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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9 16:35:07 조회 : 53         
20190906b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목숨과 생명 이름 : 한윤범(IP:119.192.174.75)
20190906b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목숨과 생명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을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는 제사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요. 이 말은 제사 앞에서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마귀한테 속아서 벌벌 떨고 아버지, 예수님 부른다고 아버지 어떻게 생겼는지 주님 앞에 제사 앞에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왜냐하면 내가 나답다는 것은 그걸 어려운 말로 정체성이라 하는데 나는 이 정도야, 이런 인간이 나야, 라고 그게 자기의 정체, 자기 본체를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은 개인의 정체, 본체를 인정하지 않고 집단적인 정체성을 위해서 제사 의미를 거기다가 심어놓고 그 절기에 총집합하게 돼있어요. 모든 사람은 몽땅 절기에 참석하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절기가 한 번만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많으냐? 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아까 제가 언급을 했는데 하나님의 일은 빈칸이 없습니다. 쉬엄쉬엄이 없고 띄엄띄엄이 없고 연결돼있거든요. 하나님의 일이. 7월 달에 안식을 위해서 1월부터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반복해서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대 속죄일을 겨냥해서.

아까 대 속죄일일 몇 번째였지요? 또 하면 되지. 유월절-무교절-초실절-맥추절(오순절)-나팔절, 여섯 번째가 대 속죄일, 7월 10일. 그 다음에 일곱 번째가 초막절, 7월 15일부터 21일까지가 초막절이에요. 이것이 1년 동안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빈칸이 없어요. 계속 쭈우욱 산을 오르듯이 윙~하고 추진력을 더 높이고 가속도를 높이는 거예요, 지금. 어디까지? 대 속죄일까지.

초막절은 텐트 치는 거거든요. 대 속죄일 지나고 난 뒤에 우리가 옛날에 이 약속의 땅에 오기 전에 어떠한 생활을 했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23장 22절에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주목한다 했습니까? 땅주인한테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땅이 없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한테 주목하지요. 초막이 뭐냐 하면, 초막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객이 되고 가난한 자가 되는 그런 체험하는 기간을 일주일 갖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상해보세요. 그 이스라엘 나라가 해야 될 일이 뭔지를. 지금까지 절기를 들었잖아요. 도대체 그들은 하는 짓이 무슨 왜 그 짓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 그들이 사는 이유가 뭔지, 목적이 뭔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다른 민족은 목숨 부지하지 위해서 자기 살기 위해서 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 그렇게 행동하지요? 자기를 보이기 위함입니까, 누구를 보이기 위함이에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애썼고 이렇게 동행하셨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 역할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성도다 이 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흔들리지 마세요. 혼란스럽게 여기지 마세요. 딱 하나에요. 자기 증거하지 않는다는 것. 나 이렇게 고생했다고 자기 증거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집단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런저런 일을 했다. 어떤 일? 유월절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 오순절에 벼가 다 무르익었거든요. 추수할 때 됐으니까. 그 다음에 나팔절, 그 다음에 대 속죄일, 그 다음에 초막절. 그 날이 자신의 어떤 행복이나 편리를 위함이 아니에요.

자 그렇다면 나팔절, 나팔은 왜 부는가? 이제 설명할 때가 됐어요. 나팔의 용도는 싸움이고 더 어려운 말로 ‘싸움+승리’에요. 싸움하고 승리는 미뤄지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하게 되면, 승리를 위한 싸움을 하는 나라가 우리 이스라엘 나라다. 승리를 위한 싸움이다. 승리는 따 논 당상이에요.

왜 이렇게 승리해야 되는지 보여주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움직이는데 이방민족 속으로 움직여 들어갑니다. 이방민족들이 있으면 그 속을 통과하는 거예요. 통과하면서 싸울 때 되면 나팔을 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나팔은 한 번 붙어보자는 나팔이 아니고 이미 끝났다, 이미 이겼어, 라는 나팔.

