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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16:27:19 조회 : 116         
안양20190412b야5장7절(나는 기계다)-이 근호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90412b야5장7절(나는 기계다)-이 근호목사

이미 세상 자체가 지배자에 의해서 종속된 지배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억울하다, 분하다, 당신이 내거 가지고 갔잖아. 하고 그 일꾼들이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부자에게 외친다는 이 말은 정신적으로 이미 부자에 종속된 거예요. 당신이 내가 한 힘든 거 다가져가고 당신은 사치하고 우리는 당신 때문에 괴롭다. 하는 그 의식 자체가 그 부자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조금만 기다려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부자 것을 빼앗아서 너가 부자 되게 해줄게. 라는 그런 보복, 복수 그런 관점에서 해결책이 주어지게 되면 그 가난한 사람은 “그러면 좀 기다리지요. 뭐. 1년 뒤에 좋은 일이 있겠지요.” 기다리겠지만, 아예 참아라. 이리 되어버리면 이건 판이 게임의 판이 다른 게임에 돌입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누구도 여기에서 제시하는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참아라. 할 때 여기에 선뜻 동조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란 자체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재산 문제가지고 또 누가 부자 되어서 지배계층에 속하느냐 그 싸움을 싸웠기 때문에 알고 있는 정보는 뭐냐 하면 그 범위 내에 머물러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여기에 7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 기존에 있는 돈 떼어서 억울하다는 그런 인간 말고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근거가 됩니다. 어떤 식으로 관여하게 되느냐 하면, 아무런 상관없는 일에 부름을 받습니다.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에 부름을 받아요. 만약에 내가 밭에서 일했는데 품삯을 못 받았다. 이건 나와 관련되어있어요. 기어이 저 부자가 가지고 간 저 내 고생한 삯을 돌려받아야 되겠다고 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아라, 이 말은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이기 때문에 나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랑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과 같은 류의 사람. 우리는 세상에서 못 벗어납니다. 저쪽 사고방식이나 내 사고방식이나 동일해요. 우리가 부자 되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짓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아담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돼요. 진작 그리 되어야 돼요. 우리는 그렇게 별나지 않습니다. 똑같아요. 인간은. 그 육에 그 육이에요.

중요한 것은 뭐냐 주님께서 이 육인 너무나 세속적이고 세상적이고 부자 못 돼서 환장한 우리 속에서 주님의 자기 사명을 뽑아낸다는 이게 중요한 겁니다. 뽑아내는 거예요. 주사기에서 약을 뽑아서 우리의 생체 피부조직을 통해서 주사액을 집어넣듯이 우리는 주사액이 들은 병이라면 병에서 주님이 주사기를 우리를 그냥 쫙 공기 집어넣듯이 빨아 당기는 거죠. 뽑아낼 건 다 뽑아내는 거예요. 주께서. 쓰레기 같은 우리를. 어떤 인간도 부자를 마다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부자 됐기 때문에 예수를 찬미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하지만, 막상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주님에 대한 감사보다도 이 억울함을 보복을 대신해 주길 바라는 거죠. 억울한 일을. 그 정도로 사람은 아프면 아플수록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자기한테 더 응결이 돼요. 자기한테 더욱 더 집착을 하면 할수록 온갖 병 스트레스로부터 해서 온갖 췌장암이란 암은 다 걸리는 거예요. 종합 암이 다 들어와요. 종합 암이. 자기한테 응축이 되게 되면.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에게서 주사기를 가지고 뽑아내는데 나한테 뽑을 것은 없어요. 그러나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주님의 자기 사명이에요. 사명. 보통 우리가 사명이라 하면 누가 갖고 있는 사명입니까? 성도가 지닌 사명을 말하잖아요. 그거 얼마 못갑니다. 성도가 지니고 있는 사명을 말하잖아요. 그거 얼마 못갑니다. 그거 얼마 못가지요. 교회에서 밖에 나가면 사명이고 뭐고 내가 무엇이 못나서 이런 싫은 소리를 들어야 되느냐 하면서 자기 본전 생각이 막 든다니까요. 본전 생각. “주여. 나는 이 정도로 대우받을 입장이 아닌데요.” 이런 식으로. 자기 방어에 나오고 자기변호에 나서거든요.

우리의 사명은 소용없어요. 이거 몇 일, 이건 너무하다. 몇 달 못가요. 몇 달 못갑니다. 교회에서 1월1일날 위임식 할 때 하나씩 증을 하나씩 받고 하지요. 형식적이지만 주의 종이라 해가지고 또 그 본문 설교해가지고 성가대는 성가대 데로 위임장주고 주일학교는 교사대로 주고 구역사찰은 사찰대로 해가지고 위임장 받고 액자 해서 걸어놓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면류관같이 귀한 것이다. 해가지고 해놓지만. 나중에 벌써 3개월 되고 4개월 되고 이렇게.

