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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1 16:08:48 조회 : 105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잃어버린 상태)181002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21.165.203.222)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잃어버린 상태)181002b-이근호 목사



예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그 성경에 보면서 볼 때 누가 보느냐 하면 내가 현재 있는 내 마음 가지고 그렇게 보거든요. 보게 되면 내가 행할 수 있는 것과 행할 수 없는 것을 일방적으로 이렇게 정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지요. 그런데 그럴 때 뭐를 놓치느냐 하면 내 안에 ‘내가 이기지 못하는 요소’가 있음을 자꾸 잊어버려요. 우리는 지키고 싶어 내 안에 내가 이기지 못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충동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감정일 수도 있고 또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내가 내 성격 때문에 말씀대로 못 지키는 걸 알게 되면 그냥 못 지키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것을 변명을 하고 그걸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는 식으로 내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은 그게 내 진심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잘 해보려고 하는게 진심입니다 라고 이렇게 안에 있는 것을 억압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어요.


주님은 중심을 보는데 우리는 그게 아니고 그 중심을 잘 요리했고 그 윤리 도덕으로 덮어놓을 정도로 성의를 보이는 나 자신을 좀 보라고 주님 앞에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헤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과정 과정 하나가 제자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자기 속마음을 숨겨왔는가를 그대로 다 보여주는 절차를 보여줘요. 절차를 쭉 나열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혀서 가는 이것이 불신자 이렇게 겁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 나중에 과정을 자기 백성이 볼 때에 주님 하신 일이 우리가 도저히 역으로 다시 우리가 찾아올 수 없는 그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거에요. 그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약간 좀 미리 어렵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여기에 19장에 보게 되면 19장 2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하게 하신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지요. 한번 적어 볼께요. 성경에서는 요한복음을 강조한 것을 적어 볼께요 크게. 응하게 그 다음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참 첫째 시간에 제가 이것 잘못 썼어요. Camera Obscura, 카메라 ‘암실’이라는거 상을 거꾸로 맺히게 하는 장치. 어디? 어둠 속에서 빛은 거꾸로의 모습으로 반대의 모습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응하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거든요. 응하는데 뭘 응했느냐 하면 메시아의 옷을 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옷이 필요 없잖아요. 옷을 두고 이게 골고루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게 내기를 해요 내기를. 군병들이 내기를 한다고요.


누가 몽땅 다 가져가는지 내기를 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대상이냐 하면은 내기를 거는 판돈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자기의 오락과 자기의 즐거움거리 밖에 안 되는 겁니다. 이 예수님이. 그러면 이걸 보고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제자들은? 아 참 군인들 잔인하다. 남은 피 흘려 죽는데 자기들은 내기를 하고 예수님을 그렇게 하찮게 보느냐 라고 분노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본인 내부에 벌레가 예수님을 하찮게 보는 벌레가 인간들 안에 제자들 안에 들어있어요. 모든 인간들에게 다 들어있다고요. 예수님을 하찮게 보는 것. 우리는 예수님을 하찮게 안봅니까?


다시 이야기할께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가면서 하시는 계속해서 던지는 이 요한복음의 나열은 성도로 하여금 도대체 우리 안에 어떤게 들어있기에 주님과 우리를 죽음으로서 완전히 결별되야 되는가를 알려주는겁니다. 그럴 때 여기 군병들이 등장하지요. 여러 가지 체포 뭐 가야바의 18장에 보면 제사장의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가 있는데 이 안나스 가야바 원래 장인이 적임자고 안나스가 지금 현재 제사장이에요. 그런데 제사장 같이 있으니까 둘 다 제사장으로 보면 되요.


이런 사람 등장하니까 이게 전부 남의 이야기고 우리한테는 해당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 예수님을 하찮게 팔아먹고 그 예수님을 보는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 당신을 볼 때는 이런 안목으로 이런 정도로 밖에 안봅니다 그것을 불시에 그 당시에 예수님을 체포하는 쪽을 통해서 낱낱이 보여주는데 그 낱낱이 보여주는 그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19장이 아주 세밀한거에요. 우리하고 성도하고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정말 관계있는 이야기에요.


