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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6 12:55:19 조회 : 356         
284강-갈 3장 26-27절(그리스도의 옷)180415-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49.39.243)
284강-갈 3장 26-27절(그리스도의 옷)1804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26-27절입니다. 신약성경 305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옷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금까지 갈라디아서를 죽 보았는데 그 때는 옷이라는 말이 안 나왔고 율법이라는 말이 나왔지요. 율법은 무엇을 만드느냐 하면, 저주받은 몸을 이 세상에 내세웁니다.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430년 후에 율법이 추가되었고 약속을 세상적으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율법이 견인하는 거예요.

매스스타트라 해서 평창올림픽에서 남자 스케이트 제일 마지막 게임할 때 우리나라 선수가 두 명이 나왔어요. 한 사람은 견인하다 뒤로 빠져버리고 나머지 한 사람이 뒤에서 치고 나와서 마지막에 금메달 땄지요. 금메달 따고 욕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약속을 견인하기 위해서 율법이 추가되는 겁니다.

율법이 추가되면 율법은 뭘 이야기하느냐? 우리 몸이 저주받을 몸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저주받을 몸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딜 봐서 인간이냐 하는 겁니다. 저주의 대상이지요. 네가 보기에는 네가 괜찮지만 주님 시선이 꽂혀버리면 너는 지옥가야 된다는 겁니다.

저주받을 이 몸들을 가지고 하는 일이 있어요. 뭐냐 하면, 최선을 다 합니다. 교회 다녀도 최선을 다하고, 헌금을 해도 최선을 다하고, 전도나 선교나 기도를 해도 남한테 안 지려고 악바리처럼 합니다.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율법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걸려든 거예요.

공식은 이렇습니다. 교회 충성하면 지옥 간다. 그 공식이죠. 그게 율법의 한계입니다. 저주받은 몸.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천국은? 그런 질문이 그 다음에 딱 나와야 돼요. 그러면 천국은? 옷 입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옷이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옷은 어느 백화점에서 팝니까, 하고 나오겠지요. 어디서 구입합니까, 라고 오는 겁니다.

그럴 때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세례 받으면 된다. 세례는 뭐냐 하면, 돈 주고 구입하는 것이 아니에요. 덮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세례는 폭력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 다 폭력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같이도 안 봐요. 그냥 덮쳐버립니다. 위에서 그물 덮치듯이 그냥 덮쳐버리지요.

그렇게 덮칠 때 율법을 먼저 주고 성령세례로 와서 덮치게 되면 그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보다 먼저 있던 약속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에 두 개의 단어를 동원합니다. 하나는 세례라는 용어, 또 하나는 옷이라는 용어지요.

이 용어를 사도바울이 동원하는 것은 성령세례 받은 자만 알아듣도록 하는 자체적인 폐쇄적 용어에요. 일종의 암호 같은 겁니다. 사도바울이 무슨 암호를 사용하는데 ‘내 말 들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혹시 여러분 가운데 성령세례 받은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내 옷과 성령세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제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해요.

설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 그러냐 하면, 26절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이 신약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문장이고 사실은 성경전체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안과 밖,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을 나누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을 나눈다는 말은 임의로 나눌 수가 없고 이미 성령께서, 주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수 안에 있는 사람 따로, 예수 밖에 있는 사람 따로 구분 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분되었음을 측정하는 용어가 두 개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 하나는 세례고 또 하나는 옷이라는 거예요.

세례라는 말과 옷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이거 듣고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니고 이미 성령이 와서 구원받은 사람이 혹시 계십니까, 하고 묻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것은 암호니까. 세례, 옷, 이런 것이 암호거든요.

그러면 이것을 암호라고 제가 구태여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율법을 주고 그래서 율법을 받은 대상자가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독대하시고 전달하라고 건네준 것이 있어요. 그게 십계명인데 그 첫 계명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이상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쉽게 말해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과 공통점을 만들려고 해서 내 백성이 아니다. 세상 사람과 공통점이 형성되는 쪽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내 백성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남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자기의를 만들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돼요. 보통 교회 나오면 자기의 신앙 있음을 남에게 자꾸 측정 받으려고 하고 확정 받으려고 하잖아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기가 교회 다니면, 특히 아내가 먼저 교회 나오고 나중에 남편이 교회 다니게 되면 남편은 수시로 먼저 교회 다닌 아내한테 “나 지금 잘 믿고 있지, 그지? 나 이렇게 믿고 죽으면 천당 가겠지, 그지?” 이렇게 먼저 선배한테 물어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물어볼 필요가 없이 되어야 그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남에게 평가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남의 평가에 신경 써 버리면 그 사람에 맞추려고 시도하게 되고 그 기준은 주님께서 주신 성령세례라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아요.

