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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9 16:40:04 조회 : 2513         
004강-계1장8-9(예수님의 환난)-rev060312 이름 : 박온정(IP:211.202.16.177)

004강-계1장8-9(예수님의 환난)-rev060312 /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8-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399페이지입니다. 『8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아멘.



요한계시록은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후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혜택으로 덮쳐오느냐에 대해서, 그 혜택에 대해서 쭉 적어놓은 책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다 이루었다’했죠? 다 이룬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넘겨져 오느냐 하는 겁니다. 부활이란 것이 속된말로 ‘못 말리는 능력’이에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 죽은 지 나흘 된 마르다와 마리아 오빠가 썩은 냄새가 무덤가에 진동을 하는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썩어 문드러져가는 마리아 오빠 나사로를 부활의 능력으로 나오라 했습니다.



‘나오너라!’ 하니까 죽은 나사로서도 감당이 안 되는, 죽은 나사로도 저항할 수 없는 부활의 능력이 덮치면 부활의 능력이 자기를 감싸고 휩싸이게 되면 끌려 나와야 되는 거예요. 산채로 나와야 되요. 이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센지, 성경에 보면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렇게 돼 있어요. ‘끊을 수 없다’고 돼 있습니다. 세상의 악마조차도. 누구누구의 저주조차도 「환란과 핍박과 가난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라…」어떤 협박공갈과 시련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했습니다.



그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어느 정도 강한가를 보여주는 게 바로 부활입니다. 죽은 자가 주님의 능력으로 되살아난 거죠.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살리려고 아등바등 애를 써봐야 힘만 빠집니다. 소용없는 겁니다. 어떤 물리학자가 그런 예를 들었는데, 그 예가 유명한 예입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자기 운동화를 신고 물에 빠졌을 때 그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그 사람 스스로 물에서 나오겠느냐, 하는 겁니다.



자기 운동화 끈 잡아당겨봐야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는 시도와 함께 같이 물에 빠져버리죠. 사람이 교회 와서 부활되겠다, 영생 얻겠다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물에 빠진 사람의 신발 끈을 잡아당기는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 업습니다. 종교의 힘이라는 것은 부활의 힘이 아닙니다. 종교의 힘은 아무 소용없어요. 진짜 힘은 예수님의 부활의 힘이 참된 힘입니다.



종교의 힘에 있어서의 중심에는 누가서 있느냐 하며는, 자신의 열심이 그 핵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죽은 나사로도 죽은 지 나흘 만에 성큼성큼 걸어서 나올 정도니 그 능력의 중심이 어디 있느냐 하며는, 오늘 본문에 보면 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그 공로와 본질이 그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종교라 하는 것은 내가 시도해야 되고 내가 열심내야 되고, 내가 게으르지 말아야 되지만 그런 거 해봤자 물에 빠진 자가 몸부림치는 것에 해당되지만 부활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의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오실 그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을 분출하는 중심 센터에 그분이 자리 잡고 계시는 겁니다. 그분이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어떤 분이냐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 들으면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며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논한 적도 없이 다른 어떤 세계를 꾸미고 계시는구나, 딴 세계, 부활의 세계를 주님이 일방적으로 장만하고 계시는구나, 를 여러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의 시도 말고 주님의 시도가 따로 자신의 프로젝트대로 진행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람의 모든 노동은 자기를 위한 노동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정확하다고 봐요. 인간의 모든 노동은 자기를 위한 노동이에요. 그런데 부활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결과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노동 하다보니까 거기서 삐져나온, 거기서 흘러나온 결과가 부활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일하다 보니깐 흘러 넘쳐서 나오는 능력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부활의 능력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의 부활은 나의 소망이 아니었어.’ ‘나의 기대사항이 아니었었어.’



내가 용서를 받고 내가 영생을 얻고 내가 부활한 것은 주님의 계획이 내 계획보다 앞섰어, 라는 고백을 스스럼없이 내뱉게 돼 있습니다. 특징이 그래요. ‘천당 가는데 어떤 식으로 가야되지?’ 이런 음흉한 꼼수를 쓰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들이대는 거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말려든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내 죄 다 가져가시고,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의 낙원을, 우리가 있을 영원한 안식까지 다 장만해주시고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 하냐면 ‘증언 한다’



예수의 증거에 인하여 밧모 섬에 있다. 예수님의 증거에 인하여…그렇게 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귀양 간 것도, 귀양 가면서까지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와 그 영광의 나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사도요한을 밧모 섬까지 몰아넣고 몰아넣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눈치를 챈 겁니다. “에이, 주님께서 하셨죠?” “나 귀향살이 한 것도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하셨죠? 모를 줄 알고? 다 안다니까요!”



