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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1 16:16:11 조회 : 40         
159강-창 41장 25-31절(바로꿈해석)18101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159강-창 41장 25-31절(바로꿈해석)1810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장 25-31절입니다. 구약성경 63페이지입니다.

창 41:25-31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칠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기근으로 멸망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꿈이 현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곧 현실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꿈, 또는 하나님의 계시가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지요. 현실은 현실 자체적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현실 되게 하는 외부적인 프로젝트가 계획이 따로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외부적인 것을 현실 속에 있는 사람은 만들 수가 없어요. 따라서 이 세상 현실 속에 있는 인간들은 현실이라는 그 자체에 갇혀 있는 겁니다. 현실은 현실뿐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은 현실에 가두어져 있는 형편에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실정 모르면서 평생을 다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외부적인 것, 지금의 현실을 현실 되게 한 외부적인 계획과 내용은 현실 외부에 있는데 그걸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느냐? 현실 안에 외부적인 것이 박혀 있게 돼요. 그것을 외재성이라 합니다. 외재성이라는 것은 현실 바깥에 있다는 그것도 되지만 바깥에 있다는 그것이 강조점이 아니라 현실 안에 있으면서도 현실이 그것을 잠식하지 못할 정도로 외부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수의 아들로 봤어요. 그런 요소가 외재성입니다. 예수님을 볼 때 자기들하고 같은 현실 안에 있는 일반인으로 봤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을 만드신 분이고 현실 바깥에 계신 분입니다. 바깥에 계신 분이 현실 내부에 들어와 버리니까 사람들이 분간을 못하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것인지 원래부터 우리 안에 있는 것인지를 밝혀낼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 현실 바깥에 있는 것이 현실 안으로 들어와 있는 방식으로 현실을 설명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현실이 예수님에 대해서 지배를 못하듯이 요셉이라는 그 요소도,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온 요셉이라는 그 요소도 바로의 나라가, 애굽나라가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없습니다.

애굽나라 보디발의 감옥에 갇혀있다고 해서 같은 애굽의 권세에 눌려 있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애굽의 최고지도자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셔서 그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의 역량을 총동원해도 바로의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못하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이 애굽 왕의 어떤 신하가 요셉을 꿈 앞에 대령하게 만드는데 이로서 요셉은 외재성적인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애굽 안에 있어도 오히려 이미 애굽나라 자체가 요셉의 종이 된 겁니다.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애굽의 한계성을 드러낸 거예요. 다시 말해서 현실의 어떤 한계성을 드러낸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 현실 바깥에 따로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현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현실에 테두리를 쳤다는 것이고 그 테두리, 경계선으로 인하여 현실과 현실바깥이 새로 생긴 겁니다.

요셉이 그 현실 바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애굽나라에 침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파견근무 한 겁니다. 어쨌든 간에 현실에 있는 사람은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겁니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바로왕도, 애굽의 어떤 사람도 몰랐지요.

몰랐는데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그 꿈이 아주 요상한 꿈이 되어가지고 그 꿈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애굽나라 전체가 그야말로 소동 나게 만드는 그러한 요소로서 꿈을 꾸게 했습니다. 애굽나라의 어떤 사람도 그 꿈을 해석 못합니다.

그동안 애굽나라에서 바로는 애굽나라의 대표자의 모습으로 왕이 되었거든요. 왕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개별자,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겁니다. 애굽나라의 그 현실이 현실의 전부라고 했을 때에 그 모든 인간들은 그 현실 속에서 나, 혹은 너를 항상 고려하게 되어 있어요. 나 아니면 너, 너 나.

그런데 꿈 앞에서는 너, 나라는 인식자체가 무용지물입니다.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꿈의 내용이 너, 나를 봐주지 않습니다. 없애버리고 삭제해버리고 전체성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지요. 요셉이 자기의견으로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해석할 때는 요셉마저도 나라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루하루 살면서 힘들다, 어렵다, 불안불안 하다는 그 요소가 뭐냐 하면, 나와 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와 너. 나 중심의 현실, 너 중심의 현실, 또는 너와 나를 합해서 우리의 현실이 되는데 우리가 아는 현실은 제대로 아는 현실이 아니거든요.

