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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10:23:08 조회 : 32         
181강-창 47장 13-16절(중심부)19031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17.111.178.72)
181강-창 47장 13-16절(중심부)1903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13-16절입니다. 구약성경 74페이지입니다.

창 47:13-16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몰수히 거두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오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요셉이 가로되 너희의 짐승을 내라 돈이 진하였은즉 내가 너희의 짐승과 바꾸어 주리라.”

가뭄이 거의 막바지 절정에 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뭄에 대해서 열심히 나름대로 버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가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유발된 겁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요. 그 가뭄에 대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할 사람은 아마 한 사람밖에 없어요. 요셉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은 그 가뭄에 대해서 도저히 고마워하거나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상당히 가뭄을 두려워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인간들의 생각들이 당연해 보이지요. 사람은 살아야 된다. 배불리 먹고 살아야 된다. 굉장히 당연해 보이는데 이 당연해 보이는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마땅히 ‘나는 사는 것이 당연하지’라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뜻과 안 맞는, 하나님에 도발하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악한 뜻이 거기에 서려 있다는 것이 성경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안일하게 성경을 본다는 것이 잘못된 해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나는 살고 싶다. 바로 그것에 대해서 네가 문제를 한번 삼아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뭐가 나쁜데?”라고 나온다면 “그러니까 네가 더 나쁘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가뭄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의 문제를 아무리 제시해 봐야 그게 과연 문제꺼리인지 아닌지, 이게 과연 문제가 되는 이야기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바닥이 무엇이며, 바탕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 수도 없어요. 모든 것을 뒤집어봐야 됩니다. 걷어내 봐야 돼요. 그 뿌리까지. 오늘 본문의 내용을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26절까지 계속 내용이 이어지는 겁니다. 가뭄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니까 돈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돈이 없어서 양식을 못 사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하는 말이, “가축이 있으니 가축을 내라.” 가축주고 양식 샀습니다. 가축을 주고 난 뒤에 “이제 가축도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 몸을 바쳐야지. 네 몸을 바치고 땅 자체를 양식 있는 곳에다 바쳐야지.” 그것도 다 바쳤습니다. 다 바치니 이제는 그것조차 없습니다. 내년에 모종할 씨앗이 없을 정도로 양식으로 다 먹고 말았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바로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9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내년에 농사지을 종자를 주시면 우리도 살고 이 토지도 황폐하지 않을 겁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좋다. 주는데 20퍼센트 세금 떼겠다.” 그렇게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26절까지 나오는데 주변의 모든 토지가 전부 다 바로왕의 것이 되었다고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을 바로왕에게 상납하게 되고 바로의 왕국이 그만큼 몸집이 커져서 모든 것을 지배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 너무 심하지 않느냐, 완전히 조폭도 이런 짓은 안한다, 어떻게 싹 긁어 가느냐? 전제군주도 이런 군주가 없다. 숨통조차 허락지 않는다. 그러한 평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평 자체가 우리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그 자기 권리를 아직도 쥐고 있다는 거예요. 주께서 말씀하는 것은 이런 거예요. “인간들아. 너희가 마지막까지 아등바등 하면서 기어이 쥐고 있으려는 것이 뭐냐?” 하는 것을 가뭄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나는 아무리 극한의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누구의 소속이 되기가 싫다는 거예요.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누구의 것이 되는 것, 누구의 종이 되는 것만큼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 고집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뭄 앞에서 버틸 수가 없지요. 이 가뭄을 오늘날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이라 봅시다.

가뭄, 죽음. 인간은 아무리 예쁘든, 참하든, 훌륭하든, 품위가 어떠하든, 인격이 어떠니 관계없이 죽음이 모든 인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효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인간은 소모품입니다. 인간은 자체가 소모품이에요. 사라집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렇게 되는가, 문제제기 할 수 있는 자질이 없어요.