눈치 챘어요. 사도요한이 눈치를 챘다 말이죠. 사도요한이 눈치를 챘는데 왜 우리는 눈치를 못 챕니까? 참 이상하죠? 사도요한은 자기가 밧모 섬에 귀양 가서 고생한 것까지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못 말리는 능력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몰아넣었다는 것을 그걸 감지덕지하게 수용하는데 우리는 왜 인생을 살면서 한 순간 한 순간 넘어갈 때마다 짜증부터 낼 준비를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아까 제가 얘기했듯이 모든 노동을 나를 위한 노동인양 여기고 노동에 나섰기 때문에 결과물이, 증거 하는 그 결과가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라는 반발심으로 나올 수밖에 없죠. 이제는 바뀌어야 됩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되요.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증거 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동참해야 됩니다. 사도요한을 제끼고 나는 나의 신앙을 갖겠다고 나오면 그거는 엉터리입니다!


사도요한이나 사도바울이 괜히 우리 앞에 얼쩡대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괜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우리 앞에 얼쩡대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좋아하는 식으로 믿음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아브라함과 사도요한과 이런 사람 비교해 보세요. ‘아, 이런 게 신앙이구나,’ 라는 것을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좀 어렵게 하라고 요청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어떤 점에서 어렵냐 하면,



여기에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알파요 오메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전능한 자, 이점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알파요 오메가’ 헬라어로 처음이고 나중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왜 어려우냐 하며는, 우리는 처음과 나중이 발전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쭉 살아오고 있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은 훨씬 더 변화된, 성숙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성경말씀의 해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 동일하다’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과 나중을 동일하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과악 사이를 항상 조절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비록 시작은 악이지만 나중에는 선으로 탈바꿈하려고 그 과정 절차를 밟아 나가려고 시도합니다. 흔히 교회서는 그걸 성숙, 또는 성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악에서부터 점차 적어진 악으로 더 나아가 악과 선의 중간쯤 지점을 지나서 이제는 악보다 선이 더 많아지는 보다 더 성스럽고,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천사와 같이 성자의 반열에 들어가 골인하는, 그러한 절차와 과정을 포물선 그리듯이 쫙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스토아학파라는 게 있어요. 거기에 보면 이것 전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건 원래 순수했는데, 인간의 영혼이 못된 육체에 갇히다 보니까, 배고프다, 때리고 싶다, 욕망이 들끓은 육체의 갑옷에 갇히다 보니까 영혼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영혼이 주도권을 쥘 수가 없어가지고 양보에 양보를 하다보니까 타락에 가속도가 붙어서 이제는 영혼과 육체가 같이 침몰하고 추접스럽게 살아가는 인생,



이것은 순수한 영혼의 세계에서 많이 이탈했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 안에서 영혼을 따로 해방시켜주어야 될, 그 순수함을 끄집어내어 그 알맹이만 쏙 빼먹을 수 있도록 알맹이를 보존하는 책무를 지고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간다. 라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철학입니다.



방금 제가 한 이 이야기는요, 스토아학파라는 서양철학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과 理가 있어서 정은 이를 학대하고 이는 정에서부터 벗어나고 이러한 몸부림과 갈등이 인생의 고민과 괴로움을 제공한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육체를 영혼이 때려야 되죠. 절제하고 관리하고 때려서, ‘말 좀 들엇!’ 하면서 자기를 때려서,



자기를 때리면 때릴수록 하나님이 주신 영혼은 상처를 덜 받게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영혼이 욕망에 의해 덜 상처를 입을까를 그들이 구상한 것은 뭐냐면,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은 타인을 모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이 갖고 싶은 것 갖고 싶고, 남이 하고 싶은 것 하고 싶고, 따라서 이거는 마귀의 유혹이기 때문에 끌리면 자기 영혼이 상처를 입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사람과 사이에서 훌쩍, 떠나버리는 거예요. 외롭게. 고독스럽게.



그러면 어디 가냐, 깊은 산속에 가지요. 바로 중들이 깊은 산속에 가잖아요. 팔공산은 깊은 산속도 아니고 유원지 다 됐습니다만, 기도원도 깊은 산속에. 깊은 산속에 가도 성이 안차면 어떤 사막의 성자는요, 육각형으로 만든 원주, 기둥을 세워놓고 수 십 미터를 어찌 올라갔는지 그 위에 꿇어앉아 금식하면서 하늘나라를 사모했다 말이죠.



