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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14:24:16 조회 : 136         
20180514b 부산강의 : [시편]10(4편)-자기 통치 이름 : 한윤범(IP:14.39.134.25)

20180514b 부산강의 : [시편]10(4편)-자기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아히도벨이 죽었다는 것은 사무엘하 17장 23절에 나오는데 자기가 제안한 것이 안 됐다고 죽은 것은 다윗은 이렇게 생각해요.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 못한 사람의 대표자, 아히도벨.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죽은 사람 없거든요. 그것도 전쟁에서 죽은 게 아니에요. 아히도벨은 지략가잖아요. 누구보다도 다윗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자가 죽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예요.

 

다윗은 자기 인생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자기가 처신을 잘못해서 일어나는 일로 보는 게 아니고 이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 제대로 된 통치의 본질로 보는 겁니다. 이것은 존재가 아니에요. 기능이에요. 존재가 되면, 천국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죽으면 천국 간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나 천국은 저기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천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천국은 존재하는 인간에겐 없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물론 천국 없으면 지옥도 없어요.

 

그러면 천국, 지옥은 어디서 나오는가? 다윗의, 다윗도 언약이니까 다윗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윗의 기능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어떤 질서가 나오면 그 질서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와 인정하지 않은 자로 구분될 것이고, 인정하는 자가 천국 가는 자요 인정 못한 자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순간순간 그렇게 새롭게 등장하는 거죠.

 

우리가 교회 세우길 기대하지 않아야 될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 몸입니다. 그리스도 몸이란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는 기능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자꾸 일을 벌여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성도 주변에 계속해서 아우라처럼 생겨나는 거예요. 사건들이.

 

광주에 가면 식사를 일식뷔페로 먹어요. 약간 서민적인 거. 그 집에 특이한 게 있는데 솜사탕 만드는 기계에요. 다 먹고 난 뒤에 입가심으로 솜사탕을 줘요. 들어갈 때는 작대기만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작대기 주변에 아우라 같은 게 생겨요. 없는 게 생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활동으로 비로소 등장하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이 천국으로 보겠어요? 거부하죠. 왜냐하면 자기 나름의 천국이 따로 있기 때문에.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하늘나라 천국을 보여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 짓자고 나오잖아요. 베드로 생각이 뭐냐 하면,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의 천국입니다. 가서 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정작 천국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별세해야 된다는 거예요. 죽음이다. 예수님이 죽어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 거기서 천국이 번져 나오는 겁니다. 솜사탕기계에서 솜사탕 나오듯이 예수님의 죽음의 취지가 본질이 되어서 그게 이 땅에 와서 죽으신 죽음의 의미, 죽음의 의의, 취지가 뭉쳐져서 그게 천국이에요. 성령 아니면 못 들어갑니다. 누가 거길 들어가요?

 

전북에 백제예술대학이라고 있는데 그런 대학이 없다고 칩시다. 대학은 없는데 모집요강만 있다면 희한한 대학이죠. 우리가 아는 상식은, 대학이 먼저 있고 신입생 모집요강이 있어야 순서가 옳잖아요. 대학은 없는데 모집요강만 먼저 있다면, 모집요강에 준수해서 모집한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바로 주님의 방식이에요. 천국은 없어요. 없는데 천국 모집요강은 있어요. 요건이 있어요. 그러면 그 천국 가려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해야 됩니까?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존재로서의 천국과 지옥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냥 포기하면 안 되죠. 왜냐하면 첫째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다. 물살이 세다 했잖아요. 그 물살을 단 한 사람도 극복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수고스럽겠지만 로마서 3장 13절을 봅시다. 거기 뭐라고 돼있어요?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이걸 우리 존재에서 보기에는 특정, 나 말고 다른 존재의 특징을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돼있는 거예요.