어떤 고정된 장소에 뿌리를 박고 그것에서 안 뽑히려고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가뭄이 와서 그 뿌리째 그것을 뽑아버리지요. 여기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왜,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느냐? 간단하게 아주 알기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어떤 분은 알기 쉽게 한다고 하니까 더 어렵다는 분도 있는데, 알기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이 있는 것을 가지고 중심부라 합시다. 중심부가 있다는 것은 요셉이 있는 그곳 외에는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주변부가 돼요. 그런데 인간은 각자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중심부라고 아주 집착하듯이 우기기에 결국 이 싸움이에요.

‘내 인생의 중심이 나냐, 아니면 나는 누구의, 그분의 주변부에 불과한 것이냐’의 싸움, 하나님께서 문제제기하는 그 이유가 이런 지형을, 이러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요셉에게 언약이 있다 했습니다. 요셉에게 언약이 있다는 말은 뭐가 있다는 말이냐 하면, 심판이 있다는 말이에요.

부산강의에서 그걸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노아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전 지구에 홍수를 내리신 벌인데 그 노아언약에서 심판을 내리실 때 특징이 뭐냐 하면, 방주, 제가 지금 말한 중심부입니다, 방주 안 외에는 전부다 심판받아서 물속에 잠겼습니다. 물속에 잠긴 것을 주변부라 합시다.

그런데 언약이 이 땅에 나타났다는 말, 곧 하나님의 뜻이지요, 하나님의 뜻은 언약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언약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말은 곧 어디에 소속되지 않으면 너희는 전부 다 심판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부산강의에서 강조한 것은 개인 심판은 없다는 거예요. 일괄심판이고 집단 심판이에요.

개인구원이 없고 집단구원이 있는 것처럼 심판도 개인 심판이 없고 일괄해서 심판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언약과 무관하게 배제되어 있으면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요한복음 3장에도 그런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않으므로 이미 심판을 받았느니라, 고 되어 있어요.

얼마나 인격이 고매하고, 우아하고, 남들에게 얼마나 자비를 베풀고, 그것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자동적으로 언약의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요. 교회에서 심판 이야기를 자주하고 성경에도 심판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식상했는지, 제가 용어를 좀 바꾸겠습니다. 천벌을 받는다.

천벌이나 심판이나 같은 말이에요. 천벌을 받아요. 길 가던 사람이 우리보고, 또는 우리가 남에게 “당신 천벌 받는다.”고 하면 기분 안 좋지요. 심판받는다 하면 나중이야기처럼 느껴져서 별로 기분 안 나쁜데 천벌 받는다고 하면 마치 옛날에 벼락 맞는다든지, 갑자기 하는 일이 다 어긋난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성도가 되었으면, 언약 안에 있는 사람 같으면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해야 됩니다. 이 세상 사람에게는 무엇이 주어집니까? 천벌. 천벌 받는 거예요. 이걸 정말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천벌 받는 겁니다. 오늘 본문대로 하면 가뭄 받아요. ‘우리가 버티면 되지. 아직도 몸뚱이는 있으니 열심히 하면 되지. 토지가 있으니 버틸 때까지 버텨야지’

이렇게 버티는데 요셉이 갖고 있는 언약의 위력은요. 결국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의 자리를 중심부로 여기는 그 마지막 버팀까지 다 거덜 나게 만들어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언약 밖이 심판을 받는다는데 심판의 취지가 뭐냐를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나의 고정된 그 자리마저 뿌리째 뽑히는 것, 그것이 바로 언약이 준 심판이요 언약이 준 천벌입니다.

마태복음 7장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마치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다 무너뜨린다. 역시 뿌리째 뽑히는 거예요. 말씀완성에 자리 잡고 있지 아니하면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고, 연봉 10억이니, 집이 재벌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기그룹이니, 유명인사니, 학력이 대단하니, 가정이 얼마나 화사하고 화목하니, 인생을 편안하게 살았다니,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천벌의 변형태입니다. 지금 벌 받고 있는 거예요.

어떤 가수가 무명가수 하다가 히트 치면 복 받았다 하잖아요. 천벌 받은 거예요.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가정에서 사랑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 천벌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취지에요. 그들은 자기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몰라요. 자기 자신에게 문제를 던지지 않습니다.

