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1-01-21 17:34:28 조회 : 2655         
홍해의 의미b-출애굽기 15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70)
 

20110107b 울산강의-출애굽기 15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노래를 하죠. 노래 가사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인간의 살고 죽는 것은 별로 안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 죽느냐, 잘 사느냐 못 사느냐는 안 중요하다는 문제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식이 사법고시 마지막 3차 합격을 앞두고 있는 그 날 낮에 엄마가 미장원에서 머리를 했는데 영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전화가 와서 ‘엄마. 나 합격 먹었어!’ 했을 때 아까 낮에 머리 잘 안 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안 되죠. 머리를 아예 삭발을 해도 좋단 말이죠. 너무 좋아서. 드디어 내 아들 소원 이뤘구나. 내 꿈도 이뤘구나 하는 것처럼.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예상도 못한 소원을 이룬 거예요. 그러니까 더 좋은 거예요. 예상치도 못한 축복이에요. 내 뜻대로 놔뒀으면 절대로 이루지 못할 목적을 내 뜻을 꺾으셨기 때문에 비로소 이게 구원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그 축복을 받은 거예요.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무기가 무슨 힘이 세서 애굽 군대들을 다 몰살시키겠습니까? 자기들은 손도 대지 않았어. 그냥 뒤따라오다가 엎어져서 다 죽어버렸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내가 살아난 것도 뒤따라온 사람이 죽는 것과 그러니까 살 사람은 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는 이 모든 것이, 저 사람 지옥 가고 내가 살았다는 게 좋은 게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손에서 완료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너무 감격스러운 거예요. 이 구조를 총괄, 지배하시는 분을 내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 좋은 겁니다.


그걸 누가복음에 보면 시므온이 ‘이제 종을 평안히 쉬게 하시는군요.’ 나의 구세주를 내 눈으로 봤다는 것, 난 이래서 살았군요. 목자가 들에서 양을 칠 때 양을 잘 쳐야 내일 장날에 제값을 잘 받잖아요. 걱정하는 것이 노상 양이 풀을 잘 뜯어먹어서 토실토실한 양이 되는 거기에 온 신경 다 쓰는데 갑자기 천사가 와서 놀라게 만들고 자빠지게 만들고 하늘에서 찬송이 들리면서 지시한대로 가보니까 구세주가 등장했을 때,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태어난 것을 봤을 때 양 토실토실 그것은 내일 장터에서 양 한 마리 얼마나 받나 그것은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구원받았노라.’ 하는 그 소리밖에 못 하죠. 그게 전부죠.


정리해봅시다. 결국 찬송이라 하는 것은. 목사님, 잘 들어놓으셨다가 아플 때 약 먹일 때 오늘 후반전 한 것, 잘 이야기해주세요. 평소에 이야기 안 하는 사이 아닌가 또.


‘찬송=완료’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구조에요. 아래쪽에서는 야단법석이라. 난리 났어. 그런데 위쪽에 가끔 보여주는 천국의 장면은 좋아서 잔치분위기라. 종려나무 들고 숱한 사람들이 어린양을 환호하면서 그야말로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것처럼 희희낙락이에요. 사자성어로 야단법석, 이쪽은 희희낙락. 이 두 구조가 요한계시록을 계속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 구조를 이루는 이 경계는 사람 손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고 바로 천사가 등장해서 경계를 이루는데 경계를 더욱 더 예리하게 좁혀가면서 절대로 섞여서는 안 될 사람은 구분해내는 그 작업을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통해서 갈라지게 하는 거예요. 예리한 칼날처럼 ‘어딜 감히 이쪽을 넘봐! 오지 마!’ 그래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받게 되면 이쪽은 짐승의 인을 받은 사람의 특징, 저쪽은 어린양의 인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또렷하게 구분되겠죠.


