거부하지는 않아요. 하나님을 알되. 신을 거부하진 않지만 하나님, 신 빼고 다 거부해요. 심지어 예수님이라도. 신은 좋지만 예수님은 별로에요. 이상해요. 이상한 게 아니고 그게 참 정상이죠.




신 앞에서 자기가 단독적으로 남기를 원하지, 신 앞에서 자기보다 더 잘난 어떤 분이 따라 있다는 것은 곁눈질해서 이씨~ 화를 내요. 사람은 하나님 믿으라 하면 잘 믿어요. 그러나 예수 믿으라 하면 더러워서 안 믿어요. 왜? 예수가 와 버리면 나는 뭐가 돼버려요? 졸지에 쪼다가 되잖아요.




예수님은 뭐냐? 뒤에서 잘 믿으래이! 잘 믿으래이. 하나님 잘 믿으래이. 우리 아버지데이. 이렇게 밀어주는 분으로만 있으면 좋겠어요. 왜? 법 앞에서 내 태어난 속성이 뭐냐? 하나님은 항상 내 앞에 있고 나는 하나님 늘 앞에 서 있는. 그런 관계. 그런 관계를 난 깨기 싫어. 난 이게 좋아. 그런데 뭔가 앞지르기해서 예수가 앞지르기해서 가로 막아서 나서면, 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비키소! 이래 돼요. 비키소. 내가 당신의 공로를 아는데 하나님 안 보이니 비키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이야기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 자기의 영이라는 사실은 이거는 요한복음에서 철저히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화났던 게 그거에요. 제자들이 이해 못했던 게 뭐냐 하면, 요엘서에 의하면, 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요엘서에. 그런데 그것이 장차 성령의 시대가 요엘에 오거든요. 메시아의 영이 오는데. 그 이사야 62장에 나오듯이 내 영이 와서 하는 그 영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이 자체.




결국 그렇게 되면 영이 예수님한테 온다면 우린 누구한테 매이게 돼요? 예수님한테 매이고 나는 완전히 쪼다 되는 겁니다. 완전히 박살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기본적인 자존심을 박살내는 거예요. 괴멸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태반인데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메시아적 사명이라 하는 것은 바로 방향성을 가지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로 모이게 한다. 십자가로 모이게 하게 되면, 그럼 여기서 뭐가 되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개념, 율법개념, 땅 개념 그리고 구원개념 이거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세우며 나오는 천국개념, 율법개념, 땅 개념 이 모든 거 하고 이게 완전히 극대 극으로 틀리게 되는 겁니다.




그 틀리게 되는 점을 마태복음 5장에서 찾아줘야 돼요. 찾아줘서 성도들로 하여금 너희의 자신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도록 해야 돼요. 왜? 다른 복음은 없으니까.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은 없으니까. 그걸 구원 받는 것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받지 하나님 이름 부르면서 구원받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날 제일 딜레마가 뭐냐 하면, 하나님 믿는다고 알고 온 사람을 예수 믿는 걸로 뒤바꾸는 거, 이거 성령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안 됩니다. 정말 안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경쟁관계에 있다 하는 것은 이거는 세상사람 생각도 못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누구 설교를 들을 때 항상 핵심이 그걸로 봅니다. 이 분이 하나님을 증거하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지 봅니다. 만약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반드시 거기에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인간이 뭘 하나님께 해야 된다는 것이 행함이 반드시 거기에 깔려 있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결국 우리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주님의 내리시는 은혜를 의지해야 된다, 의지해야 된다. 그게 나와야 돼요. 그게 나오는가를 살핍니다.




우리 정석훈 목사님 새벽 기도한 것 보거든요. 그 절 아닙니까. 그 교회 절이거든요. 절인데 절에서 새벽기도 하면서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가? 나름대로 고민하며 전하는가? 제가 속으로 욕본다. 욕본다 하면서 쭉 봅니다. 보면 그리스도를 증거를 못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못합니다. 증거하면 진짜 이건 위기에 들어가니까. 용어를 바꿔요. 뭐냐 하면, 우리는 죄인입니다로 바꾸고,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바꿔요.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냐는 이야기하지 안 해요.




그래서 아마 내가 보기에는 신약을 하지 않고 구약 스가랴를 하는 것 같아요. 전략상. 스가랴를 해서 스가랴에 보면 거기에 예수가 빠졌잖아요. 그러니까 유리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데 이거 누가 시비 걸 자 누가 있어요? 없잖아요. 그죠?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라 하는 건 알아서 양심 있는 놈은 다 알잖아요. 여기서 부담 없이 이슬비 젖듯이 슬쩍 연착륙할 수 있는 그런 전략을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진 못해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죄인이다 그걸 증거 못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가를 증거 안 해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뭡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부족합니다. 우린 깨져야 된다. 이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깨진다고 구원 받는 건 아니거든요. 주님이 우리한테 뭘 했느냐에 대한 거예요.




