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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18:20:02 조회 : 3338         
하나교회101104요한계시록-6강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119.148.121.61)
 

하나교회101104요한계시록-6강b-(이 근호 목사)




제 6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4절에 보면 사도요한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합당한 자가 보이지 없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라.” 사도요한이 울었어요. 책은 있는데 그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사람이 없어서 울었다는 겁니다. 안 펴면 되지...ㅎ 뭐 펴야 됩니까? 사도요한이 그 책은 반드시 펴져야 된다고 언급을 하게 된 것은, 그 뒤에 보면,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라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책이 있다면, 책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으로 인봉되어서 아무도 떼지 못한다 이 말이죠. 못 떼게 돼서 사도요한이 울었다 이 말이죠. 엉 엉 엉 엉 울은 거예요. 엉엉 울었다는 말은 자금 사도요한이 속해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이 지금 하나님의 계시 내용과 반대하는 식으로 통치가 되는 식이라 말이죠.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기었으니,” 이겼다는 말은 전쟁이 있었다 말이죠. 이쪽 세계와 이쪽 세계 사이에 전쟁이 있는데, 그 전까지는 누가 이겼냐 하면, 악한 세력이 이겨가지고, 아무도 인을 뗄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마귀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인봉을, 진리를 공개 될 수가 없던 겁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고백하기를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어떤 후손 한 분이 이기셔서 전쟁에서 승리하셔서, 그래서 탈탈 털면서 책을 하나, 둘 드디어 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럼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느 세계에 살았습니까? 진리 아닌  비 진리 속에서 그것이 진리처럼 여기면서 살아온 거예요. 비 진리 속에서 살았는데, 살면서도 우리는 비 진리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고, 누가 오셔서 이겨서 우리로 하여금 건져내줘야 되는데, 이것을 다른 사람은 못하고 메시야 다윗의 뿌리에서 오신 분이 이걸 해줬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봐야 돼요.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냥 넘어가 버리면 우리는 구원 받았다 하고 ‘헤이’ 하고 그걸로 끝나 버려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 말이죠. 다윗의 뿌리라 돼 있잖아요. 그 다윗의 뿌리라면, 그림으로 그리면, 이래 있으면 뿌리가 있잖아요. 다윗의 뿌리. 그러면 열매는 무엇이 열렸다? 다윗이었고 그 뿌리가 자라서 다윗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말이죠. 그러면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 했는데, 다윗이 뭐하는 사람이냐?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는 것부터 할게요. 골리앗을 이겼죠? 골리앗을 이겼을 때 다윗이 무슨 힘으로 이겼습니까? ①번: 돌팔매 ②번: 하나님의 이름 성경에는 뭐로 돼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돌팔매로 나오는 거로 보이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야기 한다.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 했어요. 그런데 이름이 무기가 됩니까? 예? 이름이 무기가 됩니까? 총, 칼, 이런 게 무기가 되고, 사물 이런 차가운 북동쪽이 무기가 되지, 무기란 게 뭡니까? 상대방의 단백질을 압력을 넣어서 단백질을 붕괴시키는 것이 승리가 아닙니까?




그러면 그만큼 에너지가 이쪽 에너지 뭉치가 날아가야 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일이 되느냐 말이죠.




다윗의 뿌리라 하는 것은 결국은 다윗이 승리의 열매가 됐다는 것은, 다윗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하신 거예요. 근데 문제는 우리가 비 진리 속에 살다 보니까, 항상 우리는 힘과 에너지 중심으로 생활했지, 힘이 있어야 에너지가 많아야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이것이 생존을 넘어서서 생명 얻는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하죠. 왜냐 하면, 우리의 한계는 항상 생존 이예요. 생존의 노선을 가다가 생명 노선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우리 육체가 그걸 허용을 안 합니다. ‘나 예수 믿으니까 굶겠어.‘ 이런 것을 우리 육체가 허용을 안 해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부터 배도 안고프고 목도 안 마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그런데 그런 걸 경험한 사람이 누구죠? 모세죠? 모세는 40일 동안에 전혀 목마르지도 않았고 배고픔도 몰랐어요. 침해입니까? 침해예요? ㅎ 그렇지 않죠? 그리고 내려올 때는 보너스까지 받고 내려왔습니다. 뭘 받았느냐 하면, 얼굴에 광채가 났어요. 무슨 화장품을 발랐습니까? 눈부신 화장품을 발랐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효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생명’이 나오고 우리 육체에서는 뭐냐 하면, ‘생존에 대한 몸부림’밖에 안 나오죠.




