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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1 00:02:42 조회 : 54         
42강-호 11장 1-4절(아들 만들기)20052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42강-호 11장 1-4절(아들 만들기)2005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1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5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1:1-4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로 그렇게 생각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자식 키우듯이 그런 식으로 키워왔다는 겁니다. 이걸 부성애라 하는데 아버지다움의 사랑, 그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그동안 아들답게 키운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아들이 아들답다고 한 것은 어떤 배경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바로 애굽이라는데서 불러낸 것으로 인하여 아들다움의 부합된다, 그렇게 하나님은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불러내올 때는 정말 아들다운 모습으로 불러냈는데 그들이 약속의 땅에 와서는 도리어 아들다운 면모가 사라지고 우상 앞에서, 바알들에게 제사하고,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했다고 2절에 나오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애굽에서 불러낼 때만 아들다웠고 그리고 바알들에게 제사할 때는 아들답지 않는 이유가 뭐냐? 바알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어떻게 아들답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느냐, 그걸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그냥 우리가 보통사람일 때는 자기아들이 pc방에도 갈 수 있고, 축구할 수도 있고, 공부할 수도 있지요. 공부해도 아들이고, pc방에 가도 아들이고, 놀아도, 밥을 먹어도 아들인데 한번 아들은 계속 아들인데, 아버지가 “너는 공부할 때만 아들이고 컴퓨터 게임할 때는 아들이 아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의아해할 거예요.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 모습 어디 갑니까? 그 모습, 그 자태가 있다면 아들인데 왜 환경에 따라서 아들인 경우가 있고 아들 아닌 경유가 왜 생기느냐? 그것이 굉장히 의아할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는, 애굽에서 부를 때는 거기서 아들다움의 맨 처음 자리, 처음의 자리의 성격이 애굽에서 불러내면서 그것이 또렷했고 뚜렷했습니다. 분명히 드러났어요. 애굽에서 불러낼 때는. 왜 그런가 하면 공부할 때는 내가 알아서 공부하고 게임할 때는 내가 게임하면 되는데 게임할 때는 아들 아니고 공부할 때는 아들이라 하면 납득이 안 되지요.

그러나 애굽에서 불러낼 때는요. 애굽에서 본인들이 나오고 싶지도 않았었고, 심지어 애굽에서 심한 노예로서의 학대를 받아도 그들은 애굽이라는 그 권력,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자들이었어요. ‘난 애굽에 살다가 가나안 땅에 살래. 내 자유야.’ 그렇게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한다는 그 말은, 이 세상에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정 짓는 거예요. 아들은 이 세상에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 없는데 없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자 하는 겁니다. 만드는 방법은 그 애굽이라는,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강력한 막강한 악의 힘이 먼저 작용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이 하나님 믿는다는, 여호와의 약속된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받는 학대라는 조건이 거기에 첨가가 되어 있어야 돼요. 노예로서 학대받아야 돼요. 그렇게 해서 거기 있는 히브리인들이 생각하기를, 학대받는 이 현실 말고 아예 다른 현실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돼요. 알고 있어야 돼요. 학대받더라도 다른 대안은 전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 현실의 전부는 바로 우리가 고통당하고 있는 이 세상일 뿐이다. 오직 그 세계뿐이에요.

만약 오늘날 어떤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가 좀 독특해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을 아무리 받아도 전혀 병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특이한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모든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신종코로나에 걸리면 아프게 되어 있고 나중에 심하면 죽게 되어 있다는 그것이 인간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에요.