래드가 메시아적 사명, 전체가 뭐냐 하면, 예수가 무수한 말씀을 했고 무수한 기적을 했는데 그게 결국은 어디로 모여졌다? 결국 십자가로 모여졌다 이 말이죠. 그럼 주님이 우리한테 한 게 뭐예요? 십자가 지신 걸 한 거예요. 그럼 십자가 지신 걸 했는데 십자가를 지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과 기적들이 있다면, 그러면 그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뭐도 같이 합류해서 아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의 의미를 이제는 제대로 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지금 래드도 그런 쪽이에요. 래드가 메시아적 사명을 쭉 읽어 보시면 이렇게 중구난방에 연결도 안 되고 좀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내가 애써 이해해 주고, 이런 사람이 더 아주 힘들어서 짜 맞추기 해서 아주 좋게, 좋게 해서 이 사람 편이 되서 특히 메시아적 사명 이 대목에서 좋게 생각해서 해보면, 아, 래드 당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의 모든 일은 십자가적 사명에서 의미를 찾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죠. 그런 뜻이지요. 라고 내가 묻고 싶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259페이지인데, 번역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십자가 사건, 수난의 예고, 예수님 죽음에 대한 예견, 그 뒤에 보세요. 예수의 죽음은 메시아적이다. 예수의 죽음 구속적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적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희생적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종말적이다. 십자가의 체험, 예수님의 승리와 죽음. 이래 되어 있지요. 이게 14장 내용이에요. 이제부터 그걸 다 합니다.




그 원래 순서도 별로 순서가 안 맞고 안 좋아요. 이래 보니까. 하여튼 뭔가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지가 뭔지 애초부터 뭔지 몰라요. 하여튼 간에 이거는 중요하다한 것은 책에서 신학자들이 다 해서 고맙게도 우리 신학생들에게 이걸 다 해서 알아서, 알아서 니가 배워라. 라는 식으로 이만큼 가져온 끌어 모은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걸 래드에게 시비 걸 필요는 없고, 여기서 과연 십자가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냐 그것만 파악해서 같이 은혜 받으면 되니까.   




이 사람이 십자가, 그거 다 아는 이야기 아니냐? 이래 돼버리면 14장 글 이렇게 길게 쓸 이유가 없지요. 평소에 사람들이 십자가를 생각할 때 주님 생각할 때 무지무지하게 오해하고 놓치고 빠뜨리고 있는 것들 많이 있더란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속죄'와 '대속'을 구분 못하더라는 거예요. '희생'과 '죄 사함'을 구분 못하고. 속죄와 대속을 구분 못하고 희생과 희생하심과 죄 사함을 구분 못하는.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구분을 못하고.




또 뭘 구분 못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과 '십자가 체험'을 구분 못하고. 체험해야 십자가 사건 믿는 사람이냐? 그건 아니잖아요. 체험을 같은 것은 감정적인 문제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체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뜯어보면 십자가 사건과 관계없고. 그런데 지는 십자가 믿는다고 눈물 줄줄 흘리고. 도대체 눈물 흘리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당신은 뭘 보고 눈물 흘리느냐 말이죠. 그런 문제.




그리고 이 사람이 한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과거로 볼 것이냐, 미래로 볼 것이냐 그 문제 다뤘어요. 이것도 아주 짧게 다뤘어요. 왜 짧게 다뤘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이거 먼저 합시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볼 때 세대를 볼 때 이원론으로 봤다. 지난 세대와 옛 세대와 올 세대로 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두 세대가 다 지난 세대다. 다 의미가 없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 세대 구분 자체가 없다 이 말이죠. 요한복음에서는.




왜 그러냐 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이 지난 세대, 이런 세대, 세대 자체도 전부 지난 세대고, 지금은 뭐냐? 영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마태, 마가, 누가하고 관계없이 영의 세계에 속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이것은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뭐가 문제되느냐 하면, 사람의 시간관에 있어서 과거라 하는 것은 항상 어디를 염두에 둘 때 과거의식이 생깁니까? 현재나 미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과거지요. 과거가 뭐예요? 지금, 이제를 과거라 하잖아요. 그럼 지금이란 의식이 없으면 과거란 없지요.




그 예가 뭐냐 하면, 졸도 했는데 교통사고 나서 졸도했다 깨어났다 말이죠. 그때 안 그러면 술을 많이 먹었다든지. 니, 어젯밤에 무슨 소리했는지 아나? 몰라. 내가 그런 소리 했나? 모르지요. 그러면 기억나는 사건이 없으면 그 사건은 과거에 속합니까, 아예 없는 게 돼요? 아예 없는 게 되죠.




