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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22:57:23 조회 : 131         
강남-요한복음 20장 17절(너희 하나님)190305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25.130.152.223)
강남-요한복음 20장 17절(너희 하나님)190305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16절에서 17절 18절 일단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선생님이라 하는 것은 학교 교사란 뜻이 아니고 극존칭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인간으로서 가리킬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하는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영혼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잖습니까. 자기 영혼을. 거기에다가 도박 같으면 거기에다가 모든 판돈을 다 거는 건데 판돈을 거는 입장에서 대충 한 다리는 이렇게 긴가민가 한 다리는 세상에 이렇게 걸칠 수가 없어요. 그 유대사회에 랍비라고 하는 것은 한 다리는 걸치고 한 다리는 나중에 뭐 제가 신임하고 싶으면 그때 오겠습니다 그런게 용납이 안돼요. 랍비라는 것은 종교 사회이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에 일반인 사이에 신과 인간 사이에 랍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랍비가.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성전이 깨지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끊어졌잖아요. 말라기 이후에 440년 동안 선지자가 없어요. 그 공백을 뭐로 메꿀 것이냐 하는 거에요. 신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빈자리를 뭐로 메우느냐 하면 기존의 신탁을 해석을 하게 되고 그 해석해 놓은 것을 그것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고 분석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도록 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닌 사람이 랍비들이에요. 랍비들.


물론 선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계시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안해요. 그러면 선지자가 왜 랍비가 그런 건방진 말을 못하느냐 하면 예언이라 하는 것은 그냥 내질러보고 보는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성취되어야 되거든요. 그 다니엘에 그런 내용 있잖아요. 남이 꿈을 꿨는데 해몽해 주는 사람. 그건 선지자 아니지요. 적당히 좋은 말 하면 되지요.


그런데 당신 어젯밤에 이런 꿈 꿨지? 나하고 권투하는 꿈 꿨잖아. 그걸 말도 안했는데 미리 알아채버리면 헉! 뭐지 이분은?! 랍오니 이렇게 되는 거에요. 너는 나의 영원한 랍비가 되는 거에요. 그 정도 되면. 랍비 이상이죠 선지자는. 그래서 그 시대에 있어서의 자신의 영혼을 담보할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랍비.


그 랍비가 그 당시 유대사회니까 이스라엘의 그 랍비가 있다는 것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대적으로 억압받는 가운데 있어도 그들은 행복해요. 여러분 행복이라는 것이 소유가 넉넉해서 행복한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소유가 넉넉해져 버리면 그걸 나중에 그 소유가 빠지거나 사단나거나 줄어들 수도 있고 자기보다 먼저 소유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배가 아파서라도 화나서 질투심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요.


인간이 진정으로 최종적으로 마감적으로 행복할 경우는 뭐냐 하면 내 영혼마저 갖다 앵겨도 그 사람에게 맡긴 내 영혼이 아마 빛이나고 미래가 잘된다는 보장이 있을 때 그때 행복해요. 그래서 매슬로우의 욕구설의 제일 마지막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라는게 있거든요. 그거는 심리적 안정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그때 선지자 누가복음 선지자 시므온입니까? 그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 맞지요? 시므온이 아기예수를 이렇게 안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재여~” 주님이여 이런 뜻이죠. 주님이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종을 평안히” 여기는 그냥 평안히 되어 있지만 제가 이렇게 운을 띄웁니다. ‘종을 평아~~~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런 경지에 이르는거에요 시므온이가.


하나님께 몇 푼 받았어요? 어디 취직했어요? 얻은거 없지요? 천식이 낫고 그런거 있었어요? 없어요. 종의 마음을 편안하게 기쁘게 편안하게 놓아주는 것은 자,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뭐를 본거에요? 아기예수를 봤잖아요. 아기예수를. 이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이 무슨 책이다? 누가? 그다음에 뭐에요? 누가? ‘누가복음’ 누가복음. 누가복음 2장 29절에 나오잖아요. ‘복음’.


그러면 교회가 교회가 해야 될 임무가 뭡니까? 교회 온 성도로 하여금 예전에 집에 불이 나고 부도 나고 애가 아프고 뭐 취직 안되고 결혼도 안하고 뭐 1억 5천 잃어버리고 사기당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옛날엔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했고 그것에 휘말렸다 휘둘렸다 이 세상 사는 것이. 미세먼지만 해도 막 시달리고 뭐 물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런 것까지 가슴 덜컹 내려앉고 아파트 전세 올라가면 어찌 사노 그러한 휘둘리는 것, 이 세상 휘둘리다가 복음 자체가 우리에게 뭐를 제공해야 된다? 이제는 주의 영혼을 ‘평안~~히 놓아주는 거’에요.