나는 문제없어. 나는 아무문제 없어. 이걸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에게 어려움이 오게 도 되면 사람들은 억지를 부리면서 내가 계속 이 땅에 살아야 될 명분을 계속 발굴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꾸 지연시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려도 그다지 문제의식이 안들 수가 있지요.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 36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했을 때에 교회 좀 다닌 사람은 이런 소리 안 들은 사람이 없어요. 다 들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이 뭐냐?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상실하고,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빼앗겨도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따로 나라고 버틸 수 있는 경계선 같은 것이 이제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뜻이거든요.

주가 누구냐 하면, 오늘 본문에 요셉이에요. 요셉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애굽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나는 중심이다. 나는 이것 가져야 산다.’ 하는 이 모든 것, 이게 문제꺼리인 것도 생각도 못하고 평소에 살아온 대로 나는 내 것 가지고 살겠다는 상식선에서 살다가 갑자기 가뭄이 들이닥치니 모든 것을 빼앗겼어요.

그런데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 36절에 보게 되면, 우리가 빼앗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몰랐던 분을 알게 되는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 왕을 만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되었다는 거예요. 종이 되었다는 것이 이렇게 신나고 기쁘고 감격에 넘쳐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속해서 기쁨에 울먹이면서 외쳐도 모자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요 나의 왕이십니다, 하는 것, 더 이상 나에게는 일체의 고민거리가 남아 있지 않다는 그 감격 속에서 주는 나의 그리스도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고백이 나와야 돼요. 종인데……, 누구의 종이잖아요. 왜 내 것이 있어야 되지요? 왜 내 행복이 따로 있어야 되고 내 가정, 내 자식, 내 인생이 왜 따로 있어야 됩니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보통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단독적으로 내가 중심부고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 인생이라는 것, 내 몸, 내 육체 이런 것이 따로 있어야 돼요. 왜냐? 그것 없이는 우리는 살 명분이 없기 때문에. 살 이유가 없어요. 살 보람도 없고.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내가 내 몸이라고 여기는 것도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에요.

그러면 주의 몸을 굴리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인생이라 합니다.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 자기 몸을 굴리는 것이 인생이라면 내 인생이라고 굳이 이야기할 것이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말이지요. 내 인생이라는 것은 주님, 왕 앞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되고 손을 놔야 돼요.

내 인생 손 놓으면 내 고민, 내 걱정, 내 염려, 내 공포, 내 두려움, 내가 위협받는 것도 다 같이 완전히 없어져 버려야 돼요. 날라 가버려야 된다 이 말이지요. 이 논리가 맞는 논리 아닙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동안 인생을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뭐냐? 내 인생은 내가 담당해야 되고 내가 이끌어 가야 된다는 그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럴 때 요셉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을 놓친 겁니다. 자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주면서 만들라고 한 것이 방주였어요. 방주를 만들어 놓으니까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홍수가 나도 사는데 그 방주라는 잣나무로 만든 그 배 비슷한 바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때 사람들이 미리 알았다면, 미리 믿었다면 자진해서 자기의 전토나, 자기의 가족이나, 자기의 그동안의 위상이나 명예, 그리고 위신이나 체면, 그리고 금융기관에 있는 자기 통장잔고, 다 버리고 그저 뭐만 좋아서 뛰어와야 되느냐 하면, 방주 자체가 좋아서 방주 속으로 쏙 들어와야 돼요.

