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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6 08:39:47 조회 : 42         
20200914a 부산강의 : [시편]31(19편)-가짜 사회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00914a 부산강의 : [시편]31(19편)-가짜 사회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19편을 합니다.

시편 이전에 신명기나 출애굽기에서 율법에 주어진 일에 새로운 것이 거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전에 율법에 대해서 신명기나 출애굽기, 레위기의 율법을 보게 되면 율법은 축복받을래, 저주받을래? 이 기능을 했습니다. 축복과 저주 기능, 율법에는 그게 있다. 따라서 율법에 이런 기능이 있다는 것에 매개체가 있는데 축복은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여기 매개체로 동원된 자들이 누구냐 하면 율법을 받는 수용자, 수신자, 이스라엘이 그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살아 있다, 죽어 있다는 것은 항상 유보된 거예요. 율법대로 살면 살고 율법대로 안 살면 죽고. 이스라엘 자체적인 가치와 의미는 없는 거예요. 통과하는 거니까. 율법이 와서 율법이 존재하는 활동에 의해서 어떤 결과물을 낳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체적인 가치와 의미란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즘 말로 하면 측정기 역할을 하죠. 측정기는 뭔가 통과하는 것에 의미 있을 뿐이지 자체적으로 가치가 있을 필요가 없고 이유가 없습니다. 뭐가 왔다 갔다 했지, 뭐가 왔지, 뭐가 갔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것.

이스라엘이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면 인간으로 구성돼있지요. 사람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 논리에 의하면 사람이란 측정기, 기계, 도구, 반응하는 반응기계. 이 말은 인간이란 자체적으로 가치와 의미를 솎아낼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존재 이유를 인간에게서 찾아낼 수 없다 이 말이죠. 나의 존재 이유를 나에게서 찾아낼 수 없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과 율법의 만남이에요.

이렇게 제가 글씨를 썼잖아요. 그럼 이 앞에 율법에 해당되는 걸 다 지우겠습니다. 율법, 축복, 기능, 매개체 다 지웁니다. 다 지우면 뭐가 남지요? 이스라엘만 남지요. 이스라엘만 남는가는 것은 뭐만 남는다는 거예요? 인간만 남는다는 거예요. 율법이고 뭐가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인간만 달랑 남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체적인 가치와 의미를 뽑아내려고 하지요.

자체적인 가치라 하는 것은, 이름의 존엄성, 이름 대신 다른 걸 붙인다면 최고의 존엄성. 최고의 존엄성을 어디서 주로 이야기하지요? 김정은이죠. 김정은과 우리가 똑같은 거예요. 나는 나에게서 최고 존엄성을 갖고 있어요. 이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한테 굴복도 하고 더럽지만 아부도 하고 고개도 숙이고 하지만 노리는 것은 뭡니까? 내 이름의 최고의 존엄성이에요.

왜 몸의 존엄성이라 하지 않고 이름의 존엄성이라 하느냐? 몸은 늙어 죽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지만 인간은 뭘 남깁니까? 뭐가 영원한 거예요? 내가 죽더라도 사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고 내가 살아 있을 때의 존엄성이 죽고 난 뒤에도 유지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것, 이게 바로 인간의 자체적인 의미와 가치를 뽑아내는 겁니다. 의미와 가치, 앞에다 무의미, 무가치, 이것은 살아도 자살, 지연된 자살이죠. 우울증 같은 경우,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뭐가 없는 상태라 했습니까? 율법에 해당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게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김정은으로 보는데 김정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누가 시편 98편 1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됐습니다.

지금 우리는 내가 거울보고 인간이란 걸 알 수 있지요. 언젠가 강의에서도 거울을 강조한 적 있는데, 거울의 특징은 뭐냐? 나와 나의 공감대 형성, 이게 바로 거울입니다. 내가 나와 친하게 지내는 거예요. 그래서 뇌 과학자들은 뇌 속에 거울세포가 있다는 겁니다. 거울세포에서 타인이 갖고 있던 감정 있잖아요. 슬픔, 기쁨,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 이게 공감대에요. 가족끼리 공감대, 부부끼리 공감대. 인간에게 이런 세포가 있다는 거죠. 공감대 세포.

