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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1 17:31:43 조회 : 3278         
홍해의 의미a-출애굽기 15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70)
 

20110107a 울산강의-출애굽기 15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15장 할 차례인데요. 지난 시간 출애굽기 14장 끝에 보면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죽고, 히브리인들은 홍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홍해라는 것이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어요. 홍해는 동서독 간의 장벽과 같습니다. 유명한 마술사 카퍼필드가 만리장성을 타넘는 게 아니고 그냥 통과하는 마술을 펼쳤잖아요. 그럴 때 만리장성을 통과하는 마술을 행할 때 사람들의 선입관은, 사람인 이상 벽돌로 된 건 통과 못한다. 담으로 된 건 통과 못한다. 이게 홍해 같은 거예요. 누가 정상인가? 애굽 사람이 정상이에요.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이상해. 그게 희한한 일이에요.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하고 2부 순서로 질문이 있었는데 아주 마음잡고 질문해대는 거예요. 두 시간 동안 강의를 듣고 하시는 말씀이, ‘왜 목사님은 하나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느냐? 사람 관점은 왜 안 넣어주는가?’ 하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해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동양은 동양철학이 있고, 서양은 서양철학이 있듯이 성경 내용이 인생의, 사상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 사람 말 듣고 있으면 그 사람 주장이 극히 정상이에요.




애굽 사람처럼 바다는 기어 들어가면 안 돼요. 그건 기어 들어가면 죽게 돼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들어가면 죽게 돼있는 그러니까 죽음이죠. 죽음이 마중을 나와 주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일의 특징입니다. 모든 일의 특징이 죽음으로 마중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의 장벽이 있으면 통과시킨다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비켜지나가는 것, 산을 타넘는 것, 만리장성을 타넘고 만리장성 끊어진 데를 비켜 지나서 저쪽 편으로 가는 것 우리의 아이디어가 기껏 그 정도거든요. 이런 아이디어로 저한데 공격을 해대는 거예요. ‘당신은 내가 알아듣는 소리를 하란 말이야.’ 꼭 개콘 같아. 하나님 관점에서는 믿습니다가 아니고 충분히 이해는 되는데 왜 사람의 관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걸 모독하고 까고 이야기하느냐? 모든 민족들이 그렇게 했는데.




그래서 제가 답변을 했지요. 방금 아저씨가 이야기한 모든 민족들은 각기 고유의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만 성경에 보니까 이스라엘은 이 모든 민족들에 포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이스라엘이 희한한 나라에요. 이게 포함이 안 된다고요. 하나님이 마중 나온 죽음의 장벽을 통과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이야기를 했어요. 다른 분들도 안 가고 있었으니까. 2부 순서에. 다른 민족들도 신들이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말하기를 진짜 신이 모세와 40일 동안 산 위에서 독대해서 물도 음식도 먹은 적도 없고, 잠은 물론 안 잤고. 거기서 조깅한 적도 없고, 다이어트한 적도 없고. 40일 동안 있어도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면서 진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이 세상에 내려와서 하는 말이, ‘나 외에 다른 신은 두지 마라.’ 다시 말해서 나 외에 다른 신은 아예 신이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제가 이런 소리 하면 또 뭐라 합니까? 그건 이스라엘 신의 입장에서 그렇다고 하죠.




그래서 이 강의 전체를 뭐라 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지 이스라엘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건 아니란 말이죠.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고 성도도 마찬가지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이거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거기에 차출된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차출된 사람은 아까 질문한 사람처럼 우리도 제발 정상적이고 싶어요. 홍해는 안 들어가는 게 정상이고. 그리고 만리장성은 타넘든지 돌아가는 게 정상이지 그걸 가려놓고 통과하는 이런 미친 짓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하는 게 옳아요. 하지만 우리가 인간들이 하는 식대로 사다리 타고 만리장성을 넘고 돌아가 버리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이게 문제라니까요.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아요.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은 우리의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든 하나님은 정상적인 하나님이에요. 갓바위 같이. 그런데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만 유독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고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이거는 낯선 신, 이것은 도저히 우리 아이디어에는 들어있지 않은 정말 희한하신 신이 먼저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고 그걸 이스라엘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는 곳마다 이런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이해가 되는 신이야 아니면 해괴망측한 신이냐는 그 다툼과 충돌이 이스라엘이 가면서 계속해서 벌어지는 겁니다. 흔하고 흔한 상식적인 신 믿으라고 새순교회 세운 게 아닙니다. 큰 교회 많은데, 따뜻한 데. 실내기온 4도, 5도 이런 데 말고. 사찰이 있어서 미리 와서 20도 맞춰놓는 그런 교회 많아요. 우리는 정상에다 더 정상이 되려고 이 교회 다니는 게 아닙니다.




