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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3 21:35:10 조회 : 163         
강남-누가복음 6장 43절 (배경) 210622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6장 43절 (배경) 210622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은 신약입니다. 구약에서의 기본은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고 나타남이고요. 이스라엘 백성은 없는 나라 민족이었지만 유월절 사건이 그 이스라엘 나라를 존재케 했지요. 이스라엘 나라 존재한다는 것은 곧 유월절 사건이 계속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 유월절 사건의 과정 속에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움직일 때에 이스라엘을 생각 안하고 자꾸 누가복음보고 도덕책인줄 알고 이걸 지킬려고 하면 안돼요.


이스라엘 존재에서 그들이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나 양각나팔 할 때 보면 그들은 결국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외침이 나왔어요. ‘외침’. 세례 요한 같으면 이건 뭐냐?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는 거에요.


이스라엘이 여기 있다가 아니라 뭔가 여기에 추가가 되는 게 있어요. 여기에 운동이 있는데 어떤 운동이냐 하면은 주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어떤 운동이 일어나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요. 그게 이스라엘에게는 외침, 찬양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시다라는 것을 그냥 나지막하게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감정과 사태를 그들은 체험하게 된 거에요.


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깜짝 놀랬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날 놀래케 한다 이 말이거든요. 외친다는 말은. 여기 어떤 운동이 있는 겁니다. 그 운동이 있는데 그 운동이 예를 들면 이해하기 쉽기 위해서 애굽 사람을 봅시다. 애굽 사람들이 그들이 삶에 있어서 어떤 행동이라든지 행동을 할 때 뭐냐 하면은 이 행동이 그 이유가 행해야 될 이유가 어떻게 하면 내가 행위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어요.


내 행동이 결국은 마지막에 내가 괜찮은 ‘나’로 달라진다는 그 목적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애굽 사람들은 해 왔던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모세하고 흥정에 나섰지요. 그러니까 애굽 사람 바로왕은 뭐냐. 모세도 인간이고 자기도 인간이잖아요. 인간 대 인간의 문제는 흥정하고 협상하면 될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제가 그 첫째시간에 잠시 언급했잖아요. 요셉과 그 형제들을 한번 보라고요. 에서와 그 야곱을 한번 보세요. 이삭과 아브라함을 한번 보세요. 그게 흥정해서 될 일입니까? 참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어떻게 하면 내 목적이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


이걸 다른 말로 사용했어요. 나의 가치와 나의 의가 어떻게 하면 계속 이것이 지켜낼 수가 있을까? 나의 가치와 나의 의미와 나의 의로움이 어떻게 하면 나의 의로움이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 그걸 생각 안하고 행동하는 그런 애굽 사람은 없어요. 이 바로 왕이 그런걸 했고요.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의 어떤 언약을 보낼 때는 그 언약을 통해서 인간들이 기존에 그렇게 살면서도 우리가 왜 사는지 우리가 어떤 이유 때문에 행동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는 거에요. 너 이렇게 살았잖아 라고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면 그쪽에서 억울한 거에요.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지.


그러면 내가 내 가치 지키고 내 의 지키고 내가 내 자식 지키고 이걸 어떻게 나쁘다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아니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나는 내가 행동할 때에 내가 나 좋아라고 하는 것이지 내가 나빠지라고 행동하는 그런 바보 등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말도 안 되지요 라고 한다면 여기 있는데. 바로 너희들이 생각한 범주 바깥에 존재를 내세워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셉이에요. 그게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도 바라고 있어요. 고생하고 싶은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 요셉에게 요셉과 다른 사람의 차이점은 요셉과 다른 형제들과의 차이점은 요셉은 뭐가 있느냐 하면은 혼돈. 어떤 혼돈? 원초적 혼돈을 자기 안에 품고 있습니다.