북한도 아니고 왜 그리 회의를 많이 하는지. 빨리 예배 마치고 집에 가서 밥해야 되는데. 뭐 그리 교사회의 있고, 성가대 회의 있다 해가지고 또 모이고. 그것도 회의 모이면 되지 회식은 왜 그리 많은지. 노래방회식, 불고기파티 회식. 이 커뮤니티가 그렇잖아요. 이 커뮤니티가. 뭐 먹어야 들어가야 맛이 나거든요. 단팥빵이나 먹어야 교제가 되는가요.

이게 뭐냐 하면 억지로 힘을 쓰는 거예요. 억지. 억지로 단결을 촉구하는 거예요. 받아먹은 정이 있고 꼴에 니가 양심이 있다면 어느 정도 봉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건 일방적으로 줘놓고 빼먹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5월 달부터 하기 싫은데 저한테 옛날에 그런 전화오고 그런 상담도 있어요. “목사님, 12월 달까지 꼭 해야 됩니까?” 주님의 사명의 날짜를 알려드릴게요. 12월35일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2월35일이라니까요. 없습니다. 어떤 장소도 없고, 어떤 시간도 관계없는 이유가 옥에 갇혀 있을 때도, 또는 몸이 아플 때도 병원에 누워있을 때도 주님은 얼마나 야무지게 사명을 뽑아내요.

병원에 누워있다고 뭐 건강해서, 건강해서 해라가 아니라 니 몸 아픈 것이 그 자체를 사명으로 보는 거예요. 몸 아픈 그것을. 여기 참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참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참음을 우리 속에서 뽑아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가난한 자는 부자와의 전쟁이 아니고 누구와의 전쟁이냐, 바로 우리 내부에서 주님과의 전쟁입니다.

기존의 가치 있는 나를 붙들려고 하는 것과 그것을 강제로 뜯어내려고 하는 주님의 싸움에 주님사이의 그 갈등이에요. 쓰레기라고 해도 이 쓰레기가 정들었던 쓰레기 때문에 못 놓겠습니다. 그건 우리 고집이고, 주님의 새로운 일을 주시는데 그 새로운 일은 일이 뜯겨 나갔을 때에 그게 느낌이 뭐냐 하면, “그렇다면 주님, 나랑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사명입니다. 나의 존귀함, 나의 후짐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는 내가 얼마나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잘되고 못되고 이런 것도 필요 없어요. 내가 천당 가고 지옥가도 관계없어요.

그냥 아무런 상관없는 외부적인 일이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 들어온 사명으로 인하여, 아까 첫째시간에 한 거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주님이 우리한테 찾아올 때는 그물망 들고 온다고 했지요. 그물망이라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관계망이라 합시다.

주님께서 자신의 관계망, 수요일날은 이걸 두자로 언약이라 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을 해봐야 약속을 받을 사람 없어요. 무조건 약속은 하는 거예요. 약속을 집어넣는 겁니다. 단팥빵 안에 단팥을 집어넣듯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손가락으로 후벼가지고 집어넣어요. 집어넣어놓고 그 다음에 언약만 살짝 잡아당기면 사실은 살짝이 상당히 아프지만. 살짝 잡아당기면 언약에 꿰어가지고 새롭게 만들어져서 딸려 나오는 그 관계가 영원히 천국 가서도 유지되는 관계에요. 주님과 그 증인. 이렇게 딸려 나오는 거예요. 새로운 관계망에 이슬빵의 초롱초롱 방울 맺힌 것처럼 새로운 방울로서 여기에 달려 나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 마태, 마가에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이라고 했지요.

종은 종이 했을 뿐이지 종이 무슨 존귀를 받겠습니까. “밥 같이 먹지.” 종이 “아이고, 저는 나중에 먹겠습니다.” “수고했잖아.” “종이 종의 할 일 했지 무슨. 종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저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까라하면 까나이다. 이런 뜻이다 말이죠.

종이기 때문에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자기가 계획하고 입안한 게 아니에요. 자기가 구상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구상과 계획은요, 그 끝머리에 뭐냐 하면 자기 존귀함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가 우수하게 변화된 걸 이야기한 겁니다. 천로역정 같은 것이 그런 이야기고, 왜 위험하냐 천로역정 같은 경우는 천당 가는데 뭐가 있습니까? 뭘로 되어있어요? 계단으로 되어있어요.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맹세하고, 두 계단 올라갈 때마다 언약 맺고, 이런 식으로 계속 194계단인가, 이게 용두산 엘레지 노래에 나와요. 부산에 용두산 계단이 있는데 194개인가 그런 모양이에요. 니가 한 가지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했잖아. 또 한 계단 얻을 때마다 니는 우리 이렇게 살기로 언약했잖아. 하지만 니는 왜 다른 남자 만나가지고 나 지금 이리 됐다고 그런 내용이거든요. 엘레지 슬픈 노래를 엘레지라 하잖아요. 용두산 엘레지. 우리는 천국의 엘레지.