그래서 애굽나라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 학대받는 자들도 생각했고 학대하는 애굽의 바로왕부터 모든 사람들도 생각하기를, 이 힘이 있는 세계 그 세계만이 가장 확실하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내가 너에게 노예생활하게 되면 그저 밥이라도 먹여주지만 노예생활 못하면 너는 내 손에 노예로서 죽는다. 그것뿐이야.’ 다른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은 아예 품을 수도 없고, 품을 재주도 없고, 다른 참고자료 같은 것이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어쩔 수 없이 애굽사람 밑에서 노예생활 했지요. 그래서 모세 아론이 구해준다 하니까 그것은 거짓말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자기가 아는 상식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이 세상 그것이 곧 처음 자리 유일한 현실의 자리라고 생각했지 그것 말고 다른 본래의 아들의 자리가 있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했을 때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낸다면 애굽의 세계가 전부인데 애굽세계에서 불러내서 다른 데로 가도 맨 애굽의 영향력 하에 있고, 애굽에서 살았던 그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광야에 살든 약속의 땅에 살든 그것은 똑같은 사고방식,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 역시 그것은 애굽의 확장이고 연장일 뿐이에요. 애굽과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는 것뿐만 아니고 애굽에 있으면서 상상도 못한 다른 세계의 삶의 방식을 하나님이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아, 참, 이건 구원을 받은 사람만 알지요. 구원 안 받은 사람은 오직 이 세상이 전부에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여기 2절에 보면 바알이라는 신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 바알을 우상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바알을 믿는 사람에게는 우상이 아니고 그냥 신이에요. 인간이 신을 믿든 또는 자진해서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든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은 애굽방식인데 애굽방식이 뭐냐? 세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내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모든 이치, 내가 아직 모르는 이치까지 포함해서 미리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이치와, 원리와, 일어나는 일들과, 사건들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역시 나는 잘났어. 나는 의로운 거야. 내 생각은 의로운 거야.’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은 있을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집대성하고 그걸 집중한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신이라는 거예요. 내가 믿는 신인 거예요. 내가 믿는 신은 신을 믿는 행위를 포함해서 그 신에다가 세상의 모든 원리를 다 집어넣는 이유는, 그 모든 원리가 들어 있는 신을 내가 믿는 나의 행위는 옳고, 정당하고, 의롭다는 것을, 바로 그 신이 나에게 옳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신을 믿는 것조차도 ‘나는 옳다. 나는 의롭다.’ 자기 의죠, ‘나는 의로운 존재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예요. 신을 믿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유는 모르겠는데 태어나면서 모든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똑같은 생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남을 깔보기 위해서 살아가요. 인간은 남을 깔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인간이 남을 깔볼 때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어요. 그래서 잘난 사람이 상처가 많아요. 자기 뜻대로 깔보이고 싶지 않아서. 자기는 남 깔보고 싶었는데, 그래야 그게 사는 재미고 즐거움인데 나의 사는 쾌락인 상대가 자기보다 좀 더 낫다, 내 뜻대로 안 움직인다 하면 심한 상처를 받아요. 상처를 받으면 몸이 아파요. 아무 일도 아닌데 몸이 아파요.

인간의 본성이, 나는 이유도 따지지 않고 나는 무조건 의로워야 되고, 나는 내 판단은 옳아야 된다는 것, 무조건 나는 잘나야 된다는 것. 그런데 나는 잘나야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 저쪽 상대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는 저쪽 상대를 죽이고 싶어요. ‘네가 왜 내 마음을 몰라?’ 죽이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인간은 왜 사느냐 남을 깔보는 재미로 산다. 그 외의 다른 재미는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사람을 깔보기 위해서. 태권도 배우고 깡패 질 하는 것은 남을 깔보기 위해서. 내가 힘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연예인들이 이혼하고, 싸움하고, 사업하다 망할 때 그것이 그렇게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은, 나보다 인물 잘생긴 놈이 나보다 낮춰졌다는데서 오는 반대효과에요. 마음적으로 반대보상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 탓을 할 수가 없으니까 맨 날 연예인 망하는 것 보면서 오늘 하루의 피곤을 다 푸는 겁니다. 박카스가 따로 없어요. 누구 망했다는 소식, 무슨 기억연대가 망했다는 그런 것이 기분이 너무 좋아. 모든 인간의 특징은 자기 신을 믿는데 그 신에게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집중해서 거기에 따 쏟아 붓는 거예요. 그 신은 자신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어떤 신을 쪼개보면 나는 이런 인간이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 신안에 뭐가 있느냐?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 모든 의미가 돌아오는, 그것을 어느 인간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보편성이에요.