원초적 혼돈. 그러니까 보통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데서 몇 년 사는 인생 사는 그것뿐이지만 요셉으로 하여금 꿈이라는 것을 접촉하도록 꿈을 경유해서 인생을 살게 만들어요. 꿈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이 카오스에서 혼돈에서 창조되었던 그 원리 원칙이 작동하고 있는 그 현장을 요셉으로 하여금 겪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그건 뭐냐? 천지창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요셉의 꿈을 해석하는 내용이나 요셉이 꾼 꿈의 내용은 이 자연 세계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 자연 세계가. 여기 존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거에요. 자연 세계는. 일곱 마리의 튼실한 황소가 나오다가 그다음에 시들시들한 소가 나온다든지 첫 번째는 풍년이 되고 나중에는 흉년이 되는 이 모든 자연 세계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세상인간들은 네가 너 자체 목적의 최종 지점이냐 이 말입니다. 이건 뭘 해도 나를 위해서 저걸 해도 나를 위해서. 카오스, 혼돈이라는 것을 다시 경유해서 거기서 다시 기어나오라 이 말이죠. 혼돈으로 들어가서 나오라 이 말이죠. 혼돈에서.


아까 고립성의 출현이라고 했지요. 출현, 표현. 예수님. 카오스라는 그 거친 면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십자가의 완성함으로 말미암아 그 카오스가 예수님 안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깨끗한 유리표면이 되는 거에요. 깨끗하게. 물 딱 떨어트리면 물이 또르르 흐를 정도로. 어느 하나 모순됨이 없이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 있잖아요. 막 포장된 도로. 차가 달릴만하지요. 깨끗하지요. 평탄하고 요철 없고. 인생 한번 그렇게 살아봤으면 좋겠지요?


바로 주께서 그렇게 살게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 인생은. 네가 목적이 되지 말고 네가 네 가치와 네 의를 네가 포기한다면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날라간 것이기 때문에 깨끗하게 뭘 해도 감사와 “고맙소”가 계속 나오게 되죠.


왜? 여러분들이 요셉이기 때문에. 이거는 내 인생은 내 스케줄은 내가 짜는 것이 아니고 카오스에서 코스모스 질서로 바꾸시는 새로운 질서죠. 천국 질서로 바꾸시는 주님의 작업과정에 우리가 박혀 있습니다. 여기에 용어 하나 더 쓰겠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원초적인 운동을 저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과정’입니다.


주께서 일하는 그러한 절차를 바라바 같은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우리의 절차를. 이런 식으로 못된 열매 이런 식으로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티를 빼게 하려는 이러한 위선자. 이런 식으로 남을 비판하는 자, 이런 식으로 원수를 미워하는 자. 이 카오스 이 혼돈 속에서 어떻게 해서 주님이 이들을 구원했는가를 한번 보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애굽 같은 세계에서는 인간들의 고민은 뭐냐 하면은 도대체 신의 은총은 어느 죄까지 용서가 되는지 그들은 굉장히 연구를 많이 해요. 신의 은총이 어느 정도까지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지.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도덕이나 윤리에서 하나의 관심거리에요.


어느 정도까지 죄를 지어도 그게 용서가 되는지 지경이냐를 하는 한계선을 인간들이 한번 정해보자는 거에요. 한계선을. 제가 지난 낮설교 때 했지요. 베드로가 그걸 하지요. 베드로가 한계선을 몇 번까지 했습니까? 나를 성질 건드리면 일곱 번 참으면 많이 봐준 겁니까 할 때 주님께서 70번의 7번을 했지요.


베드로가 그걸 490번으로 이해했겠습니까? 아 이건 안 되는 문제구나. 내가 용서의 주체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내가 용서받아야 될 인간이구나. 내가 누굴 용서해버리면 여전히 나의 가치와 나의 의미는 손실되지 않아요. 살아있어요. 그러면 모든 하는 행동은 내가 이미 목적이 되어버려요. 세상 일어나는 모든 자연 세계가 나를 위해서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요셉도 꿈을 꿀 때 그렇게 오해했지요. 해와 달이 자기한테 절한다 하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날 위해 하는 줄 알았지요. 자기 아니에요.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와 그 자기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는 하나의 희생번트. 자기는 소모품이 된 거에요. 자기는 소모품 된 겁니다. 아버지와 형제들 살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 아버지와 형제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오늘날 교회를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왜냐하면 야곱과 형제들로 메시아 왕국이 종결된 게 아니고 계속 내부적으로 그 카오스가 일어나야 돼요. 내부적으로 혼란이 일어나야 돼요. 혼란이. ‘야 이거야’ 하는데 다시 혼란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육신을 가지고 평생 살면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이 뭐냐? 나의 카오스입니다. 나의 혼란입니다. 분명히 어제 은혜 받았는데 오늘 은혜 받은 거 어디 갔지. 막장 만든다고 짜증만 내고. 갑자기 주님께서 다른 배경을 딱 만들어줘. 다른 배경을.


