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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2 20:42:37 조회 : 6525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삶 이름 : 이근호(IP:220.230.121.25)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삶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을 재차 방문한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 죽음이 밀려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죽음과 다른 죽음을 이야기하셨다. 그것은 저주에 관한 언급이었으며 예수님 본인의 말씀이 곧 기준점이 되셨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담겨 있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로서 이 세상 안에서 두 개의 대립되는 죽음이 동시에 등장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너희 죽음을 대비하라’ 하든지 혹은 ‘너희 죽음을 이겨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들은 죽음 안에 갇혀있다’고 말씀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엄연히 살아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생각에는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너희들은 죽었다’라는 의사 전달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너희 죽음에 관심 두라’는 뜻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의 죽음에 관심 두라’는 뜻으로 다가오시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종교라는 것은 현재 아직도 살아있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장래에 들이닥치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하든 피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아직은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에 하등의 의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살아있을 동안에 죽음을 대비해보자는 취지이다.



이런 취지로 평생을 일관하기에 일반인들에게 종교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해야 될 각가지 활동 영역 중의 하나일 뿐이다. 주간 스케줄 중에 겨우 한 모퉁이에만 차지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자아를 더욱 더 윤택 있게 살려내기 위한 시간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 모통이에 할애한 그 ‘종교 시간’은 장차 죽음 이후의 보장받을 영광스러운 ‘자아 불멸의 삶’을 위해 보험용으로 책정된 시간이 된다. 이런 아이디어는, 자신의 죽음이란 그저 자기 일상적 삶의 뒷부분에 갖다 붙어있다고 보는 안목에 불과하다. 이런 안목 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안목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셈이다.



결국 인간들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 혹은 종교생활이라는 형식 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앞장세우시고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의견을 전혀 담겨 있지 않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있다.



인간들은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이 땅에 보내시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그냥 오면 ‘오시는 가봐’ 하는 식이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만 살아가는, 그 죽음에 이미 합류된 자들만이 그 이유를 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있다.



그리고 왜 자신이 벌써 죽어야만 하는 자인지도 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초래된 결과인 것도 안다. 이 ‘예수님 죽음’은 일관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층에서 솟아올라 온 능력인데, 그 능력을 통해서 따라 들어가게 되면 당연히 일관된 하나님의 약속 층 전체와 만나게 되어 있다. 이 영역과 장(場)은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된 자가 아니라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세계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 세계를 들어서고자 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거절당했다(요 13:37). ‘처소’가 예수님의 자기 죽음으로 마련되지 않는 한 인간이 거할 처소는 천국에는 없다(요 14:2). 이 ‘처소’는 성령님이 이 지상에서 구성해내시는 영적 공간이기도 하다(요 14:16-18).



예수님의 재림이란 이 ‘처소’의 내막과 내용과 관련 있는 사건이다. 즉 ‘처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이 세상 밖으로까지 그 내용이 완전히 공개되고 확인되는 사건이 예수님 재림 사건인 것이다. 누가 들어 앉아 계시기에 그 처소만이 축복의 공간인가가 온 우주에 확인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의 본질을 알려면 ‘처소’ 안의 사정을 알아야 한다. 처소 안에서 성령님은 어떤 식으로 성령을 끝까지 영원토록 떠나지 않고 보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처소 확인’을 위하여 재차 방문하시는 예수님의 ‘오심 사건’에 입각해서 정리되어야 한다.



왜 오셔야만 하는가? 이왕 헤어진 마당에서 그냥 따로따로 사시다가 연말에 정산 처리하듯이 심판으로 없애버리면 되지 않는가? 아직 처리되지 못한 무슨 일이 미련처럼 남아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귀환은,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죽은 자’로서의 귀환이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것은, 인간들이 죽은 자의 세계를 인간들의 세계 속에는 용납해 줄 수 없음을 전제로 한 조치였다. 이 세계는 산 자들만의 세계이지 죽은 자는 죽음의 영역에 따로 집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다.



죽은 자들만의 세계와 산 자들만의 세계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불변의 원칙임을 보여진다. 그런데 바로 인간들의 이런 의식을 발칵 뒤집어진다. 산 자만이 허락이 되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죽어버린 자들이 합세가 가능하다는 것이 ‘처소’ 개념에 담긴 의미다.



예수님에 의해서 확보된 ‘처소’ 개념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그 어떤 제자의 머리에서도 짐작하지 못한 공간 개념이었다. 기존의 공간에 속해있으면서도 섞이지 않는 특별한 ‘처소’가 성령님에 의해서 조성되어 진다는 것은, 인간의 경계화가 예수님의 처소 마련 정책에 의해서 와르르 허물어져 버렸다.



‘안’과 ‘밖’의 구분은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해서 결정할 문제였다. 자동차는 창문을 경계선으로 하여 안과 밖에 구분된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아라는 자동차를 각기 갖고 있고, 그 자동차 안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안과 밖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인간이 자동차 창문을 안에서만 자동차 창문이라는 경계를 통해서 자동차 바깥을 향하여 ‘절대적 세계’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미 내 안에 들어있는 절대세계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아 안에 들어있기에 어디까지나 ‘안의 세계’이지 ‘바깥의 세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동차 창문이 그대로 있는 이상 인간은 그 절대 세계를 품고 있는 중이라도 창문을 통해서 또다시 자아 세계를 능가하는 그 넓은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목숨 바쳐가면서 소망했던 세계가 그 세계였다. 하지만 그 세계는 베드로 본인의 창작이 세계이요 허구에 불과했다.