공감대 세포는 커뮤니케이션이라 하지요. 소통하는 것. 말이 통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감정이 통하는 겁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통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최고란 말을 절대로 남한테 양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말을 이해했다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절대 이해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존엄성을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누구한테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만의 존엄성을.

왜 내가 나한테 최고냐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유를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왜 나는 내가 보기에 지저분하고 별 것도 아닌데 남이 나에게 어떤 공격성향을 보인다든지 존재에 위협을 가할 때는 갑자기 자포자기했던 내가 각성을 해요. 각성을 해서 순간적으로 흩어져있던 자기 감각이 하나로 모아져서 방어태세에 긴장된 상태에 다시 돌입하는 겁니다.

보통 부부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니까 결혼했잖아요. 부부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다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강조했습니까? 인간의 공감대라 하는 것은 형성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지요. 둘이 부부로 사는데 갑자기 부부의 가정이 내 뜻대로 안 될 때는 남한테 양보한 것을 다 거둬들여요. 다 회수를 해요.

남한테 사랑 있잖아요. 희생, 이것을 빨리 거둬들여서 자기 집단방어체제를 이릅니다. 사드에요. 어딜 감히 나를 공격해. 도로 내놔. 내 사랑한 것 다 내놔. 내가 너한테 희생한 것 다 내놔. 나 손해 안 보겠어. 공감대는 모르겠고 다 날아가 버리겠죠. 마지막으로 종합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자체적으로 발동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논조를 끄집어내야 돼요. 아까 시편 98편이라 했습니까? 시편 98편 1절,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인간이 자기가 최고의 존엄성인데 제가 물어볼게요. 여기서 새로움이 나온다면 최고는 양보해야 되겠어요, 그냥 쥐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완전히 이건 날아가는 거예요.

인간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최고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이게 박살날 정도로 더 큰 새로움이 주어지게 되면 이게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동안 내가 나를 최고로 여기고 이걸 수습하기 위해서 이걸 지키기 위해서 각가지 노력들을 다해요, 인간들은. 자기 목숨까지 위태위태할 정도로 끝까지 가면서 지킬 것은 지켜야 된다는 그런 의식. 지킬 것은 뭡니까? 자기 가치와 자기 의미를 지키는 거죠.

이것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다가 갑자가 새로움이 확 다가오게 되면, 이것 안 지켜도 돼. 내가 지키고자 한 이것이 오히려 평생을 두고 나를 힘들게 만들었어. 인생 평생을 힘들게 만들었어. 자,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게 뭐예요? 남 핑계대고 자식 핑계대고 하지만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본인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힘들게 해요. 이 점에 대해서 자신만만해요.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힘들게 하는데 이 말을 달리 표현해봅시다. 달리 표현한 노래가 있어요. <걱정말아요 그대>란 노래 가사에 나와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처음에 가사에 보면, 그대요 힘든 일이 많았죠. 힘든 많을 때까지 왜 힘드냐 하면 내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일이 많았죠. 그 다음 가사를 보세요.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새로움이 없는 기라. 사람 사는 재미는 매일같이 새로워야 돼요. 그래야 사는 재미가 나요. 구닥다리 어제 생활 또 하려하니 지키는 것 외에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걱정말아요 그대>(들국화)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댄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그러면 둘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뭐냐? 너는 나한테 뭘 준다? 새로움을 준다는 요건 하에 결혼한 거예요. 나를 새롭게 기쁘게 해라. 내가 알던 내가 기존에 날 지키기 위해서 있었던 그것 말고 내가 예상 못한 새로움을 계속 주자. 오늘 시편 98편에서 찬양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디서 새로움을 준다 말이에요?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움을 주는 그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으리오. 않을 수 있으리오. 날마다 새로운데. 이 새로움의 위력은 어디 정도라 했습니까? 내가 그렇게 아끼는 최고의 나의 존엄성을 까짓 것 가져가버리세요. 이렇게 되는 거죠.

