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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1 09:43:00 조회 : 52         
2020 여름수련회 룻기강해 제8강 : 족보교체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202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8강-룻기 강해: 족보교체

이 시형제 결혼법에 대해서 왜 이런 율법이 주어졌는지, 그것은 인간 자체는 죽음이기 때문에 계속 생존할 권한과 자격은 없다. 다만 인간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율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조건하에만 인간은 살아있다. 바로 이러한 취지 때문에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정상적으로 부부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되는데, 자식이 없다는 것은 단절이에요. 단절. 부모가 자식사이를 끊어가는 겁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우리 보기에는 부모에게서 내려오는 자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신약입장에서는 이 자식이 태어나는 그 과정 자체가 끊어진 거예요.

이것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끊어줘야 부모가 지니고 있는 죄가 그대로 물려 내려온다는 이 원칙을 극복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이 자식은 자식1, 자식2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자식, 자식 하니까 욕하는 것 같은데, 이 자식1과 이 자식2는 서로 대결하면서 서로 튕기게 되어 있습니다.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경쟁이죠. 자식이 두 종류가 있으면서 자식이 한 종류로 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에서냐, 야곱이냐, 베레스냐, 세라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후보감 둘을 줘놓고, 어떤 입장에서 하나가, 정당한 입장에서 그 다음에 후보감에 들지 못하고 잘려나가는가. 잘려나갈 때 그 기준이 뭔가를 보라는 겁니다. 기준이.

그게 바로 약속이라는 겁니다. 약속. 이 사람들이 약속을 지킨다고 약속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은 실천에 의해서 실제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실제로 등장하게 되면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의 성격이 같이 등장한다는 이야기에요. 대립되는 두 가지의 성격이. 그러면 신약에서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등장하면서 하나님 종류가 몇 종류가 되었습니까? 딱 두 종류였어요. 여호와냐, 예수님이냐, 딱 두 종류였습니다. 유대인은 여호와, 여호와가 주신 율법.

예수님은 그 율법대로 하면 내가 바로 오신 하나님이다. 이거는 뭐 어떤 더 이상의 여지가 없어요. 하나를 죽여야 되는 거예요. 하나를 죽여야 결정되는 겁니다. 이러한 대립이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까지 들어오는 거예요. 어느 신을 믿느냐? 라는 것과 같은 질문으로 너는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다른 말로 하면 너의 기원, 원천은 어디를 두고 살아가느냐를 묻는 거예요. 아담이냐? 아니면 마지막 아담이냐? 그러면 우리는 뭐 성경에 나온 대로, “아이고, 그것도 문제라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어요.” 뭐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예수 안에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면 약속에 의하면 두 개는 반드시 다른 쪽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당신이 예수 안에 있다면 니가 아는 하나님을 니가 예수 이름으로 우상이라고 지적할 수 있느냐를 우리한테 묻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지적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건가지고 지적한다는 말인데,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뭐냐 하면은 십자가 죽음이거든요. 십자가 죽음으로서 그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이 너 안에서 어떤 신을 내모는지, 내쫓는지, 네가 파악하고 있느냐를 묻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로 인하여 쫓겨 가야 할 우리 안에 있는 신은 어떤 신입니까? 나를 위한 신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입니다. 내 기도 응답해주는 하나님. 내 헌신과 행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하나님. 내가 살아온 모든 것에 대해서 좋게 좋은 점수를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십자가 영이신 성령이 그것을 지적하게 되어 있어요.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은, 뭐로 지적하느냐 하면은 서로 다른 두 자식을 통해서 부모를 도리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곱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룻기에서 유다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유다이야기를 해볼게요. 유다가 가나안 땅에 와서 가나안 여자와 결혼해서 애를 낳아요. 엘과 오난과 셀라. 창세기 38장에. 이 세 자식을 낳아요. 2절,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유다가 이 셋을 낳을 때에 이 자식들, one, two, three, 이 자식들 중에서 어느 자식도 유다 자식이 아닌 자식이 하나도 없어요. 다 귀한 자식입니다. 그래서 이 자식들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라든지, 차이성이라든지, 틈이라든지, 그런 게 없어요.

