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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5 13:35:01 조회 : 3228         
007-계시록2장1(주의 사자)-rev060402 이름 : 박온정(IP:211.202.16.177)


007-계시록2장1(주의 사자)-rev060402


설교: 이근호 목사님



* 광고시간에 빠진 게 있었습니다. 늘 나오시던 강구만 집사님과 강영숙 집사님 정식으로 우리교회 서리집사로 이렇게 당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다른 분들도 집사님이라고 불러주세요.


 


하나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1절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아멘.



오늘은 일곱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편지를 살펴보는데 편지를 누구 편에 보냈느냐 하면, 「여기 에베소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이렇게 돼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당회장에게 편지하기를’ 이것도 아니고 ‘에베소교회 목사에게 편지하기를’ ‘에베소교회 교인들게 편지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편지 하신 것이 아니고, 「에베소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가 어떤 사자냐 하면, 사자라 하는 것은 메신저라 해서 ‘전달자’ 이 전달자가 하나님의 일꾼, 그런 뜻인데요, 이 전달자가 어떤 전달자냐 하면,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 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주님에게 붙잡힌바 된 사람에게만 납득이 되는 편지를 보낸다는 겁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혀져 있다는 것을 아주 기분 좋게, 그걸 자랑스럽게 고맙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앞으로 전개되는 이 성경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지 아니한 사람은 뭐를 배척하게 돼있냐 하면 교회에 편지를 보낸 주님의 사자, 주님께 속한 그 사자, 편지 내용을 뜯어보기도 전에 그런 사자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의해서 보면 사람은 본의 아니게 타의에 의해서 예수 패냐, 예수패가 아니냐로 결정이 나게 되어 있어요.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평범한 우리 입장에서 보면 기분 대게 기분 나쁜 이야기죠. 사람은 누구 패에 속하기를 싫어해요.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따로 가지는 걸로 사람 사는 재미를 느끼는 겁니다.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니고, 열린 우리당도 아니고 한나라당도 아니고, 나는 내 당이다 이거예요.



나는, 절대적인 나의 세계를 가지기 위해서 지금도 분투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누구로부터 침범 받는다든지 간섭을 받는다든지 누구로부터 지적받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이거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인간이라면 한 자존심들 다 가지고 있을 겁니다. 아쉬울 땐 약간 고개 숙이는 척이라도 하지만 좀 산다싶으면 절대로 남한테 싫은소리 듣고 가만히 있을 위인들이 아니에요.



독자적인 자기 노선, 그 안에서 절대적인, 미래를 예측 못하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자유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고유영역 이것이 사는 재미요 보람이고 희망이고 목적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포부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성경은 단도직입적으로 너는 예수 패야? 아니면 예수 반대하는 패야? 예수님은 우리를 나누려고 작심을 하고 등장합니다.



예수 패도 아니고, 예수 반대하는 패도 아니고 중립지대를 따로 마련하겠다는 우리의 소박하고 내심 갖고 있던 포부 같은 거 주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은, 기분 대게 나쁜, 내 몸을 왜 타의에 의해서 결정하느냐 말이죠. 내 운명은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놔둬라 말이죠. 방치 좀 하라 말이죠. 너는 누구 패냐, 왜 나한테 그런 말이 들려와야 되느냐, 하고 기분 나빠 할 겁니다.



그런데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자 하는 이 마당에 철저하게 주님 패, 주님에게 붙잡힌바 된 천사를 통해서 주님의 편지를 우리에게 보낸다는 것은 결국은 교회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 아니에요. 한 오만 원 주고 간판 하나 만들고, 한 오십만 원 주고 강대상 하나 만들고, 그까짓 거 대충 이런 홀 하나 빌리고 전세금 주고, 총신 나온 목사님 모셔다가 노회에 속한 목사 모셔다가 새벽기도 하고, 대충 이러면 멀리 갈 손님들 가까운 같은 프렌차이즈 같은 교단이니까 사람들 오고 이러면 교회 되지요.