뭐든지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되고 세상에 대해서 여유만만하게 살고 싶다는 자기마음의 포부 같은 게 있어요. 그 포부가 돼가지고 나한테 벌어졌던 모든 상처들을 거뜬히 보상하고도 남아있는 어떤 여분의 행복 같은 것을 챙기려고 시도합니다. 어디서 간교한 꼼수를 씁니까.

주님의 소유됐다는 말은 곡해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의 소유됐다는 것은 주께서 내 것을 빼먹는 게 아니에요. 우리 것은 쓰레기이기 때문에 빼먹지 않습니다. 돈을 바쳐도 돈 안 받고요, 봉사해도 봉사 안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주께서 집어넣었는데 그 집어넣은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성취할 수 있고 우리가 가능성 있는 것을 집어넣지를 않았어요. 애초부터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성경이 이렇게 두껍잖아요. 이거 지킬 수 있는 게 몇 개 있습니까. 몇 개가 아닙니다. 하나도 없어요. 성경은.

성경은 누구 이야기이냐 하면 예수님이 요 계획에 맞추어서 자기 성도에게 성경 전체를 그냥 집어넣은 겁니다. 에스겔에게는 어떻게 집어넣었느냐 하면 입을 벌리고 집어넣어버렸어요.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이걸 두루마리를 꿈이지요. 환상 속에 이걸 먹었는데, 꿈에 먹었는데, 입에는 다나 속에 들어가면 쓰린 거예요. 위궤양인지 모르지만 쓰린 거예요. 그러니까 쓰리다는 말은 왜 쓰리냐 하면 그 에스겔은 사람이잖아요. 우리 아담에 속하지요. 들어온 것은 누구냐 장차 자기가 이루지 못하고 주께서 이룰 주님의 장차 오실 일이 에스겔에게 미리 들어온 거예요. 이게 사고가 안 맞지요. 그래서 이 사명에 의해서 아내가 갑자기 죽어요. 죽는데, 미리 예언했습니다. 인자야, 에스겔아, 아내 죽더라도 그냥 울지 마라.

오늘 강의 같으면 니는 기계다. 죽던지 살든지 그것도 그동안 아내가 살아온 것도 주의 덕분이고, 죽은 것은 이제는 그만 살리려고 하시는 모양이다. 그냥 죽어버리고 목석도 이런 목석이 없지요. 아내 죽음에도 울 필요 없고. 부의금도 받지 말고. 그냥 집에 벌레하나 죽었구나, 이리 생각하라 말이지요. 듣는 아내들은 섭섭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남편이 은혜 받으면 곤란한 문제지만. 남편이 복음 몰라서 천만다행이에요. 알았으면 아내를 완전히 개무시 했을 테니까.

에스겔이 바로 그런 예언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요번에 수련회할 때는 이사야 하거든요. 여름수련회. 이사야 같은 경우는 3년 동안 벌거벗고 애굽에 나가서 전도하고, 옷도 벗고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너희들이 잘 차려입어도 결국은 마지막 때 너희들이 다 벌거벗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자기가 애굽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 모양새를 통해서 미래의 그들의 장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달린 모습은 이건 무엇을 보여줄까요? 예수님이 바로 인자거든요. 에스겔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은 아무리 재벌이니 어떠니 잘난 체해도 결국은 우리는 강도와 다를 바 없는 거예요. 진즉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야 돼요. 진즉에. 뭐 인권해가지고 가스실에 가가지고 약 먹여가지고 주사 놔가지고 안락사 정도가 아니고. 생생하게 느끼면서 고통은 고통대로 감내하면서 십자가에 나무에 달려서 죽는 치욕스런 죽음 아닙니까.

십자가 죽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냥 죽음이 아니고 치욕 스러운 개도 그렇게 처리 안하잖아요. 개도 그렇게 하게 되면 요새 벌금 물 거예요. 개를 십자가에 매달아서...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집에 키우는 개를 십자가에 매달아 볼까요? 뭐 곤충채집합니까? 안되잖아요. 인간을 곤충채집하듯이 잠자리 매달 듯이 그렇게 매달고 죽게 하는 것은 이게 내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바로 너희들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너희들.

