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9-08-08 11:08:00 조회 : 138         
2강-호 1장 2절(호세아 가정)190807-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2강-호 1장 2절(호세아 가정)1908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장 2절입니다. 구약성경 125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세아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개인의 영달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호세아에서 어떤 행동이 나오고 어떤 태도가 나올 때 이것은 개인이 기분 나빠서 나온다든지 또는 개인이 기분 좋아서 하는 식의 사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요.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지금 어떤 감정으로 보고 있는가? 그것이 호세아의 마음과 몸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선지자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나라에 선지자가 있다는 그것만 해도 사실은 복된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전히 연락을 취하는 통로를 하나님 쪽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지옥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동네지만 그 지옥이 지옥답게 되는 기본 구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은 그냥 하나님께서 내팽개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사람들은 혼자 살고 싶은 심정들이 있어서 하나님이고 뭐고 다 귀찮아하지요.

요즘 사람들은 사람하고 사귀더라도 사귀는 기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전에는 6개월 사귀더니 이제는 3개월로 끊고, 3개월 사귀던 사람이 1개월 끊고, 한 달 사귀면 “야 지겹다. 우리 너무 많이 사귀었다. 이쯤해서 갈라서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옛날에는 어떤 모임이나 여행을 가도 쪽수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열 명만 되면 골치 아파요. ‘열 명에서 한 다섯 명 되면 재밌겠다.’ 다섯 명이서 여행 갔다면 ‘그것도 귀찮다. 한 세 명만 가자.’ 그런 식으로 점점 더 자기 쪽에서 뭔가 깊은 관계, 깊은 사귐을 귀찮아하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 것이 뭐냐? 점점 지옥을 닮아가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아무하고도 관계를 끊고 살고, 관계를 주고받는다 할지라도 ‘멀찍이 그 정도로 서 계시고 더 깊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고 견제하는 식의 세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기만의 세계를 본인이 열심히 꾸리다 보니까 하나님이고 이웃이고 전부 다 나 몰라라, 하는 상태가 되어버리지요.

여기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북 이스라엘 또는 남쪽의 유다에게 선포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사랑한다면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면 그것이 사랑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할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는 이런 형편에 있다고 제대로 알려줄 때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너 지금 이정도 밖에 안 돼.’라고 제대로 찔러주고 알려주는 것, 그게 최고의 사랑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뭔가 잘못된 것을 일러준다는 것은 그 잘못된 것과 더불어서 수정할 수 있는 여지도 하나님 계획안에 들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여동생이 잠을 자는데 껌이 머리에 잔뜩 붙었다. 혹은 남동생이 바지 지퍼를 안올려서 남대문이 벌어졌다. 이때 그걸 지적한다는 것은 남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같은 식구잖아, 하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만큼 지적한다는 것은 남들로부터 보호해주려는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원할 때는 그걸 말로 바꾸셔야 돼요. “주여, 지적, 지적, 지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가는 것이 지옥으로 통하는 것인지 아니면 천국으로 통하는 것인지 주께서 지적을 해주셔야 알지 저는 몰라요.”라고 해서 늘 주님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호세아를 보게 하십니다. 호세아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무슨 일을 벌이셨는가?’ 우리가 보면 돼요.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지시를 하기를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이것 지적입니다.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사랑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이런 지적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지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음란한 자식을 낳고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는 그 말은, 현재 북 이스라엘 그들이 뭘 모르느냐? 하나님보시기에 자기들이 음란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전혀 감 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편안하고 태평스럽게,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모습을 어떻게 볼까?’ 거기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는 거예요. 선지자가 왜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변하는 겁니다. “야, 너희들 어느 수준인줄 알아?” 그러면 그 사람들이 “몰라.” “그러면 내 가정을 봐. 내가 장가간다. 누구하고? 음란한 여인과 장가간다. 아마 좀 있으면 내가 자식 낳을 걸? 어떤 자식? 음란한 자식.”

그것은 자랑이 아니지요. 특히 호세아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해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는 것은 호세아의 계산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뭐냐?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계산하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계산 안하고 살면 되는데 혼자서 자기 잘난 맛에 버티다 보니까 한순간도 계산 안하고 보내는 시간이 없어요.