이제는 수입 얼마 안 되지만 작은 수입이나마 먹는 거 입는 것 족한 줄로 알겠습니다 이래가지고 찬양하고 집에 가서 보니까 알지도 못하는 빚이 2000만원 있다 했을 때 기가 차지요. 내 생 피 같은 내 돈을 누구야 지옥이나 가라. 입에 욕이 막 비타민씨가 막 나오고 어떤 돈인데 갑자기 은혜 받은 거 없어요. 다시 카오스가 되는 혼란이 혼돈이 되어버렸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해서 이 구원이 완성인줄 알았던 실수를 이스라엘 역사는 역사 내내 그 실수를 한 거에요. 반복해서 계속 그 실수를 한 거에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언약의 원칙을 줬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쭉 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살아라 할 때 그들은 자기가 최종 목적이 되가지고 율법대로 살면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 소원 들어주지요 라는 식으로 율법을 자기 소원으로 마감을 시켜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율법을 적용시키지 못하는 새로운 사건들을 여기 유발해버려요. 그러니까 이거는 율법이 먹히지를 않아요. 내가 율법을 잘 지켰다 이것이 그 다음 사건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보탬이 안돼요. 마치 자칭 성도라 해가지고 기도 빡시게 하고 헌금하고 온갖 것 다 했는데 막상 집안에 일 터지니까 50년 예수 믿은 게 아무 짝도 소용없는 일을 51년째 일어났어요.


과거에 그렇게 마일리지처럼 쌓아놓았던 이건 너무 아껴서 짬뽕 하나도 안 바꿨어요. 동네 짜장만 탕수육하고 바꾸지 않은 그 쌓은 마일리지가 중국집 이사 가니까 아무 소용 없는 거에요. 혼돈이 아무 짝에도. 그러니까 인간은 구원에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딱지만 모으고 있는 거에요. 자기 의와 가치를. 이만큼 모았으니까 주여 천국은 기본이고 상급 주세요. 상급 달라고 그거 내미는 겁니다. 보너스 줄 일 있습니까.


여기에 사건과 더불어서 등장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특징은 선지자가 해야 될 일은 카오스 속에서 고통이에요. 하나님의 상처. 그래서 선지자들은 톱에 켜서 죽고 그 히브리서 11장 한번 보세요. 그 정상적인 사람 별로 없어요.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고.


“모세도 애굽의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하면은 “고난 받기를 원했으니”, ‘고난’입니다. “고난 받기를 원했으니 장차 하나님이 주실 상을 봄이라 상을 고대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고난이에요. 사는 것 자체가 대구 강의에서도 했습니다만 억지고 고난이에요.


마치 인생살이라는 것은 이런 아주 높은 언덕을 올라갈 때 자기가 여기서 수레를 끌고 있고 뒤에다가 쓸데없는 자기 마일리지 있잖아요. 가치 의미를 이 기울기가 얼마나 높습니까. 가면 갈수록 힘들어요. 왜? 육신이 늙어가니까. 이제는 쥐어도 자꾸 떨어트려요. 이걸 쥐었다 했는데 떨어트려요. 미쳤다 내가 왜 이러지.


두뇌에 있는 명령하는 것이 신경세포에서 근육에 제대로 전달이 안 되가지고 근육 따로 내 의도 따로따로 놀아요. 이거 하나 고치면 눈 고장 나고 눈 고치면 이거 고장 나고 이거 고치면 이거 고장 나고 완전히 전부 다 기계인간으로 바꾸던지 수를 내야지 나중에 다 바꾸면 기계부분이 더 많아요. 원래 태어난 건 별로 없고 이빨 빼고 다 고쳐. 낼 치과 가야 되는데.


