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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00:37 조회 : 41         
서울의존강의20190412b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서울의존강의20190412b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

 

자,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해놓고, 사도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의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돼있어요.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러면 여기 우리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재해석된 세상에 우리가 속해있습니다, 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사람이죠.

 

사도베드로가 보기에 예수님께서 뭐 이순신 장군이나 석가모니처럼 그냥 죽어버리면 예수님도 보통 일개의, 아담의 여러 가지 개인, 개별자 중에 한 사람일 뿐이에요. 전체를 다 포괄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냥 죽어버리면. 모든 사람은 다 늙어죽으니까요. 그렇고 그런 죽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뿐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사도베드로나 사도들이 설교할 때는,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났거든요. 예수님의 개인자격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났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남으로서 그 죽음의 이유가 밝혀진 거예요. 그 죽음의 이유가. 인간이 죽어야 될 이유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죽는 역할을 했어야 합니다. 죽는 역할.

 

운동회 때 보면 큰 깃발이나 태극기를 한 사람이 쥐고 있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보조로 이렇게 스크럼을 짜죠. 깃발이 하도 크고 길어가지고 혼자 쥐면 바람에 날리니까, 여기서 태극기나 큰 깃발이 날리지 않고 곧추서라고, 이렇게 똑바로 서라고 해주잖아요. 모든 아담 자체가 예수님을, 예수님이 주가 되심을 받쳐주기 위해서 모든 아담은 필히 죽었어야 된다는 것을, 뭘 보느냐 하면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거예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러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이 말이 그대로 증명이 되려면, 예수님에게 뭐가 적용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에게 공히, 같이 적용되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 인간이나 예수님에게나 다 같이 적용되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을 같이 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유일하게 율법을 지킨 자가 돼버리면, 모든 인간은 이방인이든 헬라인이든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이미 율법아래서 그들은 시험을 쳤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시험을 쳤는데 예수님만 백점이고 나머지기는 빵점이다 이 말입니다. 이 율법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죠. 언약. 율법대로. 언약대로. 하나님의 에언 대로.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저 모든 사람을 더불어, 함께 생각해서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던 그 능력 있잖아요. 성령의 능력. 그 능력이 임해야 전체를 아울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것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개인적 안목이 한계에요.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했던 경험에 준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미래이야기를 하고 자기의 현재를 판단하고 세상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아보지도 않고 겪어보지도 않고 자기가 없던 시절까지 아울러서 동일한 가치체제로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해요.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합니다.

 

미리이야기를 할게요. 아까 도르가 또는 다비다하고 같이 등장하신 여인이 있죠. 누구라고 했습니까? 루디아. 이름 이쁘죠. 사도행전 16장 14절이에요. 제가 두 사람을 비교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비다는 실제로 죽었죠. 죽었는데 누가 살렸습니까? 주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살려냈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구원하죠. 설교가 아니고. 설교 멋지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 설교를 이용해서 죽은 다비다를 죽은데서 살린 거예요. 그래서 다비다가 죽은데서 살아난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냥 폼 잡은 거예요. 성도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가를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모든 성도는 신분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간주해준다, 라는 것을 이 다비다를 통해서 그걸 한껏 주님께서는 보여준 겁니다.

 

만약에 성도가 열 명 있다면 그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관계없이 일괄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죽은 것은 무효냐? 그게 아니고, 죽었을 때 왜 죽었느냐는 것을 알아야 하고요. 살아났을 때 왜 살아났는가를 알아야 돼요. 더 정확하게 해서 모든 성도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정답이에요.

 

모든 성도는 죽었는데, 살아난 적이 없는데, 뭣이 살아났느냐 하면은 그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난 거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켜보자 이 말이죠. 그냥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나버리면 이거는 개별자가 돼버려요. 나는 혜택을 입었다. 이래 되는 거예요. 혜택 입은 것이 아니고 개별자의식에서 벗어난 채로 살아나야 돼요.