실연을 당했든 모든 것이 주저앉든 남한테 웃사를 당하든 평안히~~~이것은 이게 바로 성령이 임해서 그랬다는거에요. 같은 성령이 임했다는데 왜 다른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성령이 임하는 사람은 그까이것 그까이것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까이것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 내에서 성령은 헌금 빠지면, 인원수 빠지면 덜덜 떨고 그런 성령이 어디 있어요 그런 성령이.


복음의 내용과 다를 때는 그건 뭐다? 복음이 기다? 아니다? 복음이 아닌거에요 그건 복음이 아닌거에요. 복음 이야기 나왔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우리가 지금 요한복음 하거든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하는데 제가 예를 든 것은 누가복음 2장 29절에 시므온이 아기예수 안아서 종을 평안히 놓아줬다 했지요.


뭐를 안았다고 했습니까? 방금 제가 뭐를 안았다고 했습니까? 아기예수, 아기예수죠. 이걸 오늘 요한복음 20장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몸이라고 하는거에요 ‘몸’. 몸이에요 몸. 이걸 칠판에 쓸 수 있는데 그냥 나직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 나직해서 좋으네 목이 안 아파서 좋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초월적 실체의 너희들이 아직 결합될 수 없는 몸이라는 뜻이에요.


“나를 만지지 말라” 했거든요. 초월적 실체의 몸이 따로 있고 그 몸과 질이 다른 몸이 바로 네 몸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초월적 실체의 몸과 네 실체, 흙의 속한 실체에 몸은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한 입장에서는 이것이 만져도 되는 사이가 아닌 겁니다. 만져도 되는 사이가 아니에요. 그 만지지 못한다는 말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어떤 몸이어야 되느냐 하면 죄인을 흡수해서 자기 안에 통합시키는 기능이 발현되는 그런 새로운 몸이 되어야 돼요. 아직은 아니다라는 거에요 아직은. 네가 전에처럼 내가 십자가 부활되기 전에처럼 네가 함부로 만지고 같이 잠자리하고 식사하고 그런 몸이 아니에요. 지금 어떤 중간에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 자체의 실체가 변형되는 과정을 오늘 본문 요한복음 20장 16절에서 18절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한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가만 있거라 나 홀로 다할게” 라는 뜻이에요. “가만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너희들이 네 자신을 변형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네가 변형돼봐야 그 몸에서 그 몸밖에 나올게 없어요. 사람이 기껏 자기 몸을 굴린다는 것은 자기 몸이 갖고 있는 한계를 기껏 한계를 보여줄 뿐인데 그 한계라는 것은 자기 몸을 굴려서 정신적으로 어떤 쾌감과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겁니다.


아주 쉬운 예가 바로 춤추는 거죠. 음악에 맞춰가지고. 음악에 맞춰서. 지금 다이어트하는 거기에서도 음악 틀어놓고 하지 않습니까? 잘 모릅니다만 음악 틀어놓고 하지요? 음악 틀어놓으면 뭐가 반응한다? 몸이 반응하고 가만있을 수가 없지요? 예민한 여성의 몸으로서는 가만 있을 수가 없지요. 흔들다 보면 땀 빠지고, 땀 빠지면 증발되고 증발되면 기분 썩 괜찮고 살 빼고 기분 좋고 오늘도 돈값 한거지요. 회비 낸 값을 하는거에요.


그 다이어트 하는 그 클럽이 얼마나 또 강사가 친절합니까. 또 잘생겼지 젊지 친절하지. 이미 결혼했습니다만. 그러니까 회원수가 곱빼기 부흥이 되는 거에요. 그냥 있기만 해도 부흥이 되는 거에요 있기만 해도. 교회는 부흥 안되고 하여튼 거기는 부흥되는 거에요. 왜? 몸을 몸에서 엔돌핀이 나오도록 그걸 상품화시킨 거거든요. 조치를 취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몸은 다른 몸을 흡수할 수 있어요? 없어요? 통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혼자 즐거워. 자기만 즐거워요. 자기만 댄스 춰요. 댄스 추고 춤춰요. 안동역이란 노래에 맞춰가지고. 안동역 앞에서 몸을 흔들어. 신나. 혼자하면 재미가 없어. 라인댄스를 해야돼요. I ‘can't stop loving you’ 그 노래에 맞춰가지고 잘 추는 사람 앞에 세워가지고 라인댄스 알아요? 컨츄리 음악에 맞춰가지고 미국에서 하는거 있어요. 안 그러면 유투브 찾아보세요.