이런 식으로 자기 영혼을 구원하려고 한 겁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얘기했듯이 이것은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은 그 핵심부분에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님의 공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종교적인 열성과 노력이 사람이 자기를 부활의 능력으로 열어주지 않습니다. 기본이 안 됐어요. 모르죠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도. 기본이 안 돼 있는 거예요. 뭐가 복음인지 뭐가 종교적인 짓거리인지 그 차이를 몰라요.



부활의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몰라요. 자기 속의 영혼이 부활의 능력이 아닙니다. 영혼이 자기 영혼의 고향을 떠난 것이 부활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능력이 임해야 죽은 지 나흘 된 자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아니고 스토아철학자도 아니에요. 저도 물론 아니고. 예수님 빼놓고는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부활의 능력을 제공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에요.



인간의 노력은 기껏 자기 육체를 학대해서 상상했던 순수함, 자기 영혼이 안 다치게 하기 위해서 잘 보존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아이고, 네 영혼 네가 잘 보존했구나, 기특하구나, 천국으로 구원해 줄 거라,’ 그런 아이디어 그런 발상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에서 멀어지고 선과 가까이 가면 구원되는 줄 알고 착각하는 이것이 인간들의 솜씨예요. 인간들의 작품이고. 인위적인 산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네 힘으로 노력해서 천국을 찾아오너라,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창세기 3장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먼저 찾아오신 분이 먼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될 프로젝트, 기획된 작업을 하나님이 먼저 제시했어요. 그게 뭐냐면 그게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 약속이라는 것이 어제의 약속과 내일의 약속이 알파요 오메가라, 항상 동일하다 이 말입니다. 항상 동일해요. 사람들이 노력해서 더 선한 일을 추구하게 되면 약속이 더 빨리빨리 효과를 발하고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라, 약속은 처음 약속하실 때 그때뿐만 아니고 약속이 성취된 거기에도 동일하게 주님께서는 일하셨다 이 말입니다.



사람의 어떤 노력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예를 들게요. 하루는 아침에 운동하고 오니까 다른 식구가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식탁을 보면서 ‘내 밥 있나?’ ‘아빠 밥 없어요.’ ‘그러면 숟가락 있나?’ 숟가락 없습니다.‘ ’그럼 국은?‘ ’국도 없어요.‘ 그래서 부엌으로 가서 밥과 젓가락하고 국하고 가져 올라니까 손은 두 개지, 세 개를 쥘라하니 쥘 수가 없어요. 물도 가져와야 되고 물까지 네 개, 우리 진주가 하는 말이 ’아빠 접시에 담으면 안 되나?‘ ’아, 맞다 접시에 담으면 된다.‘ 거기서 내가 느낀 게 뭐냐 하며는 접시에 담으면 국, 밥, 젓가락까지 하나의 쟁반에 이동이 가능합니다.



몰랐지요? ㅋㅋ 접시에 담으면 같은 이동이 가능하다고요. 접시에 들면 손은 두 개라도 네 가지 한꺼번에 공간이동이 가능하다 말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약속은 접시예요. 접시에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심지어 악마도 있고 예수님도 계시고 코끼리, 사슴부터 해가지고 코스모스도 거기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 내가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주동자가 돼 가지고 창세기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님이 접시 용도로 사용해서 거기에 남자든 여자든 몽땅 이동을 시킵니다.



언제까지? 마지막 때까지. 알파요 오메가요, 전과 후와 시작과 끝이 발전 된 게 아니고 동일하다 이 말이죠. 세월이 가도 동일하고 시간이 흘러도 동일해요. 그렇다면 이게 왜 중요하냐면 잘 들어보세요, 보통 남자 여자 결혼하면 ‘너 나에게 뭐해줄래?’ ‘너 나 사랑하나?’ 이런 식으로 자기 주장한데 약속 안의 남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배치되느냐 하며는 남자는 예수님 역할 하라고 약속이란 접시 위에 놓여있습니다.



