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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4 05:11:37 조회 : 2501         
005강-계1장10-16(주의 날)-rev060319 이름 : 박온정(IP:211.202.16.177)

005강-계1장10-16(주의 날)-rev060319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10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399페이지입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


 


방금 보았던 이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벌어졌고, 이 일은 우리 인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고 해서 재현될 일도 아니에요. 우리는 이 사건을 무시하고 싶어도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그 사실 때문에 이 사실에 대해서, 이 의미에 대해서 외며할 수가 없습니다. 귀양살이하는 사도요한에게 왜 이러한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났는가,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려고 우리가 예측 못한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외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괴물 같은데, 정상인이 아니죠 그 모습이. 너무나 두려운 모양새로 나타나시는데 그것이 누구냐, 주의 날에 나타나신 주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거예요. 왜 변형된 채 이 시대에 나타나는가, 이것을 우리는 포착해야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행색을 하고 계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이 감당을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느냐 하며는,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절차가 있어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그 다음에 40일 만에 승천하시고. 이러한 절차가 단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그런 입장에서 일 하신다는 겁니다.


 


승천하신 그러한 자세와 사태를 견지하시면서 승천한다는 그 사실에 입각해서 남은 마지막 재림하실 때까지의 일을 추진을 하신다는 겁니다. 승천하신 그 예수님의 모습이 이렇게 사도요한에게 돌발적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은 기존에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몸에 대해서 포기를 해야 됩니다. 지금은 승천하신 주님의 몸을 가지고 그 몸에 합당한 구원의 일을 하시는 걸로 정리가 돼야 되죠.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부활의 몸에다가 자기 백성들을 집어넣으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은 약한 우리 몸의 신체를 가지고는 접근이 되지를 않아요. 접근이 불가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몸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천국이라 하는 것이 어떤 구획된 영역이나 공간 같으면 이 몸 가지고 저 영역으로 옮기며 될 텐데 천국은 사건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신체를 갖고 있는 것이 어떤 사건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일어나야 되지 사건이 없잖아요. 얼마 전에 어딘가에서 산불 났는데 우리교회 커튼 쳐 놓은 것처럼 산물이 나버렸는데 ‘나 산불 경험 못했는데 그 산불 한 번 보고 싶다.’ 한다고 해서 예배 끝나고 난 뒤에 우르르 산불 난데 가봤자 재만 남아있지 활활 불이 타는 그 사건이 이미 날라 가버렸죠. 사건이 없다 이 말이죠. 그 사건이 현장에 남아있지를 않아요. 사라져버렸어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승천하고 난 뒤에 영광스런 몸이 하늘나라에 계시기 때문에 지상에서 일을 쏘아댈 때는 사건으로 쏘아대는 겁니다. 사건으로. 사건으로 쏘아대기 때문에 이런 몸을 골백번 죽어도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나라는 몸 자체가 <주님의 손에 잡힌바 된> 사건화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건에 결합이 되지 못해요. 합류가 되지 못합니다.


 


말을 해 놓고 참 어렵게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예를 들면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부활했던 그 몸이 우리가 들어가야 될 몸과 합류가 돼야 되는데요, 그걸 하늘에 속한 형상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십자가, 부활, 승천이라는 그 코스를 우리가 그대로 밟아 와야 그 승천에 그 사건에 합류가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한 몸을 갖고 있었다, 그거 하나 말씀드렸고 그 몸이 지상을 얘기할 때는 놀라운 사건을 이 본문에 나오는 ‘사건’을 통해서만 일하는 거예요. 이거 제가 헛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다메섹 내려갈 때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주의 영광스런, “주여! 누구십니까?” “주여, 웬일입니까, 왜 저에게 나타납니까!” 이런 식으로 사건을 통해서 만났어요.


 


만났기 때문에 “나야, 네가 핍박하던 예수잖아!” 그러니 나사렛 예수란 모습이 고정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신체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미 승천한 차원이기 때문에 나타날 때는 돌발적으로 우연적으로 그냥 마주치면 거기서 접촉이 되는 식으로 다가온다 이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구원되려면 예수님의 그 영광스런 몸이 사건으로 조각조각 나버린 거예요. 산산조각 나버린 거예요.