몰래 줬거든요. 아무라도 모르게 줬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노력 없이 그냥 줬다 이 말이지요. 대가 없이 줬고 예상 못하게 그냥 준 것이고, 그게 성령세례고, 그것이 주께서 주신 옷이거든요. 이러한 폐쇄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그 말은 이미 십계명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 이야기하는 순간에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들춰내는 겁니다. 나는 신을 안 섬겨, 나는 교회도 안다니고 절에도 안가도 나는 나밖에 몰라, 라고 할지라도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이 떨어진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신을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그 신은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한 신이에요. 내 잘되기 위해서 나 천국 보내기 위한 신을 믿었던 겁니다. 물론 본인이 그것은 골라잡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느 원칙에 어긋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 있었던 약속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자, 순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있고, 이스라엘과 동시에 율법을 줬고, 그 율법은 견인하다가 빠져버리고, 나중에 약속이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등장했고, 그 약속된 분의 영이 와서 약속된 세상, 그것이 천국이거든요, 약속된 아들의 나라, 거기에 합류한다는 이것이 성경 전체의 줄거리인데 처음부터 약속이 먼저 있는 겁니다.

약속된 자만 구원받아요. 그런데 약속된 그 내용이 뭐냐? 나 외에 다른 신, 다른 신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다고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말은 내가 오기 전에 있었던 그 신은 너희를 천국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선언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신을 원하고 하나님을 원하는데 그 하나님은 너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하나님이 아니고 같이 망하자고 믿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다른 신에서, 다시 말해서 “가짜 신에서 진짜 신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라고 우리가 묻고 싶지요.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 한, 율법 주고, 율법 빠지고, 성령세례 오고. 그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없어요. 그렇게 하면 나는 구원받습니까?

아니요. 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약속되게 드러내는 그 현상 가운데서 너의 구원이 결과물로 주어지는 거지요. 지금 약속에서 약속으로 가는 거예요. 약속에서 내 구원으로 오면 안돼요. 하나님 계시고 내 구원이 왔다면 이것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다른 신에 속한다고요.

교회 가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삼위일체 믿고 구원받아야지, 하는 이것은 다른 신에 속해요. 왜냐하면 나 자체가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 자체가 인간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약속된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노선이 다른 노선이에요. 노선이 달라요. 엉뚱한 노선에 가 있다는 말이지요.

엉뚱한 노선에서는 엉뚱한 신을 믿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생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종교라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오게 되면, 나 때문에 오셨지요, 가 아니라 약속을 약속대로 들춰내기 위해서 너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너는 그 약속을 실천해 오는데 거기에 참여될 뿐이고 합류될 뿐이지요.

결국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구원받기 때문에 영광 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주의 이름 앞에 굴복하게 하는데 구원받은 우리도 마땅히 굴복해야지요. 굴복한다는 말은 뭡니까? 굴복한다는 말은, 내 위주로 안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가짐이 굴복이잖아요. 고개 쳐들고 내 놓을 것 내놓으라는 식은 굴복이 아닙니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주께 영광만 된다면 저는 족해요.” 이게 굴복이잖아요.

어제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자기문제가 아주 심각해서 질문을 하신 것인데요. 남자분인데 회사에서 경리책임자로 있는데 회사 돌아가는 것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겁니다. 회계장부 조작부터 해서 그렇게도 부정을 하는데 나는 복음을 아는 사람으로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자기는 경리책임자인데 사장이 와서 장부 뜯어고치라고 하고 세금도 회피하는 식으로 자꾸 부정한 것을 시키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그게 계속되니까 이걸 세무서에 고발해야 되느냐, 아니면 사장한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해야 되는지, 어떡하면 좋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어요.