승리하게 되면 슬픕니까, 기쁩니까? 기쁘죠. 그래서 기쁜 소식, 복음이에요. 복음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한 번 해봐라가 아니라 끝났네. 복음은 끝났네, 에요. 그러니까 기쁘지요.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내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나의 본질이 아니고 나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냈다. 어떤 취지를 가지고 어떤 희생을 하시고 건져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제가 빈칸이 없다고 했지요. 더 쉬운 말로 하면, 주님 앞에 다른 현실은 없다. 모든 것이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현실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울산바닥은 누가 만들고 누가 이끌어 가십니까? 주님이 만드시고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현실이에요. 울산에서.

온 사방이 눈밭이고 어젯밤에 눈이 왔다 치고 완전히 눈으로 싸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내가 저쪽 마을로 가는데 눈 안 밟고 가는 방법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신체를 안 밟고 가는 방법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안 건드리고 가는 방법 없습니다. 왜? 사방에 눈이니까. 하나님의 승리가 꽉 차있으니까. 물론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생명 없는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자 깔아놓은 은혜의 벌판이에요. 은혜의 눈밭. 그런데 우리는 매일 살면서 그걸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거기서 고마움이나 기쁨도 없고 짜증 지대로 짜증만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건 우리의 정체성이 없고 나의 정체성으로 전환됐기 때문에 그래요.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것, 내 목숨만 부지되면 그만이다. 이거는 유지되지 않아야 될 정체성인데 나의 본질인데 이걸 계속 쥐면서 이것과 주님이 하신 눈밭과 주께서 만드신 현실을 억지로 내 행복을 위해서 끼어맞추려고 하니까 이게 됩니까? 안 맞지요.

돈가스 집을 내서 장사를 하려하니 젊은 사람이 안 와. 이제는 칠천 원짜리 돼지고기 덮어주는 걸로 바꾸고. 그것도 장사 안 되면 그 다음에 뭐 하려고? 뭘 할지 모르지요. 매 생각하는 게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고요, 왜 존재하는지 모르고. 이 말은 뭐예요? 살아서 뭘 할지 이유도 모르고요. 혼자 부스럭거리면서 살긴 사는데 이유가 없어요.

결국 이건 근본적으로 자기한테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요. 이 현대인들이. 내 잘못이 뭔지 몰라요. 레위기를 옆에 두고도 몰라요. 레위기 23장을 옆에 두고도 몰라요. 절기가 있는데 그 절기가 왜 있는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맥추절을 왜 지키는지 전혀 몰라요.

만약에 그렇게 자기만 생각하다 교회 오면, 맥추절 지키면 제 개인적으로 행복해질 거야. 또 자기 행복을. 성경말씀을 지키면 개인적으로 잘 될까 싶어서 또 그런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걸 아까 주술이라 하고, 그걸 만약에 붙인다면 부적. 교회 다니는 게 실제로는 부적됐어.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교회 다니니까.

그렇다면 제사를,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첫째 시간에 한 걸 정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복습이니까. 여러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땅이 있는데 땅주인이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추수할 때 100을 줬다면 90은 땅의 주인 것이고 10은 땅이 없는 사람의 몫이지요. 주님께서는 90을 보는 게 아니고 10을 먹어야 될 사람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왜냐하면 사람이 넉넉하게 되면 자기 목숨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요. 지 목숨 살면 되지 생명까지. 여기에 정신 팔리면 생명에 관심 없어요.

그런데 목숨은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나 이렇게 살았다가 들어있는 반면에 생명은 뭐냐 하면, 나는 죽을 인간인데, 객과 가난한 사람은 가장 죽음에 근접한 사람이에요. 죽음을 보여주는 사람이고 넉넉한 사람은 뭘 보여준다? 신난다를 보여주죠. 나 이만큼 넉넉하다는 걸 보여주겠지요. 부자들은. 나는 죽음하고 거리가 멀다는 걸 보여주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관심사가 돼요. 객과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지요. 부자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어요. 왜? 넉넉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나님이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는 쪽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죽음을 반복하는 형식이 바로 제사고, 제사하는 날이 절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절기는 쭉 이어져오면서 이스라엘이 하는 거죠. 이스라엘이 하면서 하나님 제사 앞에서는 인간의 개인적인 것을 일체 묻지 않지요. 그 이유가 뭐냐? 7월 10일은 어떤 날이었습니까? 대 속죄일이죠. 대 속죄일은 본인이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도 그 날은 용서받는 거예요. 신기하지요.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도 이미 용서가 되는 날이에요. 일괄적으로.