여자는 교회 역할 하라고 그 접시 위에 같이 놓여있습니다. 따라서 남자가 ‘너 나 사랑하나?’ 이걸 요구할 자격 없고, 여자가 ‘자기 나 사랑해?’ 그렇게 요구할 자격 없습니다. 둘 다 공통의 토대위에, 공통의 접시 위에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놓여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되요. 이거 내가 지어낸 얘기 아닙니다. 이거는 에베소서5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남편 된 자들이여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친 것같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남자들은 안 들은 걸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여자는 그런 남편에게만 복종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 남편에게만. 개나 소나 술 먹고 깽판치는 남편은 후라이팬으로…? 그런 남편에게만 복종하라 돼 있어요. 왜 그랬냐 하며는 그 여자는,



하나의 탤런트로 배우인데,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알파와 오메가 안에 여자는 여자이기 위해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여자로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로서의 미션을 떨치기 위해서, 자기 뜻을 도모하기 위해서, 영웅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영웅인가를 실감나게 연기하라고 거기에 남편으로 새겨져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귀도, 마귀도 피조물이에요. 타락한 천사입니다. 악한 것들도 하나님의 때를 위하여 적당하게 참여한다고 잠언서에 나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악마도 선택되지 못한 자, 지옥 갈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서 마귀는 지금도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해야 되는 거예요. 지옥 갈사람 여기 모이라고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악에서 선으로 추구하면서 우리 천국가자.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면 천당 간다. 열심히 해야 천당 간다. 이런 식으로 열심히 전도하는 것도 마귀의 일꾼입니다. 따라서 그 접시 위에는 ‘그 약속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고 돼 있죠? 싸움이 알파와 오메가, 이미 시작된 싸움이에요. 그리고 그 접시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접시에 담긴 하나님의 자기 약속입니다. 우리한테 의논한 약속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만들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것으로 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작용하시고 마지막 때에 마리아 몸에서 태어남으로 오셔서 재림까지 하시는 거예요.



장차 오실 분이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자는 남자역할 해야 되고 여자는 여자 역할 해야 된다는데, 어느 남자 어느 여자가 주님의 말씀 지킬 위인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접시 네 개, 악마 여자 남자 예수님 네 개의 접시 가운데서 남자와 악마는 우리에게 죄 짓는 쪽으로 인도하는 자고 여자와 남자는 말씀을 지키고자, 선악적으로 지키고자, 지키고자 해도 나는 못 지킨 죄인이구나,를



아는 자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여자의 후손, 예수님은 우리가 지키지 못한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그 접시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같은 시대에. 그럴 때 예수님을 뭐라고 하냐면 ‘새로운 몸’이라고 해요. 새로운 몸. 이게 로마서에 5장에 보면 상당히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5:14」



아담은 장차 오실 새로운 몸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옛 몸으로 오신 겁니다. 여러분들 음식점 앞에 진열장에 보면요, 가짜로 만든 음식모형이 있어요. 가짜로 만든 음식물을 아주 먹음직하게 만들어 놨지만 못 먹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원하는 몸이 아니에요. 그것은 가짜 몸이에요. 오실자의 모델케이스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 가짜 모형 부서져도 괜찮아요. 식당에 가면 김이 피어오르는 맛있는 음식이 실제로 있습니다.



아담의 역할은 흙에 속한 몸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에 속한 진짜 몸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이 존재해야 되는 겁니다. 아담의 육체를 입은 자가 누구냐,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몸을 준비했는데 새로운 몸의 주특기가 뭐냐 하면, 부활이에요! 주특기가 부활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몸으로서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왜 이 땅의 아담의 몸을 입어서 하늘의 몸을 입어야 하냐면,



마귀로 말미암아 생겨버리니 죽음이라는 것을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 이길 수 있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이 못 이길까? 라는 것을 온 우주에 밝혀 보여주는 겁니다. 봐라! 되잖아! 십자가에 죽어도 사흘 만에 되잖아! 나사로는 나흘 만에 살아났거든요. 나사로는 사람의 모형이기 때문에 나흘 만에 살아나도 또 죽어야 되요. 모형으로서 흙에 속한 거니까 죽어야 되지만.



항상 알파요 오메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장차 오실 자라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의 어떤 실수와 오류와 상관없이 첨부터 확정된 채 그냥 세월 따라서 그대로 약속이라는 접시에 실려서 이동하고, 이동하고 이동했다는 겁니다. 왜 이걸 안 바라보느냐 하는 겁니다. 왜 이걸 사람들은 안 바라보고 자기를 위한 노동에만, 그 결과에만 집착하느냐 이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어떻게 혜택을 입었느냐 그건 생각 않고 내가 이 교회에서 장로가 됐나, 집사가 됐나, 목사가 됐나,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느냐,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느냐, 얼마나 전도를 많이 했느냐 여기에만 몰두하다가 자기 예상 결과가 안 나오면 삐져가지고 교회 안 나오고 낙담하고 ‘이게 뭡네까~’(개그 버전) 기껏 목사가 설교한다는 게 뭐냐면 스토아학파야,



