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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4 22:17:52 조회 : 3420         
하나교회101202요한계시록-7강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119.148.121.61)
 

하나교회101202요한계시록-7강a-(이 근호 목사)




제 7강a




우리가 오늘 강의 해야 될 곳은 요한계시록 6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6장에 관한 내용을 보게 되면, 6장 전체가 인을 떼는 첫째 인, 둘째 인, 이렇게 인이란 도장을 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하나하나 첫째 인 둘째 인을 뗄 때마다 일어나는 낯선 현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을 하나 뗄 때마다 있다는 말은 그럼 떼기 전에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났다는 뜻이죠? 여기서 일곱 인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개 이걸 떼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을 떼 가지고 인을 떼버리면, 첫째 인을 떼버리면 그 자체가 첫째 인이 없게 되죠? 첫째 인을 떼서 어떤 현상,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 사건을 가지고 뭉쳐서 첫째 인으로 되돌릴 수 있는 그런 입장은 못 됩니다. 첫째 인이 있을 때는 아직 둘째 인, 셋째 인에 대해서는 아직 떼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나오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죠? 근데 둘째 인을 막상 떼버리면, 더 이상 첫째 인, 둘째 인은 역사 속에서 있을 수 없죠. 물을 엎어버리면 되 담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섯째 인을 떼면서 이 전체가 1,2,3,4,5,6,7 전체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돼버리죠? 이렇게 물처럼 돼버리면 여기에 대해서 누가 저항한다든지, 반발한다든지,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 미쳤습니까? 왜 이리 난리를 치십니까?’ 라고 말릴 수 있는 일들은 아니죠? 우리 인간이 나서서 말릴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보통 세상일은 인간이 행사하고, 인간이 계획하고 프로젝트 꾸미고, 자기가 일을 수행해서 자기가 거기서 조그마한 결실을 맺는 것을 가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는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건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물을 엎지른 이상 인간들이 주워 담는다고 해서 이게 달라질 게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섯 째 인 자체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창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손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막 시작하면서 분명히 정리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창조의 원리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죠. 못 벗어나는데 왜 우리가 고민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만사가 주의 뜻대로 되는데 왜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구태여 고민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특히 두려워한다는 이것은 뭔가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을 한 게 아니에요.




제가 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는데, 안산에 계신 분이 전화를 했어요. 지금 안산에 있는 교회에서 어떤 예언자가 나타나서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어쩌면 좋겠느냐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것은 관심사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소유가 없어 질까봐 내 것이 깨어질까봐 겁을 내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이야기가 안 일어났으면, 오늘 본문과 관련돼 있습니다. 전쟁의 소리가 안 일어났으면, 자기가 마치 믿음이 좋은 척하고 있었는데, 전쟁이라는 것이 유발되니까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도 관심 없고, 오직 우리는 ‘내 것 손대지 마라. 내 것 갈구면 안 돼. 내 것은 없으면 안 돼.’ 여기에 연연한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1,2,3,4,5,6,7을 통해서 일으킨 게 뭐냐 하면 전쟁과 같은,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잖아요. 사건을 일으켜 보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본색이 나오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실 때는 어떤 인간도 창조의 원리 밖으로 못 나가게 돼 있어요. 갇혀 있는 겁니다. 가마솥이죠. 여러분 가마솥 아십니까?(가마솥 누룽지) 가마솥 손잡이. 우리 집에 있었거든요.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요. 어린애가 이걸 들다가 미끄러지면, 발 다치고 큰일 납니다. 이 가마솥 안에 버글버글 끓고 있는 거예요. 이 솥 안에 있는 것이 창조의 원리예요. 창조의 원리 속에 인간은 갇혀 있습니다. 자기가 여기서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이 그것이 뚜껑을 열어 제낄 수 있는 힘이 되지 못돼요. 염려하든, 걱정하든, 두려워하든, 우리는 창조의 원리 속에 포함돼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2,3,4,5,6,7, 8도 아니고 9도 아니고 7로 끝나버렸어요. 1234567안에 들어있습니다.