그래서 생존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에게 복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인다.’하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예.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오죠. 죽기 무서워서 일평생동안 종노릇하는 것이 우리라고 아예 성경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규정을 해놨습니다. 그 규정에서 혼자 빼지 마세요. 그것은 한꺼번에 규정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예요.




생존에 속한 사람은 우리 육신의 욕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더라도 그 궤적(흔적)은 육이 있는 사람에게는 뭐로 보이겠습니까? 육적인 흔적으로 이해 해석이 되는 거예요. 돌팔매 잘 던져서 골리앗이 맞아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까 얘기 했잖아요? 인간이 육체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가 보고 경험한 것이 뭉쳐서 뭐가 됐다 했습니까? 그것은 역사죠. 나만의 역사 또 우리 역사. 역사에서 나오는 것은 역사의 한계성에서 나오는 그런 발취한 걸 근거로 해서 외부를 해석을 해요. 성경이든 어떤 사건이든 해석을 한다 말이죠. 근데 그 사건, 하나님이 주신 그 사건이 육적인 인간으로 봐서는 돌멩이가 날아가서 골리앗의 그 틈새(이마)를 쳐서 이마에 압력을 가해서 넘어진 걸로 보죠.




동방박사가 뭘 따라 왔습니까? 별 따라 왔죠. 별 따라 와서 예루살렘에서 왜 별이 사라졌습니까? 동방박사는 별 따라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따라 온 거예요. 근데 그 궤적은 뭐로 보입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육적인 흔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든 뭐든 들어와 버리면, 이 세상 모습으로 변형돼 버립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어떻게 돼야 ‘주’가 되는 겁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담에 십자가에 죽는다고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예수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달릴 때 강도도 십자가 달렸어요. 뭐를 했냐 하면, 죽기까지 ‘복종’을 한 거예요. 주님은 누구한테 복종을 했습니까? 아버지한테 복종했죠? 근데 아버지의 본체는 뭡니까? 없죠? 이게 없는 거예요. 아버지께 복종한 사람은 있는데, 정작 아버지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럴 가지고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는 겁니다.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름이 서로 통하는 세계 속에 여기 들어와 있을 때, 그 분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어떤 자리를 잡고 어떤 궤적을 남긴다면, 그럴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사태’라 하고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언약사태’라 해요. 하나님의 언약 사건은 언약 때문에 생긴 사건이기 때문에, 인간이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까? 예상 못합니까? 예상 못하죠. 근데 인간이 예상 못한 사건이 일어나버리면, 인간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요? 고 사건을, 이미 일어난 사건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역사로 바꿔버려요.




‘옛날 금식해서 블레셋 이겼어, 우리 또 금식하면 이길 거야. 옛날에 언약궤 밀어붙이니까 저쪽이 물러갔어. 우리 언약궤 또 밀어 붙일 거야. 옛날에 언약궤 밀어붙이니 요단강 건너갔어.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는 저쪽 이길 거야.’라고 역사적으로 해석해 버리죠. 그래서 언약궤 들고 나와서 전쟁에서 완전히 개떡 된 사람 있잖아요? 죽은 사람 있죠?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역사로 자기를 속이기 때문에, 과거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은 꼭 그 기도원 자리를 찾아가요. 돌멩이도 꼭 그 돌멩이에서 하는데. 만약에 신학도 날과 시와 절기를 지켜서, 은혜 받은 그 시점을 찾아 가는데, 문제는 그곳에 이미 그 장소를 누가 선점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벌써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화가 나죠. ‘내 자립니다.’ 그러면 따져봐야죠. ‘당신 언제 이 자리에서 은혜 받았어요? ’98년도에 은혜 받았어요.‘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나 86년도에 은혜 받았어요.‘ ㅎ끝 발이 위에 있는 겁니다. 그 끝 발을 목사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영발이라고, 기 팍 죽여 버리죠. ’ 니 기도 얼마 했어? 니 금식 얼마 했어?‘