방주 안에 아무도 안 들어왔습니다. 안 들어온 이유가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기 인생의 즐거움에 신났어요. 내 인생 자체가 천벌 받고 있는 인생인줄 모르고 내 인생 잘 살면 나중에 천벌이 면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내 것이라고 있는 것 자체가 천벌인데, 그게 문제의식이 안 되는, 자기 자신이 자기인생 살아온 것을 스스로 무의식중에 자기 중심부라고 쥐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 요셉 이야기는 뭐냐 하면, 중심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뭄이 일어나더라도 중심부는 따로 있는데 그 요셉이 있는 곳에서부터 가뭄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이 있는 곳에만 양식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주변은 그야말로 주변부입니다. 중심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주변부가 있는 것이지 그 주변부를 살리기 위해서 중심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나를 버리라고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더 이상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우기지 말라고 예수님이 계시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받았던 사람, 이걸 지식으로 아는 사람 말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시다, 주라는 말은 왕이라는 뜻이에요, 나의 왕이시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안 사람에게는 그 뒤에 사도행전에 보면, 그까짓 거 뭐, 내 것이 없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내 것 네 것 하지도 않았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것이라고 우기다가 하룻밤에 부부가다 죽었잖아요.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에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을 바치라는 말이 아니고 과연 기쁨이 있느냐, 예수님을 왕으로 삼는 순간 인생문제나 자신의 미래나 나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것이 전혀 없게 되었다는 넉넉함을 보이라는 그 말입니다. 심지어 내 생명까지.

요셉이 하나 둘씩 주변에 있는 것을 바로왕 쪽으로 끌어당기는 이유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 것 따로 있고 주님 것 따로 있는 이런 모습은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구조가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몽땅 다 빼앗아가는 나라, 우리는 즐겨 기쁘고 고맙게도 주께서 몽땅 내 인생을 다 빼앗아가는 나라, 그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빼앗기는 즐거움과 빼앗기는 행복감. 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 가벼움. 신앙생활 딴 게 아닙니다. 다 빼앗기는 것이 신앙이에요. 누구한테? 주님한테 다 빼앗기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의 걸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주’ 시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 것 다 가져가는데 우리는 그 동안 내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한 배은망덕한 내 죄를 알았다는 것, 그래서 죄라는 것을 아는 그것만 해도 우리는 큰 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구약이기 때문에 주변의 돈과 토지, 종들이 애굽 중앙의 바로의 궁, 또는 요셉이 있는 곳으로, 평면적으로 옮겨졌다고 보시기 쉬운데요. 요셉에게 언약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언약은 평면적이 아닙니다. 중심부, 지역적으로 이쪽이 주변이고 이쪽이 중심이다, 이렇게 중심부가 다른 평면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높낮이가 있어요.

위상적이라 하는데 높낮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중심도 평평하고 주변도 평평하지만 우리가 볼 때는 요셉이 있는 곳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어서 높낮이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요셉이 주변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바로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가 그 당시 애굽의 왕이었던 겁니다.

실제적으로 왕은 누구냐? 하나님의 요셉이 왕이고 요셉의 왕은 하나님의 아브라함언약이 왕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구조와 어떤 조직체로 조성되는가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뭐냐? 주님이, 하나님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왕이 되는 거예요.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주님인 겁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하늘나라에요. 그래서 그걸 아들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 주님이 왕이 되는 나라에요. 그러면 그 왕을 왕으로 인정하고 대우를 하려면 우리는 빼앗기는 즐거움으로 살아가야 돼요.

빼앗기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그리고 그 빼앗기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늘나라에서 실시하는 쉬지 않는 주님의 활동이 우리에게 도달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창세기 47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어찌 우리의 전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식물로 사소서.”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레위기25장 5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노아 때는 방주를 만들었지만 노아 방주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품군을 만드는 것, 품군을 네 자로 하면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을 만드는 것이 노아 때 만든 방주의 기능과 동일한 기능입니다.

노아는 뚝딱뚝딱 목수가 되어서 어떤 형식을 만들면 되지만 점차점차 언약의 내용이 어떤 인물에 집약을 해요.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의 에너지가 한 인물에 모두 응축이 되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이 그렇게 돼요. 왜냐하면 요셉이 꿈을 받았고 그 꿈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까. 그 꿈대로 이루어지도록 주어지는 모든 에너지는 요셉을 통해서 구체화되고 현실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재편되고 정리되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말씀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그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으면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왕국이 되는 기본원리가 되는 거예요.

죄인을 나의 백성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 그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이 주변의 주변부를 다 빼앗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너희가 네 자신의 중심이 아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해도 듣는 사람은 어떻게 듣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간에 사는 모습을 보면 제각기, 제각기. 경상도 말로 지줌지줌이라 하는데 제각기, 제각기, 자기가 중심이에요.