그 취지나 유월절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안 내리고 봐주고 넘어가는 취지나 서로 통하고 있는 거예요. 유월절부터 시작한 것이 어디서 완성됩니까? 대 속죄일로 구체화되는 거예요. 다만 유월절은 희생이 어린양이지만 대 속죄일은 이스라엘 집단을 위한 희생제물은 양이 아니고 양 단위가 아닙니다. 더 비싼 것 드려요. 더 크고 비싼 것, 흔치 않는 것, 소를 잡습니다. 그 소가 대 속죄일에 언약궤 뚜껑에 바르면 일괄해서 완전히 죄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는 일체 인간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안 받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에서 생명으로 전환돼야 되지 않습니까? 전환되려면 그냥 내 목숨 살려주세요, 생명이여. 할 순 없고 이 목숨이 죽음에 다 블랙홀처럼 빠져야 돼요. 그러면 나라는 것은 제사 앞에서 집단적으로 소멸돼야 됩니다. 소멸되면서 그 동안 내가 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행동에 조심했잖아요. 이것 하면 벌 받아. 이건 나쁜 짓이야. 이건 착한 짓이니까 복. 그 모든 두근거림과 조마조마함과 그리고 윤리, 도덕적으로 신경 쓰이는 것이 일거에 다 날아가야 돼요. 그 의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 의도 자체가 내가 구원받기 위한 의도기 때문에 제사의 취지와 안 맞습니다. 제사는 집단적인 정체성을 주지 개인적으로 괜찮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제사와 절기는 인간들의 사적인 행동을 묻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배제해버려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괜히 우리가 사적으로 잘못했느니, 잘했느니 완전히 우울증, 조울증처럼 좋았다가 울었다가, 울었다가 기뻤다가 혼자 좋고 혼자 까불고 혼자 롤러코스트를 타고 다녀요. 매일같이. 불상사 일어나면 착한 일하면 만회해주시겠습니까, 보상해주시겠습니까? 지가 법을 만들어서 지 마음대로 하는데 그래봤자 그 결과는 사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제사에 모으고 그 다음에 전쟁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전쟁에 나설 때 그 전쟁은 어떤 전쟁입니까? 승리를 위해서 해보는 겁니까, 아니면 이미 승리했기에 치르는 전쟁입니까? 이미 승리자 입장에서 하는 전쟁이에요. 승리된 상태에서 벌이는 전쟁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승리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승리죠.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가 와서 애굽 사람들이나 히브리 사람들이나 어린양의 피 없는 사람은 다 죽였지요. 여러분 전쟁이 좀 비겁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세상에 낮에 지진이 일어나면 덜 죽어요. 흔들려도 낮엔 피할 수 있는데 밤에 새벽 3시에 지진이 일어나게 되면 꼼짝 못하고 파묻혀 다 죽어요.

미국에서 유람선에 35명인가 탔는데 몽땅 다 죽었어요. 왜? 새벽 3시에 불났거든요. 전부 다 선실에서 자고 있었어요. 문은 닫혔지 그대로 다 죽었어요. 아무도 깨어나지 못한 돌아다니지 않는 그 새벽 시간에 하나님께서 급습한 겁니다. 다만 잠 안 자고 있었던 가정이 있었지요. 뭐냐? 유월절 피를 바르고 양의 고기를 먹으며 밤샘했던 히브리인들은 살았지요. 그 취지가 신약에 깨어있으란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전쟁은 좀 비겁해요. 남자 대 남자가 아닙니다. 몰래 뒤에서 급습해서 전쟁에서 승리케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패배하기로 작정됐기 때문에 칼 들고 나서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전쟁의 취지는 뭐냐 하면, 유월절 취지를 계속 살려주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쪽에서는 발달된 철기문화의 칼 들고 나오고 많은 숫자의 군사가 나오고 옛날에 애굽에는 말이 유명했어요. 전투용 말이 있고 거기다 전차까지 온갖 인간의 발달된 무기를 들고 나오면 이스라엘이 내세울 무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전쟁 끝났는데 뭐. 이스라엘은 파장이거든요. 장사 끝났어. 이것 사세요, 저것 사세요, 할 것 없어요. 이미 끝났어요.