자, 그러면 병이란 뭐냐? 질환, 병이란 뭐냐 하면, 기존의 것을 목숨 바쳐서 지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병이고 그런 사람을 환자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 환자 아닌 인간이 어디 있어요. 환자 아닌 인간이 없어요. 병이란 것은 기존의 것을 못 버리는 게 병이에요. 아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숙변 또는 숙취, 과거의 것이 꽉꽉 차있단 말이죠. 빠져야 되는데 꽉꽉 채워있는 거예요.

서울의 어머님이 편찮다. 이게 뭐냐 하면 이미 결혼할 때 어머니로부터 독립했어요. 그런데 소식에 엄마가 아프데요. 수련회 빠지고 안 갈 수 없지요. 어머니 아픈 것이 행복합니까, 아니면 슬픈 소식이에요? 그게 슬프다면 왜 슬프지요? 과거가 나를 계속 붙잡고 있는 거예요. 나의 행복은 새로움을 얻고자 하는데 갑자기 가족 중에 누가 아프니까 이 새로움을 잃어버린 거예요.

지나가면 지나간 대로 다 뭐가 있다? 의미가 있지요. 기껏 들국화가 위로한다는 게 그렇게 위로하는 거예요. 의미 있으니까 노래합시다. 찬양이 나와요. 노래하자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살아야지 어쩌겠어요. 어차피 힘들지 않은 인간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 노래에서 언급했듯이 결국 해답은 새로움이 없는 거예요. 새로움이 없으니까 안 아파도 환자에요. 모든 게 환자에요.

새로움을 줄 수 없고 새로움을 받을 수 없다면 부부가 결혼했다면 그 집에 환자 둘이 있다는, 애까지 나면 환자 셋이죠. 자꾸 짜증을 부리는 거예요. 짜증은 왜 청소를 안 해놨느냐, 밥맛이 없느냐. 그건 구실이고 실은 뭐냐 하면, 최고의 존엄성의 무게, 질량, 엄청난 인생의 짐을 한꺼번에 사이다 같이 해소해버릴 새로움을 왜 나한테 안 가져다주느냐는 말이에요. 아이고, 참. 이기주의도 일방적 이기주의에요. 왜 나를 새롭게 가볍게 만들지 못하느냐 이 말이죠.

그럼 새로운 게 뭐냐? 갑자기 돈을 갖다 준다든지, 갑자기 승진했다든지. “여보, 나 임신했어.” 이런 것 있잖아요. 와, 새로움이에요. “당신 미국 가고 싶다 했지. 나 미국 발령 났어. 온 식구 가자. 회사에서 비용 다 준대.” 이게 새로움 아닙니까. 이 새로움은 사이 안 좋은 친구에게까지 자랑질을 해대는 거예요. 왜? 이제는 가벼우니까. 옛날식으로 내가 날 지키는 방식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나를 지킬 수 있다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님께 찬양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율법적 기능에서 시편 98편에서 새 노래로 찬양하라. 맨날 옛날 노래 말고.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것은 네 인생이 네 생각처럼 네 것만 지키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뭐가 계속 분출돼 나온다는 뜻이에요? 새로움이 나오도록 뭘 집어넣는다? 율법과 결합시킨다, 연결시킨다.

법이란 게 우리에게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말씀이라는 게 무거움이 아니고 새로움이 나오려면 율법과 연결이 관계 지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이렇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사람들이 괴로울 때 인위적으로 자기 몸을 약물로 처리해서 새로움을 유발시키려는 방법을 쓰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그걸 한 자로 술이라 해요.

술은 또 그냥 먹으면 맛이 없잖아요. 역시 술은 취해야, 술 취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술은 돈만 날리지 소용없는 일이에요. 술맛은 알코올 맛이지 무슨 맛이겠어요. 술은 취해야 맛이 있듯이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술 취해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방법으로 새로움을 얻고자하는 너희들아, 이제는 술 취하지 말고 어디 취하라고 합니까? 성령에 취하라.

신약에서 성령은 뭐냐? 율법의 완성 단계를 말합니다. 율법의 최종단계. 율법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새로움, 율법의 결과물이죠. 최고의 결과물을 성령이란 택배기사가 와서 우리에게 늘 제공하게 되면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 다음부터는 19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게 된다.