결국 그 사람이 질문을 거의 20분 가까이 했어요. 그 사람이 그것부터 해서 계속 시비 거는 것이, ‘인간은 스스로 교회 다니고 애쓰게 되면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데 왜 인간의 이런 노력 같은 것을 깡그리 무시하느냐?’ 기분 나쁘다는 식으로 질문을 퍼부어대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속에 괴물이 들어있는 것은 까발리기 위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상이다, 정상이라고 했던 사람도 율법에 흠이 없던 사람도 사도 바울이었거든요. 율법에 흠이 없는 그 사람이 진짜 신,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졸지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하면서 그 내막이 로마서 7장에 보니까 내 안에 괴물 들었다. 괴물이 나를 주관하고 있지 정상적인 이성과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나라 하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단 말이죠. 이미 나는 죄 짓고 싶어서 환장한 죄를 못 지면 입에 가시가 돋는 그런 괴물이 나를 장악한 채 있다는 사실은 진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발각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홍해 봅시다. 홍해라는 장벽 또는 만리장성이라는 장벽을 넘을 때 사람은, ‘나는 정상적이야. 나는 온전한 사람이야.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온전한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고 만리장성을 통과할 거야.’라고 시도한 인간에게는 절대로 홍해는 빠져죽게 만들고 절대로 건너가지 못하는 장벽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마중 나오는 이 세력을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란 이미 살아있으면서 희한한 사태를 맞닥트려야 되는 거예요. 죽어서 골라잡는 게 아니고 살아생전에 뭐 이런 게 다 있어. 누구 글처럼 이따위 교회가 다 있어 하는 것처럼. 살아생전에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하고 그걸 맞닥트려야 돼요. ‘이런 하나님은 생전 처음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해?’라는 내용으로 들을 수 있어요 돼요.




내가 정상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것도 정상적인 하나님이고, 온유하고 자비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착한 사람에게 상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주는 정상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모든 신들이 얼토당토 않는 낯선 신에 의해서 그게 박살나고 우리로부터 ‘그 따위 신이 다 있어.’라는 욕설이 절로 나오는 사태가 일어나야 됩니다. 자기 딴에 교회 나왔는데      안 될 때 자연적으로 그런 분노가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홍해사건은 우리가 좀더 심층 있게 다시 봐야 돼요. 홍해사건은 뭐냐? 죽음으로 마중 나온 것이다. 죽음으로 마중 나와서 죽지 않으면 통과 못하는 세계가 천국이란 걸 알려주는 거예요. 그럼 왜 죽음으로 마중 나오는가를 신약으로 보면, 십자가로 마중 나오는 거죠.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자신의 죽으신 그것으로 마중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이건 사실 여름수련회에서 나올지 모르겠어요. 그건 내일 이야기고 오늘 할 건 해버립시다. 죽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없다는 겁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있는 것도 다 소멸해버리고 사라지고 재가 되고 없어지는 거예요. 한 줌의 재로 뿌리면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죽음으로 마중 나와서 천국 간다는 말은 인간의 것으로 갈 수 있는 나라는 천국은 아니다. 인간 것으로 교회에 돈 갖다놓고 봉사, 자기 몸 헌신하고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걸 총동원해서 세례 받고, 성찬식 하고, 예배참석하고 해서 갈 수 있는 나라는 결코 천국은 아니다.




그러면 내가 동원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현재 나에게 없는 것이 나를 천국에 넣어주는 그것이 천국입니다. 나에게 없는 것, 내가 만들 수 없는 것, 내가 노동해서 얻을 수 없는 것, 내가 칭찬 받아서 가질 수 없는 그것이 뭔가 외부에서 주어져서 ‘주여, 이건 제가 받은 게 아닌데요? 제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닌데요?’라고 해서 낯선 선물이 들이 닥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찐득이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서 그것을 준 그 출처로부터 나를 잡아당기는 거예요.




