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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9 13:48:13 조회 : 2284         
003강-욜1장15-20(그날, 여호와의 날)110828-(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7.76)
 003강-욜1장15-20(그날, 여호와의 날)1108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요엘1장15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0페이지입니다.


요엘1:15-20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마지막 심판은 불로 심판된다 했습니다. 불로 심판된다는 말은 인간은 이미 불로써 포위되었다 이 말이죠. 우리 곁에 불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불 가운데서, 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맹렬한 심판의 불, 우리를 태우고 우리의 모든 의지하는 것들을 다 태워버리는 불속에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알게 돼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안에 담긴 채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를 운반하는 운반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됩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되면 우리는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 우리가 하나의 탑승이 되어서 가게 되면 그 약속이라는 그 거울 앞에 나오는 앞 거울 앞에 비취는 모든 것은 불에 태워지는 광경들이 다 드러날 거예요.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아르헨티나의 그 넓은 팜파에서 나오는 그 목축도 나중에 불로 태워질 것이고, 호주라는 뉴질랜드에 있는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도 하나님께서 불로 다 태워질 것이고, 뉴욕에 있는 듀바이에 있는 상하이에 있는 그 높은 빌딩들도 불에 다 태워질 것이고, 그것이 약속 안에서, 예수 안에서 창을 통해서 바깥을 볼 때에 본래 이 세상은 불로 싸지름을 당하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운반체. 그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냥 구경만 하고 관람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비행물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소위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이 불로 없어지는 세계, 그 세계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은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 놓여있는 우리는 비 진리가 되죠. 진리 안에 있는 비 진리를 그 진리에 합당하도록 결합시키는 작업이 비행접시 안에서 따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쉽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을 통해서 야곱과 에서를 쌍둥이로 낳았는데 같은 쌍둥이예요. 쌍둥이인데 야곱을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고 에서를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습니다. 에서는 운명이라는 게 없어요. 지가 지 인생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게 없는데 야곱은 운명을 느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시도하는 대로 거부를 당하고 자꾸 커트를 당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다루는 인생이 아니고 다른 쪽에서 나를 그쪽에 맞도록 다루어지고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야곱은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약속 안에서 언약 안에서 언약이란 비행물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야곱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와 뭣과 관련을 짓느냐 하면 그 차창 밖, 앞 유리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로써 태워져야 될 그러한 아직도 다 태워지지 않고 남아있으면서 불 태워질 것을 알지 못하는 바깥 풍경과 연관 지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바깥쪽에 있는 그 멸망, 최후의 날, 심판의 날과 안쪽에 있는 자기 자신의 운명과 연결을 시키면서 언약이라는 그 비행물체를 타고 천국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안쪽에 구원받은 사람의 운명은 바깥쪽과 어떻게 연관 되는가, 바깥쪽에서는 심판과 멸망인데 그럼 이 안쪽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는가, 그걸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게 되면 여기에 “아담은 셋을 낳은 후에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돼 있어요. 이걸 중간 것을 다 생략하면 “아담은 죽었더라“ 아담은 결국 죽게 되더라. 아무리 자식을 낳고 요란한 업적과 성과를 이뤄도 결국은 죽더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죽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텐데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은 소위 그 사람이 죽은 날, 기일을 맞이해서 죽게 하신 주님은 찬양하지 않고 그 사람이 사적으로 벌였던 일에 대해서는 극구 그렇게 찬양을 해요. 안중근 의사 기념일, 심지어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 이런 사람들의 기일이 되면 아직도 팬들이 살아있어서 난리도 아닙니다. 그날이 되면, 김 현식 기념일, 내 사랑 내 곁에 다시 한 번 듣고 그리고 유명한 가수들 죽고 나면 또 하고, 어제 육상 경기 기념식 하는데 죽은 손기정 선수 기념상 앞에 방석하나 해놓고 꽃 하나 바치는 그런 의식을 행한다 이 말이죠.


