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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21:25:20 조회 : 233         
175강-신 32장 40-43절(심판)20180311-이 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16.46.79.235)
175강-신 32장 40-43절(심판)201803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2장 40-43절입니다. 구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이는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심판을 잡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내 화살이 피에 취하게 하고 내 칼이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데 정작 하나님 본인은 나타나지 않아요. 나타나지 않으면서 부지런히 일을 한다고 하니까 보통 인간 세상에서는 일을 한다고 하면 당사자가 눈에 보이기 마련이거든요. ‘누가 했다, 누가 했다’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나는 말씀으로만 일을 한다” 이렇게 해 놓고 정작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할 때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세상 자체가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의 모형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모형물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할 때는 모형물에서 그 안에서 활동을 하고 움직임이 있고 변화가 있을 때에 사람들은 그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특별히 이 갇혀있는 바깥에 있는 하나님과 소통이 되기 때문에, 연락이 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이런 취지에서 일어난 일이고, 이번 일은 이런 취지에서 일어났다’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예언적으로 그게 알려집니다. 말씀으로.

선지자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죠. 선지자는 바깥 안목, 그러니까 이 세상에 갇혀있는 안목이 아니고 천상회의에 참석해서 보았던 그 안목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도로 파견 근무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도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세상을 고치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오해하면 안 돼요. “너희들 그거 고쳐야 돼. 회개해야 돼.”를 말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어쩔 수가 없다. 너희들의 성깔에 입장에서 하나님의 조치는 합당하다. 그거 내가 통보하러 왔다.”라는 식으로 선지자가 이야기합니다.

선지자가 나서서 개선한다든지 하나님에게 벌을 적게 받도록 조치를 취하고 하는 그런 거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지자는 배짱이고 복장 편하다고 할 수 있죠. 망하면 망하는 대로 주의 뜻이고 잘 되면 잘되는 대로 또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그 선지자가 신약에서는 성도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이 땅에 마지막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전부다 복음을 위해서 전하는 것이다 이 말이죠. 아까 예배 전에 청소하는 집사님께서 트럼프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김정은 이야기를 했는데 복음을 좀 연관시켰으면 좋지 않았겠는가하는...

YTN이나 KBS, MBC뉴스는 복음이 안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성도라면 복음을 집어넣어서 이야기 하면 좋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음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하면 “차라리 핵폭탄 멸망 받는 것이 더 속편한 일인데 그래도 뭐 평화 협정 때문에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또 약간 더 살게 되어서 울화통 터진다.” 요게 복음적입니다.

그냥 한방에 보내지 뭐 또 추스르느냐는 거죠. 그냥 확 보내버리지.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신약의 선지자의 성도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안목이 차이가 나는가. 천상회의에 참석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안목과 그걸 모르는 사람의 안목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말씀드리면 세상에 갇혀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비극에 강조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비극.

거기에 비해서 선지자들은 악에 강조점을 두고 보지요. 어떻게 하면 이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고 어떻게 하면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느냐에 관점을 두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비극에 휩쓸리지 않고, 남들은 비극적이어도 괜찮아요, 나만이 늘 희극적으로 웃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럴 쨉이 되나? 그런 행복과 웃음을 원할 자격이 되느냐?”하시는 겁니다. 비극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몸부림을 다하는 거, 황금 같은 내 인생, 드디어 끝장납니다. 오늘로써. 참, 진짜 울화통 터지는 내용이에요. 착한 아버지 때문에 가족이 화목했다는 뭐 그런 내용인데, 무슨 인간이 착한 인간이 어디 있어요? 무슨, 남자 치고 착한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미투 해버릴까 보다.

성경에 보세요. 여기에는 하나님이 친히 복수를 하시는데, 복수를 할 때 어떻게 복수를 하느냐 하면 김밥을 쌀 때 그 김을 김발에 둘둘 말아버리죠. 땅이 인간 세상을 이렇게 말아서 엎어 버립니다. 땅이 모든 걸 토해 내요. 땅이.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에 보면 “이를 기이 여기지 말라” 기이 여기지 말라는 것은 참 기이하다는 뜻이거든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여기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땅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한 복음적으로 파악한 자는 땅과 쏟아지면서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고 원초적인 땅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지옥 불에 가는 악한 자로 나온다는 겁니다.

땅이 인간을 토해 냅니다. 다 도로 들어내요. 보통 성지순례나 답사 갔다 오면 설교시간에 목사가 자기 설교꺼리 많다고 성지순례 이야기로 다 때웁니다. 그걸 하도 제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입을 봉하고 ‘내가 성지순례 이야기 하면 개다’라고 했는데, 그걸로 지루한 설교 시간 다 때우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오후에는 한번 해야 되겠습니다.

