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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2 15:12:04 조회 : 155         
20190610b 부산강의 : [시편]19(12편)-중첩 이름 : 한윤범(IP:125.129.150.22)
20190610b 부산강의 : [시편]19(12편)-중첩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악은 없는데 성경에 보니까 처처에 악이 있고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경건하는 자가 없어지고 아첨하는 자밖에 없고. 그게 1절, 2절, 3절 계속 나오거든요. 그럴 때 악이 없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시편 12편에서 하는 그것을 증거를 찾으려고 여기에 해당되는 것을 찾고자 해도 찾아낼 수가 없어요.

세상이 그렇듯이 우리 이웃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하는 그래서 성경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게 현실다운 것 같고. 성경을 안 보게 되죠. 성경 안 보고 차라리 9시 뉴스 본다 말이죠. 비현실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악을 내가 찾을 수가 없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여기 주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악이 없으면 주님 대신에 거울 앞에 있는 내가 더 크게 부각이 되는 거예요. 내 판단은 괜찮았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이 세상의 악과 한 패이면서도 내가 악을 찾으려고 하니까, 내가 악을 찾으면 자동적으로 그 순간 나는 악에 속하지 않고 악의 영역이 아니라 악에서 벗어난 괜찮은 쪽에 속해서 악을 찾는 방법. 이것 이외에는 악을 찾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그 수법만 사용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해선 시편 12편과 합치가 안 되는 거예요. 내용이 일치가 되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교회 가고 목사 설교 들어도 역시 나는 잘났어, 역시 내 행동은 옳았어. 그것만 부각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특이성이에요. 사도 바울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 안에 있음으로 자기는 세상과 구분이 된 겁니다.

같이 있으면서 각각 다른 환경에 속하지요. 세상에 보이는 환경 말고 보여주는 환경에 사도 바울이 지금 속해져 있습니다. 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 말이 전혀 현실성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왜 현실성이 없어야 되느냐?

그래야 세상에 있는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행위와 교회 열심으로 예수 안에 못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예수 안에 못 들어간다는 말은 천국 못 들어간다. 헛짓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트와 볼트, 이게 조이는 것과 나사를 말하지요. 이게 헐거우면 어떻게 될까요? 겉돌지요. 안 맞는 거예요.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 성경공부 하는 것이 천국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교회 가고 기도하고 목사 시키는 대로 가끔은 기도원에 가고. 그것으로 다소 위로받기 위한 것이지 이건 구원에 딱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구원이 와서 나를 장악하게 되면 그 자체가 마감이 되는 거예요. 더 이상 구원하기 위해서 내 쪽에서 할 게 남아있지 않게 돼요. 딱 들어맞기 때문에. 옷 입을 때 핏fit을 보잖아요. 딱 맞는지. 옷은 예쁜데 안 맞으면 옷을 사서 입어도 늘 찜찜해요. 수선해도 딱 안 떨어지는 것 같아요.

딱 떨어진다는 게 중요한데 신데렐라 동화도 있지만 아무리 언니가 자기 발 구겨 넣어도 신발이 안 맞아요. 딱 들어맞는 것, 맞춤, 그게 선택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절대로 빠지지 않을 신발을 준비했어요. 창세전에. 그러면 그것은 인간이 설쳐대고 꼼지락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구원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여기 나오는 악이 발견되고 주님 앞에서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경청하고 이 내용대로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을 알아야 돼요. 악이 뭐냐? 악은 환경이라 했는데 달리 이야기하면 육체입니다. 육이에요. 혈통상 이게 악이에요. 그래서 이미 우리가 육신대로 살기 때문에 악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두 개의 육신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아담의 육에서 흘러나오는 육신과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등장한 육신을 준비하게 되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이삭입니다.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시편 12편을 돋보이기 위해서 앞에 창세기와 예수님 이야기 있다고 했지요. 다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여기 연관된 것은 이야기해야 돼요.