그런데 엘과 결혼한 여자이름이 다말이죠. 다말이라는 여자 역시 가나안 여자에요. 그 동네 사람이니까 그 동네 여자하고 결혼했어요. 했는데, 엘이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했죠. 이 관계가 단절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내가 약속의 자녀라면 약속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자식이 있는데 자식이 끊어졌어요. 이거는 뭐냐, 교체시점입니다. 아, 이거 죽음의 자리, 없는 자리에 누가 들어가겠구나! 하는 것을 눈치를 채야 돼요. 거기에 율법이 들어가야 돼요. 율법에 의하게 되면 지금 형수 다말은 살아있으니까 그 다음 차례 동생이 누굽니까? 오난이잖아요.

그러면 율법이 살아있으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그냥 육적인 자식과 아버지 사이 같으면 이거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잖아요. 약속의 자녀는 반드시 혼인도 어디에 준해서? 율법에 준해서, 율법에 의한 혼인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자식도 전달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율법에 의하면 다말은 누구하고 혼인을 해야 하느냐 하면은, 다말과 오난이, 형수하고 시동생하고 결혼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형수는 이미 뭐냐 하면은 중고시장에 내놓은 거죠. 이거는. 신상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오난 입장에서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은 자신의 욕구적인 자아가 충족될 수가 없어요. 더구나 자식을 낳아도 내 자식이라고 하지 않는, 아버지라고 말 못하고, 삼촌! 삼촌! 삼촌이라고 불러야 될 처지에 있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 자식은 형의 자식이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는 대리모가 아니고 대리부가 되는 거예요. 일종의 씨받이가 되는 거예요. 남자가. 자기 자식을 낳아놓고 자기 자식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인정한 유다와 장자계열, 장자계열에서 둘째, 셋째는 아무 의미 없는, 이거는 하나의 부스러기 같은, 그냥 보조배터리 있잖아요? 보조배터리. 보조배터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자아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주체성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난이 관계 맺으면서 땅에다가 설정했습니다. 임신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복수죠. 또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내가 사랑하는 자식을 낳겠다는 사적인 견해가 당연히 올라오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뭘 했느냐 하면은 이 오난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 둘은 없는 거예요. 둘은 없고 여기에 다말만 있는 겁니다. 그래도 유다가 애를 세 명이나 낳아가지고 아직 배터리가 하나 더 있어요. 보조배터리가. 씨받이가 하나 더 있는 거예요. 근데 애가 어려요. 어린데, 아버지 유다가 생각하기를 또 죽을 것 같아요. 이 자식이. 여기서 바로 이거는 아버지와 자식과의 대립이 아니고, 시아버지와 다말과의 견해차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그만큼 약속이 약속 값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 원대로 마옵시고 하는 것처럼. 내 원대로 안 된다는 것은 징조가 괜찮은 징조에요. 물론 나는 파괴가 되겠지만. 나에 대해서 율법적인 차원, 말씀의 차원에서 지적을 당하는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정말 이거는 행운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지적당한다는 것은, 그것도 죽기 전에 미리 지적당한다는 것은 구원받는 거예요. 그거는. 정말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받을 때 그렇게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성과가 휴지조각처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가볍고 즐거운 일입니까?

그동안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선택했고 내가 관찰했고 내가 결정한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무용지물로 내려앉는다는 말은 주님에 의해서 관찰당하고, 주님에 의해서 간택되었고, 주님에 의해서 택함이 되었고, 주님에 의해서 해석하는 인생, 책임지는 인생이 되었다는, 이것만큼 감격스러운 인생이 또 있을까요? 이 평생에. 어디 좋은 대학 나온다고 그걸 압니까? 주님이 책임져서 나로 하여금 다루고 있다는 것. 이게 물이 되던, 불이 되든, 어떤 험한 길을 간다할지라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일절 없는 거예요. 당최 없는 거예요. 전혀 없는 거예요. 부족함이.