늘 ‘무엇이 이익일까? 무엇이 손해일까?’ 자꾸만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호세아 가정의 경우에 자식을 낳는 것이거든요. 자식을 낳을 때 계산하지 않고 낳습니다. 마치 염소가 새끼 낳는 것과 같아요. 새끼 낳을 때, ‘무슨 염소가 나올까? 알록달록한 것이 나올까?’ 그런 계산 같은 것 없어요. 그냥 팍팍 새끼 까는 거예요.

개가 새끼를 낳듯이. 개가 새끼 낳으면 누구한테 한 마리 준다든지,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개는 임신해서 자식 낳으면 그만인 겁니다. 지금 호세아도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아무 계산이 없습니다. 아무 계산 없이 그 아내가, 그 자식이 이 호세아 선지자의 명예를 먹칠할지, 명예를 드높일지, 가문을 세우고 가문을 잘 건사할지, 그런 계산 같은 것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좀 그렇게 살면 안 됩니까? 딸을 낳으면 의과대를 가야 되고 대학은 어느 대학을 가야 되고,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많은 사람이 찾아와야 되고, 주위에서 나를 우샤우샤, 칭송해야 마땅하고. 그 계산한다는 자체가 잘못인 이유가 뭐냐? 아무리 계산해도 인간들은 뭘 계산 못하느냐 하면, ‘지옥에 가서 내가 받을 벌이 지금의 내 행동과 얼마나 균형을 맞추는가, 얼마나 적절한가?’ 그 계산을 인간은 못하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착하게 산다고 착각하기에 막상 지옥가게 되면, ‘이건 너무 심한 벌이 아니냐?’ 하지만 막상 지옥에서 살다보면 ‘야, 참 하나님께서 빈틈없이 내 죄에 대해서 적절하게 형벌을 매기셨구나.’ 하는 것을 감탄하면서 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오버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더 넘치지도 않아요. 적절하게 벌을 주시는데 그 벌이 바로 지옥행이에요.

그러면 우리 계산하고 다르지요. 그러면 우리는 계산하지 말고 주님의 계산에 맡겨야지요. 오늘 호세아의 가정에서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고 음란한 자식이 나온다고 이미 예고되어 있을 때에 호세아가 머리 싸매고 엉엉 울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 따로 있는데 나는 저 더러운 여자와 결혼하니 내 인생 조져 놨다.’ 이렇게 몸부림 치고 그러지 않아요.

선지자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야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이 선지자가 무엇을 빗대서 겨냥해서 왜 음란한 아내와 결혼해야 되는가? 그 이유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3절부터 보면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참 복잡하지요. 그냥 일반가정에 애 하나 낳고 부모가 부르기 쉬운 이름 하나 정해놓고 혼자서 어디 가서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알아서 팔자대로 간다.’ 그렇게 소박하게 살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선지자를 철저하게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해요. 선지자만 선지자가 아니라 선지자가 낳은 자식까지 본의 아니게 그 시대를 반영하는 선지자역할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계산 하에 자식을 낳게 하는 겁니다.

참 신기하지요? 자식을 낳는데 보통 생물학에서는 자식은 어떤 확률에 의해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리고 태어날 때 성격 같은 것은 dna에 의해서 부모 양쪽에서 각각 50퍼센트를 받아서 성격의 70퍼세트 정도가 이미 확정되고 그 나머지 30퍼센트는 환경 탓이다. 생물학에서 낸 통계로 그렇게 이야기들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의도를 가지고 자식이 태어나야 되는데 그 의도가 복잡합니다. 어떻게 복잡하냐 하면, 이름 자체가 ‘이스르엘’이에요. 그러면 이스르엘이라는 것은 지명입니다. 목사님이 또 여기를 가 봤거든요. 이스르엘은 평지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곡식이 잘 되는 평야, 호남평야나 김해평야같은 아주 거대한 평야에요.