여러분들이 복을 못 받은 것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래, 이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십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거는 누구한테 얘기한 거냐면 욥한테 된통 당해야 될 그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얘기한 거예요. 그런 사고방식으로 하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된 거예요. ‘네가 선악과 따먹으면 하나님이 되리라’ 이건 마귀가 하는 얘기잖아요. 마귀가 하는 이야기를 액자 만들어 걸어놓은 사람 없지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거는 암웨이나 다단계에서 영업사원 훈련할 때 붙이는 거예요! 시작과 끝이 동일하다는 것을 믿을 때, 나의 부진함과 미진함이 수치가 아닙니다! 이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인간은 원래 덜 되먹어서 맨날 자기 몸을 덧입히는 짓들만 해요. 그게 문화, 컬쳐라 하는데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자꾸 덧입는 걸 시도하고 있어요. ‘옷 괜찮아?’ ‘머리 스타일 한번 바꿔봐?’



이거는 전부가 새 몸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새 몸, 부활이 아니에요. 「우리의 몸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했습니다. 이동하고 이동하는 거예요. 이걸 저는 마침 무엇으로 표현하고 싶냐면, 지금은 그런 거 없습니다만 우리들 중학교3학년 때만 해도 졸업장이 상장보다 더 귀한 증서예요. 그래서 졸업식 날 골목에서 졸업장을 돌돌말아 담을 수 있는 통을 팔아요. 졸업장을 꺼낼 때는 통이 있고 돌돌 말린 졸업장이 빠져 나오지요?



그 빠져 나오는 것을 보면 역사에 구애받지 않은 알파요 오메가가 빠져나오는 겁니다. 첨부터 그랬었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동일하게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빠져나오면 여기서 빠져나올 때마다 새로운 몸이 창조됩니다. 그 새로운 몸이 창조 되는 게 어디에 나오냐면 마태복음1장1절부터 나옵니다. 마태복음1장1절이 얼마나 어려운지 전도하는 사람한테 성경 읽힌다고 첨부터 마태복음 읽으라 하는데 1장 읽다가 시험 들어 가지고, 그냥 웃죠.



뭐가 낳고 뭐 낳고 그 낳는 얘기 왜 하느냐 차라리 우리 집 족보 읽는 게 낫겠다, 이런 식인데, 여기 보면 14대. 14대. 14대로 끊어지죠? 실제로 세 보면 14대 15대 14대입니다. (이 부분 90년대 오래된 마태복음 강의 들으면서 새롭게 발견, 놀랐던 녹취자) 이것은 뭐냐면 다윗이라는 사람은 졸업장 통 속에서 졸업장 끄집어내는 것처럼 그 다윗이 그 다윗 아니라는 거죠.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 없는 이삭,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 모든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서 속사람이 새롭게 되어지는 부활의 능력을, 미래에 천당 가야 하는 것이 아니고 어제도 그리했고, 오늘도 그리했고, 내일도 그리하니까. 이미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거듭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14대, 14대, 14대예요. 부활의 능력은 어제도 역사했고 오늘도 역사하고 지금도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이 뭐냐 하면 우리가 세상 살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이 노동 말고,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기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의 그 결과물, 부산물로 주 예수님이 부활했다 하는 것, 새로운 몸이 되셨다 하는 것,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 그런 거 가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이 말은, 그것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그것이 장차 나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 믿어지는 기이하고 놀라운 현상이 우리 내부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작열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아, 주님의 약속이 침투했구나. 내가 주님의 접시위에 놓여 있구나, 이제는 내가 아니라 즉시 약속을 구현하기 위한 나구나,



약속을 구현하기 위한 나. 나는 남편이 아니라 아내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해야 될 책임을 갖고 있는 남편이구나, 또는 아내 같으면, 베드로전서에 보면 나오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남편보고 뭐라고 부른 줄 압니까? 1) 자기 2) 여보 3) 어이, 아브라함 4) 주여! ^O^*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라고 했습니다. 요새 자기 남편보고 주여 라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왜 안 하느냐, 만약에 자기 남편에게 주여 라고 부르면요, 남편들이 기고만장해갖고 깝죽대면서 야, 괜찮은 하녀 하나 생겼구나, 하면서 까불기 때문에 그런 점을 감안해서 주여 라고 말을 못합니다. 왜? 남편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사라는 아브라함보고 ‘주여’ 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약속 위에서 너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는 겁니다. 우리는 둘 다 약속에 의해서 출생되어야만 하는 부부였다는 겁니다.