이 부족함이 없으면 뭐가 나오겠어요? 고맙소! 노래하면 돼요. 고맙소, 감사합니다, 고맙소~가 절로 나오죠. 고맙소~! 그리고 나한테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이 날리는 오로라. 노르웨이, 핀란드, 캐나다 북쪽에 있다는 그 오로라. 누가 설치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밤중에 사다리타고 그리지도 않았는데, 자기장에서 태양광선이 춤을 추는 그 장면처럼.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오로라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춤추는 하나님의 사태,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주시는 사태, 따라서 우리는 그 인디언처럼 오로라와 함께 유령이 되어서 춤을 추는 거예요. 내 영혼은 귀신, 유령이에요. 좀비도 있지만. 좀비는 아니고 유령. 어떤 데도 구애받지 않는 유령. 하나님에게 다루어지는 존재. 어떤 것에도 내가 평가하고 내가 관찰하고 내가 해석할 권리마저 내게서 박탁되었다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나에게서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유다가 그런 마음을 갖기 전에 그는 과정을 거쳐야 돼요. 뭐냐 하면은 자식 셋 중에서 둘, 엘과 오난은 날렸는데, 가만 보니까 막내 셀라까지 날릴 것 같아. 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다말과 시아버지인 자신과 대립이 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이 여자가 이방여자니까 죄가 많아서, 부정이 타서 우리 집안을 거덜 낸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차원에서 마지막 아들을 보호해야 된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때까지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기 관찰과 해석과 자기 평가와 자기의 선택은 옳은 선택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시아버지가 어디에 갔다는 정보를 입수해가지고 다말이 창녀로 변장해가지고, 유다는 며느리인지 모르고 거기서 동침을 했습니다. 참 희한한 게요. 이 다말이 물론 본인은 믿음이 좋아서 했다고 했지만 정답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다말로 하여금, 다말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도록 다말에게 시킨 겁니다. 왜냐하면 다말도 이 집안이 약속의 집안인줄 알고, 시형제 결혼법을 알기 때문에, 그걸 시행해야 될 아버지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자기가 그 율법 속으로 룻처럼 빨려 들어간 거예요. 지금 그이야기가 룻기 4장에 나오잖아요.

이 룻 집안에 일어난 일이 옛날에 다말과 유다집안에 일어난 일의 재탕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약속은 안 죽고,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있다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그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자기 코앞에, 현실화 된 겁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그 현실화 된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있으면서 우리는 지적을 받게 되고, 내가 그동안 선택하고 관찰하고 결정한 모든 일은 십자가 앞에서 다 무용지물로 드러날 때, 이것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구원의 능력이거든요.

우리가 강도와 세리와 창기가 되는 그 순간이 구원의 능력이잖아요. 십자가가 능력이 있는 한, 따로 내 것을 챙길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내가 선택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저 버티고 있는 겁니다. 버티고 있으니까 주의 십자가가 와서 흔들기에 나서는 거예요. 흔들기에 나서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했던가를 자기의 자식이나 가정이나 남편직장이라든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대립되는 요소가, 나로 인한 대립적인 요소를 하나님께서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다말과 시아버지가 동침을 하게 되고, 그 소문을 나게 해서 다시 다말을 죽이려고 할 때에, “누구하고 잤느냐?” 할 때에 지팡이하고 도장하고 끈하고 딱 내주니까, 유다가 하는 말이 “너가 옳도다.”라고 해요. 너가 옳도다. 너가 정당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가 정당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내 줄기를 통해서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줄기는 옆에서 차고 들어온다는 사실. 내 줄기 말고 나와 대립되는 그 입장에서 차고 들어와서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약속이 나를 이기게끔 그렇게 조치한 것에 대해서 유다는 감격하죠.