여리고 성 돌때 몇 바퀴 돌았습니까? 일곱 바퀴 돌았죠? 여덟 번째 바퀴가 없어요. 첫 날에 한 바퀴 돌고, 두 번째도 한 바퀴 돌고 마지막 날에 일곱 번 돌았습니다. 일곱 번 돌았다는 것은 여덟 번째 바퀴, 아홉 번째 열 번째 바퀴는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여리고 성 무너지는 것도 창조의 원리 속에 포함돼 있고, 그걸 무너뜨리고 들어가야 될 너희들도 너희들이 원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원리 따라 때가 되매, 무너져야 되고 때가 되매 인수인계를 해야 되는 겁니다. 여리고 성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7’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거예요. 그 여리고 성 돈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리고 성이 이래 있다 말이죠. 하루에 한 바퀴 돌았는데, 하루, 이틀, 삼, 사 오,육 일곱 번 째 날에 몇 바퀴 돌았어요? 일곱 바퀴. 합치면 사실 열 세 바퀴인데, 그게 의미가 없다 말입니다. 여기 하나, 둘, 셋, 다섯, 여섯은 한 바퀴 돌았고 일곱 번 째 돌았다는 말은, 여기에 있는 시간, 123456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그담에 일곱 번째 하나 여덟 번째 하나해도 이것은 별 의미가 없고, 마지막 일곱 번째가 앞에 있는 123456를 총괄해서 이것을 흡수시켜 버리면, 이 날짜라는 게, 6일이라는 시간이, 시간은 반드시 어떤 완성을 내다보고 6이라는 시간이 밑에 먼저 깔렸다는 겁니다. 7일째가 없으면 123456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달리 말하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현재를 잡아당기고 과거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마지막 날에 땅기는 힘이 오늘날 우리를 살게 하는 거예요. 2010년 2월 2일 날은 2010년 2월 3일에서 땅기는 힘에 의해서 이미 존재하고, 3일은 4일로 존재하고 5일은 6일로 존재하는데, 이러다가 시간 다 보낼 수 없고, 마지막 모든 시간의 의미를 완성으로 종결시키는 그날이 있고, 그날에서 회수하듯이 잡아당기니까 그 전의 세월들, 12월 2일이 존재돼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12월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되면, 전부 다 철거가 돼 버리죠. 이거 없어지죠. 다 없어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은 여기 한 바퀴 돌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6일을 거쳐 왔던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마지막 7일을 7이라는 숫자로 강조한 마지막 일곱 바퀴를 돌게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여리고 성은 접수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성에서 얻은 노획물, 보물은 누구 손에 가야 돼요? 하나님께로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간이란 사람은 그것을 자기가 쳐들어갔다고 누구 몫으로 조금 떼 냈습니까? 자기 몫으로 떼 내 가지고, 그담에 아이 성 칠 때 피 봤잖아요. 어딜 감히 손을 대?? 그럼 내 몫은요?? 우리는 ‘하나님, 제 몫은요? 우리는 무슨 용이냐 하면, ‘소비용’입니다. 우리 것을 점거(축적) 하는 용도가 아니라 소비를 해야 돼요.




제가 지난주일 중고등부 설교할 때 이런 설교 했어요. 중등부 설교하면 기뻐요. 매주를 못하니까... 애들이 나와야 하죠.ㅎ 가끔 나오는데 기쁜데... 전도서를 하는데 전도서 내용이 이겁니다. 짐승하고 사람하고 차이점 없다. 왜? 다 같이 흙으로 돌아가니까. 그 대목이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렸죠. 남자, 여자 그리고, 남자 여자는 지금 애들 보기에는 남자 여자가 다른 것 같지만, ‘통통 한번 두드려봐라.’ 그러면 거기서 흙 소리 난다. 남자같이 생긴 흙이고, 여자 같이 생긴 흙인데, 나중에 우리가 다 소비되고 다 깨지면 둘 다 흙이라는 무덤으로 변해버린다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개 무덤이나 고양이 무덤이나 인간의 무덤, 다 같이 흙으로 돌아가는데 차이점이 뭐가 있는가? 차이점이 없는 거죠.