애굽이라 하는 것, 아까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애굽세계의 생활방식과 세상을 보는 그것은 모든 인간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리고 그것뿐인, 다른 세계는 아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것이 전부에요. 애굽이라는 나라의 그 현실이. 따라서 그 나라에 속한 모든 인간은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음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애굽에서 있지도 않는 내 아들을 끄집어냈다는데 애굽에는 하나님의 아들은 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내 아들을 끄집어내면서 아들이 생긴 거예요. 여기서 약간 복잡한 논리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오늘 낮에 제가 라면을 먹는데 김치 없나, 하니까 제 아내가 일반김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일반김치 말고 보통김치 달라고 했어요.

자, 일반김치라 하는 것은 김치 일반으로서 모든 김치를 주도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일반김치, 그게 일반김치에요. 그런데 일반김치라 하는 것은 주로 배추김치를 말하지요. 물김치를 가지고 일반김치라 하지 않아요. 김치 일반은 배추김치가 주류고 간혹 물김치가 있다는 말이지요. 라면 끓이니까 일반김치를 주겠다고 한 거지요. 그래서 저는 일반김치 말고 보통김치를 달라고 했거든요.

일반김치하고 보통김치하고의 차이점이 뭐냐? 보통김치는 자체적으로 그 김치 말고 다른 김치와 비대칭적이라 해요. 레벨이 같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분류하는 거예요. 보통 김치라는 말을 할 때는 다른 어떤 비대칭적인 다른 김치가 있는데 그 차이성이 좀 고급 진 김치를 염두에 둔 것인데 그게 물김치에요. 그래서 물김치 말고 흔히 먹는 보통 김치를 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을 논리학에서 보통을 보편성이라 하고 일반을 일반성이라 하는 거예요. 일반성의 반대말을 다양성이라고 이야기하고 보편성의 반대말은 특수성이에요. 비대칭성.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 일반이나 보편이나 같은 뜻이 아니냐, 하는데 보통은 같은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을 이야기할 때 분명히 우상이라고 하거든요.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우상이지만 일반에서는 그냥 신이에요. 이스라엘은 여호와 네 신 믿고 나는 내 신 믿고 전부다 신들이 한두 개가 아니고 여러 가지 신들이 있기 때문에 그 신들을 사람들은 뭘 로 말하느냐? 일반적인 신들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신들이라고 보는 반면에 주님은 그것을 보편적인 신이라고 보는 거예요.

일반적인 신이라 하는 것은 ‘너도 신이고 나도 신이고 자기 믿고 싶은 것 믿으라. 그거 뭐 별 차이 없어.’ 왜 애굽만이 유일한 현실이니까. 애굽이라는 현실에 살면서 힘들 때 신에게 의지하는 것, 그것은 애굽의 모든 사람이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일반적인 일반신에서는 다양하지요. ‘다양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신이 그 신이고 그 신이 그 신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냥 넘어가지. 불교 기독교 천주교 여러 가지 있지만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 신이나 그 신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어디든 가면 된다.’ 이게 일반적인 신이에요. 거기는 우상이라는 것이 정립이 안돼요. 우상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것을 보편적인 신으로 봐버리면 특수한 신이 따로 등장해요. 그러면 그 특수한 신과 일반신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고 비대칭적, 같이 섞이지를 않아요. 섞이지를 않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일반적인 신을 믿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내가 정당하고 내가 의롭다는 것을 자기의 우주관,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주에 담아놓으면 그것이 신이거든요. 우주의 모든 이치를 신이 운행하니까.