몸의 쾌락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그냥 운동에너지를 가해서 굴리면 되는 겁니다. 자기만 즐거워요. 자기만 즐겁다고요. 제가 왜 댄스이야기 자기 즐거움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은 사람들 쪽에서 다가가는 것 주님이라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다가가는 것 그게 한계가 있습니다. 이번에 수련회 때 아가 했잖아요. 아가의 내용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하면 다가가는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는 겁니다. ‘다가오는 사랑’이어야 한다예요.


다가올 때 다가오는 사랑이었는데 다가오는 그 사랑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가 다가가는 쪽으로 나설 때 그건 항상 실패로 끝나요. 그런데 아가에 보면 실패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난데없이 바람이 불고 향기가 넘치고 그래서 주변의 대자연이 두 사람이 결합하도록 도와주지요. 심지어 그 여자친구까지 도와줍니다. 그 여자친구가 어디에 소속됐느냐 예루살렘이 소속된 여자들이에요. 신부를 혼례 올리도록 도와주지요.


그 친구들의 춤을 무슨 춤이라고 하느냐 마하나임의 춤이라고 했어요. 아가에. 그것은 바로 천사들이 추는 춤이에요. 춤은 어디서 춘다?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다윗언약에 의해서 의미있게 자리잡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랑이 거기서 시작이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랑의 출처가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 왕이 여자를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남자가 다가가도 여자가 다가가도 이게 쉽게 성사되지 않아요. 늘 실패로 끝나요.


하지만 여호와의 질투심 그래서 거기 아가 마지막에 여호와의 불같은 질투심이 죽음보다 강한 질투심이 결국은 그 왕에 합당한 신부로서 혼례를 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대자연은 그걸 후원해주고 도와주고 천사 기능하는 여자친구들도 도와주고. 그래서 아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일상 중에 하나가 아니라 사랑이 최종목표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사랑이 최종목표다. ‘힘’이 아니고 ‘사랑’이다.


제가 지난 오후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을 삶의 일부로 보는 거에요. 왜 그러냐 하면 힘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을 가질 수밖에 그까이것 사랑, 돈 있고 힘 있는데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이처럼 사랑을 뒷전으로 만드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사랑의 반대말이에요. ‘힘’이에요. 힘입니다.


그건 누구의 힘? 본인이 갖고 있는 힘이지요. 목사가 교회를 가졌다. 이거 힘이잖아요. 가장이 빌딩을 가졌다? 이거 힘이란 말이죠. 나는 돈은 없지만 아이들을 8명 낳았다. 이것도 힘이다 이 말이죠. 나는 내 친구가 많다. 영구 친구도 있고 이것도 힘이다 이 말이죠. 여자혼자 살기 힘드니까 힘 있는 남자만나겠다는 거에요. 돈 주고 사겠다는 거죠. 그게 다가가는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욕망이 있는 사랑은 실패로 끝나고 충동에 의해서.


주어지는 사랑이 되면 바로 그 사랑 앞에서 나라는 것은 사랑의 아이스크림 녹아지듯이 내 자신이 녹어져버려야 돼요. 내가 녹아지게 되면 뭐가 남는다? 나와 너가 있는게 아니고 중간에 뭐가 피어나요? 사랑만 피어난다. 이것이 아가서의 전체에 있는 분위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니 좀 기억이 좀 나십니까? 두 사람의 몸은 없어져 버려요. 없어지고 두 사람의 몸에 의해서 발견된게 있어요. 그게 ‘사랑’이다. 아가에 나오죠.


그런데 여기에 그렇다면 그걸 신약에서 너무 성급하게 적용하면 예수님의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다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할 수 있겠지요. 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바로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고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하잖아요. 로마서 7장에도 나오고. 너무 성급하게 그렇게 이뤄버리면 중간에 중요한게 확 빠져버려요.


뭐가 빠지냐 하면은 오늘 본문이 빠져버린다고. ‘만지지 말라’가 빠져버렸어요. 만지지 말라를 저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위반의 요소가 현재 주님과 결합할 때 그 위반의 요소가 우리 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까먹은거에요. 만지지 못할 몸을 가지고 우리가 우리 부모한테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쳐버리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내 쪽에서 왜 다가갈 수 없는가? 위반의 그 주님의 몸과 합의를 하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거는 주님께서 부활한 몸을 마리아가 랍비여 랍오니여 선생님이여 하면서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그 단절성을 다시한번 새롭게 부각시키는 취지가 바로 그 취지예요. “너는 네 자신을 아직도 모른다.”