 

우리가 공부하는 시편 5편에 나오는 이러한 특징이, 다윗이 보기에 하나님의 원수들의 특징들이 특정 인간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에 빠짐없이 다 내재돼있다는 겁니다. 이게 때가 안 돼서 사태가 안 벌어져서 이런 특징들이 안 나오지 누구라도 자기에게 뭔가 일이 들이닥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그럼 들이닥침이 어떤 일인지 그걸 다윗부터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존재가 위태로울 때. 참 이것이 다윗 입장에서는 정말 신기한 건데 자기 존재가 위태롭다는 것은, 다윗 말고 언약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다 이걸로 끝나요. 존재가 위태로울 때는 살기 위해서 아첨이고 뭐고 무조건 살아남는 게 최고에요. 이 땅에는 돈의 물살이 세잖아요.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벌 수 있다면 놓치지 않는 거예요. 이걸 시편 5편 9절에서는 뭐라고요?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함에 해당되는 속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희한한 것은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물론 이것도 있어요. 자기 존재가 위태로우면 도망칩니다. 하지만 뭐도 있느냐 하면, 이게 바로 내 안에 작용하는 언약의 통치성, 언약은 누굽니까? 언약이란 하나님이 왕이죠. 왕이 나를 통치하는 방식이 들어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통치하게 되면 다윗 내부에 무엇이 원수적인 속성이고 무엇이 하나님이 속성인지 같이 있는 거예요.

 

이걸 교회론에 적용시켜 봅시다. 아까 제가 교회는 인간이 못 세운다 했지요. 그러나 인간 자체가 아첨함이죠. 열린 무덤이죠. 그래서 인간은 교회를 세웁니다. 그 교회를 세우는 취지가 뭐냐? 교회 세우기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의 자기들 존재적인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요. 교회 세우는 것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결국 자기 가치로 되돌아온다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의 목적은 최고가 되는 거예요. 자기 이름을 하늘에 이르기까지 높이는 것이 최고의 자리인데 그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것에 차질이 일어나게 되면 그걸 악으로 간주하고, 원활하게 잘 되면 선으로 간주해요. 결국 인간은 누굴 닮은 거예요? 최고의 자리가 누굽니까? 악마지요. 악마가 최고의 자리에서 통치하잖아요. 쉽게 갑시다. 현재 이 세상은 세상신이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악마 이름이 그냥 세상신이에요.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은 최고의 자리를 누가 갖고 있다? 이미 악마가 갖고 있는 거예요. 최고의 자리를 갖겠다는 것이 악마만의 생각이 아니고 그 악마의 특혜를 받는 인간들이 악마로부터 그대로 그 성질을 세뇌 받고 양육 받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 가기가 힘들다는 게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부자가 있으니까 오만하지요. 오만하니까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부자인데 “나, 부자 아니어야 돼”라는 생각이 부자 되고 난 뒤에 들 리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동안 나를 나 되게 했던 것이 부자 되기라는 목표에 대해서 집중했기 때문에 모든 정신을 지금 이 순간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만약에 부자 안 된다면, 내가 부자 되려고 노력했던 모든 의지와 노력 자체가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고 자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선 성립이 안 되지요. “나는 부자 되려고 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해.” 이런 생각 안 한다 말이죠. 부자가 부자 안 돼서 한 맺힌 건 아니잖아요. 무슨 새벽기도 가서 “부자 되지 말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 봤습니까? 교회를 세울 때 “교회 좀 망하게 하옵소서.” 미치지 않고는 그렇게 안 되지요. 교회도 하나에 존재잖아요.

 

제 말은 인간인 이상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잘 되길 바라고 크기를 바라고 그래서 많은 경제적 혜택을 입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세워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께선 세워진 것을 허락하면서 그걸 허물어버립니다. 기존 교회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교회는 저렇게 세워져선 안 된다는 게 아니고, 안 되든 말든 교회는 세워지니까. 교회를 허무는 과정을 통해서, 그럼 교회를 세웠다 허물면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세우는 것은 인간 뜻이고 허무는 것은 누구 뜻이다? 주의 뜻인 것을 교회 세우면서 인지하도록 그렇게 해당되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고 교회에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본성대로 하되 본성에 역으로 주께서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 다윗처럼 양쪽을 느끼는 사람이 구원될 사람이에요. 그 사람 속에 언약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도기 때문에 로마서 3장 13절을 납득을 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이야기다? 그게 바로 내 이야기인 것을 깨우쳐주신 것을 주여,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교회에요.