너희들 신세가 지금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거죠. 따라서 주님의 관계망은 상관없는 일에 우리가 관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뭘로 만듭니까? 기계로 만들어야 되지요. 기계로 만드는 방법은 바로 어제 나와 오늘의 나를 강제로 잘라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제의 나는 우리는 좋은 믿음이거든요. 오늘 되면 그 믿음 다 무효가 돼요. 시효가 끝났어요. 오늘은 오늘치의 믿음이 또 있어요. 왜냐하면 나 구원하려는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기 위한 믿음이기 때문에. 주님의 관계망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믿음이지, 나 이 믿음가지고 천당 갈래. 이리 되어버리면 믿음 한 번 가지고 다음부터는 지 맘대로 살고 이리 되잖아요.

아까 첫 째 시간에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했어요. 자기 역사를 쓰지 마세요. 사람이 이렇게 하루가 지나서 하루 저녁만 되면 이미 하루치 역사가 일기처럼 하루시제가 또 이렇게 연결고리가 또 형성되어있어요. 고 일기를 써가지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되어버리면 그게 하나님의 사명이 날아가 버린 사명이 없는 잘나버린 또 자기 자신으로 이미 돌변해있어요. 인간은.

그러면 이걸 제가 방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자른다 하는데 이 자를 때 들어가는 요 칼, 가위, 가위가 뭐냐, 가위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서5장 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있다는 게 칼이에요. 심판주가 문 밖에 서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요? 문 밖이 아니고 문 안에 있겠지요. 문 안에.

문 안에 있으면서 문 밖에 있다는. 참, 이런 게 어려운데 문 안에 있으면서 문 밖에 누가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은 결국 주님이 문 밖에 있더라도 그 어떤 상황이냐 하면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문 밖에 있다는 주님의 사명이 이미 여기에 장착돼 있다는 그러한 현상을 말합니다. 성경 다시 보니 어렵지요. 여기 문이 있습니다. 문만 보면 늘 생각나는 게 바로 옛날 CF에 그런 게 나와요. 트라이. 속 옷 갈아입고 올 걸. 트라이. 냄새나는지 문을 안 열어주는 거예요. 이덕화 나오는 거. 문 탁 칠 때.

여기에 주님께서 세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일방적으로 자기 계획에 있어서 세상을 묘사해버려요. 배정을 해버려요. 오늘같이 배치를 이렇게 해버려요. 문을 하나 또 만듭니다. 주께서. 이 문을 세상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그 문은 없어요. 세상은 커뮤니티 하나의 공동체인데 무슨 문이 있습니까. 있는 문도 다 폐하고 평화를 외칠 판인데. 남북도 지금 휴전선 서로 대화하자 해가지고 있는 문도 없앨 판인데.

문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문 인식을 제공합니다. 그 다음에 문 밖에 누가 있는가, 문 밖에 주님 계시고 문이 있는 이유가 밖과 안을 이야기하면서 안에서 벌어졌던 세상 사람한테 돈에 시달리고 사기당하고 억울함을 당한 그것은 사실은 니가 니 인생 자체가 니가 뭔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문 밖에 계신분이 문 안에 있을 때라면 너 못지않게 똑같은 사정을 상황을 맞이해야 될 분이었다. 누가? 우리 주님이.

주님이 이 땅에 사신다면 현재 니가 당하는 것을 그대로 다 당했고 또 당해야 될 그런 분이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에 지옥의 미세먼지가 그렇게 지독해요. 아주 시커멓게 캄캄해요. 앞뒤가 안 보일정도로 세상은. 오직 여기 부한 자는 돈이지요. 돈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꽉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자식들이고 그 교육과 양육으로 인하여 모든 사고방식은 세상이 제공된 사고방식 외에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에요. 우리가 가난하던 부하던 중간쯤 던 관계없어요. 우리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밖에서 관계망을 담이라는 의식을 제공했고, 밖에서 기다린다고 이야기했고, 니는 참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 구조 있잖아요. 이 구조. 이 구조 우리의 아이디어입니까? 안양모임에서 지어낸 아이디어에요? 어떻습니까? 그거 아니지요. 우리는 참는 것도 힘들어죽겠어요. 애 키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애 키울 때 아 우는 것도 힘든데, 그걸 참으려하니 더 힘들지요.

어린이 집에 보면 동영상보면 애들 밥 먹을 때 때리고 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엄마는 어린이집 원장한테 도끼 들고 들어갔는가 해가지고 징역 받았는데. 죽인다고 어린이집원장한테. 내 아들 그렇게 버린다고 하는데. 지는 집에서 그리 안 키웁니까. 뭐 선생님 부모처럼 키워 달라면서. 부모가 자기 애 안 때립니까. 때리지요. 밥 안 먹는데 “밥 드세요.” 이렇게 합니까? 부모가 집에서 부모가 한 그대로 하게 되면 독한 선생님 되어버려요. 부모의 이중인격이지요.