그게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닌데, 교회가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지도 않은 교회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거는 신기함을 넘어서서 이거는 공포입니다. 이거는 무서움입니다. 이거는 심판의 징후입니다. 우리가 만들지 않았는데 주님 혼자 만드는 교회를 가지고 우리한테 들이 미느냐 이 말이죠.



그리고 한 말이 교회에 관한 주도권은 목사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당회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말씀만 곧이곧대로 전파하는 어떤 천사, 천사에 의해서만 접촉이 가능한, 사람들과 천사의 말과 동일하느냐 라는 식으로 접촉이 가능한 교회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 ‘에베소교회 사자에게’ 할 때, 총신 같은 신학교 나오고 난 뒤에 시험 치는 게 있어요. 그게 강도사 시험인데, 이름이 좀 이상해요. ‘강도사 시험’ 하니까 젊은 강도짓 하는 특허? 라이센스 그런 뜻이 아니고, 그 강도사란, 도를 가르치는 걸 강도라 합니다. 그 밑에 한 단계 떨어진 게 전도사인데 전도사는 도를 전하는 사람이고, 그 차이점은 아직도 저는 모르겠어요. 그 차이점은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강도사 시험에 필수적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에베소 사자에게’에서 이 사자가 누구냐 하는 물음입니다. 거기서 목사라 하면 합격이고 ‘천사’라 하면 점수 깎이는 거죠.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성직은, 성직자는 ‘거룩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거룩한 직책을 따로 분류함으로 말미암아 성직자 외의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가름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강열하죠.



일반 교인들에 대해서 목사가 관여하는 것은 주의 뜻이 되지만 일부 교인들이 목사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은 주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주를 확실하게 받는다.는 인식을 첨부터 그렇게 가져가라는 겁니다. 왜냐면 인식을 그렇게 가져가야 조직체에 질서가 살고 카리스마, 권위가 있게 되고 권위가 있는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든지 설교를 한다든지 할 경우에 비로소 하늘의 권위가 실려서 전달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서 장님이 감히 설교한다든지 장님이 목사한테 성경말씀을 거론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성직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어떤 해석을 해내도 하나님께서도 전혀 권위를 안 실어준다는 이야기로 통하게 되죠. 그래서 ‘에베소교회 사자에게’ 하는 것은 그 교회, 에베소교회가 있는데 당회장한테 편지를 줘서 당회장이 에베소교회 사자가 되어서 당회장이 교인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이 이 본문이다, 라고 가르쳐 왔던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당회장은 어디서 빠지느냐 하면 이 편지 내용의 질책에서 당회장은 당연히 빠진 사람이 되요. 해당사항이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머리가 잘 안돌아가나요? 제가 ‘우리교회’에 세워주신 주의 사자기 때문에, 주의 사자 권위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무슨 내용을 전하든 간에 그 내용 가지고 주의 사자를 도로 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고 교인들은 목사가 관리하고, 두 개의 관리 층이 직접 관리하는 게 아니라 목사를 통해서 관리한다는 것이 유명한 칼뱅주의입니다. 그 유명한 칼뱅주의예요. 루터하고는 좀 생각이 다른데 칼뱅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루터라는 신학자는 만인제사장을 주장했어요. 누구든지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외부적인 추가적인 행함이란 게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하심,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죠.



예수님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이 거룩한 성도로 만든다 이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성직자로 만드는 거예요.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느냐가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그 한 사람을 이 땅의 성직자로 만드는데 그걸 가지고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 의해서. 루터가 이런 주장을 하려면 무엇을 배제해야 되느냐 하며는, 기존에 있었던 모든 교회의 체제를 배제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경으로 돌아갈 때만 나올 수 있는 결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반 교인들이, 루터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이 과연 맞는가? 할 때는 목사 쫓아가면 안돼요. 그 당시 신부한테 쫓아가면 안 됩니다. 그거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일이 되기 때문에 안 되고, 성경을 직접 봐야 되지요.(아멘) 성경을 직접 보면, 성경을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직접 깨닫게 하시는데 그 깨닫게 하시는 내용이 ‘아, 모든 성도가 다 이 마지막 때의 제사장이구나,’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 당시에 광활한 토지를 갖고 있었던 교회에 대해서 교회 파워, 정치적 힘이 셌던, 농사짓던 시대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가진 자(요새 같으면 재벌이에요)가 재벌이에요. 그 당시에 교회 자체가 재벌이었어요. 부동산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정치적인 알력과 힘에 대해서 굴하지 않고 도망쳤을 때 거기에 동조한 사람은 바로 토지가 없던 농민들과 일부 반대했던 사람들이 동조해서 새로운 개신교, 반항하는 단체가 개신교가 있었거든요.