주께서 다 죽인 건데 ‘아유, 아깝다’는 거예요. 뭐가 아까운데. 아까우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전부 다 엉터리네. 그러면,ㅎ ‘차라리 죽이려면 주께서 잘 죽여주세요.’ 이런 식으로. 진작 죽을 사람을 진짜 죽였나?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데 아깝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비행물체 바깥을 볼 수 있는 불로 심판한다는 이것은 집단적으로 다 죽는 날을 생각 안 하고 그걸 염두에 안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휴, 잘만 하면 오래 살 수 있었는데.’ 이래 생각하거든요.


인간이란 존재는 언약과 결부 시켜서 자기 존재를 봐야 되는데 언약도 몰라 계시도 몰라 성령도 몰라 아무도 몰라요.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니까 자기 죽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남 죽는 걸 되게 아까워하는 거예요. ‘그 다음 니 차례야. 니. 니 언제 죽을지 몰라.’


여러분, 교회 나오는 것 쉽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어머니는 오시다가 장소를 못 찾아서 집에 도로 가셨어요.ㅎ 사람이 연세 많고 하면 교회 나오는 것도 자기 집 찾아가는 것도 많이 봐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못 오고 안 오고하는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전에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왜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안 하면 안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멸망, 쉽게 말해서 노아홍수, 전체적으로 다 죽이는 사건, 심판의 홍수 이전에 먼저 구원받을 백성에 대해서는 그 비행물체 안에서 죽음이란 의미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일을 안팎으로 약속이란 이름으로 안팎 양쪽으로 다 실시를 하게 됩니다. 죽음의 의미를!!


요엘서 같은 경우에 그날이 온다 할 때 그날이 왔을 때 그것이 요엘만 아니고 전 세계의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 여호와의 날이 닥치기 전에 먼저 유다나라라는 혹은 이스라엘 나라라는 그 나라에 죽음을 통해서 마지막 심판을 미리 앞당겨 맛보게 하는 혜택으로 오늘 본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읽었던 본문 기억하시잖아요. “멸망의 날이 여호와의 날이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멸망이다 이 말이죠. ‘아! 세상 더럽다. 확 부셔라.’ 이렇게 지가 원해서 멸망 온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기 당하고 난 뒤에 ‘에이고, 나만 죽나, 다 죽어라, 다 죽어.’ 이런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 망하는 게 아니에요. 그날은 자기 날이지 여호와의 날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인간도 마지막 날은 내 소원 풀어주는 내 날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면서 일방적으로 여호와께서 들이닥쳐서 일을 벌이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한테는 매일이 여호와의 날 이예요. 왜, 매일 자기 뜻대로 안 되는 날이기 때문에.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 미칠 지경 이예요. 아침에 눈만 뜨면 하루 종일이 아니고 삼백육십오일 내 뜻대로 되는 날이 없어요. 하여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말씀은 왜 그렇게 아버지께서 잘 지키시는지.ㅎ 아주 차질이 없어요. 빈틈이 없어요.


요엘을 보게 되면 유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려고 뭘 의지 했는가가 나오죠. 여기 16절에 보면 “음식물(식물)이 우리 목전에서 끊어져버리고 기쁨과 즐거움도 성전에서 끊어지고”, 교회 나와야 재미 하나도 없는데요. 복 받을 일이 없으니까. 17절, “씨가 흙덩이에서 썩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고 곡식은 시들고”


성주군에 참외해서 1년에 3천6백억 번다는 거예요. 대구시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자기 아버지 말 듣고 때려 치고 성주에서 참외 키우는 기술 배웁니다. 우리나라 참외 70%가 성주군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연말 되면 목돈이 1억씩 된 답니다. 어떤 사람은 비닐하우스 25~30동을 지어서 하니 한 동에서 몇 천만 원 나오는데 25동이니 돈이 3억대, 5억대가 돼요.