신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세상에서 되는 어떤 일을 통해서라도 그 현장에서 ‘나는 역시 옳아. 나는 옳은 거야. 세상 모든 것은 내가 옳기 위해서 이 세상이 움직여주는 그것이 마땅한 거야.’ 그러니까 신을 믿으면서도 누가 신이냐 하면, 본인이 신이에요. 왜? 본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옳으니까. 그래야 남을 깔볼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고 그런 신들을 일반적인 신으로 보는데 반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의 신들을 보편성으로 보는 거예요. 보편성으로 봐버리면 그렇고 그런 신인데 그것은 어떤 기준점이 있는 거예요. 특수한 신의 기준점으로 봐서 그렇고 그런 아무 쓸데없는 신이라는 말이지요. 그 중 하나가 바알, 또는 바알들, 바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 모든 이치와 신들의 집중된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말미암아, 출발점을 자기로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특수한 신이 볼 때 인간이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처음 자리의 성격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적입니다. 악마적이지요. 내가 의롭다 여기는 그 자체가 우상의 심보 악마의 심보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대들기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나?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지. 다 잘난 맛에 살아.” 그러면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그렇지 않은 자도 있거든. 그렇지 않는 신도 있거든!”라고 하면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아들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은 신을 믿지만 이쪽은 뭐냐? 저쪽은 신에게 모든 것이 집합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아들에게 집합이 되어버려요. 이 세상에, 애굽에 없었던 새로운 그 무엇 그게 아들입니다. 세상신을 믿는 것도 헛되지만 아들 믿는 것도 헛되지 않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반론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낼 때 조용하게 밤에 몰래 끄집어낸 것이 아니에요. 한밤중에 완전히 대요란을 떨었어요.

훈련소나 군대 가서 제일 군인들이 힘든 것은 뭐냐? ‘밤에 잠 좀 자게 해줘.’ 밤에 연병장에서 벌주고 고요한 밤이 되어야 할 밤을 힘든 밤이 되게 만들어요. 출애굽이 애굽에서는 내무반장이 내무반 뒤집듯이 완전히 뒤집어놓은 밤이 되었어요. 그냥 추상적으로 이론적으로 애굽에서 여호와 믿고 조용히 나갔으면 아, 이것도, 여호와도 이론상 있는 가짜신이고 우리가 믿는 것은 물론 마음은 편하기 위해서, 믿지만 있는지 없는지 본적도 없고 그냥 믿는다, 라고 이야기가 평화롭게 끝나겠는데 그게 아니고 대요란을 떨었어요.

이쪽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기위해서 애굽의 바로왕부터 애굽에 있는 모든 애굽사람의 맏아들을 그날 밤에 다 죽여 버렸습니다. 실제적이에요. 팩트에요. 실제라니까요. 완전히 다큐멘터리에요. 픽션 아니에요. 조작된 것 아닙니다. 소설이 아니에요. 실제적으로 그들은 없는 신과 부딪히면서 난데없이 밤중에 새벽 2시 47분에 자기 아들이 죽었어요.

실제로, 실제로 죽었다고요. 하나님의 아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기껏 양 잡아서 피 발랐다는 물질성, 실제로 손에 만져지는 그 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랐다는 그것뿐인데 저쪽의 실제성은 뭐냐? 자기 가문을 이어야 될 자기 가족을 빛낼 아들이 죽어버렸어요.

그렇다면 이 무슨 이런 조화, 이런 난리가 있느냐? 도대체 숨겨져 있는 저 보이지 않는 신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일반적인 신과 달리 특수하게 실재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으면서 ‘오직 애굽같은 세상뿐이야. 그것뿐이야.’라는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자기의 본래의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본래의 자리에서 출발해야 되는데 시작도 안했어요.

시작은 하나님이 아들을 만드는 그 자리에, 인간들 본인들도 모르는 진짜 그 시작점은 그 아들에게 있어요. 아들에게 있다고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뉴스 보면서 n번방에서 누가 나쁜 짓을 하고, 누가 살인을 하고, 죽 나오면 “아주 흉악한 범죄, 저거 죽여라. 청와대 청원 넣어라. 죽이자.” 하고 비난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요, 그런 세상적인 윤리도덕이나 그들이 사고치고 사기 친 것 가지고 그렇게 비난하지 마세요.