그 개신교와 상공업자들이 결탁을 하면서 -개신교라는 단체가 없고 천주교에 반대한다는 뜻이에요.- 저쪽은 아니다 그거죠. 사람을 두 번 거쳐서 복주는 이런 거는 없다 말이죠. 주님께서도 두 번 거쳐서 구원하는 경우가 없고 예수님 피가 직접 그 사람 마음속에 능력으로 역사해서 구원하는 것이지 두 번 거쳐서, 성직자 거치고 성직자가 성찬식 해야 구원받는다는 말도 안 되는,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끌어당기는 이단에 속한다고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왔던 교회가 또 다시 성직자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개척했던 것이 칼뱅이 또 그렇게 해버렸어요. ‘목사 말 듣지 않으면 저주 받아’ 이런 식으로 옛날 신부와 같은 루가 돼버려요. 그들만의 노동조합이 돼버리는 겁니다.



‘에베소교회’라 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게 뭐냐 하면 디모데전서3장 같은 경우인데 디모데전서3장 같은 경우에 보면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맡으려면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된다, 선한 일을 사모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나그네를 대접하고, 집사 된 사람들은 돈을 사랑치 않고, 새로 입교한 사람은 마귀가 정죄하며 교만에 빠지기 때문에 감독해서는 안 되고,…



사도바울이 말한 이런 감독, 집사직분이 있다는 말은 교회의 형식적인 제도를 갖추어야 교회라고 말 할 수 있다 라고 그들은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들어와 보면, 디모데전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것이 어디에 바탕이 돼 있냐 하면 복음의 바탕 위에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감독이어야 되고 집사여야 하는데 교회 조직을 붙잡아 놓기 위한 감독, 집사라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원래 교회와는 달리 사람이 세운 교회가 돼 버려요.



교회라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몸의 덩치예요. 덩치 큰 강호동이 알죠? 덩치 큰 강호동이가 만원버스 안에서 밀면 (쏠림)밀리잖아요. 그처럼 교회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몸이 하늘에서부터 커져서 지상까지 미는 거예요. ‘어? 미네? 밀리네?’ 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덩치가 말하기를, ‘너 내편이야? 내편이야?’ 이러면서 미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만드는 게 아니고 이미 만들어져서 우리가 압박을 가하는 식이에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너는 주님 손에 붙잡힌바 되어 있어’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2장5절 보면 나오는데 같이 한번 봅시다. 요한계시록 2장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재밌는 말인지요.



