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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11:53:56 조회 : 64         
10강-호 3장 1-3절(값)191009-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59.116)
10강-호 3장 1-3절(값)1910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3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3: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전에 결혼한 적이 있던 전처를 값을 주고 사서 다시 되돌려옵니다. 그냥 빈손으로 “집에 가자.” 하고 손목 끌고 집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버린 아내가 지금 같이 지내고 있는 남자에게, 2절에 있는 대로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그 남자에게 주고 그 남자 품에 있는 자기전처를 다시 데려오라고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립니다.

은 열다섯 개와 한 호멜 반은 합쳐서 요즘 시세, 요즘 가격으로 하면 얼마쯤 되는가? 성인이 백일동안 일한 일당이 되겠습니다. 하루에 7만원 받는다 치면 7백만 원이라는 상당한 돈을 들여서 자기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름이 고멜이라고 되어 있고 호세아 1장에 보면 고멜이 호세아 선지자와 만나서 해야 될 일이 있었습니다. 아들 둘 그리고 딸 하나를 낳는 일을 하는 거예요. 호세아 1장에 보았듯이 아들을 낳아서 ‘이스르엘’이라고 하고, 또 딸을 낳았는데 ‘로루하마’라고 하고, 9절에 보면 또 아들을 낳았는데 ‘로암미’라, 이렇게 해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는 기능을 해야 될 여인이었습니다.

아들 둘 낳고 딸 낳고, 자기 남편 호세아를 버리고 옛날 했던 행세대로 다시 돌아가야 돼요. 왜냐하면 호세아 1장 2절에 보면 이 고멜이라는 여자는 어떤 여자냐 하면, 음란한 여자라고 되어 있어요. 질이 안 좋은 여자인데 호세아는 그 여자를 택하여 결혼을 했고, 그 여자는 아들 둘과 딸 하나 낳고 난 뒤에 다시 그 전의 행세대로 바람피우기 위해서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호세아의 전처를 데려오라 한 이유는, 고멜이라는 여자가 낳은 아들과 딸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그게 이스라엘을 뜻하는 겁니다. 이스르엘, 하나님이 직접 씨를 뿌렸다는 뜻이에요. 이스르엘, 쉽게 말해서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이지요. 이 말은, 이스라엘을 만드신 분이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지키신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르엘은 북쪽 이스라엘의 지명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이라는 다른 신을 섬겼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이 땅에 태어나게 한 백성이기 때문에 끝까지 책임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그 점을 좋아하지 말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들이 예상 못한 하나님의 독특한, 바알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고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에 주목하라는 이야기지요. 그것은 뭐냐? 정당한 남편이 집나간 아내를 두들겨 패서라도 데려올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의외로 남편이 값을 주고 아내를 데려와요.

크게 아내가 잘못했는데 실제로는 그 아내가 잘못한 값을 남편 되는 호세아가, 아무 잘못도 없는 남편 호세아가 대신 값을 치러서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는 이 과정 속에서,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고정인식을 여호와하나님께서는 철폐해 버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 벌을 받아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그 사고방식이 날라 가버려요. 그런 것은 이방신에게 통한다는 거예요. 흔히 신이라 하는 것이 이방신이거든요.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신은, 신 앞에서 내 잘못은 내가 책임져서 내 잘못을 내가 벌을 받아서 “이제 충분히 벌을 받았으니 나를 받아주겠지요?”라고 할 때 하나님과 인간은 원활한 관계가 된다.

그것은 세상사고방식이고 여호와하나님의 독특함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이 그런 주장을 하거든요. 그것과 차이난다는 거예요. 바알신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라는 말, 바알신을 번역하면 그냥 신이에요, 신을 섬기지 말고 세상에 없는 신을 믿으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들이 상상한, 그리고 인간들이 꾸준히 관습적으로 믿어왔던 그 하나님이, 그걸 치워버려라, 하는 거지요. 그것 말고 그것과 전혀 성격이 다른, 다른 속성을 가진 독특한, 오직 호세아선지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정체를 드러내는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라.

그 하나님이 “네 잘못에 대해서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만든 백성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친히 만든 백성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 할지라도 값을 치르는 쪽은, 범죄한 내가 알아서 내 죄를 치르는 것이 아니고 피해 입은 남편, 아무잘못도 없는 남편 쪽에서 7백만 원이라는,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값을 치르면서 자기 아내를 데려오는 그 과정을 한 번 주시해 보라.