이것을 꼬챙이로 팍팍 쑤시는 분이 계시는 분이 누굽니까? 바로 주님이 이 꼬챙이로 그러한 역사를 구멍을 내버려요. 구멍을 낼 때 예상 못한 구멍이 나죠.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요? 사건. 앞에 뭘 붙인다? ‘언약 사건. 언약 사건은 되풀이 됩니다. 되풀이 되는데, 되풀이 되는 그 궤적은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홍해 사건의 출애굽은 그 다음 출애굽에 한해서 홍해가 아닌 다른 걸로 사용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구약의 홍해사건이 있다면, 신약에서는 뭐냐? 죄로부터의 탈출이죠. 처음에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어요. 그러니까 안쪽에는 고기를 먹었고, 그리고 고기를 먹은 사람은 할례를 행했고, 그런 그 당시 사건에 필요한 요건들이 갖춰졌습니다. 근데 지금 유대인은 아직도 그 짓하고 있어요. 뭐 피까지는 안 바르지만, 냄새난다고..양고기는 먹는다 말이죠. 지금도 유대인은 지키니까.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유월절 지키고 하면 되는데, 왜 지금은 하나님께서 못하게 하십니까? 제가 오늘 정답을 분명히 이야기 했는데.....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메시야가 아니니까. 그쪽은 그림자에 합당한 실체가 우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할 거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할 게 있다는 그 사고방식을 없애야 돼요. 우리는 안 해도 돼요. 왜? 대신 하이카가 다 해주니까.ㅎ대신 다 해주신다니까, 우린 그걸 믿습니다. 근데 그걸 믿으려면, 자기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돼요. 사람이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조바심을 내는지 몰라요. 안 해도 된다는 것처럼 힘든 게 없어요. 그러니 이것은 육신으로는 못하고, 성령이 임해야, ‘아! 안 해도 되는구나.’를 아는 겁니다. 고거 3초갑니다.ㅎ




안 해도 된다고 버티다가 환난과 핍박 오게 되면, ‘너무 안 했구나.~ 나도 너무 뻔뻔스러웠어, 너무 심했어.’ 라고 그 다음부터 설칩니다. 그게 로마서 8장 또 어긋나요. ‘환난이나 핍박이 오더라도 누가 너희 사랑에서 끊으리오.’ 또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또 행함으로 설칩니다. ‘전에는 기도를 이렇게 했는데, 이제는 꿇어앉아서 기도 해야지.’ 제가 분명히 했죠? 이 세상이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차이를 없앤다고. 꿇어앉아서 기도하나 그냥 기도하나 찬송하면서 손뼉을 위에서 치나 옆으로 치나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없다 말이죠.




중요한 것은 이것에 의미를 준다는 문제예요. 의미를 주면 그것이 내가 이렇게 풀릴 것이고, 이리 풀리면 누구 영광? 결국은 나에게 돌아오는 반대급부. 나의 영광. 결국은 인간은 자기 영광 챙기는 그 순간 주님의 영광은 눈앞에 보이질 않는 겁니다. 어떤 차이도, 교인 수가 3명이든, 1000명이든 하늘나라는 전혀 차이가 없어요. 다만 인간들의 게임이죠. ‘어이, 어, 동창생 몇 명이야? 570명. 난 590명.’ 이거는 자기들이 하는 월드컵이라니까요. 그들만의 메이저리그예요. 거기 주님이 왜 심판 봅니까? 왜 주님이 인정도 않는 게임에 왜 우리가 말려들어서 자존심을 걸고 거기다가 헛된 세월을 다 보내느냐 말이죠. 주님께서 그런 시합을 붙인 적이 없는데... 목회 크게 하는 시합을 붙인 적이 없어요.




이건 결국 뭐냐? 여기서 울었는데요. 왜? 우리는 나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으로 살 수밖에 없는가? 우는 겁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실체와 진실성을 드러내주시옵소서.’ 다윗보고 하나님 이름 맡긴 게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의 그림자였어요. 다윗의 뿌리입니다. 다윗의 뿌리라? 그러면 사울의 뿌리는 안 되는가? 다윗의 뿌리에서 다윗이란 열매가 맺었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이런 말 어려운데) 어렵지만 들어봅시다.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이 ‘주님 되게 하시는 공정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이 스스로 주님을 양산해 내요. 내가 주님이 스스로 주님 되고 싶어서 깔아놓은 배치물들이예요.




그런데 다윗이라는 열매는 뭐냐 하면, 다윗은 다윗 아닙니다. 다윗은 뿌리가 만든 성령의 열매예요. 다윗이. 다윗은 주님의 열매입니다. 다윗이 요구한 적 없어요. 주님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열매를 그렇게 맺고 싶은 걸 어떡합니까? 우리가 말립니까? ㅎ육의 열매하고 성령의 열매 차이가 주체가 달라서 그래요.