그 당시에 그 안나스나 가야바 안나스 이 패들이 예수님을 함부로 체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그들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었고 그들의 권력 위에는 누가 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있었고 그 본디오 빌라도 위에 누가 있느냐 하면 로마라는 실제적인 권력체가 있어요. 그래서 빌라도가 여기 18장 19장에 보면 빌라도가 자꾸 주춤한다고요. 멈칫한다고. 이 사람 죄가 없는데. 자꾸 몇 번이나 풀어줄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럴 때 마지막에 내는 카드가 뭐냐 하면 만약에 이 예수를 사형시키지 아니하면 당신은 황제한테 배신하는 것이라고 협박을 해버린다고 이게.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이 세상에 권력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거에요.


그러니 이것이 예수님 체포할 때 정신 기조였지요? 그 정신 기류와 분위기가 지금 우리 안에는 없냐 이 말입니다. 없겠어요? 교회 안에 없습니까? 당회장 목사 전도사 그 조직체 계급체 장로 권사 그 안에는 권력이 없어요? 보이는 사람 말 듣지 보이지 않는 주님 말 듣겠습니까? 요한복음 18장 19장 이게 남의 이야기 아니에요. 우리가 평생토록 한번 알면 그만이다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두고 우리는 확인해야 되고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이 괴물이라면 이 괴물이 아직도 우리 안에 꿈틀 거리고 있는 겁니다. 내 쪽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평생 가도 우리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우리가 믿는 것은 말씀의 응함이라. 아버지가 보낸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예수님이란 자기 약속 때문에 구원받는 거에요.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또 질문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게 있을거에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 질문부터 하고 싶어 하지요. 요한복음 6장 끝에 보면 요한복음 6장 38절 끝에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는 지금 예수님이 누구 할 일 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 본인이 할 일이지요. 예수님 본인이 할 일을 이렇게 선언하는 거에요. 할 때 이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어떤 질문을 의문을 던지느냐 하면은 예수님 그렇게 하시는데 그 예수님이 나를 안 건져주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 그 질문을 하고 싶은거에요 전부 다. 주께서 나를 비켜가면 어떻게 되느냐 비켜가면. 내 옆 사람은 건지고 나는 그냥 비켜서 너는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야 하고 넘어가면 나는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떻게 살아? 지금까지 예수님한테 공 들인게 많은데.


성경공부도 참석하고 열심히 하고 뭐 교회 봉사도 하고 열심히 했는데 나 그냥 슥 빠지면 어떡해? 그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 속에 있는 낭패성, 불상사, 불행 그게 우리 마음속에 나온다 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소리도 안 나오도록 서울말로 하면은 확실하게 부산말로 하면 학실하게. 확실하게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어떤 근거 자체가 폭파되었음을 그 자체가 이미 구멍 뚫렸음을 주님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내가 알게 아직 많이 남아있고 나도 아직 모자란게 그렇게 모자란게 많구나. 이정도 하면 하나님 충성이고 이정도하면 하나님 섬기는구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든지 갑자기 누가 50억 줄게 이러면 갑자기 흔들리면서 복음을 버리면 50억 줄게 갑자기 뭐가 흔들리면서 그동안 나 라는 인간 자신을 자기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에요. 자기가 아무리 자기를 파봐도 자기를 안 되는거에요. 우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주님 앞에 완전히 잊어버려야돼요.


이런 비유해서 저녁때 좀 죄송합니다만 이런 비유까지 거론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쏟아낸 대변을 도로 음식을 만든다 상상하겠습니까? 아 내가 상상해도 지저분하다. 쏟아낸 대변 가지고 다시 음식을 만든다 못 만들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걸 하신다니까요. 주님은 똥으로 지금 천국 백성을 만드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뭐 됩니까? 똥 되야 되는 거에요 지금. 그런데 이게 저주인데 우리가 저주받은 사람 아니라고 자꾸 우긴다 우리자신은.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제자들 보내버리고 십자가 예수님 주변에 누굴 포진합니까? 저주 받을 자들을 포진해가지고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야 될 죽여야 될 그 사고방식 있잖아요. 그 사고방식에 너희들도 이미 같이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평교인이기 때문에 교회라는 것이 그만큼 안 중요할거에요. 왜냐하면 평교인들은 교회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배드리고요 후딱 점심 먹고 빨리 집에 가기 바빠요. 평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가 중요한게 아니고 자기 집구석이 중요해요. 오늘 제목을 자기 집구석이라고 할까. 교인들한테는 자기 집구석이 중요하다니까요. 그래서 걱정하는 것은 자기 교회 때문에 걱정하는게 아니고 자기 집구석 때문에 걱정해요. 모든 걱정 염려를.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목사 입장에서는요 교회보다 더 중요한게 없어요. 교회가 자기 자존심이라니까요. 교회 있고 없고 교회 되고 안 되고가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교인들은 교회 와서 뭐냐 뭘 느끼느냐 하면 목사가 교회를 교회에 대한 애정 집착에서 오는 어떤 권력 같은 것을 교인들이 느낍니다. 느낄 수밖에 없어요. 닦달하는 거에요 목사가. 여러분 집은 좋은 아파트 살면서 교회 지붕 새는데 여러분 가만히 있을거에요? 돈 안내고? 교회 어떻게 할거에요? 그러면서 홀딱 들추는 것이 학개서 막 들추는거에요. 자기는 좋은 집 짓고 주의 성전은 소홀히 한다 그 대목 필요한 대목 다 끄집어내가지고 예배당 건축하고 교육관 늘리자고 하는거에요. 여러분의 비전을 위해서 선교 헌금 더 내고 자식들을 위해서.