 

욥기에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그럼 욥은 하나도 없었습니까? 아니에요. 욥은 나중에 갑절이나 부자 됐잖아요. 욥은 지옥 갑니까? 부자 됐으니까. 딸 일곱, 아들 셋 다 죽었어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들 일곱 주고 딸 셋 줬어요. 그럼 그동안 꿈이었어요? 이상하게 약간은 고통스럽고 깨보니까 꿈이네. 욥은 천국이 뭔지 알게 됐어요. 천국이란 내 힘으로 된다, 안 된다? 내 힘으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내 존재로도 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걸 아니까 욥은 천국 사람이 되는 겁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주의 집에 주인 누구죠? 주님이죠. 그걸 내가 통치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집에 가면, “야, 내 집이다.” 이게 아니에요. “주님이 통치하는 집이란다. 우리는 통치를 기다렸네.” 하면서 들어가겠지요. 주님이 통치하는 집에 들어간다는 말은, 주님의 통치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하는 거예요. 죽기 전에. 살아있으면서 주의 통치를 좋아하는 거예요.

 

주의 통치를 뭐라 했습니까? 세우는 것은 내 일이고 허무는 것은 주의 일이고. 그 통치를 좋아하는 거예요. 작살나는 것을 좋아하고 깨지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잔을 마셔야 된다. 제자들이 그 소릴 듣고 잔 마시는 걸 희망으로 삼았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도망치기 바빴지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니까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가죠.

 

참 말씀이 재밌지요. 띠 띠고,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원치 않는 길. 그러니까 원하는 길은 따로 있어요. 원하는 건 여전히 있는데 고맙게도 주께선 내 뜻대로 안 해주는 게 주님의 통치 현실인 걸 알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 말을 하면서도 참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물론 그 당시는 고맙게 안 여겨요. 하지만 돌아서면 나중에 소급해서 보면 고맙게 여겨져요. 이런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 백성입니다.

 

천국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있어요. 내가 있기에 천국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함께 계신 주님의 통치가 곧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그 통치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오만한 자가 돼요. 강의 처음에 했던 것 다시 봅시다. 어떤 사람이 있다. 아침에 눈떴다. 자기의 스케줄 따라서 했다. 이게 오만입니까? 제가 이걸 오만이라 했지요. 지금 이 사람이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역을 계속 세우고 있는 겁니다. 내가 세운 모든 것은 파괴돼야 마땅함을 본인이 느낄까요? 조마조마해요. 자기 뜻대로 안 될까봐.

 

우리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연세도 많아요. 칠십이 훨씬 넘었어요. 아들이 결혼상견례 한다고 해서 서울로 차 몰고 가다가 문경휴게소 지나고 난 뒤에 휴대폰 잃어버린 걸 안 거예요. 그래서 다음 휴게소에서 문경휴게소로 전화해서 휴대폰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직원이 챙겨놨다고 했어요. 그럼 약속시간이 늦어지겠지요. 그래서 경황없이 허겁지겁하다 단양과 문경 사이에서 네 시간을 헤맸다는 거예요. 서울에 도착하니까 밤 열두 시. 상견례 끝. 그래서 입이 퉁퉁 부어서 교회 못 나왔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재수 되게 없다고 할 거예요. 오늘 이야기한대로 따져봅시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건 신자나 불신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세세요. 들풀과 참새를 키우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배웠잖아요. 내 뜻대로 안 되게 했죠. 그 말이 성립되려면 내 뜻이 따로 있다, 없다? 내 뜻이 있는 거예요. 차 몰고 나올 때부터 내 뜻 있는 거예요. 차 몰고 지금 가면 상견례 제 시간에 댄다. 그게 내 뜻인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오만입니까? 출발할 때 절대로 오만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는 내 존재를 위해서 사는 지극히 자연스런 존재에요.