너와 나라는 인식을 그냥 허용하는 현실은 엉터리 현실입니다. 망상입니다. 현실 바깥에서 현실을 볼 수 있으려면 바깥에 나갔다는 흔적, 증거가 뭐냐 하면,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자체가. 이것은 누군가가 만든 전체적인 운명이 같이 움직이는, 전체적으로, 보편적으로, 총체적으로 같이 움직여나가는 현실에 우리 모두가 놓여 있는 겁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해서 나의 가치, 너의 가치를 논하는 그런 방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세상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 그리 되려면 나는 여기서 삭제되어야 되지요. 나에게 어떤 이득이냐? 나에게 어떤 손해냐?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꿈의 해석의 내용을 보게 되면 전체 다가 같이 움직여서 같이 융성했다가 같이 망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멸망을 원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잖아요.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은,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는 나와 너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이 개입하면서, 외재성이라는 말을 했지요, 너와 나라는 사적인 것으로 세상 현실 속에서 이득을 보려는 사고방식은 현실을 통해서 현실을 해석하려고 하니까 그런 오류가 범해진 겁니다. 나를 위한 세상도 아니고 너를 위한 현실도 아니에요.

이 세상은 왜 있는가?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요. 외부에서 이 현실에 대해서 한꺼번에 설명을 해줘야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요셉이 설명하면서 누구한테 이익이냐, 누구에게 손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라고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꿈의 해석이.

꿈을 해석을 하는데 지난번에 신하들의 꿈 해석하는 대목에서 제가 상당히 강조한 것이 있어요. 창세기 40장 12절에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제가 설명을 이렇게 했지요. 시간요소를 먼저 꿈에서 만들어낸다 했지요. 오늘 본문 창세기 41장 25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절에 보면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또 시간을 도출해 내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존재가 우선이지 시간은 존재를 따라가는 그림자 같은 것으로 봐요.

내가 얼마나 흘러갔는가?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내가 얼마나 이 땅에 기거하고 있느냐? 항상 자기 자신이 먼저고,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묘사하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몇 십 년 살았다, 흘러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 현실은 존재가 먼저고,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의 긴 그림자와 같이 존재가 있음에 따라 붙이는 거지요. 그것이 우리의 망상적인 현실관이에요. 꿈이 현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꿈이 곧 진정한 현실이고 꿈의 해석이 없는 현실은 그냥 헛된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꿈같은 거예요. 허망한 거지요.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허망한 것밖에 모르면서 평생을 사는 거예요. 자기존재중심인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존재중심, 나 너, 이거 알아가지고는 현실을 현실답게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겁니다. 내가 내 중심으로 내가 못되고, 내가 잘되고, 울고불고, 그게 현실진행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상관없어요.

사람이 자기한테 존재감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더 외부로부터 협박받게 되어 있어요. 좌절감이 더 큰 겁니다. 나라는 생각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내가 망신살 당했을 때의 그 좌절감, 낭패감, 그 상실감은 더 커지는 법이에요.

이 세상신이 악마인데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자꾸 강요하는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 네 존재감, 계속해서 너에게 집착하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그래야 악마가 주는 협박이 더 강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부들부들 떨지요. 이러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요새 경제 어렵고 자영업 하는 사람들은 위기지요. 최저임금도 오르고 하니 아슬아슬하지요. 이렇게 어려울 때 자기존재감은 더 강렬해지는 법이에요. 자기아집이 더 심화되어서 움츠러들지요. 그렇게 되면 그나마 아는 현실을 붙잡으려고 하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나를 위한 현실이라는 것이 아주 노골화되고 구체화되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의 본색이, 나만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현실이어야 한다는 욕심마저 정당화하는 식으로 노골화되고 노출됩니다. 얼마나 엉터리 같은 사고방식이고 세상관입니까? 억지지요. 사는 것 자체가 억지에요. 몇 년을 살았든지 살아온 자체가 억지로 살아온 거예요.