뭘 느꼈다고 했어요 방금? 그 가운데 뭘 느껴요? 권력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목사말 들으면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지요. 인정받는 동시에 그 사람은 가정에서도 인정받고 이제는 교회와서도 인정받으니까 인정받는걸 다 챙긴거에요. 제2의 가정처럼 교회를 섬기게 될 겁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정신구조에요. 이게 예수님을 죽이는 정신구조에요. 목사는 목사대로 교인은 교인대로.


뭐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입이 째졌어. 뭐 충성해서 구원받는거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입이 째졌어. 교인들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왜? 자기 집은 아직 있거든. 자기 집은 지금 손 안 대고 있거든요. 교회는 나 몰라라 에요. 자기 집만 잘되면 되요. 어차피 교회는 내 집 아니니까. 안 그래도 그 전까지는 두 집 살림한다고 고생하고 좀 신경썼거든. 교회도 돈 내고 그래야 되는데. 목사가 와서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하니까 좋은거야 이제 자기 집구석만 챙기면 된다고요.


그러면 복음의 타켓이 어디로 갑니까? 혈육으로 갑니다. 혈육이 곧 저주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엔 아예 교회 보이지도 않지 뭐. 왜냐 피할 구석이 마음 둘 곳이 없어지니까. 마음 둘 곳까지 저주로 날려버렸으니까. 이제 마음 둘 곳이 없거든요. 그러면 나는 나의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이러고 있거든요. 나의 가치는? 지금 예수님을 죽여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당시 그들이 찾아놓은 밥상의 가치, 유대인의 가치를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해야 되는 겁니다.


이 본문이 18장에 나와서 여기 18장 14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보세요 ‘유익’이잖아요 유익. 공리주의 아닙니까. 어떤 일을 했을 때에 우리한테 이익이 되느냐 그 얘기잖아요. 한사람을 죽여서 예수님을 죽여서 누구한테 이익이 있다? 우리한테 이익이 있다면 그 사람 평소에 살아온게 뭡니까?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데 그리스도가 훼방꾼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을 죽이는 동기였잖아요. 그 동기가 현재 우리 속에는 없느냐 이 말입니다. 있어요 이 동기가. 지금 이 사람들 욕할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다들 전부 다 예수님 곁에서 잃어버린 자가 되야 돼요. 우리는 약간 저쪽은 200km 잃어버렸고 우리는 5km 잃어버린거 아니에요. 다 잃어버린거에요.


어떤 쪽이든 알아서 그리스도 찾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대변이 음식되는거하고 똑같은 거에요. 이런거 없어요. 안 되는걸 되게 하셔요. 안 되는걸 되게 하시는걸 뭐냐 하면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남는 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것뿐이에요. 이거는 성령을 받아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성령 안 받으면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해요. 말씀 보다 더. 곧 죽어가면서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해요. 치매 걸리고 아무리 병들어도 인간이 끝까지 놓지 않는게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가치 자신의 자존심입니다. 어른들 돌아가신 어른들 한번 보세요. 끝까지 놓치 않는 것은 그것 놓으면 이제는 진짜 가시는 거에요 그것 놓으면. 자기의 가치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명예같은거 끝까지 지킵니다.


