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07-10-07 06:28:30 조회 : 5182         
퍼온 글(오스카쿨만의 시간관) 이름 : 고관규(IP:218.55.107.180)

 


 


오스카 쿨만, "이미"와 "아직"의 역동적 긴장성을 강조한 신학자


 


 



정미현


 


 


 




1. 들어가는 말

필자가 쿨만(Oscar Cullmann)교수를 직접 만나고, 강연을 들은 것은 그가 90회 생신을 맞게된 1992년 2월, 쿨만 교수의 90회 생신기념회가 열린 스위스 바젤의 베드로(St. Peter) 교회에서였다. 신학공부를 시작한 이후 나는 줄곧 시간, 역사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쿨만 교수의 저서도 내게는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신학적 숙고의 대상이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저자들을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유학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격이었다. 그 날은 더욱이 그러한 감흥이 더하였다. 그 날의 행사는 우리나라의 칠순, 팔순잔치에서 쉽사리 보여지는 요란한 음식잔치는 없었지만, 음악과 강연이 절도있게 어우러진 참으로 풍요로운 잔치였다. 클래식 음악의 연주가 청중을 사로잡았고, 연주의 중간 중간에는 쿨만의 신학사상을 되새김질하는 강연이
곁들여졌다. 행사의 마지막부분에 가서야 쿨만 교수가 등장하였다. 몸놀림이 무척 느리다는 것을 빼고는 구순(九旬)의 노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해 보였고, 목소리가 힘차고 또랑또랑한 것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1999년의 1월에 내가 바젤에 있게 된 것은 우연이 빚어낸 필연의 기회였다. 아무튼 이 시간에 그 곳의 공간에 있게 된 덕에 쿨만 교수의 서거소식을 바젤 신학부를 통하여 빨리 접하게 되었고 곧 장례식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97세의 일기로 프랑스 샤모니에 있는 그의 소유지 별장에서 돌아가신 쿨만 교수를 추모하며, 이 지면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쿨만의 신학적 작업의 특성을 세 가지 점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

쿨만은 명실공히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이다. 그가 몸소 실천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그의 저서 "다양성속의 일치"의 내용을 요약하면, 모든 다양한 교파들은 서로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에게서 보여지는 특별한 은사와 장점을 존중하며 도저히 풀 수 없는 차이점과 간격은 교회의 제도적 연합을 추구하면서 "믿음 안에서 약한 자"에 대한 배려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서적 기도

1994년 쿨만의 마지막 저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 저서는 "신약성서에서의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중요 본문을 설명하고 이로부터 현대인이 직면하는 기도의 위기문제와 관련하여 신약성서의 기도론을 정리하였다.

3) "아직 아닌", 그러나 "이미" 일어난 그 사건을 믿으며 살아간 신학자

쿨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의 개념이 분명히 강조되었다. 그는 신약성서의 시간적, 역사적 특성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으로 설명한다.

2. 쿨만은 누구인가?