희희낙락할 사람과 야단법석, 벼락 떨어졌는데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숨을 곳도 모르고. 기껏 한다는 게 바위에 내 위에 덮쳐라. 바위 덮치면 혹뿔 납니다. 지하철공사장 뭉개보세요. 완전히 숨 막힙니다. 얼마나 복음의 광채가 눈 부셨으면 차라리 지하철 속에 가서 갱도가 무너져서 땅굴 속에 틀어박히는 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지겠습니까? 그 거룩한 빛이, 어린양의 보좌의 빛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그렇겠습니까? 해같이 빛난다 했어요. 변화산에서. 감히 소릴 못 들어요.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히 죽은 듯했어요.


그런데 세상 신이 악마가 그 복음의 강렬한 광채가 우리 마음속에 어둠을 좇아내지 못하도록 빛이 오지 못하도록 우리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사는 사람 목적, 이유 왜 사는지, 왜 돈 버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죽어서 뭐 하는지 야단법석이야.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야. 우리 마음이. 그러니까 호주영화처럼 ‘아비인데 뭐 어쩌라고? 아비라고 이해하잖아. 그런데 왜 간섭하느냐고.’


그래서 하나교회에서 20분 동안 질문의 주제가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왜 인간을 공격하느냐?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든지, 빙빙 돌려서 전하든지, 우회해서 전하든지 나오는 반응이 이거에요. 왜 인간을 공격하는가? 제대로 복음을 전한 거죠. 로이드 목사님 설교집에 나와요. 전도했는데 저쪽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진짜 복음을 전하면 화를 내게 돼있다.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선 화 잘 안 내죠.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고 사랑을 전하거든요. 사랑이란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갈구했던 겁니까? 사람들이 열심히 애쓰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 누구 없소? 사랑을 찾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요즘 아가씨들이 고르고 고르는 것은 딴 게 아닙니다. 무조건 나를 공주 취급해서 내가 원하는 사랑을 다 채워줄 수 있는 그런 남자 없어요? 차라리 네가 만들어라. 만드는 게 빠른 거예요.


라캉의 주장은 그거에요. 인간의 주체는 결핍을 채우려고 애쓰는 그 순간 주체가 등장한다. 세상에서 회사에서 일 바쁠 때는 내가 누군지 생각 안 나요. 빨리 작업을 마무리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런데 ‘오늘 일 열심히 했는데 과장님이 회식 안 해주나?’라고 결핍을 느낄 그때 비로소 다시 한번 내가 누구라는 게 떠오르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 이렇습니다. 진실이란 반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또는 반란을 느낄 때 비로소 숨어있는 진실이 진실로 드러난다는 말이 있어요.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내가 진실 값을 하는구나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좋게 지내버리면 좋은 사이죠.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의 빛이 와버리면 평소에 굉장히 좋아보였던 그 사람도 성경대로 보니까 거룩한 것을 짓밟은, 아주 신을 모독한, 하나님의 복음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인식이 되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에요.


저 친구가 그렇게 술 잘 먹고 까불더니만 갑자기 교회 간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하고 횡설수설 친구 사이에 금기가 되어있는 종교이야기를. 친구 사이에서는 두 가지를 하면 안 돼요. 종교이야기, 정치이야기 하면 안 돼요. 그 다음부터 친구 안 하려면 하세요. 친구 다 떨어집니다. 친구에 다가가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남자한테는 축구이야기, 여자한테는 원빈이나 송승헌이야기.


그래서 연예계라는 것은 현대인들이 스트레스 푸는데 좋은 이야기됩니까? 그 사람들이 없었으면 다른 사람들이 단합을 못한다니까. 박지성, 이승엽에게 왜 돈을 그렇게 많이 줘야 됩니까? 축구이야기, 야구이야기 아니면 남자들 우정이 싹트지 않습니다.