낑낑거리면서 가봤자 아무 희망도 없어요. 가봤자. 고생만 했지 아무 희망도 없어요. 이 무거운거 왜 들고 갑니까? 그럼 방법이 있느냐? 방법 없으면 강의하면 안 돼지요. 있어요. 뭐냐 하면은 바로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12장 31절에서 32절. 지금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주신 율법이거든요. 산상설교라고 하잖아요. 그 한마디 보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보기 전에 누가복음 6장 34절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그러니까 그냥 줘버려라 그 말이거든요. 그냥 줘버리는 것이 우리끼리는 그냥 줄 수 있어요. 그게 소문나면 또 공짜로 달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거는 어떤 사태가 해결이 안돼요. 마태복음 12장을 한번 봅시다. 31절에 보면 12장 하고 여러분한테 상당히 생소한 그림을 하나 그릴게요. 12장 31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그 다음에 뭐죠? “사하심을” 얻지요. 그럼 인간과 죄는 왜 태어났습니까. 인간 자기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인간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인간의 무슨 일을 하려고 태어났습니까?


모든 죄와 하나님 앞에 훼방하는 그 짓을 하라고 태어난 거에요 인간이. 인간이 할 역할이 이 역할이에요. 죄 안 짓고 싶다고요? 율법이 가만두지를 않는데. 율법이. 네가 오늘 웃었지? 내일 울거야. 율법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매사를 시비 걸고 나옵니다. 매사를.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고 우리 배경 자체가 해서 그래요. 우리 배경은 이 세상 애굽은 절대로 우리를 죄 용서가 안 되는 그런데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이게 인간의 분량이죠. 죄 용서가 안 되는데 태어났어요. 그런데 주님은 배경을 뭐로 바꿔줍니까? 죄 용서가 되는 그런 곳으로 신생아로 만들어주는 거에요.


이게 바로 주님이 할 수 있는 전부고 처음이고 나중이고 전부에요. 우리는 그 과정에 불과하고. 줄 거 다 줬어요. 율법 줬지요. 율법 줘가지고 의인 하나도 없게 만들었지요. 복음 줘가지고 전부 다 죄사함 없게 만들었지요. 뭘 더 원해요? 뭘 더 원합니까? 비 맞아도 괜찮아요. 비 맞아도 죄 용서받으면 됐어요. 죄 용서받으면 됐지 비 좀 맞으면 어때요. 감기 걸려서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 안 믿겠다 주체 의지는 우리 선에서 우리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요. 어디로 넘어갑니까? 성령으로 넘어간다는 말은 주님께 넘어간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주님의 영이니까.


주께서 용서해줘버리면 우리가 어떤 의지를 동원해도 우리가 지옥 안 가는 이유가 성령이 오신 것이 내 의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만약에 내 의지로 예수 믿으면 내가 나이 70넘어서 치매 걸리면 그걸로 쫑났어요. 끝났어요.


“권사님 정신 차리세요. 마지막 가시는데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 나 기억이 안 나는데요.” “그러면 나훈아는 누굽니까?” “나훈아는 잘 알지요.” 이게 자기 기억이거든요. 나훈아는 잘 알면서 예수는 모르는 거에요. “이 옆에 있는 젊은 사람 자식인데 알겠습니까?” 실화입니다. 우리 어머니 이야기니까. “모르겠는데요.” “남편 이름은 알아요?” “남편 이름은 알아요!”


장기 기억. 그만큼 오래 됐기 때문에. 장기 기억 되거든요. 나중에는 남편 이름도 모르겠지만. 이처럼 우리는 배경이 우리한테 스며들어서 배경이 만든 하나의 벽돌이에요. 하나의 부속품이에요. 우리는 세상의 셋트장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왜 내 운명을 내가 예수 믿습니다 내 있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왜 성령에게 넘기느냐?


그것은 바로 12장 29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다시 말해서 이건 권력 문제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우리를 포효하고 있는 그 권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좀 생소하지만 여러분들이 이해 안 될까봐 걱정하지만. 녹취 못할까봐 더 걱정.