잡아당기면 질질질 끌려가면서 ‘아이고. 잡아당기는 주님이여, 지금 여기는 죽음의 장벽인데.’ 죽음의 장벽이던 만리장성이던 관계없이 ‘이때는 타넘고 가야 되는데.’ 그런 것도 듣지도 않고 그냥 잡아당기니까 가는 거예요. ‘이러면 죽는데요?’ 죽으라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천국에 와있다. 이게 바로 그러한 설정을 홍해를 가지고 한 겁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이 홍해의 설정이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나옵니다. 유리바다로. 유리바다로 건너가면서 어린양의 피 효과를 누가 과연 믿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믿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모세의 노래를 부르면서. 요새 김광석 노래고 부활의 노래 그런 것, 요새 부활 하면 김태원만 생각하고 십자가 부활은 생각 안 하고. 그런 대중적인 노래가 아니고 모세의 노래에요. 모세가 18집 판 냈는지 모르지만.  




모세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은 유리바다를 건너간다는 그 설정, 그 형식, 구조라 하는데 홍해를 구조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그래야 구조가 나보다 더 세다는 걸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구조가 없으면 내가 잘나서 구원받고, 내가 애썼고 전부다 개체가 있어버려요. 구조는 개체 안에 하나의 소속된 꼭짓점 같은 역할밖에 안 돼요.




초등학생 때 성냥개비로 집을 만들죠. 그럴 때 성냥개비 하나하나는 무슨 의미입니까? 그 집의 기둥 또는 바닥 그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그럼 성냥개비가 왜 거기 붙어있습니까? 성냥개비가 모여야 집의 윤곽이 드러나죠. 그리스도의 몸이 드러난다고요. 그걸 에베소서 1장에선 교회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고 머리에서 쏟아지는 능력으로 너희들을 본드로 붙이잖아요. 여기 의사, 판사 여러 직업이 있더라도 그런 것을 잘났던 못났던 관계없이 본드로 붙여서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몸이라는 윤곽 또는 성전이라는 윤곽을 형성시키는 것이 예수님께서 머리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자기 힘에 의해서 지체된 자들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한 구조가 구약성경 홍해사건에서 반드시 적용돼야 되겠죠. 그럼 이렇게 적용되게 되면 무엇이 드러나느냐가 중요하죠. 신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시고 지체되는 그 구조적 적용을 우리가 보고 있는 홍해에 적용시키면 이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항상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다가오게 되죠. 그럼 우리 인간은 뭡니까? 지금 홍해는 없는 것, 다른 말로 홍해는 죽음의 바다 아닙니까. 바다 자체가 사람을 못 살게 하니까. 없는 것을 통해서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죠.




그럼 애굽 군사들의 입장, 관점을 보세요. 아까 질문한 사람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신을 믿던, 예수를 믿던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럼 이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죠. 그 배후에 보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사람의 이름이에요. 이름이라는 건 명예, 명성, 자존심이거든요. ‘내가 여기 있잖아. 여기 있는 내가 뭔가 발휘에서 여기 있는 나를 구원하는 방식, 이게 정상적이고 올바른 것이지 무슨 홍해에 집어넣고. 헤엄칠 줄도 모르는 인간을 왜 집어넣느냐? 그거는 하나님의 엉터리 구원방법이다. 그런 하나님은 엉터리다.’라고 애굽 군대는 이야기할 것 아닙니까.




쉽게 가겠습니다. 어쩌면 어렵지만 애굽 군대가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이 보이죠. 보이는 것은 있지요. 있는 히브리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보기에 자진해서 있는 쪽에서 없는 세계로 사라져가는 걸 본 거예요. 바다에 왜 들어가느냐 말이죠. 미친 거예요. 그러면 그걸 따라잡으려면 있는 데서 나온 있는 방식을 사용해야 되겠죠. 그게 말을 몰고 마차, 활을 준비하고 ‘반드시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여 버려라.’ 하고 홍해 길로 추적해왔잖아요.