교환은 직접적 교환이 아니라 우회해서 교환하는 거예요. 너와 나가 하나의 우정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되질 않아요. 내가 좋아는 걸 그가 좋아할 때 제삼의 공통지점에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유럽 사람들 믿음을 떠나버려요. 기독교라면서도 믿음이 없는 그런 유럽 사람들이 매일매일 자기의 주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분 묻겠습니다. 주체를 유지하게 위해서 뭐가 발생돼야 한다? 결핍이죠. 결핍을 매우기 위해서 그들은 놀랍게도 축구장에 모이죠. 시시한 팀 경기해도 몇 만 명 모이는 줄 알아요? 육만 관중이 꽉 차요. 우리나라 축구사상 다 해도 한두 번 나올까말까. 수원 삼성과 서울 팀과 붙을 때나 한 사만 명 올지 몰라도. 그것도 결승전. 그 외는 텅텅 비었어. 꼴찌 하는 대구 같은 경우에는 중계방송이 부끄러워. 카메라가 부끄러워서 관중들 없는데 피해 골라서 비춰야 돼. 하도 안 오니까. 동네축구도 그만큼 온다.


유럽축구 보세요. 비와도 심지어 눈밭이 돼도. 유럽만 그런 게 아니고 멕시코, 남미 완전히 미쳤어요. 그것 아니면 내가 왜 사는지 몰라요. 골프 좋아하는 사람은 골프 쳐야 자기가 왜 사는지 알고, 담배 피우는 사람, 술 먹는 사람, 매일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야 비로소 가장답고 내가 이 가정에 아버지답고 그리고 사는 사람답게 보이는 거예요. 그 제삼의 영역들이 바로 전부다 악마가 주는 구조가 되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뭐냐? 이런 주체는 무엇 때문에 생긴다? 결핍이죠. 여기서 찬송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결핍인데. 찬송은 완성 구조 속에 있을 때 나오거든요. ‘완성된 것 맞습니다.’ 두 자로 하면 ‘찬송’이에요. ‘열심히 합시다.’ 이건 찬송이 아니에요. 왜? 실패하면 어떻게 하려고? 결핍이에요. 모든 게 완료된 상태가 올 때 찬송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기를,‘완료됐다면 그 사람들이 광야에서 왜 실패하느냐?’ 놀라운 사실은 완료는 완료됐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실패한 가운데서 완료가 완료답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 바닷가에서 불렀던 찬송은 그들이 실패할 때마다 새롭게 숨어있는 완료가 그들에게 들이닥칩니다.


나중에 하박국 3장에 가면 이런 완료가 있어요. 무화과에 과실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안 열리고, 외양간에 구제역 걸려서 도살당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완료한다.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나의 주체의 결핍요소로서 들어올 수 없다는 거예요.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이미 완료된 상태란 말이죠.


이렇게 보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일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신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과 거기에 대비되는 하나의 짝패가 되는, 여러분 장갑이 오른 장갑만 하면 소용없잖아요. 왼짝도 있어야 한 짝이잖아요. ‘양말 하나만 주세요.’ 하는 바보 없잖아요. 양말 양쪽 다 신어야 되지. 신발도 하나만 사면 얼마입니까? 이러면 안 된다니까. 신발은 두 짝으로 파는 것이지 한 짝만 파는 신발가게는 아마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안 하죠.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인간의 이름을 불러내야 하나님의 이름이 이름다워요. 인간의 이름이 없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름은 죄인의 이름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 그러니까 의인의 이름이죠. 죄와 의인이 만나서 그 죄인을 의인의 이름으로 의의 관계 때문에 그 죄마저 의에 복속되어서 의가 되는 놀라운 사랑, 이것이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완료된 하나님이라고 찬송하는 거죠.


다시 한번 정리하면 하나님 이름 앞에서는 내가 죽고 살고가 중요하지 않는 문제에요. 죽고 살고 아프고 건강하고 돈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늘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늘 찬송이 안 나와요. 그럼 찬송이 안 나온다는 것은 완료된 상태에서 눈을 어디로 돌렸다? 미완료로 돌린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고 미완료된 나의 이름이 어떻게 보다 나은 완료된 나의 이름으로, 나의 이름에서 나의 이름으로 발전할 것인가에 몰두하다보니까 거기는 인간의 행함을 가미할 수밖에 없어요. ‘역시 열심히 일해야 돈 벌어. 놀면 하늘에서 돈 안 줘.’


