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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07:55:51 조회 : 392         
279강-갈 3장 6-9절(아브라함의 의)18031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49.39.243)
279강-갈 3장 6-9절(아브라함의 의)1803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6-9절입니다. 신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왜 성령이 꼭 개입해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풀 수가 없습니다. 믿으면 되는데. 그냥 믿으면 되잖아요. 평소에 믿는 사람들은 잘 믿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성령이라고 따로 오실 필요가 없는 문제가 됩니다. 믿습니다,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인한 믿음과 평소에 율법을 행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거기서 나오는 믿음, 이 두 믿음은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성령을 언급하기 이전에, 예수님을 언급하기 이 전에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굳게 믿었으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한 열심 보여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나온 믿음이냐 하면, 성령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고 자기에게서 나온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느냐, 하는 의구심이 들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의구심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나를 구원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 나는 결과를 제시한 적이 없는데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와서 그 결과가 나를 구원할 때 그러면 나는 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그동안 인간들이, 믿는다는 것이 같이 동반할 수 없는 것끼리 있으면서 믿게 되었다는 이론을 펼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율법의 행위로도 되고 그리고 하나님도 믿고, 이 둘이 서로 나란히 놓일 수가 없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율법, 하나님을 법을 지킨다, 쉽게 말하면 바르게 산다는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도 살고 그리고 바르게 사는 것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바른 생활도 하고, 이 둘이 결국 동반될 수 없는데 뭔가 동반되었다는 거예요.

율법의 행위로 의를 얻겠다고 했을 때에 이것은 그 결과가 결국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죽게 했다면 율법의 행위와 같이 동반했던 ‘하나님, 믿습니다. 여호와 믿습니다.’ 이 전체를 십자가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아직도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구원 받잖아요.’ 하는, 그리고 ‘하나님까지도 믿습니다.’ 하는 전체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진짜 믿는 신앙과 비교해 볼 때 이것은 영 다른 동네 이야기고 딴 소리가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에 의해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시도,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 시도, 같은 이야기에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이것, 그동안 율법의 행의로 의롭게 된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으매 의롭게 되었고 우리는 의로운 사람으로 율법을 행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된다는 생각을 그동안 꾸준히 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다면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잖아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 아브라함과 더불어서 의롭게 된다, 그런 주장들을 펼치는데 그렇다면 성령이 왜 와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들려주고 “우리 조상이 그렇게 해서 의롭게 되었군요. 그러면 저도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법,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넘어온 법도 우리가 지킵니다.” 이러면 아무 하자가 없다는 거예요. 뭐가 문젠데요? 이게 뭐가 탈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렇게 탈이 없다는 것이 오신 하나님을 죽이고 말았잖아.” 그리고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소위 아브라함 자손이고 또 아브라함 자손이기에 율법의 행함을 믿었던 너희들의 바깥 이방인들이, 율법도 없는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아서 의롭게 된다면 너희들이 그 점을 설명할 수 있어야 된다고 본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도 아닌데 성령이 와서 의롭게 되어서 천국 간다면 우리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서 합당한 설명을 해보려면 해 보라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 유대인들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뭔가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영이 이방인에게 갔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부터 다시 출발해야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믿으매 의롭다, 하는 그것부터 다시 따져보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다시 한 번 따져보자 그 말이지요. 성령과 아브라함을 연결시킨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우리하고 똑같은 육신이고 육신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것을 두고 착하다, 의롭다고 여기시고 그 믿는 육신에게 하나님의 의를 제공했기 때문에 육신 있고 하나님이 있고, 그 가운데 성령은 개입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동안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렇게 굳게 생각했는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8절에 보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라고 해서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십자가 지고 성령오심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다시 해석하겠다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뭘 믿었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면, 그래서 우리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으면 아무런 하자나 잘못이 없어요. 아브라함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믿음의 내용이 하면, 아브라함이 믿을 수 있는, 예상할 수 있는 믿음의 내용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오지를 않았어요. 이미 사래의 태가 죽은 입장에서, 자식이 없어야 될 입장에서 자식을 낳겠다는 소식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거예요. 왜 그 점을 놓치느냐 하는 겁니다.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음을 왜 너희들은 모르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죽인다? 이걸 너희가 예상했나? 예상 못했잖아. 그런데 십자가가 바라보인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 의해서 하나님이 죽었잖아. 이걸 예상 못했잖아. 믿어라 이것을.” 예상 못한 것을 믿으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아니 성령이 와야지. 성령이 온다는 것도 예상했어? 못했잖아.”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온다는 것은 내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믿는, 이 육신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매 의롭다 하는 그런 공식이 폐기되었다는, 그런 공식은 애초부터 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지고 다시 구약 전체를 봐야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약전체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야 되는 가정인데 자식이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해서 태어나요. 없는데서 자식이 태어납니다. 그 때까지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기 때문에 아비가 아니에요.