그런데 그 씨가 만약에 어느 날 정전된다든지 가뭄 들어서 참외밭이 망해버리면 그 사람들이 뭘 느끼겠습니까? 우주의 종말을 느끼고 그 다음에 자기의 종말을 느낄 거다 이 말이죠. ‘야! 이러다가 정말 참외밭을 폭싹 쓸어버리면 정말 이 세상이 멸망의 날, 심판의 날이 아니가, 이러다가 우리 집안 뭐 먹고 사노.’라는 걱정을 하게 되죠. 결국은 이러한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참외가 안 돼서 참외가 썩어서 수입이 없을 때 걱정한다는 자체가 사람들이 자기 날을 기다렸지, 절대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 궁금해요. 난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찾아가 보고 싶어요.ㅎ 그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목사들 외치는 것이 여호와의 날을 외치는지 아니면 추수 잘되는 목동 챙기는 그날을 챙기는지, 무슨 소리하는지 구경하고 싶어요. 구경하나 안하나 뻔하지. 그래서 성주에서는 그렇게 돈이 많아서 공공 단체도 그렇게 대우를 잘해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생축이 탄식하고” ‘우~~’ 하고 소가 운다는 거예요. 돼지가 울고, 소하고 돼지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매몰처리 하면서 얼마나 울었겠어요. 죽은 채로 하면 그것도 소의 인격을 높이는데 이건 산채로 죽이니까, 괜히 베트남에 가서 하나가 구제역 들어서 온 나라에 소, 돼지 다 잡고 또 지나면 닭도 다 잡고 또 바다의 전복도 태풍불면 다 죽을 판이고, 그러니까 평소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럼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여호와가 싫다는 거예요. 괜히 시어머니 옆에 얼쩡거리는 게 딱 귀찮아, 여호와를 싫어하면서 뭐라고 입을 벌려서 하는 말이 ‘여호와여, 영광 받으소서.’ 영광 받으소서. 가관이라. 가관. 그렇게 여호와가 싫은데 평소에 자기 날만 좋아하면서 교회에 와서 여호와를 부르짖는 심보가 더럽잖아요.


여기 “소떼가 민망해 하니 양떼도 피곤하고” 양 떼가 피곤해서 누워있고, 그게 누가 이렇게 하느냐, 그게 비행물체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이미 마지막의 모습을 비행물체 안에 있는 자기 택한 백성에게도 이 일을 일으키는 겁니다. 너희가 평소에 여호와의 날을 진정 좋아했던 적이 있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기 위해서 의지했던 모든 것을 전부 다~ 거두고 치워버리고 없애버리고 그야말로 이 세상을 광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가 광주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애굽에서 광야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구약의 절차라면 신약에서는 그 절차를 반대로 합니다. 애굽 먼저 있고 광야 만들고 그 다음에 천국 가는데,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이 엄연히 가나안 땅이라서 지명이 나와 있지만, 신약에서는 이 땅이 애굽이고 이 땅이 광야 되게 해놓고, 그것도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지만,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느냐, 없어요. 이 땅에는 없어요. 골로새서 3장 1~4절 “이미 이 땅에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감춰졌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신약에서는 하늘을 쳐다봐야 되지 땅의 것에서는 어떤 승부 걸만한 게 없어요. 그래서 땅의 것이 날아가더라도 ‘아! 이건 여호와의 날이 가깝구나.’ 하고 반기고 즐거워해야 되는 겁니다.


자기 헤어졌던 신랑이 올 때 옛날 같으면 그 부인이 버선발로 뛰어나오잖아요. 그런데 반가운 신랑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밍기적 밍기적 화장할 거 다 하고 이런다는 것은 ‘니 오든 말든 귀찮다.’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남편이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처음에는 기다리지만 나중에 오게 되면 여자 혼자 살던 버릇이 있어서 남편 오게 되면 귀찮아요.