문제는 임신이 되었습니다. 임신되었을 때, 베레스와 세라가, 하나가 나와야 될 텐데 둘이 나왔어요. 그 둘은 경쟁관계입니다. 9회 초까지는 누가 먼저 나왔느냐 하면은 세라가 먼저 나왔어요. 9회 말 투아웃 투쓰리 풀카운트에서 역전 홈런을 칠 줄 몰랐어요. 이 나오는 모습이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쇼트트랙에서 마지막 결승점에 칼날을 먼저 쫙 뻗느냐에 따라서 금메달이냐 은메달이냐 결정되는 그 순간처럼. 터치고 나온 거예요. 세라를 제키고 나왔어요. 제키고 나왔다는 말은, 어차피 베레스가 나오면 되는데, 아니에요. 그 과정이 중요해요.

그 과정을 통해서, 이 자식을 통해서 역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아버지를 깨우칠 때 그냥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과오를 듬뿍 담고, 담은 자식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오를, 선조의 죄를 깨우치죠. 그러면 십자가 안에는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십자가 안에는 바로 우리가 어떤 죄를 짓게 되든지 다 듬뿍 들어있어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사도바울의 편지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 속에서 그걸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이 세상은 다 끝장이다. 이런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의 글들이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면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도대체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으면 주께서는 십자가에 죽어야 되는가를, 낱낱이 펼치는 작업을 성령께서 하는 거예요. 왜? 성령은 책망하는 것이 주특기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기에 책망하는 거예요. 책망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막혔던 감사와 고맙소가 나한테 계속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는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깨지기 싫어가지고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천당 가는 것을 원해요. 그러면 비중이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겠어요? 부활의 새 생명에 가있는 거예요. 이게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자기 욕망에 부합되었다 이 말이죠. 이제나 저제나 결국 끝에 부활, 영생을 얻으면 그만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겁니다.

거기에 초점이 있다 보니까, 부활과 십자가 구원을 믿고, 부활을 믿는 내가 계속 잘난 존재가 돼버려요. 지적해줄 수 있는 근거를 아예 치워버리는 겁니다. 에이, 뭐 십자가 지나고 부활 같으면 부활이 중요하지, 십자가 이거는 지나간 간이역인데 그냥 넘어가자. 이런 식이라 이 말이죠. 사람의 종교적인 욕구, 욕망을 교회가 부활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구미에 맞춰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은 부활에 있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 있어요. 분명히 십자가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 하나님의 깊은 것은 십자가지 부활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십자가지 부활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자체가 뭐 저주죠. 그리고 그 복음은 사람을 지적하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종이 아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사도바울은 자기 교회를 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어요. 나도 죽을 판인데 무슨 자기가 책임질 교회가 있습니까? 없어요. 교회는 성령께서 책임지시고 자기를 다루실 거예요. 자기 속에 있는 그런 사탄의 가시라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자기가 뺄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지금 룻기에서 주위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율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그 가정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의, 제사 중심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파격적인, 낯선 율법 완성이 등장한 거예요.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스스로 자기를 재편해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이끌어간다는 그 증거를 룻의 개입으로, 나오미 가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사사기 속에서도 하나님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룻기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 4장 16절,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그러니까 그 당시에 도대체 족보가 이상한 족보가 되죠. 나오미가 아들을 낳은 게 아니죠. 누굴 낳았어요? 손자를 낳았잖아요. 며느리가 애를 낳았으니까, 며느리가 새 남편 만나서 낳았는데 그게 어떻게 자기 아들이 돼요? 손자가 되죠. 근데 나오미의 아들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보아스가 나오미의 남편입니까? 그래야 이게 말이 되거든요. 며느리 룻은 빼놓고, 늙은 나오미하고 보아스하고 결혼해서 나오미가 임신을 해야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데 왜 자기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집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도대체 이 사람들의 머리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었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느냐, 이점을 우리가 마태복음을 통해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마태복음까지 가야 돼요.