 


마치 불꽃놀이 할 때 지상에서 불꽃이 탁 올라갈 때는 분명히 하나의 물체로 올라가지만 공중에서는 천만 만만 조각으로 화려하게 밤하늘 공중을 장식합니다. 하나하나가 사건처럼 끄집어서 내려오지요. 펴지는 우산처럼요. 마찬가지로 주님이 사건화 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몸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이 몸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몸이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 몸이 죽어서 주님과 합류가 되는데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냐면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 우리의 상식은, 부활이라 하는 것은 우리 몸을 지탱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을 우리는 부활로 이해하거든요. 우리 몸이 그냥 유지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부활은 죽었다가 죽은 이 몸이 되살아나는 것을 부활로 보는데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부활은 우리 몸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을, 죽어야 될 몸을 계속 죽이도록 하는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부활의 능력인데- 그걸 첫째 부활이라고 보는 겁니다. 안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요한계시록 20장5절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계20:4-6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을 지상에서 딱 바라보니까 뭐냐면, 목 베인 영혼이에요. 순교한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조명에 의해서 보니까, ‘너는 첫째 부활에 참여했다’ 이 말입니다. 부활이 둘로 갈라지는 겁니다. 부활이 둘로 갈라져요. 부활이 둘로 갈라지면 두 번째 부활은 뭐냐, 기존 우리가 생각했던, 진짜 부활이라고 여겼던 부활은 둘 째부활에 흡수가 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특별하게 나오는 개념을 이렇게 분리시키는 원리 원칙이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요,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을 나눔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자신의 목숨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때의 성도들아, 우리 목숨에 연연할 필요가 없이 된 것을 즐거워하라는 겁니다. 왜 우리 목숨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의 부활의 개념을 설득하느냐 하며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저쪽 마귀들이, 적그리스도들이 최종적으로 던지는 그 무기가 뭐냐 하면 우리 목숨을 노리는 쪽으로 무기가 날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이라는 사건에 포착되지 않고 장악되지 아니하면 사람이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내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서 천당 가려고 애를 써도 인간의 마지막 약점이 있어요. 아킬레스건이 있다고요. 그게 뭐냐, 내가 죽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말씀대로, 성경전체를 다 지키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죽는다’는 그 앞에서는 ‘졌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고, 그 점을 누가 잘 아느냐 하면, 바로 마귀가 너무나도 잘 알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2장15절에 보면『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가 무서워서 평생토록 종노릇하는 자들이 인간인데


 


특별히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너희 성도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한 토대를 깔아줌으로써 우리 발밑에,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부활의 토대를 우리 죽음과 더불어서 깔아줌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죽는 것 때문에 헉헉거리고 예수님 부인하는 그러한 처지에서 건져 내셨다는 겁니다.(히2장14-18)


 


신약성경을 보면, 우리가 그냥 안 본척하고 건너뛰고 싶은 구절들이 있어요. 로마서14장도 그렇고 빌립보서1장인데, 로마서14장에는 이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고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도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빌립보서1장20절 21절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쉽게 말해서 ‘죽으면 죽지 뭐,’ 에스더가 이야기했던 ‘죽으면 죽으리라’ 도대체 뭘 믿기에! 그런 고백을 하는 사도바울은 도대체 뭐를 믿기에! 어떤 사건을 접했기에! 어떤 능력에 포섭돼 있기에!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게 실제 사항이니, 죽는 것도 실제사항이라도 나는 괜찮아!’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느냐 말이죠.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노동이라고 지난번에 이야기했죠? 사람이 일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노동이에요. 사람이 노동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나에게 유익이 있을까를 견제하는데, 그냥 마귀의 눈으로 보면요,


 