주의 뜻은 이겁니다. ‘내가 아무 대가없이 너 이만큼 살려놨잖아. 그러면 이제는 내가 너를 죽여도 너는 여한이 없어야지.’ 그게 그동안 은혜로 인도하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그 다음 조언이고 충고입니다. 우리가 대가 지불하고 살았습니까? 돈 주고 살았습니까? 값없이 살았잖아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어 가시는 자도 하나님이라면, 그만큼 공짜로 살려왔으면 이제는 “나 너 그만 살리련다.” 할지라도 “참 조치가 멋지십니다.” 그래야지요. “이제 종을 놓아주시는군요.” 이렇게 되어야지요. 갈수록 존재감이 강렬해진다면 도대체 그동안 은혜라는 것은 그냥 빈말일 뿐입니다. 믿음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 했던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요셉의 해석은 존재에 갇혀 있는 이 현실을 외부에서 다시 그 실상을 밝히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존재가 있고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먼저 있고 그 시간의 내용과 시간의 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땅이, 세상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요셉의 꿈의 해석은 뭐냐 하면, 시간이 모든 존재를 삭제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 바로의 꿈의 해석이에요. 시간이 모든 존재를 삭제해버립니다. 결국 그 존재의 끝은 뭐냐? 황폐고 황무한 거예요. 있음에 대해서 없음이 승리하는 거예요. 바로의 세계는 있음의 세계라면 요셉의 세계는 없음의 세계에요. 모든 있음을 없애버리는 것이 요셉의 세계입니다.

이미 시작한 천국이란 있는 것도 없애주시는 그 나라, 이미 와 있는, 이미 도달해 있는 천국입니다. 그 없음의 세계에는 뭐만 있느냐? 시간만 있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때가 있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사건. 사건만 있어요. 때가 되매. 때가 되매. 십자가 사건, 승천사건, 재림사건, 사건만 있어요.

우리의 존재라 하는 것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 때문에 이 존재가 여기에 사건화 된 존재로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있게 한 어떤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 예수님이 살아 있음, 존재는 예수님만 존재하거든요, 예수님의 존재하심, 살아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걸 증명해내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하지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다.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 속에 잠시 나타난 겁니다. 시간이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겁니다. 그 해석이. 그래서 여기 뭘 봐야 되느냐 하면, 26절에 “일곱 좋은 암소”라고 되어 있는데 일곱 좋은 암소는 우리의 현실의 안목으로 봐서는 암소 좋은 것 일곱 마리에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일곱 마리라는 말이지요.

일곱 마리의 암소를 보면서 그것은 일곱 마리 암소라는 존재가 아니고 7년이라는 시간입니다, 라고 해석을 요셉이 과감하게 하려면 요셉만큼은 무엇을 아느냐 하면, 이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의 세계에 들어간 요셉만이 그 해석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해석내리는 요셉 자신도 얼마든지 나 있음조차 없음으로 넘어가도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해석이 돼요. 세상현실을 해석하는 해석자가 됩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 세상을 해석하는 요셉 같은 해석자가 되어야 돼요.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됩니다.

창세기 40장 13절,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포도송이 세 가지는 사흘이라고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세 가지는 그저 세 가지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3일을 뽑아냈어요.

그러면 창세기 40장 12, 13절에 나오는 이 해석원칙을 그대로 창세기 41장 오늘 본문을 해석하려면 일곱 좋은 암소는 7년이 아니고 7일이 되어야 합니다. 왜? 세 가지가 사흘이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는 사흘이 아니고 일곱 암소는 7년이에요.

그래서 한 번 존재에게 써먹었던 그 해석을 또다시 써먹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는 해석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있는 존재는 있음을 이해 못하고 해석 못한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은혜 받았다는 식으로 하는데 해석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해석하는 내가 여기 있고, 이 해석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이득과 어떤 정보를 얻을까 싶어서 해석한다면 이미 그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에요. 해석해봐야 결국 나 좋아라, 하는 해석이거든요. 그런 것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이런데서 하라고 해요. 신화나 동화나 드라마나 만화책이나 그런데서나 하라는 말이지요.

창세기 41장 30절을 봅시다.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요셉의 해석이거든요. 따라서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라는 것을 바로 알기 이전에 흉악한 일곱 암소, 또는 흉악한 일곱 이삭, 이렇게 보자는 말이지요.

30절에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라고 하지 말고 “후에 일곱 흉한 소가”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해석만 달랑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 출발지점, 존재 있음부터, 요셉이 와서 없음으로 해석했다면, 존재에서 시간을 빼냈다면, 우리는 시간만 가지려 하지 말고 존재부터 해서 시간으로 넘어가야 돼요.

그러면 그 넘어가는 해석에 동의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그동안 겉으로 잘못되게 엉터리로 해석해왔고, 현실을 해석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요셉의 해석을 받아들여야 돼요. 인생사는 게 나 잘되려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성경을 천 독 만 독해도 소용없다는 그 말입니다.

교회 왜 나옵니까? 맨 날 나와도 자기 잘되기 위해서 교회 나왔잖아요. 그 자체가 잘못된 해석이라 그 말입니다. 죽여주옵소서, 하고 나와야지요. “엉터리 같은 나를 왜 살려 주십니까, 주여.” 이런 마음으로 나와야지요. 고생 없이 무슨 구원이 있습니까? 고통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실망하는 거예요.