이 권력 문제를 인간이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원통이 있다고 합시다. 원통입니다. 이 원통 있을 때 원통의 체적이 있겠지요. 체적. 부피. 이 원통이 원통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 원통을 한번 쪼개보자 이 말이죠. 쪼개보는 겁니다. 쪼개보면 정육면체가 되겠지요. 또 이걸 쪼개는 거에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이 쪼가리 된 이것을 cell, 작다, 세포라는 뜻인데, 조각. 여기서 힘이 여기서 사방으로 힘이 나오는 거에요. 이쪽에서 힘이 나오고 이쪽에도 힘이 나오고.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될 때는 힘의 역성이 계속 그 힘이 나오는 거에요. 힘이 나오는 이것을 선으로 표시할 때 이걸 가지고 선속이라고 합니다. 벌써 골치 아프지요? ‘선속’.


그래서 이 전체 권력, 인간 세계 권력 전체를 통나무로 본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적분해가지고 모든 cell의 적분을 델(∇), 델은 연산자에요. 이 표면적 전체를 A라 하고. 벡타장. 벡타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힘이 받는 방향에서 부피 하나를 조각을 내서 d에 v로 적분한 거에요. ∫d/v ∇=Adv 이것이 바로 벡타장 힘의 장이 된단 말이죠. 이것이 표면이거든요. 벡타장이라고 하는 것은 방향을 주는 힘을 이야기합니다. 힘의 선. 힘이 나온다는 거에요.


인간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힘이 나와요. 에너지가 있다고요. 어떤 장력이 있다. 장력. 이것을 체적으로 바꾸면 부피로 바꾸는 거에요. 부피로 바꿀려면 여기 이렇게 해요. 폐. 갇혀 있는 폐곡면. 체적의 s= a벡타×ds. ds라고 하는 것은 작은 이 조각을 ds라고 해요. 이렇게 해가지고 이 수식을 방정식을 푸는 거에요. 푸는 과정을 생략하겠습니다. 무리한 태도이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지금 제가 수학을 동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벡타를 동원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절대로 고립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고립적이지 않다 이것보다도 통나무 이렇게 해가지고 수학적으로 수학에서는 이게 전기장 이걸 계산해내거든요. 하나의 자력장 또는 전기선에서 전체적인 흐름이 얼마나 되는가 이게 수학을 동원해서 이걸 뽑아내요. 적분 미분을 통해서 뽑아낸다고요.


마찬가지로 수학에서 그걸 한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는 수학적인 계산해가지고 딱딱 수치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장력이 어느 정도고 압력이 어느 정도고 부피, 압력 이런 거 다 한단 말이죠. 세상은 자연세계가 그들에게 전부에요. 자연세계가 전부이기 때문에 자연이 흔들리면 안돼요. 자연 자체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거기서 속해 있는 인간도 그냥 흘러가는 거에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좀 시적인 표현이지만 여러분들이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걸 가지고 고요한 밤. ‘고요한 밤’. 밤인데 어떤 밤이냐? 아무 문제 없어요 이 세상에. 약간 코로나 있지만 백신 맞으면 그만이고. 아무 문제 없어요. 고요한 밤이에요. 그 고요한 밤에 누가 왔습니까? 누가복음 2장에서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 누가복음 2장에서 천사가 목자에게 알려줘가지고 베들레헴에 아기 태어났잖아요. 사단 났지요 사단 났지요.


시므온과 그 한나라는 과부된 지 84년 된 그분은 딴 것 보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혼돈에서 창조가 되시는 그 하나님의 약속. 그 완벽한 마지막 배경, 배경화면. 바탕화면 있지요. 그 배경화면. 그분을 딱 만나고 난 뒤에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이 다음과 같은 참 중요한 말을 했어요. 제가 유명한 말이라고 안하겠습니다. 중요한 말을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누가복음 2장에서 34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 보셔야 돼요.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아멘.


아기 예수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망하고 어떤 사람은 살아남는 그 표적이 되는데 그 표적되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바로 비방을 받게 되어있어요. 상처를 아픔을 느끼게 되어있다. 그 다음에 36절에 보면 “그 칼이 네 마음을 어떻게 한다? 찌른다.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했던 누가복음 아닙니까.