나는 되고 니는 안 된다. 결과는 내가 되는 식과 그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가 하는 식 말고 다른 식을 내놓아라. 그것도 어린이집 애가 한 둘이 아닙니다. 많지요. 무척 힘듭니다. 정말 힘들어요. 말이 통하면 말로 하지요. 8개월, 10개월 뭐가 말이 통합니까? 그냥 본능인데요. 강아지한테 이야기하는 게 낫지, 강아지보다 더 못하잖아요. 강아지는 사람보다 일찍 식언하잖아요. 사람은 강아지보다 두뇌 성장속도가 그만큼 늦게 돼가지고 파충류수준으로 보면 돼요. 파충류 수준. 그 애한테 어떻게 당합니까. 어떻게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안 되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참으라 하는 것은 좀 이렇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맥없는 하나님, 실력 없는 하나님, 유능하지 않는 어린이집 원장 이런 거요. 참아라, 에 맡길 수 있는 사람 나와 봐라 그래요. 1년만 기다려. 내가 다 30배, 60배, 100배 다 채워줄게. 이러면 우리는 그걸 믿을 만한데 그저 참으세요. 라고 맡길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 유가 뭐냐, 인간은 자기가치를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이런 구조는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하고 전쟁하느냐 하면 나한테 악하게 했던 부자들과의 전쟁이 아니고 나한테 전쟁이에요. 이런 구조를 가지고 이런 구조가 없는, 이런 구조를 원하지도 않는 구조를 고대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 이런 구조를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양보하시겠어요? 주님께서는 양보 없어요. 양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하고 좋게, 좋게 해서는 우리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는 양보 없이 그냥 들이대면서 비로소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를 매일같이 우리가 갖고 있던 사고방식 있잖아요. 우리의 의식의 범주를 주님께서 지금도 매일같이 새로운 구조, 아까 이야기한 언약의 구조를 가지고 이것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자기 뜻이 깨어짐으로서 비로소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나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게. 예수님이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했지요. 그게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조건하에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그걸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방적인 일을 나에게 덤배기로 나를 가지고 던져놓고 그 성취성에 있어서의 조금씩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리는 시그널을 보여주는 식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러면 이런 주의 일에 강렬하게 반대한다면 누가 반대하겠어요? 바로 우리 자신이 주께 극렬하게 반대하겠지요.

극렬히 반대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근거로 하는 겁니다. “주여, 제가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한테 지시를 해주셔야지 왜 자꾸 제 뜻을 뭉개버리면 저는 무슨 재미로 무슨 보람으로 무슨 희망과 의미를 가지고 살 힘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솔직하게 우리의 본심을 우리의 그 상당히 주님 앞에 안 좋은 본심을 꽁꽁 못 감추게 만들어요. 기어이 그것을 우리 입을 통해서 터져 나오게 만들지요.

그게 바로 야고보서4장 14절의 이야기입니다. 13절부터 보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요 13절 요 대목만 이렇게 가위가지고 칼 가지고 쫙 오려가지고 요걸 딱 문제지라고 붙여놓고, 어떤 사람이 요 주장을 하는데 요 주장의 문제점을 쓰세요. 만약에 천국 시험 문제 낸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쓰겠습니까?

4장13절을 딱 해놓고. 자, 이 문장이 포함하고 있는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14절, 15절 모른다고 한다면. 영원히 거기에 대한 답변은 못하겠지요. 만약에 14절, 15절 말씀을 안다고 한다면 친히 여러분들이 답을 한 번 써보세요. 뭐라고 해야 됩니까?

“우리는 기계에 불과한데 우리는 우리 계획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닌데 주님의 뜻 때문에, 주의 뜻이면 했으니까. 주의 뜻 때문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내 뜻을 고집했습니다.” 라고 답변을 쓸 게 아니겠습니까. 답변만 그렇게 100점 맞으려고 잘 쓸 게 아니고 그게 우리의 실생활이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걸 얼쑤 받아야 돼요. 그걸. 감사해야 돼요.

야고보서4장13절, 14절의 그 문제 던짐과 거기에 대한 정답을 우리보고 쓰라고 한다면 우리는 시험 좀 잘 치니까 쓰기는 하는데 이게 실제 내 인생으로서 푹 젖어든다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능력, 주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야고보서4장13절, 14절 돼야 하기 때문에.

그러면 답은 답만 있어서는 답의 의미를 모르겠지요. 그럼 뭐가 먼저 되어야 됩니까. 문제 주어지고 답변 주어져야 되겠지요. 그럼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던지는 야고보서4장 13절도 되고 그 다음에 뭐가 되고? 14절도 되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여보, 우리 이제 회사 잘렸으니까 이제 경기도 동탄 가가지고 치킨집할까?” 이런 식으로. “몫 좋은데 누구한테 해가지고 해볼까?” 그럼 해야지요. 집에서 놀까요? 뭐든지 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애도 둘이나 되는데 뭐든지 해야 될 게 아니냐, 애도 어린데.” 이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이렇게 문제점이라고 지적한 사람이 오히려 욕을 얻어먹을 지경이에요.