마태복음 1장 족보를 한번 봅시다. 6절에 보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되어 있죠. 솔로몬의 족보를 잠시 그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공부한대로 해봅시다. 솔로몬은 과거를 재편하죠. 자식이 아버지를 갱신하니까. 죽은 아버지를 살려내고 하니까.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지만, 이 족보의 의미는 솔로몬에서 거꾸로 자기아버지들을 봅니다. 여기에 남자가 두 명이 나오죠. 하나는 다윗이 나오고 또 하나는 우리아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에 여성은 밧세바, 단 한명이 나옵니다.

자, 이 솔로몬이 다윗의 자식이냐? 아니면 우리아의 자식이냐?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거예요.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지 말고. 성경에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되어 있잖아요. 근데 그냥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지 말고 여기다가 밧세바를 다윗과 나란히 두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솔로몬은 누가 뭐래도 다윗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하고 결혼해서 솔로몬을 낳았다. 이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솔로몬이 아버지에 대해서 지적할 게 없어요. “우리 엄마는 정상적이야.” 지적할 게 없다 이 말이죠. 지적할 게 없으면 이거는 그냥 아담의 계통이죠. 새 아담의 계통이 아니고. 천국으로 향하는 영적 노선이 아니고 그냥 육으로 가서 지옥을 가는 노선일 뿐입니다. 뭔가 노선의 교체, 변화가 일어나야 되잖아요. 변화가. 아까 했던 것을 여러분들이 걱정돼서 다시 하는데. 자식은 없어요. 남자가 다 죽었으니까 자식은 없는 거예요. 없는 자식인데 율법에 의하면 있도록 되어 있다 이 말이죠. 하나의 틀로 있다 이 말이죠.

아버지가 없죠. 없음. 엄마가 있습니까? 엄마 없음. 그런데 여기 이 자식은 나오니까, 없음의 자식을 위해서 없는 아버지를 채워야 되고 없는 어머니를 채워야 된다 이 말이죠. 없던 아버지를 채울 때에 여기에서 보아스가 들어간다고 했죠. 없던 어머니의 자리에 누가 들어갑니까? 여기는 룻이 들어가죠. 이거는 실제적으로 그렇고. 이걸 빼자 이 말입니다. 룻 제거하고 보아스 제거해버리면, 없던 아버지 자리에 엘리멜렉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엘리멜렉의 아내가 누굽니까? 룻이 아니고 누구에요? 나오미죠. 나오미가 들어가요.

그러니까 없던 자리가 없음에서 자식이 발생되니까 거꾸로 따져서 죽은 엘리멜렉이 살아나고 죽은 나오미가 자식을 낳게 되는 거예요. 없던 자식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겁니다. 없던 자식이.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뭡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든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어야 마땅한 우리를, 율법에 의해서 죄로 규정된 우리를 의롭게 살려낼 거예요. 이 족보대로 하면. 이걸 믿습니까?

이게 바로 룻에게서 일어난, 인간의 아담계열과 장차 오실 새로운 아담계열이 이스라엘 내에서는 중첩이 되면서, 두 개의 맥락이 중첩이 되면서, 거기서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일구어낸 결과물이 우리의 혜택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이 성경 전체가. 죽은 자가 관찰하고, 죽은 자가 해석하고, 죽은 자가 선택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일체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내놓은 관찰과 선택과 평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것이 다시 한 번 지적받아야 될 대상이 돼버려요. 그리고 성도는 이미 구원받은 채로 계속 지적받고 있고.

“고맙소! 고맙소! 내가 내 식대로 하나님 믿으면 지옥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그때마다 내 선택과 내 관찰이 욕망에서 나온, 내 쾌락에서 나온, 그냥 아담의 몸에서 나온,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그 쾌락을 조정하는 그런 데서 나온, 악에서 나온 것을, 이제야 죄인인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강남에 집이 세 채 있고, 달러 사놓고, 엄청난 부자라고 할지라도, 이거는 뭐 너끈히 천국 가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 돈 십 원도 안 줘도, 그렇게 해도 천국 가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삭제대상이기 때문에, 본인이 그걸 알기 때문에 그래요. 나에게 준 재산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런 재산을 가져야만 했기에 이런 재산이 왔습니다.