지금 누가복음 2장은 6장 앞에 있지요. 2장에서 했던 그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6장에서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 하나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는 거에요. “원수를 사랑하라. 남에게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도 비판받는다. 그냥 줘버려라” 29절 보면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이거는 마태복음 보면 산상설교에 보면 여러분 다 외우지요.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8절에 나오잖아요. 이거는 인간을 찌르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배경을 찌르는 겁니다. 오늘 제목은 배경으로 확정합시다. 배경이에요. 우리가 사는 배경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지금은 고요한 밤도 아니지요 인간은. 고요한 낮이죠.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지요. 낮의 풍경과 밤의 풍경을 제가 대비한 적 있습니다. 고요한 대낮으로 보는 겁니다. 젊은 애들은 밤이 되겠지만. 고요한 대낮. 아무 문제없어요. 이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없어요.


그냥 남 하는 것처럼 너무 튀지는 마시고 패션도 너무 튀지 마시고 그냥 남 비스무리하게 사시면 이 땅에서 잘 살았다 주위에서 그렇게 평가할 것이고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이 나중에 목사님 오셔가지고 기도해주실 것이고 그리고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내 뼈는 고향에 뭍히리라. Green Green Grass Of Home. 가사 내용에 그런 게 나와요.


사형수가 마지막에 죽는데 목사님 와가지고 걱정하지 말아라. 당신 죽으면 당신 그 뼈는 고향에 묻어줄게. 저 푸른 꽃이 피는, 메리가 마중 나오는, 탐 존스가 불렀던 그 노래에 나와요. 그것처럼 인간은 현재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자연세계가 누구를 위한 자연세계인지는 모르고 다만 그것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견고하고.


따라서 너무 나대지 말고 여기서 차분하게 조심스럽게 살게 되면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라고 이야기해요. 그 평가에 의하면 우리는 인생 성공작이라고 생각하지요. 이 정도하면 잘 살았다. 마지막에 커튼이 내려질 때 my way. 나는 욕 얻어먹지 않고 잘 살았다. 그렇게 자부하겠지요. 그게 바로 성령에 의하면 악령이 그 짓했다는 거에요. 악령이.


그래서 다시 한번 마태복음 12장을 보게 되면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현재 그 당시의 예수님의 모습은 상처받은 모습이거든요. 누구나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그런 성령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안목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중요하나 내가 중요하지 하면서 도망치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세요.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고요한 밤이거든요. 밤이잖아요. 어두움이잖아요.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이건 빛이 아니에요. 어두움이에요. 빛이 없어요. 처음부터 빛이 없었어요. 어두움뿐이었어요.


그런데 빛 되신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그들로부터 비방을 받고 우리의 가슴을 찔러줄 때 그거는 성령으로 찔러주지요. 찔러주게 되게 되면 뭘 아느냐? 내 인생이 내 결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내가 잘못 살았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성하거나 회개할 수 있는 능력 없어요. 따라서 반성하고 회개하지 마세요. 그것도 쓸데없는 자기 의입니다. 반성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바탕, 원초적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거에요. 카오스 혼돈 속으로.


내가 혼돈 속의 일부였구나. 내가 참 어두운 밤이었었어요. 어두운 밤이었구나.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이미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이죠. 왜냐하면 자기 자신부터 해서 자기 사상 자체를 일거에 부정할 수 있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은 이 세상 바깥에서 온 새로운 성령의 안목이 아니면 이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다시 누가복음 6장 봅시다. 6장 보게 되면 이제야 6장을 해석을 하게 됩니다.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라는 이 말씀은 나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네가 해낼 능력은 애초부터 태어날 때부터 이 말씀이 없었다는 것. 그것도 네가 잘못이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세상 자체가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끝은 어디로 끝나는가? 십자가에서 연결이 되어버려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어버립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버리면 우리는 이 말씀에,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배경이 돼요. 우리는 그 다 이루심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구원 받은 게 기쁜 게 아니고 주님 홀로 하는 그 구원을 구성하는 하나의 벽돌로서 가담됐다는 자체가 영광스럽지요. 우리는 너무나 황공스럽지요. 내가 구원받았다가 성립이 안돼요.