차이점 없음을 우리가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겁니다. 왜냐하면 개나 소는 그걸 모르잖아요. 자기가 흙인지 모르지만, 인간만큼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흙 맞습니다. 죄 지어서 흙으로 돌아감이 마땅  합니다.’ 라고 유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어요. 그런 점에서 인간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마귀하고 싸울 때 개하고 싸우라 하지 않았잖아요. 인간 우리를 통해서 뱀의 후손과 싸우라 했기 때문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이런 뜻 속에서 다 이뤄지는데 그 뜻을 가지고 창조 원리 속에 인간은 갇혀 있다 이래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적어보면, ‘인간은 창조원리 속에 갇혀 있다.’ 솥뚜껑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소비용이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것은 너무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이고 주제를 모르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흑 흑 흑 우는 게 맞아요. 흙이기 때문에, ㅎㅎ 이거는 개그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개그인데 한번 해봤습니다.ㅎ 운다는 자체가 아직도 창조원리 말고, 딴 원리가 자기의 시간 속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234567, 7 그 위에는 없습니다. 7일 동안 창조했기 때문에 1234567말고는 없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겨난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해 보면, 123456은 7에서 당기게 돼 있어요. 1은 2를 위해서 2는 3을 위해서 쭉 당기다가 여기에 전부 다 모아지면 없어지는 겁니다. 123456이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인류의 역사라는 겁니다. 7 여기를 위한 123456이 되죠. 그럼 여기는 7,1~6에서 창조원리는 하나의 바퀴가 되어서 123456 바퀴가 되어서 굴러가는 거예요. 계속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굴리고 자꾸 굴러가는 거예요. 온 천지에 세상에는 계속 이 원리가 돌아가는 겁니다.




1234567, 1234567. 그러면 1234567을 돌려버리면 여기서 또 뭐냐 하면 1234567이 나올 텐데, 여기 7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1234567 안에서 또 7이 나와야 돼요. 7안에서 7이 나온다 말이죠. 또 7이 되면 7안에서 또 1234567이 나와요.


123456⑦→123456⑦→123456⑦→123456⑦→123456⑦→






그래서 7인, 7나팔, 7대접인데, 전부 다 7나팔과 7대접 연결 부위가 123456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바로 7과 연결돼 있죠? 그러면 7이 없으면 234가 자기가 2인지 3인지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모르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그냥 살아요. 그냥 시간 때우면서 살아요. 취직해서 그냥 돈 벌고 자식 키우고 늙으면 노인정에 놀다가 그냥 죽고,  누가 잡아당기는 사람도 없고 인생이 왜 사는 것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7이 없으면, 1도 없고 2도 없고, 3,4 이건 운동회 때 가끔 붙이는 거지만, 그런 거 모른다 말이죠. 7이 딱 등장하매 소급해서, ‘아하, 나는2구나~ 3이구나~ 4구나~ 이걸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런데 7만 되면, 123456 전체가 인류의 행함의 역사로 바뀌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은 7 때문에 소모용으로 이게(123456)있어줘야 7하나 성립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7로 완성하기 위해서 결국은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이용한 겁니다. 아이, 하나님 못 됐죠? 우리가 힘들고 울고 웃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완성의 의미를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사방놀이가 되는 겁니다. 사방놀이 알죠? 하나님께서 사방놀이처럼 던져놓고 마지막에 회수해 가면서 모든 것이 창조원리 따라 빈틈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7안에서 모든 게 된다면, 이 7이 갖고 있는 내용이 뭐냐 하는 데서 세밀하게 되면, 7에서 또 123456이 나타나요. 그러면 7을 세밀화 시키고 이걸 구체화 시키고 나오다가 또 7되면 또 7나와요. 그러면 이것이 또 구체화 되고, 점차, 점차 7에서 7로 진행되면서 뭐가 점차 나오느냐 하면, ‘천국’이라는 윤곽이, 새 예루살렘 윤곽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동시에 뭐가 소멸되느냐 하면, 이 좋던 것,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돈 많은 세상, 금은보화가 가득한 이 세상은 점점 더 뭐로 끝납니까?  점점 더 쓰잘 데 없는 쓰레기로 변하는 그런 흔적을 보여주죠.




마지막 천국을 위해서 쭉 지나가면서 여기 처음에는 ‘ 이 세상없이는 못 삽니다. 우리는 이거 없이는 굶어 죽어요.’ 하던 것이 점점 더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오게 되면, ‘아하 천국이 있는데...’ 가볍게 이 세상을 포기해야 된다는 그런 식으로 인도 받게 되죠.