그 말이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백번 맞죠. 근데 문제는 그게 틀린 것이 아니고 그렇게 나온 인간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그 사실을 놓친 게 문제지요. 인간의 이름을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교회에서 질문한 사람이 맞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일한다는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걸 발각당해야 한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때려치워버리고, ‘내가 평생 내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어쩌라고? 하나님이 아비야? 아비면 어쩐대?’ 그 철딱서니 없는 호주 젊은애처럼 만드신 건 잘 했는데 그러나 그 이후에 내가 인생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살았나?’ ‘살았습니다.’ ‘살았구나.’ 끝난 문제에요. 의미 없기 때문에.


문제는 왜 입에서 찬송이 안 나오지? 찬송이 나올 리가 있습니까? 완료가 아닌데. 어떤 사람은 억지로 찬송을 불러요. 부르면 미완료 찬송이에요. 왜? ‘하나님, 이 찬송 부르면 복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니까. 찬송이 결과로 나와야 되는데 수단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 찬송이란 수단을 하게 되면 결과로 내가 얻을 것을 챙기겠다는 수단으로 동원된 찬송은 그것은 찬송이 아니고 자기 노래인 거죠.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노래에요. 찬송이 아니고 악 쓰는 겁니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찬송이라 하는 것은 찬송하려하지 말고 그냥 사시다보면 흥얼흥얼 찬송이 나와요. ‘왜 나는 그대 앞에서 서면 작아지는가.’ 찬송이 막나온다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랑하는 그대가 보이고’ 찬송이 절로 나와요. 모든 노래가 다 찬송이 되지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면. 감사 없이 찬송 부르면 찬송이 아니고 악을 쓰는 거예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떤 노래를 불러도 ~~~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찬송은 그 자체로 완벽한 건 없고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할 때는 미완료는 주님 앞에서 의미 없고 항상 완료된 완료만이 우리에게 의미 있다고 찬송이 나오죠.


그러면 완료된 주인공은 누구겠어요? 우리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이죠.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1절부터 18절까지 처음부터 주인공이 바로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 이름만이 찬양받을 분이라고 찬송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진도 좀 더 나가봅시다.


그러면 그들이 찬송했습니다. 첫째 시간 배웠던 것 복습해보면, 이스라엘은 사적으로 가입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벌이시는 이스라엘 구조 안에 자기 위치를 점하고 있죠. 그걸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벌이는 그 자체가 무기가 되죠. 이 무기에서 나오는 찬송은 하나님의 예언이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고.


한나가 찬송했지요. 한나의 찬송이 그냥 흥얼거림이었습니까, 자기 기분이었습니까, 그 말씀이 하나의 예언이었습니까? 예언이었어요. 자기가 예언을 만들어냈습니까? 심사숙고해서 어떤 가사를 쓰면 주께서 예언대로 되겠나? 아예 애를 썼습니까, 작사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한나는 그냥 고난 속에 있다가 기쁨에서 터져 나왔는데 그 자체를 무기로 사용하죠. 구조 속에 하나의 점조직이기 때문에 그 속에 하나님의 새 생명이 들어와 버리면 이왕 일어날 장래 일을 마리아 입을 통해서 그 언어로 예언을 발산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 예언을 알아듣는 후대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 동참해야 그 예언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느냐 하면 한나가 경험한 아픔과 환희에 동참한 사람에 한해서만 마리아가 외친 찬송의 제대로 된 의미에 동참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한나는 한나고, 나는 나고 몸이 다르잖아요. 개별자잖아요. 각기 떨어진 몸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을 구약에서는 그걸 언약이라 하고 신약에선 성령이라고 하는 겁니다. 몸은 떨어져도 영으로 하나 됐다 이 말입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우리 몸을 동참케 하는, 이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신다는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 어떤 체험을 하게 되느냐 하면, 한나의 체험, 베드로의 체험, 마리아의 체험, 예수님의 체험, 스데반 집사의 돌 맞았던 체험을 같이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 순간 우리는 성경말씀이 해석이 되죠. 그럼 어떻게 해석됩니까? 해석되는 건 하나밖에 없죠. ‘주의 이름이 완료되었군요. 십자가로 다 이뤄졌군요.’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현재 죽고 사는 것은 주님의 완료 앞에서는 아무 문제 거리조차 되지 않는군요.’라고 한 2초, 짧은 사람은 1.2초. 그 짧은 순간에 ‘내가 괜한 걱정을 했었구나.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모든 게 주님의 인생인데 왜 자꾸 주님의 인생을 내 인생이라 했을꼬?’ 하는 이 긴 문장도 말로 하면 오래 걸리지만 생각하면 한 0.2초밖에 안 걸려요. 0.2초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정신 차려! 현실이야. 돈 벌어야 돼. 아무도 돈 안 벌어줘.’