아까 영원히 남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죠. 인간에게 영원히 남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나 나 나 나 나. 끝까지 악마가 집어 넣어준 나의 절대성 그것 못 놓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미 구원을 시켜놓고 18장 19장을 되풀이 해버립니다. 이미 구원된 사람한테서 18장 19장을 계속 되풀이하는거에요. 되풀이할 때 이게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매순간 마다 우리는 성도로 하여금 네가 원하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으냐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던지게 되면 우리가 해야 될 답변은 참 아직도 모자라네 아직도 이렇게 무식하네요 이런겁니다.


아이가 손녀가 독감 걸렸어요. 한국에 와서 독감 걸렸습니다. 독감 걸렸을 때에 온 집안이 혼이 나갔지요. 이제 두 돌 밖에 안 된 아이가 독감 걸릴 때 사실은 우리 손녀만 독감 걸린게 아니에요. 대구 시내 어지간한 애들 독감 걸렸어요. 올해 1월달이잖아요. 얼마나 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했지요. 우리나라 모든 애들이 독감 걸려도 절대로 우리 손녀만큼은 절대로 독감 걸리면 안돼. 왜? 내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자기가 가진 줄도 몰랐지요. 모르는데 걸리고 보니까 남의 아이 독감 걸리는 그것이 거기서 우리가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 우리 인생에 가는 길에 특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요.


걸리는 것 그건 그거고. 독감 걸리니까 난리도 아니에요. 그 다음부터는 뭐하느냐 자동적으로 뭘 하겠어요? 기도가 됩니다.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기도 시작은 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리고 응답은 어떻게 옵니까? 왜 낫게 해야하는데? 이렇게 주께서 시비조로 나오지요. 그러면 할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말이 없지요. 기도라는 할 말을 통해서 응답은 할 말 없음으로 끝나버립니다. ‘할 말 없음’으로. 그러면 뭐냐? 주의 자식이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시옵소서.


건강할 때 주님은 저 하늘에 계셔요. 기도할 때 좀 가까이 옵니다. 기도 응답 받으면 내가 있는 자리가 주님의 자리고 나는 주님 있던 자리에 내가 가버려요. 지난 낮설교 한 것처럼 그분이 내가 되고 나는 그분에 의해서 ‘너’라고 지칭이 되는 거죠. 자식이나 손녀나 주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였다 이 말이죠. 그러면 왜 독감 걸리게 하느냐? 우리가 얼마나 호들갑 떨 수 있는 그런 내부, 내가 미처 나를 이기지 못하는 수상한 음흉한 나의 내부를 또다시 들추어내는 계기로 삼은 겁니다. 이만하면 됐다. 된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훌륭해. 이만하면 복음 아는거야 라고 했을 때 주께서 예상 못한 사태를 일으켜 가지고 얼마나 우리가 내가 철딱서니가 없고 진짜 주님 보시기에 구원 안 해도 상관없는 그냥 지옥에 내쳐도 주님 탓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는 거에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바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모든 염려라든지 걱정이라든지 예상되는 불상사같은 이 모든 것이 그냥 건방진 인간의 사치에 불과한겁니다. Camera Obscura 식으로 거꾸로 사물이 맺히는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낙타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가는 것이다 라고 했을 때 이걸 Camera Obscura에 집어넣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이것을 Camera Obscura 에 집어넣으면 어떤 대답이 나오느냐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너무 많은 IQ를 필요로 합니까? 낙타는 바늘구멍에 못 들어가요. 만약 들어갔다고 한다면 낙타가 통과한게 아니에요. 낙타가 통과한게 아니고 심령이 가난한 자,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서 본인이 죽은 자만이 이미 천국에 도달된거에요. 천국치고 낙타 통과 안 된 사람 하나도 없어요. 전부 낙타 통과 하고 온 사람이에요. 모든 성도는. 그런 식으로 다룰거에요 주께서. 그런 식으로 다루는데 우리 마음은 뭡니까? 부자 되고싶은 거에요 우리 마음은.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부자 되도 괜찮아요. 왜? 부자 된 그것이 심령이 가난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도치고는 가난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낙타 통과한 부자기 때문에. 왜냐하면 심령이 부자기 때문에. 심령이 부자가 또 가난하다 같은 말이 되어 버리죠.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이 넉넉하기 때문에. 심령의 가난함이 넉넉하기 때문에 천국이 너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런 질문 방금 한 이 이야기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여러분 답변을 이런 식으로 해야 돼요. 제가 지난 지난 시간인가? 제가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인간은 모래위에 지은 집 밖에 없다. 어떤 인간도 모래위에 집을 짓게 되지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께서 구원을 할 때 구원의 대상자가 전부 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야 돼요. 그래야 나중에 구원받은 사람 반석 위에 집을 짓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 그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이 막 반박하기를 그래도 성령 받으면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다 라고 하는데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라고 그 답변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했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나’ 라는 것이 없지요. 이미 ‘나’ 라는 것을 이미 성령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 가 있다는 것은 아직 성령을 통과 성령을 받은게 아니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나의 자리가 누가 있어야 되요? 주님이 안 되려는 나를 그렇게 되게 했습니다 라고 나와야지. 나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인데 어떻게 반석 위에 집을 지을까 구상하고 있었는데 성령이 오심으로서 드디어 내가 얻고자 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되었다 이렇게 나와버리면 자기가 기대한 요구사항을 성령을 이용해서 자기가 얻은게 되요. 그것은 까부는 거지요. 그것은 자기가 장난치고 있는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께요. 은혜가 두 종류인데 하나는 뭐냐. 자기가 알고 있는 은혜 과거의 알고 있는 은혜 있잖아요.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니까. 아는 은혜를 가지고 미리 고대하고 기대한거에요. 목표를 잡은거에요. 그러나 실제는 내가 모르는 은혜가 와요. 그럼 모르는 은혜가 뭐냐 하면 너는 죽어도 상관없어 라는 은혜를 주께서는 주셨다는거에요.


