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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5 19:00:07 조회 : 57         
서울의존강의20180413a 베드로전서1장 8-11절(고난과 영광)-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8.64)

서울의존강의20180413a 베드로전서1장 8-11절(고난과 영광)-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8-11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절,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절, 자기 속에 계속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전서 1장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사람이 뭘 본적이 있어야 사랑이 돼요. 아무것도 안 봤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구라입니다. 이건 백퍼센트 구라예요. 거짓말이에요. 본 게 있어야 돼요. 본 게.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보지 않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본다든지, 듣는다든지, 어두운 가운데 피부로 접촉한 게 있다든지, 뭔가 있어야 돼요.

 

멀리서 본 적이 있다든지, 사진을 통해서 봤다든지, 그림을 통해서 본 적이 있다든지, 뭔가 감각적인 접촉이 없다면 그것은 귀신이든지 아니면 유령이든지. 결국 귀신, 유령이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 없는 존재로 분류됩니다. 없어요. 사람이 뭔가 볼 때에 있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제일 확실하겠죠. 뭔가 봐야 돼요. 보고, 그 다음에 저 사람이 믿을만한지, 안 믿을만한지를 검토하는 겁니다. 보든지 듣든지 뭔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모세 같은 경우에는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모세는 보이지를 않아요. 모세가 보이지 않는데, 그들은 본 게 있었습니다. 뭔가 하면 시내산 정상이 번쩍번쩍 거리고 시내산이 흔들리더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께서 그 산에 계시다고 인정해요. 그러나 모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모세가 나중에 와서 말씀을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는 모세가 이제는 보이는 모세로 나타났죠. 나타났는데, 모세가 올라갈 때하고는 달라요. 뭘 들고 왔어요. 돌판을 들고 왔습니다. 근데 돌판을 중간에 성질나서 깨버렸죠.

 

자, 그럴 때 시내산 밑에 있는 백성들은, 모세가 있다가 없었으니까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인간성이 좀 달라졌겠습니까? 안 달라졌겠습니까? 없는 모세가 나타났다. 그래서 그 모세한테 하나님에 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그들이 변화했겠어요? 안 변화했겠어요? 자꾸 시간이 가니까 답변은 제가 해야 되겠죠.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보를 추가했을 뿐이죠. 정보를.

 

인간이 뭐가 문제냐 하면은, 인간에게 몸이 있다는 게 문제거든요. 인간에게 신체, 육체, 몸이 있잖아요. 몸이 있으니까, 모든 매사에, 외부에서 오는 듣는 것, 보는 것, 누가 이야기하더라, 율법을 이야기하더라, 하는 이 모든 것은 뭘 해도 몸의 허락이 있어야 돼요. 몸의 허락. 누구 몸? 내 몸의 허락이 있어야 돼요. 내 몸의 허락.

 

근데 이 몸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느냐 하면 내 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해요. 내 몸이 기분 좋을 때, 내 몸이 유리하다고 여겨질 때, 내 몸이 이익이라고 느껴질 때만, 그럴 경우에만 바깥에 있는 외부정보를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든지, 나는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든지, 여러 가지 표현방법이 있지만, 어쨌든 간에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그걸 인정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조건이 뭐냐 하면 내 몸이 유리할 때, 내 몸이 그냥 지켜질 때, 안정적으로 보존이 된다고 하는 그 조건 하에 받아들인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 몸은 결국 누구한테 충성하느냐 하면, 현재 기존에 있는 내 몸에 충성하게 되어 있어요. 환자가 병원에 가서 주사 맞는 아픔을 견디는 이유가 병원을 위해서입니까? 이 아픔만 견디면 내 몸은, 내가 다시 아프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더 튼튼해질 수 있다는, 내 몸의 본성적인 요구조건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몸에 주사를 맞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내 몸을 가져가세요. 내 몸을 죽이세요. 나를 이것보다 더 아프게 해서 죽이세요.”라고, 그걸 요청하려고 병원에 안 가잖아요. “내 몸을 바칠 테니까 이 몸 가지고 장사 잘하세요.” 이러지 않는다 이 말이죠. 병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몸이 중요하니까.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병원에 가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요구하는 모든 귀찮은 검사도 감당이 되고 참아내는 것은 다 건강한 내 몸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버릇이 어디에 가겠어요? 안 가는 겁니다. 그 버릇이 갈 수가 없어요.