육의 열매는 우리가 주인이고,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하냐 하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그 분이 맺은 열매가 성령의 열매예요. ‘니는 가만히 있어.’ 하고 우리는 가만히 있어 하고 정과 욕심을 못 박아서 나온 열매가 성령의 열매예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은 그 순간 우리는 뭐로 변하느냐? 육의 열매로 바뀌어요. ‘아! 난 온유하네, 왜 닌 온유 안 해? 이게 뭐냐? 육정의 열매예요. 시기하고 질투하고. 성령의 열매라 하는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 돼요.’나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게 성령의 열매예요. 그거는 인력으로 안 되거든요. 인력으로 안 되는 걸 뭐라 했습니까?  ’사건‘ 사건이라 하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 화산 터지듯이 내 안에 구멍이 뚫려 버려요. 이런 것은 예상도 못한 거예요. 우리 역사에 구멍을 뚫어 버려요. 과거에 이렇기 때문에 적어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상 자체를 전부 다 쑤셔놓는 거예요.




자, 여기서 좀 더 어렵습니다. 이왕 어려운 거 계속 어렵게 합시다. 이게 사건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별합니까? 주님은 사건을 일으키는데 우리는 사건을 기다린다고, ‘맞아 사건으로 뭔가 획기적으로 깨져야 돼. 벌써 지나갔는데...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너무 어려워서 설명을 하기도 자신이 없는데, 그냥 해 보겠습니다. 사건이 우리 속에, 우리 역사 속에 사건이 주어지게 돼요.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충실성‘, 다른 말로 하면, ’성실성‘인데, 사람은 자기 역사, 자기 내력, 자기 인생을 꾸미려면, 촘촘하게 자기한테 유리한 건 다 끄집어내야 돼요.




자기 잘난 것, 자기 피해 본 것, 자기 억울한 것, 자기 잘못한 건 다 감추고, 철저하게 충실하게 딱 다듬어야 됩니다. 그 다듬는데 등장한 게 뭐냐 하면, 놀랍게도 '자기는 ’이런 게 기억나? 라고 자기 기억나는 대로 그냥 무심코 해서 충실하게 역사를 다듬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등장하는 부산물이 뭐냐 하면, 바로 ‘주체’라는 겁니다. ‘나 이런 인간이야. 나 이렇게 잘났어, 나 이렇게 슬퍼, 나 이렇게 우울해.  위로 받아야 돼. 나 손해 봤어. 나 이런 인간이야. 동정 좀 해줘.’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주체가 이뤄집니다. 근데 나만 그렇습니까? 타인도 마찬가지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주체에 대해서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주체에 뭘 낸다? 구멍을 내잖아요? 구멍을 내는데 이 주체가 충실하다 보니까, 자기 주체 형성에 유리한 것은 채택하고, 자기 주체와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제껴 버리는 거예요. 마치 바리새인이 바라바를 채택하고 누굴 제껴 버립니까? 예수님을. 바라바는 다시 우리 형제로서 이 사회에 섞여 살아도 무방하지만, 예수란 저 작자는 두 번 다시 우리의 이웃으로서 우리와 함께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사람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가짜로 생각하게 되면, 주님은 좋으신 분으로 늘 우리 곁에 있고 싶죠. 그러나 바라바 체포할 때 현장 사람들은, ‘니도 예수 한 번 당해봐라.’ 그런 말 안하는가. 절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두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 대신 그들은 뭐를 믿었습니까? 예수 안 믿고 그들은 뭘 믿었죠? 하나님 믿었죠. 하나님 믿으면 되는데, 왜 예수 추가로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느 아비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다.’ 라고 했어요. 느가 믿고 있는 신은 악마인데, 너희들은 악마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신으로 본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신과 자기하고 뭔가 통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사건으로 왔으나 채택을 안 해보는 겁니다. ‘에, 당신은 저리 가.’ 예수라는 이름이 듣기 더러워서 채택 한 것이 아니고, 예수라는 이름은, 앞에서 기능이 나와요. 야곱의 이름은 야곱 적 기능,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기능, 요셉은 요셉기능,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기능, 아브람은 틀리죠? 이삭은 웃었다는 기능, 예수라는 이름의 기능으로 나오니까 이 사람이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채택된 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이 흔했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그 기능은 아무나 납득을 하고 이해를 해줄라 해도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내 주체 형성에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채택이 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이런 말씀 있죠? 지옥 간 사람이 묻기를 ‘언제 주님이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안 주었고, 언제 목마를 때 제가 물 안 준적이 언제 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 지옥 갈 놈아. 이렇게 했다 말이죠. 그러면 왜 그들이 왜 물을 안 주었을까요? 탐탁지 않기 때문에. 자기 주체 형성에 전혀 보탬이 안 되거든요.