새로움에 대해서 자신이 그냥 있을 수가 없어요. 새로움이 너무 좋아서. 그렇다면 술 취한 현상이나 성령 취한 현상이나 유사성이 있겠지요. 술 취할 때 주사 가운데 하나가 기마이 쓰는 게 있어요. 잠자고 있는 애들 깨워서, “너 휴대폰 사고 싶다고 했지? 사줄게. 당신 뭐, 명품? 내일 백화점, 카드 줄게 당신 쓰고 싶은 것 써. 오늘 기분 좋다. 말리지 마라. 오늘 기분 좋아서 한 잔 했다.” 무슨 한 잔에 취해버려요.

선심 쓰는 그런 주사가 있듯이 성령을 받아버리면, “내 목숨? 가져가요, 가져가.” 이 정도로, 스데반 집사처럼. 오늘 기분 좋아서 내 목숨 주께 바친다. 이런 것. 내가 힘들 게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기쁨, 희열, 즐거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 버린 그것. 그런데 성령은 바람 같아서 왔다 싶으면 없어져요. 이게 뭐냐? 성령은 우리의 소유용이 아닙니다. 마약 같은 것, 프로포폴 같은 것은 늘 기분 좋으라고 소유해서 찌르면 되는데 성령은 본인의 뜻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측정기로 봐요. 아까 매개체 봤지요.

성령이 있고 있는 성령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왔을 때 백성은 어떤 표현과 현상과 삶을 잠시나마 보이게 되느냐? 초월적이죠. 자기 인생에 대한 초월적, 추상적입니다. 이모저모 따지지 않는 거예요. 이 조건, 저 조건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 인생이에요. 나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를 내가 계산하지 않아요. 내가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걸 계산하지 않는 거예요.

내 인생 내 일기장 같으면 찢어버려요. 일기장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아이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다. 찢어버려요. 너무 기분 좋아서 찢고 난 뒤에 후회하겠지만. 술 깨고 난 뒤에 무효하고 하듯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오늘 기분 좋다. 오늘 진자교회 오만 원 헌금한다 해놓고는 취소, 취소. 내가 잠시 착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기서 중요한 것 집어봅시다. 환자란 정신병 환자나 일반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란 새로움이 없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기존의 것으로 자기 가치를 해석하고 지키고자 한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게 자기에게 너무 힘들어요. 스트레스지요. 왜? 자기 몸을 자기가 지켜야 되니까.

새로움을 찾아 자기 영역 확장을 해야 되는데 영역 확장할 여유가 없어요. 내가 환자고 우리 집안에 환자가 있다면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다 소비해서 남들처럼 빨리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생산할 여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 여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그러한 의식, 내 인생이 낭비하고 있다는 인생이에요.

그래서 남자의 로망이나 남자의 소망은 특히 20대나 30대 초반의 남자들의 로망, 소망은 뭐냐 하면, 전에는 나 좋아하는 여자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요새는 여자가 그냥 여자가 아니고 그냥 죽자, 죽자 돈만 벌어주는 여자, 기계죠. 돈만 벌어주고 자기는 취미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그런 여자.

취미생활은 뭐냐 하면, 나의 이름을 내거든요. 내가 이 정도야, 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그러한 여자를 만나고 싶은데 이 여자가 돈 번다고 너무 힘들어서 환자가 되었어요. 그러면 어쨌든 간에 이걸 빨리 정리해야 돼요. 발로 차서 내쫓아버리고 신상, 20대나 40대 신상을 다시 여기다 박아 넣어 버리는 거예요. 남자들의 로망이에요, 희망이에요. 안 들키려고 애를 쓰지만 남자의 희망.

이건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는 죽자고 돈만 벌어오고 지는 매일 백화점 출근하는 거예요. 신상 나왔나 싶어서. 계절마다 자기 꾸미기, 자기가 최고의 존엄성이기 때문에 존엄성답게 치장을 포장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미리 오늘 제목 후보감로 뭐냐? 오늘 제목이 ‘가짜 사회’에요.