 

죽을 때는 개별자로 죽지만 살아날 때는, “이거 나는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었네. 나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네. 이런 무조건적인 혜택은 나에게만 온 것이 아니고 그런 혜택을 입는 다른 분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네.”라는 것을 인식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여러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차후에 어떻게 적용을 시키시느냐 하면은 개인의 자격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냥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이 되었다.”라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나는 여러 사람 가운데서 홀로 구원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문장이 굉장히 길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개인을 상대로 개인한테 당해서 하시는 일이 아니고, 이게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기 모든 집단과 예수님 자체를 비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구원하실 때에도 개인적인 자격, 니가 잘나서 구원하는 그런 방법은 없다. 이 말이에요. 오늘 강의 듣는 사람들 머리 깨지겠네. 복잡해가지고. 다비다가 살아났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전부터 이미 구원되었어요. 다만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잖아요. 역할이 뭐냐 하면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왜? 역할이 너무 맘에 안 들어요? “하필 저한테 시키세요. 다른 사람 시키지.” 이게 바로 개별자에요. 그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역할에 맡기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을 하고 나는 이런 일을 하더라도 뭉쳐보면 이것은 집단의 일이고 주님의 일이에요. 그 집단을 아까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라고 했죠. 우리. ‘나’가 빠져버린 우리. 나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그래서 개인적인 구원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우리. 그래서 각자 하는 일이 다르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똑같은 일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하는 일의 모든 것은 죽은 자가 한 일이고,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리는 일이고, 이 알리는 일은 우리 중에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 벌이는 일이다. 따라서 죽었다가 살아난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일한 게 아니에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일을 하지. 사도바울처럼.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일하신다? 성령이 일하는 거예요. 성령은 개별자를 용납하지 않고 집단으로 일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불공평합니다. 일 좀 잘하면 전부 다 몰아줘요. 여자 형제가 한 다섯 명이 있다고 칩시다. 있는데, 명절이나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열심히 하는 여자 형제가 있어요. 그러면 모든 일은 그 애한테 다 갑니다. 부모가 “야야! 동생 하는 일 니가 가서 해라.” “나도 바쁜데?” “갸는 일 못한다.” “안 시켜놓고 그래.” “시켜도 시원찮다. 니가 가서 해라.” 그래서 일 잘하고 착실하면 모든 일은 다 자기한테 옵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게 되면 집안대소사 일은 효도하는 그 딸내미나 아들한테 다 가요. 다른 형제들은 뭐하냐? 다 놀러 다녀요. 상당히 불공평해보이지만 그게 상당히 합리적이에요. 못하는 애가 해서 나중에 뒷손질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것이 당연하죠. 능력 없어서 안 되니까. 언니가 동생한테 일 시켜놓고 동생이 일 못하면 뭐하고 하잖아요. 그러면 동생이 “그러려면 언니 니가 일 다 해라!” 이러죠. 어디 뭐 그런 경험들이 없습니까? 뭐 그 반대에요?

 

이 세상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자한테 다 몰아붙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다 몰아붙여요. 뒤에서 평가나 하죠. 지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런데 주의 일은 높낮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해요. 한 사람은 골프만 치고. 한 사람은 골프공이나 줍고. 똑같은 일을 하는 겁니다. 한쪽은 빌어먹고 한쪽은 돈이 남아돌고. 그래도 똑같은 일이에요. 주님이 맡기신 일이에요. 똑같은 일입니다.

 

그러면 팽팽 노는 사람이 기분이 좋겠네? 팽팽 노는 사람이 일이 적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감사하죠. 바쁜 사람도 일 많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감사하죠. 그런 점에서 주께서 일하지 인간은 일하지 않습니다. 공식하나 만듭시다. 모든 일은 누가 하신다? 주님 홀로 하신다. 주님 홀로 일하신 거예요. 우리는 일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자이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일을 못해요. 오직 주께서만 일하시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죽은 자를 통해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주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 확인해주기 위해서 동원된 자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우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

 