거짓 나사로를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품에 안깁니까? 왜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왜 못 본받았을까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부자는 거지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요? 질문 하는 내가 나쁜 놈이죠..ㅎ 부자의 주체가 뭡니까? 나는 항상 부자이어야 되는데, 왜 부자여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가난한 것보다 부자를 왜 좋아할까요? 그걸 제가 묻고 싶어요. 왜 좋아합니까? 학생 왜 좋아하죠? 문제가 너무 어려워요? 왜 사람은 가난을 싫어하고 왜 부자를 좋아할까요?




부자는 어렵게 말해서 ‘주체의 잉여’ 또는 초과분. 25억 갖고 있던 사람이 20억 돼 보세요. 기분 더럽습니다. 25억 갖고 있을 때 자기 주체는 뭐였습니까? 나는 적어도 25억은 유지돼 줘야 나다운 거예요. 근데 25억 되었다가 주식이 폭락되어 20억 되면, 뭡니까? 자살까지는 안 해도 술 퍼먹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5억 가졌다가 25억 됐을 때 좋아서 나자빠집니다. 드디어 나는 뭐가 됐다? 드디어 원했던 부자 되었다. 부자가 뭐냐? 초과분이라 하고 주체의 잉여분. 주체의 잉여분은 내 노동의 댓가 보다 더 예상외로 더 주었을 때, 이것을 그들은 뭐라? 축복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처럼. 이걸 축복으로 본 거예요. 그럼 한국교회 축복은 그 성질이 어느 성당과 연계돼 있습니까? 이 지상에 있는 세속적인 선과 같은 노선이죠. 선이 이탈되는 것이 아니고, 축복이란 그 속성을 탁 깨보면 뭐가 있습니까?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복이라고 여기는 것들과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동일하게 돼 있죠.




이거 한 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행하셨죠? 오병이어. 어려운 말 했습니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사람들은 축복했다 했죠? 그런데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잠시 화장실에 갔다 합시다. 자, 남자들 5천 명씩 앉아. 자 이제 빵 줄게. 아이고, 나 화장실 갔다 올게. 하고 빵 나두고 화장실 간 사이에 5천명에게 배불리 먹였습니다. 예수님 안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궤적은 뭘까요? 뭐가 중심이 될까요? 눈에 보이는 게 뭘까요?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어린아이의 그 도시락이 하나님 앞에 아주 가상한 진짜 값있는 헌물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겠죠? 뒤늦게 주님이 오셔가지고 뭐하고 있노? 먹고 있네. 아이고, 주님보다 애의 희생하는 저 마음이 월등합니다. 할거예요.




인간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가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잉여, 초과분, 나보다 더 초과분 그것을 찾는데, 그 찾는 방법이 뭐냐? 납득이 되는 식으로 궤적을 찾기를 원합니다. ‘역시 우리는 동전 하나라도 어린 주일학교 헌금 무시하면 안 돼, 왜? 그것이 큰 이적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하고 복 받는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조차도 해낼 수 없다고 우리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죄인입니다. 아! 정말 성질납니다.




여러분! 구원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와요. 왜? 하면 할수록 그것이 내 주체가 개입하기 때문에. 주체라 하는 것은 첫 번째 사건의 개입이고, 두 번째는 충실성입니다. 개입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다지고 다져요. 1998년도에 이 자리에서 내가 은혜 받았다고. 그건 잊어버리지도 안 해. 노상 방뇨한 것은 생각 안하고...ㅎ 그걸 잊어버리지 않아요.




사람이 살고자 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은 남을 밀쳐야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밀치고 싶지 않더라도 저쪽에서 떠밀어요. 사기를 당해봐야 사기를 치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사기를 칠 리가 있습니까? 사기를 당했으니까 복수하느라 엉뚱한 사람에게 사기 치듯이. 밀어 줘야 밀리고 하는 이 시대에, 버스 타봤잖아요? ‘어이구, 미안합니다. 뒤에서 미니까, 차가 흔들리니까. 우리는 같이 흔들리는 거예요.