쿨만은 1902년 2월 25일 프랑스 알사스에서 태어났다. 스트라스부르크 신학과 파리 소르본느대학에서 신학과 예술사를 수학한 그는 1930년부터 스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1938년부터는 바젤에서 가르쳤다. 여러 대학(무엇보다도 마르부릌, 에어랑엔, 파리, 뉴욕)에서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그는 주로 바젤대학에서 연구하며 교회사와 신약성서를 강의하였고, 유럽에서 학생운동이 크게 일어난 1968년에는 바젤대학 총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38년부터 1972년까지 바젤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쿨만은 그와 마찬가지로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누이 루이제(Louise Cullmann)와 함께 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인 알룸네움(Alumneum)의 관장을 지냈다.
그는 또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참관자였고, 1958년부터 기금을 조성하여 1965년에는 예루살렘에 에큐메니칼 신학연구소(Tantur)의 공동 설립자가 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그의 재산을 들여 초교파적 대화를 촉구하는 재단(Fondation Oecum nique Oscar Cullmann)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신약성서 에베소서 4장 15절에 근거하여 사랑과 진리추구의 열정 안에서 교파를 초월한 열린 자세와 다양성 속의 대화를 추구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제도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이전인 1920년대에 이미 쿨만은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자들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차원에서 대화를 전개하였다. 콩가르(Y. Congar), 다니엘루(J. Dani lou), 베아 주교(Kardinal Bea), 틸리히(P. Tillich), 니이버(R. Niebuhr), 니그렌(A.T.S. Nygren), 니씨오티스(N. Nissiotis), 발타자르(H.U.v. Balthasar). 카러(O. Karrer)등의 신학자등과 폭넓은 교류를 갖었던 쿨만은 바젤대학신학부를 범세계적, 범교파적 차원으로 열려진 포괄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지로 부각시키게 된다. 바젤 이외에 프랑스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의 강의를 통하여서는 가톨릭, 개신교와 정교회의 만남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로서 드물게 그는 특히 교황 피우스 12세(Pius XII.)와 연구문제로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그를 공의회로 초청한 교황 바오로 6세(Paul VI.)와는 친분이 무척 두터웠다고 한다. 1993년에는 밀라노의 감독 마르티니 추기경을 통하여 개신교 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공로로 바오로 Ⅵ세 연구소가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았고, 1979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문화대훈장(Ehrenlegion)을 받았다.
그의 삶에 허락된 마지막 시간들에 쿨만은 네 가지 언어로 되어진 에큐메니칼 예전집 "Sinfonia Oecumenica"의 편찬에 큰 관심을 갖고 도왔으며, 이 예전집은 세계교회 협의회 창설 50주년을 맞아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1998년 12월에 열린 세계교회 협의회 제 8차 총회에서 300여 개 회원교회들에 전하여졌다.
쿨만의 주요저서로는 『그리스도와 시간 Christus und die Zeit』,『 베드로 Petrus: J nger, Apostel, M rtyrer』, 『신약성서의 기독론 Die Christologie des Neuen Testaments』, 『신약성서에서의 국가 Der Staat im Neuen Testament』, 『역사로서의 구원 Heil als Geschichte』, 『다양성속의 일치 Einheit durch Vielfalt』, 『신약성서에서의 기도 Das Gebet im Neuen Testament』등이 있다.