그 속에서 장차 이 땅에 진정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성은, 호세아 선지자가 하는 행동 속에서 미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방식은 무슨 구조를 다 뭉개버리는가?

인간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있으니까 성의껏 정성을 다하여 자기진심을 다해서 하늘에 있는 상상의 하나님을 섬기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일방적인, 상식적인 하나님은 가짜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게 바알종교라는 거예요. 이방인들이나 아이디어 끄집어내서 믿는 신들이에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하나님자신의 본모습을 지니고 있는 어떤 특정사람을 보내주는 것부터 하나님은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거예요.

위를 쳐다보면서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누굴 보내셨는가? 동일한 인간이지만 독특한 인간, 같은 인간이지만 다른 인간을 찾아야 되지요. 그 계획은 창세기 12장에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3절을 읽어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니까 그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숭배하면서 우리가 착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나는 너와 거래하지 않는다. 너와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특정 인간을 보고 축복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인간에 대해서 “네가 뭔데? 네가 나와 다를 것이 뭐가 있는데? 너나 나나 똑같지.”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저주받는 거예요.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도 아주 수속이 복잡해요. 대구 땅에 있는데 미국 땅이라. 한국 사람은 그냥 못 들어가요. 수속 밟아야 돼요. 굉장히 복잡하다고요. 미군부대 안은 한국의 법이 적용되지 않고 무슨 법이냐? 미국법이 적용돼요. 그러면 미국법은 어디 있느냐? 아무리 봐도 안보이지요. 앞사람만 보이고 건물만 보이지 법은 안보이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촘촘한 어떤 법의 망이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거기서 담배꽁초 하나 버리면 헌병이 끝까지 쫓아와서 고발한다는 거지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법이 있듯이,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신을 상상해서 ‘하나님 잘하겠습니다.’ 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법이고, 그 법 말고 이미 보이지 않는 그물망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 이것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미 일을 시작한 거예요.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벌인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언약망이 촘촘하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잘했다, 착했다, 할 것이 아니라 그 망(罔)의 존재를 네가 인식하느냐?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착실하냐가 아니라 구체적인 어떤 인물에 대해서, 언약적인물이지요, 내가 그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브라함에 대해서 모르고 아브라함을 저주해버리면 그 사람은 지옥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어보면, 고린도후서 5장 1절,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굉장히 은혜롭거든요. 쉽게 해서 우리 몸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늘에 가면 우리 집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희망적인지 우리 마음을 부풀게 하지요. 문제는 뭐냐? 이런 희망을 갖고 나는 신자다, 나는 천당 간다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 장막집에 가려면 우리 인간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모르는 체 이 하늘나라 장막집에 들어갈 수 없어요.

인간자체가 개조되어야 된다고요. 변신되어야 돼요. 변신되고 개조되려면 그 모델이 뭐냐? 그게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날 축복하게 되면 그 사람이 천국가고 날 저주하면 지옥 가는 그런 대상자가 되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 앞에 착하게 살면 되지.’ 이것이 아니고.

‘하늘에 장막집, 우리 집이 있대. 이 땅에서 고생고생하다 죽으면 이 몸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 천국집에 들어가서 살면 된다.’ 라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고 거기에 들어가려면 인간자체가 언약에 맞춤, 아브라함 같은 존재로 달라져야 천국집에 갈 수가 있는 거예요.

이 몸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려서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냐? 아브라함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그 아브라함 속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대로 하면 호세아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호세아 속에 하나님의 지시가 들어 있어요. 인간 속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삽입되어 들어와야 된다는 말이지요.