마태복음을 잠시 그렇게 해놓고, 룻기 2장 3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아, 3초를 못 기다립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그 뒤에 나오는 부사가 뭡니까? 우연히, 우연이죠.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우연히. 우연입니다. 우연히. 그러니까 뒤에서 율법이 밀어 넣은 거예요. 그냥 우연이에요. 우연이라는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인간이 갖고 있는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말과 언어로서는 근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속한 것. 소유대상이 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건은 사건만 남기고 사라져요.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이 요청하지 않았는데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처럼. 예상치도 못했는데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처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어떤 분이 묻죠. “아직도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까?” 이래 묻는 사람이 있어요. 뭐가 궁금한 거예요? 보고 싶은 거예요. 주님이 보고 싶은 거예요. 이 보고 싶다는 말은 현존을 못 느끼고 있으니까, 뭔가 봐야 속이 좀 시원하다는 뜻이잖아요. 그 두 눈을 뽑든지, 무슨 조치가 있어야 돼요.

눈을 뜬 사람은, 주님의 시선의 증인인 사람은 안 봐도 함께 있음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여튼 내 원하는 일은 족족 파토 내게 만들어요. 내가 뭐 이렇게 공부했다 싶으면, 내가 안 될 줄 알았어. 전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귤을 먹고 싶어서 귤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화를 내면서 “이 인간은 능지처참할 인간이다. 여봐라! 이 인간에게 사과를 한 궤짝 주어라. 이 못된 놈!”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내가 달라는 것을 주지 않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백방으로 갚아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요구와, 왜 우리의 요구가 기존의 욕망의 달성에서, 만족도에서 나오는 요구인지를, 죽을 때까지 이 몸이 있는 이상은 계속해서 그게 뿜어져 나올 거예요. 그러나 뒤돌아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선물답게 우리가 인정해줘야 하는 겁니다. 선물에 대해서 나의 보관료를 달라, 내가 열심히 붙잡겠다고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그건 선물이 선물답지 않아요. 선물이 선물다우려면 그 선물 앞에서 나의 모든 행위는 부정이 되어야 하겠죠. ‘우연히’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마태복음 1장이 이게 처음 등장하지만 참 어렵습니다. 솔로몬에서 보는 거예요. 솔로몬에서 보면 아버지가 이중이 되는 겁니다.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났어요.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밧세바가 아니고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남성이 있어요. 어떤 남성이 있는데, 태어났다. 그런데 우리아는 어떤 자냐 하면 이미 죽은 자죠. 죽은 자인데, 우리아의 죽음 안에는 무슨 내용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느냐 하면은, 누가 우리아를 죽였느냐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어요. 우리아에게는.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인데, 죽은 자의 이름은 죽음을 통해서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의 기능이죠. 예수님은 죽었지만 주의 이름은 살아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완전히 도배를 해버리는 겁니다. 북한이든 남한이든 어디든 상관없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구원을 받으리라고 할 때, 그 나의 이름 안에는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나 때문에 당신이 죽었습니다.”라는 게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주님의 이름 안에 가해자로 포함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될 수가 없어요. 가해자기 때문에 구원되는 겁니다. 뭐 다 같이 가해자라도 성령을 안 받아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되지 못하지만. 십자가에 내가 죄인으로서, 범인으로서 가담되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나는 주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천국 가는 나, 주님의 자식새끼죠. 천국 가는 나를 누가 만든 거예요? 누가 나로 하여금 천국 가게 만들었습니까? 아담에 의해서 내가 새 아담 안에서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 조상 아담은 그 안에 우리 자녀가 될 자의 죄를 내포한 채, 죄가 내포된 그 자의 인식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인식으로 상호연결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할 때에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의가. 우리가 의인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한다고요. 루터가 거기서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죄인이야? 의인이야? 둘 중의 하나만 하라고 하니까, 난감해가지고, 난감하네. 내가 죄인이야? 의인이야?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죄인이 재료가 되어서 하나님의 의를 생산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의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나의 죄인 됨이 들어가 있으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고맙도록 일을 하셨어요. 우리가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쪽으로 일을 한 거예요.