왜? 어차피 그들은 아들이 아니잖아요. 아들이 아니라니까요. 그들은 일반적인 김치잖아요 특수한 물김치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나쁜 짓 하나도 안하고, 사기를 치나 안치나, 곱게 평생을 살면서 제주도 한 번 안가고, 평생을 감자 캐면서 자식만 키우면서 고요하게 살아도 그 할머니가 아들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자녀관계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그것은 지옥 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어떤 인간도 일반적이다. 똑같다. 모양이 달라도 그것은 다양성뿐이지요. 똑같다. 본질은 똑같다. 시작점은 똑같다. 모양새는 달라도. 이게 바로 일반화입니다. 그렇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똑같다고 여기는 그것이, 아직 네가 시작도 안했어요. 정말 네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악마에게 속아서 모든 눈이 감겼기 때문에 그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고 다른 세상은 없다, 라고 출발하니까 다 그렇고 그런 신이고, 종교도 다 똑같고, 인간도 다 똑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을 깨고 특수성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시작은 어디서 하느냐? 바로 마태복음 2장 15절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원형, 이스라엘 이전에 원형이 먼저 있어요. 이 세상 모든 우주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와 실제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마치 인간들이 가상 신에다가 모든 것을 부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들에게 부여한 거예요. 그 아들, 주가 되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부여하신 겁니다.

그 원형 되시는 분은 신약에 나타나지요. 현실적으로 이 땅에 신약에 오신 분이지요. 하지만 구약에서는 장차오실 분의 모형물을 만들기 때문에, 인형같이 모형물을 만들기 때문에 그 모형물에 해당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애굽에서 불러낸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 누구냐 이름이, 모세, 모세가 나이 80이 넘도록 애굽 바깥에 거주하게 만들다가 주께서 모세로 하여금 자기 출생지와 재결합하게 만들었어요. “다시 애굽으로 가라. 다시 애굽으로 가거라.”

그러면 첫 번째 태어난 그 모세와 그리고 팔십이 넘어서 다시 애굽으로 들어간 그 모세는 다른 사람 보기에는 같은 모세지만 모세가 받은 그 사명은 완전히 달라요. 한쪽은 그냥 태어난 것뿐이지만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작업을 위해서 투입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스라엘집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대목은 출애굽기 4장에 처음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면서 사명을 줬어요. 출애굽기 4장 22, 23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아들은 없어요. 아들은 없는데 아들이 만들어지고 모세 따라 나오다 보니까 그동안 그 누구도 몰랐던 아들을 유일한 현실이라고 간주되는 그 애굽이 바로가 아들을 못 보낸다고 꽉 잡고 있었던 거예요. 자,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요. 몸이 아프니까 아들이라는 생각이 없이 그냥 몸이 아프다. 여러분이 몸이 아플 때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어서 건강하기를 기대하겠지요.