끝났다는 그 신호, 그게 뭐냐 하면, 나팔 부는 겁니다. 빰빠라밤빠 나팔 불면 여리고 성 완전히 다 무너지지요. 그 나팔 부는 걸 슬픈 소식이라 했습니까, 기쁜 소식이라 했습니까? 기쁜 소식, 그게 뭐냐? 복음이에요. 복음 앞에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홀로된 전쟁 우산 밑으로 우리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로 승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어야 될 분이 죽었는데 죽지 않고 죽음마저 이겨냈으니까.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러면 죽음이 마지막 무기였거든요. 악마가 내세운 무기는, “너 죽으면 실패야.” 죽음이 마지막 무긴데. 그래서 노인들이 늙고 아프면 겁내잖아요. 요양병원 안 가려하고. 죽음을 반겨야 될 텐데 안 반기고 벌벌 떠는 거예요. 자기 꼴이 망가진다고. 처음부터 망가진 꼴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호들갑떨기는.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산 사람이에요. 이미 산 입장에서 죽어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죽는 즐거움, 그렇다고 번개탄 고르지 마시고요. 매일매일 사는 것이 그냥 놔도 되는 날들이에요. 그냥 신경 안 써도 되는 날들, 고민할 필요 없는 날들.

이게 절기라는 시간은 안에 뭐가 기다리느냐? 바로 목숨에서 생명으로 전환되려면 여기서 반드시 죽어야 되는데 자살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이 죽음은 하나님의 절기, 하나님의 제사에 합류한 죽음이기 때문에 절기라는 시간 속에서 모든 인간은 절기 제사 앞에서 자기를 소멸시키는 기회를 갖습니다. 자기를 없애버리죠. 나는 없고 우리로 태어나는 거예요.

성도가 사적으로 거듭나는 건 없습니다. 나는 죽고 우리로 거듭나지 다시 개인적으로 거듭나는 건 없어요. 중생은 개인적이 아닙니다. 집단 중생이에요. 왜냐하면 나중에 죽었다가 깨어보니까 똑같은 혜택을 입은 사람이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명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주님의 복제라 합니다. 아바타들.

주님의 복제를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뭐냐? 주님의 복제기 때문에 그들 이름이 누구의 이름입니까? 바로 주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 그렇다고 여권 할 때 Jesus Christ라고 하지 마시고요. 이 세상은 안 통하니까. 예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여권 보니까 Jesus. 이건 뭐야? 성은? Christ. 말이 안 되지요. 세상에서 그건 안 통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을 상대할 땐 누구 이름으로 하라? 예수 이름으로. 그걸 실제적으로 하면 나 죽었다. “너, 나 죽이러 왔지? 그래 죽여라.” 이게 귀신 이기는 방법이에요.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면 귀신 안 물러갑니다. 그건 부적이고 그건 주술이죠. 그게 아니고, “죽었는데 아직도 더 죽을 게 있나?”이런 식으로.

마귀가 재미가 없지요. 네가 착해야 복을 받는다. 나 죽은 놈인데. 착하라고 요구한 마귀는 떠나버리죠. 네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데 착해야 된다. 이런 귀신 있잖아요. 착하고 뭐고 이미 게임 오버, 끝났거든요. 복음이 그거잖아요.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안 듣는 이유가 목숨 부지하는데 바빠서 복음을 못 듣는 거예요. 듣고자 하지도 않고. 목숨 부지할 때는 누굴 만난다 했습니까? 제사와 만납니까, 누굴 만납니까? 타인을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남 만나기 바빠요. “어서 오이소.” 이런 것. 남을 만나야 돈이 생기고 돈이 있어야 내 목숨 부지하니까. 하루 온종일 거기다 치중합니다. 몰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말씀은 언제 보고 복음은 언제 들어요. 들을 기회가 없지요. 내 목숨 부지한다고 사니까.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어렵다 해놓고 별로 어렵지 않다 하는데 진짜 이제부터 어려워요. 제사가 위기를 조장하고 위기를 초래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제사 지내면 최종 구원이 아니고 제사에서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이어져야 되거든요. 제사 지낼 때 레위기 23장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는 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게 툴툴 털어내야 돼요. 털어내야 될 사람은 털어내야 돼요.

