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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13:10:32 조회 : 2516         
006강-호3장1-5(주인님의 깊은 뜻)-hos110130-(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119.148.121.61)
 006강-호3장1-5(주인님의 깊은 뜻)-hos1101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호세아3장1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3:1-5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방금 읽었던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오늘날하고 약간 다른 게 있을 거예요. 오늘날하고 다른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떤 개인을 상대할 때 그 개인의 운명으로 국한해서 ‘넌 이렇게 살면 이렇게 벌 받아. 넌 이렇게 살면 잘 될 거야.’라고 개인 한 사람에게 대한 그러한 말씀을 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어떤 사람에게 운명을 이야기 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한 운명에 그치지 않고. 그 주변을 둘러싸 있는 그 나라 전체의 운명을 그 사람에게 미리 알려주는 형식으로 되는 겁니다.


둘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 따로 나라 따로가 아닙니다. ‘내 이 나라 싫으면 이민 가지.’ 라는 것이 이스라엘에는 해당이 안 돼요. 이게 참 이상한 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흩어져도 이스라엘이라고 우기지 않습니까? 흩어져도 인간이 만든 국가라든지 민족 같은 것은 그런 것을 이스라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국가와 민족, 그런 것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만들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약속 속에는 전체와 하나, 하나와 전체가 언약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렇게 연결 돼 있기 때문에, 나에게 일어난 일이 전체에게 일어난 일이고,  전체에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구축이 돼야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나의 일이 되고, 나의 일이 예수님의 일로 드러나게 되고, 아담에게 일어난 일이 장차 예수님에게 또 다시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아담은 예수님을 보여주게 되는 표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여기서 역할이 있어요. 역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특별하게 약속을 이루어야 될 중심인물이 되는 사람에게는 뭘 하느냐 하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 약속이 임하지 않은 이스라엘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죄를 맘껏 발휘하게 되고, 특별히 하나님이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신 져야 되는 그런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역할 분담을 하는 사람을 5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은총이 쏟아지는 구멍이 한 곳에 지정돼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기만 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 자비와 은총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 이예요.


오늘날 사람들은 내가 행동을 똑바로 해야 행동 똑바로 한 나에게만 복이 오고, 옆집에는 복이 안 온다 하잖아요. 내가 기도해야 기도한 나에게만 응답이 주어지고 옆집에는 기도한 혜택이 안 주어지는 게 보통 우리가 사는 주체적인 사고방식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아예 특정 지점 특정 장소를 하나님의 폭발적인 사랑이 나오는 장소로 확정을 지어놓고, 그 다음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너 자신을 어떻게 다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장소로 다시 돌아오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터져 나오는 그 장소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죠. 어디 있으며 누구냐 하는 것이 등장하는 겁니다. 어디 있느냐, 누구냐, 하는 것은 그냥 막무가내로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기다리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죄 짓는 과정에서 그게 자연적으로 발생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짓는 가운데서!! 이것은 죄를 짓는다는 말이 오해가 되는 건데,  죄 안 졌다가 죄 지으란 말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하는 것이 죄라고 드러나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쪽은 죄를 드러내고, ‘그래서  긍휼의 자리가 이 자리란 말이야.‘라고 함께 해서 드러내는 거예요.


사람이 누구를 기다리게 되면, 자기 자신의 행동을 잊어버리고 기다리는 것만 집착하게 되는데, 사람이 누굴 기다리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본색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어요. 그 연극 마지막에 이렇게 돼 있어요. ‘자, 우리는 이제 가자!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돼 있어요.ㅎ 가자 해놓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 말이 그 문항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어디를 가고 아무리 부산을 떨고 움직여 봤자 사람이 있는 자리라 하는 것은, 결국은 제자리 뛰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설쳐 대면서 자기초월과 자기발전과 자기 우수함으로 변덕을 부려도 쿵덕쿵덕 변덕 부려봤자 중력에 의해서 올라갔다가 다시 뚝 떨어지는 곳이 자기 자리예요. 그래서 그 자리는 ‘아! 내가 몸부림 쳐도 나올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지옥이란 말을 하는데 지옥이란 말을 할 때 꼭 유념할 게 있어요. 지옥은 절대로 사람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사람이 빠져나오는 곳이라면 지옥이 지옥답지 않죠. 사람이 지옥 빠져나오게 하고 천국 보내주는 악마라면 악마가 악마답지 않죠. 악마는 어떤 수단과 노력을 해도 절대로 자기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그게 악마예요. 예수님께서 데려오지 않는 한, 내가 알아서 성큼성큼 이 악마와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이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인간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모든 것은, 지옥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서 어떻게 개선해 보고 개혁해 보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로 너무 가득 찼어요. 다 헛수고입니다. 소용없는 짓 이예요. 마귀를 그렇게 쉽게 보면 안 돼요.