추적하면서 백날 하나님 믿어도 우리와 똑같은 있는 거야. 그건 뭐냐 하면, 그들은 아무리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믿어도 히브리인들을 어느 범위 안에서 생각하느냐 하면, 애굽인들이 자기들 평소에 살아왔던 세상관과 생활방식 범주 내 존대들뿐이란 말이죠. ‘아이고. 까불긴. 하나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소용없어.’ 내가 살아가는 그것을 확장시켜서 저들도 기껏 내가 아는 인간일 뿐이라고 집어넣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희한한 현상이 벌어졌죠. 우리 같으면 바다 속에 안 들어갈 건데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예상 밖으로 겁나서 못 가는 죽음의 길로 주께서 강제로 이끌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뒤에 사람들이 저들과 우리가 똑같다면 까짓 것 우리도 들어갈 수 있다고 따라온 겁니다. 그건 뭘 놓쳤습니까? 홍해 자체가 구조라는 사실을, 요새 말로 십자가 속이라는 걸 몰랐던 거예요.




십자가는 개나 소나 믿으면 안 돼요.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만 믿어야지 그렇지 않고 믿으면 그건 당장 튕겨져 나가버려요. ‘이게 어딜 감히 들어와. 어디 정상적인 사람이 여길 들어와. 정상적인 사람은 정상대로 살아. 교회 많잖아. 친목단체하고 종교생활 해. 어디 감히 새순을 들여다 봐. 희한한 순인데.’ 홍해가 이런 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이기는 무기인데 그 무기가 저쪽은 창과 활과 말이고 이쪽 무기는 바로 이스라엘, 히브리인 자체에요. 그게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병기가 돼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싸우는 하나님의 총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총칼이기 때문에 번쩍번쩍 빛나야 되고 뭔가 날카로워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오, 연약한 것들의 위대함이여!’ 이런 시구가 있어요. 상당히 역설적이죠. 이게 고린도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주께서는 연약하셔서 십자가에 죽었는데 비로소 처음으로 죽음과 죄와 마귀를 유일하게 이긴 그 위대함이여!




우리 힘으로 홍해를 못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병기로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강제로 우리를 죽음의 장벽 속에, 죽음의 만리장성 속에, 죽음의 바다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니까 바깥사람들만 의아해하는 게 아니고 당사자 되는 우리도 ‘인생이 뭔가 이상해, 이상해. 이건 내가 원래 예상했던 건 아닌데.’ 갑자기 추었다가 더운 게 이상해.




주님께서 싸우시는 주님이시라고 한다면 애굽 군사들이 그 이야기 들으면, ‘우리는 칼인데 저긴 총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자꾸 무기를 삼는데 하나님의 것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보이는 것, 강한 것, 큰 것 그것과 전혀 대비되는 없는 것, 죽은 것, ‘인생 왜 그렇게 사나?’ 이런 식으로.




부자를 기죽일 수 있는 사람은 더 부자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거지 되고 싶어서 철야 기도한 게 아니에요.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무기는 그래야 돼요. 저쪽은 가졌다고 우기기 때문에 차라리 이쪽 무기는 ‘많이 가지세요. 많이.’ 하고 있는 것도 다 빼앗아버리죠. 억울한 것은 거지 나사로가 사이에 끼여서 ‘주여, 이게 무슨 재앙입니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욥의 세 친구를 치기 위해서 난데없이 욥에게 욥이 원치 않는 고난이 와야 되는 거예요. 이상해요. ‘정말.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너는 구조야. 너는 그리스도 몸의 발의 때거든. 나는 왜 있느냐고 질문하지 마.’ 질문하면 쥐어박아버려요. 구조가 어떻습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되는데 ‘주여, 저를 왜 자꾸 힘들게 하십니까?’ 하면 쥐어박아버려요. 그래서 나중에 욥은 그걸 알고 재를 뒤집어쓰고, ‘저는 구조입니다.’ 하거든요.




왜 황무지에 비가 오는지 황무지는 대들지 않거든요. 왜 노루가 그렇게 새끼를 낳고, 왜 하늘에 있는 안드로메다는 저렇게 매달았는지 안드로메다 성운은 주님한테 대들지 않는데 욥은 대들었다고요. 그래서 나중에 쥐어박아버렸잖아요. ‘내가 안드로메다구나. 내가 황무지구나.’ 내가 만날 바다한테 얻어맞는 기능을 보여주는 바위. 얻어맞다 나중에 다 깎여지죠. 해운대 앞에 있는 동백섬 바위는 얻어맞는 역할 해야 돼요. 왜? 구조니까.