누가 질문하면 제가 5초 내에 답변하잖아요. “억울함을 즐길 수 있으면 고발하세요.” 참는 정도로 하면 안돼요. 그것은 화병 걸려요. 내가 이 억울함을 즐기고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린 주님께 감사할 수 있거든 세무서에 고발하고 남에게 지적질도 하라고요.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그 회사의 불의에 모두 일조하고 있는 거예요. 책임을 지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됩니다. 경기가 어려우면 슬슬 본색이 나오지요. 그래서 제가 답변할 때, “고발하면 당신은 잘립니다.” 회사 일에 협조 안하면 잘려야지요. 자기 회사도 아니니까.

그렇게 잘리기 전에 내가 먼저 더럽다고 사표를 냈다. 심리적인 승리감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나가 봤자 뭐합니까, 농사짓거든요. 나가봤자 농사짓거나 치킨 집 아니면 피자, 아니면 햄버거 집 그런 거 아닙니까? 카페 차리든지, 빵집 하든가. 할 거 뭐 있어요.

본인이 사장이 되었다면 부정부패 안할 거예요? 세금 조작 안할 거예요? 본인이 사장 안 되었으니까 부정 안한다고 장담하는데 본인이 사장 되어보세요. 이 세상 전체가 불의한 것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래서 남에게 당했을 때 그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 말입니다. 그동안 그 회사에서 월급 받고 밥이라도 먹고 살았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지는 불의하고 나는 착했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지는 불의하고도 헉헉거리면서 기업운영하고 나는 착하면서 월급 받아 챙기고. 내가 이익 봤네요.

세상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된다고 우기는 것 그 자체가 거짓이고 위선이에요. 그 거짓되고 위선된 인간이 자기 잘못은 전혀 모르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나올 때 그게 바로 다른 신에 해당되는 겁니다. 자기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모르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추구한 것은 너는 구원은 입도 떼지 말라는 차원에서 준 거예요.

“네가 구원을 받아? 뭘 보고 구원을 받아. 인간도 아닌 게.” 이렇게 몰아세우기 위해서 율법 주신 겁니다. 천국은 의롭지 않으면 갈 수 없거든요. 의롭지 않으면 갈 수 없으니까 인간은 의를 어떻게 만드는가? 최선을 다해요. 내가 회사의 불의도 고발하고 예수이름으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해도, 사탄이고 사탕이고 간에 백날 그거 해도 너도 똑같은 인간이에요.

제가 만약 그 회사 경리책임자라면 그저 알아도 모르는 체. 시집살이가 원래 그렇잖아요. 알아도 모르는 체, 뭘 해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같이 하자고 오기 전까지는 그냥 모른 체 하고 직접적으로 같이 하자고 할 때는 정치적인 협상을 하는 거예요. “이거 해 줄 테니 보너스 더 주시렵니까?” 이런 식으로. 어차피 잘릴 거 내 회사도 아닌 걸.

그쪽에서 날 이용하려 하니까 나도 그쪽 이용해야 되고. 그게 정치적 협상 아닙니까? 다들 그렇게 안 살아요? 그렇게 살지요? 나 같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주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더러운 세상 더 살려고 더러운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분 마음에 이런 것이 있어요. “목사님, 저는 이렇게 복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는 어떤 공통점을 형성하려 하는데 그것은 다른 신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사람은 옷이 필요 없어요. 자기가 평생에 걸쳐 만든 자기의 성과가 자기 옷에 더덕더덕 묻어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해서 썩어 들어가야 돼요.

결국 뭐냐 하면, 약속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인데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사도바울의 말에 의하면 온 세계로 다 퍼졌다는 거예요. 그 원리가 뭐냐? 율법이 있는 곳에는 필히 저주라는 결과를 낳았다면 이 복음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다는 말은 전 세계는 율법에 의해서 이미 저주받는 대상으로 전체가 완전히 파묻혀 있다, 덮여 있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저주를 피할 곳은 없습니다.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백날 이민 가 봐야 거기도 마찬가지에요. 율법은 끝까지 따라가요. 귀신 따라오듯이 끝까지 율법이 따라옵니다. 거기서 어떤 의도 우리는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되는데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는 것만 있지 않고 약속이라는 것이 그 틈새에서 나타나는데 그 약속이 뭐냐 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했지요. 종단면, 단면을 끊어버리면 두 개의 케이블이 있다 했지요. 하나는 약속이고 하나는 율법이 있다 했지요.