그러면 그 중에 하나가 복음 아는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우리는 그냥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이렇게 하면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의 답변은 항상 모호해. 너무 관념적이야. 구체적이 아니고 추상적이야. 당신은 너무 비겁해. 대답하는 것이. 이러면 정말 당신 같으면 대책 없잖아.” 그러면 또 아내가 하는 말이 “참읍시다. 주께서 기다린답니다.” “어디에서?” “담 뒤에서.” “담 철거하는데, 어느 담에서 기다리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나오는 모든 답변이 주님의 일이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답변을 우리가 쏘아내도 답을 내는 우리가 내가 봐도 내가 허황 돼. 내 자신이 좀 한심하다는 느낌이 안 듭니까? 차라리 그보다도 구체적인 것. “새벽기도 40일 연속 나오세요.” “가서 기다리세요.” 이것보다 훨씬 더 처방전이 낫지 않습니까.

우리가 늘 꼼수 부리는 거 우리는 늘 뭔가 복음들을 때는 그렇다 해놓고 돌아서면 자기 스토리, 자기 역사, 어떻게 또 용두산 엘레지처럼 계단 밟고 올라가가지고 지금보다 내일이 더 낫고 내일이 더 낫고 미래를 위하여 한 발자국부터 지금부터 노력하면 그만큼 대가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이런 원리를 꼭 고수하고 싶다고요.

그래서 되고자 하는 게 뭐예요. 갑자기 강의가 끊어졌습니다. 되고자 하는 게 뭐입니까. 용두산 179계단 올라가서 뭘 할 거예요. 뭐 할 거예요. 대한민국 독립만세 할 거예요? 뭐할 거예요? 그러면.

야고보서4장16절 봅시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주의 뜻입니다. 해놓고 행지 아니하면 뭡니까? 죄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은 뭐를 보여주는 것이냐, 바로 우리가 몰랐던 죄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주님의 사명입니다.

그 관계로 인하여 우리는 죄를 보여주고 주께서는 죄를 용서하므로 그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성도라고 칭하는 겁니다. 우리 이름을 쓰고 읽기는 성도라 읽으라 이 말입니다. 우리 이름을 쓰고. 아무개 이름을 쓰고 이름은 성도가 되는 거예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어요. 문제는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게 문제거든요. 왜? 새로운 범주가 안 들어왔으니까. 담이 있고 주님 밖에 있고 우리는 안에 있다는 새로운 범주가 없으니까. 맨날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 라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면. 최선이 최악이에요. 우리는 악밖에 나오는 게 없습니다. 정말 어려우면 악만 나와요. 최악만 나와요.

지금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아주 배부르다는 뜻이에요. 지금 배불러. 단팥빵도 먹었겠다. 삶은 계란도 먹었겠다. 배불러. 하지만 정말 어려울 때는 예수 하나님 보이는 게 없습니다. 살고보자는 겁니다. 죽기는 왜 죽어. 야고보서4장15절과 정반대입니다. 죽기는 왜 죽어. 니가 죽어라. 그래서 주님이 죽었잖아요. 우리는 항상 죄인 줄 모르고 버티는 거고요. 버티는 외에는 하는 재주가 없어요. 버티는 재주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을 이쁘게 보지는 않지만 그걸 죄로 보시고 주님께서 문 밖에 나가계시는 겁니다. 죄는 죄대로 알려주시고 문 밖에 나가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은 문 밖에 나가 계시고 우리는 문 안에 있으니까 니가 아직도 남아 있는 죄가 있을 거니까 평생 모든 니가 원 없이 죄라는 것은 죄다 다 지어버려라. 모든 죄는 죄다 다 짓기를 조장하시면서 결국은 마지막에는 뭐냐 하면 자기 풀에 내 풀에 내가 포기하게 만들지요. 내 풀에.

그게 뭐냐, 내 역사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는 주님의 새로운 계획이 삽입돼 있기 때문에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라고 우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제의 나는 어제의 고민거리와 오늘의 고민거리 다르지요. 예측하지 마세요.

이건 건방진 겁니다. 예측하는 건 건방진 거예요. 동탄에 치킨집하면 한 달에 얼마고. 예측하지 마세요. 그냥 그 가게 하나 했거든 이것도 죽으라는 주의 뜻인 줄 알고 이 세상 빨리 이별하라는 뜻인 줄 알고 대출 한 5억 내가지고 치킨집하는 거예요. 파리바게트 하던지. 죽으면 대출 안 갚아도 되잖아요. 죽었는데 돈을 갚을 수가 있어요? 5억 내려면 10억 있어야 내지만. 그것도 없으면 대출도 못 내요. 대출 내가지고 이제 직장 잘렸으니까 파리바게트 해볼까. 이런 식으로.