3. 쿨만의 대표적 신학사상

신약성서를 통하여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그 사건의 완성을 신학적 시간개념으로 표현한 언어가운데 "이미"와 "아직 아닌"이란 용어이외에 더 적합한 것이 있을까! 이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강조한 신학자가 바로 쿨만이다.
구속사 학파를 대표하는 쿨만은 "역사로서의 구원"을 성서적 사고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창조로부터 새로운 창조로 이어진다. 때문에 구속사는 "기독교적 복음의 핵심"으로 표현된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와 더불어 역사 안에서 무엇을 의도하시는가를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쿨만은 신앙이란 이러한 "구속사에 대한 증언"이라 본다. 그는 여호와의 자기 계시(출 3, 14)와의 연결성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는 내가 행동하는대로, 즉 구속사적으로 스스로 행동하는 자이다. 나는 구속사적인 자이다(ich bin der Heilsgeschichtliche)" 라고 풀이한다. 쿨만은 불트만과 그의 학파의 실존적 해석, 특히 점 적인 실존이해(das punktuelle Existenzverst ndnis)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왜냐하면 오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항상 결단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해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 "시간의 경과 안에서의 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쿨만의 주요 신학사상인 구속사 이해는 신약성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거한다. 구속사라는 개념은 "경세, 살림(Oikonomia)"으로부터 유추된다.
경세란 하나님이 그의 계획을 시간적 사건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펼쳐나감을 의도한다. 쿨만은 신약성서의 의미에서 경세란 바로 구원의 역사를 의미하므, "구속사(Heilsgeschichte)" 대신에 "구원의 경세, 구원의 살림살이(Heils onomie)"라 부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제안하기도 한다. 쿨만의 견해에 따르면 성서의 역사는 계시의 역사이다. 모든 계시는 신약성서의 핵심에 자리하는 구원의 역사에 관련된다. 이미 일어난 사건과 이것으로부터 비롯된 "이미"와 "아직 아닌" 사이의 긴장,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사이의 긴장이 우리가 사는 시간의 특징이며 곧 교회의 시간이다.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으되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속사는 미래적 심판을 목표로 한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재자로서-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선택의 완성자로서 수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이다.-그리스도는 현재적으로 지배하는 주(Kyrios)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건의 완성자로서 되돌아오는 인자이며 새로운 창조의 중재자이다." 이 존재는 항상 동일한 그리스도이다. 그의 다양한 기능들을 쿨만은 "시간적으로 연속적인 구
원사적 기능"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구원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사건은 역사 안에서 반복적이지 않고 유일회적으로 일어났으나 모든 시간에 연관된다. 에파팍스(das Ephapax)는 구원사의 모든 점에 연결되고, 구원사의 중심에 있다. "시간적으로 연속적인 구원사의 기능"은 과거, 현재와 미래에 연결된다. 이러한 구원사적 시간을 삼단계로 구분해보면 첫 부분은 창조이전의 시간, 중간부분은 그리스도의 사건, 마지막 부분은 재림이후의 시간으로 분류된다. 즉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구속사적 과거와 미래가 연관된다.
쿨만의 견해에 따르면 구속사는 일반역사 옆으로 진행되는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니다. 구속사 자체도 일반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관계되지만 두 가지가 혼동될 수 없다. "구속사에서도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관계한다. 구속사는 그러므로 역사 옆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니다. ... 구속사는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에 속한다." 구속사가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역사에 끊임없이 관계되어질 지라도 구속사는 일반역사와 다르게 진행된다. 이점에서 쿨만은 두 가지 용어를 갖고 설명한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지속성(Konstante)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반구속사적 역사Unheilsgeschichte)가 일어나기도 한다. 두 가지를 다 유념해야 되므로 쿨만은 그의 후기 저서 "역사로서의 구원"에서 "파상선(Wellenlinie)"이라는 개념을 추가한다. 이러한 개념설정을 통하여 지속성(Konstante)과 우연성(Kontingenz)의 개념을 부연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순탄하게 수행되지 않고, 인간적 반역 때문에 물결치는 파도와도 같은 선(Wellenlinie)을 그리며 진행된다. "실제로 우리는 구원사안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인 지속성과 이러한 계획에 예정되지 않은 개별적 사건과 특히 하나님의 계획에 반역하는 저항인 우연성에 맞물려 있다." 쿨만은 이로서 그의 선적인 시간이해(die lineare eitauffassung)를 수정한다. 그는 구속사를 마치 순탄하고 매끄럽게 진행되는 선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피하려한다. 그래서 쿨만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근본적인 특성으로서 지속성과 우연성의 공존을 주장하는 것이다. 지속성과 우연성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구속사의 토대 위에 "예정과 자유"의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선택이란 인간의 죄의 결과이다. 모든 구속사는 인간적 죄 없이 이해되기 힘들다. 전 인류의 죄 때
문에 인류의 구원목표에 소수만이 선택되어진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첫머리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구원계획에 역행하며 작용한다. 그러므로 모든 구속사는 이러한 구원계획의 지속성과 역사적 우연성에 의하여 제한되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은 구원계획을 수행하고, 전체 역사를 구속사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우주적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죄와 불신앙도 들어 쓰신다." 쿨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일반역사가 구속사안으로 흡수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쿨만이 파상선 개념으로 그의 구속사적 시간이해개념을 수정, 보완하였으나 인간과 세계사적 죄악의 복합성을 설명하기에는 미약한 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히 13:8)이시라는 구속자적 항존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구조적 불의와 구조악을 보아내지 못하고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현상태(Status quo)를 하나님의 섭리로 합리화하는 경우에 쿨만의 구속사 이해는 문제적일 수 있다. 개인적 실존 안에서 점적인 결단(punktuelle Entscheidung)을 강조한 불트만과 달리 쿨만은 구속사를 신약성서의 근본적 체계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의 구속사적 시간이해를 강조한 쿨만은 종말적 현재성만을 강조한 불트만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불트만에게는 선적으로 이어지는 구속사개념은 미약하다.
불트만에게서 강조되는 것은 실존적 현재성, 점 적인 존재양식과 존재과정으로서의 "지금 여기(hic et nunc)"이다. 쿨만에게서도 현재성은 강조되지만 그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미래에로의 중간기(die Zwischenzeit), 미래를 기대하는 현재로서 선적인 역사의 과정인 것이다. 불트만이 말하는 종말론적 실존(die eschatologische Existenz)이란 시간적 연속성으로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에 비해 쿨만에게서 중간기는 "이미"와 "아직"사이의 갈등과 긴장의 시간이다. 불트만에게서는 개인의 현재적 실존에 초점이 모아지므로, 믿음의 공동체성이나 교회 공동체의 선교의 문제등은 간과되고 있다. 중간기로서의 현재성을 부각시키는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사이의 교회의 선교를 강조한다. "불트만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을 단지 개인적 신앙의 문제나 실존적 변증법의 의미에서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는데 반하여, 쿨만은 이러한 긴장을 기독론으로부터 개체의 문제를 너머서는 결정적인 구속사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바르트가 수평 시간, 역사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직적 사건과의 연결성속에서 "동성(Gleichzeitigkei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쿨만에게서는 수평적 시간, 역사개념이 월등히 우선적으로 부각된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성의 삼위일체적 역동성이 쿨만에게는 미약하다. 쿨만은 오히려 삼위일체적 시간이해가 초대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계시적, 구속사적 시간이해의 방향성을 불명확하게 만들거나 최소한 약화시킨다고 본다.
그러나 수직적 계시사건이 수평적 인간의 역사에 비춰짐으로써 인간의 시간과 역사는 새롭게 조망될 수 있지 않겠는가! 계시의 시간은 현재성만이 강조된 점 적으로나, 수평적 차원만이 부각된 채 선 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수평적 인간의 역사성을 감싸면서 조명하는 수직적 사건의 동시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계시의 사건이란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사건"이다.    