아브라함 속에는 언약이 들어왔고 호세아속에도 하나님의 지시가 들어왔던 거예요. 호세아안에는 뭐가 들어왔느냐 하면, 저 더러운 여인을 값을 치르고 받아들이라는 지시가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호세아는 뭐냐? 그 자체가 값이에요, 값. 못된 여인의 죄를 대신하는 값이라는 요소가 호세아 선지자속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로마군병이 십자가에 예수님 달아놓고 창으로 찔렀지요. 찌를 때는 사람보고 찌른다고 찌른 겁니다. 찔러보니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들어 있는 거예요. 찌를 때는 사람인데 들어가 보니까 하나님을 찌른 거예요. 로마군병이 예수님의 손을 벌려서 못을 박았지요. 로마군병이 망치로 예수님 손에 못을 박을 때는 사람의 손바닥에 못을 박는다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 사람 속에 들어가면 예수님 안에 누가 계신가?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하나님의 손바닥에 구멍을 낸 거예요. 인간들이. 그러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몰라보고 그런 짓을 했으면 그 다음차례, 하나님은 인간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작살내는 거지요. 뭣도 몰랐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인줄을 몰랐던 거예요.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할 때에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봤지 그 사람 안에 언약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이처럼 언약이 들어 있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 장막집에 갈 수가 없어요. 이 텐트를 버리고 하늘나라 영원한 집에 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 그냥 몇 년 다녔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자체 안에 뭐가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호세아는 그걸 모델로 보여줘요. 네 안에 뭐가 들어왔느냐? 주님께서 네 죄를 치른 값이 들어와야 돼요. 값이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신약에 죄라고 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6장 19절, 20절에 보면, 너희 몸은 하나님의 지체다. 성령의 전이다.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값으로 샀다. 값을 치르고 산거예요. 호세아가 자기 부인을 값을 주고, 7백만 원을 주고 산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인간들만 천국에 집합되지 그렇지 않은 인간들은 못갑니다.

‘하나님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착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는 아브라함언약원칙에 어긋나요. 그것은 촘촘히 있는 보이지 않는 법망과 같지 않다니까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미군부대에서 한국 법은 소용없다고요. 미군부대 안에 보이지 않는 미국의 법이 있듯이 이 땅에 이미 천국의 법이 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값이 건드려서 그 값이 내 내면에 파고 들어와 있어야 이미 그 사람 속에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는다는 그 언약의 법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겁니다. 그렇게 그 언약이 법이 들어왔을 때 사람이 어떻게 개조되는가? 이렇게 개조되지요.

사도행전 9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절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일어나서 저를 둘러비추었지요. 그리고는 4절에, 사울이 땅에 엎드러집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자,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서 어떻게 달라졌느냐? 지금까지는 ‘내가 누구며 내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관심사가 자기구원에 대한 관심사, 내가 어떻게 복을 받는가, 나는 끝판에 천국 갈 거야, 지금 나는 천국 백성이다. 항상 관심사가 자기에 관한 관심사에요. 내가 얼마나 철저할 수 있고 완벽할 수 있는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얼마나 착할 수 있는가? 그런데 관심이 있는 거예요. 부산가면 나는 어느 대학 갈 수 있는가, 그런데 관심이 있다는 말이지요. 어떤 총각 만나서 결혼해서 팔자 고쳐볼까, 그런데 관심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어요. 질문자체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나는 죽어서 어느 나라 가느냐가 관심사가 아니라, “주여 누구십니까?”로 바뀌는 거예요. 이 변화, 이 개조, 그런 자만 구원받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하는 사람은 천국가고 ‘나는 장차 구원받을 걸?’ 하는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왜? 관심사가 자기밖에 없으니까. 관심사가 자기밖에 없는 것을 두고 단독성이라 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오늘날 교인들은 자기가 알아서 교회 왔고, 알아서 복 받고, 알아서 헌금했고, 알아서 전도했어요. 전부 다 자기가 알아서 다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가 안 나와요. 나올 수가 없어요.

“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는 질문이 안 나와요. ‘하나님이여, 저 착실하지요? 저 훌륭하지요? 대견하지요? 이만하면 괜찮은 존재지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상상으로 생각해서 자기 잘남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못남은 감추고.

1848년도 미국에서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당시 철도공사의 감독관 이름이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 1823-1860)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의 그 때 나이가 25살입니다. 이 사람이 다이너마이트를 다루다가 폭발사고나 났어요. 그 사람 얼굴로 쇠막대가 날라 와서 그 쇠막대가 왼쪽 뺨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머리까지 관통하고 말았어요. 그 쇠막대가 왼쪽 뺨을 뚫고 코를 지나서 두정엽이 있는 머리 위쪽으로 관통했어요. 사람들은 죽었다고 봤는데 어, 멀쩡해요.

분명히 멀쩡하다는 말이지요. 멀쩡한데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게 1848년에 일어난 사건인데요. 전두엽부분에 손상이 갈 때 인간의 성격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그 때부터 의사들이 모여서 연구를 했어요. 그 연구가 뇌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최초의 연구입니다.