여기 촛대가 있는데 그 촛대를 옮긴다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동구 지묘동에 있잖아요. 지묘동에 모여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열심히 하고 있는 걸 주님이 보시는데 갑자기 지붕이 홀라당 날아가요, 촛대를 옮겨버리면 우리끼리 앉아 뭐하는데? 이게 소용없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들이 여름에 해변가에 텐트를 쳤는데, 텐트 안에서 서로 손잡고 이야기하면서 다정하게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텐트가 휙~ 날아가 버리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민망하겠습니까. ‘어? 내 지붕 날라 갔어~!’ 할 거 아니냐 말이죠. 사람들이 교회 한다고 모여 봐도 촛대 옮기면 이거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교회란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세운 곳에 주님께서 붙잡혀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붙잡혀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촛대 옮길 때 같이 딸려 가면 교회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2장을 보면서 뭐라고 하냐면, 요한계시록2장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말씀대로 촛대를 안 옮기는 진짜 교회 되자,’ 이거는 교회가 주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운 교회가 중요하기 때문에 안 허물어지려고 붙잡아야 된다는 거예요. 붙잡으면 촛대 안 옮겨집니까? 그래서 이렇게 시킨대로 반성하고 회개하면 촛대가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주님한테 관심사가 없고 이왕 시작한 이 교회에 관심사를 두게 되면 그런, 천주교 식의, 칼뱅의 개혁주의 식의, 관심은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에 있으면서 주님한테 있는 근거는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 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주의해야 됩니다.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뭐냐 하면, 타락이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타락했다 범죄 했다 하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말씀의 토대 위에 서야 하는 존재 근거가 상실됐다 이 말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냥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있는 것을 ‘타락했다’ ‘부패했다’ 고 보는 겁니다. 처음부터 죽느냐 사느냐 문제가 에덴동산에 있는 바나나와 과일을 얼마나 많이 퍼먹느냐에 있는 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선악과 따먹으면 너는 사람이 아니라 죽는 존재가 된다’ 「죽으리라」 돼 있거든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그 근거가 말씀에 근거할 때는 사람이고 말씀의 토대가 상실돼 있으면 그 사람은 부패된 사람, 곧, 사람이 아닌 겁니다. 취급을 못 받아요. 말씀의 근거가 없어버리면. 그런데 그 말씀의 근거가, 이미 우리는 범죄 했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이 말씀의 근거를 다 확보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자처럼, 철저하게 주님의 손에 붙잡힌바 돼 있느냐 존재의 근거가 지상에 있느냐, 하늘의 주님에 있느냐, 주님 안의 지체냐 묻는 식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멜기세덱 교회’라 합니다. 이 멜기세덱이라는 말이 히브리서에도 나옵니다만, 성경에서도 멜기세덱이라는 말이 어렵다고 돼 있어요. 그래서 어린아이같이 젖을 먹는 아이들은 못 알아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사람보고 어린아이라고 하면 독이 올라 어른 되려고 더 알고자 하는 그런 이야기도 있는데, 멜기세덱이라는 분이 어떤 분이냐 하며는 멜기세덱의 특징이 히브리서 7장3절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아비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게 멜기세덱입니다.


그 멜기세덱이 세운 교회를 ‘멜기세덱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표현이고 단어인지 사람이 사람다운 것을 유교의 풍토에 의하면, 자기 어미 아비를 알아봐야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후레자식이 어떠냐 하면 어미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걸 후레자식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후레자식이 누구냐 하면 멜기세덱이에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도대체 뿌리가 없어! 뿌리가 없어! 이 지상에 뿌리를 두지 않는 거예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겼는지 지상에서는 감 잡을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1장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육으로 된 것도 아니고 혈통으로 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이걸 어떻게 납득이 가도록 설명이 됩니까.



사람이 육으로 안 되고, 혈통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다 했어요. 여기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엄마도 없고 족보도 없고, 끝도 없고. 항상 있는 그대로가 제사장이라 했어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다 이 말이죠. 이게 그냥 관념뿐이고, 추상적 단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이걸 현실로 드러내겠다는 작업에 주님께서 나선 겁니다. 그게.



이게 성경에만 묻혀있는, 문자로만 묻혀있는 이론이나 관념이나 추상적이나 허망한 내용이 아니라, 만화책, 신화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이게 실제로 뿌리도 없고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 있음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접근하는데 가짜 교회들 때문에 방해를 많이 받아요. 그래서 촛대를 옮기겠다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사람들이 만들어놓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걸 유지를 하려고 하니까 교회에 관심을 두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에는 관심이 없는, 그 사이에 알력과 자존심 싸움, 질투, 교만과 자만심, 그런 것이 풍성한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3장 일곱 교회를 한 마디로 말해주세요, 한다면 주님의 교회에서 자존심과 교만과 자만과 다툼과 그럴 필요가 없는 교회에서 왜 중요시 여기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교회를. 이미 주님께 속했으면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도록 돼 있는데 개인이 갖고 있는 위신이나 자존심 같은 것은 소용이 없는 건데 씨잘데기 없는 그런 덧들이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씀의 토대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래 보는 겁니다.