이런 인식이 어떻게 발생됩니까!? 만약에 그 부부가 주님의 약속의 바탕 위의 부부라면 상대방의 허물을 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거기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존재 자체가, 아내 자체가 주님의 은혜이고 남편 있다는 존재 자체가 은혜예요. 남편이 불구자가 되든, 백수가 되던 주식해서 돈 7백만원 날렸든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당신이 거기 있음에.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둘이 만나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입니다. 몸을.



그 몸은 부활의 몸이에요. 부활의 몸. 자 그렇다면 끝으로 이 부활의 몸인 접시가 이 땅에서는 어떤 현상으로 드러나는가?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놀랍게도…환난에 참여한다 합니다. 이거 대단한 역설이죠? 희한한 역설이죠. 부활 같으면 붕붕 날아다녀야 적당하지 싶은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도요한을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극한 환난에다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로마서8장16-1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유명한 말씀인데,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의도적으로 환난을 집어넣어서 환난 속에 집어넣는 것을 계기로 해서 주님의 부활은 이 환난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해서, 그로 인해 성도들이 세상 소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환난이 없는 하늘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그러한 전략을 바탕으로 주님께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환난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사는 방식의 차이에 의해서 남들로부터 예수님 당하는 그 비웃음과 모독을 함께 당하는 그런 환난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다 보면 집이 열 채 있고 땅이 십만 평 있어도 예수 이름으로 환난 당하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 환난 참 많이 당합니다. 재산이 호텔 한 열 채 있고, 모두 팔고 두 채밖에 없고…골프 회원권 한 서너 개 있는데 아, 환난 심합니다.’ 그것도 역시 환난이죠.(ㅋ) 왜냐면 가난해서 환난 당하면 그거는 예수님 때문에 당한 환난인지 분간이 안가요. 왜냐면 돈만 조금 생기면 헤헤거리고 또 교회 안 나올 사람이니까.



소위,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 있는가를 점검을 해봐야 되요. 빌립보서 1장29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립보서 3장에 유명한 말씀 있지요? 내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지금은 고난의 길을 가고 있다. 고난의 길로 갈 때, 세상 소망은 다 탈락이 되죠. 그런 것은 시시하게 보인다 이 말이죠.



“당신 그러면 무슨 보람으로 사느냐? 인생 그리 사느니 차라리 챠라! 예수 믿지 마라!” “당신을 그렇게 힘들게 할 것 같으면 예수 왜 믿느냐,”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약속, 내가 이렇게 환난 받는 것도 다 하나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몰아넣으신 상황이다. 이 상황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었어요. 사도요한처럼. 사도바울처럼. 몰아넣은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당했는가를 나와 있죠? 자기가 사도임을 증거 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수고도 넘치게 했지만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많이 맞기도 하고, 40에 감하는 매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사도바울이 주로 하는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에요. 7월6일 날씨 맑음: 오늘은 세 번 맞았다. 주로 맞는 이야기에요.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일 굶어지 냈으며 8월9일: 그날은 흐렸다. 배가 뒤집어졌다. 이런 거. 그 다음 20절에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10월6일: 날씨는 왜 이리 춥냐. 강도가 와서 돈 20만원 뺏어갔다. 나는 빈털터리 되었다. 그런 식으로. 친한 동족이 와서 배반했다. 죽이려고 했다. 이방인의 위험과, -이거는 필리핀 테러범?- 그 다음에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저는 여기 ‘여러 번 굶고’ 하는데서 무엇과 연관시켰냐면 주기도문과 연관시켰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그런데 사도바울한테는 일용할 양식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용할 양식 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 안 먹고도 부활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가를 사도바울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헐벗었노라. 저도 여기서 가담한다면 저도 한 구절 쓸 수가 있습니다. 3월12일: 똥배가 나왔다.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느라 똥배가 나왔다. 하여튼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환난과 연관시켜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성도는 같은 약속이라는 것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결같이, 어제나 오늘에나 변함이 없는 주님이시지만, 우리는 사태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고 수시로 낙담하고 좌절하고 울고불고, 기쁘기도 하다가 울기도 하다가, 이런 분별없는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을 바라보고 사도바울을 바라볼 때 안정되게 살아갔던 그들, 꿋꿋했던 그들, 당당했던 그들, 이제는 죽은 자 같으나 산자라고 했었던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 중에도 부활의 능력으로 울려 퍼지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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