우리 같으면 뭡니까. 주님 우리 아는 사이잖아요. 이렇게 나올거에요? 아는 사이하고 몸이 하나의 몸이 되는거하고 달라요. 우리는 또 이럴거에요. 주님 우리 아가 봤는데요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고 신부니까 주께서 능력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예, 능력으로 해내요. 성령오시면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을 놓치면 안된단 말이죠. 과정이고 뭐고 결과적으로 한 몸되면 되지. 아니요.


그러면 그것은 내 사적 구원용이 되어 버려요. 사적. 나만 챙기면 그만이지. 사적 구원 그것은 마귀의 주장이고 우리는 내 구원받기 위해서 성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거에요. 개인적 구원 챙기면 우리는 코웃음치고 돌아설 인간들입니다. 주께서 만지지 말라 할 때는 우리는 약간의 불만 요소가 있을 수 있어요.


좀 만지면 어때? 그거 좀 만진다고 주의 일에 어떤 차질이 일어납니까? 차질이 일어나는데. 무슨 차질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너는 너를 모른다는 거에요. 너무 나댔어. 너무 함부로 예수님을 함부로 생각한거에요. 마리아가 오늘 본문에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일거에요. 마리아가 그냥 반가운 마음에 만지려고 했지요.


왜 그랬느냐 하면은 마리아의 마음은 자기 몸이 있잖아요. 인간의 몸은 내부적으로 어떤 단절성을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그 몸하고 지금 내 몸이 동일한 동일 실체라고 본거에요. 어제 주님을 만났으니까 오늘도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누가복음 8장 4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러분 잘 들으면 잘 아실 말씀이에요. 43절에 42절에 중간에 후반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호하더라” 여기에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여자가 12년 동안 피를 흘리며 하혈하는 그러한 아주 비참한 병을 참혹한 질병을 앓고 있었어요.


여자가 뒤도 와서 그 옷가를 손을 대매 혈루증이 즉시 즉시 그쳤다고 되어 있어요. 즉시 그쳤다. 자, 몸 만졌습니까? 옷 만졌습니까? 단지 옷만 만졌을 뿐인데 즉시 혈루증이 그 저주받은 그 질환이 즉시 나았어요. 즉시 나았다는 말은 이 병 고침이 여자의 건강회복에 의미를 두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짐작하겠지요?


즉시 나은 거에요. 차츰차츰 좋아진게 아니고. 차츰 원기회복한게 아니고 즉시 나았다고 하는 것은 12년이에요. 12년과 즉시를 한번 비교해보세요. 12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참 고생했거든요. 남자들은 그냥 남자 아니고 군에 갔다온 남자들은 이걸 알아요. 우리할 때는 거의 3년이었거든요. 34개월. 36개월 34개월 동안 했다구요. 34개월 했다고요.


34개월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거에요. 내 자유시간 갖고 싶다. 국방부가 준 스케줄말고 내가 내 임의대로 초이스할 수 있는 선택하고 정할 수 있는 내 자유를 얻고 싶다 그게 34개월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달력에다가 가위표치고 이럽니다. 빨리 죽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너무나 허망하게도 제대날이 오게 되면 부대에서 빨리 나가라고 합니다. 즉시. 그러면 기다린 보람이에요? 아니면 국방부의 명령이 더 셉니까? 어느 쪽이에요? 취지가.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만큼 기쁨이 오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있으라 하면 있고 제대하라면 제대하는 그 명령에 우리는 그 제대군인은 종속되어있는 거에요.


즉시 나가야 돼요. 오래 있으면 안돼요. 오래 있으면 또 내일의 밥은 제사과에서 제사과라 하는 것은 밥하고 이런거에요. 제사과에서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밥이 안 나옵니다. 즉시로 나가야 돼요. 3월 23일 제대를 했는데 내 군대 이야기를 왜 하나? 그런데 눈이 펄펄 오죠. 3월말에 눈이 와요. 제대한 사람이 나 혼자 밖에 없어요. 서글프기 짝이 없어요. 뒤돌아보니까 고생했던 그 부대. 처량하기 짝이 없어. 그 의미를 몰랐는데. 내 운명이 내 열심과 내 인내와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구나. 나의 미래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12년 했느냐 15년 했느냐 묻지 않고 38년 동안 병 들었느냐 묻지 않고 딱 믿기만 하면 즉시로 그만 ‘꺄르륵’ 합격. 주님의 주저 없는 조치에요. 나하고 사전에 조율하거나 의논하거나 협상한 적이 없습니다. 일방적, 그냥 국회에서 세 번 두드리는 것처럼 그냥 선포로 끝나버려요. 너는 해방이다. 너는 해방이다. 그런데 이 방금 누가복음 8장 42절이 어느 책에 있다고 했습니까? 어느 책에 있다고 했어요? 어려운 문제 아닌데. 이거 어느 책에 있다고 했어요? 누가복음에 있지요. 누가 복음이잖아요 “복음”.