아무리 자기를 위한다 할지라도 그 밑바닥에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워서 살고자 하는 것으로 도망치는 비겁한 모습을 띤다면 마귀는 오히려 그것을 방치해버려요. ‘실컷 노동해~’ ‘실컷 노동해봤자 나중에 죽는다~’ 하는. ‘잘못 됐습니다.’ 굴복할 게 빤하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며는, 주님께서 지나온 모든, 독생자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능력을 사건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 것으로 던져 주고 우리를 포착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11절에 보니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 나오죠? 이 모든 지명들은 지금 터키의 동부와 남부, 동남부에 걸친 일곱 도시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인데 여기에 12절에 보니까 일곱 교회를 봤는데 주님 안에 보니까 일곱 촛대라 돼 있어요. 이게 오늘 본문 해석하는 비결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일곱 교회, 일곱 교회가 실제 존재하더라도 일곱 교회의 원형은 뭐냐,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있는 일곱 교회가 일곱 교회라는 겁니다. 주님 안에 일곱 촛대가 들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사용되는 것이 우리 지상의 역사 속에 있는 일곱 교회 존재예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일곱 촛대냐!? 촛대라는 게 오늘 핵심인데요,


촛대라는 게 원래 어디 있느냐, 촛대 일곱 개 있는 것이 아니고 가지가 일곱 개라 그 말입니다. 촛대는 하나밖에 없는데 일곱 개로 된 가지라는 뜻이에요. 일곱 촛대가 어디 있었느냐 하면 옛날에 성전에 있었습니다. 이 성전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으로서 완성이 되고, 그 완성된 몸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완성된 몸은 너무나 영광스런 몸이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오직 사건으로만 지상의 자기 백성과 그리스도 몸의 사건으로만 접선이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되지 않아요. 사건을 통해서 건지는데, 그 구약에 있는 성전을 그리스도의 자신의 신체로서 완성할 때 그 코스가 뭐냐 하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시는 코스였거든요.


 


그게 예수님 가시는 하나하나마다 성령께서 사건에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 몸을 완성된 성전으로 짓게 하도록 인도를 하는 겁니다. 이제는 그 절차를 그대로 우리 성도에게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죽으라,’ 이 말이죠. 너의 신체 이것은 가상적이고 실제적인 것은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일곱 촛대를 내가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으니까 죽어도 산다는 겁니다. 이게. 이게 진짜 사는 거예요.


 


우리 몸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서 스스로 죽게 하는 사건들을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막강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갑자기 로또복권 당첨되어서 40억 탔다, 그래서 재산이 40억이다, 또 누가 부동산이 갑자기 10만평 생겼다, 갑자기 누가 박사학위를 주었다, 이런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걸치고 있다 할지라도,


 


걸치는, 옷걸이 노릇을 하는 이 몸이 지금 같이 내려앉아야 된다면, 오히려 걸쳐있는 그런 재산과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짐이 돼버려요. 하중을 더욱 가중시키는 겁니다. 옷걸이 노릇하고 있는 이것도(이 몸도) 허물어지고 있는 판에 허물어진 판에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거기다 짐을 눌러 버리면 찌그러지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뭐라 하냐면, 쓸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도리어 너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따져보면 그것 하나하나 전부 다 짐스러운 것들이니까 내가(주님) 알아서 그걸 가볍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사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볍게 해주는 사건들로 오는 겁니다. ‘아, 재산 권력이란 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놀라운 은혜로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하는 겁니다. 수천 수백 개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의 기반을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 존재 기반은 어쨌든 살아야 되겠다, 살아야 되겠다, 하는 존재기반이 깔려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가와서는 우리 존재 토대를 이미 죽었다는 것을 토대로 깔고, 깔아버리면 더 이상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이나 겁나는 것이나 걱정스러운 것은 몽땅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쉽게 예를 들면, 성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민수기 16장에 보면


성전을 깔보다가 무려 17400명이 죽은 사건이 나옵니다. 만 칠천 사백 명. 성전을 깔보다가 고라라는 사람이 있고, 르우벤 조상의 어떤 사람이 주동을 해 250명의 족장들을 합세해서 모세한테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일리가 있지요.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때,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 믿고 나왔는데 네가 무슨 독대냐? 네가 뭔데 거룩한 제사와 거룩한 법궤와 왜 너 혼자 독점해서 처리하고, 우리는 멍청하게 거기 혜택만 보고 거기 근접도 하지 마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느냐,