 

8절에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라고 해서, 이 말의 의미가 뭐냐 하면 보는 식으로 믿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채택한 적이 없다. 이래 되는 거죠. 보여주는 것으로 믿으라는 구원방식을 주께서는 아예 채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지 않았는데 사랑하게 되니까. 보지 않았는데 사랑하게 돼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보지 않으면 없는 건데, 없는 존재를 뭘 사랑해요? 인간은 평소에 자기 신체가 거기 있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지 않고 한다는 이건 뭐 성립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처럼 그렇게 들립니다. 그래서 지난달에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가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했잖아요. 희대의 사기꾼.

 

뭐 사기도 걸려들 만한 내용으로 한 게 아니에요. 먹혀들지 않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사도거든요. 안 먹혀들면 할 수 없고! 이런 배짱이에요. 이런 배짱입니다. 자기가 몇 명을 더 꼬셔가지고 천국 보냈다는 그러한 성과는 전혀 이거는 베드로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베드로는 지금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고 있죠.

 

가게 주인하고 가게 직원하고 차이점이 그거잖아요. 자기 가게가 아니기 때문에 월급 준만큼, 아니 월급 준만큼도 하지를 않아요. 월급 준만큼만 하지 더는 안 하잖아요. 그러나 가게주인은 근무시간이 20시간이 넘죠. 밤이나 낮이나 자기 가게 신경 쓰고, 직원은 근무시간이 한 댓 시간이 되나 몰라요. 6시간 중에서 3시간은 엉뚱한 짓 하면서, 시계나 보면서 빨리 퇴근이나 하려고 하지 전적으로 하지는 않아요. 직원들이 딴 짓 할 때, 그 시간도 주인은 가게에서 충성을 다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주인도 있어요. 직원한테 맡겨놓고 자기는 낚시하러 놀러가는 사람들의 퍼센트도 제법 돼요. 그러면 가게는 망하죠. 할 필요가 없죠. 가게를 할 때 놀려고 가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요.

 

어쨌든 간에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지금 전개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인데, 전개되는 일이 인간 쪽에서 어떻게 시도하느냐 그거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봐야 믿는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생각이고요. 주님 쪽에서의 구원의 방법은, 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가 내 백성이라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일하시는 거예요.

 

“뭘 체험하고 뭘 느껴야 믿겠습니다.”하는 쪽은, 그거는 인간들이 하는 짓이에요. 뭐 구시렁구시렁 거리면서. “잘 믿고 싶어도 주님께서 사도바울처럼 그런 획기적인 체험을 준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 믿음이 요 모양 요 꼴이죠? 뭐 체험을 줘야 믿죠?”라고, 이렇게 믿음 없는 것도 전부 다 하나님 탓이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 안 한 탓으로 돌리는 그런 방식이 인간이고요. 주님은 아무 체험도 없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그런 식으로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근데 그런 베드로의 주장에 대해서, 주님의 주장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럴 리는 없다는 거예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비켜가면서 건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믿고 싶어서 오는 사람은 천국에 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야! 믿을만해서 믿어야 되겠다.” 이런 사람은 오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뭐지 이거?! 뭐지? 보지도 못하고 내가 사랑하네! 나한테 그런 요소가 있었어? 내가 그런 인간이었어? 나는 뭔가 따지고 빈틈없이 분석하고 나한테 뭐가 이익이며 손해는 얼마냐, 그걸 따지는 그런 본질을 갖고 있는 내가, 아무것도 준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고, 아무것도 뭐 장래에 잘 되겠다는 그런 것도 없는데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 뭐 이런 일이 다 생겼냐?!” 이게 바로 그 당시에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방식이에요.

 

지금 베드로전서 1장 8절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 공식에 대해서. 이 공식은 주께서 양보할 수 없는 공식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줘도 문제에요. 은혜를 주게 되면 은혜를 더 달라고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진짜 은혜를 은혜로 받아버리면 “아이고, 안 주셔도 되는데 왜 주셨습니까? 이거는 제 노력과 상관없이, 내 노력여하에 관계없이 그냥 공짜로 주시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할 때 은혜를 은혜답게 아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염치없게 더 주세요, 라고 할 일은 없을 거 아니냐 말이죠. “더 주세요.”라고 하는 일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뭔가 마땅히 얻을만한 짓을 했기에 얻었다고 하는 사람은 “주여! 이게 뭡니까? 내 노력에 비해서 너무 은혜가 적습니다. 더 쭈세용~!”하고 이렇게 또 손을 내미는 거예요. 그래서 더 주면 “더 주세요!” 이래 나와요. “옆에 있는 김집사 보다 박집사 보다 더 주세요!”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완전히 은혜받기 쟁탈전이에요. 은혜받기 쟁탈전. 이래서 건수 올렸다, 뭐 이래서 은혜 받았다, 뭐 난리도 아니에요.