복음은 뭐다? ‘즉시’. 아까 누가복음 2장 이야기는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그리고 누가복음 8장은 즉시. 그럼 교회에서 외쳐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즉시로 종이 편안한 것. 구하면 되잖아요. 즉시로. 아무것도 안 해도 즉시로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으로서 이제 종이 편안한 것. 뭘 더 아이큐를 굴리고 요모조모 뭐를 더 따집니까? 봉사했는데 앞으로 복을 얼마 더 받나? 쓸데없는 그 계산을 왜 해요. 할 필요 없어요.


소유해서 종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즉시로 해방되어서 평안한거에요. 그런데 여기서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옷을 만졌다. 옷가를 만졌다는 거에요. 주님의 몸에 근접되어 있지만 몸은 아니지만 어쨌든간에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을 만졌는데 즉시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은 그러면 그 12년 동안 병 들었던 그 여자 몸에 무슨 효과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여자는 너는 이제부터는 따로 네 몸이 아니고 너는 내 몸과 통합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통합된 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든 자도 꺄르륵 웃을 수 있는 환경이 하나님의 예수님의 몸이에요. 예수님의 몸입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요. 그런 설교하니까 진짜 몇십년만에 처음 태클이 들어왔어요. 제가 대구강의에 했잖아요.


“어떻게 천국 가서 자기 죄를 잊어야지 자기 죄를 언급해가지고 꺄르르 웃느냐? 그런 천국은 없다 목사님 너무 막나갔습니다” 라고 그렇게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그런 이야기했던가요? 그 이야기 안 했구나. 오늘 강의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 사도 요한이 벌거벗고 도망쳤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사도 요한이. 예수님 팔리실 때 다급해가지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지요. 그 이야기를 자기가 쓴 요한복음에 거기에 기록이 되어 있지요. 그거 왜 기록합니까? 자기 수치심인데.


베드로의 비서가 마태잖아요. 마태복음에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태클 걸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 나오지요. 마태복음에 나오지요? 그 이야기가 왜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게 포함되어야 그게 복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포함되어야. 그래서 대구강의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말씀은 나 구원받으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의 죄조차도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형성에 이미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죄를 지어도 그게 예수님의 계시가 된다 했지요?


주님은 계시 만들기에 집중할 뿐이에요. 네가 어떤 죄를 지었는가는 그런 것은 네가 알 바 아니에요. 내가 내 관리하거나 내가 나 단도리 할 그런 권리도 없고 그런 입장도 못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된다는 거에요. 나같은 인간도 증인되는 거에요. 그래서 강의할 때 의인 중에 천하의 의인인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천하의 괴수 됐잖아요. 꺄르르 안 웃을 수가 없어요. 기분 좋아서. 웃으란 말은 감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감사’.


오늘 본문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했잖아요. 좋다고 하는데 “이씨 만지지마 어디”. 물론 “이씨”라는 말은 안했습니다만 비타민씨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만은 “만지지 말라.” 그럼 사전에 그런 이야기 해야지 사전에. 만지려하기 전에. 주의사항 나는 부활했을 때는 너희 흙에 속한 몸은 일단은 만지면 안 됩니다 뭐 이렇게 붙이던지.


그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만지지 말라고 그 의미가 소중한거에요. 그걸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려고 막달라 마리아는 일단은 허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만지지 말라고 단절을 거리를 두신거에요. 그러면 주님의 몸은 얼마나 대단한 몸으로 될 것입니까 라고 우리는 궁금해 하겠지요. 도대체 주님이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 대단하게 만들 것인가 이렇게 관심을 두는데 쓸데없이 주의 몸에 관심두지 말고 도대체 우리 몸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가를 생각해야지요.