자, 다비다에 대해서 그렇게 알고 있죠. 다비다는 부활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이 됐고, 다만 주님이 하신 일의 역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역할을 하셨다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다비다는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상당히 기적처럼 보이죠. 기적 맞죠. 사실은 기적이 맞죠. 근데 여러분, 뭘 놓치면 안돼요? 아휴,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나느냐? 이건 기적이다, 라고 하는데 기적을 거기서 찾으면 안 되고 그 전에 찾아야 돼요. 다비다가 예수 믿는 것을 기적이라고 봐야지, 다비다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기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개인이 개별자로 사는 내가 우리라는 것을 인식하는 자체가 기적이에요. 개별자가 빠져있는 우리. 우리만 있는 우리. 나라는 것을 거기서 찾아낼 수 없는, 나라는 것을 거기서 찾아볼 수도 없는 우리. 하늘에 계신 무슨 하나님? 우리 하나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사적인 죄가 아니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다비다 말고 사도행전 16장을 봅시다. 16장 14절. 이번에 여인하나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사도행전에서 여인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 당시의 사회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자는 보조적인 위치에 있다고 본 거거든요. 여자가 나서서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용납이 안 되는 시대였습니다.

 

여자가 나서지 않더라도,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은 자는 전부 다 그리스도의 형제가 돼요. 이게 우리잖아요. 우리. 동일한 유니폼을 입었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거예요. 동일한 유니폼을 입은 거예요. 유니폼을 입은 우리집단이 되겠죠. 그리스도의 옷 입은 자. 다른 말로 하면 니나 나나 다 같이 죽어있는 자. 이래보면 되는 거예요. 죽은 자. 죽은 자고, 다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우리 안에 동일한 그리스도가 일하신다는 조건하에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살아있는 자가 되죠.

 

그러면 여기서 성도를 찾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성도를. 성도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쪽에서 성도를 찾아갈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외롭다고. 찾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성도를 만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외롭다는, 내가 불행하다는 것을 메우기 위해서 내가 수작을 부리는 거거든요. 그러나 죽은 자는 수작을 부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나게 해줘도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필요할 때만 만나게 하는 거예요. 성도라는 이름으로 자주만나지만.

 

주의 복음이 주님의 살아있음을, 우리가 죽어있음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거예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나서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나서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나서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주님이 나설 때, 결과적으로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의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들이 교인들 꼬시려고 자꾸 오라고 하면 안돼요. 그렇게 만나봤자 쓰레기만 만나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개별자와 개별자의 만남은 절대로 우리가 될 수 없어요. 자기 개인의 이익과 그런 것만 계속 챙기고 계산하고 있다 이 말이죠. “내가 교회 와 줄 테니까 나를 위로해 달라.” 뭐 그런 식으로. 가치 인정해 달라, 그런 식으로 될 거면 그거 교회 아니죠.

 

여기 16장 13절부터 보게 되면, 13절, “안식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자주 빛 옷감, 염색약 또는 그런 것을 파는 모양이죠.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그 다음에 잘 보세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던집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기적입니까? 아니면 사도바울의 말에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알아듣는 것이 기적입니까? 어느 쪽이 기적입니까? 둘 다 기적이겠죠. 그러면 어느 것이 보편적입니까? 성도로서 어느 쪽이 보편적입니까? 전부 다 꽥하고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야 됩니까? 아니죠. 더 보편적인 것이 뭐예요? 마음 문을 열어, 마음 문이 다 같이 열려야 돼요. 마음 문이 안 열린 채로 성도될 수는 없어요.

 

마음 문이 열리지 않은 채로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마음 문이 열리지 않은 채 암이 낫는다든지 기적을 받을 수 있죠. 하지만 그거는 천국 못 갑니다. 기적은 받았지만 천국은 못 가요. 하지만 마음 문은,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은 내 마음 문이 열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 문이 열렸다는 말은 사도바울의 말씀이 오기 전에 인간은 마음 문이 열렸다는 말입니까? 닫혔다는 말입니까? 마음 문이 닫혔죠. 오늘 제목은 닫힌 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닫힌 문입니다. 닫혔는데 본인이 알아서 낑낑대면서 열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여기 주어가 누굽니까? 누가 문을 열어줬어요? 주께서 열어줬죠. 그럼 주님이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안 하신다는 말입니까? 일하시잖아요.

 

주님이 일하신다는 말은 주님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살았다는 말입니까? 살아계시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나 공자는 이미 죽은 자예요. 그건 개별자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에요. 개별자 아닙니다. 집단의 표상이라고요. 마지막 아담. 개인이면서도 그 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에요. 마치 아담 같아. 아담이 개인이면서도 자손대대로 자기의 속성을 계속 남기잖아요. 죄를 남기죠. 그런데 예수님은 뭘 남깁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죄 대신 의를 남기죠.