갈멜산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에 보면 나오는데, 직경도로가 한 10킬로 정도로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보기 드믄 평탄한 지역입니다. 그 지역을 북쪽 이스라엘이 차지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곡식이 많이 나는 옥토의 평지가 되어서 거기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요. 그 사건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 죽어서 지옥 갈 그 징벌을 역사 속에서 미리 당겨서, 이스라엘 평지를 무대로 해서 하나님의 벌을 내리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꼭 아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누굴 향하여 벌을 내리겠다, 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저주의 바다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저주가 아니고 복을 받은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겠다는 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여러분이 신약의 십자가복음을 알게 되면 이것은 하나 분명히 해야 돼요.

어떤 벌을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하는 것은 저주 없고 벌 안 받아도 이미 그 사람은 저주의 바다에 속하고 지옥 갈 사람이에요. 지옥 갈 사람에게 왜 벌을 내리시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지옥 간다, 안 간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런 분, 이렇게 무서운 분, 벌을 내릴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알리고자 해서 성경에 저주받은 사람이 이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겁니다.

성경 대부분이 벌 이야기에요. 구약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 벌 이야기입니다. 물론 신약에 가면 용서이야기가 아주 많지요. 사도행전의 경우에 이방인들이 용서받는 것이 나오고 성령세례 받고 죄 씻음 받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같은 경우에는 벌 이야기가 많아요. 그렇다면 이스르엘을 통해서 북쪽 이스라엘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한 벌 이야기가 나오는가?

그것은 열왕기상 21장과 열왕기하 9장 14절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 호세아 4절에 간단하게 이스르엘이라고 해놓고 그 이스르엘은 지명입니다. 사람이름이 아니고 지명입니다. 그 다음에 예후라는 것도 사람이름이에요. 호세아가 2남 1녀를 낳는데 그 첫째 아들에게 이스르엘이라는 평지의 이름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 땅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라도 놓친 적이 없고 다 주시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cctv에요. 숨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낱낱이 지켜보는 이유는 “그러니까 너는 지옥가고 그러니까 너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어.”라는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통해서, 인간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펼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겁니다. 제가 놓치지 않고 지켜본다고 할 때는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인간은 사람 눈에 안 띄면 그것은 하나님의 cctv에 안 걸리는 줄 알고 마음 편안하게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사람 눈에는 안 들켰지만 하나님 앞에 들켰다고 해도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뭐냐 하면, 무능한 하나님이에요.

아무 맥도 못 추는 하나님, 있으나 마나한 하나님. 마치 하나님을 약 올려도 하나님은 등신같이 아무 반항도 못하는 하나님. 뒷방 영감 같은 하나님으로 인간은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호세아의 큰 아들의 이름이 이스르엘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네가 한 짓을 내가 철저하게 놓치지 않고 끝까지 다 추적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뒤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이스르엘이 나오지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라고 나오는데 그 사람이 자기 포도원을 자기 생계수단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은 누가 줬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조상이 준 것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해요. 그 땅 자체가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력과 하나님의 전쟁의 승리의 전리품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땅을 피자 나누듯이 나눌 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지파, 그 집안에 대대로 계속 하늘나라가 올 때까지 전달, 전달될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탐을 냈느냐 하면, 북쪽 나라 임금 아합이 그 포도원에 그렇게 탐을 낸 거예요. 탐을 내서 거래하자고 나섭니다. 하나님이 있든지 말든지 그것은 관계없어요, 이 왕은.