자, 이건 서론적으로 했고,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해 봅시다. 하나 정리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창조원리 안에 갇혀 있다. 갇혀 있기 때문에 창조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의 장치로서 여러 가지로 등장했어야 했다. 이렇게 이야기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7인을 떼는데,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요한이 울었잖아요? 7인을 뗄 사람이 없어서 울었을 때, 이 뗀다는 게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안에 어떤 인물이 있는데, 여기에 양파 껍질이 있다 합시다. 양파 껍질이 있는데 양파 껍질을 쪼개보면 제일 겉에부터 1,2,3,4,5,6, 요거 안에 7, 양파 껍질을 이렇게 벗겨보면 사실은 아무것도 안 나오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껍질을 하나 탁 벗겨보면 점점 더 어디에 가까워지냐 하면, 이 역사의 주인공 되시는 어린양에게 접근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요한계시록 어떤 주석, 어떤 책을 봐도 양파 껍질 안의 예수님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으로 봐요. 7인, 7나팔, 7대접, 그래서 무슨 역사? 구약의 여기는 로마의 네로황제가 어떻고, 어떻고  이래 이야기 한다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 돼 버리면 우리가 만약에 이 시대(앞부분) 와 버리면 이 시대는 모르게 되죠. 왜? 이미 지나갔으니까. 이미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앞으로 남은 시대만의 프로그램만 잘 눈치 채어 바짝  고 때만 잘 견디면, 천국에 쏙 들어간다는 고런 식으로 제공한 겁니다.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할 때 이렇게 시간적 개념으로 보는 것은, 이것은 인간 몸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인간은 말할 때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기의 주체를 확인하는 습성이 있는데 인간이 원래 그래요. 내가 나이 몇 살이며, 나는 어느 동네 산다. 그 자기의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자기의 주체를 다듬어 나가는 식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시간 개념이 있으니까, 인간의 시간 개념이 뭐냐 하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거든요. 흘러가는 인간에다가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니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아하 하나님이 내가 납득이 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계시를 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잘 하나님의 계시를  시간속의 배열( 중국사람 마작하듯이)로 딱 순서대로 1234 포카 하듯이 스트레이트 숫자놀이 하듯이 딱 맞춰 가지고 딱 맞추면 ’아하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드디어 소화했으니까, 나는 피할 건 피 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면, 구원되겠다.‘라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교회 2000년 역사의 요한계시록 주석이 다 그래요. 다 엉터립니다...ㅠ 전부다 엉터리예요.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구원용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 받고자 할 때는, 반드시 왜 내가 갇혀 있나 이유를 알아야 돼요. 내가 어디에 갇혀 있는가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가서 왜 우리는 갇히게 되었는가? 죄에 갇히고, 율법에 갇히고, 마귀에게 갇히고, 죽음에 갇혔는가? 저주에 갇혔는가? 왜 갇혔는가. 이유는 모르면서 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자체가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가? 왜 산다는 것 자체가 이 이렇게 허망하고 어려우냐 말이죠. 근본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근본을 모르게 되면, 구원받는 방식도 제각각 지 맘대로 예요.




무엇 때문에 갇혀 있는가를 안다면, 진짜 아신다면, 여러분들은 ‘나 구원 포기할래,’ 이 말이 나와야 됩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한다고 구원될 수 없는 지경으로 갇혀 있구나. 라는 것을 알고 포기하세요. 자기 구원을 포기해야 됩니다. 자기 구원을 포기해 줘야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게 의미가 나타나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고생이 많았죠? 그들은 뭘 몰랐느냐 하면, 왜 우리가 고생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왜 고생하는지는 모르고 몸은 되게 고단하고 힘들고 꼭 우리들 같아요.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같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살기 힘든지, 몸은 왜 이렇게 피곤한지 이유도 모르고 어쨌든 짜증은 나고, 왕짜증!!, 짜증  나고 이유는 모르고 갇혔는데 나오지도 못하고 , 그것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왜 갇혔는지 이유도 모르고 다만, 이 고통에서 면제만 해 달라고 그렇게 닦달내고 안달을 내는 겁니다. 모세 아론 붙들고 그렇게 요구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냥 빼주지 않았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렸죠. 그 10가지 재앙 중에서 1~3번째 재앙은 이스라엘백성과 애굽 인들이 같이 얻어맞아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6인이고, 같이 얻어맞아야 됩니다. ‘니도 구원 없어.’ 같이 얻어맞는 겁니다.