 


우리도 그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합세하자, 왜, 하나님이 너 혼자만의 하나님이냐? 이런 식으로 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노해가지고 ‘나의 거룩하게 택한 자 만이 거룩한 성전의 일을 할 수 있다,’ 라고 하시면서 족장들 250명 나올 때에 향로를 가지고 나오라 했습니다. 이 향로는 뭐냐 하면, 제사지낼 때에, 제사 지내고 난 뒤에 제사가 합당하다는 의미에서 향불 피우는 그 향로입니다.


 


그 향로를 250명이 가져올 때에 향로에 불이 나오는데, 불이 저쪽으로 피어나야 할 불이 향로를 가지고 있는 250명에게 덮쳐가지고 250명을 그 자리에서 졸지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며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라는, 그들도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인데 그 사람이 술 먹었어요.


 


소주를 먹고 -소주 먹었는지 빼갈(?) 먹었는지 그거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술을 먹고 취해가지고 제단의 불로 향을 피워야 될 걸 그냥 아무런 라이터불이나 성냥불 가지고 피웠더니만, 그렇게 자기가 평소에 봉사했던 성전에서 주님의 진노의 불이 나타나서 두 사람이 타 죽었어요. 아론의 아들 네 명중에서 두 사람 타죽었습니다. 이것은, 성전이란 너무 거룩해서 인간이 접근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거기에 접근이 될 수가 없어요.


 


접근이 안 된다는 말은 결국 이건 천국도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접근할 수도 없는 천국에 접근이 안 되는 그 인간을 어떤 식으로 집어넣어주려고 우리에게 사건으로, 영광의 사건, 부활의 사건으로 오는 겁니다. 그 뒤에 한번 봅시다. 그 뒤에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죽은 자 같이 됐다’ 예전에 그렇게 무섭고 무섭던, 나답과 아비후도 죽고 250명 족장 죽었다고 국회의원들과 유권자들이 모세에게 대모를 하는 겁니다. ‘모세 너 때문에 우리 국회의원 250명 죽었다’고 난리를 치니까 하나님께서 그 분노를 내리셔서 ‘이놈들 다 죽이겠다,’ 해가지고 죽이는데 14700명이 전염병 걸려서 다 죽은 거예요. 모세가 나서서 말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대신해서 향로를 드릴 테니까 이 진노를 거두소서.’ 모세가 나서서 그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중간에 커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 하면 승천하신 몸, 이걸 아주 시시하게 봐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사도바울은 눈이 장님 돼버렸어요. 가버렸어요. 그 영광의 빛 앞에.


 


도대체 하나님이라는, 하나님과 같이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몰라요. 죄 많은 초라한 우리가 감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이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여튼 근처에 있으면 죽어요.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세상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데,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데 우리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교회 와서 교회 부흥시켜 달라, 돈 벌어 달라, 사업 잘되게 해 달라, 애들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 남북통일 되게 해 달라, 몸이 건강하게 해 다라, 어떻게 그런 바람이 나오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였는데.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렸다는 정도는 우리 몽땅 버린 거예요. 우린 사람 취급도 않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 기반을 죽음으로 깔아놓는 거예요.


 


이게 교회가 장사를 하다 보니까 예수를 상품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상품화를. 뭐든지 상품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사람들의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상품으로 제시할 때는 사람들이 원하는 예수 상으로 만들어줘야 된다 이 말이죠.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사도요한은 실제적으로 죽은 자같이 됐다 말이죠.


 


이거는 예수 이용해 무엇을 해 먹는다는 이런 발상이,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발상이 나올 수가 없어요. 예수 예수를 거론하는 가짜들한테는 가짜 예수가 다양하게 팔리는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한테는요, 「내 안의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이런 발언 외에는 다른 발언은 할 게 없어요.