나봇 보고 “야, 값을 더 쳐줄 테니 그 땅을 나에게 팔아라. 다른데 있는 더 넓고 더 좋은 포도밭을 대신 줄게. 됐나!”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 때 나봇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주신 것은 못 팝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못 팝니다.” 일언지하에 잘라버렸어요. ‘네가 왕이면 왕이지 어디서 하나님 것을 손대.’ 그런 식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아합 자기 말은 안 먹어주는데 그의 아내가 있어요. 그 아내가 아주 최 순실이에요. 대단한 여장부고 눈에 뵈는 것이 없어요. 그 이름이 이세벨인데 이세벨의 눈에 어긋난다 하면, 그 즉시 사형입니다. 남편 이건 허수아비에요. 여자가 남편을 쥐고 흔드는데 이 이세벨은 이스라엘 나라에 억한 감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믿거든요. 그런데 이 이세벨은 여호와를 안 믿어요. 바알과 아세라, 다른 신을 믿어요. 나라의 정신은 ‘여호와 믿자’ 지만 거기에 시집왔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신을 안 믿고 여호와 신을 믿어야 된다는 그 강박관념이 있어서 이세벨은 항상 이스라엘 자체에 대해서 원한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뭘 장려하느냐? 여호와 말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매우 양성을 했어요. 그걸 누가 곧이들었느냐 하면 아합이 곧이들어서 임금이 나서서 바알과 아세라를 전파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거든요. 리 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신자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니까 나중에 균형 맞추자 해서 ‘부처님 오신 날’도 하나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백성들 눈치를 봐서 백성들이 원하는 것 해주고, 사탕 줘서 달래는 식으로 하면 나라 잘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이것은 오랜 세월 후에 변질된 이스라엘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 이세벨이 사주를 해서 한 마디로 “죽여라” 그렇게 되었어요. “죽이고 빼앗자. 죽일 때 그냥 빼앗으면 안 되니까 왕을 험담했다고 모함해서 죽이자.” 그래서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어요.

빼앗아놓고 ‘내가 왕이다. 그래서 내가 빼앗았다. 그래, 뭘 어쩔래? 달려들어, 달려들라고. 해볼래? 누가 이기는지? 내가 빼앗았다. 어쩌라고! 내가 왕인데. 나, 왕이야.’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있으나마나한 나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을 줄 몰랐지요. 그 선지자 이름이 뭐냐?

엘리야 선지자가 나서서 아합을 보고 하는 말이 열왕기상 21장 1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그리고 이세벨에 대해서도 23절부터 나오는데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이미 죽고 난 뒤에 개가 뜯어먹든 말든 아픈 것도 모를 텐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할 텐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역사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옥에서 왜 너희들이 꼭 이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의 그 기준을 하나님이 이 역사의 지평에서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아합과 이세벨이 왜 저주받느냐 하면, 하나님의 것을 빼앗자는 계산이 머리에서 팍팍 돌아간 거예요.

그래서 나봇에 대해서는 ‘왕이 팔라고 한 것을 팔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 땅을 왕에게 팔아야 해.’ 이런 계산을 안했어요. “하나님의 것이니 못 팝니다. 끝.” 이것은 당신이 왕이든 뭐든 돈을, 값을 쳐주든 말든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것이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나는 이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계산하지 않으렵니다. 옷이고 이 몸통이고 다 하나님의 것이니까 내 몸을,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나는 계산하지 않으렵니다. 주께서 이끄는 대로 살겠습니다.” 이것을 나봇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천국 가는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것을 공격하는 저쪽은 지옥 가는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천국 지옥이 어디 있느냐, 하지 마세요. 천국 지옥의 기준은 이미 이스라엘 평지, 그 땅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죽은 나봇이 어떻게 복수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오늘 본문 호세아 4절에 나오는 이름인데 그 예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등장할 때 예후라는 이 사람도 그냥 복수의 칼날이나 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똑같은 사람인데 열왕기하 9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과 통하는 선지자인데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선지자가 등장해서 가만히 있는 예후를 건드려서 “너 왕 해라. 네가 왕이야.”라고 했어요. 그 당시에 이미 요람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이 있는데 예후는 하나의 장군이거든요. 군대의 그 장교를 보고 네가 왕이 되라고 하니까 이 사람이 좋아서 발작을 한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2학년 2반 반장이 있어요. 반장이 있어서 지금 활동을 잘하고 있는데 어떤 선생님이 오셔서 앞에 있는 애 보고 “야, 오늘부터 네가 반장해. 완장 네가 차고 네가 반장해라.”

이러면 그 애가 “난 안합니다. 우리 반에 이미 반장이 있는데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 제가 하겠습니다. 그 애 죽이고 내가 반장하겠습니다.” 이런 식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불을 지른 겁니다. 예후라는 사람이 나서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명분을 받아요. 무슨 명분이냐? ‘이 북쪽 이스라엘 아합왕의 가문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때문에 필히 내 손에 죽으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를 했다.’라는 것을 빌미로 해서 다 죽여 버립니다.