 

과연 은혜라는 것이, 은혜 받을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과연 그 은혜를 주셨을까요? 은혜를 진짜 주셨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 자체가 이미 바뀌어져 있을 거예요.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래서 은혜란 있는 것에다가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 자체가 돌변해야 그게 은혜가 온 사람이죠. 돌변해야. “지금껏 교회생활 잘했기 때문에 그래도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우리 가정의 태평과 애들이 잘 되고 뭐 남편 돈 잘 버는 게 있어야 됩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지금 달라진 게 없어요. 그건 성과급이지 은혜라고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나오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행함의 대가일까요? 은혜일까요? 사랑이라는 게. 고린도전서 13장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은사라는 말이 은혜라는 말이거든요. 믿음, 소망, 사랑이, 이게 행함의 대가에 속하겠습니까? 아니면 은혜에 속하겠습니까? 은혜에 속하죠. 은혜라고 하는 것은 나는 안 행했는데 왔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누군가 내 대신 나한테 은혜를 주도록, 그 근거가 주어지는 행함을 내가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이 했겠죠. 그 다른 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그 다른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보지 않고 사랑하는 거예요. 이제 공식이 풀렸습니까? 주님 쪽에서 주신 게 뭔가 나한테 도달된 거예요. 도달된 시점부터 추정해보니까, 내가 행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행하셨고, 그 행하신 결과물이 나한테 도달된 거예요.

 

근데 그 도달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그냥 도달된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것에다가 뭔가 더 추가적인 것을, 뭔가 하나 덤으로 더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평소에 내 마음 위주로 살았던 마음 자세가 도달된 은혜로 말미암아 이게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아, 내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노력해서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집안의 살림이 내가 가계부 써서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추가적인 은혜가 온다는데, 그 추가적인 은혜가 뭡니까? 라고 한다면, 바로 냉장고에 있는 모든 반찬, 그게 인간의 마음만 바뀌면 반찬 하나, 깍두기 하나, 전부 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보이는 겁니다. 그게. 식은 밥부터 시작해서 저 냉장고 깊숙한 데에 집어넣어놓고 일주일째 안 먹고 있는 밑반찬부터 시작해가지고 락앤락에 넣어놓은 그런 것 있잖아요. 인기없어가지고 뒤에 처박아놓고 그냥 썩기를 바라고 있는 그런 반찬들. 그런 것조차도 은혜 아닌 게 없는 거예요. 그런 것조차도 전부 다 은혜에 속했다는 것으로 변화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시장가서 사와서 다듬어서 반찬 했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그것 자체가 전부 다 주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이끄셨다는 은혜성을 놓치지 않게 되죠. 그러면 주님의 공식은 보지 않고 사랑하는 게 주님의 공식이죠. 보지 않고 사랑하는 거. 냉장고의 밑반찬을 주의 은혜라고 한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냉장고에서 까꿍! 하고 얼굴 내밉니까? 아니죠. 냉장고 속에 예수님의 얼굴이 수염나가지고 이래 있습니까? 예수님이 수염이 난지 안 난지도 확인되지 않지만. 뭐 예수님을 봐야 예수님이다, 아니다가 판정 나는데 본적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본 사람이 이건 예수님이다, 이건 예수님이 아니고 악마다, 라고 이렇게 하겠는데, 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건 예수님이고, 이건 악마라는 판정을 못 내리잖아요. 판정을 못 내리면 자기가 받았던 것이 마귀가 준 것인지, 주님이 준 것인지 어떻게 판정하느냐, 그 문제가 계속 생기겠죠. 주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마귀의 은혜였더라. 이럴 경우도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럴 때 어떻게 판정하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바로 나의 변화에요. 내 자신이, 내가 행한 것은 행한 거고, 내가 행하지 않은 것은 주의 은혜다. 이게 아니고, 소급해서 나의 모든 것이, 나의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일괄적으로 몽땅 다 딸딸 긁어서 그렇게 주의 은혜로 전환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려면 뭐 부터 다루어야 하느냐 하면, 아까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뭐냐 하면 몸이라고 했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누구의 허락을 맡는다? 내 몸의 허락을 맡는다고 했죠.