실재하는 절대 세계는, 인간들의 자동차 그 자체를 폭파시키고 그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세계다. 왜냐하면 주님이 마련하신 ‘처소’는 오직 주님의 죽으심에 의해서만 안과 밖이 경계 지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 안’의 세계와 ‘예수 밖’의 세계를 또렷하게 드러내는 사태다. 재림 때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잘 아시고 천사들은 그들에게 보내어 자기 쪽으로 올려 보내신다.이왕 확정지어진 처소 안의 사람과 처소 밖의 사람을 구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가 곧 예수님 재림인 것이다.



여기서 성도의 이 세상 삶의 본질이 밝혀진다. 성도가 마땅히 주님의 나라에 합류해야 되지만 그대로 이 세상에 남겨 두는 이유는, ‘죽은 자’로의 귀환을 성도의 삶을 통해서 증거하기 위함이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이지만 데려감을 당하지 않고 그대로 이 세상에 눌러 지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허용하는 진리말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기초한 다른 진리를 섞어 넣기 위함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4-19)



즉 성도에게 있어 예수님의 죽으심이 주도권을 쥐게 되고, 성도가 유발하는 인간적인 창문은 이 죽으심 안에서 계속해서 깨어지게 되어 있다. 이 성도들의 존재로 인해 이 세상은 생(生)과 사(死 )개념 정립에 필요한 현장이 되고 경계를 보여주는 배경이 된다.



인간들은 죽음의 세계를 자기 세계에서 축출했다. 하지만 그 축출당한 세계 안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살아있음’의 공간(처소)이 마련되었음을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증거될 때에, 이 ‘처소’의 존재함은 축출의 성격과 결부되는 양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축출의 의미를 함유한 채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진정 주님이 장만하신 ‘처소’가 충만한 생명의 로서 행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버림받은 자가 되셨기에 비로소 진작 버려야 할 세계와 버림받지 않을 세계가 또렷하게 구분 지어졌고 그 취지를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이 세상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죽음’을 ‘생명’이라고 말하고, ‘생명’을 ‘죽음’이라고 말하는 죄악된 ‘처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만드신 처소가 이곳 인간 세계에서 만날 때 비로소 십자가 지심의 의의가 드러나게 된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이 세상 사람들은 건들지 말아야 될 분을 건드렸고, 죽이지 말아야 할 분을 죽였다. 사실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의도한 바였다. 그들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은 확정된 증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3-2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장차 ‘죽은 자’로서의 귀환될 자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네들과 똑같이 공간에 계신 일반인으로 여겼다. 낯선 공간을 이 땅에 박아넣으시라고는 그들은 도저히 생각 못했다. 이점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공간을 설치하신다는 것은 곧 기존의 이 세상을 철저하게 버리겠다는 결심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왜 그래야 하시는가? 그것은 예수님은 심판하려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그 심판의 마무리 작업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인간들은 자기 세계 안을 깨끗이 소제하는데 아이디어를 바깥 거룩한 절대 세계에 눈을 돌린다. 결코 자기 세계에 대한 포기나 버림이 아니다. 만약 자기 세계를 포기하게 되면 이는 곧 자기 자신도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를 물고 들어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 청결 작업에 동원된 불도오즈 앞에 자신의 신체를 들이내밀어서 의도적으로 깔려죽으신다.



누가 자신을 죽여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스로 죽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 왜 이렇게 나서시는가 하면, 궁극적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생명’이 아니면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생명 생산을 위해, 참 생명이 넘치는 공간 창조를 위해 악은 그 본질과 정체를 궁극적으로 유일하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공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목숨을 얻고자 한다면 잃는다”는 주님의 말씀은(마 10:39), 인간들이 따로 자신의 살 공간을 마련하거나 구성하는 그 장소가 항상 죽음의 덩어리 위임을 분명히 해두고자 하신 말씀이다.



악의 세력, 곧 죽음의 힘은 인간들에게, 죽지 않고 계속 사는 쪽으로 몸부림치도록 유도하기에 참으로 무섭다. 죽음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로 하여금 자꾸만 살려고만 하는 방향으로 몰아넣으므로서 인간에게 죽음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절감하고 늘 절망한다.



이러한 악의 강력함이 충분히 살아있는 그 깊숙한 곳으로 예수님은 자기 성도들을 보내시는 것은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에 동참케 해서 ‘죽은 자’의 귀환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소가 딴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임을 철저하게 느끼게 하신다.



성도의 삶이란 죽기를 강요받은 ‘처소 ’안에서의 삶이다. 거기는 이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분이 계시고, 그 버림받은 분에 대한 이 세상 세력의 축출 성향도 함께 느끼게 되고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이 세상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복수성향을 함께 떠맡게 된다.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시 69:24-28)



예수님은 재림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버림받으신 그 십자가 사건이 성경 말씀 전부를 그대로 성취시키신 최종 사건임을 최종적으로 증거해 주는 사건이다. 성도에는 예수님이 재림은 기정사실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버림받은 처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성도를 자신의 ‘처소 안’에 가두어두심으로 함께 버림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충분히 이해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8)



이스라엘이 광야에 들어설 때에 비로서 ‘안식’의 의미도 함께 등장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버림받으심 자체가 곧 생명의 진수임을 확인해주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말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또다시 배척하도록 작용하는 죽음의 힘이다.



생명에 대한 배척, 이것보다 더 악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악함 없이는 생명도 없다고 아우성들이니, 우리는 지금 지옥, 그 후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세상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 즉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자들이 곧 재림 때에 건짐받을 주님의 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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