 

제가 어제 오후 설교하면서 저도 은혜 받은 대목이 이주일 이야기에요. 하나님 이야기 맨날 하면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주일한테 뭔가 나올지 기다린다고요. 그런데 이주일이 뭔가 보여주던가요? 뭐 별 것 없어요. 수지큐나 보여주지. 별로 보여주는 게 없잖아요. 자, 오늘날 우리가 성도라고 주께 보여준다는 데 그 대목에서 제가 은혜 받은 거예요. 주님께 뭘 보여줬습니까? 우리가 아침에 눈떠서 남한테 보여줄 게 주의 것을 보여줘요? 안 그러면 내 뜻을 고집한 겁니까? 내 뜻을 펼치지요. 결국 한 고집한다는 걸 보여줬잖아요. 내가 여기 있음을 보여줬죠. 아직도 안 죽었고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잖아요.

 

그러면 주께선 성도를 통해서 어떻게 주의 일을 보여주십니까? 아까는 제가 약간 실패했다고 했는데 생각을 바꿔 봅시다. 내 뜻대로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려. 내 뜻대로 다 됐습니다. 기쁘던가요? 아니면 허무하던가요? 허무해요. 내 뜻대로 다 되면 기쁨이 오래 가던가요? 아니면 이상스럽게 이렇게 살면 뭐하나? 된들 이게 뭐냐? 기껏 이것 성취하려고 내가 사느냐?

 

사람들이 둘이 연애할 때 기뻐요. 만나면 주고받고 하죠. 연애하면서 기쁘지만 돌아서면 모든 일을 다 잘라내고 오직 그 사람/그녀만을 위하여 집중하는 내 선택이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이 돼요. 결혼할 때 여자가, “나만을 사랑해?” 할 때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사랑 안 해, 이런 사람 없잖아요. 그러면 결혼 안 되지요. “사랑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여자는 오해하기를 저 남자의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ALL FOR YOU

 

그런데 남자는 그게 아니고 약간만 떼 주는 거예요. 그 말은 어떻게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까. 딱 보면 알아들어야지. 여자는 그때 네가 날 위해 바친다고 했잖아, 라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언어란 언어의 본뜻을 언어가 다 담지를 못합니다. 바람 새겨 돼있어요. 원어 연구가 그것 때문에 문제 있어요. 원어를 들여다보는 내 자신이 원어에 의해서 배척받는데 원어에 안 맞는 사고방식으로 원어 연구한다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니까. 일방적이에요. 주님께서 원어 연구해서 구원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지. 신학자들이 얼마나 불신자들인데. 마귀입니다.

 

진짜 중요한 게 남아있는데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선악이란 내 존재로부터 나와요. 내 존재 긍정, 나 잘났다, 나 이렇게 훌륭하다. 그런 것으로 선과 악을 판정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객관적으로 선과 악을 평가하는 게 아니고 내가 저 평가를 하고 난 뒤에 나한테 돌아올 이익이 있느냐? 있으면 내 평가는 선이 되고, 내가 뭔가 결정했는데 악으로 돌아오면 평가 자체를 수정해요. 기준을 수정한다고요. 자기한테 이익이 안 되니까.

 

그걸 문제라고 하지만 인간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다윗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요. 그렇게 되니까 문제가 뭐냐 하면, 여러분 잘 아시지만 늘 확인해봐야 돼요. 내가 선과 악을 판정내리면 남은 뭐예요? 남 속에 예수님 들어있고 하나님 들어있는데, 타인인데 타인은 뭐예요? 나의 선악에 강제로 맞추어야 될 타인이에요. 내가 힘이 있으면 강제로 맞춰줘요. 내가 물 컵을 던지면 설계도면 던지면 대한항공 전무가 갑질하면 맞춰줘요. 그러면 내 선택이 옳았어요, 안 옳았어요? 남들이 따라주니까 내 선택은 옳았지요.