오늘 내용은 악이 뭐냐? 육신 자체가 악이 되는 겁니다. 신체 자체가 뿜어내는 욕망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어요. 같은 신체기 때문에. 그래서 주의 약속을 통해서 육신이 오는데 육신이 올 때는 하나님이 주신 노선, 새로운 육신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악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존의 육신과 대비시킵니다. 기존의 육신이 누구냐 하면,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은 정말 억울한 사람이에요. 본인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서 엄마 뜻에서 또 하갈을 씨받이로 해서 그들의 의견이 모아져서 태어난 거예요. 그럼 저주는 누가 받습니까? 이스마엘 본인이 받아요. 부모 잘못의 저주의 열매가 본인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스마엘을 내치면 안 됩니다. 이스마엘을 거쳐서 이삭을 이해해야 돼요.

나, 이삭 할래. 이렇게 중립지역이 없어요. 이스마엘을 통해서 이삭을 봐야 이삭이 보이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저주 안 받습니까, 하지 말고 이 저주는 나의 운명입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나는 지옥 가는 게 나의 운명이고 내게 딱 맞습니다. 내 몸에 지옥이 합당한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가 가장 합당한 조치입니다.

이게 될 때 다시 말해서 나에게 육신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가 온다는 것을 당연시할 때 이 저주는 무엇과 짝을 이루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복과 짝을 이루겠지요. 저주에 합당하다는 말은 저주만 아는 게 아니고 복과 더불어 저주가 함께 세트로 안다는 뜻이에요. 그렇잖아요.

나는 지옥 갑니다는 말은 그 사람은 비로소 뭘 안다? 천국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천국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이것을 아까 첫째 강의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환경을 몰고 온 거예요.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 결정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기존에 우리의 환경은 뭡니까? 이미 악이기 때문에 악이 없는 거예요. 전부 다 악으로 도배를 했기 때문에 완전히 차단됐기 때문에 그다지 악이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적으로 노력하면 선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안 가도 자기는 착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 안 믿어도 내 운명은 내가 나쁜 짓 안 했기 때문에 신이 있다면 그동안 모아놓은 착한 일을 수습해볼 때 아무래도 정량적으로 선한 정량이 많기 때문에 지옥보다는 나를 천국에 넣을 것이다, 라고 어렴풋이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저주받는 사람다운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욕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육신이 그런 자아를 배태하고 이미지를 남기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 안 믿는 사람 불쌍하다고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복음 듣는 순간 끝나면 도로 획 돌아가는 게 그거잖아요. 오늘 그다지 나쁜 일은 하지 않았지, 이런 식으로. 왜 그래요? 그게 저주받은 자의 본모습이에요. 선악적으로 나가는 것.

자, 이렇게 짝을 이뤄서 옵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할 일은 뭐냐 하면, 자식 이삭을 잡는 게 아니에요. 이삭은 옳고 이스마엘이 틀렸다면 이스마엘을 잡아 죽어야 되는데 뭘 잡느냐 하면, 이삭을 잡아 죽입니다. 이삭을 없애버려요. 이것은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삭을 죽이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이삭의 죽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죽음이죠.

이삭 따로 있고 이스마엘 따로 있죠. 이삭의 요소를 아브람 속에 집어넣으면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되면 이 후손들은 양쪽이 다 항상 같이 병행해서 마주보면서 태어나게 돼있어요. 이삭이 자식이 바로 야곱과 에서입니다.