요한복음에 있어서 인간의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 있어서 요한복음의 모든 이야기는 아예 없는 게 돼요. 이게 아주 놀라운 힌트라고, 이게. 누구 이야기하던가요? 누가 한 적 있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볼 때 뭐로 봅니까? 과거 이렇고 맨 마태, 마가부터 이래 보잖아요. 오는 세대, 지난 세대, 이래 보잖아요. 요한복음에선 아예 기억나지 않는 것들만 이야기한다고 보란 말이에요.




그 매인교회 사이트에 보면 박기삼 사장님이 뭐라 했느냐 하면, 성경은 방언이다 하는 게 있어요. 이게 이번에 51호 [예수사회]에 그게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내용 포함되어 있던가요?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김용옥 보고 화가 나서. 사장님, 내 속으로 그랬어요. 김용옥 뭐하는데. 난 그런 거 김용옥 따지면 약간 좀 의아한 게 지금 김용옥 따지면 옥한흠, 하용조, 이동원, 이 놈들, 정통이라고 여기는 이런 사람을 따져야지, 개혁주의자 이런 인간을 따져야지 왜 남들 다 아는 이단을 왜 따지냐. 난 그게 좀 아쉬워요.




김용옥 그런 게 한두 번입니까? 여호와 증인, 안식교, 누굽니까? 통일교 공격하면 통일교 공격할 줄 알면 그 사람 정통이에요? 아니잖아요. 남들 다 아는 거 뭐하는데 하는데. 김용옥 이야기를 왜 씹어요. 지금 기존교회 문제지 김용옥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김용옥 하는데.




거기서 뭐냐 하면, 박기삼 사장이 하는 말이, 성경은 모르는 이야기만 실려 있다. 모르는 이야기를. 그런데 그걸 안다고 덤벼들 때는 이미 어떤 의미의 그물, 내 의식의 그물에 포착되는 것만 이게 체득되는 식으로 아는 게 되니까 이게 아는 게 엉터리 아는 거다 이 말이죠. 박기삼이 하는 이야기, 주장이 그건데.       




요한복음, 여기서 이제 좀 어렵지만 뭐냐 하면, 사람이 어떤 의미를 찾는다든지 언어의 내용을 찾을 때는 시간관에서 탈출, 도망치질 못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어떤 의미를 할 때는, 전에는 왜 물을 안 주지. 오늘은 물이 흥건하니. 이랬다고. 지난번과 비교해서 이야기하잖아요. 어, 니 이쁘다. 이 말은 뭐냐면, 지난번엔 안 이뻤다 이 말 아닙니까. 니 실물보다 낫네. 사진보고 실물이 낫네. 이건 뭡니까? 사진하고 실물하고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려 오셨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관을 이용해서 구원하거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성령의 세례로 오지 않으면 아무도 알지를 못해요. 모른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적으로 간주한다니까. 아예 소경으로 간주해요. 너희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라. 이거는 가만있는 놈 귀때기 때리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애, 아주머니 젖 주고 있는데 소경이야! 이카면, 그 아주머니 죄가 뭡니까? 아무 죄가 없잖아요. 지 아 배고파서 젖 준 것 밖에 없는데, 니 소경이야. 제가 무슨 소경입니까? 소경 같으면 애를 이렇게 젖 줄 수 있습니까? 그래 니가 생각하는 관점은 뭐냐? 내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관점이에요.




요한복음에서 지금 이걸 다 전부다 여기 나오는 거 설명 다 합니다. 이번 시간에 다하는데,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은 일체 인간들과 공통성이 없었던 내용이었다. 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은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무슨 뜻입니까? 마태, 마가, 누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과 공통성이 있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래되거든요. 그거 한번 정리해 봅시다.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인간들과 공통성이 있는 걸 이야기했고, 요한복음은 인간과 공통성이 없는 걸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마태, 마가, 누가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용어 중에서 이런 게 있어요. 니 상이 크리라. 니 상이 크다 이 말이죠. 그게 하나의 예가 되겠죠.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면 뭐냐 하면, 7장에 보면, 니가 이것을 다 행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가리라. 마태복음 7장 마지막에 주여, 주여 하는 바 천국 갈 것이 아니고, 다 지켜야 천국 간다. 그리고 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나를 위하여 모든 걸 버린 자는 이 땅에서 백배나 받을 것이다. 백배. 이 땅에서 백배나 받을 것이다. 그걸 문자 그대로 하면 뭡니까?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천원 헌금 한다면 백배가 십만 원 받겠단 뜻이지요. 지금 예수님 말씀이 그 말이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씀 있지요.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리이까 하니까 일곱 번의 일흔 번 용서하라.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에다가 이걸 초월한 것이 아니고 계속 극단으로 밀어 이까지 확산시켜요. 확장시키죠. 의미를 확장시키지요. 공통점이 잇잖아요. 아, 따라 붙으면 되겠다. 이런 거요. 그리고 무엇이 율법이며 무엇이 선지자냐? 이웃을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면 그것이 그렇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안 된다는 거예요. 니는 소경인데 뭐. 소경이 백 날 해도 소용없지요. 신학자들이 그런 걸 찾는 거예요. 세대적인 그러니까 옛날 세대에서는 일곱 번 용서한다면 지금 세대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는 세대란 말이죠.