자기는 멀쩡하다고 우겨요. 자기는 아무 몸이나 만져도 된다고 우기고 있어요.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몸은 어떤 몸이냐 하면은 이미 죽음을 포함한 몸입니다. 죽음을 포함한 몸이에요. 그리고 죽음을 포함 정도가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그걸 경유해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힘을 이기시고 살아난 거에요. 인간의 몸으로서는 그 표현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까 그 아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이야기해볼게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가를 하면서 제가 강의 중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아가 교재를 쓸 때 이런 이야기했지요. 상징은 상징에 담긴 의미는 문자로도 다 마저 표현하지 못한다. 교재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고 강의할 때도 그걸 약간 언급 했어요. 뭔가 있는데 표현하려고 하니 그 표현이 늘 미흡해. 미흡해서 또 다른걸 또 대타로 집어넣는다? 그래도 또 미흡해요. 다른 걸 또 바꿔도 또 미흡한 거에요.


육개장 맛이 달달하네. 그 달달한게 뭔데? 달달하다는 것은 속 시원하면서도 매콤하면서도 약간 단맛 있다는 그 뜻이다. 그런데 그게 뭔데? 그건 말이야. 아 말로 하란 말이야 그렇게 된다고요. 아 참 남자한테 좋은데. 말을 못하겠네 얼마나 좋은지를. 표현을 못 하는거에요.


그것은 인간이 평소에 모든 의미를 언어에 담아서 이야기했고 그 언어에 담긴 의미는 인간이 자기 몸을 충분하게 검증하는 용도로 핑계로써 내 몸은 아직도 의미가 가치 있는 의미다. 내 의미는 올바른 의미라는 것을 그걸 과시하는 용도에서 단어들을 낱말들을 계속 타인을 향하여 같은 인간들을 향하여 쏟아내고 왔다는 거에요.


“랍비여”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몸을 누구한테 몸을 만지는 것도 마찬가지고. 아마 막달라 마리아로서 내 몸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마 처음일걸요. 사람이 뭔가 시도할 때는요 그만큼 나는 시도할 권한이 있고 그러한 나는 그만한 자격이 된다고 시도하거든요. 단어를 내뱉을 때도. 아가의 내용에 보면 아가의 남녀가 서로의 몸을 표현할 때에 온갖 단어를 다 동원하지요. 그런데 그 표현을 다 동원할 때 그 표현은 이미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에 있는 식물같은 것 또는 인공물이나 식물 이런 것들을 가지고 붙여놓은 거에요.


그런데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내 여자는 이 여자들 중 제일 이쁘다고 했지요? 어느 정도 이쁘냐하면 백합화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의 우리 일상적인 인간세계에 속한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이쁜 여자를 알기 위해서 백합을 뜯어서 이렇게 그 여자하고 한번 비교해보려고 시도할거에요. 백합만큼 이쁘냐? 할 때에 백합만큼 이쁘다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백합꽃 자체가 그게 이쁜 꽃이냐라고 정리 안 된 사람이 많아요.


나는 백합이 영 이쁘다는 생각 없는데. 차라리 나는 가느다란 나는 오히려 그 코스모스도 있고 향기 나는 라일락 아카시아가 투박스러운 면이 있지만 코스모스도 괜찮잖아. 산소같이 하늘하늘하니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건 사람들 취향마다 다 다른거에요. 언어로도 표현을 못한거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사랑’이란 문자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사랑이란.


그게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나와있어요.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6절에 보면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언어 분석? 히브리어? 헬라어? 그거 죽이는거에요. 문법 죽이는겁니다. 문법에서 성령 안 나타나요. 그래서 원어가 없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그 바탕이 있어요. 그 바탕이 자기 몸에서 나온거에요. 그러면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성경의 계시는 어디서 나왔느냐? ‘문자 따져 봐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거에요. 만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거에요. 그럼 만지지 말라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내 몸에서 나오는 그 성경 문자를 너의 더러운 네 몸에서 나온 의미로 풀지 못하는 겁니다. 해석 불가능이란 뜻이에요. 곧 불가능이란 구원의 불가능이에요 이거는.


네가 안다는 것은 네가 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제가 아까 했지요. 위반의 요소.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 몸 사이를 주목해봐야 돼요. 만지지 말라 하는 가운데서 움찔하겠지요. 그럼 예수님 몸 따로 있고 막달라 마리아 몸 따로 있지요. 그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단절성이 있는 거에요.


그럼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뭘 강조한다? 단절성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앞으로 내가 너에게 성령을 주고 계시를 줄 때 그 단절성을 빼면 안 된다. 그 단절성을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 안에 인간 안에 위반의 요소. 주의 몸과 만지지 말라 정도가 아니고 주의 몸과 통합이 안 되게 하는 요소가 인간 속에 나도 모르게 인간 속에 여기에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잠복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네. 우리교회 의사 집사님이 제가 천식 걸렸다고 주사 맞고 이렇게 링거 놓고 하면서 지금 약 먹고 이렇게 좀 낫다고 나은게 아닙니다. 잠복되어 있습니다 그랬거든요. 그냥 천식은 잠복이 안 되지만 알레르기 비염에 의한 천식은 잠복이 되니까. 늘 미세먼지 있을 때 마스크 하시고 마스크 하시고 약 꾸준하게 챙겨 잡수시고 찬바람 할 때는 따뜻하게 하셔야 됩니다. 잠복되어 있다는 거에요.