같이 있으니까 이스라엘에 그 두 개의 케이블이 나란히 가요. 나란히 가다가 이스라엘 역사 그 껍데기 벗겨지면 그 약속이 십자가 복음의 약속으로 드러나고 율법은 온 세계에 덮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약속이라는 것이 우리 가운데 어떤 식으로 등장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되지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움할 때 거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소년 다윗이 끼어듭니다. 소년 다윗이 끼어들 때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은 뭐냐 하면, 저쪽에서 누가 나와야 되느냐? 소년 골리앗이 나와야 돼요. 그게 격이 맞아요. 그래야 게임이 공평하잖아요.

그런데 이쪽에서 소년 다윗이 나갔는데 장정 골리앗이 나왔던 거예요. 키가 3미터가 넘습니다. 그게 약속이에요.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신명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즈음에 정탐꾼을 열두 명 보냈거든요. 보냈는데 약속의 땅이 텅텅 비어있는 땅이 아니고 거기에 건장한, 네피림 족속부터 해서 철기문화와 무기로 발달된, 인구가 많고 힘이 많은 자들이 이미 가나안 땅을 턱, 하니 지키고 있는 거예요.

갔다 온 사람의 소감이 뭐냐 하면, 우리는 그 사람들 앞에서 메뚜기 같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말이지요. 그게 약속이에요. 약속이라 하는 것은 빡세게 믿고 기도하면 얼추 들어갈 수 있다, 가 약속이 아니고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에 마주치게 하는 것이 약속입니다.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

그게 왜 약속이냐 하면, 약속은 지금까지 해왔던 나의 의,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기는 텄다, 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약속이에요. 그동안 내가 교회 다니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했고, 주일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하고, 하여튼 모을 수 있는 모든 경건과 거룩은 다 끌어 모았는데 정작 구원받을 사람, 물론 구원받을 사람에 해당됩니다, 구원받을 사람에게 덮치는 인생의 역경은 정말 자살 외에는 대안이 없어요.

내가 하나님을 이만큼 섬겼는데 주께서 들이닥친 것은 뭐냐? 이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하는 사태밖에 없어요. 그동안 모아놓았던 마일리지, 하나님께 쌓아놓았던 그 기도마일리지, 십일조마일리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헌금 한 것, 남에게 해코지 한번 한적 없고, 욕설 한 번 한적 없고, 기도를 해도 남 잘되라고 먼저 기도하고, 그렇게 산 것, 최선을 다해서 교회생활 한 것,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가정은 가정대로 엉망이고, 인생은 대책 없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밖에 없을 때 그게 여러분 앞에 등장한 골리앗입니다. 그런데 그 소년 다윗이 골리앗 이겼을 때 하나를 봤어요. 그 골리앗에게는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할례가 없어요. 할례 없는 것.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거예요.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언약 속에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약속의 요소가 없기에 저것은 헛것이다 그 말이지요. 저것은 거짓이고 저것은 하나의 멍 때리는 것이고 꿈같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허깨비 같은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약속이 없으니까.

기준이 뭐냐 하면, 약속이 있기에 그 다음부터는 기준이 약속 있음과 없음으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골리앗은 자기 딴에 완전무장 했어요. 이마에 물맷돌을 맞았다 하는데 이마를 막는 투구를 썼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되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가고자 하는 이 천국은 약속을 주신 분에 의해서만 약속대로 갈 뿐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어떤 행함이나 어떤 실천, 말씀에 대한 어떤 실천도 오히려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구원받게 하지 못해요. 교회는 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못 받습니다. 구원 못 받으니까 기껏 하는 것이 교회나 키우는 거예요.

어차피 장사니까요. 사도바울은 세례와 옷의 문제를 율법과 약속으로 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특징을 옷을 입은 것으로 이야기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저주받은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아브라함의 약속으로 그냥 덮치지요.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의 약속으로 그냥 덮어버립니다. 이러한 것이 이미 구약 때 보면 나옵니다. 옷에 대해서 처음에 나온 대목은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유명한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몸의 이상을 뭔가 느끼고 나름대로 대책을 세운 것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뭔가 가리는 거지요.

옷이라 하는 것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느냐 하면, 옷을 만듦으로서 옷 뒤에 있는 것이 거짓이고 헛것이라 하는 것을 도리어 드러내게 만듭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모든 인생,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나 한평생 노력한 것이 어디에 다 붙느냐 하면, 옷에 다 붙어 있어요.