 

오늘 베드로전서를 봅시다. 2장 24절에도 나오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는 게 개별자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도 개인적인 잘못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고. 집단으로 죽어야 되고 그리고 집단으로 살아야 되고. 내가 죽는 이유는 집단적인 죄 때문이고. 내가 사는 이유는 집단적인 의 때문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고 의에 대해서는 산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 말을 쉽게 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했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살려낸다 이 말입니다. 양쪽 다 뭐가 빠졌는가 하면 내가 개별자로서 내가 알아서 죽고 알아서 산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현대인들은 자기를 어떻게 봅니까? 자기를 개별자로 보잖아요. 지금 현대인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른다고 보시면 돼요. 세상 사람들은.

 

자, 16장 다시 봅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제가 할 이야기가 많아요. 많지만 천천히 해봅시다. 베드로는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물론 사도바울도 죽은 자를 살리고 본인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지만. 여기 루디아라는 사람은 줄었다가 살아난 그러한 육체적인 기적이 구태여 필요치가 않죠. 그냥 마음 문만, 쬐끔이든 활짝이든 마음 문만 열면 되는 거예요. 누가? 주께서 열어줬다 이 말이죠.

 

자, 마음 문이 열리기 전에는 자기 생각만 하겠죠. 문이 닫혔으니까. 그 문 안에 있는 모든 생각은 자신의 가치와 자기의 의미, 자기의 잘남과 나는 꼭 살아남아야 돼, 라는 그런 이유들로 가득 차 있었겠죠. 나는 남한테 지면 안 되고, 나는 남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고, 나는 살만한 그만한 가치가 있을만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는,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애씀과 자기가 남한테 양보한 것, 남한테 베풀어준 사랑, 그리고 자기가 침착하게 인내하고, 참고, 견디고, 분노도 억누르면서 자기가 자기의 가치를 이정도로 키우기 위해서 애썼던 그런 것들이 가득 차 있죠. 그게 문에 갇힌 채 있다 이 말이죠.

 

문을 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전부 다, 문이라는 자체가 그전에는 없다고 봤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는 이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어디 문안에 있어가지고 문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문을 딱 열고 보니까 주님이 주님 증거 하라고 내가 그동안 쓸데없는 개별자 생활을 하고 온 거예요. 문밖에 누가 계신 겁니다. ‘문밖에 있는 그대’는 아니고요. 박강성의 노래. 문밖에 누가 계신 거예요.

 

문이 있고 문밖에 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마음 문이 열려버리면, 내가 뭐냐 하면 내가 개별자로, 나를 위해서 살았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전부 다 뭐가 된다? 죄. 아, 이거 죄만 짓고 살았구나! 나는 내 생각만 했구나! 세상에 미세먼지부터 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다 나한테 유리하도록 돌아가야 된다고 내가 은근히 기대했구나! 예측했구나! 인간이 하는 모든 기대와 예측은 전부 다 나 좀 편해보자는 것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여기서 가는데 버스정류장이 저쪽 한 100미터에 있다 말이죠. 그러면 뭘 기대합니까? 내가 버스정류장에 갈 때, 마침 내가 타야 될 버스가 택시처럼 대기하기를 기대하면서 가는 거예요. 기대하면서. 그러나 자기가 죽은 자라고 생각하고, 내가 죽었다는 말은 누가 대신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살아 있잖아요. 주님이 살아있어서 나로 하여금 지금 버스정류장까지 걷게 하신 거예요. 죽은 자를 어떻게 걷게 하십니까? 살아계신 분이 계속해서 걷게 하시죠.

 

하는데, 버스정류장에 딱 도착하는 순간 내가 타야 될 버스가 방금 떠나버렸다면, 그거 누가 그렇게 타이밍 맞춰서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셔서 주께 감사하죠. 어떻게 감사합니까? “주여, 제가 미처 몰랐던 내 속 욕심을 발각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뜻대로 된다면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개별자가 돼버려요. 우리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그 우리 속에서 자기만 돛대처럼, 자기가 오야붕처럼 행세하는 그 버릇을 또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지난겨울에 대전수련회에서 했죠. 아가서 했죠. 강의에는 안 나오지만 교재에 보면 나와요. 교재에 제가 대중가요 노래 가사를 잠깐 언급했는데, 무슨 노래냐 하면 가수 ‘이현’이 불렀던 ‘내 꺼 중에 최고~’라는 가사에요. 그런 노래가 있어요. 그게 아가에 보면 나오거든요. 여자 중에 최고! 또는 남자 중에 최고! 라는 것이 있죠.