울산강의에서 야곱의 쌍둥이는 에서가 아니고 야곱의 쌍둥이는 하나님이라 했지요. 에서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갔지요. 야곱은 에서인 줄 알고 죽이려 했습니다. 어딜 내 것을 뺏으러 와. 그런데 그 자리에 쌍둥이 형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야곱을 죽여 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야곱이 안 죽으면 안 돼요. 죽을 때 여기서 이스라엘이 나와요. 아브라함이 이삭과 이스마엘이 중첩된 것처럼 야곱도 이스라엘과 야곱이 중첩돼있습니다. 한쪽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육신을 그대로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육신은 그대로 있다고요.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 누굽니까? 유대인들이잖아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이죠.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 자손의 세례를 받은 사람, 갈라디아서 표현대로 하면 예수님의 옷 입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돼요. 다수를 1로 만들고 1로 다수를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 1이라는 게 그냥 1이 아닙니다. 다수가 1이 되고 1에서 퍼져서 다수가 되잖아요. 성경적 내용대로 하면. 그런데 성경내용이 현실로 보면 1이 아니에요. 이게 제로가 돼요. 없는 분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왜 없는 분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확대로써 신을 만들기 때문에 있는 신을 원해요.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신은 없어요.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건화된 것. 바람같이 나타나고 없을 때도 스스로 없어지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인간의 육신이 예수님을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찾아가서 내 것 만들 수가 없어요. 반대가 돼야 돼요. 성령이 나를 인도해야지 이끌고 덮쳐야지 내가 성령을 종 부리듯이 부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와서 없음이 와서 나를 장악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야곱을 장악한다면, 야곱은 어떻게 되느냐? 야곱의 인생은 자기 인생이 아니고 야곱의 아들 요셉에 의해서 농락당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야곱에 있어서 긴 세월 동안 자기가 사랑하는 요셉은 죽었어요. 짐승한테 물려죽었습니다.

아들만 알지 자기는 철저하게 몰랐어요. 아들을 믿지 마세요. 아들의 비밀은 따로 있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몰라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잔소리하면 아들이, 아버지는 나에 대해서 압니까? 알만큼 알지. 아버지 모르는 비밀이 있어요. 비밀이 주로 안 좋은 비밀이에요.

악이 뭐냐? 악은 육신의 자식을 계속 고집하는 거예요. 왜 고집하느냐? 두 번째 노선이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 붙들어서 어떻게 천당 가볼까, 애쓰는 그게 악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할 필요 없거든요. 교회에서 하는 행세나 집에서 하는 행세나 놀러가서 하는 행세나 그냥 그대로 살면 되는데.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느냐?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이 종이 하나가 우리 전체라면 우리를 날이 갈수록 이걸 찢어버려요. 찢김 당하면 되는 거예요. 교회 가나 집에 가나 직장 가나 어딜 가도. 참 쉽죠, 잉. 참 쉬운 거예요.

하루하루 살면서 나라는 것이 자꾸 파쇄 되고 조각조각 나고 피부는 피부대로 다 늙어가고 아름답고 고운 것도 다 거짓되고 전부 다 엉터리고 어느 날 귀는 안 들리고 허리는 아프고 계단도 못 올라가고 치과는 사흘마다 가야 되고 이것 하면 이것 해야 되고 저것 하면 저것 해야 되고(한꺼번에 하면 안 되나?) 머리카락은 빠지고 빗으로 모으고 두드리고 발악을 해요. 미백이고 화장품이고 온갖 것 다 써보고.

그게 뭔 뜻입니까? 지금 누가 나를 파괴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파괴당하는 그 틈 사이에서 비로소 주님이 보여요. 주님은 그래서 보이는 거예요. 누가 나를 지금 다루고 있는데 문제는 뭐냐? 우리가 악인 줄 모르고 악으로 하니까 주님께서 악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찢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공부 잘한 것 자랑하고 어느 고등학교 나왔는지 자랑하고 내가 옛날에 회사한 것 자랑하고 온갖 자랑거리를 다 끄집어냈는데 주님께서 그걸 또 해봐. 하면 쪽쪽 찢고. 마치 예레미야가 말씀 전하면 히스기야가 다 치는 것처럼 찬란한 나의 히스토리, 역사, 찬란한 과거를 다 찢어버려요.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하게 만들어요. 네가 지금 환경을 몰라. 네가 소속도 몰라. 네 자랑거리가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거든요. 교회 목사들이야 잔업근무, 성과급해서 구원받는 건 기본이고 나중에 상급 있다고 해서 교회 봉사에 매진하게 하는데, 그래봐야 자랑거리는 점점 더 증가하지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이런 게 있어요. 어떤 우주선이 광속, 빛이 속도를 내면 낼수록 우주선은 점점 더 증가한다. 속도 내는 본체는 질량이 늘어나게 돼있어요. 착하면 착할수록 그것이 나에게 짐이 돼버려요. 내가 착해야 될 덩치가 점점 커지는 거예요. 그게 악이 악다운 거예요. 진짜 지옥은 교회에서 체험해야 돼요. 진짜 십자가에 예수 죽인 인간들은 교회에서 만나야 돼요.