지금 제 뒤에 커튼이 있잖아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이 커튼 뒤에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한 번 열어 볼까요? 이 옥색 커튼 뒤에 하나님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서 여기 거룩한 장소가 갑자기 유발되잖아요.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하지만.

인간이 옷을 입는 동시에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인간도 아닌데. 평생에 걸치는 옷이라는 것은 직책을 이야기하고, 신분을 이야기하고, 소속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수녀한테 불만이 수녀 복 입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거잖아요. 자기 일터에서나 입지 바깥에서는 그냥 아줌마처럼 하라는 말이지요. 왜 수녀복 입고 밖에 돌아다닙니까? 신부도 마찬가지고.

옷은 자기가 거짓임을 감추기 위한 용도에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옷을 벗겨버렸습니다. 네가 이런 짓을 한 인간밖에 안된다고.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이 하는 짓은 무슨 짓이다? 수치를 가리는 이런 짓, 가려봤자 소용없는데 소용없는 그 짓에 너는 몰두할 것이다. 왜? 그게 마귀의 안목이니까. 그게 마귀의 시선이에요.

그것은 고정화시키기 위해서, 너는 이것밖에 못돼, 고정화시키기 위해서 가죽옷으로, 사람이 자기를 가렸던 그 옷의 그 지점에다 가죽옷을 입혀버리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먼저 이런 짓을 했잖아, 하는 뜻이에요. 그것을 고정시키는 겁니다.

옷에 평생을 치중하는 이유는 옷이라 하는 것이 단지 섬유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전부를 말합니다. 인생의 훈장은 물론이고, 인생전부, 일대기 전부를 말합니다. 매력적이고, 남에게 시선을 끄는 유혹거리를 마구마구 채우는 거예요. 너 나에게 반했지, 하는 식이지요. 우리 인생이 그런 것들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악마의 시선이 바로 그거거든요. 그걸 요구한 겁니다. 돌이 떡 되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 있고, 세상부귀와 영화. 이게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해요. 오히려 우리를 가리는데 일조하는 겁니다. 우리를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 옷을 입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옷을 안 입을 수는 없고, 주님께서는 어떤 옷을 입히느냐? 출애굽기에 보면 옷이 하나 등장합니다.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옷을 아론과 아들들에게 입혀서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고 민수기 20장에 26절에 보면,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고 해서 인수인계를 합니다. 옷을 인수인계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볼품없다, 그 말입니다. 볼품없는 인간이 무엇을 입었기에 그 사람이 하나님과 거룩한 세계를 공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의 혼인잔치에도 나오잖아요. 그냥 마구잡이로 사람 모아놓고 혼인잔치에 참석을 시켰는데 다만 유니폼, 주체측에서 마련해준 옷을 입지 않았을 때는 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어요.

옷을 입어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너 그냥 살면 인간 아니야, 그런 뜻이에요. 뭘 보고 인간이야?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아니면 인간 아닌 거예요. 인간 아님이 수치스럽기 때문에 나 인간입니다, 해서 걸치는 것이 국회의원, 자격증, 목사가운 입는 것,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나 거짓 아닙니다, 나 거짓 아닙니다, 그런 뜻이에요.

전도서 7장에 보면 잔치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결혼식은 바깥을 화려하게 꾸미잖아요. 초상집에는 가면 관밖에 없어요. 관을 보게 되면 거기에 아무 짓도 안하고 누워만 있어요. 아무 짓도 못해요. 그게 인간입니다. 자기의 발가벗은 본색이 장례식장에 드러나요. 남의 장례가 아니라 나의 장례식을 미리 보라는 겁니다.

네가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었다는 거예요. 그걸 율법을 통해서 완전히 까발려주는 거지요. 출애굽기 28장에 제사장의 복장에 대해서 죽 나와 있습니다. 이 글을 다 읽어봐도 상상이 잘 안돼요. 잠만 오고. 그래서 제가 이스라엘 가서 비디오로 찍어온 성막과 제사장 복장이 나오는 대목을 오늘 아침에 따로 빼서 고화질로 유-튜브로 해서 우리교회 가족나눔터에 올려놨어요.