 

아가의 주제가 뭐냐 하면은, 최후의 1은 뭐냐 하면은 바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나는 사랑받기를 원해서 사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 때문에 나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 나라는 것은. 1을 사랑에게 양보한 거예요. 사랑에다가 드리는 거예요. 사랑을 위해서 내가 존재해야 되지, 나를 위해서 사랑이 있으면 안돼요. 뭐 가수 김세환처럼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라고 백날 해봐도 ‘나를 위해서’에요.

 

나를 위한 사랑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나를 포기하는 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이. 주님도 사랑 때문에 죽었잖아요. 사랑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물론 주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래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뭐가 없느냐 하면은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사랑만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으니까. 더는 소원이 없어요. 더 바라면 죄가 됩니다. 4월의 어느 날.

 

그러니까 마음을 열었다는 말은, 그 뒤에 보세요.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고 그 다음에 뭐했습니까? 청종했죠. 15절 봅시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이래 되어 있죠. 자, 다비다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봉사하고 충성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여기 루디아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마음이 닫혀있어요. 닫혀있기 때문에 누구밖에 모른다? 누구 이익만 챙긴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 챙기죠.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루디아가 은혜 받고 난 뒤에 베풀었다고 하지 마세요. 베풀어도 내가 베풀면 그거는 마음이 열리지 않은 거예요. 내가 베푼 것이 아니고, 이게 나의 집이 아니고 우리의 집이라는 거예요. 갑자기 내가 없어지고 그 현장에 뭐가 생겨요? 우리가 등장해요. 우리가. 예수님 중심의 우리가 등장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섬기고 봉사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오니까 어떤 집사님이 알아서 커피를 타서 쭉 나눠주거든요. 그러면 “참. 은혜 받고 봉사 많이 하시네요.” “아닙니다.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커피 좀 더 주세요.” “못 주겠습니다.” “왜요?”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욕심내지마라고.” 소위 일본말로 기마이(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는 기질)쓰는 것이 아니거든요. 절대 기마이 쓰는 것 없어요. 돈 함부로 쓰지 않아요. 뭐 주의 돈이니까 니나 내나 다 뿌리고 다니는 것 없어요. 주께서 지시할 때까지만 해요.

 

그럼 주의 지시를 어떻게 아느냐? 내가 주의 지시를 따라서 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개별자 의식이 도달되기까지가 주의 일이고, 그리고 갑자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 되는 거예요. “주여, 믿게 하셨네요.” 주의 일이에요. “내가 믿었다. 드디어 나는 믿었다.” 이러면 벌써 주의 일 떠났어요. 내 일이 돼버렸습니다. 원래 감정이란 순간적이고 잠깐이니까. 감정이라는 것이 오락가락해요.

 

이 루디아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은, 소위 산자들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이 모이는 거예요. 죽은 자들이. 그걸 루디아가 받았던 세례라고 하는 겁니다. 세례가 뭐냐 하면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이 어디 회관에서 모였습니까? 어디 노래방에서 모였습니까? 모인 장소가 어디죠? 사람들이 평소에 즐겁게 파티 하는 장소였어요? 안 그러면 휴가 보내는 장소였습니까? 식사하는 장소였습니까? 어디서 모였습니까? 세례요한에게 모인 장소가. 어디서 모였죠. 물속에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잖아요.