자기가 중심이 되어놓으니까 걱정하고 염려하는 내용을 보면 전부 다 자기걱정하고 있어요. “목사님, 알레르기천식이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또 자기걱정. 주님께서 천식을 하게 하신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우리로 하여금 본문 그대로 왕의 종이 되기 위해서. 종은 특징이 뭐냐 하면, 쉽게 해서 노예입니다.

종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는 의식이 종의 행복이어야 돼요. 내가 내 주인이 아니야, 라는 것이, 억지로 인내하면서 ‘그래. 나는 아니야.’ 하고 참는 것이 아니고 즐거움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는 누구의 종이 되었다는 것. 종이 되었으면 계속해서 주인의 업무지시가 있을 거예요. 주님이 일하시니 우리가 놀 수가 없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 7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지금 이 종이 속으로 ‘에이!’ 이러고 있으면 그것은 종 아니에요. 악한 종. 또는 그걸 가지고 마태복음 달란트 비유에 보면, 그걸 ‘악한 종’ 혹은 ‘게으른 종’이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주인한테 해주지만 속으로는 ‘내가 중심이야. 내 인생은 내가 챙길 거야. 끝까지 나는 나라는 것을 만들고야 말리라. 나에게서 내가 없다는 것은 내가 살 이유도 없어. 왜? 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의 왕 됨을 거부하는 악마적 속성임을 주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들춰내는 겁니다.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천벌밖에 없어요. 심판밖에 없습니다. 언약대로. 그것은 언약대로 그렇게 실시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신앙이 뭡니까? 신앙은 즐겨 우리 주님한테 몽땅 뺏기는 그 광경을 보면서 그걸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고마워하고, 그런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마음에 병까지 들어버리는 것, 그게 바로 신앙이지요.

우리 집에 공들여서 해놓은 가재도구며 전자제품이 있는데 누가 와서 다 들고 갈 때, TV, 가스렌지, 김치냉장고, 다 들고 갈 때 그게 좋아서 발을 구를 정도로 기뻐하는 것, 더 이상 내가 이제 내 관리에서 손을 뗄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 나는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분의 종으로서 취직이 된 거지요. 나라는 것이 뿌리 째 뽑힌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 겁니다. 지금 주변부의 이 사람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저것들 완전히 조져 놨다.’ 하지만 조져놓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은 행복해야 돼요. 애굽의 백성이 된 것을, 내가 왕의 종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아까 말씀한 레위기 25장 55절에서, 이스라엘은 나의 품군이고 나는 주인이다. 너희는 나의 종에 불과하다고할 때 이스라엘은 이구동성으로 “세상에, 이런 축복을 받다니 너무 감사하고 황공무지로소이다. 이제는 영원히 딸랑딸랑 우리 주님의 종으로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감사해야 되지요.

끝으로 아까 보았던 성경보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의 사도들, 스데반 집사부터 해서 모든 사도들은 지금 사는 것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심지어 자기가 순교하는 것도 좋아서 미치는 정도에요.

‘어떻게 이 내 아이큐, 이런 머리가지고 주님이 나의 왕이 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챘을까?’ 아이큐를 가지고 알아챘겠습니까? 성령을 받으니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종으로서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앉은뱅이는 너무 좋아서 뛰었습니다. 펄쩍 일어나서 뛸 정도로 좋았어요. 더 이상 자기앉은뱅이, 자기건강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것이 너무 좋아서, 건강하게 몇 년 더 살고, 건강하게 더 벌고,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남들이 나보고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네가 범죄자니 어쩌니, 흉악하다니 이상하다니 그런 온갖 평가조차도 이제 더 이상 나의 기쁨을 앗아가지 못하고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왜냐? 우리는 그분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데 우리 자신이 이걸 너무나 시시하게 여겼고 그냥 들은 풍월로 넘어가고 여전히 우리가 우리 중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중심을 찾게 하옵소서. 주님만이 우리의 중심인 것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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