멀리 유학 갔던 딸 오게 되면 방 청소 해야 되고 수리해야 되고 가면 안 오면 속 시원하겠지만,ㅎ 또 오게 되면 거기에 맞춰서 방 청소해야 되고, 요새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하잖아요. 괜히 결혼했다고 서울에 있다가 추석이라고 찾아오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둬도 될 방을 청소를 깨끗이 해야 되고 치워야 되고, 누가 누구 시집살이를 사는지, 올 때는 정종 한 병이나 사들고 오지, 지들이 다 먹고 가고 아무것도 없이 훌쩍 가버리고 민폐 끼치고 가면서 ‘설에 올게.’ 그러면 하죠. ‘차 밀리는데 오지 마라.’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 돈만 보내라’는 거예요. 뻔한 이야기를, 서로 다 아는 이야기를,ㅎ


그래서 이 지상에서 애굽이고, 그 다음에 광야 되고,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없고 하늘나라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을 거칠 때 태웠거든요. 예수님이 이미 그 경과를 거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거쳤던 그 경과를 그대로 밟으면 그 코스가 구원코스입니다. 다른 구원코스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숨어 나오고 죽어서 천국 갔다면 그 코스대로 성령께서 그 코스대로 가라고 인도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오늘 중요한 것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특히 신약이나 구약이나 광야를 만든다는 말은 우리가 스스로 더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을 일부러 다 치워버려요. 소도 탄식하고 양도 피곤하다 하고 전부 다 나자빠지고 곡식도 다 썩어버리니까 뭐 답답하죠. 강제적으로 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그런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대전 공부에서 새로운 사람이 참석을 했는데 연세가 저하고 동갑 이예요. 그런데 그동안 사업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이제 신학교 1학년 전도사님이라 하는 거예요. 만감이 교차했죠. 그래서 식사할 때 제가 물어봤습니다. ‘참 좋겠습니다. 젊을 때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이제 맛볼 것 다 맛보고 이제 별 할 일 없으니 신학교 들어오니 꿩 먹고 알 먹고 다 먹어버렸어요. 그런데 젊을 때 사랑 받아서 ’청춘을 돌려다오.‘ 식으로 청춘을 신학교에 다 바쳤는데 개척교회도 안 되고 뭐 교회가 밥벌이 해봐야 잘 안 될 때 이제 와서 기술도 없는데 다른 걸 해보려 하니 잘 되지도 않고 이럴 때, ’야! 참 좋겠습니다. 할 것 다하고 돈도 벌어놓고 돈도 별로 들지 않는 신학교에 가서 좋겠습니다.‘라는 심정으로 이야기하니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 와서 공부하려고 하니까 머리가 안 돌아가서 괴롭다‘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그 정도 괴로운 것은 씨, 아무것도 아니다. 씨.‘ㅎ


오늘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어떻게 살다보니까 죽을 수밖에 없구나.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아이고, 이제는 할 수 없다. 죽어야지.’ 이런 게 아니고 그런 식이 아니라면 그건 믿음이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어 죽는 것은 그건 신앙이 있고 아니고 관계없이 다 주어지는 거니까, 특별한 게 없어요.


그러나 아담에서 ‘~~죽었더라. ~~ 죽었더라.‘ 하는 것은 그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낯선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아이쿠, 이거 먹을 거 다 죽고 닭 죽고 소 죽고 할 수 없다. 하나님, 빨리 죽이세요. 죽어서 좋은데서 편히 쉬렵니다.‘ 이런 자기 편한 걸 생각하는 죽음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그냥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거 좀 생각해 볼게요. 창세기 5장 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죽음 이야기가 없어요.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여기 창세기 5장 22~25절에 보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냥 계속해서 처음부터 동행했고 끝까지 동행했고 그리고 그를 데려갔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죽음을 집어넣어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결과적으로 여러분,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죠?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동행했다고 돼 있고 히브리서에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다고 돼 있어요. 두 개 합치면 무슨 이야깁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 믿는 자는 ‘죽음도 동행이지 죽음이 아니다’라고 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지금 매일같이 죽여줄 때 그걸 동행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라 이 말입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 밥그릇을 치우고 젓가락을 치우더라도 그게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동행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는 없다는 거예요.


‘어떤 집사가 매일같이 밥그릇을 치우시고 밥그릇을 깨고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얻어터지고 하다가 죽어버렸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방법인데 무슨 방법이냐, 평소에도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았던 동행 방식으로 우리는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그 안목을 두자로 믿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죠?