울산바닥에 30년 만에 눈 온다는 말은 자칫하면 우리 인생에도 30년 만에 먹고 떨어질 수도 있어요. 아무리 눈 좋아하는 개나 아이들도 눈이 매일 와보세요. 지겹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바로 기적을 가져다주는 기적의 효과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어른들은 그게 없어요. 왜냐하면 늘 한 번씩 오게 돼있어. 기적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법속에 들어가 버리죠. 거기서 찬양이 안 나오죠. 처음 온 사람이 405장, 나 같은 죄인 부르면 오래된 사람들은, ‘나도 15년 전에 해본 겁니다.’ 하고 무시하죠.


그 말은 뭐냐? 우리는 새로운 더 센 마약이 필요하죠. 오래 믿은 사람은 더 센 게 필요해. 더 센 주사를 놓게 되면 그땐 좀 다듬어지죠. ‘주여, 이럴 수 없습니다. 내 인생 이렇게 여기서 끝장낼 수 없습니다.’ ‘네 인생 나한테 별로 안 중요하거든.’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걸 알게 되면 찬송이 일어나죠.


그래서 로마서에 믿음 약한 사람의 믿음 약한 것을 비웃거나 그걸 무시하지 마라. 왜? 그것 자체가 하나의 조직에서, 그리스도 구조 안에서 이뤄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전구,     크리스마스트리에 나오는 어떤 땐 노란색 전구, 빨간색 전구처럼 각기 있어줘야 그게 모여서 보석이 줄 되는 겁니다.


하나교회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 들었어요. 두 번째 질문에 헌금문제 나왔어요. 복음을 모르는데 억지로 헌금을 해야 되느냐는 겁니다. 제가 보석 줄 이야기했어요. 보석이 단독행위하면 안 돼요. 헌금할까, 말까 단독행위 안 됩니다. 반드시 보석은 보석 줄에 꿰인 채 보석이 돼야 돼요. 이 보석 줄에 파이프에 바로 예수님의 피가 통하는 겁니다. 그러면 헌금은 언제 나와야 되는가? 피가 통할 때 헌금이 나와야 돼요. 그러면 돈을 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저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월요일 강의에서 했죠. 복음 모르면서 헌금하는 것은 사기단체, 사기꾼이라 했어요. 피를 받는 것이 주는 자도 그렇게 해야 되고. 주는 자도 그냥 돈 내버리면, ‘내가 이 돈 번다고 얼마나 애썼다고.’ 이렇게 돼버려요. 주께서 거저 주신 피가 돈이라는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사실은 핍니다. 내 피가 아니고 주님 주신 것이라고 낼 때 받는 사람이 돈을 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받아야 돼요. 그게 구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하면서 교회에서 소위 없는 척하면서 동정유발하고 하는데 주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복음을 원하는 게 아니고 돈을 원합니다. 그럴 때 복음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피~ 치~. 교회가 엉망 되는 거예요. 결국 교회는 복음 붙드는 게 아니고 남는 것은 부동산 그리고 이 돈 누가 낸 거야? 이 피아노 누가 낸 거야? 결국 처음부터 피를 준 게 아니고 돈을 낸 것이 들통 난 순간들이 오죠. 그래서 보석을 보석되게 하는 것은 관통하는 복음의 피가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교인들이 복음의 피를 통해서 진짜 돈을 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낼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됩니까? 그걸 왜 기다립니까? 교회 머리가 누구신데 자기가 왜 기다려? 교회가 되고, 안 되고는 누가 걱정해야 됩니까? 자기는 조직의 부속품인데 왜 걱정합니까? 네 속의 피만 감상할 문제지 왜 걱정하느냐 말이죠. 걱정하는 게 매우 수상하죠. 맞잖아요. 지가 왜 걱정합니까?