다 죽이는데 이 예후라는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냐? 또 계산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저걸 잡아 죽이면 권력을 내손에 쥐었을 때 북쪽 이스라엘의 나에 대한 반발심이 얼마나 적어지겠느냐? 단호하게 단칼에 쳐야 저 정치적인 적들이 끽소리 못하고 나를 대적하는 힘을 안 모을 것이다.’ 명분은 여호와고, 실리는 내가 권력을 쥐겠다는 것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 있지요. 침을 당하는 그 인간이나 치는 예후나 둘 다 마찬가지에요. 계산하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하겠어요. 호세아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염소새끼 낳듯이 애 계속 까는 거예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음란하든 나중에 천재자식을 낳든 나 몰라. 하나님이 벌써 계획 잡아서 순풍순풍 낳게 했다면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그런 식이에요.

그러나 그 계산 없는 쪽이 누굴 공격하느냐? 계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쳐버립니다. 그 가정이 바로 호세아가정이에요. 선지자가정입니다. 선지자가정이니까 칼을 갈고 탱크 만들고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선지자는 말로써 주의 뜻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 태어난 2남 1녀도 이스라엘의 그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큰 아들 이름이 이스르엘이지요. 이스르엘은 평지 이름이고요.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고멜이 잉태하여 또 딸을 낳았습니다. 음란한 여자인데 자식은 잘도 낳습니다. 그 딸 이름을 하나님이 지시합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이름을 그렇게 하나님이 정했어요. 아버지나 엄마가 정한 것이 아니고요.

로루하마라 하는 뜻은 ‘절대로 긍휼을 받지 못할 족속’이라는 뜻이에요. 설명이 6절에 나와 있지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노시는 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팔짱끼고 쳐다보시는 분 아니에요. 지금도 이 시대에 선지자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의 기준을, 지옥과 천국의 기준을 지금도 맹렬하게 전합니다.

지금의 선지자가 바로 성도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면요. 계산하면 안 되고요. 그리고 죄인인 입장 같으면 여유부리지 말고, 군소리 하지 말고 인생 사세요. 뭘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안도와주고 어쩌고, 그런 쓸데없는 군소리하지 말고 어차피 하나님께서 선지자기능을 하게 하시고 또 어차피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이 세상을 잊고 떠나라는 뜻이에요. 이 세상은 저주의 바다니까.

이 저주의 바다, 지옥의 바다거든요. 여기에 어떤 변화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단지 용서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로루하마, 용서받지 못한다. 이것보다 더 큰 저주는 없는 겁니다. 여러분, 학교 다니는 친구보고 “친구야, 할 말 있거든. 너 절에 다닌다면서?” “그래, 절에 다니지.” “너 하나님한테 용서받지 못해. 무섭지, 무섭지, 무섭지?” 하면 ‘이게 미쳤나?’

왜 그러냐 하면, 이 저주의 바다, 지옥의 이 바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특징이에요. 하나님은 있으나마나고요. 뒷방 할배처럼 무능하게 보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랑받아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저주받고 있다는 것도 몰라요.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사람이 최대의 기쁨을 얻게 되면 다른 기쁨을 안 찾게 될 거예요. 하나님의 용서받은 진짜 큰 기쁨을 받게 되면 그 기쁨보다 큰 행복은 없거든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보내는 것은 일부러 저주를 강조하고, 계속해서 집안 자체를 저주의 집안 만드는 것은, 이 세상에 긍휼을 받고 용서받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것을 그 당시 이스라엘을 통해서 넓게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 호세아를 보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것을 우리가 받았으면 우리는 더 이상 얍삽하게 나 하나의 행복을 위해서 통박 굴리고 계산에 열중하는,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스트레스 받는 불상사는 일어날 필요가 없어요. 어떤 짓거리도, 어떤 짓을 해도 용서가 된다면 이것이 천국의 기준입니다.