언제 우리가 마귀에서 벗어난 걸 아느냐 하면, ‘마귀와 악마는 절대로 나를 버려두지 않았다.’ 라는 것을 느낄 때, 달리 이야기해서 ‘나는 절대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대로 나는 최종 사랑은 나밖에 사랑한다.’라는 것을 느낄 때, 이미 그 사람은 빠져 나왔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1장 끝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런 이야기 했어요. 호세아가 등장하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에 나오는 ‘다윗의 자리’가 사랑과 은혜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다윗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여정 중에 호세아가 앞장서서 등장하는 거예요. 호세아가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나중에는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 호세아의 마음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뭐라 하시느냐 하면,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여러분! 사랑이 명령으로 가능한 겁니까? 그 다음에 사랑하라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겨도 여호와 내가 그들을 사랑했다”예요. 그러면 이렇게 물으면 돼요. 아무리 죄를 져도 하나님이 사랑했다면, 그 사랑했다는 그 흔적이 이 세상에 남겨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 흔적으로서의 호세아가 자기 인생을 살아야 된다 말이죠. 살아갈 때 ‘사랑해서는 안 될 자를 사랑했다.‘라는 흔적이 있기 때문에 호세아 목사님은 도저히 사랑이 안 가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여인을 본인이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백성을 사랑했구나.’라는 흔적을 보여야 될 그런 역할을 하는 겁니다.ㅎ


그게 무슨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겠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소위 말해서 땡기는 게 있어야 되거든요. 땡기는 게 없는데 사랑한다? 이게 어떻게 이런 사랑이, 우리 힘으로 성립 안 되죠.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악마나 지옥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게 힘든 이유가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쪽을 사랑함으로써 내 사랑의 우수함을 간직하고 싶어서 상대방이 이용되는 거죠. 그런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순간 나의 미워하고 싶은 사람도 같이 겸하여 발생됨으로써 우리는 마치 내가 다윗언약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졌는데 간단하게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법적인 차원에서 책임지는 것과 사랑의 차원에서 책임지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마을에 여중생이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여중생이 성폭행을 당한 후에 그 마을에서 두 남자가 죽었어요.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은 나이 70넘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60넘은 사람인데, 여중생의 부모 입장에서 그 두 남자가 자살했으면, 여러분! 기분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기분 더럽죠. 그 이유를 한 번 따져보자 말이죠.


예를 들어 그 자살한 두 남자가 진짜 마을에 있는 여중생을 성폭행했다고 칩시다. 그 성폭행한 사람이 자기가 교도소에 가야될지, 아니면 농약을 먹고 자살할지, 이것은 성폭행한 가해자가 스스로 결정하면 안 돼요. 이 피해 입은 여중생이나 가족들이 ‘어이, 두 남자 이리 나와. 할아버지 둘 다 이리 나와. 당신 농약 먹고 자살 하세요.’라고 명령이 떨어지고 난 뒤에, ‘네, 자살하겠습니다.’ 하고 자살해야 피해 입은 사람이 속이 시원한 겁니다. 그런데 농약 먹고 자살하지 않아야 하는데 둘이서 알아서 죽어버리면, 기분 더럽죠? 누구 맘대로 죽어? 그래 죽어버리면, 조곤조곤 씹을 수 있는 대상이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러면 그 두 남자는 왜 자살했습니까? 그것은 상대방이 씹기 전에 내 죄는 내가 알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성폭행 해 놓고는 그 죄 처리를 누가 처리하느냐 하면, 자기가 처리함으로써 자기가 의인이 돼버리고 말았어요.ㅎ 이야기가 복잡해지죠? ‘나봐, 내 죄 안다고.’ 하고 자살함으로써 자기가 죽어가면서 훌륭한 사람이 죽어가는 거예요. 성폭행 해놓고 죽었다는 아주 양심적이고 훌륭한 사람! 가룟 유다 같아요.