그래도 안 보는데 하여간 올려놨습니다. 이 복장에 보면 머리에 ‘여호와의 성결’이라고 있고 두건 두르고 옷은 흰 옷 입고, 그 위에 청색 옷 입고 그 위에 에봇이라는 옷을 입어요. 그 에봇의 어깨에는 검은 색 돌(9절에 호마노로 되어 있는데)에다가 여섯 지파씩 이름을 새기고 더 내려오면 가슴께에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 열두 개를 죽 달아요.

그리고 청색 옷의 아랫단에 석류방울과 금방울을 번갈아 달아서 제사장이 움직이면 소리가 나도록 했다고 출애굽기 28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도 주목해야 되지만 더 주목해야 될 것은 출애굽기 28장 30절에 나옵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 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그 옷, 그 거룩한 제사장 옷, 유일하게 거룩한 제사장 옷 안에는 정말 감춘 것이 있어요. 인간의 옷 뒤에는 거짓만 있어요. 헛되고 헛된 것만 있는데 여기는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림과 둠밈이 그 안에 있어요. 우림과 둠밈이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을 판결하는 겁니다.

동영상 보면 나와 있는데 설명하는 분도, “이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했어요. 정확하게 그 모양을 몰라요. 하지만 이런 식이 아닐까 해서 녹차 팩같이 생긴 주머니 안에 동그란 구슬이 들어 있는 모양새를 에봇의 품 안에서 끄집어냈어요. 나중에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성도한테는 내 것이 따로 있으면 안돼요. 마지막에 있는 것은 ‘노’와 ‘예스’라는 판결만 있는 것이 성도라 그 말이지요. 성도가 판결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성도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 천국이며 무엇이 지옥이라는 기준의 용도로서의 사건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성도라 그 말입니다.

천국을 가지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그 하늘나라, 예수님의 나라를 내가 가지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가지면 안돼요. 마지막 옷 속에, 주님 주신 이 거룩한 옷 속에, 제사장의 옷 속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존재가 아니고, 어떤 면적이 아니고 선, 사건만 들어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37)는 그런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것, 그냥 지나가면 사건만 남을 인생으로 살아라, 그 말입니다.

존재와 존재의 연속이 아니고 사건과 사건의 다발로 살아라, 그 말이지요. 오늘은 무슨 사건을 주시렵니까, 내일은 무슨 사건을 주시렵니까? 그 사건 가운데 기준은 뭐냐 하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그러한 기준점이 되어서 살아라. 그것이 제사장에게 마지막 숨겨져 있는 우림과 둠밈이에요.

그것은 네 기준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넘겨준 기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는 기준이에요. 따라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에 말려든 거예요. 주님의 구원에 의해서 지금 생산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9, 20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말하나 하더라도…… 이것은 안동 말이니까 욕이라고 듣지 마세요.

네가 지낀다(지껄인다)고 하지 말라. 안동사람들에게는 이게 표준말이에요. 지낀다는 말은 들으면 기분 굉장히 나빠요. 네가 말을 할 때에 네가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말이기 때문에 네가 거기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뭐냐? 네 인생은 없기 때문에 책임질 인생도 너에게는 남아 있지 않도록 내가 그렇게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평생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고, 자살하려고 했습니까? 내 인생이 따로 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책임질 인생이 있다는 거예요. 지킬 것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게 아닙니다. 이번에 북한에 간 백지영이라는 가수가 부른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총 맞은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뜯어내요. 뜯어내서 내 속에 내 존재라고 여기는 나의 정체성을 뜯어내서 구멍을 만들어버립니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지요.

말씀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뜯겨난 그 죄 된 증거물들의 모임, 그게 교회입니다. ‘나 이렇게 뜯겼어.’ 주께서 나에게서 이런 것을 뜯어갔습니다, 라고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자기 의에요.

기도 잘하는 것 가지고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했고, 헌금 많이 하는 것으로 기 안 죽으려고 했고, 전도 많이 하는 것으로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했고, 돈 많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그것으로 기 안 죽으려고 한 그것이 바로 내가 뜯어낼 수 없었던, 마귀적 안목에 의해서 내가 뜯어낼 수 없었던 그것을 성령이 와서 뜯어내는 그 작업이 내가 할 수 없는, 골리앗을 이기는 약속의 위력, 말씀의 위력으로 뜯어낸 겁니다.

그 뜯어낸 것이 모이고 모아진 그 창고가 바로 천국이에요. 너 같은 인간들을 내가 뜯어내서 그리스도 안까지 오게 했다. 예수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감추는 쪽으로 도망하는 것이 주특기이기 때문에.