사해바다에 가게 되면 사람이 물에 뜬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건 제가 가보니 잘못 된 말이에요. 사람이 뜨는 게 아니에요. 가라앉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해 바다는 헤엄이 안 되는 거예요. 가라앉지를 않으니까. 그런데 사해 바다에 유일하게 빠진 사람이 접니다. 까불다가 빠져가지고 다 들어갔거든요. 사해바다는 사람을 다 토해내지 절대 가라앉는 걸 용납하지 않거든요. 물속에 숨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이 세상도 절대로 인간이 어디 숨을 곳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2장 말씀 때문에 모든 것은 심판 앞에 다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인간은 자신의 비극에 꽂혀가지고 절대로 비극적인 삶이 되지 않아야한다고 그쪽으로 모든 것을 방향을 정해 버리죠.

방향을 정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에게 오는 저주와 비극을 염두에 두고 철저하게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 해드리려고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갈릴리 바다에 베나니 호텔이 있는데 그 호텔에 우리가 안식일 날 들어갔습니다. 안식일 날 들어갔는데 거기에 ‘Sabbath(안식일)’라고 엘리베이터 전광판에 딱 뜨면서 눌러도 눌러지지 않고 작동이 안돼요. 10층인데 아래층에서 2층, 3층 올라가 지지를 않습니다. 눌러지지 않으니까 그냥 안 누르고 가만히 서 있으니까 알아서 2층, 알아서 3층 되고, 이건 뭐 누를 것도 없이 저절로 4층, 5층 되요.

안식일 날에는 절대로 인간의 노동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이건 뭐 정신병자들인지, 바보인지. 그러면 문을 닫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안식일에 유대인은 가만히 있다가 이방인들은 어차피 저주 받을 자들이니까 자기들이 버튼 누를 때 같이 있다가 엎어 가는 거예요. 이 비겁한 인간들. 안식일 지나고 그 다음날 보니까 8층, 9층 잘 눌러지고 멈춤 없이 계속 올라가는데, 안식일만은 노동하지 않기 위해서 층마다 안식일 해 놓고 전부다 스톱시켜놨어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아니에요. 심판에서 면제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 말씀을 지키기 때문에 그래요. 신약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지키는 거 없어요. 말씀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의 완성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미 이루어 진 자는 말씀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을 마음껏 만끽하면서 그걸 자신 만만하게 펼쳐야 합니다. 말씀에 구애받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말씀에 구애받는 이유가 이거 못 지키면 신명기에 저주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저주가 없어요. 비극이 없어요. 비극은 죄가 있어야 오는데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의로 전환시키기 때문에 저주가 없습니다. 참으려고 하니 도저히 못 참겠는데, 또 한 가지 더 이야기 하면 이스라엘에서 마지막 날 성막해설이 있어가지고 가니까 1:1 측량으로 성막을 다 만들어 놨어요.

성막의 크기가 성경책 레위기에, 출애굽기에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모습을 몰라요. 그래서 일부러 그 모습을 알라고 제 아내에게 1:1 실측으로 되어 있는 곳에 서보라고 했어요. 그 장막에 서가지고 이렇게 한번 보고, 번제단도 서보라고 해서 그 서본 장면을 제가 오자마자 48개 다 우리교회 사이트에 다 올려놨어요. 거기 보면 성막 해설 있고 미국에 이상현 목사님이 내가 이 분들이 영어를 모르니까 내가 한국말로 번역하니까 그 해설자에게 번역하도록 허락을 해달라고 하니까 오케이 했어요. 그 사람은 영어로 이야기 하고 이상현 목사님은 한국말로 이야기 하니까 원래 40분 코스인데 한 시간이 훨씬 넘어 버렸어요.

그렇게 가면서 쭉 이야기 할 때 성막 구조만 이야기 하면 참 감사하겠는데, 이 구조는 몇 인치고 몇 센티이고 하는 거, 슬슬 설명이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지어서 범죄 해서 천국에 못가고 생명나무에 못 가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니까 제가 이 ‘사랑이시라’ 하는 말에 큰일 났다 싶어서,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이 슬슬 올라오죠.