목돈 내고 교회 지었다는 장로들이나 교인, 헌금 끌어 모으겠다고 발악하는 그저 위로, 위로, 축복 남발하는 그 목사나 실제로 성령께서 우릴 찢어주는데 네 흔적을 없애주는데 교회 가면 있는 쪼가리도 다 끌어 모아서 자랑거리로 점심 먹을 때까지 계속 터는 거예요. 그 자랑거리 없는 사람은 기죽어 있고 자랑거리가 있으면 기 살아 있고. 누가누가 잘하나, 어린이 노래 자랑하는 것처럼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랑거리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악이 들어있거든요. 악은 반드시 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등장해요. 아주 간사하지요. 그게 시편 12편에서 말하는 그겁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되 하나님에 대한 복수하기 위해서 헛짓들, 하나님 이래도 등신같이 가만있지요, 그지요? 하나님께 반발하는 식의 복수하는 거예요.

독일 라인 강 근처 가면 높이 132미터의 언덕이 있어요. 마르크스 성 맞은편에 있는데 이름이 로렐라이 언덕이에요.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은 남자한테 배신당한 여자가 한을 품고 반은 인간이고 요정인지 분간도 안 되고 노래를 불러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노래를 들은 어떤 선원들도 미쳐서 그 노래 소리에 끌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분들 자기가 다 미인이라 생각하니까 남자들 내 미모에 안 끌리는가 보자. 그게 로렐라이, 완벽한 착각이죠. 그 노래 소리에 선원들은 덩치만 컸지 멍청하니 끌려가다보면 한 맺힌 여자만 아는 물밑의 암초에 걸려서 사람들이 다 죽는 거예요. 전설입니다. 로렐라이 전설입니다. 실제 있는 게 아니고요, 음악소리 들리는 게 아니고요. 다만 거기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한 맺힌 여자가 남자한테 은근히 욕보라는 복수심.

세상의 악마는 가만있질 않습니다. 악마는 항상 자기를 지옥에 보내기로 결정지은 신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을 볼모로 복수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 복수가 바로 그들로 하여금 모든 악에 대해서 반대로 나가는 거예요. 그 반대가 뭐냐? 네 신체에 대해서 네 혈육에 대해서 놓치지 마라. 그게 너의 희망이다. 이겁니다. 육신의 자식은 지옥으로 골인하는 겁니다. 아담의 자손.

그럼 아담의 쌍둥이가 누구냐?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죠. 아담과 예수님이 상대하는 거예요. 죄가 죄를 낳고. 육신이 육신을 낳는 게 아닙니다. 죄가 죄를 낳는 거예요. 우리는 죄를 살게 하는 숙주 같은 존재입니다. 껍데기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악한테. 악이 나의 주인이지 내가 주인이 아니란 말이죠.

악은 뭐냐? 하나님한테 복수하기, 반발하기, 대들기. 선악과 심어놓기는 왜 심어놨느냐, 이런 식으로 반발하고. 그 위험물질을 왜 심어서 따먹게 만드느냐, 그건 하나님이 잘못된 거다. 어떻게 하나님은 세리와 강도와 창녀를 구원하느냐? 이 땅에 살면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순진하게 살려는 사람을 천국 보내는 게 옳지 어떻게 세리와 창기를 천국 보내느냐? 그거는 하나님이 옳지 않다, 라고 입으로 반발하게 만들어요.

그 반발에 우리가 같이 동조하는 이유가, 그들 말에 대해서 다른 대안적인 복음적인 태도를 내용을 우리가 평소에 안 갖고 있었던 거예요. 교회 들어올 때는 그만이지 에프킬러처럼 뿌릴 때뿐인데 문 열고 나가면 에프킬러 냄새도 안 나. 다시 옛날의 자기 잘났다는 식으로 다시 집으로 차타고 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걸 들었으면, 우리가 만약에 악마라면, 악마라면이 아니지 악마 맞는다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우린 무슨 노력을 해야 됩니까? 내 육신의 가치를 폄훼하고 그걸 모독하고 무시하는 새로운 존재를 공격하는 전략을 하겠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사건 아닙니다. 예수님, 하늘나라 가면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그 태도가 대드는 태도에요.