 

그런데 이제는 이게 아니고 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되어야 해요. 몸 자체가. 몸 자체가 은혜가 되어야 한다면, 내가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몸을 주셨다. 이러면 없었는데 생겼으니까 은혜라고 쉽게 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없을 때를 내가 상상을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없을 때, 이미 40년, 50년 살았는데 다시 내가 없을 때로 돌아갈 수 없잖아요. 이건 니고데모의 난처한 입장하고 똑같다는 말이죠. 내가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납니까?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방식은 니가 모태에서 다시 태어나는 방식이 아니고, 니가 없을 때는 니가 뭐 하면 됩니까? 니가 죽으면 되죠. 죽으면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굉장히 간단하죠. 내가 없을 때를 상정해야, 기본적으로 해야 현재 내가 있다는 것이 은혜라고 인정을 하겠는데, 현재 있는 몸을 다시 리마인드remind, 기억해서 돌아갈 수 없잖아요.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이 몸을 없애는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봅니까? 못 봅니까? 볼 수가 없어요. 볼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해요? 써먹을 데가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나라, 천국을 못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뭐 미용에 좋다는 거 여러 가지 바르고, 보톡스로 고치고 이게, 이 몸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이 말이죠. 천국에 못 들어가요. 못 들어가는 몸 가지고 이 몸을 지키려고 하니까 이게 헛방이라 이 말이죠. 뭐 이렇게 앉아있지만 시장에 나가보세요. 뭐 하려고 그렇게 분주하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리 살아도 천국을 구경 못할 쪽으로 계속 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몸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몸을 놔야 되는데, 그 몸을 버려야 되는데, 모든 판단도, 예수 믿을까 말까, 교회 갈까 말까, 모든 판단을 자기 몸의 허락을 맡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 자체가 고장이 나버렸어요. 이게. 이 몸 자체가 주님께서 안 받아주는 몸이라니까요. 안 받아주는 몸 가지고 십일조하고, 안 받아주는 몸 가지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참석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발하고. 가만히 보니까 이발했네요. 이발하면 구원에 좀 도움이 되는가요? 우리 몸을 우리가 손대면 그거는 아무리해도 지옥가지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 몸을 다루어주셨어요. 다루시는데 어떻게 다루셨느냐, 몸을 없애버리는 쪽으로 해요. 늙어 죽이는 쪽으로 처리를 합니다. 늙어 죽이는 쪽으로. 얼마나 감사한지요. 없애버려야 돼요. 없애버리는데, 그냥 없애버리면 자살하고 똑같이 돼요. 안 그래도 불신자도 없어지는데. 그거 없어진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없어질 때 없어지는 방법이 영을 통해서 없애야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성령이 와서 우리 육을 손대야 된다 이 말이죠. 성령이 와서.

 

성령이 와서 손을 대게 되면, 성령께서는 뭐냐 하면 이게 인수인계를 해요. 지금 이 몸은 우리 거잖아요. 우리 거라고 우겨봐야 소용이 없어요. 구원 못 받습니다. 우리 것에서 인수인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주님의 성령이 와서 이 몸을 인수인계를 한다니까요. 니 것이 아니고 이제는 누구 것이냐 하면 성령님의 것, 주님의 것으로 이걸 바꿔버려요. 바꾼다 이 말이죠. 바꾸게 되면 내 몸을 내가 관리할 때는 어떻게든 구원받겠다는 일념이 강해요. 구원받겠다는 것.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인수하면 구원문제에 대해서 니가 이제는 손을 놓으라는 겁니다. 구원받겠다는 데에서 왜 손을 놔야 하느냐 하면, 구원받겠다는 그 열의, 열망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 썩어빠진 몸의 욕구에서 나왔거든요. 썩은 몸을 가지고 구원을 받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의에 나라에 가겠다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거든요. 성령이 온다는 것을 뭐로 아느냐 하면, 성령이 왔으면 내 몸을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 몸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을 없애죠. 왜냐, 구원 안 되는 몸이기 때문에 없애주는 거예요.

 

없애주시면서, 성령께서는 우리 몸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 몸을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어주셔서,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진 것을 구원하죠. 어떻게 뭐 동의가 되십니까? 동의는 이상하게 되는데, 말은 이상하게 동의가 되는데, 둘러치나 메치나 뭐 이런 생각이 안 듭니까? 결국 내가 구원받는 것은 동일하잖아, 라는 뭐 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아까 제가 인수인계라는 말을 한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래요. 성령을 통해서 내 것을 어떻게 구원해 달라, 이거는 안 된다는 말이죠.