“사랑이시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의 피를 가지고..”하면서 히브리서에 나온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딴에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비로소 우리가 속죄를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씻었습니다.”하는데 그 청년이 그렇게 하는 것을 중간에 막을 수는 없고 팔 아픈데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이거 찍어서 한국에 가면 뭐 남기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싶어서, 뭐 보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다 찍어가지고 중간에 뺄 수가 없어서 다 했어요. 그래서 다 끝나고 난 뒤에 촬영되지 않았지만 이야기 했어요. 지금 해설자의 문제점은 이것을 구원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을 해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구원을 안 해주는 하나님으로 해야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심판이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과 동행하게 되어 있어요. 심판과 동행.

심판 끝, 사랑 시작이 아니라 심판이 없는 곳에는 사랑이 나올 리가 없어요. 심판이 없는데 무슨 사랑이 나옵니까? 지금 그걸 모르는 거예요. 끝까지 심판을 끌고 가야돼요. 끝까지. 그래서 이야기 했어요. 정보(information)라고. 이 지금의 성막 이야기는 정보(information)에 지나지 않아요. 이거 기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 베푼 아량에 만족해서 이거 알고 천당 가려고 그런 수를 쓰는데 그건 구원론 쪽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그래서 통역해달라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통역을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 때 성막이야기 할 때 뭔가 복음을 아는 사람은 다르다고 느껴질 때에, 제 뜻이 아님을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이건 그냥 그 사람이 말 한 거예요. 끝나고 난 뒤에 제가 그런 점을 지적을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이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 될 수 없는 죽은 존재입니다.

성막을 이루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그 성막을 자기에게로 가져가서 자기 안에서 새로운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을 성령을 통해서 생산해 낼 때 그게 성도지, “예수님 하신 거, 수고 했습니다, 제가 믿어 줄게요.”라고 해서 성도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 맞습니다. 구원받은 백성 맞습니다. 맞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 내에 심판을 심어주려고 한 거예요. 그들은 사랑인 줄 알아야 됩니다. 심판이 사랑인 줄 알아야 돼요. 이 심판은 어떤 심판이냐 하면, 말씀 지키면 안 받는 심판이 아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말씀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심판 받는 그것이 복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요? 내가 말씀 지키기 때문에 심판을 안 받아 버리면 내 미래의 운명이 나한테 달린 게 되기 때문에 이거는 더 상황이 악화되는 겁니다.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치매 걸리면. 줄곧 30, 40, 50년 동안 건강하게 살다가 치매 걸려가지고 나중에 엉망진창 되면 모든 게 무효가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뭐, 믿음, 소망, 사랑 다 깨지는데. 아들이 와도 “누구십니까?” 그러고 있는데 언제 예수를 기억할 거예요. 치매 걸려도 상관없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심판 기능인 것을 우리가 감사히 여기면 되는 거예요. 뭐 때문에 평화 협정을 해요. 그냥 기왕 핵폭탄 만들은 거 슬슬 대구에 2개, 서울에 5개씩 해서 좀 던지지. 뭐하려고 평화협정 합니까? 이참에 그만 살고 가겠다고 좋아했는데.

하나님께서의 이 심판은 여기 이렇게 되어있어요. 43절 끝에 보면 어려운데,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참, 이 말이 어려운 거예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박수 쳐라” 이 말이거든요. 이게 어떻게 인간으로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하나님 말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전제됨을 오히려 너는 기뻐해라.” 스데반 집사가 “종을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한 이야기에서 종을 거두어 주심에 대해 너무 감사하고 있는 그 마음을 가지라는데 이게 어떻게 인간으로서 가능합니까?

어떤 경우에 그게 가능 하느냐 하면 바로 그 심판이 바로 속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43절 마지막에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쉽습니다. 쉬운 일인지 어려운 일이지 모르겠습니다만, 스페인 내전이 있었어요. 20세기 초기에, 스페인 내전이 있었거든요. 우리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니까 남의 이야기라 잘 모르지만, 스페인 내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반 국민들은 내전하고 싶다든지 안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소위 지도자들끼리 감정싸움 붙어가지고 스페인에 어떤 마을이 있는데 마을 사람에게 강요하는 거예요. “너희들 반란 편들 거야? 독재 편 들 거야?”라고 결정을 강요하는 처지에 놓여 버리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주민들은 본인이 어쩔 수 없어요. 본인이 그냥 결정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그 결정한 그 결과에 본인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겁니다. 이게 스페인 내전의 특징이에요.