그러면 건강한 것이 주님의 아들 되는 겁니까? 그게 사명이에요? 하나님의 아들도 모르고 주님을 모를 때는 항상 나로부터 시작해서 내 것으로 돌아오니까 처음에 내 몸이 건강했으니까 하나님께 비는 거예요. 우상에게 빌어서 원상회복해달라는 거예요. 안 아팠는데 아프게 되었으니까 ‘하나님, 도와주소서 내 몸을 후딱 낫게 하옵소서.’ 끝, 이게 끝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아들의 뜻은 뭐냐 하면, 안 아팠는데 아픈 것은, 다시 네가 안 아프게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안 아플 때도 너는 내 아들이고, 아플 때도 너는 내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안 아플때도 내 아들이었고, 아플 때도 내 아들이었고, 아프다가 다시 건강하게 되거든 ‘아, 나는 역시 건강해야 돼.’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사명이 누락된 거예요. 사명이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아들 되게 하신 것은 진짜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봉사하라고 이스라엘로 아들 되게 하셨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아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미 오신 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아들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갑자기 아픈 거예요. 먹는 것 다 토하고. 세상에, 먹는 것 다 토하면서 ‘이것은 주께서 시킨 사명이니까 내가 토해야 돼. 왜? 토하는 것이 내 사명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어요. 있는데 별로 없어요. 사람은 자꾸 일반화되고 싶어요. 배추김치 되고 싶어요. 자꾸 일반화되고 싶어요.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몸 아프면 짜증나고 건강하면 좋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사명감 같은 것은 하나도 없고 ‘역시 나는 건강해야 나의 정당성, 나는 옳다, 나는 착하다, 나는 의롭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뿐이에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본인의 사명이에요. 내가 우상화 되는 것이.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밖에 없는 세계에서 너 말고 다른 분을 위해서 네가 존재한다는 사명감을 같이 부여하면서 주께서는 아들이라고 부르신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내가 그래도 하루하루 살면서 사는 재미는 남 깔보는 재미다, 그 말이지요.

나하고 같은 직장에 있는데 한 사람은 승진이 되고 나는 승진에서 탈락했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깔보느냐 하면, ‘저건 승진은 했어도 가정은 아마 불행할거야. 승진을 빨리 했으니 그만큼 퇴직도 빨리 해야 할 거야. 빨리 올라가면 그만큼 빨리 잘라낸다니까.’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아이고, 승진되어서 가다가 자빠져서 그 자리에 내가 승진해서 올라가라.’

그러니까 뭐냐 하면 소위 잘난체 하는 인간이 상처가 많아요. 멀쩡한 사람 후비다 보니 그 스트레스를 자기가 받아요. 인간의 모든 스트레스는 자기가 남 깔보는 계획에 차질이 일어나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막 기도하고, 교인 새로 왔다고 목사가 심방해서 “헌금은 그저 한 달에 삼십만 원 정도로 해서 십일조만 하면 됩니다.” 했는데 그 사람이 두 달 나오다가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하고 전화 한 통 하고 끝내버렸다, 할 때는 “나가 죽어라. 씨!”

그게 목회 스트레스라 하는 거예요. 내가 정당하고, 내 기도와 심방의 정당함을 네가 뭔데 방해하느냐, 그 말 아닙니까? 30명 학생이 있는데 다른 애들 멀쩡하게 신종코로나 끝났다고 학교 잘 다니는데 자기가 학교에 딱 가니까 42도 열나서 너만 집에 있어야 돼. 그럴 때 ‘저 인간들 다 걸려라.’

왜 그러냐 하면 남에게 지기 싫어하거든요. 그 이유가 있는지를 몰라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보면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선지자중 하나 호세아 선지자가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집나간 바람난 여자다. 너의 처음자리는 그렇게 남을 깔볼 입장이 아니다.” 그럴 잽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난 여자에요. 바람난 처자, 값을 주지 아니하면 절대로 다시 하나님 자리 천국에 올수 없는 가증한 존재에요.

“그런데도 뭣도 모르고 너는 남을 깔보고 자기정당성을 위해서 그래, 우상이 더 낫다고?” 그들에게 그 때는 우상이 아니지요. “바알이 진짜 신이라고? 처음 내가 너를 애굽에서 끄집어낼 때 너는 아예 없었어. 아들이 뭔지도 모르고 없었어. 애굽사람과 어울려서 그냥 애굽에서 잘 살기를 바랐지.” 그걸 빼내서 다른 곳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오게 할 때 바로 가나안 땅에 집어넣지 않았어요. 광야에 집어넣은 겁니다. 척박한 환경이 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원수가 특수한 어떤 인간이 원수가 아니라 이 척박한 환경, 물 없는 환경, 먹을 양식 없는 환경자체가 자신들의 원수라고 본 거예요.