얻어맞으면서 그 가운데서 4~10번째 재앙까지는 고센 땅에 사는 히브리인들과 애굽 땅이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애굽 인들은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재앙을 안 내렸습니다. 이미 하나님 쪽에서 구분 했습니다. 뭔가 조짐이 있습니다. 니들만 특별 대우한다는 조짐이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7나팔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어린양 딱  고 난 뒤에 저쪽의 장자들을 다 죽여  버리죠. 애굽 나라 자체를 통곡으로 몰아넣습니다. 그게 7대접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렇게 연결시키니까 여러분 뭐 떠오른 거 없습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이 양파 껍질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어린양을 가로막는 썩어빠진 양파 껍질을 하나, 하나 뜯어낼 때, 점점 더 어린양의 윤곽이 드러나죠? 뜯어내야 돼요. 뜯어내는데 뜯어내는 힘은 바깥에서 뜯어내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께서 발길로 차는 거예요. 발길로 차면 바깥 껍질부터 떨어져 나가죠. 발길로 차는 것이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꺼져, 저리가. 인간들은 저리가.’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밀쳐내시는 주님이란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사랑 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오라고 하는 것만 생각하지, ‘저리가. 나 니하고 안 놀아. 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 해. 저리라. 니가 언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어디 있느냐?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 안하잖아요. 평소에 우리 24시간 누구 영광 생각합니까? 내 영광. 하나님의 영광 돌릴 마음이 아예 없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싫어하면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는 이거 구원해 달라고 닦달하고 대들고 말이죠.




하나님께서 추방시키는 하나님! 밀어내시는 하나님! 떨쳐내시는 하나님! ‘저리가. 꺼져. 너 싫어. 싫어.’라고 떼어내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셔야 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정말 이걸.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왜 몰라요?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런 걸 이야기 안 하죠. 그저 사람 꼬실려고 신학을 해놓으니까 ‘어떻게 일하면 구원 받습니다.’ 이거만 있지, 주께서는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아예 눈만 뜨면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하기도 싫고, 다 싫고 고만 하나님 영광은 다 싫고 바쁜데 하나님 영광이 무슨 영광입니까?




하나님 영광 이라는 마음먹는 것 자체가 싫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질대로 ‘나가잇~~ ’발로 차버립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발길질 당해서 떨어져나간 썩어빠진 이 껍질 속에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떨쳐 내놓고 나자빠져가지고, ‘나는 끝났어. 나는 천국이고 뭐고 욕심이었어. 구원도 욕심이었어.’ 떨어져 나갔을 때, 그때 주께서 그 쓰레기 같은 더러운 오물 같은 곳에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냅니다.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사람의 겸손이나 자기 부인이나 자기 부정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을 사시면서 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 흘리는 자리로 자기 자리로 만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구원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들, 쉽게 말하면 단추라든지, 후크라든지 그걸 줍는 거예요. ‘요건 내거.’ 그러면 누가 누구 걸 줍는다? 주님이 자기 것을 줍는 방식으로만 구원이 됩니다. 그럴 때 구원 받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지? 뭘 잘해서 구원 받았지?’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자기 내부를 쪼개봐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것이, 어떤 것이 주님의 것인가를 봐야 되죠.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피를 회수하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담에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얼마나 건방진 말입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건방진 말이죠? 예? 그런데 이 마음이 고 앞에 있는 고린도전서 10~11절 보니까 이것은 사람이 건방져서 마음이 생긴 것도 아니요. 사람이 신학공부해서 된 것도 아니고, 성령이 들어오면 거지가 됐든,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든, 중학교 중퇴를 했든, 직업이 백수든 상관없이 그 사람은 누구의 마음을 안다고요?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이런 뜻 이예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우리 예수님이 뭔 뜻인지 우리 알아요.‘ 그 뜻이에요. 이게 뭐 때문에, 공부를 해서 그렇습니까? 성령이 오니까...  성경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오니까, 이런 건방진 주제넘은 말도 안 되게 건방진, 총회장 앞에서 이 말하면 뺨 맞을 일이에요.ㅎ '총회장님, 저요 주님 마음 압니다.’ 버쩍 하고 싸대기 올라와요. ‘니가 어디 신학교 나왔어?’ ‘아니요, 성령 받으니까 압니다..’