그러나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뭐냐? 살아있는 내가 얼마나 잘되고 얼마나 뽐내고 남한테 참 믿음 좋구나 그런 소리 듣는 그 은혜를 주시옵소서 라고 인간이 고대 하고 있는 거에요. 사람이 고대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걸 조작하게 되는 겁니다. 진짜 성령 받으면 조작할 필요도 없어요. 옛날에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하는 것도 죄였습니다 라고 나와야지.


왜냐하면 구원은 내 계획이 아니고 누구 계획이니까? 주님의 계획이고 주님의 계획이죠. 내가 옷 벗고 있는데 누가 가위 바위 보 해서 옷 가지고 갑니까? 아니죠? 아까 요한복음 몇 장 입니까? 19장 24절 한 번 봅시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하는 것이 지금 누구한테 해당되는 거에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지요? 내 옷 가져가라. 가위 바위 보 하지도 않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옷을 탐을 낸다는 이 사고 방식이 오늘날 소위 예수 믿는 소위가 아니고 진짜 예수 믿는 성령 받은 우리 안에도 있다 이 말이에요 제 말은.


예수님 덕분에 얼마나 혜택 받았어? 같은 성도라도 그렇게 하고 싶은거에요. 아이고 집사님 우리 애가 35살 됐는데 시집 못 갔는데 아이고 예수님이 신랑감을 그렇게 우연히 만나가지고 좋은 신랑감 만났습니다 라고 한다면 같은 나이 딸이 아직도 시집 안 간 입장에서는 저 인간은 기도를 어떻게 했기에 저런 혜택 받았지? 이렇게 생각 되지요? 그게 예수님 이용해서 가위 바위 보 한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시기 질투 없겠어요? 아 우리 딸은 안가도 되요. 통으로 당신 딸만 잘 살면 됩니다 이런 인간 없어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자기 딸은 시집보내고 싶어. 그런 인간 없습니다.


여기 지금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동원된 그 군인들이 옷 나누기 할 때에 이거는 두고 두고 성도란 이름으로 두고 두고 수시로 이런 마음가짐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나는 예수 믿어서 어떤 혜택을 받았나? 군인들은 옷이나 가졌지 나는 옷도 하나 못 얻었는데 이런 식이라니까요. 다시 생각합시다. 잃어버린 자를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리지 않아서 기어오는거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는 잃어버릴만해서 잃어버린 거에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압시다. 우리는 잃어버려도 괜찮아요. 그래도 마땅하니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응하게 함인데 응하는게 뭐냐 하면 내가 아버지가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살리는 이것은 몫이 누구 몫이냐? 예수님 몫이에요. 예수님이 살아서 하실 몫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서 그 일을 하는데 누가 방해 놓고 틱틱 거리느냐 하면은 내가 살아있다고 우기는 동시에 그 예수님이 하는 일을 내가 가리게 되는 거에요. 살 때 그냥 살아 있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체포하던 그 군인들과 그 체포하던 그 인간들의 사고방식으로서 살아있어요 우리가.