가짜 사회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의 세계에 대한 저항성을 여기서 갖고 있습니다.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이스라엘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대표적이지만 다른 모든 인간들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자기 이름의 존엄성을 추구한다. 굉장히 이건 나름대로 순수하다. 나는 다른 욕심 없어. 나는 나를 지키는 것뿐이야. 내가 큰 죄 짓는 게 아니라 내가 날 지키겠다는데 그게 무슨 죄야, 라고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덮고 있는 말씀의 세계에요. 율법의 세계에 대한 저항성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시편 19편 봅시다. 1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아까 우리가 봤지요. 영광이 될 경우는 어떤 경우냐? 날마다 뭐가 주어질 때? 새로움이 주어질 때.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그런데 그 지식은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다.

언어와 들리는 소리가 없으니까 이 가짜 사회는 뭐로 소통되느냐 하면 언어와 소리, 잡음이죠. 찌지직, 잡음, 노이즈(noise), 소리로써 그들은 커뮤니케이션, 하나의 사회적 조직을 한 거예요. 사실은 각자 자기만의 최고의 존엄성을 우기면서도 사회와의 연합을 통해서 자기 가치를 높이는데 하나의 수단으로 상대를 이용하고 있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계속.

그런데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언어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하나님의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결국 언어를 통해서 온다, 언어 없이 온다? 언어 없이 오는 거예요. 그냥 다가오는 거예요. 그냥 다가오게 되면 특징은 뭐냐? 내가 그걸 받아줄 준비자세가 필요치 않아요. 기도한다든지 금식해서 은혜를 받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닥쳐버리면 준비성 없이 그냥 와버리면 그게 새로움이에요.

준비하고 새로움을 하게 되면 이건 새로움인지 아닌지 우리가 분별이 개입돼버리면, 분별이 개입한다는 것은 내가 판단을 한다는 거거든요. 판단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 그걸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그건 새로운 게 아니에요. 나의 옛날 구닥다리, 옛날 것이 새로운 것을 영접한다는 핑계로 섞어버려요.

섞여버리면 제대로 된 새로움이 아니고 내 소유화되려는 겁니다. 이 은혜를 오랫동안 유지해야지, 이렇게 된다고. 내가 뭘 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았더라? 아하 기도를 했구나, 금식했구나, 헌금을 해서 은혜 받았구나. 내가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배려해서 사랑해서 은혜 받았구나. 그 다음부터는 더 큰 은혜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뭐해야 된다? 더 사랑하고 희생하면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상으로 주어지겠지. 이런 통박을 계산을 하게 돼있어요.

자, 아까 이스라엘은 매개체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망했지요. 망한 이유가 뭡니까? 망한 이유는 율법 없이 살아보자는 거예요. 망한 이유가. 율법 없이 사는 민족이 있었어요. 이스라엘 주변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모압, 암몬, 에돔이고 블레셋, 아람. 그래서 사람들이 구약 보는데 짜증을 좀 내는 이유가 뭘 지키면 복 받아요, 이것만 알고 싶은데 그게 아니고 계속해서 인접 국가 이야기가 나와요. 그들이 서로 싸우고 전쟁하는 이야기.

이것 쓸데없는 과거 역사를 왜 구약에 너절하게 깔아놨느냐? 그것은 얼마나 이스라엘이 율법을 싫어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할까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창조주에 대해서 싫어도 너~~~무 싫어해요. 이 땅에 태양이 둘 될 수 없잖아요. 내가 하나님인데 하나님 네가 뭔데 왜 자꾸 콩 놔라 팥 놔라 시비 걸고 내 자율성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도전하듯이 다가오느냐, 짜증나게.

절대 권위자는 나에요. 따라서 내가 하는 것이 법이에요. 내 말이 내 의지가 내 감정이 법이에요.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 없잖아요. 이미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된 이상 나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궁시렁거리면 전부 다 나의 적이 되고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 없는 곳, 하나님 말씀이 안 들려지는 곳, 산 속에 가든지 뭘 하든지 나 혼자 내가 필요한 내 영역, 절대적 영역을 내가 형성하는 것, 그게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성입니다.