이런 법적인 복잡한 문제를 거론하지 아니하면 사랑이란 말을 우리가 함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남발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었다 했을 때, 그 피해 입은 사람은 뭣까지 노리느냐 하면, 내가 피해 입은 아픔을 상대방이 같이 겪어 줘야 그때 그 피해가 해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해자는 함부로 지가 알아서 죽으면 안돼요. 피해자가 ‘죽어.’라면 죽고, ‘계속 가’ 하면 가고, 이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 아이디어는 성경에 나오는데 어렵지만 여러분 들어보세요. 로마서 6장 16절에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를 짓게 되면 지가 알아서 죄에서 빠져나오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도 같은 말씀 있는데,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 자손이지 죄의 종이 아니라 주장하니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이 말은 죄의 종이 되었으면, 지가 알아서 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죄의 종이 되었으면, 그 죄가 받는 저주도 함께 오롯이 다 받아야 된다는 것이 이 세계(영적)의 법칙이 되는 거예요.


죄에서 지가 자살하고 ‘나는 죄야’ 하고 이렇게 해서 자기가 죄 지어놓고 졸지에 회개하는 의인으로 돌변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허용한 적이 없는 거예요. 따라서 뭐를 알아야 하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야’ 하면 철저하게 죄의 종으로 살아야만 하는 거예요. ‘나는 죄의 종으로 살려니까 내 자존심이 상해.’ 그건 죄의 종이 할 말이 아니죠. ‘맞습니다. 저 죄 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생 좀 해라 지옥 가서.’ 그렇게 돼야 하나님의 만든 구조, 법칙에 합당하다니까요. 이 구조를 우리 맘대로 변경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 구조에 점처럼 돼 있어서 거기서 우리가 점이 구조를 만드신 분에게 바꿔달라고 요청할 처지가 못 되는 겁니다.


또 그러한 취지가 성경을 보면 드러날 겁니다. 마태복음 5장23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 송사하는 사람이 재판관에게 넘겨주면 재판관이 “호리라도 너의 모든 것을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감옥(지옥)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지옥에서 벗어 날 때는, 지옥에서 못 벗어난다는 뜻인데, 우리한테 묻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든 죄 주인의 운명과 우리는 같이 합세하는 것이 이것이 본디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는 뜻 이예요.


우리가 죄 지은 게 아니고 죄가 우리를 죄 짓게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죄 짓게 한 악마의 징벌과 처벌에서 우리는 결코 거기에서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러니까 우리는 지옥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를 지옥 같은 데서 빼내주시는 분도 이 법칙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예수님마저도 이 법적인 조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돌아와서 간음했던 여인이 있다. 이 간음한 여인을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사랑하라 했거든요. 그런데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뜻은 뭔 뜻이냐 하면, 그 여인이 했던 행세와 저질, 간부와 놀아난 저질, 그 저질을 법적인 차원에서 ‘저 간통한 죄는 지옥에 천 번 가도 마땅하다.‘ 라는 것을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고 충분히 그걸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과연 그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 잊어버렸다.‘ 이래서 사랑하는 것은 그 여인이 저지른 일을 빼내고 나머지 장점을 모아서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죠. 그게 아니고, 그 죄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 지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 그 문제 가지고 과연 우리가 십자가 믿어 왔느냐를 따져보자 이 말입니다.