그 마음을 세 자로 줄이면 뭐가 돼요? ‘십자가’ 십자가는 숨어있는데 그 숨어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접근이 된다, 안 된다? 접근은커녕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욕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저쪽에서 납득이 되면 수상해요. 내가 말 잘못 했어요.ㅎ 분명히 십자가는 온갖 지식과 온갖 철학과 학문을 다 동원해도, 동양철학, 서양철학 다해도 십자가를 알면 안돼요. 그거 동원해도 그것가지고 덤벼든 사람이 납득이 된다 하면, 말씀 소통해서 문제가 있고 잘못 전한 거예요.




십자가를 전하고 나면 몽둥이로 맞아야 해요.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라는 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밀어내는 것이거든요. ‘꺼져라.’ 이 말이죠. 우리가 주님 앞에 꺼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가 항상 살아있는 123456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등장한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발길질 당해서 ‘꺼져.’ 라고 해서 진흙탕에 나자빠져서 눕는 장소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신 십자가가 흥건히 고여 있는 십자가 우물이에요. 십자가 바로 밑에, 주님께서 발길질 참 잘하시는데, 딱 치면 정확하게 ‘십자가’가 떨어집니다. 위에서 보면 십자가 죽어 마땅한,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인류를 대표해서 저주받은 거잖아요. 우리는 저주를 제일 싫어한다고요. 왜냐 하면, 저주 받은 자는 저주 받아야 되는 것이 창조의 원리기 때문에 저주 받은 자가 구원 받겠다고 나온다는 것이 깝죽대는 거죠. 자기 분수도 모르고. 저주 받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제대로 저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저주 받았는데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은 아직 저주를 덜 받았어요.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몰라서 그래요. 진짜 저주 받으면, 욥처럼 입을 막고, ‘죽이든 밥이든 맘대로 하세요.’ 아예 입을 막고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욥은 그 전에 ‘내가 죄가 없는데 고난 받게 하십니까?’ 까불다가 막상 주님 나타나보니까, 입을 막고 고개 푹 숙이고 그랬었죠. 이사야와 같은 경우에도 뭐라 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제대로 성령 받은 겁니다. 성령 받으니까 아무소리 못하고, ‘예, 제가 바로 저주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럴 필요도 없으신 분이 바로 자기 백성 건지기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 저주의 자리가 이게 우리 본래의 자리에요. 이사야에 보면 그런 말씀 나오죠. ‘너희들의 근본을 알아가라. 너희들의 근본을 찾아가라.’ 근본을 찾아가게 되면, 이사야 2장에 보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라(사2:22).’ 왜냐 하면 의지하겠다는 것은 뭔가 기둥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자기 구원의 희망을 걸고 있는 거예요. 뭔가 믿겠다는 것, 의지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죠. 의지하지 말고 축~ 늘어지라 말이죠. 그런데 축 늘어지는 그 자리가 주님께서 이 땅을 사실 때 마지막 123456 마지막 7을 완성할 때, 7과 7로 연결될 때, 7,7,7로 연결 될 때, 인간의 손을 못 대는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죠. 이 사건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어떻게 낮아져서 어떻게 높아졌는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죄인의 모습으로 와서 ‘주’가 되셨는지를 그 과정.




그렇다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말리다 보니까 덩달아 구원이 되는 거예요. 주인공은 예수님인데 그냥 거기에 보조 연기자로 들어가다 보니까 우리는 하나의 드라마에 이미 합류된 셈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끌고 가는데 주님이 끌려갈 때 뒤에 딸랑 딸랑 깡통 같은 것이 매달려 가는 그 깡통들이 우리들인 겁니다. 이게 바로 모세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모세가 지팡이 가지고 홍해 물을 안 가르면 그들은 몰살됐습니다. 따라서 그 말은 뭐냐 하면, 모세 말만 들어야 돼요. 이것은 뭐냐 하면 절대로 자기를 의지해선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뭐를 너가 의지할 때는 항상 실패로 끝나는 환경들을 하나님께서는 123456 이란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옆에서 막 일으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럴 때 놀래서 누구만 의지 합니까? 주님만 의지하게 하는 거예요.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 이런 것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계속해서 생기는 이유가 뭡니까? 보니까 전체 적을 계속 생겨나고 있어요. 이런 것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힘으로 의지했던 것이 전부 다 완전히 구멍이 나야죠. 내가 의지했던 모든 것이 실망스러운 결과로 다 드러나야 돼요. 환난과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통장에 돈 한 푼도 없고 몸은 되게 아프고 죽고 싶어도 못 죽고, 하여튼 참기름 바른 것처럼 다 미끄러져 내리고, 의지하는 것마다 다, ‘저 사람은 도와주겠지’ 하면 난 몰라 하고 가버리고, 붙들면 ‘손 놔’ 하고 가버리고, 항상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항상 들끓게 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 의지할 수 있는 선을 가위로 다 끊어버려요.