여기에 19장 28절 봅시다. 이러다 18장 19장 다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했지요. 예수님이 목마르다 할 때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댔지요? 입에 댔을 때에 거기 사람들 모여 있는 네 명의 마리아가 있었거든요. 막달라 마리아하고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하고 이모하고 또 하나의 마리아 있어요.


여기 나오네 25절에 나오네.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4명이 있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하고 동생하고 글로바의 부인 아내 마리아하고 막달라 마리아하고 4명 있었단 말이죠. 있을 때 거기에 예수님이 목마르다 할 때에 여러분 그 자리에 현장에 있다 칩시다. 내가 목마릅니까? 예수님이 목마릅니까? 예수님이 목마르지요.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이 성경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중에.


아무도 없지요. 그냥 목마른거에요. 아 십자가 달릴 때에 액체가 빠지니까 목마르구나 이렇게 알지 성경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아무도 인지를 못하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성도가 되었으면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예수님 십자가로 인하여 살아있는 상황 아닙니까? 예수님으로 살아있는 상황이라면 예수님이 대한민국 움직이고 뭐 북한 핵문제 이 모든 것이 전부다 성경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거에요. 십자가에 다 이루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대목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시편 69편에 나옵니다. 시편 69편에 보게 되면 21절에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여기에 목마름 갈증 나오지요? 갈할 때 나오지요? 목마르다 나오지요? 시편에서. 이걸 응했다 말이에요 이걸. 이걸 응한거에요. 이거 누가 압니까?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만 알아요. 우리는, 인간은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우리가 아 나 이렇게 무식하나. 뭐가 무식하느냐 하면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잃어버린 자, 이정도로 잃어버린 자 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모든 이 세상에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목마를 때에 그 다음 봅시다. 23절 시편 69편 23절 봅시다. 오늘 하이라이트 최고 중요한 거에요. 23절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그 다음에 뭡니까? 보지 못하게 하지요. 이게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처음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이거는 우리가 무당되어야 돼요 정말. 왜냐하면 세상이 보지 않는 것을 예수님 살아 있는 것을 우리가 죽은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마치. 예수님 살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왜냐? 여기 본문에 의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주의 말씀을 응하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 다시 말해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장님들입니다. 소경들입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은 보지 못해요. 이건 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항상 염려와 걱정이 수심이 떠나지를 않아요. 재벌되도 마찬가지에요. 승진되도 마찬가지고 장관되고 마찬가지고 인간이 이민가도 마찬가지에요. 캐나다 미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심 걱정이 없는 날이 없어요. 왜? 그들은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들만 보기 때문에. 그러면 성도는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사람들과는 달라. 뭐가 다른데? 뭐가 달라야 되겠어요?


그들과 똑같은 입장인데 그들과 똑같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생 자기 잘난 척 하면서 살아가는건 똑같은데 플러스 세상 사람들은 눈이 감겼어요. 눈이 감겼는데 성령이 온 사람들은 눈이 열렸지요. 열릴게 되면 감긴 것도 알게 되고 보이는 것도 알게 되고 둘 다를 알게 돼요 둘 다를. 이걸 다중현실이라고 전에 대전에서 강의할 때 다중현실이라고 했잖아요. 현실이 한 개가 아니고 두 개라고요. 여러분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 우리 생명이 있다고. 이게 하늘과 땅을 양 쪽 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알기 쉽게 말하면 뭐냐? ‘신들린 사람’이에요. ‘거룩한 무당’이에요. 마태복음 10장에 ‘네가 이야기 한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에 성령이 이야기한 것이다’ 라는 것을 언급할 때 이것은 신종 무당이에요 ‘신종 무당’. 요새 그런 무당 새로 생겼나? 우리가 걱정을 안 한다는게 아니에요. 우리가 세상적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똑같이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해답이 없어요. 나 왜 이리 사나? 나 왜 이렇게 사는거야? 갑자기 노래 가사가 생각나네. 쓰러져 잠이 들면서 나 왜 이렇게 사는거야? 그것처럼 우리는 뭐냐? 똑같이 힘들게 사는게 힘들어요.