 

성령은 어디서 세례 받느냐 하면은 십자가 안에서 세례 받아요. 무덤에서. 그러니까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다 어디에 와 있느냐? 무덤 속에 모이는 거예요. 그 무덤 속에서 산 채하면 그거는 어울리지 않죠. 무덤 속에 왔으면 살아있는 척을 하면 안 되죠. “어이구 김귀신!” “어이구 박귀신!” “어이 최귀신!” 이래 되어야 하잖아요. 그게 세례 받은 거거든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는 죽고를 표면화시켜야죠. 나는 죽고를 양성화시켜야 됩니다. 나는 죽고가 아니에요. “김귀신! 어떻게 죽었어요?” “신종플루 걸려서 죽었어요.” “아이고 그랬어요. 다비다는 어떻게 되었어요?” “깜빡했는지 못 죽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어요.” 이런 식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계속 죽어있는 거예요. 다만 살아있는 것은 죽은 자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있는 겁니다. 그럼 이 몸은 언제 사느냐? 주께서 하늘의 몸을 입을 때 언제든지 사는 겁니다. 새 몸을 입을 때 온전히 사는 겁니다. 그때는. 근데 그것도 개별자 아니냐? 개별자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거든요. 주님의 영광, 주님의 몸의 영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거예요. 여전히 개별자는 없고 천국 가도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일의 시작을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원래 이 세상의 모든 신화에 보게 되면 내세에 대해서, 미래의 사후에 세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신화세계에서 이야기를 했어요. 각 민족마다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살아있을 때의 그러한 환경과 유사해요. 살아있을 때의 환경과. 이 땅에 우물이 있으면 천국에도 우물이 있고. 저는 그걸 가지고 거울이라고 해요. 사후세계를 모르니까, 사후세계를 뭐로 하느냐 하면은 지상의 세계, 살아있는 세계를 반영을 하는, 되비치는 식으로 천국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환경의 풍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사람은 뭐로 삽니까? 윤리와 도덕으로 살죠.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죠. 그게 사후세계에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착하면 천당 가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고 본 거예요. 이러한 아이디어의 잘못은 뭐냐, 역시 개별자라는 거예요. 개인구원이에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을 보세요. 개인구원입니다. 제가 지난 낮 오후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하나님의 예정론에서 ‘론’자 하나 떼기 참 힘들다고요.

 

칼빈주의 예정론이 왜 잘못되었는가? 그게 개인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개인구원. 칼빈은 집단구원 이런 거 몰라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준비하셔서 창세전에 예정했다는 겁니다. 예정된 자만 구원받고 예정되지 않은 자는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 뉘앙스가 뭐예요? 그렇게 말하는 취지가 뭡니까? 당신이라는 개별자는 예수님 믿으면 어디에 간다? 천국갈 수 있다. 이 이야기에요. 그거는 왕창 거짓말이에요. 개별자는 죽어야 되지, 개별자가 살아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신화의 세계와 사후세계와 똑같은 겁니다. 지상에 있던 사고방식을 그대로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이어준다는 거예요. 천국까지.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마음은 열 생각도 안하고 그냥 이 강의를 들을 생각만 하는데, 마음 문이 열려야 돼요. 마음 문이 열려야, 다시 복습해봅시다. 마음 문이 열리면 안에 뭐가 들어있다? 평생을 나는 누굴 위해 충성했다?

 

나 자신만의 미래와 운명과 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평생 살아왔다는 것. 나밖에 모른다는 그 사실이 폭로당하는 거예요. 마음 문이 열렸을 때에. 안 열리면 그거는 당연한 걸로 여기죠. 그래놓고 마음 문이 안 열리면요, 그냥 착실하게 살라고 해요. 그냥.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성실하게. 남한테 싫은 소리 안하고. 니 싫은 소리 안하고 내 싫은 소리 안하고 그래 살면 그만 아니냐? 그래 살아도 괜찮지 않느냐?

 