잠복되어 있다는 말은 아까 동영상할 때 은닉되어 있다고 했지요? 숨겨져 있잖아요. 숨겨져 있으니까 잠복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은 내가 행동해서 그게 실패로 나에게 다시 돌아올 때 비로소 위반의 요소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뭐가 잠복되어 있는지 몰라요. 강의를 열심히 하고 목소리를 높일 때 콜록콜록 기침이. 가짜 기침입니다 또 강의 그만 하자 하지 말고, 가짜 기침.


이렇게 날 때 아하 잠복되어 있구나 티 나듯이 뭔가 인간 쪽에서는 여전히 주님과의 우리 몸과의 단절이 계속 일어나줘야 돼요. 그래야 내 몸에 의미를 더 이상 기대를 안 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나를 안 믿는게 ‘믿음’입니다. 나를 기대 걸지 않는게 믿음이에요. 예수 믿었다는 그 믿음이 엉터리라는 것을 아는게 믿음이에요.


왜?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단어와 표현과 같은 것이 내 잠복된 위반의 요소가 발현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만지지 말라하는 요소를 우리는 마치 자랑인냥 여겨서는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헌금할 때도 그게 죄라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은 또 화가 났는지 성령으로 헌금했는데 왜 그것도 죄냐?


성령으로 헌금하는 사람, 진짜 내가 아는 상식에서는 도저히 믿지를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태복음에 이야기하기를 오른손이 하는걸 왼손이 모르게 했다고요. 그러면서 성령으로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단 수술해가지고 뇌를 두 개 잘라야 돼요. 잘라서 오른팔은 좌측 뇌에 가고 왼팔은 우측 뇌에 가거든요. 뇌에다가 여기에 철판을 심어가지고 이쪽 정보가 이쪽 정보에 전달하지 않도록 한 가운데서 오른손으로 후딱 내고 치워버려.


뇌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후딱 치우면 내가 뭐했지? 내가 뭐했지? 그게 바로 자연적인 치매 현상 아닙니까? 꼭 치매 받아야 그럼 성령받았다는건 치매를 의미하는가? 사람이 인간의 몸에서 자아 정체성이 나온다고 흔히 이야기해요. 정체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나라는 인간이 새로 이렇게 되어 있다는 자기의 체계를 만들어요. 자기 체계.


그런데 자기가 헌금을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게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은 헌금하기 전에 자아체계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헌금하고 난 뒤에 자아체계에서 이게 재편됩니다. 헌금한 나가 되요. 헌금 한 나, 헌금 안한 나. 그게 또 하나의 폐쇄적 자기의 스카이캐슬이 돼요 이게. 하나의 성체가 된다고.


그러니까 또 무엇을 착한 일 하나 하면 또 재편되어서 그거 추가된 착함이 자랑거리가 되고 자기 의가 되는 새로운 의가 되는 자아가 단단하게 구축이 돼요. 단단하게 구축이 된다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몸을 만지지 말라는 말은 너는 어떤 것을 해도 네가 단단한 성체는 성벽은 깨지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석을 아무리 이쪽에서 해석을 해봐야 이미 확정된 내 나와바리 내 영역에서 나온 해석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나 잘났다. 이게 항상 모든 의미 안에 함유가 되어있어요. 나 잘났다. 진짜 나 지옥 보내면 그건 하나님 잘못이다. 이게 항상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교회에서 누구보고 기도하라고 해보세요.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고 나면 기도하고 난 뒤에는 항상 잘했냐 못했냐를 항상 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이거는 우리 안에 위반의 요소가 주님 보시기에 남들 보기에가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항상 문제점이 있는 요소가 나를 그렇게 또 새로운 나로 만들어 내요. 내가 기도하는데 남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이만하면 남들한테 욕 얻어먹을 기도는 아니잖아. 혼자 지금 두시간 기도하고 있어 남들은 점심 먹고 있는데. 그게 자기 철저화거든요. ‘자기 철저화’. ‘자기 완벽함’.