 


죽는다는 것이 실패입니까? 이걸 요한계시록은 사도에게 묻고 있는 거예요. 죽는 것이 실패인가,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 이근호가 죽는 것. 이근호가 죽는 것이 당연한 조치이냐 아니면 내 인생 실패한 거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이렇게 답변해야 됩니다. ‘죽여주시니 고맙습니다.’ 왜? 죽이는 그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살아계심만 파악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주님이 실제로 살아계시는 것만 파악한다면… 접할 수가 있다면. 목 내놓고 주님 살아계시는 것 알게 됐다면 죽어도 복이죠. 주님 알았으니까.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께서 일곱 촛대를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고 그 촛대 사이를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두른다는 이 말은 제발 교회들이여, 교회 되려고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려고 한다는 말은 아직까지 성에 안차고 미흡하다는 말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나 세상에 있는 교회라는 것은 환상이고 운명적이고 우발적인 것들입니다. 교회 역사란 게 없어요. 인간의 역사도 없을뿐더러. 왜냐면 이미 죽은 자는 역사를 말할 자격이 안 됩니다. 왜냐면 끝은 이미 결정됐는데 인생 끝이 죽음이란 매듭으로 끝 되어버렸는데 어떤 코스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옥경이라는 노래 가사 보면 나와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내가 빨간 옷을 입었든 노랑 옷을 입었든 모두가 한 아담 속에 동일한 속성을 지닌 자들이란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아는 순간이 언제냐 하면 바로 밧세바와 간음하고, 남편 우리아를 알리바이 성립하기 위해 죽이고, 그때 나단 선지자가 와가지고 ‘네가 바로 죄인이다’ 지목할 때 그때 비로소 다윗은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아니고 진정 첨으로, 난생 첨으로 죄란 뭐냐를 알았어요. 그것은 뭐냐면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내가 죄 당하면서 살아 왔다는 겁니다. 내가 죄 지으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내가 죄한테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죄한테 농간당하고 죄한테 농락당하면서 살아온 것을 첨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게 뭐냐,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밖에 없습니다.


 


제사도 원치 않고 번제도 원치 않고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라 했습니다. 자기 실체를 안 거예요. 자기 실체를.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을 누가 지키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이고 자기는 허수아비예요. 하나님의 앞잡이.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라고 교회 누구나 그런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뭐냐, 기존의 교회는 앞잡이에 불과한 거예요. 앞잡이.


 


그리고 기존의 일곱 교회의 일곱 촛대에 부적절한 것은 항상 구조조정이 돼야 되죠. 뺄건 빼고 나올 건 나오고 들어갈 건 들어가고 혼자 바빠요. 우리끼리 모여서 교회 하자하는 것은 성립이안 되요. 우리끼리의 주인공이 누군데? 주님이십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해체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해체가 되든 우리가 죽든 말든 간에


 


이미 존재의 기반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존재의 기반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죽어도 첫째 부활 속에 들어갔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부활이고 죽어도 부활이에요. 그런 사람에게 둘째 부활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날’이 뭐냐, 사람은 사람마다 날이 따로따로 계사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아는 목사님들과 등산을 갔어요. 가덕도 영대봉까지 갔는데 배 시간이 네 시인데 3시10분 돼가지고 표를 끊었어요. 표를 끊고 물었습니다.


 


표 파는 아가씨가 우리나라에서 젤 고령인 것 같은데 한 70대 할머니가 표를 팔고 있어요. ‘야구 이겼습니까?’ 하니까 ‘나, 야구 안 봅니다.’ 티브이 연속극 보고 있어요. 사람마다 다 야구 좋아하는 거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기 시간이 따로 있어요. 자기 날, 기다리는 날이 따로 있어요. 어떤 사람은 4월 첫날이 곗날이라 그날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4월 말이 중요한 날이고.


 


사람마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날들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고 난 뒤에 ‘날’이라는 개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내요. 사람이 만든 날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거 다 죽은 날이에요. 주님의 날만 부활의 사건의 능력이 터져나가는 날이에요. 그것이 주님의 날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날이에요.