 

이걸 보통 갑질이라 하는데 여러분이 목사니까 생각해보세요. 나는 교인들이 밥 사주고 무조건 섬겨. 그것 갑질 아니에요? 갑질이 뭐냐 하면, 폭력을 쓴다고 갑질이 아니에요. 나의 헌신과 희생을 반드시 상대가 알아먹어야 돼, 라고 정신적 강요도 갑질입니다. 로마서 3장 13절 벌써 잊어버렸죠. 모든 인간이 열린 무덤 같고 아첨하지요. 내 중심이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럼 나는 악인 속에 포함시켜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나의 헌신과 희생이 뭐가 된다? 남에게 갑질이 돼요. 좀 같이 악해야 되는데 너무 앞서가서 착해.

 

교회 청소를 나눠서 해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청소를 안 해. 더러워서 내가 한다. 그것 갑질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이 나를 손실 나게 만듭니까, 내 이상에 부합되게 만듭니까? 남들은 청소 안 하는데 나 혼자 청소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익이 돼요, 손해가 돼요? 이익이 되지요. 육체는 힘들지만 이익이 되지요.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지니까. 저쪽은 악해지고 나는 선해지고. 동의 안 하면 그냥 넘어갑시다.

 

인간의 모든 행동 하나가 내 중심이기 때문에 그 중심 자체가 갑질이 된다니까. 다른 사람은 가만있는데 자기 혼자 휴지를 줍는다. 내가 하는 모습을 보라 이 말이에요. 그래도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잖아, 하는데 그럴 위인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이유가, 본인이 알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알게 된 그것이 누굴 만나게 되면, 구태여 자랑은 안 하지만 이게 행동으로 티가 나게 돼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금식할 때 금식은 몰래 하면 되잖아요. 몰래 할 수도 있어요. 문제는 금식할 때 금식한 그대로 나타나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금식할 때는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야 되는데 이걸 안 발랐다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입니다. 금식할 때 금식 안 한다, 안 한다 하는 것도 갑질이에요. 포마드를 바르란 말은 뭡니까? 눈치 못 채게 하란 말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이상은 아는 것이 행동으로 나오게 돼있습니다. 금식하는 티 안 내려고 포마드 발랐는데 일어서면서 아아 배고파. 반드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 티를 내게 돼있어요.

 

우리나라 속담에 있잖아요. 미운 자식에게 뭐 줘라? 떡 하나 더 줘라. 에라 먹어라. 밉다는 티를 떡을 줌으로서 감추면서 강하게 의사표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5편의 말씀은 인간의 힘으론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고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5절 봅시다.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이것이 다윗의 말로 그칠까요, 주의 말씀일까요? 주의 말씀이죠. 그렇게 됐으면 그 다음 봅시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할 때 그 인자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다윗을 통해서 나옵니다.

 

그러면 다윗이 통촉하옵소서, 할 때는 다윗이 뭔가 난감한 상황에 놓여있었는데 결국 그 난감한 상황을 유발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무엇을 아울러 제공하느냐 하면, 주의 풍성한 인자가 수호천사처럼 너와 너를 감싸고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난감한 사태를 통해서 새삼 확인케 거예요.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틈만 나면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 부른다고 인자하심이 아니에요. 본인의 뜻대로 안 되고 본인이 의도한 것은 뭉개지고 내가 세우고자 하는 것은 주께서 파괴할 때 통촉이라는 약간의 불만이 나오면서 잠시 잊어버렸던 주의 인자를 다시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순서를 적어볼게요. 통촉하옵소서. 난감한 상태. 그런데 주의 원수 등장, 오만한 자. 지금 다윗이 적들에게 당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다윗의 생각과 그리고 다윗의 언약을 모르는 인간들과 이미 차이가 나죠. 이걸 구분이라 하는데 구분 또는 구별됐지요. 언약은 쪼개기입니다. 언약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둘로 쪼개는 겁니다. 주의 백성과 주의 백성 아닌 것으로 쪼개는 거예요. 존재가 아니고 기능으로.