심지어 노래가사에도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신유’의 ‘시계바늘’이라고. 사는 게 뭐 별거 있더냐~~ 욕 안 먹고 살면 되는 거지~ 한평생 사는 게 뭐있겠느냐, 그저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살면 그게 잘 사는 게 아니냐. 가사 내용이 그래요.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사람은 다 납득이 돼요. 왜?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주님이 찾아와버리면, 주님은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것 때문에.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세상을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해요. 모든 인간은 죽었다. 그런 취지를 담아서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사한 거예요. 근데 그걸 받아들이는 인간들은 전체를 보는 눈이 없으니까, 주님은 성령을 받아서 전체를 보지만. 인간들은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저런 말씀을 주셨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오늘 제목을 ‘닫힌 문’이라고 했는데 고치겠습니다. ‘개별자’로 해야 되겠어요.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봤습니까?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므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단다. 나음을 입었대. 믿기지는 않지만 무조건 믿어야지 뭐.” 이러거든요. 믿자!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러니까 그게 믿음이 아닌 거예요. 그게. 착한 일 하나 더 하신 거예요. 착한 일을. 무슨 착한 일?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서 내 죄를 용서한다는 그걸 믿어준 착한 일을 더 하신 거예요. 누가? 멀쩡한 내가. 그러니까 나는 더 살아야 되고 나는 천당 가야 된다는, 이런 개별자의 근본적인 욕망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 나오시죠?”하면 “뭐 복음 아는데. 바빠서 못 나오겠다.” 이런 식이라. 우리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라는 뜻인데, 근데 뭐냐 하면 “당신 교회 나와서 개인적으로 이익을 얻으세요.”라는 그런 쪽으로 오해한 거예요. 우리가 되려면 우리는 바로 내 이익 자체가 뭐가 된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혼자 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인간은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자기 행복만 생각하게 돼있어요. 내 편하면 최고지, 그거거든요.

 

그러면 왜 죽는데? 그렇게 살고 싶은데 왜 죽어요? 나 편하면 최고래. “남한테 간섭 안 받고 잔소리 안 듣고 내 편하면 최고지. 나는 사람 있는 거 딱 싫어. 나는 나 혼자 있고 싶어.” “그럼 왜 죽는데?” “개인적으로 늙어죽는다.” 아이고, 개인적으로 늙어죽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죽는다니까요. 집단적으로 죽는 이유는 죄인 아닌 자가 없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다 죽이는 거예요. 다 죽이는 거. 개인은 다 죽이고 예수님이라는 개인만이, 그분만이 이런 일을 기획하고 획득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한 겁니다. 새로운 개인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집단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그 집단은 뭐냐, 베드로전서 2장 24절처럼 친히 나무에 달림으로서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다. 우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함이라. 우리의 죄를 대신 뭐했다고 합니까? 담당했잖아요. 우리의 죄를 담당했다는 거예요. 뭐 우리의 죄를 알아야 담당했다고 하죠? 우리가 마음이 안 열린 채로 봐버리면요. 죄, 죄, 죄 하니까 인간은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선악을 인수인계 받은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 차라리 나은데, 인수인계 받은 것이 화근이라. 선과 악이 있어가지고 선악을 지가 분별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분별한 것에서, 거기서 죄에 대해서 주께서 대신 죽었다는 거예요. 니 자체가 죄인 줄 모르고.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예요. 선악을 알고 있는 내 몸 자체가 죄인데, 자기는 멀쩡하고 자기에게서 잘못 행동한 것을 죄라고 보는 거예요. 그것은 로마서 7장에 보면 위반됩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일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죄가 내 안에서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뭐 하고 싶어도 그게 전부 다 죄로 전환되는 그러한 속성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곤고함을 어찌할꼬. 감사하리로다. 주어진, 준비된 사랑에서, 비로소 그 죄 속에서 사랑을 발견한 거예요. 일관된 죄 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귀하고, 귀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 아시는 말씀인데. 저는 에베소서를 보면 신기한 게, 사도행전을 보면 그렇게 바쁘다가, 그렇게 바쁜 사람이 어떻게 에베소서를 썼는가? 이런 편지를 쓸 시간이 있는가? 함축적으로 잘 썼거든요.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죠. 허물과 죄로,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을 것이다, 가 아니라 허물과 죄로 이미 우리가 산 자다? 죽은 자다? 이미 죽은 자예요. 죄와 허물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예요. 너희를 살릴 때는 그냥 살리는 것이 아니고, 개인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거죠. 우리. 우리 속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한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무섭고 벌벌 떨지 마세요. 무섭고 벌벌 떤다는 말은 뭐냐, 내가 뭔가 된 냥 여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니면 제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사세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날 무시하느냐? 이거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행동 좀 보이지 마시고요. 아무것도 아니면 그냥 허허 웃을 뿐이죠.