30절 끝에 보면 “이 땅이 기근으로 멸망되리니” 하거든요. 멸망. 해석의 완료가 뭐냐 하면, 있음의 세계의 멸망이에요. 그걸 쉽게 생각하면, 이 땅 밑의 지옥 불 위에서 지금 가을야구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에서는 가을야구 준비 중이고. 야구하지요. 세일하지요. 지옥 불 위에서, 멸망 위에서 야구하고 세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야구 거쳐서 한국야구까지 다 보느라 열 몇 시간을 봤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백화점 세일만 찾고 있을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세일날짜만 기다리고 있어요. 어떤 엄마는 애가 빨리 커서 유치원에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밑에는 지금 마그마 지옥불이 들끓고 있는데.

평소에 내 이익중심으로 현실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니 성경 본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쉽게 말해서 내 안에 외재성이 있어야 돼요. 내 안에, 내 안에 뭔가 나답지 않은, 오히려 나를 늘 질책하고 나무라는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지난 오전 설교에서 했지만, 세상은 뭐냐? 두 명의 강도의 중간에 있는 예수님 십자가로서 세팅되어 있습니다. 그걸로 끝이에요. 우리는 어떤 역할인가? 강도역할 하는 거예요. 강도의 소원은 그날 밤에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 낙원에 가는 거예요. 죽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더 살지 않고 죽겠다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도 모른 거예요. 세상도 누군지 모르고, 현실도 누군지 모르고. 목사는 목회하면서 교회 크기를 바라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크기를 바라고, 가정주부는 자식 잘되고, 남편 잘되고, 자기 잘되기를 바라고, 나라사랑하는 사람은 나라 잘되기를 바라고. 이게 얼마나 큰 망상인지.

종교 단체는 종교단체 크기를 바라고. 이게 얼마나 마귀적인지 몰라요. 마귀적이고 이 세상신이 요구하는 거거든요. 오늘 본문 같으면, 애굽 바로왕의 자기 목적과 목표가 요셉의 해석에 의해서 아주 작살나버렸어요. 이게 허망한 것이고 아무 소용없다는 것, 원래 하나님의 시간에 의하면 이 세상은 멸망하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앞에 융성해도 마지막은 멸망이에요. 이걸 듣기 싫어하면 안돼요. 그러면 믿음 헛방입니다. 그동안 뭘 믿었어요, 그러면?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지금 지옥 불 위에서 신천지 큰 집회하고 있어요. 지옥 불 위에서 명성교회 세습문제 등장합니다.

그걸 거론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럽다는 거예요. 일종의 질투심이에요. 우리도 그렇게 컸으면……. 그러니까 그쪽을 욕할 수가 없어요. 이단을 욕하는 인간은 이단 아닙니까? 마찬가지거든요. 본인이 이단이면서 누구를 욕해요? 다 같은 이단이면서.

성경의 수백 군데서 그 나라 의를 위하라고 나와 있어요. 수백 군데서. 백날 해도 정말 말 안 듣습니다. 나 잘되고 봅시다, 하는 식이에요. 32절에 보면,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라고 되어 있다고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다시 읽겠습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26절에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시간은 동일해요. 시간은 동일한데 동일한 시간을 표현해주는 존재는 암소인지 이삭인지 상관없다는 거예요.

암소, 이삭의 그 자리에다 우리 자신을 집어넣어 보세요. 너라든지 나라든지 상관없어요. 다 망하게 되어 있어요. 때가 되매. 7년 더하기 7년, 14년 만에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이 땅에서 나를 위해서 내가 안 태어났다는 것을 미리 알아챈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기쁘고 즐겁다는 것은 보통 큰 행운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애굽의 실상이, 2018년 이 세상이 오늘날 애굽이거든요. 애굽에 우리가 태어나면 여기가 허공이라고 보지요. 빈공간이라고 보잖아요. 결코 빈공간이 아닙니다. 날마다 이 세상 신한테 시달리고 있어요. 날마다 시달립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에 쫓기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4, 15절 말씀이지요. 죽기가 무서워서 늘 쫓기고 있다고요.