일본 왔다 갔다 해야 되고 비행기 타면 멀미나고 똑같이 힘든데 그게 무엇을 응하게 함이라? ‘말씀’, 주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또 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고 성도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별난 인생 사는게 아니에요. 야근할 때 빼주고 그런거 없어요. 여기 뭐 배 아프면 배 낫고 그런거 없습니다. 이 아프면 이 낫고 그런거 없어요 똑같아요. 그런데 그래야만 돼요. 아플 때 아파야 되고 나을 때 나으면 되고 그래야만 돼요. 그러니까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자책하지 마세요. 이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주님 주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성도가. 거기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더 혹독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정신구조에 대해서 우리가 혹독하게 더 깊이 알고 더 많이 알아야 돼요. 왜냐? 많이 용서 받은 자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되어 있어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거에요.


저는 압니다. 강의 이렇게 백날 해봐야 또 끝나면 버스 빨리 와야 되는데. 너무 늦으면 안 되는데. 우리 마음에 가래가 늘 끓듯이. 성경은 성경이고 우리 집구석은 나 아니면 집구석이 안돌아 가는데. 우리 집구석은 반듯하게 남한테 꿀리지 않게 하고 싶어. 우리 집구석은 잘되고 싶어 남 보란 듯이. 복 받았다고 티내고 싶어. 부자가 낙타가 통과하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고 우선 부자 되고 싶어. 낙타는 뭐 바늘구멍을 크게 만들든지 뚫든지 그건 그 때문제고.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 일어난 사건을 성령께서 이렇게 반복해서 하는 것은 그들만이 나쁜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들만이. 그들만이 유별나게 그들만이 극악무도해서 십자가에 죽인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상관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상관없는 자를 상관있게 하신 겁니다 주께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라고 특별하게 관계해서 그들만을 보여줘서 십자가를 보여줘서 실상을 공개하신겁니다.


너 이 정도 밖에 안 돼. 너 이것밖에 안 돼. 남 욕하지마. 베드로 욕하지마. 뭐 닭 울었다고 뭐 나 같으면 배신 안 한다고. 매일같이 넌 배신해 매일같이. 아침 눈만 뜨면 배신했잖아. 예수님 믿고 난 뒤에 어떤 이득이 뭐가 있었습니까? 맨날 이거 계산한다고요. 대제사장 안나스가 계산한게 그거잖아요. 예수님 죽음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오느냐?


그러고 난 뒤에 그다음 18장 그 뒤에 아까 20절 했지요. 유대인들 보이는 회당에서 이렇게 쭉 보게 되면 성경이 그렇게 쉬워요. 18장 19장이 거저 넘어갑니다. 자, 한번 봅시다. 25절 이야기는 아까 했으니까 넘어가고요. 닭이 울더라. 29절 봅시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아까 군중에 요새에 두 번 왔다 갔다 했지요. 지난 시간에 했지요.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무조건 우리가 요구하는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해달라.


그렇게 하니까 31절에 빌라도가 ‘너희가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가 싫으면 너희가 재판하면 될 거 아니냐’ 그렇게 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재판하게 되면 31절에 ‘사람을 죽이는 권리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이거는 뭐 애초부터 죽이겠다는 거에요. 누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사람들이 정말 못 된 사람들입니까? 잠깐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이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뭐를 빼겠다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 그림자를 빼겠다는 거에요. 그렇지요?


그럼 우리가 하루 아침 일과를 봅시다. 예수님 고려합니까? 예수님 빼고 시작합니까? 빼고 가실게요 빼고 가실게요. 우리는 예수님 빼고 일해요 빼고. 너 오늘 학원 시험 쳤지? 몇 점이야? 이 말은 뭐냐 예수님 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애가 이야기하기를 엄마 주께서 내가 수학 치는데 주께서 역사하셔서 40점 맞게 하셨어. 하면 회초리 들고 와. 애가 하는 말이 엄마 나를 때리는 것은 예수님 때리는거야. 까불지 마라 너 공부 안 했으면서 어디 핑계를 대고 있어. 성질났는데. 우리가 성질나잖아요.