결국 알 것은 뭡니까? 하나님 나라는 구조죠. 이제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것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구조적이죠. 그럼 사람의 이름으로 구축한 것이 구조적이에요. 하나님의 이름과 대결 상태, 대치 상태에 있는 인간의 이름도 구조적이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걸 어두움의 권세, 바다에서 올라온 옛 뱀, 용이라고 하는 겁니다. 구조 대 구조의 싸움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구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군에 갈 때 애국심에 간 게 아니고 안 가면 영창에 집어넣을까봐 억지로 온 것이다. 항상 개인을 생각하잖아요. 그건 이십 대, 삼십 대 철이 없을 때에요. 나중에 뭔가 계기가 생겨서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느끼게 되면 이 세상 자체가, 성경말씀대로 악마, 이 세상 신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천국만 구조가 아니고 이쪽도 구조적으로 세상 신이 꼼짝 말라고 가지고 논 거예요. 그 구조에 대해서 하나님은 재물, 돈이에요. 오늘날 자본주의. 돈과 권력, 권력과 돈 그게 구조화돼있고 그 구조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안심을 느끼는 겁니다.




여러분 피곤하시지만 어려운 것 하나 하겠습니다. 보너스로.




사람들의 세계에서 분명히 나는 눈만 뜨면 나밖에 모르는데 왜 자꾸 그걸 구조라 하느냐? 그걸 설명해드릴게요. 자식이던 남편이던 다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날 때부터 이기주의인데 왜 자꾸 그것이 아니고 구조 속의 일이라고 우기는가? 그게 바로 교회 때문에 그래요. 모스라는 사람이 정리한 건데




개인과 공동체는 증여, 주고 준 것에 대해서 공동체가 제공하는 게 있어요. 내가 능력껏 주고 나라가 주는 혜택을 제공받음으로 말미암아 구조적으로 한데 엉켜있는 거예요. 비록 이것이 사적으로 이기주의 사고방식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은 공동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돼있다는. 왜냐하면 사람이 정체, ‘당신의 정체를 밝혀라!’ 이 말이 어릴 때 만화책에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정체를 밝히라 할 때 ‘딱 보면 모르나? 나야, 나.’ 이거는 군에 보초 설 때 보통 그러는데 이러다 총 맞아요. ‘딱 보면 모르겠어? 나잖아.’라고 할 수 없어요. 정체를 밝히라 할 때는 그쪽 세계에서 용어나 단어를 사용해줘야 돼요. 그쪽 세계에서 통하는 그쪽 구조에서 ‘너의 위치는 뭐냐?’라고 묻는 거예요.




어떤 직원이 현대중공업 들어가는데 ‘누구십니까?’ ‘딱 보면 몰라. 나잖아. 나.’ 이러면 안 되고, ‘선박과의 반장이다.’ 이런 신분증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지키는 사람이, ‘우리 현대중공업에는 당신 같은 그런 직종이나 부서가 없는데요?’ 하면, ‘아. 내가 현대자동차 갈 걸 현대중공업 왔구나.’ 하잖아요.




그 구조에서 필요한 것, 요구하는데 ‘당신은 무엇을 제공할 것이냐?’ ‘나는 선반기술입니다.’ ‘맞아. 선박과다. 당신은 팀장 맞아. 이번에 제품 하나 만들어내.’ 이렇게 주고받는, 내 정체가 뭐냐? 내 정체성이 뭐냐? 하는 것은 항상 구조가 먼저 선행 되고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이런 입지를 갖고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아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이런 공부가 어려워요. 어릴 때부터 조사한 논문들이 많아요. 처음부터 어린애가 자기 주체성에 관심이 있느냐, 아니면 타인에게 관심이 있느냐? 할 때 자기 주체성에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요. 심지어 자기 팔다리에 관심이 있어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알 때는 언제냐 하면, 쥐어 박힐 때. ‘이게 어디서 오줌을 싸!’ 그러니까 구조에서 자기 위치를 정했다는 사실을 아는 그 순간 처음으로 자아성이 발견돼요. 나는 이 집의 아들이지 저 집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이게 뭐가 어려우냐고 하실 텐데 예를 들면 아실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호주영화를 봤는데 호주의 젊은애들이 얼마나 개판 되었느냐를 보여주는 영화에요. 그 영화가 호주에서 상영 금지되었다든가 하는데 뭐냐 하면, 아주 말썽꾸러기 애가 아버지와 대화하는데, 아버지가, ‘야. 옷 좀 똑바로 입어!’ ‘아니 왜 저한테 간섭하십니까?’ ‘나는 네 아빠거든.’ 그 말이 더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현대 서양의 젊은애들에게 아빠란 개념은 처음 낳았을 때 DNA제공자에요. 그 뒤에 크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컸다고 본 거예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낳아준 아빠에 대해선 인정하겠는데 그 동안 키워준 아빠는 도무지 아빠라는 개념 안에는 안 들어있는 것이 내가 아는 아빠 개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해 안 되는 소리를 했습니다.’ ‘내가 네 아빠잖아.’ 그러니까 애는 의아해 하면서 ‘아빠신데 왜 간섭하십니까?’ 그런데 아빠세대는 아빠니까 간섭하는 거예요.