‘목사님, 말은 맞는데 은혜 안 받아서 아무도 헌금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헌금 안 하면 ‘복음에 기뻐하지 않는구나.’라는 그것만 드러났잖아요. 그러면 드러난 것에 대해서 찬양해야죠. ‘주여, 진짜인줄 알았는데 가짜였습니다.’ 이러면 되지 왜 그 뒤를 생각하죠? 처음부터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게 아닐까요? 수상하죠. 대단히 수상하죠.


그러니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께서 매사를 인간의 마음과 교회 오고 안 오고, 헌금하고 모든 것에 친히 다 주님께서 허락 하에서 움직인 거예요. 주님의 허락 없이는 교회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해.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받지 못하는 그 사실을 서로가 다 믿어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될 때 하나님 뜻이 개입했구나를 아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예 내 뜻을 생각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하지만 그것도 자기 뜻이에요. 반드시 자기 뜻을 내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죄 짓는 인간의 이름과 만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일이 표가 안 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찬양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제는 언약구조 안에 들어가면서 찬양이 원망으로 바뀌는 걸 통해서 숨어있었던 그 동안 미처 미발표된 하나님의 이름이 갖고 있던 속성과 요소들이 그 부딪침 속에서 그 틈바구니 속에서 찢어지면서 절구 사이에 콩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주님의 찢겨진 살이 그 틈새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 가운데서 모세가 죽어나는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들이 홍해 건너와서 누구 노래 불렀습니까? 작사가가 누구에요? 모세와 미리암, 모세 가족 아닙니까. 각자 부른 게 아니고 모세가 했던 가사 대로 합창을 한 겁니다. 모세 노래를 불러놓고 모세한테 원망하죠. 예수님을 찬양해놓고 누구한테 원망해요? 그럴 때 또 숨어있는 인간의 나도 모르는 나의 어두운 괴물의 본성이 동행하면서 서서히 하나씩 나오는 겁니다. 그게 언약 관계 속에 맺어진 관계죠.


구체적으로 봅시다. 2절에 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말은 자기한테 힘이 있다, 없다? 없다. 이것도 어려우니까 봅시다. 사람의 힘은 어디에 써먹으려고 힘 달라 합니까? ‘주여, 힘을 주옵소서. 힘을 주옵소서.’ 누구를 지탱하려고? 자기 몸이죠. 자기 몸은 자기 이름이죠. 옆 사람 도와달라고 힘 달라 하지 않잖아요. 날 도와달라고. 내가 있어야 돼.