왜냐 하면은 내가 구원받으면 나의 목적으로 또 들어와버려요.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있는 그 구원에 내가 합류가 되는 거에요. 여기 박혀버린 겁니다. 딱 박혀버린 거에요. 빼도 박도 못해요. 쇠붙이가 강한 자석에 끌리듯이 내 힘으로 뗄 수가 없습니다. 박혀버린 겁니다. 43절 한번 봅시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여기서 생각을 좀 해 봅시다. 자, 42절하고 43절 한번 비교를 해봅시다. 42절에 대해서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한다면 애굽 사람 같으면 성령 없는 사람 같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래 우리는 나부터 생각하지 말고 남의 입장부터 먼저 생각해서 아 저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남을 이해하는 것, understand. 그 사람 입장에 되어서 생각해보고 그 다음에 다시 그 사람에 대해서 대하는 이것이 6장 42절의 말씀을 마치 성취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그렇게 만약에 생각한다면 여전히 누가 있어야 되냐 하면 결정권과 선택권을 ‘나’라는 것이 아직도 내가 존재해야만 가능 아까 했지요. 내가 있고 나의 객체가 있고 내가 말씀 지키고 내가 사랑을 베풀어 줄 어떤 대상이 있어줘야 그 대상과 나 사이에 누가복음 6장, 마태복음 5장 6장 산상설교가 유효하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장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산 속에 깊이 앉아가지고 이게 안 되겠지요? 장날에 5일장에 내려와서 누굴 만난다든지 해야 되는 거에요. 이렇게 될려면. 그런데 43절에 보세요.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지요? 그럼 여기서 뭐가 누락되어 버려요? 나는 열매에 속해버리고 나는 나무에 안 속한 거에요. 나무는 누가 결정한 겁니까? 열매가 결정한 게 아니고 열매는 나무가 있으면 어쩔 수 없어요. 이거는.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좋은 나무에 붙어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열매가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가 없다니까요. 미치겠어 정말. 열매 왜 좋아? 열매가 왜 이리 좋은 거에요?? ‘나’라는 열매가. 내가 좋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나 아는 거에요. 나 잘났습니다 나 구원받았습니다 그 자랑질 할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나는 누구한테 딱 붙었다 그 이야기할려고 하는 거에요.


당신들은 혼자 살지요. 나는 누구한테 들러붙었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에요. 당신은 홀로 살지요? 나는 신랑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참 신랑 이야기 나왔는데요 여기 보면 이것만 나오는 게 아니라 “남편들아 아내들아” 이야기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하고 다음다음 주에는 골로새서 할 건데요.


정말 결혼이라는 게 뭐냐 하면은 남편은 남편이 아내 하는데 간섭하라고 결혼한 게 아니에요. 남편은 아내한테 돈만 벌어주라고 남편 된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남편 된 자는 아내가 아내다운 그 자체로서만 감사해야 돼요. 남편이 아내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남편이 관여해서는.


그런데 그런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자기 자아를 확장할려고 해요. 다시 말해서 아내를 소유할 때만 내가 남편답다고 여깁니다. 처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래요. “여보, 애들 이리와 봐. 아빠 믿지? 당신은 남편 믿지?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당신 먹여살려줄게”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제대로 된 아내 같으면 뭐라고 합니까? 굳이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 해. 그렇게 하는데 굳이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자기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자식과 아내를 자기 소유화시키는 거에요. 이것은 곧 자기가 자기를 소유화시킬 때 오늘 여러분 이거 하나 꼭 아셔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 아내를 소유하거든요.


이거는 뭐냐? 결코 나를 배신 못하겠다. 이 고집입니다. 나는 나를 배신 못한다. 나는 아내가 굶는 것을 나는 못 참겠다. 되게 대단한 남편같이 보이지요. 아닙니다. 나는 나를 배신 못하는 거에요. 나의 남편됨을 남편됨의 그 가치와 의미와 의로움을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거에요. 남들 보기에는 정말 충실한 남편처럼 보이지요. 헌신적이고 그게 다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이 땅에 아내는 뭐냐? 이 땅의 아내는 아내의 약점은 남편 없이는 못 산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걸 약점이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남편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은 무조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없으면 내가 살맛이 안 나는 그러한 불행한 존재로 태어난 거에요. 무조건 무조건 나한테 잘해주는 그러니까 조금 잘하는 거 말고 내 욕망이 커지면 커진 그것마저도 나한테 잘해주는 그런 남편을 찾지 못하면 내가 항상 결핍을 느끼는 그러한 참 불행한 존재로 태어난 게 아내의 운명입니다.