 

그래서 나는 주의 백성이라고 우겼던 인간이 주의 백성 아닌 거예요. 주께서 나와 더불어 지금도 일하는 게 주의 백성입니다. 뭘 움켜주면 안 돼요. 소유하면 안 됩니다. 소유하면 그것은 존재로 딱딱하게 굳어져버립니다. 자기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쥐면 그 사람은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의 종은 주께서 힘차게 일하는 사람이지 도 닦는 것처럼 산 위에 앉아서 괜찮은 것 쥐고 소유하고 있는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원수 됐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주의 인자하심. 그래서 어디 갑니까? 주의 집에 들어가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경외지요. 천국은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자들의 모임이잖아요. 원수가 뭐고, 인자가 뭐고. 주의 원수니까 주님의 존재가 선행되지요. 주님의 통치니까 주도권을 가지면 주님의 존재 앞에 나의 존재를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의 존재에서 나오는 게 선과 악이거든요. 나한테 이익 되는 것, 손해되는 것을 구분한단 말이죠. 나의 가치, 내가 최고가 되고자 하는 나의 욕망, 이런 것들이 주님의 존재에 밀려서 별 의미 없이 돼버려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높인다고 해서 경외가 아니고 본인한테 경외가 우러나도록 그러한 결과가 등장하는 어떤 일들이 계속 내 몸에서 되풀이 되어 벌어져야 돼요. 그 기능이 내 뜻대로 되도 문제고 되도 허무하고 안 되면 화나는 것이, 보통 불신자는 되면 까불어요. 그런데 성도는 그것이 잠시 뿐이고, 그것 하려고 이 땅에 사나. 빨리 떠나고 싶다. 기껏 그것 하려고 내가 그렇게 수년 동안 공들였나. 그런 생각 안 듭니까? 특히 남자들 차 좋아하죠. 차 바꿀 때마다 주여, 더 이상 소원 없습니다. 하다가 한 6개월 되면 식상해. 이게 전부인가, 라는 허무가 오죠. 나의 선택을 허무하게 만드시는 고마우신 주님, 할 때 그 순간 주님이 경외가 됩니다.

 

좀 더 진도 어렵게 나가봅니다. 그러면 이야기 끝났네요. 끝난 게 아니에요. 방금 하나님께 경외한다 했어요. 그러면 그 하나님 어디 있어요? 경외하려면 뭔가 느껴져야 되는데 어디 있어요? 친절하시고 고마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 경외가 되는지, 안 되는지 이 땅에 확인케 해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아들을 경외하는 자가 곧 아버지를 경외하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에 하나님 경외하는 것은 경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이 누굴 핍박했습니까? 아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을 놔두고 다 도망쳤어요. 요한복음 5장에서 분명히 예수님이 사전에 알려줬어요. 나를 존경하는 자가 아버질 존경한다고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그 이야기는 어디 갔는지 다 달아났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 위주기 때문에. 내가 잡혀서 고문당하고 죽으면 누구만 손해다? 나만 손해에요. 나는 살기 위해 사는 게 선이에요. 나한테 힘들게 하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누가 힘듦은 유발했습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나, 저 사람 모른다.” 하고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나한테 손해되는 것은 다 끊어버리는 것이 타고난 인간의 물살이에요. 인간을 둘러싼 급류에요. 이걸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헤쳐 나옵니까? 헤쳐 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시편 5편으로 이야기 끝난 게 아니에요. 시편 5편은 무엇과 연관돼야 되느냐 하면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시켜줘야 됩니다. 시편 5편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구원받지요. 아시겠습니까? 시편 5편 달달 외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다윗이 이런 소리한다고 다윗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다윗도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요.