 


주님께서 계시했던 날이에요. 주님의 날이 인간의 날을 침투한 겁니다. 주님이 침투할 때는 우리의 날은 포기해야 됩니다. 그날은 내 계획을 포기해야 되요. 왜냐면 내 계획 그거는 껍데기고 허수아비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전’이 갖고 있는 우리를 거룩한 날의 놀라운, 사건화 된, 사건의 뭉치화 된, 천국에 보내주기 위해서 우리를,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그리스도에 인도하는 사건 사건으로 산산조각 내버렸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먹는 것도 사건이고 마시는 것도 사건이지만,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식으로 전부다 주께서 능력을 주시게 되는 겁니다.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몇 년을 살았는지, 어느 동네에 있었든지 우리 하나하나가,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촛대, 일곱 촛대의 그릇은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가 주어집니다.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면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동안 나를 위한 자기 노동이었던 그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한 주님의 노동으로, 은혜로서 의미가 바뀌어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사도행전에 나온 앉은뱅이가 돈 달라고 요청할 때, 그 앉은뱅이의 머릿속에는, 나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산다는 자기 역사, 자기 인생, 자기 계획이 다 들어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돈을 줄 때는 고마워하겠다고 하는 투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하기를 ‘나에게는 금과 은은 내게 없다’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추진하고 있는, 너가 생각하고 있는, ‘네가 토대로 하고 있는 너의 역사는 내가 협조할 수 없다.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했습니다. 주의 이름이 들어온 순간 그 사람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는 주님의 역사로, 주님의 일로 바뀌게 된 거예요.


 


이제는 앞으로 그 사람이 구걸해도 주님의 힘으로 구걸하는 거예요. 주님의 역사가 그 사람 속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건화 된 부활의 역사예요. 예수 믿고 부활 믿었다 해가지고 갑자기 내가 원하는 떼돈 버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똑같은 반찬을 먹고 똑같은 잠을 자고 똑같은 집에서 살아도 그 하나하나가 주님의 은혜의 자국들이고 인도함을 받는 여정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 받을 때, 주님께서 성령 받았다 해가지고 성령도 받고 수표 두 장도 받고 그랬습니까? 아뇨! 그냥 성령만 받고 마지막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 성령께서 그 코스를 계속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기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결국은 하늘나라에서 주님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이제 그 다음차례가 우리 차례입니다.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가 있으면 그 다음 열매도 있게 마련이에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면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합니다. 여러분보고 유별나게 뭘 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제부터 성경 하루에 다섯 장에서 여섯 장씩 읽어라, 그런 말이 아니에요. 헌금 천 원 하다가 이제는 만원 하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 지난날 오백 원 하는 헌금을 내가 했다고 생각을 했었느냐 그 말입니다.


 


그 오백 원도 주님이 주신 은혜라고 다시 의미를 집어넣어라 이 말이죠. 나의 역사는 주님의 역사에요.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 나를 같이 동행하면서 살게 하시고 거룩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바로 지금도 역사하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도요한이 놀라운 이러한 사건 봤다고 수시로 이런 게 나타났을까요? 아닙니다! ‘사도요한이 기다리는 것은 고요한 죽음’ 뿐이었어요. 내가 미쳤나? 내가 너무 굶어봐 가지고 환상을 봤구나, 이렇게 스스로 의심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사도요한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는, 너의 생명은 죽어도 괜찮게 된 생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걸 통보해주는 사건이라면 이제 우리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시든 간에 제발 죽음에 대해서 정리를 해놓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조차 정리 안 해놓으면 첫날 만날 오래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적어도 죽음에 대해서는 이미 차분히 정리가 다 돼있는 상태에서 여러분들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죽어도 ‘주님, 잘하셨습니다.’ 박수치며 찬양하면서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모든 것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님이 노시는 줄 알았습니다. 교회서 열심히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열심히 하고 주님께서는 협조를 안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우리에게 의미를 주시고 놀라운 능력으로, 세상보다도 천국이 더 낫다는 것을 일깨우게 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놓지 않고, 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미 죽은 자로서, 당당하게 맘껏 주님의 영생을 뽐내면서 살 수 있는 저희들 삼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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