주님께서 어린아이 하나 보이는 거예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있어요. 자기 시작 같은 것, 끝을 생각하지 않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어린아이에요. 어느 글에서 경직되지 않고 부드럽다고 했지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경직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독자적으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어요. 나를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기 위해선 내가 버텨야 내 육신이라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면 악은 새로운 족보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 거기에 달려들지요. 그런 예가 시편 12편 오기 전에 이미 성경에서 받쳐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여기 시편 12편에 보면, 경건한 자가 끊어지지요. 경건이라 할 때에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경건하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족보가 경건한 환경 자체가 따로 있어요. 단절돼있기 때문에 우린 못 갑니다.

그리고 두 마음으로 말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대드는 식으로 하죠. 그 대드는 것이 4절에,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철저하게 자기가 나는 내가 챙길 거야. 이건 다른 노선을 계속해서 백안시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사실 이런 걸 표구점에 가서 액자로 집에 걸어놔야 돼요. 이게 우리 모습이라니까요. 예수 믿는다는 건 다 구색에 불과하고요, 폼 내는 거고 억지를 부리는 거고. 우리 본모습은 뭐냐 하면,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잔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이거는 그냥 외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어땠습니까? 인간의 육신과 겸해서 인간의 족보에 따라 나오지 않는 새로운 육신의 등장, 그걸 아브라함에서는 씨라 해요. 새로운 씨의 등장으로 하겠지요. 그럼 악마가 가만있겠습니까? 그 씨를 죽이려고 하겠지요. 그러한 증거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한나.

엘가나 집에 브닌나라는 첩이 있었고 본처 이름이 한나. 그런데 첩은 아들 있다고 자랑질을 해대지요. 자기의 강점이고 장점이니까. 장점과 강점을 하나님이 준 복이라고 여긴 거예요. 나한테 아들을 줬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봐서 육신의 자식, 육신을 주께서 인정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원수라 했거든요. 표현이. 짝이 둘이니까 언약적으로 브닌나가 있는 반면에 이쪽은 한나가 있지요. 한나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나는 무슨 표상을 갖고 있느냐 하면, 없음을 갖고 있어요. 이 땅의 육신으로서는 자식이 없는 거예요. 자식이 없으니까 악마 세상 쪽에선 뭐라고 오해하고 좋아들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저주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걸로 상대적으로 자기는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이 증거로 자식 없는 여자를 공격한 겁니다.

한나는 슬펐어요. 그 슬픔을 그대로 기도로 토해냈습니다. 이 말은 기도라 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돼요. 참, 정말 이게 성경 하나하나가 어려워요. 공격받지 않으면 기도가 상술이고 잠꼬대밖에 안 돼요. 혼자 도 닦는 거지. 기도란 공격이 있어야 기도가 돼요.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 싸움에 참전용사가 될 때 기도가 의미 있는 겁니다.

기도할 때 네 적은 누구야가 있어야 돼요. 주여, 우리 얘 공부 잘하게 해주옵소서. 이런 것 하면 안 되고 그건 이방인들의 기도고. 적이 나타나야 돼요. 적이 나타나서 그 적에 의해서 핍박을 받을 때 기도가 나오는 겁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한나는 없음의 표상이잖아요. 자식이 없었으니까. 기도합니다. 그러면 없음의 표상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계속 가요. 한나에는 중첩이 됩니다. 한나가 기도해서 얻은 아들은 한나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돼요? 그러면 한나는 여전히 아들 있어요, 없어요? 아들이 없는 거예요. 나중에 아들 셋을 낳지만(삼상2:21) 그 아들은 의미 없는 아들인데, 어쨌든 하나님이 주신 아들은 경유하라고 주는 거예요.

내가 밤에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닮은 어떤 육체가 내 몸을 덮칩니다. 그럼 나는 니가 나야, 내가 너야. 하고 있는데 아침에 눈 떠보니까 뭔가 있다고 여긴 육체가 없어져요. 그러면 이건 중첩이거든요. 내가 기도하는 나, 나는 주께서 찢어야 되고 없어져야 마땅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나가 되는 거예요. 나 없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아담 안이거든요.