 

10절 봅시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성령 받은 자가 성경을 썼습니다. 성령은 구약용어가 아니고 신약용어에요. 성신은 미완료고 성령은 완료입니다. 성신과 성령은 그 차이에요. 성신은 미완료된 언약에서 나오는 신이 성신이고, 완료된 다 이룬 언약에서 나온 영이 성령이십니다. 성신 받고 얼마든지 지옥 갈 수 있지만 성령 받아 놓고는 지옥을 못 가요.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두 발을 아예 천국으로 지상에서 하늘로 옮겨놨기 때문에. 누가? 성령이.

 

성령이 하늘로 안 옮겨놨는데 하는데 성령 안이 천국이고 하늘나라고, 예수님 안이 하늘나라고, 십자가 안이 하늘나라에요. 성령 안이 하늘나라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처소가 돼요. 요한복음 14장에. 처소가 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그리고 성도가 같이 있어요. 삼위일체가 아니고 사위일체에요. 삼위일체하면 안 돼요. 하려면 사위일체라 돼요. 왜? 하나라 했으니까. 그때 내가 너희와 하나 됨 같이 전부 하나가 돼요. 완료가 된다고요. 완료가 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냐 하면, 바로 다윗은 예언이거든요. 시편 5편을 예언으로 보고 있잖아요. 성도가 예언의 결과물이 돼요. 우리 꼬라지는 이래도.

 

물어봅시다. 완료인데 교인수가 2명이다. 완료입니까, 아닙니까? 완료지요. 우리가 그게 별로 즐겁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새 언약에는 숫자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노아 때 구원받은 자가 여덟 명이잖아요. 숫자 나와요. 8명이라고 돼있어요. 작은 수지만 그게 완료에요. 9나 7 되면 안 돼. 8이 완료에요. 작은 숫자로 보여주는 완료에요. 숫자가 많다고 해서 더 많은 완료를 보여주는 게 아니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주와 함께 있다고 두세 사람을 거론했다고. 참 인간의 능력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 아니면 그 기쁨이 안 와요. 두세 사람으로 보여주는 주와 함께 있음이에요. 수천 명으로 보여주는 주와 함께 있음이 아니고.

 

다윗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이 설교할 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여호와 이름을 다 주의 이름으로 바꿔요. 그건 뭐냐 하면, 시편 5편만 본 유대인들은 주님이 저기 계시다고 본 거예요. 자기가 상상한 하늘에 계시다고 본 겁니다. 하늘에 계셔서 하나님께서 예언도 하시고 율법을 주시고 우리는 지키면 된다고 본 겁니다. 그걸 첫째 시간에 인간들의 통치성이라 했지요. 왕이 지시하고 지침을 내리고 인간은 지키면 된다고 했지요. 그게 인간들이 납득하는 통치성이에요. 조선시대가 그렇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게 아니라고 했지요. 다윗이 갖고 있던 내부적인 통치성이 완성이 되면, 다윗의 언약을 따라서 다윗의 시편을 따라서 어디서 완성이 되느냐 하면 신약시대에 완성이 돼요. 그러면 성도의 특징이 위에서 누가 지시한다고 따라가는 게 아니고 내부적인 지시를 따르는 자가 성도입니다. 다윗 개인적인 상황이 신약에는 모든 성령 받은 사람에게 공통적인 상황이 되죠. 형편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에요. 옛 언약은 미완료 또는 미완성, 새 언약은 완성 또는 완료. 완성이라 할 때는 내용물이 찼다. 완료는 시간적으로 끝났다고 구분하시면 됩니다. 완성보다 더 어려운 게 완료에요. 시간이 흘러가도 새로운 것은 없는 거예요. 완성된 것의 반복이 완료됨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잖아요. 십자가가 어디 보입니까? 하지만 십자가의 기능이 완료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반복해서 우리 마음 안에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어디까지 들어오느냐 하면, 성신일 때는 문자, 우리 코앞에만 와요. 율법이.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마음까지 들어와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통치성이 일어나요. 통치성이란 주님의 갑질이 일어나는 겁니다. 갑질 되면 우린 기분 나쁘잖아요. 그런데 아까 경외란 말했지요. 이게 기뻐요, 감사해요? 감사하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것도 감사하단 말이죠. 감사한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게 중요해요.