이게 뭐냐 하면 결국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이게 살라는 일이 아니고 이게 어제의 나와 오늘 가게 한 나와 다른 나인 거예요. 어제 뭘 해야지 하는 그 나는 없어졌고, 오늘 지금 이 가게를 차리고 하게 하신 오늘치의 일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주의 일을 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침에 청소하고 저녁에 자게 되면 내일되면 내일 가게에 불이 날지 아니면 손님이 되게 해가지고 빵 맛있다고 소문 나 있을지 그건 주께서 하실 문제고. 주의 문제고. 우리는 주께서 하시는 그 일에 봉사할 뿐이지요.

참아라, 하는 것은 주의 몫이고 못 참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못 참아하는 우리가 참아라, 하는 주의 말씀에 봉사하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틀렸고 주님은 옳았습니다.” 하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어떤 생각을 해도 이건 옳지 않은 거니까 내하는 일에 내가 논하거나 평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성경 마태복음7장을 봅시다. 잘했다, 못했다, 함부로 조심스러워도 평하지 마세요. 마태복음7장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알지를 못한다. “나를 제대로 비판할 자리가 어디 있지?” 를 인간은 찾을 수 없다 말이지요. 없는 상태에서 남들이 이야기한 걸 가지고 나한테 적용하고 또 그걸 남한테 적용하고.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는 그런 일 말고 달리 초월적인 비판을 인간은 해낼 수 없습니다. 이건 인간은 정답을 모른다는 뜻이에요.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지만 내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할 때 마옵시고에 해당되는 일은 아주 재주껏 잘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대가는요, 어제로 우리의 수명이 다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어제까지 한 우리 짓은 어제로 우리의 운명하고 우리를 달리해도 우리가 목숨 끊어져도 마땅한 나쁜 짓을 어제까지 해온 거예요. 오늘 더불어 사는 것은 내가 착해서 사는 게 아니고 나쁜 짓은 나쁜 짓으로 돌리고 또 새로운 나쁜 짓을 위해서 또 주께서 살게 하셔서 또 나쁜 짓 짓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쁜 짓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주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킨다는 거예요. 왜? 주의 말씀이니까요. 주님이 지키지 우리가 우이 지킵니까. 내 말입니까. 내가 지키게? 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킬 수 있다는 거예요. 마귀의 구조는 뭐냐 하면 니 옆에서 누가 이야기하던지 니 인생은 니가 관리해야지. 니 아니면 아무도 관리 안 해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내 등짝에는 코가 없는데. 왜 등짝에는 눈이 없는데? 왜 이 모양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왜 해는 있고, 달이 있습니까?

이건 제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욥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니가 지금 왜 고난 받느냐 이유를 따지는데 이유를 따지려면 그 변수를 우주의 모든 천체까지 확장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의견은. 나는 왜 아픕니까? 묻기 전에 아무도 개간하지 않는 사람 없는 황무지에 비오는 이유를 니가 아느냐, 그거 알면 니 알게 될 거다. 니 그거 알면.

저건 몰라도 되고 이건 알아야 되고 그런 거 없어요. 전체를 다 알아야지. 야고보서2장10절에 뭡니까.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어떻게 다 어기게 된 이유가 뭡니까? 알면 다 아는 거고, 모르면 다 모르는 거지.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런 반칙이 어디 있느냐,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주님께서 오늘 야고보서5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말이죠. 이미 문 밖에 계신 분의 요소가 문 안에 있으면 주님이 참았던 그 참음에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예수님이 경험했던 거 있잖아요. ‘당하고 당했지만 두고 보자. 내가 너희를 심판한다.’ 고 마음이 이미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이것보다 더 귀한 게 있습니까? 이것보다 큰 기쁨 있어요?

이보다 큰 기쁨 없어요. 왜? 내가 생각하지 않는 예상 밖의 다른 요소가 주님의 요소가 들어와 버렸다 말이죠. 이래도 참아라. 저래도 참아라. 이건 뭐냐 하면 니 인생은 니 인생과 상관없는 예수님과 상관하는 일이 니 속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다 말이지요. 니가 하는 일은 허접스런 일로 보이지만, 이건 예수님 나의 사명이 돼요. 니가 죄 짓는 것도 누구 사명이라고요? 주님의 사명이에요.

끝으로 죄 짓는 거 다시 해보지요. 인간이 죄 짓는다는 말은 인간은 죄 지었다. 할 때 그거 오해한 겁니다. 인간은 죄 짓는다 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지금 요 짓은 죄고 요 짓을 안 한 요거는 죄가 아닌 선한 일이라는 선악의 논리에 의해서 죄라고 규정한 겁니다.