아비가 아닌데 자식이 생기면서 그 자식과 아브라함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새롭게 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라 하는 것은 없는데 자식이 발생돼야 아버지가 나타나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서 없는 자식, 하나님이 없는 자식이 이 땅에 등장하셔야 인간에게 감추어진 아버지가 그 아들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눈앞에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거예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창조자면서도 자신의 피조성을 같은 피조물 안에 같이 동반되게 배치를 해놓은 것이 있어요. 그게 선악과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특징이 어디에 있느냐? 열매에 있어요. 우리는 그 열매에 주목해야 됩니다.

따먹지 말라. 또는 따먹어라 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따먹지 말라고 할 때에 나무도 피조물이고 인간도 피조물이고, 피조물이 피조물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 뭐가 흠이 될 수 있느냐 하지만 따먹지 말라고 하는 그 순간 그것에 뭐가 담겨 있느냐? 피조물이기 때문에 따먹을 수 없는 열매가 너의 옆에, 그것도 네 중심에 있다는 것은 피조세계가 단순히 피조세계의 집합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창조주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렇게 봐야 돼요. 창조전의 원리와 창조후의 원리가 같기는 같은데 같으면서도 창조 후의 피조물이 그 창조성을 바라볼 때는 자기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바라 볼 수 없는 요소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거예요. 말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피조세계에 안 계신 분을 피조세계의 형태로, 즉 있는 모습으로 없음을 나타내는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 3장 2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그리고 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한다. 떨기나무라는 것은 피조물이에요. 인간하고 같은 하나의 피조물이에요. 그냥 나무에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아요. 이것은 창조주입니다. 창조주의 흔적이 피조물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어요. 그런데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과 헤어지고 그 떨기나무에 다시 가보세요. 그냥 떨기나무에요.

있었는데 사라져 버리고, 없는 분이 있음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시고. 이 피조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피조세계를 만드신 분이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피조세계 안에 이미 현존해 계시는 거예요. 그 현존해 계신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는 인간들만 있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매 우리는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뭘 놓쳤느냐 하면, 이미 이 피조세계에 이미 들어와 계신 하나님의 창조주를 놓쳐버린 거예요. 피조물이 자기가 남을 믿듯이 그런 식으로 내 쪽에서 시작해서 믿어버리면 이것은 뭐와 같으냐? 아브라함이 자기의 혈육적인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자식이 없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자식이 없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이름은 이미 아비인데 자식이 있어야지요. 자식이 없는데.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내가 아닌 나가 되어버려요. 이걸 두자로 성도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만들어준 그 나가 아닌 나가 성도에요.

이름은 만민의 아버지라고 해서 이름이 참 좋지요. 만민의 아버지. 자식이 있어야지요. 개뿔이나 뭐가 있어야지요. 자식도 없는데 무슨 아버지에요. 아브라함이 낳은 이삭은 그냥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주의 의미가 담겨 있는 피조물이에요.

그 자식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이사야 54장 1절의 예언이 의미가 있게 돼요. 이사야 54장 1절에 보면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이게 바로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주의 모습입니다.

창조주를 위에서 찾으면 안돼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나라는 항상 닫혀 있어요. 하늘나라는 가기 쉬워도 아들의 나라는 못가는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 하나님나라가 하나님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가 하나님나라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이 지상에 등장한, 그냥 상상해서 하늘의 어르신네, 치킨 할아버지나 금복주 할아버지처럼 어르신네가 아니고 이 지상에 우리와 함께 기거하는데 나타나지를 않아요.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나타나지 않지만 그 나타나지 않는 분의 나타냄이 뭐냐? 성도라는 본인이에요. 나타나지 않는 분에 의해서 잉태된 자가 성도에요.

이삭이 있음으로 아버지가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이삭으로부터 아버지가 다시 만들어지는 거예요. 내가 있어버리면 끝까지 우리는 나의 확장으로 계속 갑니다. 내가 있어버리면 아무리 믿고 소망하고 사랑해도 그것은 내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지옥의 울부짖음이라고 하는데 부자가 지옥 가서 울부짖은 이유가 뭡니까?