뇌의 특정부분에 변화가 일어나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신경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본격적인 연구과제가 생긴 거예요. 마누라 패는 남자 병원에 가서 뇌수술 받으면 온순하게 된다는 거예요. 수술 받으면 간질도 낫게 된다는 식으로 본격적으로 전세계적으로 분석을 하게 된 거예요. 뇌의 어떤 특정부위는 어떤 성격을 나타낸다. 이걸 다 조사를 시작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왜하느냐? 성도라는 것은요, 왼쪽뺨에서 오른쪽 두뇌까지 십자가가 관통한 사람이에요. 관통해서 그걸 장착하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이질적인 거예요, 이질적인 것.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했잖아요. 사도바울에게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맨 날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정도면 율법 지켰지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으니까. “이만하면 율법적으로 괜찮지요? 저 사람보다 더 낫지요? 저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 내가 영광을 돌리지요? 내가 얼마나 잘났는데.” 맨 날 하는 소리가 자기 단도리, 단도리라는 말은 자기관리, 철저한 자기관리,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 하나님 믿는 사람답게 착하게 사는 것, 매일 생각하는 것이 그런 거예요.

‘내가 이정도 하면 얼추 괜찮은 사람이잖아.’ 맨 날 그것만 관리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와서 설교 들을 때는 그 부분만 듣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더 착해지고, 더 훌륭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쇠막대가 날라와 버렸어요. 십자가 쇠막대.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값입니다. 예수님의 피에요. 제 말이 아니고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은 뭐냐?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쇠막대가 전부 다 관통해서 그걸 장착한 사람들만 오라. 그래서 모든 질문이 “주님은 이런 분이다. 주님은 이런 분이야.” 주님이야기를 하는 모임 그게 교회입니다. 나 잘났다, 너 잘났다를 못하는 거지요. 전부 다 당했으니까.

전부 다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사건이 터졌으니까. 쇠막대를 장착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키가 작으냐, 얼마큼 배웠느냐, 한 달 소득이 얼마냐, 내가 총각이냐, 내가 결혼했느냐, 상관없어요. 내가 몇 년 교회 다녔느냐, 내가 집사냐, 장로냐, 목사냐, 관계없어요. 쇠막대가 날라 와서 꽂혔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쇠막대는 뭐냐? 음녀, 더러운 자, 세상을 향하던 그 모든 자들인데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웠던 그 값, 속죄값, 그게 바로 십자가, 그게 쇠막대고 그게 예수의 피로서 이 땅에 구체화된 거예요.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외에는 아무것도 안전했어요.

그 쇠막대 외에는 아무것도 안전했어요. 교회 부흥되기, 없습니다. 교회 키우기, 없어요. 복 받기,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이방신이에요. 여호와라는 이름의, 예수라는 이름의 이방신이고 예수라는 이름의 바알이에요. 성령이라는 이름의 바알종교를 믿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 믿고 지옥 가는 거예요. 교회 다니고 지옥 가는 거예요. 자기관리만 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관통한 그 자리는 뭐가 있겠습니까? 그 십자가가 속죄거든요. 지금 남편 되는 호세아가 값을 치렀다는 것, 그 값은 자기 아내의 죄진 값이거든요. 그러면, 값이 있다면,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 있다면 새삼스럽게 아내의 죄를 해석할 수 있는 해석권이 있어요. 그리고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왜? 값을 치렀으니까. 값이 먼저 있고 그 값의 비용에 따라서, 비로소 없던 죄가 그 값 때문에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 값이거든요. 예수님의 피 앞에서 죄 아닌 것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구제? 구제했다고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습니까? 간음 안했다고요? 마음속으로 간음 안했습니까? 맹세 안했다고요? 기도할 때 맹세 범벅으로 집어넣잖아요. “이거 주시면 이거 해 드리겠습니다.” 맹세하잖아요.

죄 아닌 것이 어디 있어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조국 물러가라고. 그것은 비판 아니에요? 호세아를 통해서 비로소 사람들이 몰랐던 하나님이 등장한 겁니다.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가 아니에요.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호세아를 통해서 값이라는 것을 나타냈고, 그 값으로부터 드디어 시발점이 되어서 세상의 죄를 낱낱이 노출시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었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의인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냥 말만 살아서 죄인이다, 죄인이다, 하지 마세요. 본격적으로, 경상도 말로 다 디빌거예요. 다 뒤져서 노출시킬 거예요. 기도하는 것도 죄, 헌금하는 것도 죄, 선교하는 것도 죄, 내가 설교하는 것도 죄, 강의하는 것도 죄,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왜 죄가 되느냐? 살아 있으면서 모든 질문을 ‘내가 지금 잘 살아있지?’ 자기한테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죄가 된다 이 말이지요. 마치 속죄값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스스로 잘해서 천당 가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가 죄가 되니까 그 쇠막대가 관통하는 흔적에 뭐가 있겠어요?