 

인수인계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내 것에서 손을 떼라는 거예요. 옛날 주인으로서의 행세를 그만두라 이 말이죠. 니 몸을 고물단지로 쳐주는데, 폐차처분 하는데, 니가 알아서 니 몸을 폐차처분 하는 것은 안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은 기껏 자살하는 것 밖에 안 돼요.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닙니까? 자살했잖아요. 지 몸을 지가 폐차처분 하겠다는 거예요. 왜 지 몸을 지가 목 졸라 죽입니까? 자기 게 아닌데, 자살하면 성령 받습니까? 힘들어서 자살했다고요? 누구 건데 힘들어요? 누구 건데? 힘들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몸은 누구 거다? 내 것이라는 그 고집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우울증은 마귀 들려서 그렇잖아요?”라고 이렇게 하는데, 아니 마귀 안 들린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다 마귀 들렸지. 어디 우울증만 마귀 들렸습니까? 다 마귀 들렸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음부의 권세, 죽음이 권세에 있는데요? 안양강의에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을 했거든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의 권세가 이겼다는 말이에요. 이 세상은 지옥의 권세가 이겼어요. 주님께서는 교회 빼놓고 나머지기는 누가 이겼다? 지금 지옥의 권세가 이겼다는 거예요.

 

그럼 지옥의 권세가 이겼다는 말을 세상 사람이 “마귀가 이겼다”라고 이래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구원받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지옥의 권세가 딴 게 아니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목사가 시킨 대로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예배참석하고 성의 있게 다 하고. 예수도 믿을 때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진실 되게 성의 있게 믿고. 참 이게..., 교회가 지옥이에요.

 

제가 어제 낮에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국제전화에요. 국제전화가 간혹 오니까 그럴 수 있다 싶어서 전화를 받았어요. 국제전화의 내용이 뭐냐 하면, 등기를 붙였는데 두 번씩이나 빵꾸가 나서 전화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 내용을 알려거든 1번을 누르시고 뭐 하려거든 2번을 누르라는 거예요. 1번을 딱 누르니까 아까 그 내용이에요. 등기가 두 번씩이나 빵꾸가 났다는 그 내용. 근데 말씨를 들어보니까 말씨가 이상하게 한국 말씨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이상해요. 그래서 전화를 끊고 우체국에 전화해보니까 그게 바로 보이스피싱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보이스피싱 근처에도 안 갔어요. 제가 보이스피싱이 뭔지 알려드릴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되 진실 되게 믿어야 된다.” 이게 보이스피싱이에요. 그냥 보이스피싱은 돈만 날아가죠. 이거는 완전히 인간의 영혼이 날아가요. 영혼이.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은 누구의 권세 아래에 있어요? 지옥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어요. 이게 생뚱 맞는 것이 아니고, 이게 비현실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 안목에서는 이게 실제라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 안목에서는 모두가 지금 지옥의 권세에 있어요. 지옥의 권세, 악마의 권세에 있다 이 말이죠. 오히려 특이한 게 뭐냐 하면 거기서 빠져나와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그것을 이상하게 느껴야 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여기 9절에 보세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영혼의 구원을. 그것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사랑한다. 이게 이상해야 된다는 거예요.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 간만에 보이스피싱한테 전화가 왔네. 이게 다 오늘 복음전하라고 그렇게 된 건가?

 

성경대로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굉장히 낯설어 해요. 그러면 낯설지 않은 이야기 해드릴게요. 제가 오늘 서울 올라오면서 오송역을 이렇게 지나갔어요. 오송역에서 ktx가 섰거든요. 섰다가 그 다음에 천안으로 가는데 창가를 보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철도시설공단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철도, 열차를 수리하고 개선하는 그런 작업장이 나와요. 철도공사에 소속된 작업장이. 오송역 하고 거의 붙어있어요. 굉장히 넓고 열차도 있고 거기에 보면 사원들 숙소도 있어요. 열차위에서 보니까 보인다 이 말이죠.

 

그걸 보면서 옛날 20대가 생각이 났어요. 20대에 대학졸업하고 취직하고자 했던 그때에 그 감정이 확 올라왔어요. 뭐냐 하면 그때에는 시설공단이 없었지만, 만약에 저 철도시설공단에 취직이 됐다고 합시다. 20대에 취직하고 싶었는데 취직이 돼보세요. 그것도 공기업이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큰소리를 치고 싶어 할 거예요. “나 취직했다!” 이게 뭐냐 하면 이제 내 인생은 내가 밥 먹고 살게 되었고, 그리고 사원 숙소까지 있으니까 거기서 출퇴근하면 되고, 그래서 돈 모아가지고 나는 어떤 여자와 가정을 이룰 수도 있고, 가정을 이루고 애를 놓을 수도 있고, 아담한 작은 아파트라도 마련할 수 있고. 그러면 나는 뭐냐, 취직만 하면 사는 거예요. 군에 갔다 와서 20대에.