내 것을 잃어버려서 그래요. 왜 복음 듣기를 주저하십니까? 왜 매사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 주저주저하십니까? 주저하는 이유가 뭐예요? 동기가 뭐예요? 내 것 잃어버리지 않고 내가 천국 가는 방식을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게 납득이 되고 내게 믿어지는 그 방법을 계속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일에 주저주저 하는 겁니다. 내 방식대로 이 세상을 탈출하려고요.

구원은 탈출이 아닙니다. 침몰이에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침몰한 것이 구원이에요. 탈출할 필요도 없어요. 왜? 우리는 예수님의 태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게 성령이거든요. 성령 받은 자거든요. 우리가 여기 있고 우리가 믿어버리면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믿음이에요. 나에게서 나온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 것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납득이 되고 쉽게 믿어지게 돼요. 예상이 되고 기대가 되고요. 그리고 그 믿음이 나를 천국까지 인도할 것이라고 좋아들 하고요. 사도바울이 믿음이라고 할 때는 흔히 세상에서 자살하고 하는 그런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너 자신을 죽일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게 뭐냐? 사도바울은 자기 의를 거론했는데 자기 의라는 것은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네 잘남과 우수함을 네가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순재가 필요해요. “못난 놈! 천하에 못난 놈!” 우리는 만날 하나님에게 등짝 얻어맞아야 돼요. “이 못난 놈!”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날마다 집착하고 독촉을 하기 때문에 입만 떼면 지옥의 울부짖음을 쏟아냅니다. 그 자체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해도,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고 아무리 열심을 내도 절대로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끊어지는 방법은 있어요. 끊어지는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가 누구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그 방법이 창세기 18장 2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주여, 어쩐 일입니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아브라함은 가만있는데 천사 세 명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천사 셋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은 뭐냐 하면 태의 열매에요. 열매. 여러분, 열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타난 것은 있는데 본체는 없는 것이 열매에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성경에서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정말 쉽게 가겠습니다. 그냥 아브라함이 임신했다 생각하세요. 마리아가 예수님 임신한 것처럼 아브라함 속에 뭐가 임신되어 있어요. 임신되어 있는데 속에 임신된 것을 아브라함 쪽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고 임신된 그 이삭이 아브라함이라는 육신을 밀어낸다고 생각해보세요.

밀어내면서 알아서 분리하고 빠져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세 명이라는 천사가 개입된 겁니다. 세 명 중에서 두 명은 심판과 관련되어 있어서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로 방문하고요. 한 명은 아브라함의 은혜를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임신한 그 분은, 예수님이지요, 마리아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임신했는데 임신한 그 분은 두 개의 속성을 갖고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저주하는 속성을 갖고 있고 또 하나는 긍휼, 사랑을 베푸시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피조세계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두 가지 속성을 단호하게 따로 분리시켜서 분류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피조세계, 피조물의 입장입니다. 더 기분 좋고 알기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은 태어나지도 않은 채로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고 형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저주받기로 작정되었어요. 이것을 야곱 개인, 에서 개인의 입장에서 거슬러서 그 원인을 찾을 생각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에서나 야곱은 둘 다 예수님의 속성의 열매기 때문에 그래요. 의존적이다 그 말이지요.

에서나 야곱이 독자적이 아니에요. 본인의 운명을 본인이 개척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적인 것이 아니에요. 내 것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을 지키려고 이 교회에 나왔습니까? 그래서 이 복음을 듣습니까? 아니잖아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거예요. 이 말을 풀이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속성을 펼치기 위한 두 가지의 색깔로만 배합되어 있습니다. 섞여져 있어요. 그 두 가지의 배합, 섞여짐이 계속해서 현상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덧 입혀지고 덮여지고 해서 새로운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뭐냐?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자는 저주받은 자요, 사실은 전부 다지요. 그런데 그중에 아브라함처럼 천사가 찾아온 사람이 있어요. 성령이 찾아온 사람은 은혜 받기로 작정된 아들의 나라의 백성, 천국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행함,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여러분 인생에 주저하지 마세요. 어떤 일을 안 해도 소용없고 어떤 일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그냥 질주하세요. 어차피 의미 없는 거예요. 주저하지 말고. 막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자기 것이 용납되면 안돼요. 내 안에 잉태된 그 분이 나를 밀어내니까 바나나 껍질 버리는 것을 여러분이 아까워하지 마세요.