아담 안에 주님이 새로운 족보로 남기고 찾아오게 되면 내 씨가 아니라 주님의 씨가 나로 인해 태어나고 나는 내 소임 다하고 사라져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낳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낳은 걸로 쳐주는 구조에 놓여있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낳은 게 아니고 우리를 이용한 거죠.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겠어요? 요셉이 예수님의 아들이죠. 하지만 실제 현상으론 예수님은 요셉 아들이죠. 요셉이 중첩된 겁니다. 나 아니고 당신입니다. 나의 나됨은 내 안에 새로운 육체가 됐습니다. 씨 문제에요. 새로운 씨가 아담의 씨밖에 없는 이 세상에 격동을 일으키고 특이점을 발생시킵니다. 그 특이점은 우리가 잘만 하면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강제로 우리에게 먼저 쳐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에게 나가라는 소릴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착해서 찾아온 게 아니고 나쁜 짓하면 나가시는 분이 아니라 묻지도 않고 쳐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지겹습니다. 예수 안 믿을게요, 한다고 해서 주께서 떠날 분이 아니에요. 창세전부터 작심하시고 찾아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에요. 그렇게 될 때 이젠 나만 구원받았다는 게 없어지고 나는 구원을 말한다고 돼요. 구원을 증거하는 사람 돼요.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난 안 찢어져야 되니까. 내가 찢어져가면서 비로소 구원을 보는 겁니다.

밤하늘에 별이 뜨고 달이 떴는데 구름이 좀 꼈어요. 구름 때문에 별과 달이 안 보여요. 그런데 구름이 잠시 끊어졌을 때 그 사이에서 별빛이 보이는 거예요. 이 별빛의 구성이 시편 12편이에요.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고 그들이 두 마음을 품고, 이런 안목은 우리가 이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요. 주님 너무 과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볼 때는 세상 그렇게 나쁜 세상 아닌데, 이렇게 돼요.

그들이 내 입술은 내 것이니 누가 나를 주관하리요? 날 주관할 자 없다. 경건한 자가 끊어진다. 경건한 자가 이 땅에 교회에 열심 내는 자가 아니고 이미 이 속에 있는 사람이 그 자체로 경건이 종결된 거예요. 경건은 마감된 겁니다.

내가 구원된 게 아니고 주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시고 나는 주님의 말려들어 하나의 종으로서 엮여진 거예요. 성령이 와서 엮여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 이야기하지 않고 주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그 말을 지난 설교시간에 내 조수가 되리라고 했는데, 주님의 조수가 된 거예요. 주님의 똘마니 되신 거예요.

주님 법 먹고 있을 때 우린 밥 안 먹고 있고. 너 왜 밥 안 먹나? 주님 다 드시고 난 뒤에 그때 먹겠습니다. 이럴 정도로. 자꾸 보통 사람들은 자기부터 챙기기 마련인데 성도는 자기 챙기지 않고 주님이 옳습니다, 하고 자기는 자꾸 뒤로 물러서는 경향을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이 이상해요. 네 자랑 좀 해봐. 성도는 자랑할 게 뭐가 있습니까. 니 아들 이번에 서울대학 갔잖아. 서울대학 간다고 천당 갑니까?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자꾸 빼. 그럼 자랑할 게 뭔데? 저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런 신학적 이론 말고. 자기는 진심인데 자꾸 엉뚱한 소리한다고 핍박을 받을 때 그게 뭐냐 하면, 타인과의 특이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특이성의 반대말이 오늘 본문에 아첨이에요. 아첨하는 입술로 하나님의 개입 없이 가죽옷 있음에도 직접 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악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대할 때 저 사람은 내가 공들이면 내 사람 될까 생각해요? 여러분, 그렇습니까? 내가 공들이면 그 사람은 도망치지 않아요. 내 공만 빼먹기 위해서 빌붙어요.