 

왜 감사한 이유가 따로 없느냐 하면,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언약 따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자기가 숙제 낸 양 스스로 건지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편들거나 보태거나 협조한 적이 없어요. 이 결론에 동의하시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음도 모르면서 이런 소리합니다. 주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 건지는데 내가 할 것 뭐 있나. 할 것 없잖아. 맨날 안 한다.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같은 결론인데도 다른 의미를 나타내죠. 자, 어디서 문제입니까?

 

아까 처음에 진짜 경외하는 사람은 과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과정이 있었지요. 누가 열린 무덤입니까? 나. 누가 아첨하는 자에요? 나. 누가 의인이 아니고 죄인입니까? 나. 그 과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경외가 제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얌체 같이 결론만 열매만 따먹는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주께서 알아서 했다는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 나는 잘났다는 다시 자기 갑질을 또 시작하는 거예요. 다르지요. 한쪽은 내가 뭉개지지만 저쪽은 자기를 돛대처럼 높이려 한단 말이죠.

 

오늘 강의를 정리해봅시다.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이라는 기준을 줬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은 자기가 절대자 되면 선이고 자기를 낮추고 을이 되면 악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는 선악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언약이 와야 돼요. 언약으로 등장하는 게 선악입니다. 시편 5편에서 선은 인자하심이고, 그 다음에 뭐였어요? 누구 의로 구원받는다? 주의 의로 주의 집에 들어가죠. 그 다음에 또 경외함이 나왔지요. 이러한 것이 주께서 받아주시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주님의 통치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란 것을 과정을 밟아서 되니까 이런 통치가 슬픈 게 아니고 허무한 게 아니고 굉장히 고맙고 감사한 거예요. 그러면 이런 통치를 받을 때 이 사람 직업이 세리다. 또는 창녀다, 강도다. 이게 문제 돼요, 안 돼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장애자다, 가난하다, 부자도 문제 안 돼요. 부자라도 구원받아요. 내가 갖고 있던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잘못된 선과 악을 계속 발휘케 했습니다, 라는 것을 주님의 인자와 주의 의와 주의 경외 밑에서 스스로 파악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다윗이 사적으로 자기 죄를 고백한 적은 없어요. 예를 들어서 밧세바와 간음한 그걸 자기는 회개 안 했어요. 다윗이 잘못한 것은 공적인 것, 인구 조사한 것. 왜 그러냐 하면 날 때부터 태생이 죄인이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에 사적인 회개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이것 잘못 됐다고 해서 내 태생이 바뀌느냐? 안 바뀌어요. 안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하죠.

 

주께서 쓰신다면 쓰시옵소서. 인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쓰신다면 나를 어떻게 지저분하게 만들고 박살을 내고 작살을 내든지 저는 전혀 의의 없습니다.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겠지요. 그것 오래 가는 사람, 하루 갑니다. 내일 되면 또 서서히 내 스케줄 시작됩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아침에 기도하면서 슬슬 또 시작돼요. 그게 우리 존재가 하루치밖에 안 된다는 것을 오히려 그 점도 감사합시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희한한 소리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갑질하도록 우리를 주님 앞에 내놔야 돼요. 주님의 숙제가 내 뜻을 뭉개는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 언약으로 인하여 주와 우리가 하나가 되고 이미 그것이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을 새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냥 정치적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뜻이라면 언약을 통해서 주님의 통치에 쓰임을 도리어 감사하고 예언하는 다윗처럼 우리 속의 성령의 이야기, 성령의 시를, 성령의 기도를 우리가 발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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