성경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그걸 깨뜨려줘야돼요. 깨뜨려주게되면 사실은 내 몸이 내 주인공이 아니고 위반의 요소가 실제적인 내 몸을 갖고 놀았다는 괴물이죠 마귀죠. 내 몸을 엉뚱한 놈이 다뤄왔다는 것을 또다시 깜놀, 깜짝 놀래는 거죠. ‘아 나한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라는 것. 또다시 깜짝 놀래면서 그걸 확인할 수 있어요.


시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살아온 너의 열심도 아니고 오직 나의 의다” 라고 되어 있어요.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미 인간들이 악마에 의해서 선악 논리에 의해서 계속해서 뭐를 생산하는 중에 있어요? 이만하면 나는 의롭잖아. 이만하면 꿀리지 않잖아.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의로움이 내 창고 안에 가득가득 들었다는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의와 내 의가 충돌될 수밖에 없지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보면 내 몸과 의가 되는 창고니까 내 몸과 주님의 몸이 충돌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만지지 말라고 하는거에요. 네가 만질 잽이 안 된다는 거에요 그 몸 가지고. 만질 잽이 안 된다. 그럼 언제쯤 만질 수 있습니까? 못 만지지요. 그 몸 가지고는 안 되지요. 사람은 안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누가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거 마태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정리해봅시다. 즉시로 돼야 복음이고 종을 편안히 놓아주는 것도 복음이고 어떤 요소? 사람은 헌금 기도 예배참석 소용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게 인간이고 할 수 없게 만들어서 하게 하시는게 이게 복음이고. 교회가 이야기하는게 그거잖아요. 기존교회에 그렇게 외치면 대번 쫓겨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만지지 말라는 말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모든 본문 말씀의 해석은 마지막은 뭐냐? 드디어 네가 만질 수 있다 그게 끝이죠. 해석의 끝. 못 만져야 되는데 못 만지는게 당연한데 주의 몸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못 만져야 될 몸인데 그 드러운 몸인데 그 몸이 주와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은 결국은 우리 쪽에서 다가가는 사랑이 아니지요.


만지지 말라. 아직까지 내가 나한테 할 일은 남아 있다. 그 일이 무슨 일이냐 하면 여기에 17절에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혼잣말 같아요. 혼자만 알고 있는 혼잣말. 예수님 혼자만이 해석할 수 있지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그 말을 지금 막달라 마리아에게 해주는 겁니다. 내 알아 들었지? 시키는 대로 행하라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지키라가 아니라 내가 내뱉은 말 그대로 나한테 이루리라 그 뜻입니다. 이룰 것이다.


네가 이루고자 하고 난 뒤에 그때 그 말을 기억해보라. 내가 못했는데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하셨구나. ‘꺄르륵’ 하고 주의 일이구나.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써의 구원이다. ‘주의 일로써’.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혼잣말을 이렇게 한다는 이 자체가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이 말은 막달라 마리아가 해석을 해냅니까? 현재 그 상태에서는 해석이 안돼요. 나중에 성령 오게되면 해석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는 오순절 우리 지금 오순절날 다락방 같지요. 다락방에 성령오지 않은 이상은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받았다고 해석이 되는게 아니에요. 성령은 하나의 우발적 사건이기 때문에 백독 천독한다고 해석되는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할 때만 해석이 돼요. 그리고 해석이 될 때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해석해냈다!!” 이게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나를 자기 해석에 나를 사용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뭐가 깨지느냐 하면 철벽같은 내 성벽이 날마다 새롭게 재편되는 내 그것이 주님의 해석에 의해서 와르르 무너지고 거기서 무엇이 주님을 못 만지게 했던 위반 요소인가 그게 깊숙이 있던 위반요소가 발각되어야 돼요. 아 나한테 이런 암조직이 있었네. 나한테 이런 요소가 있었구나 그걸 다시 한번 우리가 이렇게 육체의 아담의 몸, 흙에 속한 몸인 이상은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서는 계속 그것이 남아있어야 됩니다. 발각당해야 돼요.


아 그래서 나는 예수 믿었다고 해놓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살아가는구나. 내가 예수 믿어놓고 세상과 달리 살 수 없는 이유가 이 강력한 위반의 요소, 쉽게 말해서 주님의 복음을 시시하게 여기게 만드는 그게 뭐 돈이 중요하지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틱틱 거리는 평소에 하던 그 행세 있잖아요 관습. 내 몸 살리는게 중요하지 뭐 예수 이야기 남의 이야기잖아 라고 틱틱 거리는 그 요소, 성령이 아니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20장 17절(너희 하나님)190305a-이근호 목사.hwp (50.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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