한 것도 없이 우리에게 그냥 주기만 하면 우리는 받기만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주의 일에 가담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이냐 이 말입니다. 미쳤다고 자살해요? 왜 자살합니까? 복음 아는 사람이 왜 자살해요?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죠. 영광스럽게 여겨야죠. 몰라 자살도 그게 주의 일인가? 영광스럽게 여겨야 돼요. 영광스럽게. 이게 추하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영광스럽게 여겨야 돼요. 왜냐하면 나를 여기에 추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 율법의 작품이잖아요. 왜 하나님의 작품을 자기 마음대로 훼손합니까? 해서는 안 되죠. 못나도, 세리와 창기가 돼도 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에요.

비서가 너무 예뻐서 내가 좀 놀려봤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나로 죄인 되게 해서 주께서 우연히,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있잖아요. 우연히 나로 하여금 이쁘게 보도록 했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의가 됐다. 왜 그 말을 못해? 복음을 알면서. 뭐 성령을 받아야 말을 하죠. 이 원칙이 모든, 이게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왕에게 일어나는 일이 반복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되풀이 됩니다. 그대로 확장이 돼요. 왕에게 일어난 일이. 왕 자체가 이래야 돼요. 왕 자체가 간음하고 살인하고 했는데, 다윗은 그걸 누가 했다고 합니까? 본인이 했다고 합니까? 아니면 내려오는 죄가 했다고 합니까?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고 모친의 죄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다고 하죠. 이 뻔뻔스러움. 뻔뻔스러움의 대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래놓고 다윗과 밧세바가 동침을 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죽지도 않고 살아있었어요. 살아있는데, 살아있으면서 시들시들 죽게 하는 그 과정을 다윗으로 하여금 목격하게 해요. 다윗은 그 아들이 불쌍해서 간절히 기도하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런데 다윗의 살려달라는 요구는 묵살이 되고, 그 자식이 죽었을 때에 다윗의 표정은 어땠습니까? 생기발랄했죠. 아주 생기기 있었어요. 아, 자식은 죽은 자리에서만 새 자식이 나온다는 사실을!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를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내 죄를 영원토록 보여줄 밑천이 되기 때문에. 내 죄를. 누구 앞에서도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밑천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작용했던 그 여자와 혼인해서 솔로몬을 낳고, 그 솔로몬은 내 자식이 아니고 누구 자식이다? 죽은 자의 자식이죠. 우리아의 자식이 아니고 우리아의 자식에 뭐가 들어갑니까? 아까 죽은 자의 자리에 뭐가 들어가죠? 율법이죠. 말씀이 나를 이용해서 자식을 낳게 되고 그 자식이 나를 구원하게 하는, 내 죄를 용서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51편 8절에 보면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제가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짓밟힌 그것으로 인하여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홀가분하게 됐다는 그 즐거움을 저희에게 성령을 통해서 회복하옵소서.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번제나 속죄제를 받지 않으시고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상한심령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상한심령. 이럴 때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율법의 자체적인 갱신이에요. 왜냐 하면은 번제나 속죄제는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뭐 본인이 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주께서 시켰습니까? 레위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제나 속죄제를 하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하라’고 한 이 ‘하라’가 주께서는 원하지 않으시고 뭘 원한다? 상한심령을 원한다는 거예요. 율법 자체 내에서 갱신해가면서 마지막에 율법의 완성까지 나아갑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해놓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면서 뜯어먹죠. 바리새인들이 단박에 시비를 겁니다. “왜 너희들 집단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율법이 갱신되어 버렸어요. 율법에서 하나의 의인화가 된 거예요. 인물이 나온 거예요. “내가 안식일인데.” 내가 안식일이라는 언어가 인물이 된 거예요. 내가 안식일이에요. 내가. 내가 간음하지 말라고, 내가 살인하지 말라고, 내가 십계명이야. 예수님이.