 그 끊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버려져야 될 양파 껍질인줄 알고 우리가 나가떨어져 나갔을 때, 비로소 점선으로 보이던 이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발길로 차서 내 본래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 주께서 내 대신 함께 죽으셨던 그 자리가 원래 우리가 늘 기거해야 할 그 자리인 것을 123456은 7, 십자가 자리를 위하여 123456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깨닫게 한다 이 말이죠.




말은 이래하지만 우리들이, 성경 자체가 그걸 이야기 해줘요. 성경을 우리가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키는 용도가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덮치는 용도로 성경이 있습니다. 1인, 2인,3,4,5,6,  사건들은 우리가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면 하고 고대하면 안돼요. 고대하면 주께서 피해 버립니다.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고대하게 되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내 힘으로도 그런 정도 사건은 내 힘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고 사전에 대비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도를 내가 챙긴 내 방법을 내가 의지하기 때문에, 거기서는 양파 껍질이 하나 더 갖다 붙이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을 일어나게 하지 않죠.




늘 나가떨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됐는지, 오긴지, 아니면 객긴지 모르지만, 우리는 7번 떨어지면 8번째 일어나요. 얼마나 못 된지 몰라요. 일어나면서 꼭 한 소리 하죠. ‘주님께서 이렇게 고난 주었지만 제가 믿음이 좋아서 일어났다고, 꼭 이렇게 자기가 가치 있다고 우기죠. 그걸 간증으로 듣고 싶어 하고, 또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서 강단에 서가지고 많은 사람 감동, 감화시키는 존재의 가치를 한번 맛보려고 시도하죠. 사기꾼입니다.




진도 한번 나가봅시다. 7인, 7나팔, 7대접이 있는데, 7인은 신자고 불신자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다 당해야 돼요. 이 세상에 살면서 ‘왜 신자인데, 성도인데 어려움을 당합니까?’ 라고 따지면 안돼요. ‘니는 죄인이야. 마땅히 받아야지,’ 하고 당하는 거죠. 이것이 떨어져 나갈 때, 전체적으로 양파 껍질 전체를 딱딱 떼게 되는데, 이 떼는 힘은 양파 껍질 속에 들어있는 어린양에서 떼게 돼 있어요. 뗄 때 떨어진 것, 하나, 둘, 셋, 넷, 다섯,..일곱 번째 떨어지는 고 양파 껍질만 떨어지면,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냐 하면, 바로 구약 적 이스라엘 말고 신약 적 이스라엘이 나와요. 신약의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 나오는데 그 과정이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옵니다. 7장에 보면 유다지파 중에 일만 이천,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 총 합해서 십사만 사천 나오죠.




그러면 십사만 사천이라 하는 것은, 총 합이 십사만 사천이고, 십사만 사천이 되기 위해서는 12개가 몇 번 해야 돼요? 12개가 12번 해야 되겠죠? 12개가 12번 중첩이 된다는 말은, 처음에 12로 묘사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성립할 때 12지파로 성립한 겁니다. 12지파로 성립했던 이것이 드디어 예수님께서 마지막 정답을 공개해 보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신약의 진짜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모형으로서 보여준 거예요.