왜? 자연세계에서 생각하고 의미를 깨닫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밖에 없다고 애굽에서 교육받았고 그렇게 본인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신도 없고, 악마도 없고, 오직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이 세상 모든 자연은 생각도 못하고, 그래서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

그 생각이 있었는데 그들이 광야에 있으면서 그들의 원수가, 그들이 그렇게 장악하고 싶었던 자연이, 척박한 환경이 원수로 작용할 줄 생각 못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광야가 생각할 줄 몰랐지.” 광야가 네 지시 안 받고 광야는 병신같이 가만있으면서 그저 네가 씨 심으면 씨가 날 줄 알았지요. “그 광야를 보이지 않는 분이 조종할 줄 생각도 못했지. 바로 그분이 너의 아버지였어.” 광야까지 자연세계까지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아버지가 아버지의 모든 뜻은 아들에게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귀하지 않습니까?’ “네가 귀한 것이 아니야. 너는 모형이야.”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는 그분이 귀한 거예요. 그분에게 모든 심판권을 다 집어넣으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디를 거치셔야 되느냐 하면, 인간들이 스스로 아들 될 수 없는 환경, 그래서 자기 아들을 애굽에 보냈다가 다시 뽑아서 나사렛 동네 사람으로 구원의 활동을 개시하게 하신 거예요. 마태복음 2장 15절에서.

일단 애굽으로 내려가야 돼요. 그렇게 하고 다시 불러오면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들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지요. 왜? 예수님이 보편성 가운데 특수성, 특수성 가운데서도 특수성, 최후의 특수성 마지막 특수성, 이 세상 모든 의로움과 가치와 모든 의미는 오직 한분 예수님에게만 나온다. 아들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그 아들의 영을 받은 자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 12절에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 안하면 안 되지요.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이나 어떤 것을 총동원해도 알 수 없는 다른 힘의 권세, 다른 힘에 의해서 아들이 된 사람 같으면 더 이상 나 자신은 누굴 깔볼 입장이 아니고, 나는 그저 이 세상에 버림받은 자 일부인데 주께서 값을 치러서 바람난 아들을 호세아 목사가, 그 선지자가 데려오는 것처럼 주께서 그 선지자의 진리대로, 그 계획대로, 그 시나리오대로 우리로 하여금 이미 버려진 긍휼을 입지 못한 자를 값을 주고 데려온 작업의 흔적이 우리 안에 남기는 식으로 ‘너는 내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아들은 없는데 아들 되시는 분이 권세를 주니까 영접하게 되었고, 영접하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놓고 뭐라고 자백을 하느냐? “이것은 내 뜻도 아니고, 혈육의 뜻도 아니고, 인간의 뜻도 아니고, 이것은 오직 주님의 뜻입니다.” 하는 특수한 고백을 쏟아낼 수 있어야 돼요.

이것은 곧 내가 건강하든지, 아프든지, 그 모든 것이 주님을 증거 하는 사명자로서의 아들이 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아들 됨의 또 한 구절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하여튼 제자들은 맨날 꾸중을 들어요. 맨날 모른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은 값을 치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곧 예수님이 마시는 쓴잔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그냥 마신 거예요. 우리 자신이 죄 덩어리니까. 따라서 그런 식으로 마시고 들어가면 우리는 예수님 아들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프게 하면 아픈 것이고, 건강하게 하면 건강한 것이고, 오늘 죽는다면 죽게 하신 것이고, 그 가운데서 아들로서 특수성, 하나님자녀로서 특수성을 보이면서 우리가 죽든 아프든 어떤 순간에도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를 고백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의 믿음이 뭐냐? 이게 믿음이지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나 잘남과 남 깔보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는 지난 날로 족합니다. 그것은 족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사명이 오게 되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임을 늘 확인하는 식으로 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특수한 존재인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잘난 척 하는 재미로 살아왔습니다. 나만 행복하면 그만 아니냐, 하는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잘난 것이 사명이 아니라, 아들을 만들어주신, 값을 치르신, 피를 흘리신 주님 증거 하는 것이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사명인 것을, 그 사명을 위해서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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