바나나 속에 있는 흰 덩어리가 중요하지 노란 껍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자신을 창조성을 지닌 피조물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오늘날 껍질로 동원시킨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이 소자에게 물주는 것이 나에게 물주는 것이고 이 소자에게 옷 입히는 것이 나에게 옷 입히는 것이고 이 소자를 돌아보는 것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것을 네가 이해한다면 너도 같은 나의 천국백성이니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님성, 창조주성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자기 믿음을 포기할 자는 없는 거예요. 자기의 믿음 소망 사랑을 스스로 떼 내버릴 그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는 이야기가 능력이라는 말이에요. 얼른 보기에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능력이 있다면 이것은 다른 사람이에요. 질이 다른 사람이에요. 누가복음 24장 24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세상에, 빈 무덤은 보았는데 예수를 보지 못했던 거예요.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본인이 보고 믿으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본인을 포기 못한 거예요. 본인이 부활하신 예수를 봄으로 말미암아 본인을 천국까지 자기가 자기를 데려가려는 시도를 한 겁니다. 그것은 믿음 아닙니다. 행함입니다.

아브라함한테는 그런 것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나의 아버지 됨은 나의 기대나 예상을 벗어난다는 거예요. 예상 못한 자식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그 때 비로소 나는 만민의 아버지가 되고 아브라함 이름답게 되는 거예요.

내가 성도되고 내가 천국의 백성 됨은 내 예상을 벗어납니다. 성도 되려고, 천국 가려고 아무리 기를 써도 그것은 지옥이지 천국 아닙니다. 그런데 천국 가려는 나를 짓밟아버리고, 천국가려는 나를 못 가게 만들어버리고 오히려 내 속에서 계시던 분이 나를 밀어내면서 나와 새로운 관계의 정립에 들어갈 때 그게 성령의 관계거든요.

너는 너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주어질 때 비로소 너는 아들의 나라, 나의 백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믿음의 주체와 객체가 달라지지요. 우리가 믿지 않고 성령이 들어와 버리면 성령의 믿음이 우리 믿음을 날마다 쫒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나를 위해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그 모든 나도 같이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이게 단절이에요. 이게 떨어져 나가야 돼요. 떨어져 나가는 현상을 보여야 됩니다.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는 욕을 많이 얻어먹어야 돼요. 그 욕이 누가복음 24장 25절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믿는데 그 믿음이 실내용은 없고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 이 어리석은 자들. 우리가 그런 자였습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으려고 한 자에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생각했듯이,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고 의롭게 되었듯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의인 되잖아, 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믿음을 내가 고이 간직하려고 했습니다. 간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짓도 해서는 안 되고, 저런 짓도 해서는 안 되고, 인생 똑바로 살아야 되고, 성지순례 가서 팔레스타인에게 잡히면 안 되고, 적색경보지역에 들어가면 안 되고 죽을까봐 벌벌 떨고.

여러분, 죽는 다는 것, 인간들이 자진해서 죽을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신의 우수함과 잘남이 사라지면 자진해서 죽어요. 그게 자살이에요. 아직도 우리가 안 죽는 이유는 아직까지 자신의 잘남과 우수함이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십자가가 안보이고 더디 믿는 자가 되어버려요. 엉터리 믿는 자가 되어버려요.

누가복음 24장 26절에 보니까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바로 없는 존재로서 다시 찾아와야 우리가 스스로 믿는 자가 아니라, 교인이 아니라 성도가 되는 거예요. ‘네가 보기에는 그냥 너하고 똑같은 인간이지만 없는 분이 내 안에 계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창조성을 띄는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창조성을 띄는 피조물. 꼭 떨기나무 같아요. 불붙은 떨기나무 같아요.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내가 죽는 자 같으니 실은 산 자로다. 이거 미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내가 삼층천을 보았다. 삼층천을 봤다면서 이 지상에서의 꼬라지는 맨 날 고난 받고. 그런데 그 모습, 하나님마저 이 세상에서는 그런 모습으로, 자신의 창조주 됨을 그런 식으로만 드러낸다는 거예요. 고난 받는 식으로만. 무시당하시는 식으로만. 왜? 이 세상 모든 것은 자기 것 빼앗길까 봐서 울부짖는 함성들이기 때문에. 지옥의 함성들이에요. 자기의 주장하고, 자기변명하고.

누가복음 24장 27절에 보니까,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지금 글로바라는 제자와 또 다른 제자 사이에 끼어서 이런 말씀 하시고 지금 이 두 제자는 겁이 나서 엠마오로 도망치는 중인데 그 중에 나타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에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서 구약과 선지자의 율법을 다시 해석하는 겁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의 의를 다시 해석하는 것처럼. 의라는 것, 의로움이라는 것은 애당초 아버지와 아들 사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의에요. 이것은 창조전의 관계가 의입니다.