칼뱅주의, 루터 천주교 이야기를 잠깐 더 해버리면 천주교가 초대교회에서 회의를 자주 해가지고 자꾸 역사를 만들어서 초반이 정당하니까 지금도 정당하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는 역사를 자꾸 만들어서 교회 역사를 만들어 교회라는 덩치를 절대화 시키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개신교가 또 역사를 만들어요.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 전통을 자랑한다고요. 그렇게 전통 버리고 역사 포기하고 주님만 바라보자고 뭉친 그 개신교가 개신교라는 역사를 또 만들고 또 거기에다 집단화시키고 거기서 정치적인 힘을 만들어가지고 조직에 보탬이 안 되는 것은 퇴출시켜버리고, 요한계시록2장에 나오는 첫 사랑,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느니라」완전히 처음 사랑을 다 잊어버렸어요.



이제는 사랑하기 보다는 힘을 더 원하는, ‘주여, 사랑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첫 번째 사랑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 힘을 실어달라고 … 그런 식으로… 힘을 실어서 뭐할 건데요? 그 자체가 타락인데요.



말씀을 주옵소서! 은혜 되게 하옵소서! 이게 아니라 힘을 주옵소서! 내편 되게 하옵소서! 내편 되게 해서 뭐할 건데? 멜기세덱 교회에서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은 여기 일곱별이거든요. 원래, 별이라는 것은 지상에 뜨는 것이 별이 아닙니다. 별이라는 것은 하늘에 떠 있죠. 별은 따기 힘들어요. 힘들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죠.



일곱별은 하늘이 돌아가는 대로 움직일 뿐이지, 지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 일곱 별이 우리에게 편지 했다는 말은 시킨 대로, 명한 대로 네가 그 자리에 있느냐? 라고 우리한테 촉구할 때 일곱별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곱 사자’라고 이야기하니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하늘에 박힌 일곱별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러면 쉽습니다.



그러면 일곱 별, 일곱 사자가 어떤 취지에서 우리한테 이런 말씀을 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되겠지요? 사도행전을 수요일 날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하면서 보는데, 상당히 특이한 것이 뭐냐 하면, 성도가 위급한 상황이 될 때마다 항상 천사가 난데없이 개입하더라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은 천사라는 것을 역사에서 배제해버립니다. 천사가 끼어들지 않고 인간들 손에만 유지되는 그러한 역사. 그러한 인간 역사를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를 이루는데 영광을 천사한테 빼앗기면 안 되잖아요. ‘가문의 영광’ 가문의 영광이라는 것은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노력해서 결실이 될 때 굉장히 영광스럽죠. 그거는 천사가 개입하면 곤란하죠.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애썼더니만 이런 효과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이렇게 될 때 뭔가 의사소통이 되고 뭉치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절대로 그런 교회가 아니고 항상 인간은 좌절하고 패배하고 낙심하고 주저앉을 때마다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힘 돋아주고, 일어서게 하고, 다시 한 번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일을 천사들이 담당해가지고 하더라 말이지요.



사도행전10장에 보면 베드로하고 고넬료하고 만남이 나오는데 그 만남을 누가 주선했느냐 하면 사람이 한 게 아니고 천사가 주선했습니다.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으니까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네 기도를 응답했다, 네가 베드로를 만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천사가 어디로 가냐 하면 베드로에게 쫓아가서 “네가 고넬료라는 사람을 만날 거니까 복음을 전해라” 전도를 천사가 해버려요.



천사가 하니까 둘이 만날 때 어떻게 만나냐 하면 “아,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거는 솔직하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천사가 해야 될 전도를 요새는 돈 봉투로 하는 거예요. “일당 5만원 줄 테니까 교회 참석해 주실랍니까?” 노인들이 오만 원 받고 오거든요. 전도 몇 백 명 했다 해놓고 사람들 다 빠져버려 하나도 없고.