다 같이 이 세상은 노동하지 않더라도 초과 잉여분이 주어지는 것이 축복이라고 우리가 다 같이 그렇게 습득하고 납득하고 교육받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 언어개념, 이 의식개념에서 이탈되면 이단 돼요. 그런데 그 게임과 룰(rule)을 하나님이 인정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인정한 적이 없어요. 그걸 인정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주님께서 어떻게 왔습니까?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의 게임에 동의했습니까?  뭐 거룩한 헌물 요? 주님께서 뒤집어엎었어요. 이것도 헌금이냐? 다 찢어버렸어요. 거룩한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헐어라. 성전 헐어라. 헐면 내가 사흘 만에 지을게. 사람들 머리 계산하고 머리 굴립니다.’자, 헐면 지금 어디서 회비를 모아서, 혹은 어디서 일군을 모아서 46년간 지어도 못 지는 이것을 어디서 크레인 와서 어떻게 지을까? 또 인간의 육적으로 납득이 되는 식의 납득되는 식의 속도나 스피드가 나는 식으로 사흘 만에 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짓는 방법은 뭐냐? 바로 고따위 생각 때문에 죽는 그것이 주님 짓는 방법 이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방법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반드시 너희들이 납득이 되는 그것이 계속 그것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고 죽에 만들고 못 박고 못 박아서 그것을 주께서 살려내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다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한(한번 보세요. 어렵습니다) 어린양이 하나님의 계시를 연다는 말은, 결국 안에 있는 계시는 무슨 중심으로 해석해야 맞다? 주 예수님이 왜 죽었을까를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을 해야 그게 그 해석이 진짜로 납득이 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열어야 성령 오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안쪽에 있는, 모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예수님 십자가 어린양이 왜 죽었는가. 중심으로 해석을 해야 그게 정답이라 말이죠. 그 정답은 정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정답 때문에 사도요한부터 모든 사람들은 그 뒤에 보면 순교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순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제가 첫 번째 강의 했잖아요? 연어가 폭포수를 올라가는 것처럼, 오르는 과정 이예요. 왜 죽는 사람,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복음을 바라본다고 정신없이 살다보니까 죽게 된 거예요. ‘하나님, 나 죽습니다. 나 고생하죠? 이래 죽어서 천당 간 사람 없어요. 나는 뭘 해도 순교해도 죄인이니까, 주님 십자가 보다 보니까 순교 자리에 올라간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보면, 24장로예요. 24장로의 자리 배치를 보세요. 이건 간단하지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보세요. 24장로가 4줄, 4줄, 4줄,4줄,4줄,4줄, 이렇게 앞을 향하여(골든 벨 예능프로에서처럼) 24배치가 어떻게 됐어요? 어린양을 중심으로 전부 다 나란히 봤습니까? 어린양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있죠? 뭐를 봅니까? ‘어린양’ 이 말은 예수님과 우리와 관계있다? 없다? 관계있다 말이죠.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기능적으로 표현하면 뭐가 돼요? ‘어린양’이죠? 앞에 뭐가 붙죠?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왜 쳐다봅니까? 왜 쳐다봐요? 죽으면 죽었지 왜 쳐다봐요? 납득이 된다 말이죠. 비로소 이게 이해가 된다 말 이예요. 왜 죽었는지. 죽음의 원인 제공자가 누굽니까? 바로 나 아닙니까? 저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식이예요.




저는 분명하게 이것을 지금 이 지상에서부터 궤적을 남기자 이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어린양을 세우고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말이죠. 복음을 전하면 거기에 나와 내 인생 전부와 관련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게 이미 지상에서 또 이미 주님의 끊어지지 않는 관계 때문에 산 사람 됩니다. 죽어서 가는 세계가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서 산체로 주님께 가는데, 그걸 육의 사람들은 순교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지껄이죠. 저 사람 죽었어. 예수 믿다가. 본인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자죠. 주무십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 했잖아요? 자는 사람 깨우면 기분 나쁘다고. 이미 주 안에서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잠자고 있습니다. 여기 남편 옆방에 자고 있으면, 남편 혹시 지금 어디 갔습니까? 죽었습니다.,ㅎ 뭐라고 합니까? 잔다고 하죠. 다른 말로 그 분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래 되죠. 인구조사 한다고 딩동 하고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 죽었습니다.‘ 아니죠? 아버지 주무십니다. 아버지가 늘 주무시지 않지만...