그런 사람에 의해서 오히려 이용당하는 게 세상구조입니다. 잘해주면 친구 아이가, 하면서 옵니다. 제공할 게 떨어지면 종용히 끊고자 합니다. 이건 부모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에요. 돈 없는 부모는 부모도 아니지요. 그게 무슨 부모에요. 짐 되지요. 땅뙈기라도 있어야 큰소리치지요. 이번 명절에 올래, 안 올래? 이래야 봉투 들고 오는 거예요.

잠언에 이런 말씀 있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사랑인 줄 아세요? 아닙니다. 사랑 아니에요. 외로워서 말동무해주는 거예요. 불가능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재주를 부려서 주의 마음을 빼앗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주님, 주님 하지만 주님은 니 어디서 왔노, 이럽니다. 주의 종으로써 기적을 베풀고 선지자 노릇하였습니다. 저리 가라. 나 니 모른다.

주님의 마음을 어떤 노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어요. 구원 없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정신 팔지 주님 마음까지 신경 못 쓰거든요.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빼앗습니까? 바로 특이성, 두 자로 하면 기적, 하나님의 기적은 뭐냐? 주님이 내 마음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 그래서 내 남은 평생은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없어요.

여기 물이 있잖아요. 물이 있을 리가 없어요. 주께서 물을 채워주신 겁니다. 지금 완전히 내가 미친 소리하고 있는데 주께서 물 주셨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까불다가 물 쏟으면 물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거예요. 매사에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복음에 필요한 것만 주셔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필요한 악을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그 말이에요.

내 스스로 나를 절대화시키지 않도록 필요한 악들을 전부 다 나한테 붙여주는 거예요. 왜? 내 뜻대로 안 되게 만드는 거예요. 자식도 남편도 내 뜻대로 안 되고, 아내도 내 마음대로 안 돼. 아주 되는 일이 없어. 그러니까 마음을 이렇게 잡수세요. 될 리가 없을 것이다. 될 리가 없는데 물이 있네요. 범사에 감사^^

될 리가 없는 게 맞아요. 주님께서 날 파쇄기에 넣어서 찢었기 때문에. 그런데 아직은 여러 군데 아프지만 머리는 안 아파요. 아직 주께서 머리는 복음에 필요하다고 찢지 않았어요. 나중에 찢을 거예요. 나중에 치매 현상 보일 겁니다. 어차피 우리의 육신은 진즉에 없어질 건데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그리스도와 짝을 이루기 위해서 주를 증거하라고 계속해서 끈질기게 질척거리면서 살게 만들어요.

계속 하루하루 살게 만듭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사나죽으나 누구의 것이라 했습니까? 주의 것이라. 참 사도 바울은 말은 간단하게 했어요. 그 간단한 말을 늘여보면 우리의 한평생 내내 매일같이 체험해야 되고 또 체험해야 될 겁니다. 체험이 면적만 있는 게 아닙니다. 폭도 있어요.

하루를 살더라도 이 악이 구원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간단위로 끊고 분단위로 끊어보면 그게 다 들어있어요.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제대로 하루하루 살면서 우리 피부에 와 닿고 체험으로 와 닿는 것은 사소한 일들이 나를 괴롭힙니다. 제발 좀 우리가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라고. 괴롭히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남이 안 괴롭히면 누가 괴롭히느냐 하면, 내 육이 나를 괴롭혀요. 가만있어도 아파요. 세상에 이런 억울할 때가. 내 육신이 브닌나에요. 내 육신이 내 적이에요. 내 육신에 대해서 미련 뚝 끊으라고.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욕망이 내가 원치 않는 내가 보기에도 지저분한 짓을 하게 돼있어요. 그때는 내가 곧 불의한 청지기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만들어서 네가 이미 구원되었음을 우리에게 통보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결론은 뭐냐 하면, 주여 새로운 눈으로 보니까 세상 자체가 악이군요. 이 세상 자체가 전부 다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하는 마당, 지평입니다. 이 세상을 좋아하며 살았던 우리 모습 자체가 주님 앞에 복음을 대드는 시편 12편에 악으로 규정된 그 규정이 바로 우리에 대한 규정이죠.