천사가 개입해야 될 이유가요, 우리 인간은 육에 속했기 때문에 성도는 말씀에 기초해서 산다고 하지만 말씀을 기억하는 시간이 짧아요 우리는. 오래 못 갑니다. 사업하다 보면, 누구 만나다 보면, 드라마 봐야 되고, 야구 봐야 되고, 동창생 찾아가야 되고, 할 게 많기 때문에 언제 말씀을 생각할 사고가 별로 안 되거든요.



그런데 말씀에 의해서 유지되는 성도라면 말씀이 이 사람을 가만 두지 않고 말씀대로 인도하기 때문에 가다보면 어디에 부딪히게 하냐면 절망과 낙담과 무서운 공포로 몰아세우는 일을 하십니다. 주께서. 주님께서 그렇게 해요. 로마서8장35-3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환난이나 곤고나 어떠한 곳에서라도 주께서 너를 넉넉히 이기시리라」이렇게 돼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극한 공포에 몰아넣어버리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내 소유라는 것이 불로써 재가 될 것을 그동안 그것을 마치 보물처럼 재가 될 것을, 쓸어버릴 것을 귀한 보물처럼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불을 질러버린다든지 다 부숴버리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나지만 진짜 성도라면 ‘아, 그동안 너무 안일했구나’ 그동안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겼구나,



내가 믿게 된 것은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영생을 준다는 그 값어치를 내가 세상 것과 비교해서 너무 얕잡아봤구나, 그동안 쓸데없는, 소유될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여겼더니만 주님께서 그걸 왕창 부숴버려서 모든 심판이 남에게 일어나야 되는데 내 속부터, 육의 속부터 하나님의 무서운 극한 심판이 내 속에서 폭발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면서 주님께서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다 깨진 상태에서 예를 들어서 주기도문을 외운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에게 죄 짓지 말게 …’ 이것이 극한 공포 속에서 자기가 지옥이라고 느끼고, 지옥 속에 놓여있음을 생각하고 그때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볼 때 정말 그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제대로 된 주기도문을 할 수 있고,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귀하며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것을 그 순간만은 아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눈 뜨게 되면 보이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요, 은혜밖에 없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발광하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다고 다른 일을 하게 되는데 그때는 흩어졌다 다 모이게 되거든요.



인간의 욕망이라 하는 것은 풍선처럼 한쪽을 누르면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한쪽이 튀어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쪽 누르면 저쪽 튀어 오르고 . 스트레스 받는다고 뭘 하게 되면 저쪽에서 스트레스 받치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돼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없어요. 이런 저런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만 기반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우리는 구원 돼야 될 사람이고, 말씀대로 성도가 돼야 될 사람이고, 말씀대로 하늘나라에 가야만 할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리듯이 천국 가야 되요. 두 번 다시 지옥은 갈 수가 없어요. 지옥은 가지 않는 것이 바로 어떤 어려움 당할 때에 주님만 보인다는 것, 주님의 첫 사랑이 다시 외복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는 두 번 다시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것이 지옥이구나, 원래 내가 가야될 곳이 천국이었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겁니다.



천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한 마디로 겁대가리 없다는 거죠. 천사의 특징은 겁이 없습니다. 또 천사의 특징은 돈에 유혹 받지 않는다는 것. 여자에 유혹 받지 않는다는 것. 세상 유혹에 시큰둥해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사에게 초콜릿 내밀어 보세요. 그 초콜릿에 미쳐 돌아다니나. 그렇지 않습니다. 초콜릿이 뭐야? 아무 관심 없지요.



그 천사가 바로 우리에게 편지하는 겁니다. “교회여! 너는 예수님 편이냐?” 묻고 있는 겁니다. 네가 이미 예수님 편이냐… 사람들은 자기 중립지대를 나만의 세계를 포기 안 합니다. 정신병적으로 자기 세계를 고집합니다. 제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설교를 하니까 많은 사람이 이런 우려를 해요, ‘목사님께서 그렇게 설교를 하시면 교회 헌금도 않고 전도도 않고 봉사도 않고 예배참석도 않고 조금 안다싶으면 교회도 안 나오고 할 겁니다.’ 그러니까 설교할 때도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시면 곤란합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면 곤란합니다. 여호수아에 나오잖아요. 이런 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예요. 제가 복음을 이야기할 적에 사람이 근본적으로 자기 집구석만 챙깁니다. 이걸 깔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교회를 안 나온다 해서 자기 가정마저 포기하지는 않아요. 자기 가정과 가족은 자기한테는 교회입니다. ‘자기의 교회’가 있고 교회에 살짝 고개 내밀다가 자기교회(가정,가족)를 간 거예요.