그걸 호세아에서 ‘긍휼함을 입었다’고 하는 겁니다. 긍휼함을 입은 자만 천국 간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로루하마라는 딸을 호세아가정에 태어나게 하고, ‘저 딸은 절대로 긍휼함을 입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비해서 강조하는 겁니다. 강조를 하되 대비시켜서 강조하는 거예요. “너는 저 딸처럼 되어도 좋아? 저게 지금의 북 이스라엘 형편이야.”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모르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행복한 줄 알아요. 그러나 저 한구석에 선지자가정에서 다시는 저주받지 못한다는 이름을 가진 딸애가 태어났다면 그것은 어떤 징조로 봐야지요. 이름도 길기도 길어요. 다시는 긍휼함을 받지 못한다. 이게 몇 자에요? 한국말 번역이. “얘야, 물 떠오너라.” 그렇게 하지 않고 “다시는 긍휼함을 받지 못하는 애야. 물 떠오너라.” 그렇게 되거든요.

또 여기에 아들을 낳습니다. 8절에 보니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내 백성 아닌 것을 하나님께서 낳았다는 말은, 지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계획은 차질 없이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요즘 세상이 정치, 경제, 문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복잡한데,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 없어요.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당신의 끝은 지옥입니까? 당신의 끝은 천국입니까? 당신의 끝은 어디로 통합니까? 지옥으로 통하는 사람이에요, 천국으로 통하는 사람입니까?” 그게 관건이고 그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착하게 살까요? 이 저주의 바다에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성립이 안돼요. 듣고 배운 것이 전부 다 계산하는 것만 배워서 주님한테 모든 것을 맡기는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지요. 백 프로 없지요. 우리는 철딱서니 없이 세상 좋다고, 그게 귀하다고, 그게 있어야 행복하다고 그거 좆다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영을 받아서, 십자가 피가 뭔지를 알아서, 십자가 피로 어떤 죄도 긍휼함을 입고 용서를 받는다면 그 십자가 피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하는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저주 세상속에 허우적대면서 산다는 것을 기쁨으로 깨닫게 되고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저주에서 어떤 계산도 우리 형편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계산을 할 필요도 없어요. 다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이 주신 이 긍휼, 십자가의 긍휼을 잊지 않고 살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가 괜히 있지 않음을 저희들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 다 계산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잘나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함을 입어서 하늘나라에 합류하게 된 것을 최고의 기쁨과, 자랑과, 복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강-호 1장 2절(호세아 가정)190807-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4
게시물8,134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공지   [책]2020 신간 '말씀의 움직임'출간&구입안내 최지영 19-12-09 68
공지   겨울수련회 안내 관리자 19-11-03 263
공지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근호목사님 저서를 다량 구입했… 관리자 18-08-25 1277
공지   이스라엘 유적 답사 동영상 (1) 이근호 18-03-10 1489
공지   십자가마을(도서출판)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김종인 17-05-29 2271
공지   실시간 생방송 새주소 입니다. 관리자 17-02-19 7323
8646   19강-호 5장 3-5절(언약적간음)191211-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12-12 21
8645   20191209b 부산강의 : [시편]24(16편)-분란 한윤범 19-12-11 22
8644   20191209a 부산강의 : [시편]24(16편)-분란 한윤범 19-12-11 27
8643   사을 강의 안내 이미아 19-12-10 27
8642   안양 모임 안내(12.12.목) 공은주 19-12-09 25
8641   53강-엡 5장 20-21(감사와 복종)191208-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12-09 37
8640   20191206b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 한윤범 19-12-09 23
8639   20191206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 한윤범 19-12-09 29
8638   8강-욥기 2장 7~10절(운명과 주체) 20191208-이 근호 … 송민선 19-12-08 33
8637   범사에 감사 (1) 송민선 19-12-08 80
8636   부산 성경공부 안내 서경수 19-12-08 18
8635   주일학교 설교 / 바다에서의 전도 / 191208 정인순 19-12-08 18
8634   부산 주례사 191207 이근호 19-12-07 68
8633   광주강의20191129b 마가복음14장 32-42절(겟세마네 기… 이미아 19-12-05 35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