또 한 가지 여기 나오는데 이 책에서 강조한 게 뭐냐 하면, 신랑이 있을 때는 기뻐하고 신랑 잃어버릴 때가 올 때는 그때는 금식하고 슬퍼하라. 그러면 예수 잃으면 금식하면 되겠네. 그런 의미가 아니고 저쪽 기존의 세대에 의하면 뭔가 메시아관이 없고 하나님 신앙 잃을 때는 그들은 뭐 했습니까? 금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너희들 식으로 한다면 내 잃어버릴 때 금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뜻입니다. 마땅하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마태복음 13장의 비유 부분에 모든 것이 다 그래 깔렸어요.




그리고 이런 것이 있지요. 뭐냐 하면, 무화과나무 비유라든지 마지막 종말 때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다 이루리라. 이런 거. 그럴 때 이 세대가 몇 년입니까? 그리고 심지어 이런 말도 있지요. 그 날과 그 시는 인자도 모른다. 선한 이가 누구냐? 선한 이는 하나님 밖에 없느니라. 이것이 기존에 있던 그들의 신학적인 체계에 그걸 충분히 수용하면서 예수님을 수용한 그 범위 내에서 설명한 거예요.




그래서 그 주장에 의하면 여기 14장 말고 15장에 들어가면 종말에 이야기할 때 저자가 래드가 뭐라 하는 줄 압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의 이야기다. 그건 나사로 어디 갔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동생들 정신 차리라고 한 문제다. 이렇게 해석한 게 또 여기 15장 보면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마태, 마가, 누가 이 복음은 기존 세대의 그 상황을 수용하면서 접촉점을 가진 것처럼 하지만 안 가지지만 하여튼 가진 것처럼 이렇게 다가서고 있고, 요한복음은 아예 까놓고 이야기하기를 너희들 땅에 있는 놈들이 내 하늘에 있는 나를 알 수가 있나. 아예 절단시켜서 내 말 하는 것은 하나도 모른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은 내 양 밖에 없다. 너희들은 모른다. 아예 모른다고 나와 버려요.




심지어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에게 계속 쫓아내는 방향이죠. 너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내가 이야기 한 마디 할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하니까 다 가버렸지요. 어렵도다. 어렵도다 이렇게 된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고 했고,




여기 이 책에 나오지만 마태복음 십자가할 때 래드가 뭐에 중점을 두느냐 하면, 다시는 내가 올 때까지 포도주에서 나온 것을 마시지 않겠다. 그 대목을 뽑아요.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에요. 내가 올 때까지 포도주에서 나온 걸 마시지 않겠다. 할 때 그 포도주가 뭐냐? 그때 래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피로 봅니다. 그 잔. 피로 본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피로 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뭐냐 하면, 너희들은 내 잔에 동참해야 된다. 쓴 잔을 마셨다 할 때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게 아니고, 생명의 참연가? 아마 래드가 그래 이야기, 여기서 뒤에 생명의 참여가 아니고, 여긴 270페이지인데, 예수님의 죽음은 종말론적이다. 하고 제목이 있거든요. 그 바로 위에 이 말 나와요. 예수의 죽음은 종말론적이다. 종말적이 아니고 종말론적이다. 종말하고 종말론적 다릅니다. 또.




여기에 보면, [그의 제자들이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은 그의 생명의 참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이 이루어질 구속적 축복의 참여를 상징한다.] 찾았습니까? 서경수 목사님 그거 있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의 죽음은 종말론적이다]란 제목이 나와요. 나오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차이점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뭐냐 하면, 제자들이 잔을 마시는 것이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할 상징이 아닌 이유, 이것이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는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주어지는 구속적 축복의 참여. 구속적 축복의 참여와 생명의 참여가 왜 래드는 그걸 다르다고 이야기하느냐 그 이유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이 글을 이해하니까. 그렇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희생과 죄 사함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한 7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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