 

그때는 아무생각도 없이 그냥 취직해서 돈벌어가지고, 돈모아가지고, 결혼도 하고 아파트도 사고 그거만 하고 싶어요. 그게 바로 음부의 권세라니까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게 할 때 국가나 세계평화를 생각했어요? 시리아의 평화를 기대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시리아의 평화. 아니죠. 누구 몸입니까? 시리아의 남의 몸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누구 몸입니까? 내 몸은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더 깊은 의미 같은 것은 없어요. 그냥 본성이고 그냥 본능이라니까요.

 

나이가 20대 중반인데 지가 밥벌이 못하면 남자도 아니고 뭐 어떻고 그런 게 있잖아요.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마는. 어쨌든 간에 그 당시에 결혼할 때니까 빨리 취직해서 돈 모아가지고 집도 사고 애기도 놓고. 뭐 대통령도 필요 없어요. 그것만 족해요. 취직해서 가방 들고 숙소에서 왔다갔다 해가지고 월급타서 적금 부어가지고 돈 모으는 것. 단지 그것뿐이에요. 뭐 다른 세계평화도 필요 없어요. 그냥 내 몸만 하나 건사하면 더는 소망이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전부. 그게 바로 음부의 권세입니다. 물론 그때 교회에 나갔어요. 교회 나가서 목사 설교하는 꼬라지나 내가 기도하는 꼬라지나 왜 그렇게 죽이 잘 맞는지. “주께서 살아계셔서 너의 소원을 이루어준다. 믿고 기도하면 된다.” 그것에 빨려들었거든요.

 

결국 누구냐 하면, 예수님은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몸에 근사한 것, 이것 지키는 게 급선무에요. 이것 지키는 게. 요한복음 3장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라는 그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목사는 그런 소리 한 적도 없고. 육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걸 뭐라고 해석합니까? 영으로 살면 내 몸이 잘 된다. 분명히 이렇게 해석을 했을 거예요. 내 몸은 무조건 잘 돼야 돼요. 우리 가정은 무조건 잘 돼야 되고. 이러니까 확 실감이 나죠.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10절에 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자, 이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해요. 설명 안 했으면 좋겠는데. 설명 안 했으면 나는 교회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로 취직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도 했다. 주여! 이게 축복이다. 이 축복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나이 들어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그런 보장이겠죠. 우리는 이런 이야기로 끝내고 싶은데, 성경에서는 “구원은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 구원이 뭐냐, 선지자에요. 아, 이거는 바로 흔히 말하는 20대 초반에 지 몸만 건사하면 주께서 주신 축복이고, 그래서 나는 신자고 천당 간다는 그 사고방식과 성경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한 선지자의 사고방식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달라도. 만약에 20대에 이런 이야기를 봤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선지자 그거는 특별한 사람이고, 그거는 믿음 좋은 사람이고, 나 같은 평신도는 이쯤해서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생각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무슨 성경에 평신도가 있고 무슨 선지자가 따로 있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모든 사람이 뭐다? 그리스도의 종이잖아요. 주님의 증인이고.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없었어요.

 

누가 있어요? 목사는 완전히 높은 계급이고, 바리새인, 사두개인하고 똑같아요. 나는 20대 청년이니까 시킨 대로 하고, 시다발이 같은 청년회 회원이고. 목사님은 저 위에 있고. 그래서 청년은 강대상에 올라가지도 못해요. 그 밑에 부목사, 양쪽 어깨에 장로들, 그리고 거기서 가지 하나 쳐가지고 부목사 계열이 또 나오고. 꼭 인간의 뼈 구조처럼, 머리 있고 어깨 있고 갈비뼈 있는 것처럼. 이 갈비뼈가 뭐냐 하면 장로책임 하에 있는 각 조직들. 선교부, 친교부, 여전도회, 남전도회 있는 것처럼. 그런 조직에 익숙해졌어요.