터는 방법은 바로 나팔 부는 것, 전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쟁에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다른 이방민족과 전쟁하는 방법, 두 번째는 자기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방법. 내부전쟁. 그 내부전쟁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나중에 둘로 나눠지죠. 우리의 남북한처럼. 북쪽은 북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나라.

북쪽은 자력으로 이스라엘 나라답게 설칠 때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는 남쪽 유다의 유지는 인간의 힘이 아니고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하는 운반체 또는 운반책으로서의 유다가 있다고 약속이 살아있는 것은 바로 유다. 북쪽은 우리 힘으로 이 약속의 땅을 붙들어야 우리 목숨이 부지된다고 하는 것은 북이스라엘.

그러면 유다나라 백성들은 다 한 결 같이 이스라엘의 약속을 믿었는가? 아니요. 북쪽 못지않게 오히려 더 심하게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 신에 대해서 지난 수요일 호세아 설교 때 하고 있어요. 예수 찾는 게 요즘 바알이라고 설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남쪽 백성들이 훌륭하고 북쪽은 훌륭하지 않느냐? 그게 아니고 둘 다 마찬가지로 우상 섬깁니다.

그런데 왜 유다나라는 남고 북이스라엘은 잘리는가? 유다나라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이 사람들이 있어요. 선지자. 어떤 선지자? 문서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언약이 백성들이 안 받아주니까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 운반하지요. 그러면 선지자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할까요, 생명일까요?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하나님의 생명 노선에 가깝지 목숨 부지 노선에 가까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모습은 늘 아슬아슬해요.

그러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빈틈없는 일들로 꽉 채워져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사야 40장에 보면, 인간은 풀이고 꽃 같으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넘친다. 말씀의 바다에 파도가 넘실거리듯이 한시라도 말씀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선지자는 넓게 봐요. 넓게 보고 길게 보고 높이 보고 전체를 다 보고 살지요. 이게 선지자에요. 따라서 선지자에게는 세상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까짓 것, 뭐.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레위기 23장에서 제사, 절기죠. 제사 절기로 위기를 조장하고 초래한다 했어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장차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그 백성, 예수님이 용서한 백성을 찾기 위해서는 기존에 현재 혈육적인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제사 절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에 이스라엘의 제사 절기는 나중에 형식이 되고, 이게 주술이 돼요.

이 일을 되풀이하면 우리나라 잘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지켜주시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관심사가 하나님의 생명, 희생에는 관심이 없고 고난에도 관심 없고 현재 내가 터 잡고 사는 이 땅, 약속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길 원하는 겁니다. 누구 좋으라고? 자기들 좋으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생명을 생각 못하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집단적인 목숨 부지하는데 급급한 용도로써 여호와의 절기와 제사를 드렸던 거예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께서 안 받겠다는 겁니다. 어디 나오느냐? 이사야 1장에 나오지요. 너희들의 무수한 제물, 그리고 찬양, 기름 그만 가져와라. 내가 배부르다. 그 딴 게 무슨 소용 있나. 내 뜻은 모르고 내 취지는 모르고 형식적인 것, 재수 좋으라고 자꾸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는데

게다가 성가대까지 크게 해서 파이프오르간 10억 들여서 예배당에 설치하고 1부 성가대, 2부 성가대 하고. 노래하려고 오는지 예배드리려고 오는지 성가대 있어야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고. 봉사할 기회가 부여돼야 교회놀이에 맛이 들거든요. 교회놀이에 맛이 들면 소일거리 쏠쏠해요. 점심 주지요, 중요한 정보 교환할 수 있거든요.