복음 이야기하면 ‘나 복음 다 안다.’ 맨 날 도망쳐. 복음은 ‘복음 다 안다.’가 복음 아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입니다, 나에게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게 주께서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게 주의 복음을 드러내는 조치라면 하나의 사건으로 휘말려 드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렇게 되는 거지요.

안다고 해버리면 아는 주체가 따로 있게 돼요. 아는 주체가 따로 있으면 나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는 그것을 내가 믿는 것이 되니까 그것은 또 하나의 거짓이지요. 휭 하니 헛바람 들듯이 진짜 안쪽의 엔진 부분이 없어져야 돼요. 구멍이 크게 나야 돼요. 훤하게 뚫려가지고 바람이 쉭쉭 새고 바람이 왔다 갔다 해야 된다니까요.

그냥 남아 있는 것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내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 한이나 들어주시고 제 분통이나 좀 해결해 주세요.’ 하는 그 껍데기 같은 것만 남아 있지요. 그런데 그 안에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이런 인간, 이런 되도 않는 소리, 이런 저주받을 거리를 주께서 건져 주셨구나.’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자기 의가 있는 최종 구멍이 뚫려서 없어지니까 내세울 나의 의가 없어요. 남에게 내놓을 자랑거리가 없다 그 말입니다. 남에게 기 안 죽을 거리가 없어요. 남하고 정신적으로 다툴 거리가 없어요.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꾸기 때문에 내부투쟁이 일어납니다.

“주님이여, 이것까지 가져가면 안 되잖아요.” 주께서 “너는 사건이야. 너는 존재가 아니고 면적이 아니라 그냥 사건이야.” 하고 말씀이 와서 우리의 반항하는 그 지점을 우지직 뜯어내지요. 뜯어낼 때 정말 아픕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죽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뜯어낼 때 내가 나를 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주님만 알아요. 꼭 9급 공무원 국사 문제 같아요. 이것은 출제자만 알아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번에 9급 국사 문제를 냈는데 그 문제를 저한테 이야기해줬어요. 그 문제가 주님생각하고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소개합니다.

시를 하나 내놓고 그 시를 지은 이가 진화라는 고려 사람인데 그 사람과 교제했던 사람이 지은 책은 무엇이냐고 물은 거예요. 그 사람과 교제했던 사람은 이규보인데요.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국사 좀 한 사람은 다 알아요. 고려시대 이규보라는 사람이 지은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친구를 이야기해놓고 그 사람과 교제한 사람의 저서는 무엇이냐고 한 거예요.

정답은 2번(동명왕편)이라고 하는데 그 정답은 완전히 찍기에요. 그 정답을 알아서 2번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일 어떻게 할 것인지 그것은 출제자인 주님만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내가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정답을 알기 때문에 내일 골리앗이 나오면 내가 이길 걸, 이렇게 밀어붙이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나라지 천국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에요. 내일 되면 그 안다는 것이 어떻게 뜯겨나갈지 그 뜯겨 나올 때 내가 그동안 공들였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소용없다는 그 억울함이 바로 십자가의 체험입니다.

내 내부에서 제사가 가동 중이에요. 주님의 죽으심이 가동 중이에요. 그 억울함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그 주님이 지금 나를 가지고 네사랑, 네가 믿는 신 버리고 진짜 신, 올바른 신을 내 안에서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어디 있습니까? 우리 곁에 왔습니다. 왔어요. 아무도 못 알아봤습니다. 행색이 너무 초라해서.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성령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의 다른 신을 믿는 그것을 올바른 신으로 이끌기 위해서 다른 신을 유발하는 요인들이 어디 있다 하는 것을 율법과 말씀으로 뜯어내는 작업을 해줄 때 한평생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억울하지만 그 억울함을 넘어서서, 억울했기에, 억울하기에 오히려 사랑하게 되는 그런 주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다른 신을 믿었습니다. 날 위하는 그것이 참된 신인 줄 알았는데 우리 자신이 골칫거리였고 우리 자신이 나빴습니다. 이제는 그 나쁜 나를 그냥 두시지 않고 날마다 중심부분을 뜯어내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에 피가 묻혀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84강-갈 3장 26-27절(그리스도의 옷)180415-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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