지금 내가 알고 있는데서 주의 일을 해석하지 말고 우리가 아는데 불가능 했었었는데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살았고‘라는 입장에서 다시 어떤 분이 어떤 집사가 어렵게 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란 말이죠. 그것이 오히려 그 아픔과 그들의 고통스런 가난을 부러워하란 말 이예요. 왜, 남들은 살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살려고 하는 건더기가 없어요. 하나님이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리고,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려요.


미장원 하면 미장원 망하고 펀드 하면 펀드가 내려가고 주식하면 주식이 폭락하고 사면 샀다고 다 망하고 팔면 팔아서 망하고 여기 거치면 여기 일이 안 되고 만사가 되는 일이 없어요. 만사형통이 아니고 반대,ㅎ 모든 게 불 형통, 형통이 안 될 때 그것은 바로 니가 땅에서 이미 죽었고 니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 하늘만 쳐다보라는 하나님의 독특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되겠죠.


동행이라 하는 것은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죽어야 될 분이 나와 함께 곁에서 같이 산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집에 죽어야 될 분이 또는 우리를 이 땅에서 데려 가실 분이 함께 사신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퀴벌레와 동행하신 적 있습니까? 죽이고 싶죠. 왜, 바퀴벌레가 나를 힘들게 하니까. 예수님은 그 이상입니다. 그것을 우리 쪽에서 보면 예수 믿기 힘든 게 아니고 불가능하고 짜증나요.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에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사도바울의 구원받은 자의 성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동행 안 했으면 참 큰일 날 뻔 했어요. 동행 안 했으면 돈 좀 벌었다고 과시할 것이고 자랑할 것이고 이 땅에서 조금 성공한 것도 부풀려서 큰 성공 한 것처럼 으스댈 것이고 사법고시 누구 아들 합격했다고 붙일 것이고 누구 하나 성공 했다고 할 것이고 27살 때 대학병원 병원장 했다고 알려질 것이고 누구는 의사도 증권도 잘 하고 의사도 잘하고 시골 의사인데 뭐 그리 똑똑한지, 그런 것들을 자랑할 때 그 사람이 죽을 맘이 나겠습니까? 더 살고 싶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일하게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나의 날, 내가 성공한 날, 내가 출세한 날, 내가 대우받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날은 이것은 우리가 싫든 좋든 엄연한 현실인 것을 우리에게만 현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수시로 그것을 이해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장난이 아니고 현실인 것을 우리가 말로는 믿는데 진짜로 현실인가는 우리가 당해보면서 새롭게 느껴집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주와 동행해서 갔다는 그 말씀처럼 만나면 살려주시는 동행자가 감사할 수 있도록 늘 눈을 주님께 비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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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파일 : 003강-욜1장15-20(그날, 여호와의 날)110828-(이 근호 목사).hwp (24.0K), Down:15
 우인숙(IP:211.♡.47.247) 11-08-29 15:27 
말씀이 집사님을 들쑤셔서 이리 숨가쁘게 녹취를 하시나!! 지난 광주 공부때 참 반가웠습니다 ~~내가 문자를 못 보내서 문자 안 씹고 고맙게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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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4   006강-욜2장12-14(마음을 찢으라)110918-이 근호 목사 이한례 11-09-20 2612
3061   006강-호3장1-5(주인님의 깊은 뜻)-hos110130-(이 근… 이한례 11-01-31 2509
3125   007-계시록2장1(주의 사자)-rev060402 (7) 박온정 11-02-15 3228
2937   007강-삼하5장6-10(다윗성)-2sa091129-(이 근호 목사) (1) 이한례 10-12-24 2691
3584   007강-욜2장18-24(새 포도주와 기름)110925-이 근호 … 이한례 11-09-26 2319
3083   007강-호4장1-5(멸망당하는 어미)-hos110206-(이 근호… (1) 이한례 11-02-06 2798
3127   008강-계2장1-5(에베소 교회)-rev060409 박온정 11-02-16 2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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