김 집사, 서울대 가려면 인턴 뭐하면 돼? 동양대학에서 총장상 받으면 돼. 이런 식으로. 서울 교회들이 하는 정보 교환이 뭡니까? 과외는 어디 하면 되고, 미국 유학 가려면 뭐하면 되고. 아주머니들이 정보 얻지요. 유력한 부자들 많지요. 그게 바로 바알과 아세라 종교, 우상 종교 아닙니까.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쟁 중이란 걸 몰라요. 자꾸 위기를 초래하고 조장해버리면, 사람이 배부를 때 얼마든지 복음에 기뻐해요. 그러나 위기 오게 되고 초래하면 여기서 자기 본색이 툭 튀어나오는 겁니다.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레위기 23장 22절. 오늘 몇 번인지 모르겠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러니까 내 땅이라고 내 것이라 하지 말고 남겨두라. 남겨두는 이유가, 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데 그들이 객이고 나그네라는 거예요. 자, 그 사람들은 날 때부터 객이고 나그네고 고아고 가난한 자고 그랬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과부가 됐다는 것은 이미 그중에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전쟁을 벌였다는 거예요. 전쟁을 벌이니까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버리면 집에 있는 아내는 졸지에 과부되지요. 고아는 뭡니까? 남편 죽었다고 힘들여 일하다가 허리 다쳐 죽어버리면 아이들이 고아로 남지요. 고아와 과부는 전쟁의 부산물이에요.

고아와 과부는 누가 봐도 신세 조져놓은 거고 처량하게 보이겠죠. 하나님은 뭐 하시노. 하나님은 이들을 돌봐야지. 측은하게 여기고 동정하면서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만들어놨다고 보는 거예요.

출애굽기 22장 21절부터 보게 되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너희가 이스라엘 나라를 독립된 나라로 만들고 아무리 젖과 꿀이 풍성하게 나는 땅이라 할지라도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너를 나그네로 보고 고아로 보고 과부로 보는 그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신명기 8장 11절 보게 되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렇게 돼있지요.

하나님은 뭐냐? 너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고 가난한 자고 나 아니면 의미 없어, 라는 시선을 계속해서 부지하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갑자기 배부르고 좋은 집 짓고 우양이 번성하고, 요즘 같으면 재산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 신명기 8장 초반에 보면, 말씀을 잃어버리면 그거는 죽은 것이지 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양식을 잃은 것이 되어 그건 죽은 게 돼요. 그럼 왜 양식을 잃는가? 살만 하니까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걸 아까 읽었던 마음이 교만해서. 교만하게 되면 뭐냐? 신명기 8장 20절에 보게 되면, 내가 너희를 멸망한다는 거예요. 자, 신명기 이야기하면서 여러분들이 이걸 보면서 ①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 ②차려도 소용없다, 멸망한다. 몇 번입니까? 2번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배부르면 하나님한테 관심 덜 하게 돼있다는 거예요. 내가 네 본성을 모를 리가 있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해답은 신약까지 가야 돼요. 구약의 가나안 땅, 그게 천국이 아닙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니에요. 진짜 이스라엘은 신약에 가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돼버립니다. 자기 백성 다 마감이 돼버려요. 원서 마감하듯이 끝나버립니다.

그건 뭐냐 하면, 세리와 창기에요. 물론 세리와 창기 중에서도 부자도 있지만 그래도 세리는 세리고 창기는 창기에요. 그들은 자력으로 자기 의로 어떤 경우라도 내 잘나서 천국 가는 일은 아예 본성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한 사람입니다. 매일같이 그걸 경험하는 사람들이에요. 내 잘나서 천국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을 하루치 살면 그만큼 더 절감하고 또 하루치 살면 절감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그 관계를 견지하고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걸 유지하려면 어떻게 되느냐? 그게 전쟁이죠. 편안할 땐 전쟁이 아니죠. 우리한테 뭐가 온다? 위기 찾아오죠. 위기가 찾아올 때 자기 본색이 드러납니다. “안 돼. 이거는 안 돼. 주여 너무 심합니다.” 아니면, “옳거니. 그렇지. 요새 별 일 없다 싶더라. 요새 사는 게 조용하다 싶더라. 아무 아픈 것도 없고 고민거리도 없고. 내 이럴 줄 알았어.”