“나 뭐든지 나쁜 짓 했어.” 라고 할 때 그럼 나쁜 짓 아닌 게 뭔가를 지가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나쁜 짓이라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선악 자체를, 성도는 선악 자체에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서는 주께서는 선악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뭐로 구원하느냐 하면 사랑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사랑 안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사랑 안에는 요한일서4장에는 사랑 안에는 뭐가 없어요? 두려움이 없지요. 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 두려 우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행악질에 대해서 본인이 겁내지 않고 있으니 세상에 자기보다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앞에서 자기를 내팽개쳐버리니 자기하고 상관없는 일에 자기가 말려들었으니까 결국은 내 인생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잖아요. 그리고 두려운 일이 있을 리가 없지요. 내가 나한테 논하거나 평하지 않겠다는데. 니는 채점 70점, 80점. 평하지 않겠다는데. 인생을 70점 평하는 것은 100점을 안다는 뜻이거든요. 100점이 어떤 상태인지를 안다고 했을 때 70점이라는 게 성립된다 이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우리가 100점을 알아요? 100점도 모르면서 무슨 70점입니까? 아마 70점이 만점일걸. 만약에 40점이 만점이면 40점이 만점이에요. 지금 내가 있는 일이 빵을 먹든 내 일이 주의 일이라니까요. 아이고, 빵을 먹을 때 질질 흘렸느냐. 질질 흘리는 것이 주의 사명이에요. 아이고, 흘렸다. 봐~ 행동 봐! 줄줄 흘린 것을 이것은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여긴다는 그 자체가 빵을 먹는 동시에 뭐가 나왔어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선악체제가 죄라는 이름으로 발각된 거예요.

두 시간 뒤를 살아있을지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잠이라는 게 뭐냐 하면 죽음이거든요. 네비나스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잠이라는 것은 죽음이에요. 잠잘 때는 잠잔다는 의식조차 없기 때문에 죽음이에요. 의식이 끊어진 걸 죽음이라 하지 않습니까. 잠 잘 때는 외부에서 잠자는 것을 알지 내부는 몰라요. 수면내시경 해보세요. 나는 지금 자고 있는데 지금 간호사가 침대로 옮긴다. 그런 거 없어요. 깨보면 벌써 지금 의사가 내 앞에 있고 의사의 가운이 보이고. 지금 간호사가 마취제로 프로포플을 집어넣는다. 어디까지 들어왔을까. 어디까지 들어왔을까. 깨보면 벌써 회복실에 와있어요.

그 잠을 평생토록 늘인 것이 뭐냐, 야고보서4장15절입니다. 너희가 잠간 자는 안개 하는데, 잠간 자는 안개에요. 잠 같은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은. 자다 깨어나 보니 회복실이에요. 천국이에요. 그럼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모르지요. 이게 어떤 지혜로 아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은 인간들이 활동하는 영역이 아니라 무대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무대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게 감지된다는 거예요.

어떤 논리로 아는 게 아니고 그냥 감지되는 거예요. 감각되는 거예요. 하루, 하루가 이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주의 뜻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불만을 품는 것조차도 차질 없이 불만을 나타내요. 차질 없이. 차질 없이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성령께서 와보니까 아~~ 내가 또 역사 내 찬란한 내가 이만하면 인생 괜찮게 살았잖아. 나름. 라고 내 역사를 또 따로 준비하려는 또 죄를 범했다는 사실, 죄 아닌 게 없다는 것.

그래서 주께서는 내 뜻대로 안 해주신다는 것. 이 기쁨은 사랑에서 오는 기쁨이에요. 이미 사랑은 어떤 두려움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 없고 사랑은 왜 두려움이 없는가, 따질 수 있는 문제지를 찢어버렸어요. 그걸 골로새서2장에서는 문서를 찢는다. 율법의 문서를 찢어버린다는 거예요. “시험 치지 마! 시험 치지 마! 합격이야!” 찢어버리는 거예요.

니가 잘하고 못하고 따질 수 있는 어떤 여건도 없애버려요. 선악과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에. 빵점이기 때문에. 문제 시험을 치면 뭐합니까. 쳐봐야 선과 악, 선과 악, 이런 오답만 나올 뿐이지. 그걸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냥 사랑으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심판 대상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명, 우리의 사명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참아라, 이제는 그냥 참지 마시고요, 전에는 억지로 참았는데, 이건 바보같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기계가 되어가지고 등신 같은 기계가 되어가지고. 아, 이게 기계 되는 게 참는 거구나! 참는데 별로 힘들지 않는데. 아, 이것도 참는 거구나! 이리 이해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가 이 발목을 내가 내 발목을 잡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것도 가치 있다고 놓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주를 아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또 다시 알고 모든 범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90412b야5장7절(나는 기계다)-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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