티비 보면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뭘 하느냐 하면 새 집짓기 프로젝트 같은 것 있지요. 그렇고 그런 벌집 같은 아파트는 가라. 나의 개성과 취향을 다 발휘 못한다. 그럼 뭐냐? 우리나라에 유명한 뛰어난 건축가와 연결이 돼서 서울 근처에 안락한 산수 좋은 곳에 촌집 열 채 사서 확 밀어버리고 거기다가 내가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아주 신선한 디자인에 의한 집을 짓고 인테리어부터 해서 내가 생각했던 건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집에는 내 생각들로만 가득 찬 집이 되는 겁니다. 그래놓고 부럽지, 하는 거예요. 너희들 원하는 걸 내가 먼저 했지. 그래서 미안해. 하지만 놀러 와, 이런 식으로. 우리들 방향이 같은 쪽이잖아. 이것 원했잖아. 나만의 공간. 나만의 차, 나만의 정원, 나만의 절대적 공간이죠. 그걸 보통 성공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이방나라를 부러워한 거예요. 우리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모습이,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으니까 자꾸 간섭하는 쪽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주변의 이방나라는 간섭하는 율법이 없어요. 자기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율법이 없으면 우리보다 못 살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잘 살아도 너무 잘 사는 거예요.

하나의 유혹거리가 되는 겁니다. 마치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처럼. 주께서 먹지 말라 했으면 꼴 보기 싫은 모습으로 선악과나무가 우리에게 눈에 띠어야 되는데 이거는 언제까지 안 따먹을 거냐는 식으로 자꾸 유혹하는 것 같아. 마치 백화점에 나오는 새로운 상품 같아. “백화점, 쓸데없이 가면 뭐하겠어.” 하지만 막상 친구 따라 가보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의 목표가 돼버려요. 저거 2개월 뒤에 산다, 이런 것. 여자는 옷이고 남자는 차고.

아예 차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면 되는데 꼭 프로그램도 고물차를 뜯어고쳐서 경매 붙이는 라는 그런 프로그램 있어요. 거기 보면 테스토스테론, 남성 형을 갖고 있는 남자들과 약간의 여자들 해서 삼천오백, 사천 막 질러댑니다. 저걸 가져야 더는 행복이 없다는 식으로 그냥 질러대지요. 사는 이유, 보람이 거기에 있으니까. 내가 갖고 싶으면 갖는 것.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랬던 거예요. 이스라엘이 전부 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근처에 있는 나라들은 박람회장이에요. 골라잡을 수 있는, 그러니까 사람 심리라는 게 내가 아무것도 모를 때는 아무것도 탐을 내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어떤 안다는 것이 될 때는 그게 나의 쟁취의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된다는 이게 인간의 근원적인 약점입니다. 귀 막고 코 막고 아무것도 안 보게 되면 그냥 그렁저렁 살아요.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그런데 본 게 문제라. 딱 본 순간 지금 것은 갑자기 나의 미흡함이 돼요. 나는 미흡한 존재가 돼버려요. 충족하라고 나한테 촉구하는 것 같아. 그것을 정신분석학에선 욕망이라 합니다. 욕망은 내 속에서 오는 게 아니고 외부에서 온다는 거예요. 정신분석학에서 잘 봤지요. 속에는 욕망이 있는 게 아니라 욕구가 있고요.

욕구로 사는데 욕망은 욕구에 없는 것을 새로 제공함으로써 이제부터 너는 욕구에 속해서 살지 말고 욕망에 매달리면서 살아라, 라고 우리한테 속삭이고 있는 거예요. 그 욕망의 세계를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이게 ‘사회’라는 거예요. 욕망이 없는 것은 뭐가 없겠어요? 사회성이 없는 것, 정박아지요. 사람이 아니지요. 사람으로 가치가 없는 거예요.

입사면접 볼 때 인사위원회에서, “너는 이 회사에 올 때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가?” 물음 자체가 그래요. 욕망이란 단어까진 안 쓰겠지만 너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은 어떤 욕망을 품고 왔느냐, 욕망이 없다면 당신은 우리 회사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 온다면 욕망에 휘둘려서 사회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원을 찾는 거예요. 심지어 조그만 가게에 판매원 하나 뽑는 것도 욕망이 넘쳐야 뽑히지 아무 매가리도 없으면 돈만 날리지 필요 없어요. 욕망의 세계에 진입하는 겁니다.