그런데 창조 후의 피조물은 의인이 될 수가 없어요. 아담은 의인이 아닙니다. 무죄인 상태, 언제든지 죄가 될 가능성이 있는 무죄인 상태지 적극적인 의인이 아니에요. 적극적인 의인은 창조 전에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적극적인 의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의를 실현하는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세상에서 자기 입장에서 출발했을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마땅함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알려주시는 그 주님, 그것이 우리가 지금 통과해야 될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주여, 제가 하나님 믿고 의롭다 하는 이것 때문에 주 앞에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 하는 겁니다.

아무리 꼼수, 꼼수, 꼼수를 부려도 그게 꼼수에 불과한 거예요. 결국은 나 천당 가려고. 하늘나라는 막혀 있는데, 못 가는데. 피조 이후의 인간이 열매가 안 되고 자칭 열매를 따먹어버린 주인공 역할을 하면서 창조성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의 나라에 합류하겠습니까? 못하잖아요.

못하면 못하는 줄 알면 되지 기어이 천국에 가고 지옥은 안가겠다고 버티는 그 고집은 사탄의 울부짖음이고 사탄의 울부짖음이 목소리를 통해서 튀어나온 거예요. “하나님이여, 다른 사람은 건드려도 나는 건드리지 마세요.” 이게 사탄의 목소리 아닙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를 슬프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뭡니까? “주께서 저를 버리시는 것이 합당하니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 잔을 마시겠나이다.” 아브라함에게 없는 게 나왔어요. 여러분이 잘 아는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정말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인데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로 구원받는 겁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늘의 징조라는 겁니다. 처녀가 땅에 있는데, 마리아가 땅에 있는데도 하늘의 징조라는 거예요. 하늘의 징조를 하늘에서 찾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하늘의 징조라고, 네가 하늘의 징조에요.

침몰해도 좋아, 네가 하늘의 징조라는 겁니다. “나 주저하지 않을 거야. 망할 거야.” 네가 하늘의 징조에요. 왜? 나는 껍질에 불과하니까. 사탕은 껍질 먹는 게 아니에요. 사탕은 비닐봉지 먹는 것이 아닙니다. 사탕 먹는 거예요. 주님께서 떨기나무처럼 우리를 사용한 거예요. 이용하신 겁니다.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가 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가 나올 때 아브라함은 그 자식 속에 또 들어 있는 메시아를 믿었던 겁니다. 육에서 나왔다는 것, 육에서 의로 나왔다는 그 분을 믿었던 거예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자식이 없어도 마땅한데 이 죄인에게 하나님의 약속, 비약속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을 잉태케 해서 나를 껍데기로 사용하신, 그렇게 되어 나오신 그 자식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 자식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창세전의 의로운 관계가 새롭게 수립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받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지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이 말은, 그 안에 모든 복의 원천자가 들어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같은 동일한 혜택을 입은 자라는 말이에요. 우리는 독자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의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 또 1절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너희는 나의 과실에 불과하다. 열매에 불과한 거예요. 열매가 열매를 걱정하면 안 되지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겨울철에 입는 털모자를 봤지요. 모자 끝에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그 방울을 덮어 쓴 거예요, 모자를 덮어 쓴 거예요? 모자 덮어 쓴 거예요. 방울은 거기에서 파생된 거예요. 그냥 달려 있는 장식품 같은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부요, 예수님의 표면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작용하고 있어요. 이 못난 놈, 이 못난 우리를 통해서 하나의 원뿔로 버티고 있어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오면 튕겨나가고 또 오면 족족 튕겨나가요.

우리의 역할은 뭐냐 하면, 불나방을 모집하는 거예요. 자기 의, 나는 우수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인생 살았다, 이런 인간들 와서 다 타죽게 만들어버려요. 지옥 간 존재라는 것을 들춰내는 기능으로 우리가 이 땅에 버티고 있습니다.

오늘 주제는 ‘이 순재’입니다. “못난 놈! 천하에 못난 놈!” 천하에 못난 놈이 이렇게 남에게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의 신앙인의 현존하는 방식이고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포기하시고, 우리의 사랑과 모든 행동을 다 포기하시고, 우리는 그냥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증인에 불과한 것을, 성령을 통해서 이 복 받은 자를 널리 자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가 끊어져 있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습니다. 그동안 하늘나라 가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꼼수를 썼습니까? 그러나 꼼수는 끝까지 꼼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제는 아무 걱정 말고 주님의 증인으로 활짝 펴서 이 지옥의 울부짖음밖에는 없는 이 세상에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존재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79강-갈 3장 6-9절(아브라함의 의)180311-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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