왜 자기 가족이 절대적인 교회가 되느냐 하면, 거기서 자기가 출생했기 때문에 그래요. 출생의 근거가, 자기 가족이 없어버리면 출생지가 모호합니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가를 몰라요. 그런데 성경은 그 가족이란 건, 네가 천국 가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다는 겁니다. 너희 아버지가 목사고 엄마가 사모님이고, 기독교 가정이라도 지옥에 가는 네가 천국 가게 되는 그 이유만큼은 가정 속에도 그게 없어요. 가족들 속에도 없어요.



그거는 ‘새로운 피조물’이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주님처럼 돼 버리면 철저하게 천사처럼 움직입니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되, 그 공로는 주님이 다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 찬성합니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은 주의 은혜지 제 은혜가 아닙니다. 그걸 찬성하는 의미죠.



바로 그런 신기한 사람들이 역사적인 에베소라는 일정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에베소교회에게 일곱별, 일곱 별 중에 하나가 거기 찾아와서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여기 있느뇨?” 라고 묻고, 없구나 싶으면 다시 거기서 머물지 않고 촛대를 옮겨버립니다. 역사 끝날 때까지 이 촛대는 옮겨 다닙니다. 결국에는 내 백성이 뿌리는 주님한테 있지 사람한테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 하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여러분들이 제발! 주님 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예, 주님 패거리, 예수 패거리가 되세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다 주님의 은혜로 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남한테 증거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도 싫고 예수 아닌 것도 싫고, 오직 나만이 최고며 나의 존재 기반을 나에게서 세우는 우리들이었습니다. 한때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죽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서울 부산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리스도만 생각하면서 오늘은 무슨 일을 시키실까, 그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주께서 시킨 대로 살아가는 주의 종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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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온정(IP:211.♡.16.177) 11-02-15 13:37 
'처음 사랑'
'멜기세덱 교회'
'새로운 피조물'

에베소교회에(십자가마을에) 일곱 별(일곱 천사)이 찾아와 이르시되...
 박온정(IP:211.♡.16.177) 11-02-15 13:40 
강구만 장로님 '서리집사' 되시는 날이네요. ㅡ.ㅡ:"
 고관규(IP:123.♡.138.24) 11-02-15 17:21 
니골라당,,,에서 니골라가 분리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던데..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의 시초를 초대교회적으로 여기부터 보는 자들도 잇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맞든지 아니든지..저걸 분리로 보아도 성경적인지요?..
 이근호(IP:117.♡.132.36) 11-02-15 17:50 
'분리'에 대해서 두 가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거룩에 대한 소지'를 목표로 하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성직자를 '거룩한 자'의 견본으로 일단 간주하고서 그 계급을 모방하므로서 거룩을 따라잡으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기에 성직자에 대한 흠모한 마음으로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성직자의 거룩성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여기게 되면 '따라잡은 자'에 한에서는 성직자와 일반 신자와의 간격을 철폐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거룩=권력이 됩니다. 니골당의 정체는 거룩을 미끼로 권력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본성들로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고관규(IP:123.♡.138.24) 11-02-15 18:25 
대다수의 기성교회들이 니골라당의 반열에 있군요...요한이 기가막히게 예언했군요...
 박온정(IP:211.♡.16.177) 11-02-15 21:40 
고관규 님, '요한의 기막힌 예언'한 것에 대해서 말씀 좀 남겨주세요.
 고관규(IP:61.♡.176.38) 11-02-16 01:55 
계시록 초반부,,이지 어디긴 어디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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