이러한 사고인식의 변화, 그것은 뭔 뜻이냐 하면, 일종의 고집인데요. 나는 세상에서 조립된, 세상의 육이 그동안 나에게 알려준 그 기준을 따르지 않겠다. 나는 비로소 성령이 와서 예상 밖의 하나의 사건으로서 주어진 그것을 보겠다. 그럼 진짜 사건은 논리를 따져 보세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셨죠? 여러분 속이는 거 아닙니다.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셨죠? 죽은 척 한 것 아니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죽음한테 못 이기죠?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죽음에게 못 이기죠. 어느 인간도 죽음한테 못 이기죠? 자기가 이기면 자기가 알아서 구원 받으면 되지만, 아무도 못 이기죠.




그렇다면 죽었다가 사신 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해 버리면, 우리는 이 안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느냐 하면, 죽음보다 더 센 힘이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사신 힘이, 현재 내가 꼼짝 못하고 있는 죽음보다 더 세게 작용함을 알겠죠?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오는 하나의 궤적 이예요. 변화입니다. 이렇게 변하게 되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죠? 예수를 믿는 자는 죽었다가 사신 자를 믿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를 믿는 자는 자기를 믿지 않고, 죽었다가 사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함이라.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여기에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예수님에 영’에 의해서 살아난 사람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행함은 계속 뭐가 됩니까?  계속 죽어있어야 주님의 영이 계속 살려줌이 바깥으로 증거 되겠죠? 그렇다면 죽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선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근데 개혁주의 신학에 뭐라 하느냐 하면, 옛날에는 우리가 죄 때문에 율법을 못 지켰는데, 성령 받고 나면 율법이 요구를 이루자는 거예요. 율법의 요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냐 아니냐 하는 그 기준은 우리한테 하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 양심과 선악과 따먹은 양심 전하는 게  아닙니다.




뭐가 나쁜 짓이냐 하면, 행함이냐 행하겠다는 것이 나쁜 짓인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고, 행함으로 잘하면 될 거 아니냐는 거예요. 그게 선악 구조예요. 예수 믿고 착하면 되잖아. 술 끊으면 되잖아.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궤적입니다. 우리 육적 궤적. 죽은 자가 뭘 합니까? 자동차 사고에 대해서 뭣도 모르는 게 자동차 사고 처리한다고 더 사고내지 마시고,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해 주잖아요? 우리는 거듭났다는 우리가 왜 행하면 안 됩니까? 우리는 뭐가 아니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또 벌써 여덟 번째..ㅎ




우리는 메시야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메시야가 해줘야 은혜로부터 은혜로 마감되는 겁니다. 왜 은혜로 했다가 중간에 행함으로 빠집니까? 그런 것은 유대인이 그랬고 바리새인들도 구원 받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고, 홍해 갈라져서 구원받고, 그 담부터 구원받고 난 뒤에 영광 돌리는 것은우리가 알아서 행해서 구원받는다. 이렇게 가르친 거예요. 근데 그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거예요. 왜? 그들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맥락이 같은 예수 믿기 전의 그 맥락과 예수님 만으로의 그 맥락이 같이 연결 되리라고 그렇게 이해한 거예요. 그래 이해가 돼 버리면, 현재 있는 주체가 잠시 흔들렸다가 내 이 주체가 그대로 가요.




그런데 주님의 사건은 뭐냐 하면, 우리가 살아있다는 우리를 구멍을 내버리고 죽게 만들죠. 죽어버리면 여기서 구멍이 나서 찢어지죠. 그러면 우리 주체는 요 가장자기에 임시적으로 형성됩니다. 이게 24장로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어디를 들여다보느냐 하면, 요걸 들여다보죠. 옛날 이거 내가 있던 자린데, 어! 구멍이 났네.  쳐다보니까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의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은 반드시 모습이 아니고 눈에 띄는 게 아니고, 반드시 뭐로? 기능적으로. 그 기능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죽어도 내가 살아서 너와 함께 있는 거야. 더 이상 너는 이제는 죽은 사람이 아니고 내 안에서 산 사람이야. 독자적으로는 죽은 거지만 내 안에서는 산자야. 너가 죽는 것은 자는 거야.