우리는 마트에서 세일하듯이 복음을 믿잖아요. ‘자, 골라, 골라’ 해서 복음을 쉽게 사버렸잖아요. 우리가 어디 미끼 상품입니까?ㅎ 2만 원짜리 5천원에 파는 5천 원짜리 물건입니까? 그런 거예요?  썩었다고 해서 우리 안 좋은 양념 사가지고 우리 구원하시는 겁니까? 마구잡이로 구원한다고. 공짜로 구원하고 자비로 구원한다고 하는 이 공짜, 자비의 이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공짜 자비하고 호세아가 알고 있는 공짜 자비하고 같은가 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맘에 드는 여자하고 결혼했죠? 그렇잖습니까? 아니, 지금 사랑하지 않는데 억지로 사신다고요?ㅎ 대단하십니다.ㅎㅎ우리는 평소에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살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이론 상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했다는 거예요. 우리의 평상시 행동 속에서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해 주는 게 나와 줘야 하는데, 우리의 행동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는 게  튀어나오면서 우리 입술로는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 했습니다.‘라는 이중적인 자기 본성과 위배되는 다른 사람이 나왔을 때, 그건 지식이고 가식이었다 말이죠. 하나의 폼 일수도 있고.


호세아는 그 간음한 여인이 이쁘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사랑하라’ 해서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장차 오실 다윗언약의 성취를 이루실 예수그리스도가 호세아의 마음을 가지고 이제는 그 안에서 튀어나와서 다윗 언약을 성취하실 거예요. 그러니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도 내세울 수 없는 사랑입니다.‘라는 것을 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아무리 사랑해도 죄인의 죄까지 용납하시는 호세아의 사랑을 우리는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구원된 것은 우리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의 사랑으로 우리를 끌고 가신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는 것은, 일종의 그 사랑과 차이나는 우리가 좋아할 만해서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모습이죠. 왜? 같이 나타나야 되니까!! 십자가에서 나오는 사랑과 우리가 하는 사랑이 이런 차이를 아는 데서 오는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회개가 늘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섭니다.’라는 말로 얼마나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타입을 선택했던가요? 우리가 얼마나 선호했습니까?ㅎ 어떤 사람은 ‘난 창녀도 사랑한다.’고 하는데 창녀 중에도 이쁜 창녀도 있고 못난 창녀가 있으면 어떤 창녀를 사랑하겠습니까? 이왕이면 땡기는 이쁜 창녀를 선택하겠죠.ㅎ 그래서 남자들이 하는 말이 못 난 것은 용서가 안 된다고.ㅎ


법적인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를 보여준 것은 마태복음 5장에서 ‘호리라도 계산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는 법적인 차원의 사랑과 그리고 그냥 그것조차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경계선에 유일하게 경계선에 예수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은 경계선 자체가 다가오는 겁니다. 구조자체가 다가오게 되면, 양쪽 다가 보이는 거예요. 하나라도 법적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법적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 했는데 잊어버렸죠? 법적 처리가 뭐냐 하면, 내 죄를 누가 가져가는 것도 싫고, 우리 속에는 내 죄를 법적으로 내가 합당하게 받았다는 것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누구를 믿고 싶고, 또 내가 피해자라고 한다면, 누가 내 죄를 처방하는 것도 싫어요. 내가 씹어서 복수해야 돼요. 그런 것이 법적인 거예요.


법적인 것이 우리에게 지워질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심지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하면, 은근히 법적인 것을 찾느냐 하면, ‘돌아가신 것까지 그 사실을 내가 믿는 행위는 법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했습니다.‘하고 그것마저 쥐고 싶은 법적인 차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경계선, 법적인 차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경계선에 항상 예수님이 서 있는 겁니다. 호세아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여인을 값을 줘서 법적으로 그걸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이것이 하나님 때문에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을 품고 살아가죠. 그러면서도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요. 이스라엘 전체에 파급될 효과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장차 오실 다윗언약으로 오실 예수님께서 그분이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고 그분 때문에 산다는 정말 낯설기 짝이 없는 사랑!! 정말 희한한 분, 상상도 안갈 정도로 정말 인간이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납득이 되는 ’예수님 모두 홀로 다 하셨군요.’라는 말이 납득이 되는 내가 내 구원에 가담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이 구원받은 것이 그저 장난삼아 세일하듯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혹독하게 주님께서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오히려 그것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주님 홀로의 작품이고 공로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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