굉장히 이게 복음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분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정하라.’ ‘누구신데 나더러 자기를 부정하라 해.’ 예수님이, ‘내가 십자가 진 예수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내 죄를 사해줄 때 믿어줬잖아. 그러면 그걸로 끝난 것이지.’ 예수님 믿어줬으면 그 다음부터 나는 내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교회에서 질문한 사람이 그겁니다. 내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어쨌든 간에 인생사는 것은 내가 알아서 사는 거예요. 직장에서 과장이던, 차장이던, 직원이던, 작업반장이던 어떻게 살던 간에.




그러니까 그분이 답답해하는 것은, ‘목사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하나님 주권은 인정하겠는데 우리가 일상에 들어가서 모든 얼굴 씻고, 밥 먹을까, 코코아 먹을까, 커피 먹을까? 이 모든 관념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리잖아요. 내가 내려서 내가 먹을까, 말까, 조깅할까, 다이어트할까 내가 결정했으면 그럼 내 몸은 누가 만든 거예요? 내가 만든 거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사고방식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십자가 타령이냐 이 말입니다.




‘아빠라니? 아빠가 낳아준 건 인정해. 이상해. 아빤데 왜 간섭하지?’ 그러나 아빠 입장에선 뭡니까? 아들 됨이란 것은 아들 대 아빠의 관점이 아니고 아들과 아빠가 모여서 만들어낸 구조, 공동체란 구조 안에서 나는 영원히 아빠고, 너는 영원히 아들이란 말이죠. 이게 바로 천국 아닙니까. 천국은 예수 믿어줬다, 이젠 내 마음대로 산다가 아니라 우리는 영원히 예수님의 증인이고, 천국 가서도 증인이고. 심지어 지옥 가도 증인이 돼요. 지옥 가도 주님이 이만큼 무서운 줄 몰랐다고 증언해요.




모든 만물이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님 때문에 사는, 구조 속에 하나의 위치를 점할 뿐이지 위치를 점한 인간이 ‘나는요?’ 하는 질문자체가 허용 안 돼요. 그래선 자기 정체를 몰라요. ‘나는 내 기능이 뭡니까?’ 이러면 되지요. ‘내 할 일이 뭡니까? 내 역할은 뭡니까?’ 이러면 말이 돼요.




‘왜 하필이면 나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이건 욥이 주님을 제대로 몰랐을 때 하는 말 아닙니까. 네 역할이 고난 받는 역할이다. 그러니까 ‘아하’ 하고 자기가 그동안 자기중심으로 질문을 해댔던 그 모든 입을 자기 스스로 틀어막아버려요. ‘나는 질문 안 합니다.’ 나는 스스로 질문할 주제가 못 된다고 뒤집어쓰고 하죠. 그럴 때 욥에게 ‘욥아. 네가 친구들을 위해서 대신 제사 드려라. 네가 드린 게 아니고 네가 속한 구조 안에서 너의 기능이었다. 그 기능이 네 친구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사라지고 하나의 기능으로 본다면, 내 이름은 사라지고 누구 이름이 기능을 준다? 주의 이름이 나에게 역할을 맡긴 게 돼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 영광을 위하여 하라? 아버지 영광을 위하여. 이게 얼마나 생소하고 우리가 성령받기 전에는 상상도 못할 구조적인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교회 오면, ‘오늘도 교회 왔습니다. 이번 주간은 중요한 일이 여러 개 있으니까 알아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항상 자기 챙기는 것, 자기 이름 자기가 챙기는 것으로 자기 위주의 구조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내가 되려고 하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적수들이 하는 짓이에요.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는 평소의 습관이 그거에요.