위기가 오고 항상 아홉 가지 해결하면 열 번째 일이 터지게 돼있고. 이 세상에 대해서 애착과 미련 갖지 못하도록 주께서 매일같이 흔들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흔들 때 가짜는 어떻게 됩니까? 우르르 다 떨어지겠지요.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의 기준이라 하는 것은, 천국 가는 기준뿐만 아니고 반드시 지옥 가는 기준을 증거하는 것도 전도라 했지요.

이래서 지옥 간다는 것, 이래서 너는 절대로 천국 못 간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는 기준이 흔들리지 말아야지 사람보고 사람 따라 천당 간다 이렇게 해선 안 된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당신은 구원받습니다가 아니라 기준이 이겁니다, 라고 기준점을 이야기해야 돼요. 기준점은 우리가 알 수 없어요.

8월 5일에 알았던 기준점은 8월 6일에 수정돼야 됩니다. 8월 6일에 알았던 기준점은 8월 7일에 수정돼야 돼요. 늘 새롭게 기준점이 바뀝니다. 그러면 어떤 특정 기준으로는 만약에 8월 5일 기준으로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8월 5일에 알았던 기준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건 안 돼요. 어떤 날짜라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기준은 아니에요. 주님의 복음의 기준이 내 기준을 대신해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이런 식으로 일괄되게 일하는구나. 그러면 됐지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내가라는 것을 여기다 집어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8월 5일 기준과 8월 6일 기준의 차이가 뭐냐? 여기서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새로운 위기가 오고 조장이 돼버리면 여기서 8월 5일에 몰랐던 내 죄를 8월 6일에 내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준은 뭐냐 하면,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십자가입니다. 8월 5일에 내가 아는 십자가와 8월 6일에 아는 십자가가 그게 급이 달라요. 느낌이 달라요.

그럼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걱정될 거예요. 8월 6일까지 가지 못하고 8월 5일에 죽어 버리면 지옥 갑니까, 천당 갑니까? 또 이렇게 걱정되겠지요. 문제는요 하나님은 기준을 살리기 위해서 8월 5일에 죽을 사람은 8월 5일에 다 죽였고요, 기준을 살리기 위해서 8월 6일에 죽을 인간은 8월 6일에 다 죽이는 거예요.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움직인다는 이 점을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돼요. 내가 움직이는 것은 움직임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님이 움직여요. 주님이 움직여서 8월 6일에 살려준다면 우린 사는 거고 8월 6일에 안 살려주면 죽는 거고. 그 권한은 주님한테 있어요.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고. 중요한 것은 8월 5일에 죽던 8월 6일에 죽던 우리는 뭘 봐야 돼요? 십자가를 봐야 돼요. 구원받은 내 모습 보지 말고 십자가를 봐야 된다고요.

목사님, 십자가 바라보라해도 또 나와 결합이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위기와 복음적으로 조성된 어떤 절박함은 뭐냐 하면, 그 순간만큼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날아가 버릴 때 이게 주님이 주신 위기에요. “그래 내가 살겠다는 이게 죄다. 아이고, 살면 뭐하노. 나는 안 살아도 돼요.” 이렇게 나올 때 관심사가 나에게서 뭐로 이동했습니까? 십자가로 이동하는 거예요. 내가 움직였다에서 나의 노동이 아니고 주님이 지금 일하고 있다는 그쪽으로 가는 겁니다. 시간이 3초 내지 5초밖에 안 돼서 5초 지나면 도로 다시 나한테 오는 게 문제지요.

그래서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구약에서는 갈수록 제사를 반복해요. 제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제사는 십자가로 끝났기 때문에 뭘 반복하느냐 하면, 성령의 일하심이 반복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성령이 한 번 오면 떠납니까, 안 떠납니까? 성령이 한 번 오면 떠나질 않아요. 이걸 성령의 보증이라 합니다. 고린도후서.