그러니까 율법은 나, 예수라는 실체를 위해서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로 온 거예요. 그림자. 옛것은 없어지고 새것이 된 거예요. 옛 율법은 폐해지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가 된 겁니다. 모든 율법은 나 하나를, 두루마리라는 인물 하나를 지적하기 위해서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모든 율법은 이미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율법에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어요. 율법의 지적은 받아야 돼요. 왜냐하면 옛날 우리의 육신이 있기 때문에. 이 육체는 계속 지적을 받아야 고맙고 감사가 나오기 때문에.

지적을 받되, 그것 때문에, 이미 우리는 평가를 죄인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또 다시 죄인으로 평가 받는데서 주눅들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내 행동에 의해서,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누구로부터 새삼스럽게 평가받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의 노림수로부터, 율법이 쏘아대는 그 화살로부터 날아오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나를 향해서 쏘는 거예요. 이미 죽어버린. 마치 벗어놓은 내 옷을 보고 인민군, 괴뢰군들이 거기에다가 다다다다~ 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럼 우리는 재미나게 맞아서 아~! 아~! 아~! 쓰러지는 척을 하면 되는 거예요. 재미있잖아요.

벗어놓은, 나하고 이미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율법으로 지적을 하게 되면, 십계명이 어떻고 지적을 하게 되면 나는 이미 자유롭다는 폼을 내면서, 어~! 어~! 어~! 아프다는 흉내를 내면 되는 거예요. 자, 이쯤해서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이, “그럼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라고 하는데, 본인이 어떻게 살까를 본인한테 질문할 그런 건 아니죠. 여러분이 홀로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질문을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할 게 아니고 같이 계신 분에게 물으세요. “주님, 내일 숙제는 뭡니까? 내일 지시사항은 뭡니까? 내일은 주께서 어떻게 다루실 거예요?”라고 묻는 거예요. 그럼 주님께서는 “기다려봐. 예상 못한 초과적인 것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니가 예상도 못한 소시지 반찬이 나올걸. 아주 사소한 것. 니가 평소에 아침에 변이 안 나오더라. 잘 나올걸. 갑자기 니 자식이 말을 잘 듣는 희한한 일이 벌어질걸.”

우리는 작은 데서 여호와의 손길을 느끼면서 여러분들은 매순간 순간 감사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겁니다. 내일도 무슨 파티를 열어줄지. 파티, 파뤼, 어떤 파티를. 뭘 준비해서 깜짝 놀랄 이벤트를 벌여줄지.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겁니다. 차타고 가다가 과속으로 걸리게 해라. 카메라에 막 걸려라. 자,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것은 발걸음까지 주께서 세십니다. 예레미야에 나와요. 그동안 얼마나 우리는 주께서 주신 은혜를 공짜로 먹었어요?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감사보다도 불평이 나오고 짜증이 나왔던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놓쳤던 감사와 고마움을 작은 데서, 풀잎하나부터 해서 전부 다 하나하나가 고맙고 감사한 그 시간으로, 스물 네 시간이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될 수가 있어요.

여기 유다는 가나안 원주민 출신하고 결혼했죠. 요새 말하면 미국 같으면 인디언처녀하고 결혼 한 거예요. 인디언 출신이 뭐 그때는 청교도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 예상 못한, 율법을 전혀 모르는 그 여자 쪽에서 율법을 안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준비한 것은 깜짝 놀랄 주님의 이벤트입니다. 여러분들이 안다고 할 때 상대적으로 모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적인 그러한 깨우침이 있는 그런 계기들로,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꽉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주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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