그러니 한국교회가 복음을 안다 해도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는 이유가 복음을 안다 해서 아는 게 아니고 한국교회 자체가 이단인 것을 알아서 제대로 복음을 아는 거죠. 전도사님 전도 많이 했겠지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내가 다닌 교회가 이단이었구나를 아는 그 순간부터 해서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있지, 자칫 자기는 이단교회에 있으면서 십자가 받아들이면, 이거는 ‘아비인 건 인정하겠는데 그 다음부터는 손떼소.’ 하는 호주 불량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홍해가 계속 돼야 돼요. 홍해가 계속 되고, 여리고성이 계속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 안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내용이 다 들어있어요. 필요할 때마다 이 사람한테 홍해 주고, 이 사람한테 여리고성 주고, 필요할 때마다 내주는 거예요. 또 한 사람에게도 홍해 준 기억이 있으면 그 다음 여리고성 줄 수도 있고, 무화과나무 저주받는 것 줄 수도 있고. 주님의 품에는 성경 66권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다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성경관은 하나의 직선적이기 때문에 이것 지키면 그 다음엔 안 지켜도 되고 이것 마쳤다 하면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고. 만날 선이에요. 이것 하면 뺏기 때문에 이건 안 해도 되고 이러거든요. 홍해를 건너서 광야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아무리 홍해 건너고 해도 ‘너는 여전히 애굽 안에 있어.’ 하고 집어넣을 경우가 생기고. ‘너는 아직도 야곱이야. 너는 얍복강에서 얻어터져야 돼.’ 그런 경우가 또 생기고.




성경 전체가 매일같이 전부가 다 우리에게 덮친다고 보면 됩니다. 왜? 우리는 성경이 만든 구조 안에서 서로 교류, 직렬, 병렬하는 것처럼 10킬로 저쪽의 전기가 이쪽으로 흘러올 수도 있고. 구조 안에서 어떻게 교류가 되는지 몰라요. 다 연관이 돼있어요.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죠. 몸은 비록 너희들과 떨어져있으나 이미 영 안에서 전기가 다 교류가 되게 돼있어요. 멀리 떨어져있다고 해서 형제 아닌 것이 아닌 겁니다. 구조 안에선 마찬가지에요.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상식을 뛰어넘는데 그 요소가 뭐냐 하면, 인간으로선 들어갈 수 없는 죽음으로 마중 나와서 그 죽음 속으로 강제로 집어넣는다는 거죠. 그러면 나는 죽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새로운 구조에 가입되었다는 것을 새로운 세상을 밝히게 됩니다. 그럴 때 나를 미쳤다고 여기고 욕하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 원수들이 십자가 안에서 보니까 저쪽도 구조로 돼있는데 그 구조의 총 두목이 세상 신이 역사해서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세상 신을 누가 배치해놨습니까? 자기 백성만 건지기 위한 조치로서 절대로 저쪽에선 못 믿도록 만든 거예요. 믿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을 분명히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구원받은 것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너희들만큼은 구원받아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을 강조하기 위해서 저쪽을 거부한 겁니다. ‘복이 있도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자 해도 기회를 얻질 못했지만 너희들이 복이 있구나.’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하기 전에 나와요. ‘너희가 이걸 알게 된 것을 복인 줄 알아라.’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했다는 이것이 창세전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실효성은 천 년, 이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 평생을 통해서 계속해서 ‘너는 선택되었거든.’ 계속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홍해사건은 매일같이 일어나야 됩니다. 장벽이죠. 죽음 속에서.




여러분들이 혹시 이런 사진이나 실제로 볼 수 있었을 거예요. 얼음이 너무 냉동이 되어서 여기 바나나도 있고, 수박도 있고. 이 과일들을 너무 오래 보관한다고 완전히 냉동시킨 그런 그림 보신 적 있지요. 실제로 냉장고에 국물 있는 음식 오래 놔두면 국물 때문에 얼어버리잖아요. 이것이 바로 성도지요. 굳어져버린 그리스도의 구조 안에, 천국의 구조 안에 우리는 굳어져있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게 진동한다고, 나름대로 까분다고. 주님한테 벗어나려고 까불어요. 벗어나봐야 냉동된 건데. 냉동이 풀리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천국까지. 그런데 나만 이런 줄 알았더니만 저쪽의 하나님의 원수 집단도 마찬가지로 악마에 의해서 완전히 냉동이 돼있어요. 아무리 교회 와서 구원받으려 해도 거의 3센티까지 왔는데 뒤에서 잡아당겨버려요. ‘하지 마!’ 하고 잡아당기죠.