바로 인간의 자존심과 인간의 자긍심, 근본적인 독자성이 근본적인 죄로 노출되는 겁니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해도 스스로 혼자 힘으로 살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존심이 되고 마지막 자긍심이 되는 거예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면 그 사람이 일단은 인정합니다. “예, 죄인 맞지요. 옛날에 사업한다고 죄 많이 지었습니다.” “이것도 죄인데요.” 잠시 물러갑니다. “그것도 죄에요? 뭐 죄라고 인정해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죄인데요?” 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이 드디어 숨겨져 있던 자존감이 분노처럼 올라옵니다. “그것마저 죄라고 한다면 정말 당신 너무 심한 것 아니에요?”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걸 마지노선이라 하는 거예요.

나의 나다움을 마지막 버티는 그것, 진짜 이것만큼은 안 빼앗기겠다는 마지노선.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꼬챙이가지고 푹 쑤시면 됩니다. 푹 쑤시면 똥 나옵니다. 똥이라고 했다고 제가 험한 말 한다고 하지 마세요.

빌립보서 3장 8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7-9)

‘내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그동안 나라고, 내 것이라고 마지막 최후에 있던 그것은 바로 배설물이었다.’ 배설물을 한자로 하면 ‘똥’, 그게 배설물이었다. 똥, 오줌이었다. 마지막 쥐고 있는 그것이 뭘까요? 내 가정 지키기. 내 자존심 지키기. 자식 지키기. 내 외손자 지키기. 내 교회 지키기. 내 목사라는 감투 지키기. 나 신앙생활 몇 년 했다는 그것과 장로라는 것 지키기. 금융자산 지키기. 그동안 선행한 그것 지키기.

그것이 배설물입니다. 그것이 죄에요. 그것이 음녀에요. 아무것도 지키지 말라. 왜? 주께서 찾아오면 이제는 내가 나를 지킨다는 그런 모양새 내지 말라. 어디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막아섭니까? 인간이 뭔데, 내가 뭔데 하나님을 대신하리오?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이스라엘을 자기가 구원하겠다고 값을 치렀는데 왜 이스라엘이 나대고 설치냐 그 말입니다.

구원해주면 고맙다 하면 되지요. 꽂히면 돼요. 그림이라도 그렸으면 좋겠는데요. 왼쪽뺨으로 해서 머리끝까지 쇠막대기 걸치고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이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면 돼요. 뭔가 꽂힌 것만 자랑하면 돼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안다는 것은 뭘 알아요? 고린도전서 2장 2절, 나는 예수의 죽으심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무슨 할 말이 있어요? 이게 꽂혔는데! 날라 왔는데! 언약의 폭격이고 충격인데요, 이게! 여기서 왜 남편이 아내의 값을 치릅니까,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인 창세기 3장 16절에 보면, 여자가 선악과 먼저 따먹고 난 뒤에 벌칙이 주어집니다. 그 벌칙이, 너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너를 다스릴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남녀관계는 이 세상에 있을 때만 형성돼요. 죽고 나면 남녀가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자기 맘에 드는 여자가 있어서 죽자고 따라다녀 봐야, 천국 가서도 너와 결혼할거야, 해봐야 천국가게 되면 없는데요? 천국가게 되면 천사가 되어서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결혼 헛방이에요. 결혼 못해요.

남자와 여자로 구분한 것은 천국의 이미지를 이 땅에 나타내기 위해서 남자 여자로 해놓고 여자의 할 일과 남자의 할 일이 있어요. 여자들이 자기 자아됨, 아까 독자성이 죄라고 했지요, 독자적으로 나는 내식대로 살려고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찾는 것이 뭘까요? 그게 바로 노리개, 그 다음에 찾는 것이 자기의 옷 고르기입니다.

여자들이 옷을 고르는 것은 자기연출이에요. 자기가 자기에게 만족스러워서 옷을 고르지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옷을 고르는 것 아닙니다. 남자들이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어요. “잘 보이려고 짧은 치마 입었지?” 아니. 나는 내가 멋있어 보이려고 한 거예요. 거울 앞에 비친 내 모습이 멋있어서 입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되어 있느냐? 여자가 그런 식으로 혼자 살 수 있는데 성경은 그렇게 안 되어 있고 여자의 모든 운명은 남자가 책임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호세아가 집나간 아내의 값을 치르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는 남자가 아니고 그냥 값이에요 값. 속죄가 호세아가 음녀는 여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을 음녀라 하는 거예요.