욕구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라 하고 ‘나’지요. 욕망의 세계를 이걸 ‘주체’라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이것도 ‘나’에요. 결국 개인 집에 있으면 자아가 되고 사회에 나가면 뭐가 돼요? 주체가 되지요. 자아는 내가 조절하고 주체는 타인이 나를 갖고 노는 거예요. 자아는 내가 나를 관리하는 거예요. 뭐로? 상상으로. 주체는 뭐로 하느냐? 법으로 해요. 법이 넘실거리는 범람하는 이 체제를 사회인데 어떤 사회냐 하면, 오늘 제목처럼 가짜 사회에요. 인간은 가짜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혹을 받아서 멸망하게 하는 이유가 멸망하는 자체가 새로움의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구약이에요. 망해라, 망해라. 손 놓고 망해라.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망해. 이게 네가 사는 길이야. 안 망하려고 해? 진짜 망해. 네가 안 망하려고 애쓰면 진짜 망해버려. 지옥 가는 거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거든요. 하나님 뜻이.

자, 망할 때 망하는 이유를 알고 망해야 돼요. 망하는 이유는 율법의 매개체가 돼야 될 그게 율법이 주어질 때 상대역으로 이스라엘을 뽑았단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의 본래 일은 뭐냐? 율법이 이런 겁니다, 라고 소개하기 위해서 인데 이스라엘이 인간들 출신이기 때문에 인간은 뭡니까? 자기 가치의 존엄성이잖아요. 그러니까 죄인을 뽑은 거예요.

죄인을 뽑아서 하나님께서 율법과 연관시킴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필히 망할 때 어떻게 망한다? 세상나라는 그냥 망하지만 이스라엘만큼은 특혜를 줬는데 망하는 이유를 알고 망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에 따라서 망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우선되는 겁니까, 내 존재가 우선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나보다 율법이 먼저에요. 율법을 위해서 우리가 매치가 된 겁니다.

여기 시편 19편 12절 누가 읽어보세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율법이 이스라엘과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인간은 그냥 태어난 채로 나름대로 순수하게 살아요. 다들 나름대로. 태어날 길 뭐로 태어났습니까? 자기 가치가 최고 아니에요. 우선이잖아요. 그게 인간들이 아는 한계에서는 그게 가장 순수한 거예요. “나는 날 위해 산다? 뭐, 뭐 어쩌라고. 그게 인생의 전부지 뭐 있어.”

아까 지웠잖아요. 율법 다 지워버렸지요. 이스라엘 하나 남기고 다 지워버렸단 말이죠. 율법이란 게 인간에게는 의식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태어날 때? 없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율법을 없애버리려는 저항성을 지닌 채 인간은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남한테 간섭 받는 것 싫어요. 내가 최곤데 누구한데 간섭받아요.

심지어 나를 지옥 보내도 지옥 갈 때 갈지언정 미래의 나는 거기에 대해서 휘둘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런 고집들이 있어요. 보내, 보내, 보내. 지옥 가, 지옥 보내. 지옥 보내도 나의 자의식을 나는 포기 못해. 이게 한 고집들 하거든요. 그래서 교회 세우고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 다 헛짓이에요. 이게 안 되는 짓이에요. 이게 성립이 안 되지요. 복음 전해서 예수 믿게 하는 이거는 애초부터 성사 가능성 제로입니다.

그런데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왜?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 하신 일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설교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주께서 저 집사님, 저 성도를 직접 성령으로 찾아갔다는 사실이 드러나잖아요. 이게 바로 목회자 느끼는 새로움이에요. 아, 내가 설교해서 누구 하나 건질 수가 없다는 것.

전도나 선교라는 것은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건 주께서 하셔야 될 문제지 내가 해야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명심해야 돼요. 그럼 목사의 새로움이 그렇다면 교인의 새로움은 뭐냐? 교인들은 자기 전도목표가 있잖아요. 자기 가족 있잖아요. 평생토록 이상한 교회 다니는 자기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교회 안 다니고 절에 다니는 맨날 점만 보고 사주팔자나 보는 어머니, 그걸 목표로 자기 아는 복음 지식으로 십자가로 전도를 해본다고요. 될 턱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이런 분이 있어요. 전도하려고 자식 명의로 자기 집까지 다 내놓은 사람 있어요. 있지요. 있다 하세요. 아무 소용없는 짓이에요. 해봐야 집만 달랑 먹고 게임 끝났어요. 심지어 직장에서 멀다고 자기 집 주고 자기는 멀리 가는 아버지 희생에 대해서 자식은 고마워합니다. 고마워한다는 것은 무슨 재료가 돼요?