씨앗이 떨어져서 좋다고 했는데 바위가 올라와서 기운을 받아버리고. 또 옥토 열매 맺으라고 했는데 가시덤불에 갇혀서 못 하고. 교회 와서 복음 들으려했는데 기어이 되돌아가는 사람. 아마 새순교회도 한 이백 명 될 거예요. 이백 명은 너무 심했다. 백구십칠 명. 그러니까 기어이 되돌아간 이것을 하나님은, ‘애굽 군대는 홍해에 빠져죽었느니라. 반면에 이들은 무사히 살아났느니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화답해서 하는 말이, 15장,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이름께서 직접 용사가 된 덕분입니다.’라고 찬양을 하겠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유리바다를 통과하면서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 홍해를 건너고 있다고 이야기하죠. 저쪽 돌아간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정말 열심히 믿으려했는데 표현할 길이 없네. 잘 믿으려했는데 이거 안 되네.’ 새순교회 백구십칠 명. 우리교회는 많아요. 이천칠백사십다섯. 했는데 안 되는 거예요.




대전 공부할 때 제가 시험 보는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이쪽의 집사님이 저쪽의 집사님한테 ‘꼴 보기 싫어. 다음부터 안 봤으면 좋겠다.’라는 소리를 들어봐야 돼요. 그래야 새로 오신 분이, ‘나는 당신 보기 좋으라고 온 게 아니고 복음 들으러왔거든.’ 이런 소리가 나와야 되는 겁니다.




새순교회도 참 위험한 시험인데 ‘나는 김 집사 좀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할 때 김 집사가 진짜 냉동된 사람 같으면, ‘나는 새순교회 누구 보라고 온 것이 아니고 복음 때문에 오거든요.’ 이런 소리가 나와야 되는데 몰라. 기다렸다는 듯이 안 나올 수가 있어. 삐졌어. ‘봐라. 이게 무슨 사랑의 교회고, 이게 복음이 살아있는 교회냐. 이렇게 냉랭한 교회가.’ 하고 삐져서 그것 백구십팔 번째. 아마 그런 소리하는 것도 주의 뜻인지 모르겠어요. 구원받지 못해야 될 사람이 자꾸 구원받는 행세를 하니까 있는 사람이 힘들잖아요.




티비를 제가 거의 안 보는데 슬쩍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송창식이란 분이 있어요. 이 사람이 세시봉이란 옛날 서울에 유명한 음악다방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그전엔 홍익대학 잔디밭에서 쳤단 말이죠. 홍익대 조각과 애들 친구여서 전부다 송창식도 대학 나온 줄 알고. 옛날 번안가요, 팝송 부르려면 대학물 먹어야 하니까. 조영남이 가만 보니까 아무래도 흉내 내고 아니거든요. ‘너 대학 안 나왔지?’ 하니까 자꾸 거짓말하는 거예요. ‘어디서 대학도 안 나온 가짜가 대학 나온 우리와 같이 놀려고 하느냐.’ 하고 주먹으로 치고 맞았다는 이야기가 얼른 봤는데 나와요.




이게 목사님이 복음만 전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어요. 자칫 사람 알아버리면 이거는 원수끼리 붙어서 결국 교회가 사기가 돼버립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교회에 해버리면 누가 다치게 되느냐 하면, 뽑지도 못해요. 뽑으면 알곡이 뽑힐까봐 겁나서. 그래서 두 명 나오다 두 명 다 나가도 복음만 외쳐야 될 이유가, 그 목사 자체가 무기기 때문에.




‘목사님, 우리 교회 교인들 다 부자 돼야 되잖아요. 왜 부자 안 됩니까?’ ‘그것 보이는 거거든요. 보이는 것으로 돈 많은 것으로 천국 못 가요.’ 이건희 조져놨어요. 부자가 천국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데 언제 이건희가 바늘구멍보다 작은 사람 되겠어요. 몽땅 망해야 될 거예요. 그렇잖아요. 너무 작아서 자기가 안 보여야 되거든요. 그러니 이거는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복음만 전해야 돼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보이는 천국에 가게 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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