그게 이 땅 부부 자체가 엉망진창 혼돈되어서 그래요. 혼돈이 되어서 그래요. 아무리 남편이 잘해줘도요. 아내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돈 벌어주면 또 딴 생각난다고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여자는 자기를 배신 못하기 때문에. 나는 누구한테 혜택 받아야 마땅하다는 그 존재 자체를 본인이 배신을 못해요. 이러한 정체성은 본인 잘못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모든 게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사야 4장이나 5장에 보게 되면 남자들만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사치하는 여자들보고 저주받아라 하잖아요. 너희들은 모든 게 썩어버렸다 하잖아요. 43절 봅시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 다시 말해서 신랑이라는 것은 신랑은 고립적인 출현이죠. 신랑은 오직 한분으로 유리알처럼 깔끔하게 정리돼야 돼요.


우리는 신랑이라는 것의 의미, 연관체제 속에서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신랑이라는 말할려고 그렇게 부부들끼리 부부되게 하신 거에요. 한번 살아봤지? 됐어 그만. 이제 끝났어. 이번 생 끝나고 다른 생은 주님하고 살아. 한번 살아봤잖아. 얼마나 내 욕구 욕망에 충족하지 못하고 살아봤으니까 이제는 미련 두지 말고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생각하지 말고 신랑하고 살아.


신랑하고 돈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것이 실망스럽게 만드는 것. 그 실망스럽다는 그 근거는 뭡니까? 내가 나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나를 지키고 싶어. 남이 나를 안 지켜주면 나라도 나를 지키고 싶어. 잘했어 훌륭했어. 괜찮아 너는 할 수 있어.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 양말 벗고 들어가 골프 칠 수 있어. 잘 할 수 있어. 우리는 맨날 이러고 있습니다. 혼돈이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43절입니다. “내가 나무될게. 너는 내 열매만 되어라. 딴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딱 붙어 있어. 너는 나한테 붙어, 나는 지남철, 너는 쇠붙이” 죄사함의 유월절의 그 취지가 그거에요. 네가 있는 것이 너 구원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유월절 피를 자랑하라고 하는 거에요.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가 이제는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 교회에서 하는 이것을 좀 정리할 시점이 왔어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유월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거에요.


내가 예수 믿는다고 주문 외우는 게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들어와야 돼요. 예수님의 피와 살이 들어와야 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그걸 그리스도 몸이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 몸이 지남철이라면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휙~해가지고 의미체제, 연관체제에 의해서 갖다가 붙어버린 거에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살게 된 겁니다.


그러면 여기 머리에서부터 뭐가 나옵니까? 피와 살이 순환하지요. 순환. 돌고 돌지요. 그 피가 돌 때 우리는 죄인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내 안에 용서했던 죄 사함의 피를 우리의 행함으로 모독하지 맙시다. 우리의 의와 가치로서 잘남으로서 나의 성실함으로 그 주님의 일괄해서 이미 용서한 그 용서를 거기에다가 자꾸 숟가락 얹을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 말씀 보면서 45절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런 말씀을 줄 때 인간의 세상 배경이 있는 사람한테는 얼마나 이 말씀 보고 ‘야 나도 잘하면 변화할 수 있구나’ 변화할 수 있는 내 양심의 능력을 발휘해서 또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의 능력을 발휘해서 내가 이 모델이 함 되어보겠다고 라고 나선 사람이 12사도 가운데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지키면요, 당신은 어떻게 지켰어? 우리가 묻고 싶잖아요. 그런데 12사도 가운데 심지어 사도 바울 가운데 이걸 지킨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고 뭐고 사도 바울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씀 지킨 사람이. 지킨 분은 이미 정해졌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지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그 지켜진 몸과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죄사함의 언약적 효과를 부여받은 언약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 때나 모세 때나 다윗 때나 아브라함 때나 전부 다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움직였던 사람들을 봅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움직여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증인으로써 이 땅의 하나의 과정 속에 놓여있음을 우리가 반기면서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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