7인을 떼기 전에 마지막으로 7인 떼기 전에 그 사이에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이 땅에서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부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우리가 이스라엘인데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줍니까?’ 하는데, 원래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저주 받은 자리에서 주님이 만들어 나가지 저 이스라엘이 손들고,  아브라함이 손들고, ‘너 나와’ 하고 우리가 요청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언약 따라 12지파가 하나님의 언약 따라 그대로 언약이 적용되면, 어린양에서 적용되면 그대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힘으로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다.’ 라고 자기가 노력해서 이스라엘이 되려고 애쓴 반면에, 신약에서는 뭐냐, 어린양께서 이스라엘 되게 하면, 어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드시 돼야 되요. 그게 바로 이마에다 도장을 찍어서 ‘니는 내꺼야.’ 라고 도장을 찍어주는데, 그 힘들이 바로 나중에 나오는데 어린양에서 나와요. 6장 16절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그담에 무엇의 진노에서 입니까?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이거는 왕이든 종이든 모든 사람에게 다 진노가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서는 마땅히 성도니 성도가 아니니 구별이 없어요. 진노가 주어지고 난 뒤에 다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그 쓰레기 속에서 주님의 인 맞은 사람이 12에서 144000이 나오게 돼 있다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이는 주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구약의 모든 노선을 이탈하지 않고, 구약의 노선 따라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담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옛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구약이 모든 사람이 저주 받아 마땅한데 애굽 나라에서 저주 받은 그 사람들이 그 심판 속에서 누가 생깁니까? 이스라엘이 생기고, 이스라엘이 실제로 나중에 멸망하죠. 멸망하고 난 뒤에 어린양에 의해서 새 피로 신약의 성도가 등장하죠. 이 과정을 요한계시록 전체에 그대로 다 7인, 7나팔, 7대접으로 중첩된 7의 노선대로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다 설명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의 주석들은 하나의 시간을 선으로 봤죠? 요한계시록의 7인, 7나팔, 7대접 을 하나의 선으로 봤는데, 사실을 이게 아니고요. 여기 전체 있고 거기서 뽑혀 나오고, 거기서 또 뽑혀 나와서 요 중심이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거예요. 접근해 들어가는데 우리가 접근해 들어가는 게 아니고, 어린양에서 나오는 그 능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쭉 그림을 만들어 나간다는 거예요. 점점 만들어 가게 되면, 7인, 7나팔, 7대접을 통해서 어린양이 쭉 뽑아져 나가는데, 뽑아져 나갈 때 인간의 힘으로서 이런 것을 언약에 접근을 못하죠. 왜 못하느냐 하면, 뽑아져 나갈 때마다 강하게 그동안 인간들을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막아낸 힘이 있어요. 그 힘인 악마가 최후에는 악마가 정체를 드러내는데 초반에는 악마가 정체를 안 드러내요.






악의 어두움, 악의 세력이 강력하게 여기 버팁니다. 버티기 때문에 어린양께서 7인, 7나팔, 7대접을 뽑아 낼 때 뭐가 같이 등장하냐 하면, 그동안 인간 배후에서 숨어 있다가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그 악한 세력들, 또 덩달아서 같이 노출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새롭게 들리지만 새로운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함과 병행해서 그 주변의 이방민족들이 왜 여호와에 대해서 그렇게 저주 받아 마땅한가를 그 심판성도 같이 병행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게 되면, 병행해서 이스라엘만 구원하고 다른 쪽은 망해야 우리의 예상이 맞는데, 그게 아니고 누가 망합니까? 저쪽도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는 거예요. 합치면 누가 망해요? 온 인류가 다 같이 망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누구 혼자 안 망해요? 어린양 되신 예수님만 안 망하죠. 그게 정답 이예요. 그걸 요한계시록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만이 주가 되시고 다른 인간들은 주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주께 도전하는 악한 세력 자들에 불과한가. 그 이야기하고, 그 죄인 가운데서도 어떻게 해서 구원 되는 자가 희한하게 나오느냐 한 거예요.




제 질문이 이상하죠?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가 아니고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이게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다시 할까요? 눈만 뜨면 하나님 영광을 안 좋아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 뭘 근거로 해서 구원이 됩니까? 뭘 잘했다고?? 우리는 그저 자기가 가진 것만 생각하는데...이거 다칠까 싶어서 노상 조마조마 하면서, ‘이거 다친 거 내건데, 이것만큼은 못 내놓습니다. 더 주세요.’ 이런 것만 생각하는 사람인데, 자기 주체를 세우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인간이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불가능한 일이죠. 가능치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 이 불가능한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식으로 가능하게 되는가?




십분 쉬고 다음시간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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