내가 아버지의 은총을 고마워할 정도로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착할 수 있느냐? 지금 자기 과시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집 주신 것에 고마워할 정도로 왜 이렇게 착해? 자기한테 매료됐어요. 자기 상상력에 자아에 매료됐다고요. 그 자식 사회에 나가서 작살나봐야 주체에서 다시 자아로 기어들어오는 거죠. 사회는 자아의 특수성을 인정 안 해주니까요. 나는 최고라 해도 인정 안 해줘요.

벤츠 타고 술 취해 운전하다 사람 죽이면 무려 팔십만이 청원해서 그 인간 잡아넣으라고 동승자도 잡아넣으라고 할 정도로 사회는 자아의 세계, 내가 상상한 세계가 아니고 주체의 세계에요. 법이 여론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 세계에요. 그러니까 죽기 전까진 산다는 게 힘들어요. 더구나 사회는 법의 세계잖아요.

법은 뭘 합니까? 각서를 요구하고 사인을 요구하고 도장 찍는 걸 요구하지요. 전부 다 사람을 안 믿어요. 도장을 믿고 사인을 믿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심지어 재난지원금 받을 때고 도장, 사인, 본인이 가야 되지 우리 남편 아시잖아요. 이것 안 믿어줘요. 법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돼요. 모든 게 그래요. 맹세하고 계약 맺고 전부 다 이거에요. 말로 한 맹세는 소용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노래 있겠어요.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어디서? 안동 역에서. 분명히 눈 오는 날 안동 역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그런데 눈이 무릎까지 오는데도, 안동 역엔 눈이 잘 안 와요. 오랜만에 온 모양이라. 이게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그게 뭐냐? 자아가 아니고 주체에요. 이 사회라는 것은 그 맹세는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에요. 모든 것이 허무한 맹세입니다.

어제 내가 술김에 한 소린데 믿나? 이런 식으로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에요. 참 이 주체가 힘들어요. 힘드니까 아까 집단방어체제가 갈수록 강화됩니다. 사람이 아프다, 힘들다, 뜻대로 안 될 때는 자아는 완전히 돌이 돼요. 강력하게, 그래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랴. 점점 더 콘크리트 돼요. 그 다음부턴 말도 안 해. 대화를 끊어버리죠. 소통이 안 되지요. 나는 나와 소통하지요. 나하고 소통하다 나중엔 자살하지요. 자기와 소통하니까. 자기세계에 폐쇄되지요. 자폐증 현상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이스라엘은 그렇게 부러워했던 바벨론, 앗수르 너무 잘 살아요. 내가 갖고 싶은 것 먼저 다 갖고 있어요. 아까 백화점, 이방민족은 박람회에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거예요. 그 민족한테 이스라엘이 갖고 싶은 게 아니고 갖고 싶은 본인이 완전히 아작 나버린 겁니다. 박살나버린 거예요. 그게 왜냐? 율법대로에요.

첫째 시간을 우리가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이 기능을 봅시다. 율법은 두 가지 기능이 있다. 그 다음 기능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뭐냐? 율법대로 살면 복을 받고 율법대로 못 살면 저주받는다. 이스라엘은 뭐다? 사적으로 축복받을래, 저주받을래, 안 받을래 할 자격도 없고 너는 망해야 뭐가 살아나요, 망한 이스라엘 속에서 뭐가 샘솟아 오릅니까?

네가 율법이 이렇게 생생하게 이 세상을 덮고 있다는 걸 이제 알았느냐? 이 세상이 하나님의 복음 중심인 것을 이제 알았느냐? 복음에 얻어맞고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대들고 망하고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고 도망치는 그 모습 자체가 하나님께선 복음적으로 활용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재 활동입니다. 이것을 파악해야 돼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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