‘때림’의 연장은 뭡니까? ‘죽음’이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내가 원하는 대로 네가 안 따라줬잖아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인간들이 원하는 말을 부합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어리석음이라는 거에요. 미련한게 그거에요. 모든 세상이 합리화되고 똑똑한 사람을 찾고 있는 세상이에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등신같은 인간은 이 세상이 원하지 않습니다. 자진해서 등신된다는건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거는 주에 의해서 완전히 등신 바보가 되는 거에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받았다. 내가 구원받을만한 이유 있으면 대봐라. 없다. 그 논리가 납득이 안 되는데 납득이 안 될 문제다. 납득이. 나도 납득이 안돼요. 내가 구원받은 것이 내가 이해가 안돼. 그 순간 우리는 내 것 지키겠다는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3초동안은 사라집니다. 3초동안은. 하나 둘 셋 사라집니다. 3초 지나면 아이고 내가 예수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빨리 장보러 가야 돼. 다시 내가 나를 사는 그러한 작동이 계시됩니다. 또 몇 탕 더 뛸까? 아르바이트 할까. 이런 거에요.


그런데 32절 다시 보겠습니다. 18장 32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그 다음에 뭡니까? “응하게 하려 함이라”. 야~ 보세요. 하나님이 절대로 인간에게 안 지잖아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던 간에 그것조차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한대로 네가 움직인다, 계획한 대로.


그런데 이 말이 성도한테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주기 때문에 굉장히 좋아요. 성도한테는 기분 좋은데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는 인간에게는 이게 고문같은 겁니다. 어떤 저주 같은거에요.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렇게 대들어요. 어쩌라고. 그럼 착하지 말까? 그럼 방종인데? 그럼 막 살까? 이러잖아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끝까지 포기 못해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예수 믿는 것 끝까지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목사님 그 말이 맞는거 같은데 그럼 교회에 교인들이 안 모이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하거든요. 이걸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교인들이 교회 안 나오고 말은 맞지만 나는 교회 복 받으려고 왔는데 복도 없다고 하고 목사님 나는 믿음 없으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그냥 가버리면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걱정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 본인과 주님 사이에 바로 연결되면 되는데 옆에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교회’라는 것을 집어넣는 거에요.


주님 살아있다는 것을 교회 잘 되는 것으로 주님 살아있다는 것으로 대신 하려고 하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만 살아있으면 나는 죽어도 없어져도 괜찮은데 주님 대신에 교회가 있으니까 교회를 이루는데 내가 보탰으니까 나는 가치 없다가 아니라 갑자기 나도 쓸모 있다가 되어 버려요. 쓸모 있다가 되어 버리면 자기 포기하기 굉장히 힘들어요. 이거는 거의 안 되지요. 그래서 그 반설을 설득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헛깨비를 잡아야 되는데 헛깨비가 아니고 실적있는 것만 잡으려고 한단 말이죠.


성도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다른 세상에서는 뭡니까? 헛깨비 잡는거에요. 도깨비 잡는 것하고 똑같아요. 헛깨비 잡는거에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해버리면 교인들 안 오잖아요. 교인들 오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주님 버리고 뭐는 얻고? 주님 버리고 생긴 것이 뭡니까? 교회 얻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주를 위해서 이런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세요? 나는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뭘 했다고? 주의 이름으로 뭘? 귀신 쫓아내고 뭘 가르쳤다고? 나는 너 몰라. 주님이 알아야 돼요. 주님이 알려면 나는 나에 대해서 몰라도 괜찮아요. 내게 신경 안 써도 괜찮아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 역할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 역할하려면 이미 잃어버린 자를 주께서 이미 찾았다고 확정을 내린 상태여야 돼요. 성령을 받아서 이미 구원은 받아놓고 그 다음에 내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됐는가를 18장, 19장을 쭉 보게 되면 베드로 도망가지요 그 사람들 그렇게 예수님 욕하고 가위 바위 보 하고 했지요.


그런데 그것마저 주님의 말씀에 응하게 한다면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같은 한통속이였었는데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렇게 성령이 와서 비로소 이 사실을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이 사실을 비로소 눈이 떠서 이 사람들이 곧 내 모습인 것을 발견할 때 주께서는 의인을 부른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피로써 용서한다는 그 피의 고마움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 더 귀한 고마운 선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살아 있어서 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현재 이 모든 것이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믿는 척한 것이 얼마나 가증한 것이고 거짓인 것을 날마다 폭로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오히려 폭로당한 그것이 신앙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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