부활의 멤버들에게 물었어요? 주치의가 당신에게 필요합니까, 옛날에 잘 나갔던 가수 이승철이 필요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승철, 어떤 사람은 주치의 하는데 김태원 씨가 명답을 이야기해요. 나는 주치의가 더 필요하다. 왜? 내가 일단 살아야 그 다음에 이승철과 합해서 히트 칠 것 아니냐. 이게 명답인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남을 사랑해도 주님이 바로 사랑하면 내가 폼이 안 나잖아요. 내 존재의 의미가 없잖아요. 나를 거쳐서 이웃 사랑할 때 이웃 사랑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쓸모 있구나.’ 하고 나의 이름이 폼이 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을 빼고 하나님과 바로 연결시킨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이런 찬송이 나올 수 없어요. ‘주여, 제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주께서는 얼마든지 찬송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보통 믿음으론 못해요. 나는 지옥 가도 좋으니까 제발 내 백성들 구원받게 해달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다고요. 무슨 배짱으로 무슨 용기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우리는 그 말 듣고 두렵지요? 나는 저 말 할 수 있을까? 두렵다는 그런 마음 자체가 우선 나부터 챙겨놔야 다음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또 발각이 된 겁니다.


그래서 찬송이라 할 때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죽든지 살든지 모든 게 주의 것이라는 말씀대로 죽고 사는 것이 주님 앞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엄마. 밥 줘.’ ‘애야. 네가 밥 먹고 안 먹고는 주님 앞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라고 한다면 아들이, ‘엄마. 나 내일부터 학교 안 갈 거야. 학교 가고 안 가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이런 대화가 왜 잘못된 대화냐 하면, 그 가운데서 나 편한 게 최고라는 주님의 지시 없이 내가 나한테 지시할 때 최고의 상태가 뭔가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런 꽁수를 쓰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는 나에게 뭘 제공하고,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는 나에게 어떤 상태에 있게 하겠는가를 평소에 안 놓치고 꼼꼼히 챙기고 있다가 여차하면 주의 뜻이라고 나오는 더러운 버릇이 있지요.


어쨌든 여기 찬양할 때 하나님은 나의 힘이고 하나님은 나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길에 미끄러졌을 때 옆에 집사님이라든지 붙들면 되잖아요. 붙들 수 없죠. 왜냐하면 주머니에 손 넣고 있었기 때문에. 자립적 다하기 때문에 뭐든지. 항상 붙들 준비를 잘 안 하잖아요. 눈길에서 남자들이 당황할 때가 있어요. 여자들이 갑자기 넘어지면 무조건 붙들고 봐요. ‘당신 저 여자와 아는 사이야?’ ‘아니야.’ ‘그럼 왜 붙들지?’ ‘몰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넘어지면 안 되니까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은 완료된 것에 대해서 나의 미완료를 스스로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겠습니까? 왜? 주께서 이런 일을 하셨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된 것은, 크게 쓸게요. 분류작업을 해요. 분류작업을 하면서 분류된 사람만이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만이 분류됨을 알고 저쪽의 애굽 사람들은, 아직도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야. 언젠가 너희들은 우리 손에 죽을 줄 알아라.’ 하고 자기 실패한 것에 대한 보복을 노리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되면 그 자체가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를 특별히 대우하는 거죠.


그러면 이것이 하나의 예언으로서, 왜 예언이라 했어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무기죠. 하나의 예언으로서 개입되겠죠. 그러면 자기 입으로 외쳤던 찬송의 내용대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되면 적들과의 분류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분류작업이 일어나죠.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에게 불뱀이 와서 죽을 사람은 죽죠. 그럴 때 숫자를 세는 이유가 뭡니까? 분류작업에서 떨어져나간 인간들 숫자를 세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끊임없이 분류작업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창세기에 다 구원되는 게 아니고 구원받을 자가 따로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분류작업은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된 곳에서는 현저하게 계속해서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분류작업 이해하면서 오해가 있는 게 뭐냐? 분류작업에서 항상 좋은 쪽으로 구원되는 쪽으로 항상 기본적으로, 무조건, 이유도 없이, 당연하게 내가 포함돼야 된다는 그게 문제가 되죠. 내가 포함되었다 해놓고 본인들이 모세가 시내산 올라갔을 때 애굽의 소를 우상으로 섬기죠. 이게 여호와의 신이다. 오늘날 여호와의 축제날이다. 그러면 분류작업의 기준을 제대로 파악을 못한 거예요.