정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스페인이 농업국가예요. 그냥 농사나 지을 뿐이에요. 정치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정치에 대해서는 일부만 알아요. 그 일부의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운명을 강요해 버리는 겁니다.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에서 하는 것처럼 강원도 깊은 산골에 민주주의도 모르고 공산주의도 몰라요. 쳐들어 온 인간들이 “너희가 공산주의를 따르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 하니까 이건 외부에서 강요된 결단이 자기의 결단을 완전히 개무시하고 자기의 미래가 된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뭘 끄집어내고 있느냐 하면 속죄 기능은 어떻게 진행 되고 있는가를 이스라엘 백성들 통해서 통보해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들부터 먼저 심판이 뭔가를 너희들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심판을 너희들부터 먼저 알고, 이건 구약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읽어 보면 여러분도 동의를 할 거예요, 이스라엘부터 먼저 심판을 알고 이스라엘이 알게 된 심판을 이방나라에게 전달하게 되면 이방나라들도 “어찌할꼬? 우리들도 회개합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요나에 보면 나와요. 요나서에 보면 나옵니다. 멸망 받을 니느웨 민족이 그 하찮은 북쪽 요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심지어 반려 견까지, 고양이, 개, 짐승, 가축까지 전부다 밥을 안 먹이고 통째로 나라 전체가 회개하고 금식하니까 그 나라가 은혜를 받았어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심판이 있었는데 지금은 심판이 없어졌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은혜가 은혜 되려면 우리는 항상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우리가 항상 인정해 줘야 돼요.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면 우리보고 뭐 어쩌란 말인가. 이제 그걸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뭐 어쩌란 말인가. 이야기하는 세상 사람들한테 우리가 성도라면, 성도는 스페인 내전처럼 운명이 결정되었거든요. 심판 받은 사람들이 우리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요구를 해요. 근데 세상은 인격의 이중성과 윤리 도덕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요.

흔히 하는 말이 “네가 말만 하지 말고 네 말하는 대로 행동하라” 이게 세상 사람들의 원리예요. “말은 그렇게 하고 행동 보니까 이건 엉망이네. 이건 개차반이네.”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요. 세상 사람들은 그거예요. 말 한대로 행동하는 그것이 옳은 인간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런 인격의 이중성이 아니고 육과 영의 이중성이에요.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너희들은 너의 말한 것과 인격에 대해서 언행이 합치되는 쪽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로서는 그럴 자신이 없네요.”라는 이야기를 하라 이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우리에게 수모를 줄 거예요. 아주 비난을 할 거예요. 인간 같지도 않다고 욕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수모를 여러분들이 받아야 돼요.

속죄된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를, 죄 속에서 속죄되기 때문에 죄에 둘러 싸여야 돼요. 그들이 준 수모는 그들이 나중에 지옥에서 받을 수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유황불에 가서 빠져나가지를 못해요. 우리는 이미 빠져 나왔잖아요. 이게 가진 자의 여유 아닙니까?

이중성이 다른데 그들과 같이 자존심 싸움하고 “너 잘났나?” 할 필요 없어요. 그들은 자기 가진 것이 전부예요. 우리는 우리 가진 것을 내동댕이치고 싶어요. 심판 속에 집어넣고 싶어요. 이것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자꾸 훼방되니까. 내가 주님을 방해하니까 이게 싫은 거예요.

그들은 비극에 얽매이고 땅에 얽매이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돌출하기 위해서 뻔해 보이는 정신세계로 탈출하고 도피해요. 지리산에 들어가고 기도원에 들어가고 온 굴마다 전부다 기도한다고 집어넣고. 여리고에 가면 누가 나오느냐 하면, 또 나왔다, 이거 미안하네, 여리고에 가면 예수님에 시험받은 산이 있어요. 거기에 구멍 구멍 마다 “나도 예수님처럼 시험 받아서 승리할래.”하는 수도사들이 굴마다 방마다 다 들어가 있습니다. 정신세계의 도피입니다. 결단코 이야기 하지만 지옥 갈 거예요. 결단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왜? 왜 스스로를 자학하고 스스로를 때리고 낮추고.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예수님이 40일 금식했다고 그 토굴에 가서 예수님이 금식 했던 그 굴에 들어가서 자신도 금식기도 하고 있어요. 왜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까? 성령을 안 받아서 악마가 노리는 정신세계, 그 깊은 세계, 더 영적인 세계, 신비의 세계로,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절대로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이미 심판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심판 속에서, 이 심판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헤엄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용서라는 고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탯줄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이런 영적인 이중성을, 주님만을 우리는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심판을 오히려 반기고 지옥 갈 사람을 생각해 보며 그들의 암담함을 보면서 주님이 주신 주님의 모든 결정적 운명 조치에, 터무니없이 해주신 이 조치에 말 할 수 없는 감사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75강-신 32장 40-43절(심판)20180311-이 근호 목사.hwp (28.0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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