 

익숙해져서 장로는 배나 존경하라고 해서 무조건 굽실거리고 존경했죠. 뭣 때문에 존경했는지 모르지만. 나도 언젠가는 장로가 되어서 교회의 언약궤 메고 가는, 벧세메스에서 언약궤 끌고 가는 암소처럼 나도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겨야지. 장로가 되게 되면 목사를 섬겨야지. 부흥사의 설교에 의하면 목사급 따로 있고, 장로급 따로 있고, 평신도급 따로 있고, 평신도는 저 부끄러운 구원, 상급도 없고, 천당 가더라도 저 구석에 앉아서 부끄러운 구원받는다고 이래 이야기하니까, 천국에 가도 계급이 있는 줄 알았어요. 보이스피싱이었습니다. 사기꾼들이었어요. 사기꾼들.

 

목사가, 장로가, 그들이 노리는 것은,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교회가 필요해서 교회 만들기에 나선 사람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시도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여기 교회 있잖아요. 교회. 교회 있으니까 내치지 마세요.”라고 주장한 사람들이에요. 사기꾼들입니다. 진짜 교회는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게 교회에요. 음부의 권세가. 아까 음부의 권세는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 중심이다? 기존의 뭐 중심이다? 내 몸 중심이에요. 자기 몸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게 음부의 권세, 악마의 권세라니까요.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그게 선지자들입니다. 스데반집사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돌에 맞아 죽었어요. 스데반집사가 굉장히 아쉬워했습니까? “이거 뭐 예수 잘 믿으려고 하다가 조기에 죽네.” 이러면서 섭섭해 했습니까? 주님 앞에. 이미 소유권이 넘어갔어요. 소유권이 넘어갔다고요. 내 몸이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가 성령이 충만한 거거든요. 성령으로 넘어가버렸어요. 성령으로 넘어가버리면, 이제는 나의 구원자체도 날아가 버려요. 내가 있어야 뭐 구원이고 말고 하죠. 내가 없는데요. 내 구원이 없어요.

 

내 몸이 있을 때는, “나 구원시켜주세요. 천국가게 해주세요.”라는, 이런 요구조건이 성립이 되지만, 내가 없는 이상은 뭐냐 하면 주님의 구원 작업에 참여한 게 돼요. 주님의 구원 작업에. 집에 내가 있고 몸이 아파서 병원에 못가서 동네의사를 초빙해서 왕진할 때는 주인공이 내 몸이 주인공이에요. 요새 왕진은 거의 없잖아요. 하도 비싸니까. 옛날에는 왕진이 있었어요. 왕진비를 주던 말든 이렇게 하는 것 하고. 내가 간호사 자격증 따가지고 그 의사 병원에 취직하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그렇죠.

 

이거는 내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의사가 필요하지만, 간호사가 되어가지고 그 병원에 취직하게 되면,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뭘 위해서? 병원이 잘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내가 계속 일할 수 있으니까. 그 병원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이제는 병원 쪽에 서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해요. 병원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나 잘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은 결국 누구 잘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주님만 잘 되면 돼요. 주님만 영광스럽게 되고, 주님만 증거 되게 되면, 그걸로 군말 없어야 돼요. 아무 군말이 없어야 돼요. 사나 죽으나 그것은 주께서 할 소관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 구원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애초부터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내 구원은 없고, 무슨 구원이 있느냐 하면 우리 구원이 있어요. 우리 구원. 내 구원이 아니고 우리 구원이 있다니까요. 우리 구원. 이거는 뭐냐 하면 집합 구원이거든요. 이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법하고 똑같아요. 이스라엘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고 했죠. 처음에 이스라엘이 나올 때. 이스라엘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피 없이,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이 착합니다.”라고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개인의 어떤 자질이나 그 어떤 것을 새삼 묻지를 않죠. 고관대작이든, 그때 고관대작도 없었지만, 누구든 관계없이 문설주에 뭐 발라야 돼요? 피를 발라야 돼요. 피를 발라야 된다고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라는 것은 뭐냐, 지금 예수님께서 유월절이라는 경계선에 서 있는 거예요. 이쪽은 애굽이고 이쪽은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주님께서는 경계선을 형성하면서 출몰하거든요. 그 출몰하는 현장에 바로 우리 자신들의 변화가 있는 거예요. 변화가. 제가 수요일에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구원을 챙기는 것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이쪽은 천국이고 이쪽은 지옥입니다.”라는 경계선의 그 역할을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라니까요. ‘우리’라는 집단 구원.