그 기준이 시내산에서 내려오는데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내려오게 되면 그 언약대로 분류작업 하겠다고 나섰지요. 나서니까 이미 모세 빼놓고는 어떤 인간도 합당한 사람 없었습니다. 왜 모세는 언약에 대해서 포함되었을까요? 모세는 40일 동안 그들과 같이 안 있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죄에 참여하려야 할 수 없었던 거예요. 모세는 시내산 위에서 생명책의 명단을 본 거예요.


그런데 막상 모세도 그들과 동행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 못 들어갈 자의 분류에서 못 들어갈 자의 분류에 들어가죠.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세가 왜 지옥 가요. 변화산에 천국 갔는데. 하지만 기능적으로 분류작업에서 이렇게 하면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감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진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라고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장렬하게 약속의 땅에 못 가죠.


‘너거들 가라. 난 끝났다.’ ‘모세님!’ ‘아니야. 나는 못 가는 거야. 하나님 뜻이야.’ 하고 장렬하게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자기는 탈락하잖아요. 그런데 탈락되고 안 되고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냥 조역을 할 뿐이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만 그런 기능을 할 뿐이죠.


그런데 구약 때는 이렇게 기능적으로 나올 뿐인데 신약 때는 탈락되는 동시에 지옥 가는 겁니다. 왜냐? 신약 때는 모든 인간의 기능을 이미 테스트를 거친 이후기 때문에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기능은 하나의 해보는, 간보는, 쑤셔보는 수준이 아니고 이제는 천국과 지옥의 기준으로 등장하는데 그 마지막 최후의 기준이 새 언약 다른 말로 십자가 피입니다. 예수의 피를 믿지 아니하면 그건 두 번 다시 기능이고 뭐고 없어요.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장차오실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기준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애굽과의 분류작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이스라엘 내부의 분류작업이 주와 함께 동행 하는데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율법이야기, 이스라엘 내부에서 율법이 어떤 분류작업의 기능으로 작용하는가? 그것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계속 이어질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하며 어떤 식으로 살다가 어떤 식으로 주님 앞에 귀환하는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았사오니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간에 주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링크 :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울산/울산 110107b.MP3, Hit:283
 첨부파일 : 20110107b 울산강의.hwp (50.5K), Down:21
게시물9,238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223   화평교회 서버 주소 링크 테스트 1 김대식 07-02-26 8534
6528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 이근호 16-05-09 1003
  홍해의 의미b-출애굽기 15장 한윤범 11-01-21 2656
3044   홍해의 의미a-출애굽기 15장 한윤범 11-01-21 3749
637   홈페이지 정상 운영됩니다.^^ 관리자 07-11-26 3567
2182   홈페이지 장애발생 강구만 10-03-03 4359
124   홈페이지 수정합니다.~ 관리자 06-12-26 12176
142   홈페이지 수정/요구사항 덧글로 달아 주세요~ (8) 관리자 06-11-29 7500
1666   홈페이지 관리자 연락처 강이아빠 09-08-17 3045
40   홈 수정제안을... (4) 정판옥 06-11-29 6654
5008   혼인예식 안내입니다~~~ (1) 우인숙 14-01-25 3121
7329   혼인예식 안내~~ 우인숙 17-09-17 1138
7195   혹시 윈도우xp 쓰시는 분들은.... (1) 구득영 17-06-28 1144
541   혹시 영화 '다빈치코드'를 못보셨다면.... 구득영 07-09-29 3893
957   호세아 아모스 강의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파… (2) 관리자 08-08-10 3542
9093   형상의 변이 20-08-30 13:35 자막설교 김종철 20-09-01 272
8316   형상 지우기 (마 26:14- ) 대전-110강 주향 19-05-31 445
1241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2) 김대식 09-01-23 6150
1190   현재 세계공황인가 그 이유에 대해..... (2) 이성근 08-12-27 3439
6354   현실종교 박상도 16-01-29 895
맨처음 이전 [1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