이러한 성경에서는 보통 이런 뜻이죠. 그러면 우리는 쳐다보죠. 한시적으로. 여기서 쳐다보고, 오후 2시에 여기서 쳐다보고, 오후 4시에 쳐다보고, 한 자리에 머물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 주위의 있는 다른 일들이 변화를 해서 우리는 자꾸 왔다 갔다 해요. 애 아프다 하니까 병원에 갔다가 다시 와서 보고, 상대방 보고 좋다고 까불다가 와 보고, 이래 봐요. 우리는 가장자리를 도는데, 한평생 걸립니다. 항상 사람이 예수 믿는다 할지라도 주님 생각 안 해요. 바빠요. 예배시간에 ‘예, 예, 그거 안 되고요. 3개 5천원(전화 받는 소리). 예 알겠습니다...ㅎ 바깥에 3개에 5천 원 할 때, 이 사람은 장사하잖아요? 그러면 이거 자기의 장사니까 그럼 자기의 주체가 무슨 꾼? 장사꾼. 장사하다 말아먹으면 백수가 되겠죠. 그런데 백수와 장사꾼이 이 사건에서는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은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차이 없게 구원 하시는 겁니다. 어떤 차이가 없이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24장로가 직업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다 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데, 일체 직업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임할 때는 직업 보고 임하는 게 아니에요. 창녀다 깡패다 고려하지 않고 임해버립니다. 성령이 임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뭐냐 하면, ‘나는 이래서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주체가 이런 가스(라캉이 이렇게 지었는데)가 구멍 난 주체가 되죠. 구멍 난 주체를 가지고 공백이라 하죠. 나중에 이걸 집합론하고 연계해서 수련회 때 설명을 할 것이고, 공백이 들어와 버리면, 이 공백 안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나옵니다.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칠 때 그 담부터 다윗 주변 사람들은 다윗을 뭐로 봅니까? 골리앗을 이긴 대단한 소년 되게 했잖아요. 그러면 다윗이 그 주체를 사용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수용을 안 했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할 때, 다윗은 그걸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런 사건을 인하여 점점 더 고난 받죠? 고난 받으니까 시편 22편에 뭐라 합니까? 놀라운 이야기 나오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왜 다윗이 하나님을 믿는 자가 버림을 받는 모습입니까? 그것은 주체에서 나오는 은혜가 뭐냐 하면, 장차 올 메시야가 우리 죄 때문에 담당해야 될 고난이 이 분화구를 통해서 터져 나오니까, 그 가라앉았던 것이 옴팡 다윗에게 씌워진 거예요.






성령이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우리가 본의 아니게 십자가 길을 가도록 옴팡 뒤집어 씌워집니다. 그럴 때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목자시니, 그 담에 뭐가 없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재산이 얼마쯤 됩니까? 얼마 있기에 부족함이 없어요? 예? 자기에게 딸린 군사가 몇 명인데 부족함이 없어요? 저쪽은 엄청난데, 수십만인데 이쪽은 오백 명 밖에 안돼요. 왜 부족함이 없어요? 어떤 선 위에 올라가야 부족함이 없어요? 그 선은 뭐가 있어야 결정한다? 아! 오늘 강의 잘 들은 사람은 아는데? 뭐가 있어야? 주체, 주체. 빵꾸  난 주체에서는 내가 이렇게 빵꾸 난 자체가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왜? 고 다음 차례가 뭐냐? ”내 잔이 넘치나이다.“ 넘치지만 그 사이 가는 길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때리시는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상을 차리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까 이야기 했죠? 축복이 뭡니까? 하늘나라의 잉여, 초과분. 아무것도 행함도 없는데, 세상에 생명나무 있는 낙원에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지옥가지 않고 살다니...이거는 완전히 덤태미로 이거는 탱 잡은 겁니다.‘ 라는 고백.




그것이 바로 그 맥락이 성령을 받은 다윗의 뿌리나 다윗이나 우리나 공통점입니다. 다 같이 어린양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24장로 앉는 자리에 앉아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남들보다 주체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적어도 저 정도라면 이 정도 돼야 된다는 아직도 강렬한 주체의식이 있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아서 저 피가 누구 땜에 흘린 핀지를, 저 죽음은 누구 땜에 죽은 죽음인지를, 그로 인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서 공짜로 구원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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