그런데 구약에서는 완료된 게 아니기 때문에 성신이 오더라도 떠나버려요. 성령은 한 번 오면 떠나지 않지만 성신은 한 번 사울에게 와도 악신이 오게 돼있어요. 악신이 오더라도 성신이 오게 되면 일하게 돼있어요. 사울 왕은 몇 번 성신 왔다가 몇 번 악신 들렸는지 몰라요. 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게 되면 떠나지 않는 이유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인식은 주님의 몸이란 인식은 없고 어디까지나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자꾸 쥐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하는 일은 간단해요. 어떤 위기를 주던지 어떤 계기를 주던지 내 인생이라는 게 없다. 니 몸이라는 것도 없어. 값으로 산 것으로 돼있으니 사나죽으나 주의 몸이지 남의 몸 붙들고 왜 그러냐. 자다보니까 남의 남편 붙들고 있어.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남의 아기 붙들고 내 애라 하는 것은 솔로몬 재판 때나 나오고. 남의 총장상을 지 총장상이라고 우기는 그런 부인도 있어요.

지금 세상을 닮다 보니까 남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 몸이라고 꾸미잖아요. 이 옷 어떠냐? 이 반지. 안 사주려했는데 가방 또 사줬다고 가방 보라 하는데 모든 집중이 나한테 집중돼있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 사단 나고 언제 삐걱거리느냐 하면, 예상 못할 위기가 왔을 때 우리는 갑자기 내 몸을 내가 지키려는데 시비 거니까 반발하지요.

주님, 이렇게 나오기 있어요? 제가 뭘 잘못했는데, 하고 자기 윤리, 도덕 다 끄집어내고. 이만큼 착한데 하다가 나중에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게 되면 계속 쥐어박고 정신 좀 차려라, 꿈 깨라, 하면 “주여, 내가 또 헛짓했군요. 쓸데없는 근심걱정을 했군요. 아버지도 내 아버지 아니고 어머니도 내 어머니 아니고 자식도 내 자식 아니고 다 주님이 주신 건데 내 것이라고 여겼던 잘못된 연결고리, 그것 끊게 하시고 다시 원래대로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내맡길 때

왜 주께서는 8월 5일에 안 죽이고 오늘 며칠입니까? 내일 태풍 오는데 9월 6일까지 이끄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내일은 몰라요. 죽을지 살지 몰라요. 몰라도 괜찮아요. 이미 오늘 나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보다 기준이 십자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챘으면 된 겁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란 것은 주님이 나를 다룬다는 것을 내가 아는 거예요. 주님이 원인이고 나는 결과물이죠. 결과물이 원인을 조정하려하지 마세요. 시건방지게. 주시면 주시는 대로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이고 복음인 겁니다.

자,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33절에 보면,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그겁니다.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35, 36절)

43절 봅시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아까 설명한 대로 초막절은 텐트 생활하는 거예요. 그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강의한 것 연결시켜보세요.

안정적인 사람인데 안정적인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무슨 생활을 한다, 잠시 동안? 초막생활을 한다는 이 말은 이 과정을 반복시키는 거예요. 광야에서 사용했던 초막이잖아요. 텐트 생활하던 데서 약속의 땅으로 올 때 우리가 지금 잃어버리고 놓친 게 있어요. 그 은혜를 놓쳤잖아요.

그럼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초막절을 지킨다는 말은 뭡니까? 약속을 약속답게 되풀이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다른 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걸 매일같이 되풀이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야기에요. 우리 일상이.

그러니까 내일 되면 또 초막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또 빨래해야 되고 어서 오이소, 해야 되고 사람들에게 아부하면서 한 푼이라도 더 빼내려 해야 되고 더럽다고 사표 낼까, 이런 경우 그것 초막입니다. 초막생활 실컷 해도 괜찮아요. 이미 우리의 생명은 천국에 가있기 때문에. 이왕 초막생활 할 것, 예 바보 되겠습니다. 돈 한 푼 준다는데 바보 안 될 것 뭐 있어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더 낮아지고 더 굴욕적이 되고 더 쪼다 되고 바보 되도 괜찮아요. 왜? 그것과 우리의 운명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서만 천국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 우리를 흔들었습니까? 내 인생 잘해야 천당 간다는 그 악마의 소리에 우리는 홀딱 넘어갔습니다. 좌지우지했고 흔들렸고 고민했고 걱정했습니다. 주여, 이게 다 악마의 장난인 것을 주술이고 부적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구원받는 것보다도 십자가의 그 기준을 기쁨으로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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