호세아는 남자역할 했을 뿐이고 이스라엘은 여자역할 했을 뿐이고. 호세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우리들은 음녀로서 죄값을 스스로 치를 수 없고, 주께서 찾아와서 십자가라는 쇠창살을 날리는 그러한 대상자로서 구원받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예수 믿고 우리 힘으로 착하다, 훌륭하다 상상하면 안 됩니까? 이게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본심은 당구공 같아서 그 딱딱한 당구공에 좁쌀 놓아보세요. 양쪽으로 다 흘러내립니다. 인간의 자존심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강렬해요. 아까 제가 마지노선이라 했지요. 꼬챙이로 쑤시면 그 안에 뭐가 들었는가? 자긍심과 자존심이 들어 있어요. 최후까지 지키고 싶은 뭐가 있어요. 자아라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 이것은 내가 아무리 깨봐야 겉을 물청소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나는 지금 착하다. 나는 지금 때를 벗긴다.’ 당구공은 그대로 있고 교회 맨 날 오면서, ‘나는 착해야 돼. 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니까 그래, 거룩해야 돼.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나쁜 마음도 먹지 말고, 나쁜 태도나 나쁜 말 하지 말아야 돼.’

그런 것은 팔정도라 해서 불교에서 하는 거거든요. 불교인지 교회인지 분간도 안돼요. 항상 자기반성하고, 착한지 자기 돌아보고. 그게 천당 가는 성도가 할 일이라고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가르쳤고 그게 또 납득이 되네요. 자기가 훌륭하다는데. 그냥 그저 열심을 내지요. 이거 열심 낼 문제가 아닙니다.

주께서 다이너마이트 터뜨려서 어디서 날라온 지도 모르는 십자가가 날라 와서 나의 왼쪽뺨을 뚫을 때 갑자기 인간이 성격과 행동 모든 것이 달라져요. 전에는 나, 나, 나, 내 자존심, 나 잘났다, 내 것 지킨다, 하다가 갑자기 “주여, 주께서 이렇게 하셨지요. 내 인생 이렇게 망가뜨렸지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네 안에 나 있다. 네가 예수님 창으로 찌를 때 그냥 목수의 아들로 보고 찔렀지? 그 안에 하나님 들었는지 몰랐지? 너도 너 자신을 알아. 거울에 비치는 네가 전부가 아니야. 네 안에 나 들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전이라. 성령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계신다면 우리는 아브라함 같은 입장이에요. 누구든지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나를 저주하면 저주받는 거예요. 사람 가려가면서 저주하세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면 저주받는다고.

그런 대목이 안 보이는 모양이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 여러분이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가 아니라, 남이 건드리는 것에 관심도 없어요 성도는. 이거, 꽂힌 이것에 관심이 있어요.

사도바울은, 주께서 나를 다루는 거예요.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거예요. 교회 나오는 것도 모든 것은 주께서 인도하신 겁니다. 세상에, 고 3이 수요예배에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안가지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거지요. 벌써 고등학교 1학년만 되면 교회 끝나요. 부모가 말려서. 부모가 장로인지 집사인지 필요 없어요. “너 교회 나오지 마라.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교회 나와라. 그 때 청년회장도 해라.”

세상 교회가 그렇습니다. 자기 것 지키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요. 남한테 안 지려고, 승자가 되려고. 그게 음녀였어요. 당구공이 자기가 뭐가 문제인지 몰라요. 이게 쇠막대가 날라와서, 십자가가 날라와서 꽂혀봐야 ‘아, 내 인생은 주님이 알아서 책임지는구나.’ 하고 그 중앙부분, 내 자존심과 자긍심이 있는 그 중앙부분을 십자가가 다 차지하고 말았고, 예수의 피가 다 차지하고 말았어요.

따라서 우리의 평생은 즐겁게 이제는 내 죄가 매일같이, 나의 배설물이 십자가의 작용으로 흘러나오면 그게 바로 예수의 증인,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이고 천국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생활하면서 교회놀이하고 종교게임하면서 신앙이라고 우겼던 저희들, 천당간다고 착각했던 저희들, 그게 얼마나 헛짓이고 바알을 믿는 종교인지, 바알을 믿는 신앙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외칠 수 있도록, 혼자 살지 말고 주와 늘 동행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0강-호 3장 1-3절(값)191009-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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