4. 나오는 말을 대신하여 : 쿨만 교수 장례식을 참석하고서

1999년 1월에 필자가 바젤에 가게 된 것은 사전에 특별히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 것이 감사할 따름인데, 이런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쿨만 교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게 된 것이 굉장한 감흥으로 남아있다. 세계 각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참석하여 쿨만의 장례식에 조의를 표하였는데, 주의를 둘러보니 아시아인으로는 내가 유일한 조문객이었다. 장례식은 스위스 바젤의 레온하르트(St. Leonhard) 교회에서 파란 하늘이 돋보이던 1월 21일 오후 2시에 있었다.
쿨만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의 토마스(St. Thomas)교회에서 1월 22일 오후 2시 30분에 행하여진 하관예배 후 인근 묘지(St. Gall)에 안장되어졌다. 장례식에는 각 교파별 대표의 조사와 바젤대학 총장 게블러(U. G bler) 교수와 브랜들레(R. Br ndle) 교수가 신학부를 대표하여 쿨만의 신학적 사상과 의미를 기념하는 간략한 강연을 하였다. 중간중간에는 생전에 고인이 즐겨 부르던 찬송을 각각 독어와 불어로 함께 부르기도 하였고, 합창단의 특별찬양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내용과 짜임새 있는 의식이었으며, 장례식은 독어와 불어로 진행되어졌다. 마지막으로 선곡되어 모두가 불어로 함께 부른 찬송은 G.F. 헨델이 작곡한 155장 "주님께 영광"이라는 부활의 찬양이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신학적 씨름을 한 쿨만 교수를 보내는 마지막 찬송이 부
활의 내용을 담은 경쾌한 곡이라는 것이 마음에 와 닿았다. 장수한 노 신학자를 보내는 장례식이라는 점도 있었겠으나,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성서의 기본적 메시지를 가득 담은 채 부활의 희망을 노래함이 이 인상적인 장례식의 분위기를 더욱 뜻 깊게 해 주었다. 앞서 간 신학자의 성실하고 진지한 연구자세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한 열려진 포용적 활동을 되새기면서, 부활의 희망 속에서 전진해 가야함을 추스리게 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한 번 생각해 보고저 퍼온 글입니다.  복음의 십자가신학과  차이는 있겟지만요


 

 고관규(IP:218.♡.107.180) 07-10-07 07:12 
목사님이 기존의 성화신학에 대한 도식ㅡ을 비판하실 때에 등장하는 도식인 "이미와 아직"의 주창자가 쿨만입니다.
쿨만의 이 도입은 십자가구속의 역사를 관찰하면서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요(저의 단순한 의견). 목사님은 기존에 성화론신학을 언급하며 이 도식을 가지고 오셔서 실날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럼 쿨만도 성화신학으로 확장해서 봐도 되는건가요? 쿨만의 의도가 원래는 그런 게 아닌것으로 보입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분이 에큐메니칼운동에 매진ㅡ햇다는 부분이,,,이번에 새롭게 알게되어서 좀 캥깁니다.
"다양성속의 일치'라고 했다네요?,,,,좀 여운이 부정적으로 남고 잇습니다.

아님 성화론신학을 말하는 자들이 저 도식의 원 의미를 모르고, 잘못 가지고 온 것인가요?(주로 신약학자들과 그계통의 다른 전공자들도 저 도식을 자주 말하는 것으로 자주 봅니다.)
아님 그들이나,쿨만이나 같은 부류라서 필이 통해서 비슷한건가요?
"미래에로의 중간기(die Zwischenzeit), 미래를 기대하는 현재로서 선적인 역사의 과정인 것이다'라고 정교수가 요약햇는데....  이 부분이 성화론신학의 주창자들이 자주 주장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전에 말한 어떤 외국과 한국의 학자들이요,,,