해답도 모르면서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겹쳤다는 것, 결국은 두 꿈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은 이 세상이 2가 되든, 3이 되든, 4가 되든 결국 하나에요. 시간이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것. 주님이 정하신 때가 이 모든 존재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

32절 다시 봅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정하셨다, 확정지었다는 겁니다. 뭐라고? 멸망하라고. ‘그렇다면 애굽은 이제 끝났네. 애굽사람들 죽으면 요셉도 같이 죽겠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다음 구절에 보면 요셉이 대책 안을 내놓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세상에 우리가 산다는 것을 우리가 굉장히 정당화하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 말이지요. 정당화 하는데 그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현실 안에 갇혀 있는 우리가 우리보기에는 항상 정당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지금 프로야구 기아하고 롯데하고 한참 야구하는데 부산사람들이 롯데를 응원한다는 말이지요. 부산사람들이 롯데팀을 응원할 때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머리에 비닐봉지 뒤집어쓰고 3만관중이 응원한다는 말이지요. 사직야구장에서. 내가 롯데를 응원하는 것이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안 해요. 그게 죄인 줄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지역 팀인 롯데가 이겨야 된다는 그 바탕에는 내가 여기 부산에 살고 있다, 있다, 있는 내가 응원하는 팀이기에 반드시 이겨야 된다. 그 있음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어떤 용한 점쟁이가 “롯데는 못 올라갑니다.” 하면 자칫하면 구타당하는 수가 있어요.

“롯데 져라. 롯데는 져라” 사직구장에서 그렇게 하면 얻어맞는 수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존재자체가 죄라는 것을 모르는 이유는 내가 평소에 내 꿈만 꿨지 남의 꿈속에 들어가서 남의 꿈의 실정을 해석할 능력이 우리한테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꿈을 꾼 요셉은 자기 꿈도 아니에요. 남의 꿈속에 들어가서 남의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요셉의 꾼 꿈이 나머지 모든 인간의 꿈보다 우월하다는 겁니다. 해석자니까. 그러면 오늘날 요셉은 누굴 이야기하느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내 꿈속에 들어와서 내 꿈이 바로 죄였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밀침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모르는 내 실상을 확연하게 다 드러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죄에 대해서 이런 꿈을 줬다는 말은, 그 꿈을 준 그 분이 의가 돼요.

그래서 꿈은 소위 내가 잘났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엉터리 의로부터 해서 그걸 죄로 전환시키고, 그 죄에 있을 때 비로소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그렇게 해석하는 분이 비로소 의롭다는 것, 의에서 죄로, 죄에서 의를 나타내는 과정을 요셉의 꿈의 해석을 통해서 그 절차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꿈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그 절차를 요셉의 꿈을 통해서, 그리고 그 대책 안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게 돼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겁니다.

이미 한 번 죽었는데, 이미 죽은 자인데 미래 소년 코난처럼 거꾸로 와서 산다고 보시면 돼요. 살면서 어슬렁거리면 돼요. 내 육이 무슨 짓을 했기에 내가 죽어 마땅한가, 라고, “구경 한번 잘했네.”라고 구경하는 식으로 살아가면 돼요.

‘아이고, 롯데가 이겨도 다 부질없는 것, 기아가 이겨도 부질없는 것. 세일도 부질없고, 가을야구도 소용없고. 우리나라 월드컵도 소용없고, 남북회담도 소용없고, 소용없고, 소용없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이것을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뭐냐?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그러면 주님이 “안 된다. 나는 너를 계속 내 종으로 살려야 되겠어.” 그러면 계속 사는 거지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고 “됐다. 고생 많이 했다.” 하면 주와 영원히 거하는 거지요 뭐. 그게 사도바울의 소원이었잖아요. 이 땅을 빨리 떠나는 것.

왜 같은 믿음이 있다면서 믿음의 고백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할 때 그 바울의 고백은 빨리 죽고 싶다는데 우리는, 딸 시집도 보내야 되고, 아들 장가도 보내야 되고, 건강 체크 한 번 더 해야 되고, 땅값 오르는 것 보고 죽어야 되고, 교회 부흥되는 것 보고 죽어야 되고.

왜 그리 미련이 많고 집착이 많은지. 그게 바로 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현실세계, 외부에서, 하늘에서 주님이 오셔서 제대로 지적해주시니 비로소 우리는 눈이 열렸습니다. 세상이 하는 모든 것이 지옥갈 수밖에 없는 짓거리가 나타난다는 그것을 저희들이 이제는 감사함으로 알게 해주시고, 이런 지옥을 먼저 구경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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