 

애가 징징거리고 운다. 아무것도 아닌 게 징징거리고, 그러면 엄마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달래주면 되죠. “이래 해가지고 니가 뭐가 되겠느냐? 이리 앉아봐라. 너는 글을 쓰고 나는 떡을 썰겠다.” 이게 말이 돼요? 엄마는 몇 년 동안 했는데. 이거 불공평한 경쟁이 아닙니까? “엄마 바꾸자. 엄마만 없으면 이런 거 할 일이 없잖아. 그 떡 내가 썰어도 되겠다. 내가 방금 배웠다. 엄마보다 떡 더 잘 썰 자신이 있다.” 한석봉이가 그렇게 안 하죠. 한석봉이가 얼마나 효심이 많은지. “어머님. 잘못했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해봤자, 글씨 써봤자, 글씨 잘 썼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엄마 떡 잘 썰었다.” 그 떡 입에 들어가면 다 녹아버리는데. 떡은 맛만 있으면 되지, 떡 잘 썰었다고 맛있는 떡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인간은 자꾸 위장해요. 아무것도 아닌데, 뭐 이만큼이라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게 우리 인생에서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는데 갑자기 건드리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아무것이 돼버렸어요. “이게 어디 감히 나를 건드려!” 우리에서 언제 또 개별자로 변신도 잘해. 변신도. 후딱 변신되었어요. 개별자 되었어요. “나와라! 이 적군아! 이 마귀야! 내가 이겨주마!” 지가 왜 싸워야 되는데? 개별자가 무슨 일을 한다고?

 

여기 보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할 때에는, 이거 해석 잘 해야 돼요. 나았다는 것은 몸 건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 받은 게 아니에요.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형편 나아지고 몸 편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나은 거예요. 그냥 나은 거. 그냥 멀쩡하게 된 거예요. 죄인이 뭐 됐어요? 그냥 의인된 거예요. 그냥. 어떤 짓거리를 해도. 파출소를 왔다 갔다 해도 의인된 거예요.

 

파출소 왔다 갔다 하는 그게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입니까? 주의 일이에요. 참, 무책임하다. 정말 뻔뻔스럽다. 사람 패놓고 주의 일이라니. 주의 일인데 어떡해요? 사람 팼는데. 판사가 화가 나서 “사람 패면 어지간하면 집행유예나 벌금으로 하는데 니는 성질이 더러워서 징역 5년이다.”라고 하니까, “주의 일을 해주셔서 판사님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는데요. 그야말로 말씀에 미친 거죠. 그렇게 미쳐야 돼요. “아이, 주의 일인데 좀 깎아주지.” 이러면 애초부터 자기 일이에요. 갑자기 개별자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강도가 교육을 못 받아서 강도가 된 게 아니에요. 결국은 강도는 강도질해야 되고, 창기는 창녀질해야 되고, 세리는 세리질해야 되고. 그래도 그런 식으로 천국 가는 거예요. 남의 방식을 모방하거나 흉내 낼 필요는 없어요. 뭐 강도 흉내 내는 사람은 없겠지만. 교도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창녀 생활하는 게 힘들어요. 돈도 안 되고, 몸은 다 망가지고, 병 생기고. 누가 하겠어요?

 

그러나 마음 문만 열면, 이것은 인생이 내 임의로 주관하고 내가 계획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그냥 죽은 자에게 살아계신 분이 그냥 거기에다가 새겨 넣은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따라서 창기든 세리든 관계없이 나는 죽어있고 주님은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것이 성령 받으면 오직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목적이 거기에 있어요. 내가 니를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증인이 되면 그걸로 게임오버다. 더 이상 우리가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 주의 증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너무 무리하게 자기 고민이라든지, 자기 걱정, 자기 방어에 나서지 마세요. 그거는 현장에서 주님을 모독하는 짓밖에, 주님의 의인됨을 모독하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이미 우리는 주께서 낫게 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 나음이 소중한 것을, 그 사랑이 얼마나, 내가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랑만큼은 놓치지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작도 주의 일인 것을 우리가 놓쳐버렸습니다. 내 일을 시작하다가 주를 만난 것이 아니고, 뒤돌아보니 처음부터, 애초부터 주의 일인 것을 소급해서 우리가 증험되고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90412b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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