 

그러니까 내가 잘났다, 못났다가 아니라, 주님께 은혜 받은 사람은 동일한 소감, 반응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동일한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고백이. 그런 동일한 고백이 억지로 나올까요? 감사함으로 나올까요? 감사함으로 나오죠. 자,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의 소유권이 예수님께로 바뀌면 우리의 몸을 죽이잖아요. 죽어져야 우리가 없이 되고. 없는 데서 다시 있게 되면 우리는 은혜라고 느끼죠. 육은 사라지고 영의 사람으로 다시 생기면 그게 은혜가 아닙니까?

 

근데 그 육의 몸이 점점 더 늙어죽어 갈 때 죽어가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어요. 자기가 죽는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죠. 그러면 자기 속에서 성령이 역사할 때에, 우리 속에서 뭘 계속 유발시키겠습니까? 우리의 죄가 이렇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들을 하겠죠. 왜냐하면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기 때문에 그래요. 니들이 생각하는 죄와 니들이 생각하는 의와 니들이 생각하는 심판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죄의 규정, 의의 규정, 심판의 규정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다 떠났잖아요. 열 두 제자 다 갔죠.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 졌잖아요. 그 사람 죄인이에요? 죄인 아니에요? 죄인이죠. 그거 뭐 십자가 졌다고, 노가다 했다고, 죄인이 의인됩니까? 옆에 구원받은 강도는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이죠. 본인이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릴만한 짓을 했다고요.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즐거워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하품할 문제가 아니고.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문제가 즐거워해야 될 문제에요? 슬퍼해야 될 문제에요? 둘 중의 하나에요. 수능보다 더 쉬워요. 둘 중의 하나인데. 우리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뻐해야 될 거예요? 슬퍼해야 될 거예요? 그럼요. 기뻐해야 되죠. 기뻐해야 될 문제라고요.

 

이게 특이하다 이 말이죠. 이게 특이한 거예요. “이근호 목사는 뭐 말만 하면 지적해서 못 가겠다.” 지금 이러면 안 된다고요. 지금 뭘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뭘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놈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체면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그런 식으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음부의 권세에서 ‘우리’라는 교회만이 이겨요.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긴 게 돼요. 음부의 권세에서. 개인적으로 백날 남한테 이겨봤자, 음부의 권세를 못 이기면, 그거는 지옥에서 하는 게임이고, 거기서 이긴들 그게 이긴 거겠어요? 지옥에 갔다, 축구장이 있더라, 5대 0으로 이겼다, 메시가 한 3골 넣고 호날두가 한 2골을 넣었다, 그럼 거기서 박수쳐야 됩니까? 지옥에서? 상품이 지옥불인데요?

 

젊은 사람들은 완전히 야구, 축구, 스포츠에 목메어있다고요. 지옥에서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요. 지옥에서는 괴로우니까 계속 게임을 개발해요. 계속 개발해서 지금 올림픽 경기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되지도 않는 게임, 족구까지 올림픽 나오려고 덤비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이기고 싶은데, 세상이 만만치 않잖아요. 그 스트레스를 어디서 풀어야 돼요? 스포츠로 풀어야 되죠.

 

그건 점잖은 데 속하고. 스포츠 푸는 그것도 시시하면 이제는 화투, 도박, 스포츠 도박, 로또가 시작되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지기 싫다는 거죠. 내가 보니까 이혼하는 것도, 이것도 하나의 게임 같아요. 지기 싫어서 이혼하는 것 같아요. 네가 찼니, 내가 찼니, 그 시합하는 것 같아요. 아무나 차면 어때요. 둘 다 헤어졌는데. 근데 헤어질 때 내가 차야한다는 거예요. 안 그러면 쭈글스럽다는 거예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설교했듯이, 세상이 주는 수모와 수치가, 참 예수님 고난처럼 아파요. 하지만 지옥에 들어있는 그 수모와 수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서울시장 누가 나왔니, 지옥시에서 지옥시장 해서 뭐 하려고? 아! 뭐 할라꼬?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게. 주님께서는 우리 몸에다가 제사를 가동시켜요. 율법의 제사법을 가동시켜버려요.

 

그러면 우리 몸은 뭐냐, 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성물이 됩니다. 거룩한 몸이 돼요. 어떤 조건하에? 내 안에 십자가의 피 중심으로 제사가 진행된다는 조건하에. 성령께서는 바로 구약 전체를 다 들고 옵니다. 율법 전체를 다 들고 와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 영혼에다가, 마음에다가 그걸 집어넣어요. 그걸 집어넣는다고요. 그러면 뭐냐, 선지자들이 생각했던 그 뿌리에서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80413a 베드로전서1장 8-11절(고난과 영광)-이 근호 목사.hwp (68.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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