이렇게 보시면 돼요. 시편 12편이 남 보기 위해서 한 게 아니고 그 말씀 자체가 주님을 붙들고 우리를 먼저 쳐들어와요. 살려고 하기 전에 너는 살지 못하고 여기 나오는 악에 해당됨을 네가 그 모습이라고 통보해줍니다. 중복돼있으니까. 내가 살고자 하나님을 이용했던 그것이 시편 12편에서 너는 네가 너를 주관하고 입술은 내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주장했던 네가 악에 속했다고 공격함으로써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파괴되는 순간 저주가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순간 비로소 구름 틈 사이에서 이미 우리가 구원되었음을 아는 거예요.

이미 구원된 관계기 때문에 이런 살아 있는 혜택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 1분 내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내 이야기하지 않고 오늘 본문 6절 이야기를 해요.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하루에 일곱 번 깨져라. 인생을 일곱 번 완전히 깨져야 돼요. 깨지는 순간 비로소 말씀이 나를 구원하지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예수님만 증거해야 돼요.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았지 나의 꼼지락으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남들한테 미친 사람 돼요. 아주 특이하네, 유별나다는 소릴 듣게 돼요. 그 소리를 될 수 있는 대로 듣지 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 들은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개한테 진주를 던진 경우입니다. 복음도 믿을 인간도 아닌데 우리가 복음 증거할 때는 은근히 복음 안다는 자랑질 한 거예요.

그런데 들어오는 것은 이단옆차기가 들어온 거예요. 네가 오늘부로 미쳤구나.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돼요. 내가 전도한답시고 주의 증인된답시고 쓸데없이 아무나 붙들고 복음 전했구나. 복음 전하는 게 바겐세일이 아닌데 내가 왜 미친 짓했지? 골라골라가 아닌데 주여, 앞으론 내가 선교하지 않게 하옵소서. 전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게 전도에요. 함부로 입 놀리지 말게 하옵소서.

주께서 허락할 때 내 전도가 아니고 주님의 전도로 튀어나올 때 그 사람이 만약에 예수 믿는다면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가 돼요. 목사님들 설교할 때는 본인이 깨져야 돼요.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 오용익 목사님이 몇 년 전에 우리교회 설교하면서 내가 그때 미국에 있었는데 제가 큰 은혜를 받았어요. 설교시간에 우리 딸이 이야기하는데 아버지는 신자가 아니다, 라고 했답니다. 얼마나 바른 신앙생활 했으면 이런 소릴 듣겠어요. 아버진 아무리 봐도 신자 아닌 것 같아.

그에 대해서 반발하면 신자 아니에요. 그 신자 아님을 주의 음성으로 들으면 그게 신자입니다. 더 이상 나의 믿음을 안 믿거든요. 어제 설교한 것처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지 피 믿는 사람 믿음 보고 넘어간 게 아니거든요. 내 믿음 보고 주께서 구원한 게 아니고 우리 앞에 보이진 않지만 먼저 매사에 내 뜻대로 안 해주시는 그분이 네 뜻 필요 없어. 내 피로만 충분해, 라고 외치는 분이 우리를 지옥에서 빼내주시는 거예요. 모든 저주에서.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 믿는 내 믿음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누가 알아듣겠어요. 말하지 마세요. 입 다물고 있어야 돼요. 우리 옆집에 할아버지 18년째 사는데 말 안 했어요. 맨날 제사 드리고 절에 열중하는데 왜 말합니까. 그런데 우리 집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아요. 할아버지가 우리 독일 갔을 때 많이 도와줬어요. 왜 평가가 좋으냐? 말을 안 하니까. 사람이 말이 많으면 예예 하지만 뒤 돌아서서 욕해요. 가만있으면 좋은 사람 돼요. 오늘 팁 하나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공격입니다. 공격은 경유라 생각하세요. 중첩이니까. 이삭을 바쳐야 되듯이 우리 자신을 포기하게 하고 포기하게 하신 그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아낌없이 우리 자신의 내막과 실상을 분명히 알게 돼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악이란 말이 너무 과도한 말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당기지 않았고 성경에 대해서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이 곧 현실인 것을 알게 해주셨사오니 이 사실대로 믿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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