미래를 모른다 !! 라고 그들이 말하듯이요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근호(IP:220.♡.176.141) 07-10-07 10:36 
쿨만의 문제점은 '시간'요소를 성경의 중심 요소인양 여겼다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도 인간들의 시간관에 종속되어 버립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간의 시간관을 지적하고 공격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들의 시간관을 건드리지 않고 그 구조의 틀 속에서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분인 처럼 곡해해 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시간관을 건드리지 않게 되면 곧 인간의 죄성을 건드리지 않는 셈이 됩니다. 즉 인간의 시간관만큼은 죄가 아닌 것처럼 분류밖으로 따로 챙겨놓은 식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개혁주의 성화론의 근본 문제점은 '시간에 따라 발전적으로 달라짐'을 성숙이라고 간주한다는데 있습니다. 원래 인간이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시간관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변명하고 핑계하는 죄를 짓는 존재자들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은 이런 시간적 요소마저 그 정체를 공격하고 정죄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쿨만은 이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고관규(IP:59.♡.8.57) 07-10-10 06:43 
'시간에 따라 발전적으로 달라짐'을 성숙이라고 간주한다는데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자동적으로 달라짐이 아니라, 달라지도록 노력하고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 기존의 성화론일 것입니다.
이 주장의 실용적인 접근을 목회설교적으로 하여서 깐,,,분이 박영선목사로 알고 있습니다.
왜? 유아기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느냐? 이 한심한 교인들아 !! 라고 한 분이 박목사이십니다.
이외에 복음주의와, 근본주의계열에서는 승리의 삶을 살자 !! 라고 하면서 비슷하나 용어를 다르게 풉니다.
저는 이걸 하나ㅡ 묶고 싶습니다. 같은 내용에 대한 인용과,표현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화 ㅡ라는 용어를 아주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이런 용어를 만들어냇는지..

성화를 구원의 문제와 언급시킨다거나....1
성화를 온전한 상태를 푯대로 삼아 계단을 오르듯이 거기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웨슬리 성결신학)...2
성화의 상태를 이루지 못하면 뭔가 부족하여 날마다 정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한다거나,,,,3
박영선목사식의 성화론,,,,4

1은 이단입니다.
2는 못오르니 피곤하고 지치게 되어 사람들로 실망케하여 자포자기하게 할 부류들(1이 아닌가 의심할 부류)
3은 목회적인 측면에서 갈구는 자들
4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현재적으로ㅡ 잘 설명한다고 봄
...이것이 제가 보는 분류가 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쿨만의 깊은 의도는 모르겟으나.
작금의 잘못된 성화론자들은... 자기들의 성화구원신학을 설명키 위해  쿨만의 도식을 잘못 가지고 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자들이 과연, 쿨만의 원전들이나 제대로,,읽었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웁거든요
"그리스도와 시간"이나, "구원사"를 말입니다. (물론 저도 읽지는 않앗지만요)

1의 해석이 다반사로 보여집니다. 심각한 지경이죠

그리고
오스카쿨만의 시간 ㅡ역사철학적신학은 지금 댓글과는 다르게 질문을 하게 될 수는 있겠습니다.

쿨만은 이점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신 목사님의 결론댓글이 솔직히 아직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게시물9,238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2563   하나교회100701요한계시록 3강a (4) 이한례 10-09-06 3282
2402   하나교회 요한계시록 2강 동영상 (3) 관리자 10-06-13 4139
2318   하나교회 사이트입니다. 성재필 10-05-09 3792
2310   하나교회 모임은 그대로 열림 이근호 10-05-05 4852
1535   피에 미쳤다는 것은 (11) 김명현 09-06-29 2914
6029   피그말리온 박상도 15-08-07 1227
1505   피(이근호목사)를 읽고 (5) 심재성 09-06-15 3163
3383   피 묻은 숟가락 (2) 이근호 11-06-29 2708
1144   피 -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기 이창섭 08-12-03 3650
6522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근호 16-05-06 1258
443   품절된 대장간 책 이근호 07-07-17 6521
4126   폭염으로 한 주 연기-대구 모임 이근호 12-08-05 3056
2863   포커 페이스 - 서울강의 느낀점(11월) (1) 신직수 10-12-03 2506
352   포기하는 즐거움 (1) 이미아 07-05-13 4190
  퍼온 글(오스카쿨만의 시간관) (3) 고관규 07-10-07 5183
485   퍼 왔습니다....!! (1) 최종훈 07-08-13 4388
451   판단. (5) 송성철 07-07-25 4039
1659   팍팍 벌어서 후원해야지 (2) 강이아빠 09-08-14 2967
2967   파일정리(MP3) 창세기, 다니엘 (1) 이한례 11-01-02 3792
1742   파일을 정리하다가.... (3) 이창섭 09-09-12 2919
맨처음 이전 [1] [2] [3] [4] [5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